주일오후설교

처음으로

아빠와 함께 2021. 11. 2. 16:40

처음으로 

2021년 10월 31일                 본문 말씀: 욥기 32: 1- 5

(32:1) 욥이 스스로 의롭게 여기므로 그 세 사람의 대답이 그치매

(32:2) 람 족속 부스 사람 바라겔의 아들 엘리후가 노를 발하니 그가 욥에게 노를 발함은 욥이 하나님보다 자기가 의롭다 함이요

(32:3) 또 세 친구에게 노를 발함은 그들이 능히 대답지는 못하여도 욥을 정죄함이라

(32:4) 엘리후가 그들의 나이 자기보다 많으므로 욥에게 말하기를 참고 있다가

(32:5) 세 사람의 입에 대답이 없음을 보고 노를 발하니라

엘리후는 없던 존재였습니다. “때에 욥의 친구 세 사람이 그에게 이 모든 재앙이 임하였다 함을 듣고 각각 자기 처소에서부터 이르렀으니 곧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수아 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소발이라 그들이 욥을 조문하고 위로하려 하여 상약하고 오더니”(욥 2:11) 욥에게 친구는 세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네 번째 친구가 불쑥 튀어나왔습니다. 단순히 친구가 아닙니다. 욥에게 조언하기 위한 친구도 아닙니다. 욥과 더불어 친구 세 사람 모두에게 지적할 게 있어 등장한 친구입니다. 따라서 전에 있는 세 명의 욥의 친구와 차별화되는 내용이 전하기 위해 나타난 존재입니다. 이 엘리후의 이야기 속의 내용은 세 친구와 욥이 반박할 수 없는 내용입니다.

하지만 엘리후의 주장 또한 진실의 전부를 말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부정적인 발언인 주류를 이룹니다. 즉 사람은 하나님의 진실을 알 수 있다가 아니라, 인간은 아무리 해도 하나님의 진실을 모른다는 것을 전제로 이야기를 내어놓습니다. 따라서 마지막 친구인 엘리후가 보기에 욥이나 욥의 세 친구의 잘못은,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처럼 발언한 것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네 번째 친구인 엘리후는 논쟁 경쟁에서 이겨보겠다는 나선 사람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도리어 그들의 한계를 넘어선 사람으로 등장한 겁니다. 엘리후 다음에 바로 하나님깨서 직접 욥에게 나타나므로서 엘리후의 배치는 하나님에게 의도적이었습니다. 지금 욥기의 중심은 욥이 아니라 ‘욥의 고통’입니다.

욥의 세 친구는 욥의 고통이 욥의 죄와 관련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실제로는 욥의 고통은 욥의 행위와 아무런 ‘상관없이’ 주어진 겁니다. 과연 이 ‘상관없음’이 가능한가를 놓고 욥의 세 친구와 욥은 본인들의 한계성을 드러낸 겁니다. 욥의 세 친구는 욥의 허물과 관련지었다면 욥은 자신의 의로움을 연관지어므로서 욥 본인에게는 하자가 없는 하나님에게 하자가 있는 쪽으로  고통을 몰아세운 겁니다.

여기에 대해서 엘리후는 오늘 본문 2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욥에게 노를 발함은 욥이 하나님보다 자기가 의롭다 함이요” 그런데 욥은 직접적으로 자신이 하나님보다 더 의롭다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엘리후의 지적을 통해서 우리는, 인간이 하나님과 관련해서 과연 어느쪽이 의로우냐의 문제로 발전한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신약적으로 봐서 욥은 하나님의 의와 자신의 의를 비교해 볼 기회를 갖지 못했습니다. 즉 욥은 같은 인간들 끼리의 의만을 비교한 겁니다. 상대방 쪽이 욥을 보고, 너희 잘못으로 이런 참혹한 벌이 주어졌다고 주장하니 욥으로는 반박하기 위해 자신은 이런 징벌을 받을만큼의 죄를 짓지 않은 의인이라고 한 겁니다.

그러나 신약에 와서는 구체적인 사건이 십자가를 통해서 모든 인간들은 의를 거론할 자격조차 없음이 드러납니다. 인간에게 의가 없다는 말은 곧 인간은 계속 이 땅에서 살려고 해서는 안되는 존재라는 말입니다. 죄는 있으면서 더 살라고 우기는 것은 죄를 더욱 퍼뜨리며 다니겠다는 심보에 해당될 것입니다.

엘리후가 욥에게 지적하는 바가 그것입니다. 하나님도 의롭고 인간도 같이 의로운 경우는 성립될 수 없다는 겁니다. 신약의 세례 요한 경우를 보면, 그는 자신의 의로움을 대외적으로 주장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하늘에게 주신 바되지 아니하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다”(요 3:27)

세례 요한 여기서 더나갑니다. “그는 흥해야 하고 나는 쇠해야 하느니라” 왜 같이 흥하면 아니되는 겁니까? 이점에 대해서 욥과 욥의 세 친구는 해답을 내놓을 수가 없을 겁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에서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요 12:25)

왜 인간은 자기 생명을 굳이 잃어버려야 할까요? 요한복음 12:24에 그 해답이 나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즉 예수님 자신이 하시는 일을 두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욥은 아직 신약의 이러한 사정을 모릅니다.

욥은 구약적 인물이라서 여전히 자기에게 관심두고 삽니다. 욥을 통해서 우리가 아는 것은 ‘나를 보전하는 것’이 결코 ‘주의 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욥은 자신의 화려하고 탄탄했던 과거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호평을 받은 자신의 과거가 그립고 그때의 자신이 자신의 본래 모델이라고 여깁니다.

사람이란 그리움으로 삽니다. 밥보다 그리움입니다. 하지만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아무리 그 사람의 욕망을 보충해주어도 인간은 끝내 불만족 상태로 늘 되돌아오기 마련입니다. 자신이 꼭 보고 싶고 그리운 사람이 있어도 막상 그 사람을 만나는 현장에서 다음과 같은 생각이나 말을 하게 마련입니다.

‘내가 그리워한 그 사람 아니네“라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상대가 이렇게 대꾸할 겁니다. 그러면 당신이 그토록 만나고 싶고 그리워하는 사람은 누군요?” 그러면 이렇게 솔직하게 말합니다. “나도 몰라 내가 무엇을 욕망해야 할지를…” 욥은 자기를 욕망하고 자기를 그리워합니다. 하지만 자기 마음에 꼭 드는 그런 순간은 여전히 오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욥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 내부의 본심을 감상할 수가 있습니다. 자신이 욕망하는 바를 다 채울 방법이 없으니 계속해서 자신은 바르게 살았다고 항변합니다. 하지만 자기에 대한 청결은 얼마가지 않고 참으로 없는 고통과 비난에 다 흩으려집니다. 욥기는 우리에게 이런 현실을 알려줍니다.

사람이란 돛단배 몸을 싣고 망망대해 나서는 인생을 삽니다. 물에 빠지지 않으려고 혼신의 노력을 다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친히 주신 고통은 늘 혼돈으로 되돌아가도록 합니다. 나 자신이 애초부터 없었던 그 상황, 그 상황이 인간의 처음 자리입니다. 신약에 와서 비로소 알려진 자리가 예수님을 통해서 밝혀집니다.

이제 그 예수님의 일을 엘리후라는 친구가 해내려고 합니다. 인간의 한계는 본인은 알지 못하고 남들이 압니다. 아무리 겸손을 떨어도 그것마저 자기 보전하려는 몸부림으로 간주될 것입니다. 마음 한 가운데 구멍이 뚫려야 합니다. 이것이 신약의 성령으로 가능한 마음의 할례입니다.(롬 2:29)


『하나님 아버지, 주어진 상황의 요건에만 주목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07강-욥기 32장 1~5절(처음으로)211031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욥기 32장 1~5절입니다. 구약성경 790페이지입니다.

“욥이 스스로 의롭게 여기므로 그 세 사람의 대답이 그치매, 람 족속 부스 사람 바라겔의 아들 엘리후가 노를 발하니 그가 욥에게 노를 발함은 욥이 하나님보다 자기가 의롭다 함이요, 또 세 친구에게 노를 발함은 그들이 능히 대답지는 못하여도 욥을 정죄함이라, 엘리후가 그들의 나이 자기보다 많으므로 욥에게 말하기를 참고 있다가, 세 사람의 입에 대답이 없음을 보고 노를 발하니라”

욥의 세친구와 욥이 실컷 논쟁을 벌이게 되었습니다. 그 논쟁의 핵심은 욥에게 고난이 온 것이 욥과 관련이 있느냐는 겁니다. 욥과 관련이 없습니다. 정답은 없습니다. 욥과 전혀 상관없이 고난이 온 거예요. 그러나 욥의 세친구는 욥이 잘못한 것이 있어서 욥과 관련해서 징벌 차원으로 왔다는 겁니다.

그런데 욥의 문제점이 뭐냐 하면 그 징벌과 나는 상관이 없다는 식으로 소극적으로 대처한 것이 아니고 반대쪽에서 하도 반대를 하니까 그 반대되는 것과 다른 것을 이야기할 때 자기가 진실 된다고 생각한 것 같아요. 그래서 “나는 의롭다”라고 이야기한 거예요. ‘고난받는 것과 나와 상관없다’라고 이야기해야 하는데 하도 약을 올리니까 자기는 의롭다고 나와버린 거예요.

욥의 세친구나 욥의 문제점은 뭐냐 하면 비교 대상이, 결정적 비교 대상이, 최후 비교 대상이 그들 속에는 없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욥 말고 또 하나의 친구를 투입 시킵니다. 이름이 엘리후라는 친구를 투입 시켜요. 투입 시키면 이 사람은 어떤 시각이냐면 부정적 시각을 갖고 있습니다. 이 사람이 부정적 시각을 갖고 있다는 말은 인간에게서 나올 수 있는 어떤 것도 하나님 보시기엔 깨끗한 것은 없다. 하나님 보시기에 깨끗한 것이 없는 거예요.

엘리후 이 사람이 뭘 했느냐 하면 세 명과 한 명, 3 대 1의 이 자리에 뭐를 불러 들여오느냐 하면 하나님을 여기에 초빙하는 그런 역할을 엘리후가 하는 겁니다. 엘리후가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여기 32장 1절에서 22절까지 여러분들이 한 번 읽어 봤을 거예요. 오후 예배 전에 한 번 다 읽어 봤을 텐데, 쓸데없는 거 안 하고 읽어 봤을 텐데, 읽어보게 되면 이상하게 엘리후가 뜸을 드립니다.

본래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안 하고 있어요. ‘뭐 너희들은 너희들만 잘난 척하는구나. 대단하지도 않으면서 대단한 척하는구나. 너희들이 깨달은 바를 내가 깨닫지 못하겠는가...’라고 자꾸 쓸데없는 주변 이야기만 하고 핵심 이야기는 자꾸 비켜 가면서 ‘나도 참을 만큼 많이 참았다’라는 식으로 안 해도 되는 이야기를 32장 내내 이야기하는 겁니다. 게다가 33장까지 넘어가도 마찬가지예요. “그런즉 욥이여 내 말을 들으라”

그러니 욥의 입장에서는 짜증이 나죠. “그런즉 욥이여 내 말을 들으라”라고 하면 뭐 말을 해야 듣지 말은 안 하고 엉뚱한 소리만 쭉 이야기하고 무슨 이야기. “내 마음이 지금 말하고 싶어서 혀가 입에서 동하는구나” 제발 좀 그런 식으로 하지 말고 뭐?뭐? 이야기해봐. 내가 들을 건 듣고 말할 건 말할 테니 이야기를 해보라니까.

계속해서 자기는 지금 자기 혀가 가만있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지금 나를 이야기하라고 부추긴다는 이야기만 하는 거예요. 알맹이 없는 이야기를 엘리후가 계속 연결하고 있습니다. 이게 뭐냐 하면 엘리후는 내가 말하는 것조차 의롭지 않다는 것을 전제로 깔고 하는 거예요. 이것은 바로 세친구나 욥에게 없는 요소입니다. 내가 진실을 말한다고 할지라도 내 선에서는, 내 레벨에서는 진실이 아닌 것이 확실하다는 겁니다.

제가 언제 강의에서 그런 이야기 했습니다. 세례요한에게 말씀을 주는 것은 세례요한에게 너의 말을 하지 말라고 말씀을 준거예요. 그래서 세례요한도 거기에 잘 반응을 해줘서 “하늘에서 주시지 아니하면 나는 아무 말도 못 한다”라고 앞에 “하늘에서 주시지 않으면”을 괄호 넣으면 “나는 아무 말도 못 한다”만 있습니다.

나는 어떤 말 해도 소용없다. 더 나아가서 뭐냐 하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거. I’m nothing. 더 나아가면 “주님은 흥해야 하고 나는 쇠해야 한다”이죠. 주님이 흥하는 방법은 내가 쇠하는 것밖에 없다. 전혀 자기를 생각하지 않고 자기를 계산에 넣지 않습니다. 하나님 일을 하면서 거기에 곁들여서 ‘나는 어떻게 잘 됩니까’라는 것이 끼어들어 가질 않아요. 세례요한은.

그것을 가지고 신약에 사도바울은 편지에서 “마음에 할례받았다”라고 이야기합니다. 마음에 할례받았다는 것은 구멍이 뚫렸다는 거예요. 구멍이 뚫릴 때 자기가 자기를 뚫어버리면 이건 자살이 되고요, 하늘에서 어둠을 뚫고 주님의 사랑이 뚫고 내려오는 거예요. ‘주 예수 나의 산 소망’이라는 노래에 나와요. ‘어둠을 뚫고 주의 사랑이~’ 그러니까 뚫고, 뚫고 들어왔다는 거예요.

이건 내 쪽에서 후벼 파서 성사되는 일이 아니고 주님의 소망이 뚫고, 빛이 어둠을 뚫고 들어오니까 그때부터 나는 뭐냐 하면 나는 주님의 소망체가 되는 거예요. 나는 주님의 소망이 되는 거예요. 내가 주님을 소망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주님 됨을 드러내기 위한 작은 자아들, 소 자아라고 하는데, 많은 자아들을 확 뿌려버린 거예요.

그러면 그 가사대로 예수는 나의 산 소망이라는 가사대로 나는 주님의 소망이 된 거예요. 쉽게 말해서 내 것이 없는 거예요. 내 것이 없다는 것은 나와 비교될 여지가 아예 무산된 겁니다. 신약에서 뚫고 들어온 것이 있기 전에 구약의 욥기에서는 욥은 어떤 한계를 보이고 욥의 친구들은 어떤 한계를 보이느냐를 보려고 우리가 지금 욥을 보는 겁니다.

욥의 한계성이라는 것은 제가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비교될 최후의 대상이 없다고 말씀드렸는데요. 그러면 비교될 것이 없을 때 인간은 가만히 있느냐. 가만히 있지 않아요. 참, 인간의 욕망이라는 것은 생각할수록 신기해서 아무리 옆에서 많이 도와줘도 인간의 욕망에 결핍은 마저 매워지지 않습니다. 항상 불만족으로 끝나요. 사람이 100살을 살았잖아요. 그래도 100년 더 살고 싶어요. 자기 욕망이 채워지질 않으니까.

만일 어떤 사람이 누가 보고 싶잖아요? 보고 싶은 것을 직접 만나보세요. 그 보고 싶음이 다 해소되는지. 절대로 해소되지 않습니다. 분명히 보고 싶어서 만났는데 ‘자, 됐냐? 소원풀이 했어?’라고 하면 ‘아니, 아니야. 당신 말고 당신과 비슷한데 내 만족스러운 당신이 있어’라고 하면 이게 무슨 말이에요. 당사자를 만났는데 그 당사자라는 현장성, 현장이라는 당사자가 그 현장에 나타나기 전에 내가 그리워했던 그 상태가 아니란 말이죠.

부모가 아무리 자식을 도와주고 자식들이 아무리 부모를 도와줘도 부모에게 효도한답시고 맛있는 것을 아무리 해줘도 치매 끼가 있는 부모는 “아버지 하나 드세요”라고 하면 “아니~아니, 그 맛이 아니야” “이거는요?” “이것도 맛없어” 도대체 뭘 해줘야 맛있습니까. 본인이 몰라요. 내가 무엇을 그리워하고 내가 무엇을 희망해야 하는지를 뭔가 희망해야 하고 욕망해야 하는 것을 알면서도 그게 도대체 뭐? 뭐? 뭐를 욕망해야 하는지 본인이 몰라요. 인간은.

이게 욥이 그대로 다 보여줍니다. 욥이 지난 시간까지 이야기한 것이 바로 그거였어요. 욥은 굉장히 똑똑한 사람이고 훌륭한 사람이에요. 심지어 아마 이 정도까지 생각이 깊은 사람일 거예요. 오늘 떨어지는 저 수평선에 지는 해와 다음 날 뜨는 해가 동일한 해인지를 어떻게 그걸 알 수 있느냐. 절대로 그게 동일한 해가 아닙니다. 왜냐 하면 인간이 보는 것은 본인의 체험을 통해서 보기 때문에 그때 해질 때 떠 있던 해와 더불어서 자기가 지금까지 살아왔던 과거가 전부 다 축약이 됩니다. 한때로 응축이 된다고요.

해를 보면서 눈물을 흘리고 해를 보면서 아름답게 느꼈던 것은 바로 어젯밤 황혼길에 봤던 그 해예요. 그러나 그 해가 다음 날 아침에 떠도 관심 없어요. 왜냐 하면 내가 어제 마음에 감동한 해는 지는 해, 그 해였거든요. 그러면 오늘 해, 나중에 오후 6시 반쯤 지는 거 보면. 아니~아니, 그 맛이 안 나요. 그러면 어쩌라고. 세상이 어떻게 네 만족을 위해서 살아갑니까.

아까 정답을 이야기했습니다. 신약에는 그런 욕망이 뚫려야 합니다. 마음이 종이라면 총알이 거기를 뚫어야 해요. 그게 바로 총 맞은 것처럼이에요. 총알이 와서 구멍을 뚫어야 해요. 구멍이 안 뚫리면 내 욕망에 내가 평생 시달리고 또 시달립니다. 사람은 밥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그리움으로 살아요. 그런데 이 그리움으로 사는 것을 정당화하지 마세요.

따라서 욥의 이러한 몸부림. 욥은 한마디로 말해서 본인이 본인에게 그리운 거예요. 그 잘나가던 내가 그리운 거예요. 현재 상황과 너무 차이나니까. 그걸 이미 경험했잖아요. 경험했으니까, 경험 안 했으면 몰라도 경험했던 잘나가는 내 모습과 지금 내 모습의 형편이 너무 차이나니까 거기에서 좌절하고 절망하는 겁니다. 그래서 욥이 전에 이야기했잖아요. 차라리 이럴 것 같으면 저를 죽여 주옵소서. 죽여 주옵소서. 하나님은 아무 소리 안 하죠.

왜 아무 소리 안 하시냐 하면 그 죽여달라는 것이 현재 욥의 소망이기 때문에 안 들어주는 겁니다. 소망하는 욥이 죽어야 하는데 욥은 계속해서 괜찮은 자아를 견지하고 지탱하고 유지하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욥의 잘못은 자기를 보존하려고 하는 거예요. 주님은 거기에 응답을 안 함으로 말미암아 너를 보존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사람들이 교회를 왜 옵니까. 괜찮은 내 모습을 보존하려고 오잖아요. 유지하려고 하잖아요. 나는 나로 인해 즐거워하기 위해서 나는 이 세상을 산다는 이런 조로 계속 가는 겁니다. 그러한 것은 결국 자기 안에서 욥이 그리고 우리가 결국 노리는 것은 뭐냐 하면 버티고 버티면서 그래도 나는 깨끗하다, 나는 죄지은 적 없다, 나는 정결하다, 나는 순수하다, 이걸로 계속해서 어쩔 수 없이 버티는데 여러분 중에 개인 주택 있으신 분은 아시겠지만 여름철에 아무리 마당을 깨끗하게 깨끗하게 마당을 청소해도 그 청결성을 가을이 전부 다 무산시킵니다.

낙엽은 계속 떨어지죠. 청소해도 표도 안 나고요. 이게 주의 일입니다. 주의 일은 우리를 계속 더럽게 해요. 이게 주의 일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제발 너를 견지하고 너를 지키려는 것은 이제는 버릴 때가 되었다는 겁니다. 너 자신을 포기할 때가 되었다는 겁니다. 요한복음 12장 25절에서 주께서 아예 정답을 이야기합니다.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그렇게 모순된 이야기처럼 “그렇게 보존하고 싶거든 너 자신을 잃어버려라” 없어지는 거죠. 너 자신이 없다면 너 자신은 보존될 것이다. 어떻게 이런 말이 가능하냐 하면 중간에 다른 연속성이 개입될 때 가능해요. 인간은 돛단배에 자기 자신을 싣고 망망대해를 꾸준히 노 저으며 간다고 칩시다. 그러면 그 풍랑이 일 때 살려달라고 할 것이 아닙니까.

풍랑이 일고 살려달라고 하는 그 순간 인간은 세상 돌아가는 모든 풍랑이든 하나님이든 나 보존하기 위해서 산다는 그 본성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난 적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그 배와 더불어 파선해야죠. 물에 빠져야 하고 다시 혼돈 속으로 소멸해야 합니다. 이게 바로 신약에서 이야기하는 죽음에서부터의 구원이에요. 없는 데서부터의 있음이고 죽은 데서의 생명이고.

욥이 이 정도로 깨끗한 욥, 정직한 욥, 신앙 있는 욥이 이 정도 노력해도 이게 실패로 끝났다는 말은 이건 다른 사람이야 뭐 말할 것도 안 되죠. 이건 인간의 능력으로 불가능한 겁니다. 그런데 이 불가능할 때 그러면 나는 끝났다고 나자빠지고 교회 안 나온다는 사람 있거든요. 그런데 욥의 요소에 뭐가 있느냐 하면 욥에게 고통이라는 연속성이 주어져 있습니다.

지금 연속성에 대해서 세친구나 욥이나 아무런 어떤 답변 같은 것이 없었어요. 고통이 있다는 이 사실, 사건만 있고 나머지는 다 나자빠지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욥에게는 고통은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이 있어서 욥을 구원하기 위해서 고통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욥은 그 고통을 하나님에 의해서 구원되는 방식이 있는데 욥은 그 고통을 통해서 자기 보존을 계속하려고 고통에 대해서 어떤 해석을 가하려고 했던 거예요. 욥의 친구는 거기에 반대했던 거고.

그러니까 엘리후가 등장한 거예요. 욥의 친구도 아니고 욥도 아니고. 욥의 세친구나 욥 사이에 인간에게 나올 수 있는 모든 지혜는 다 끄집어 나왔어요. 그러면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끝났습니다. 고통에 대해서 좋게 생각하느냐 나쁜 게 생각하느냐 하는 둘 중 하나예요. 없거든요. 그런데 여기에 제 삼의 인물이 등장한 거예요. 마치 하나님이 등장하듯이.

엘리후 등장한 뒤에 그다음 하나님이 등장하거든요. 그러면 엘리후는 뭐냐. 인간이 끄집어낼 수 없는 말을 엘리후를 통해서 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엘리후가 이야기할 때 뒤에 쭉 33장, 34장, 35장, 36장, 37장 쭉 계속해서 엘리후가 이야기하는 것은 뭐냐 하면 창조되기 전에 있던 혼돈에서 어떻게 질서가 나오냐는 그쪽에 집중해서 엘리후가 이야기해요.

이 말이 뭐냐 하면 돛단배 탔잖아요. 다시 혼돈으로 들어가는 것을 그렇게 아쉬워하지 말라는 겁니다. 네가 그렇게 손해나는 장사는 아니라는 겁니다. 원래부터 혼돈이었는데 혼돈으로 들어온 것이 당연하단 말이죠. 오히려 혼돈이어야 하는 인간이 내가 인간이 되었다는 이것을 이상하게 신기하게 여겨야 하는 겁니다. 어린아이가 처음 태어나서 말을 못 하다가 첫 말을 할 때 원래는 어린아이는 말을 못 하는 것이 당연한 거예요.

그런데 첫돌 지나도 아이가 말을 잘 안 하고 두 돌 다되어가도 말을 잘 안 할 때 아버지가 시도해 보는 거예요. “이 유모차 아빠 거야?”라고 하니까 아이가 하는 말이 “베이비”라고 하는데 세상에 얼마나 감격스러운지. “이, 오” 이렇게 한 자도 아니고 “아빠, 엄마” 이렇게 두 자도 아니고 “베이비(baby)” 비록 이건 영어지만 세자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베이비’라는 그 말을 할 때 굉장히 신기하고 부모나 부모 계통에 할아버지 할머니는 굉장히 감사하고 놀라운 일이죠. 어떻게 일곱 살 먹은 딸 아이가 “아~옛날이여”라는 그 노래를 고음처리까지 하면서 부르는지. 모든 국민이 귀여워서 어쩔 줄을 몰라요. 55살 먹은 이선희가 부르는 것이 아니고 일곱 살 먹은 아이가 부르니까.

그러니 이 첫 말, 첫 시작이 신기하게 시작했다면 다시 그 신기한 지점으로 욥을 다시 돌려보내는 것이 엘리후의 역할입니다. 지금은 욥이 알아도 너무 많이 알아요. 착해도 너무 착해요. 이래서는 문제 해결 전혀 되질 않습니다. 처음 자리. 요한계시록에 의하면 첫사랑의 자리로 되돌아가야 해요. 처음 자리로. 처음 자리로 가려면 현재 자기 자신을 미워할 수밖에 없죠. 미워해야 해요. 자꾸 자기 자신을 보존하려고 고집하니까요.

몇십 년 전이죠. 그 삼촌이 돌아가시기 전에 일인데 대구시 인구가 그때도 200만이 넘었어요. 200만이 넘는 그 길에 삼촌이 차를 몰고 가는데 고모도 차를 몰고 시내로 볼일을 보러 갔는데 가는 길에 뒤 차가 와서 박아버리는 거예요. 그렇게 교통사고가 난 거죠. 그래서 고모가 성질나서 운전 똑바로 하라고 말하려고 나와서 보니 자기 오빠예요. 그 넓은 대구 시내에서 추돌사고가 일어났는데 보니까 이건 확률적으로 너무 희박한 친오빠가 친여동생의 차를 뒤에서 박았어요.

그래서 그걸 물어줬는지 안 물어줬는지 모르겠어요. 안 물어줄 가능성이 커요. 여동생이 더 잘살기 때문에 그냥 넘어갈 가능성이 켜요. 이게 바로 우연입니다. 지금 욥의 잘못은 하나님이 개입한 우연을 이미 만들어졌다는 것 때문에 자기를 나를 위한 필연으로 계산한 것이 욥의 결정적 잘못이에요. 그래서 엘리후는 다시 우연으로 분산하자는 거예요. 그걸 해체라고 하는데.

너 자신을 아예 해체해 버리자. 해체해 보면 너의 안에 뭐가 있는지. 그 안에 뭐가 있느냐가 2절에 나옵니다. “람 족속 부스 사람 바라겔의 아들 엘리후가 노를 발하니 그가 욥에게 노를 발함은 욥이 하나님보다 자기가 의롭다 함이요”라고 되어있거든요. 욥 입장에서는 자기가 자기 입으로 ‘나는 하나님보다 의롭다’라고 한 적이 없어요.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욥은 반박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그동안 욥이 뭘 잘못 생각했느냐. 내 말 하나하나를 내가 컨트롤(조절)한다고 생각했거든요. 자기의 숨어있는 욕망은 남이 알아내지 내가 알아내지 못한다는 사실을 욥이 몰랐던 겁니다. 여러분들이 어깨 아파서 파스 붙여보세요. 본인은 냄새 하나도 안 나요. 그런데 파스 붙이면 밖에서 들어온 사람은 단번에 파스 냄새난다고 이야기해요. 인간의 자기 긍정, 무한한 자기 애정, 자기 사랑, 자기라는 연민, 본인은 그걸 당연시하는 거예요.

본인은 맨날 ‘나는 부족합니다.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말은 분명히 하는데 가만히 듣는 오빠 입장에서는 그것도 자기 자랑이에요. ‘부족합니다. 부족합니다. 할렐루야~’라고 하고 있는데 내가 보기에는 교만의 극치예요. 욥이 지금까지 1장에서 31장까지 보는 것도 정말 애먹었는데 자기는 잘못한 것도 없고 어쩌고저쩌고 쭉 이야기하면서 전혀 하나님에게 접근하지 못하고 자기 이야기만 하는 거예요.

비교할 대상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아까 말한 세례요한 보세요.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딱 만나고 하면서 ‘나는 쇠해야 하고 나는 곧 없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은 흥해야 합니다’라고 일체 자기 생각을 안 하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나는 혼돈으로 빠진들 그것은 저의 본연의 모습입니다. 해체되어서 빠져버리는 거.

그러나 인간은 오늘 욥에서 엘리후가 말하는 것처럼 인간이 일단 존재하게 되면 필히 나오는 게 뭐냐 ‘나는 의롭다’가 되고 나는 의롭다고 말하는 순간 신약의 입장에서 주님만 의로운데 우리가 비교 대상이 되는 십자가 지신 분만 의로운데 십자가를 모르는 인간은 나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나쁜 짓 안 하려고 했다고 나는 의로운 것 맞다고 내뱉는 순간 하나님이 필요한 천국에 필요한 하나님의 의는 공중으로 완전히 날아가 버리는 거예요. 다 파괴된다고요. 그러니까 엘리후의 말이 맞아요.

너는 아무 소리 안 해도 너는 하나님보다 더 의롭다고 여긴 그런 인간일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어떤 분과의 대화에서 그런 이야기 했거든요. 사람이 자기의 행함으로 의롭게 되는 게 아닙니다. 그리고 사람이 자기 행함으로 죄를 짓는 것이 아니에요. 그래서 지난 낮 설교에서 자기 행함으로 시험 들지 말라고 했는데 이게 뭐냐 하면, 구원이 뭐냐 하면 구원은 나를 둘러싼 환경의 요건이 하나님의 의로 가득 차 있으면 그 안에 들어온 사람은 뭘 해도 의인이 되고 자기가 아무리 착해도 그 자체 환경이 어둠에 속한다면, 그래서 위에서 빛으로 뚫는 구멍이 없으면 어둠에 속하면 뭘 해도 그건 허물이 되고 죄가 되는 겁니다.

그 환경에 처하는 요건에 대해서 로마서 4장 6절에 나옵니다.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서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라고 되어있어요. 아무 일한 것도 없는데, 일할 것도 없는데 의롭게 된 거예요. 그걸 가지고 아브라함을 예로 제시합니다. 아브라함이 뭘 하면서 설쳐도 아브라함을 주도하는 것은 아브라함이 아니고 아브라함을 둘러싼 언약이라는 환경이 약속이라는 환경이 계속 아브라함을 의인으로 몰아갔던 거예요.

아브라함이 거짓말하고 무슨 짓을 해도, 하나님이 아들 주신다는 것을 부인해도 하나님의 것은 의의 요건 속에 포함이 되어있다는 겁니다. 거기서 아브라함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어떤 인간과도 새끼손가락 걸고 약속한 적이 없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우리는 감격해야 해요. 시답지 않은 나와 약속 한 해줘서 감사합니다. 나의 행위와 행동에 대해서 어떤 기대를 안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나의 어떤 결심에 주님이 놀아나지 않으신 것이 얼마다 다행스럽고 고마운 일인지 내 아부와 내 찬양과 내 찬미와 내 행동과 내 헌금과 선교와 희생에 주님은 일체 놀아나지 않고 따로 별개로 주께서 일하셔서 내가 만들지 않은 환경의 보쌈 안에서 의롭다는 보쌈 안에서 놓아주시니 너무 감사합니다. 이런 내용이 지금까지 욥에게는 한 마디도 나온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엘리후가 말합니다. ‘너는 지금 말 안 해도 꿍꿍이가 하나님보다 욥 네가 더 낫다는 그런 인간의 속성을 그냥 보여준다. 그것은 바로 창조 이전에 혼돈 그 자체다’라고 엘리후가 지금 이야기를 시작한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을 보지 말고 우리 자신을 둘러싼 약속을 다 이루신 그 환경이 어떤 환경인지를 관심 두게 하옵소서. 구원받는 것이 나에게 관심이 아니라 주님 하신 일, 주님 이끌고 가시고 만들어 가시는 그 일에 관심이 있음을 저희들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주일오후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좁은 한계성  (0) 2021.11.15
내면의 세계  (0) 2021.11.08
끝과 시작  (0) 2021.11.02
전과 후  (0) 2021.10.17
주체 의식  (0) 2021.1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