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과 후
2021년 10월 17일 본문 말씀: 31:24-30
(31:24) 내가 언제 금으로 내 소망을 삼고 정금더러 너는 내 의뢰하는 바라 하였던가
(31:25) 언제 재물의 풍부함과 손으로 얻은 것이 많음으로 기뻐하였던가
(31:26) 언제 태양의 빛남과 달의 명랑하게 운행되는 것을 보고
(31:27) 내 마음이 가만히 유혹되어 손에 입맞추었던가
(31:28) 이 역시 재판장에게 벌 받을 죄악이니 내가 그리하였으면 위에 계신 하나님을 배반한 것이니라
(31:29) 내가 언제 나를 미워하는 자의 멸망을 기뻐하였으며 그의 재앙 만남을 인하여 기운을 뽐내었던가
(31:30) 실상은 내가 그의 죽기를 구하는 말로 저주하여 내 입으로 범죄케 아니하였느니라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욥에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숨어계십니다. 이렇게 되면 욥이 경험하는 세계에서는 하나님은 빠지고 인간들만 눈에 뜨이는 세계입니다. 이럴 때, 인간은 자신을 어떤 식으로 구성하는지를 살필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타인들과의 비교를 통해서 자기 구성에 나서게 됩니다.
이렇게 되려며 일단 악한 자, 나쁜 자들은 어떻게 사는지도 구성되어야겠지요. 욥은 오늘 본문을 통해서 하나하나를 집고나갑니다. “금으로 소망을 삼고 정금더러 내 의뢰하는 바라 하는자”가 악인입니다. 그리고 재물의 풍부함과 손으로 얻은 것이 많음으로 기뻐하는 자가 악인으로 분류됩니다.
또한 하나님을 섬기는 대신 태양의 빛남과 달의 명랑하게 운행하는 것을 보고 두 손 모아 그 해와 달에게 경배하는 자가 악인이 됩니다. 또한 자기를 미워했다고 그 자의 멸망을 원하고 그 원수가 망하는 것을 보고 환호성을 올리는 자가 악인이 됩니다. 그리고 그 원수가 죽어 버리기를 소원하는 자가 악인입니다.
욥은 이런 식으로 자기와 차이나게 사는 자들을 가지고 얼마든지 악인의 요소를 구성할 수가 있는 겁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악인을 구성하는 것은 선함의 기준이 욥 자신일 수가밖에 없는 겁니다. 왜냐하면 어차피 인간 세계에 하나님은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욥이 모르는 것은, 욥이 악인이라고 규정한 그들도 욥과 똑같은 생각으로 타인으로 악인과 선인으로 규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욥은 자신의 한계를 알아야했습니다. 욥이 아무리 자기에게 철저에 철저를 기해도, 결국 자신이 추구하는 방향으로 계속 밀어붙이면, 하나님에게 문제가 있다는 식의 논리선을 유지하게 됩니다. 이것을 수정할 수 있는 그 어떤 대안이 욥에게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빠진 인간 세계에서는 인간들은 각자 자신의 인생을 따로 챙기고 삽니다.
이것은 사람들은 자신을 인질로 삼고 사는 바가 됩니다. 각자 따로 사는 세계, 곧 너의 것은 너의 것이고 나의 것은 나의 것이라는 점이 부각되는 세상입니다. 욥은 자신이 나서서 남을 돕고 어려운 사람을 도와준다고 자부하지만 막상 본인의 것이 침해 받았을 때에 본인이 얼마나 화를 내는 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즉 화를 내는 바로 그 감정 속에서 인간은 자신의 본성이 나오는 겁니다. 인간이 산다는 것은 순간순간 자신을 조직화하며 사는 겁니다. 그 방법은 이러합니다. 흥분된 상태를 습관적으로 자제하면서 사는 겁니다. 흥분과 습관의 만남에서 인간의 본성을 다듬어지는 겁니다. 따라서 욥이 자진해서 모든 것을 부정하고 뜯어고칠 방도는 보이지 않습니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내가 잘 들여다보지 않는 외딴 방에 청소기 앞장 세우면서 마치 자기 집처럼 그동안 사용해왔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되었을 때에, 얼마나 기분이 나쁠까요? 뒷집 사람이 벽을 허물고 내 집에 속한 방을 무단으로 자기 방처럼 사용하고 청소한다면, 내 집에서 공간에서 자신이 부재한다는 감정은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을 정도로 불쾌할 겁니다.
이처럼 인간의 불쾌감은 자신의 부재(不在)함, 곧 자신이 그 공간에서 배제된 느낌입니다. 지금 욥은 철저하게 자기 몸은 자신이 주인이 되어서 관리할 몸으로 여깁니다. 다들 그렇게 살아갑니다. 따라 하나님이 빠진 이 세상에서 인간들은 자기 선함을 놓고 쉬지 않고 경쟁하고 비교하고 있는 겁니다.
드디어 신약시대가 되면 하나님께서 자신을 인간 세계 안에 들여놓습니다. 이제 인간 대 인간하고 비교하면 아니됩니다. 하나님과 비교해서 선인지 악인지 구분되어야 합니다. 율법을 앞장 세우고 인간 세계에 들어오신 주님의 뜻에 의할 것 같으면 모든 인간들은 하나님에게 빚진 자임이 드러납니다.
본인이 율법의 존재를 인식하든 아니하든 간데 이 세상은 율법으로 짜여져 있습니다. 마태복음 5:17-19에 보면,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율법이 스스로의 완성을 위해 이 세상의 공간과 시간, 그리고 인간들도 창조되었습니다. 그래서 율법은 인간들에게 율법에 충실하도록 요구할 권한이 있습니다. “너를 송사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송사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주고 재판관이 관예에게 내어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마 5:25-26)고 되어 있습니다.
이 빚진 관계가 개인적인 착함과 선함에 우선하는 철저함을 갖추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3:4에 보면,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율법 노선에 필요한 시간성을 인간 세계에 집어넣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인간은 나름대로 과거→현재→미래의 시간이 아니라 전/후라는 방식으로 구성됩니다. 즉 옛사람과 새사람으로 구분되는 겁니다.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고후 4:16)
여기서 ‘옛 사람’이란 자신이 알고 있던 과거와 현재를 비교해서 날마다 보다 향상되는 자아를 실현하려는 그 인간성이 그대로인 사람을 말합니다. 반면에 새 사람이란 하나님에게 빚진 죄의 빚을 다 탕감받은 사람을 말합니다. 따라서 새 사람은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니었던 그 상태를 잊지 않고 복음이 주는 조치에 어쩔 줄 모르고 마음껏 고마워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망대 이야기를 하시는 이유는, 인간들이 규정하는 선과 악의 경계선 상에 아무런 이유없이 망대에 치어죽은 사람을 포진하라는 겁니다. 인간의 죽음은, 하나님 보시기에 누구나 율법에 대해서 빚지고 있는 상태임을 알려주는 겁니다. 즉 새 사람이 된 인간은 더 이상 자신을 자신이 책임지고 관리한 대상이 아님을 알아야 하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아무런 문제없음을 전하는 이 복음에 빚지 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105강-욥기 31장 24~30절(전과 후)211017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욥기 31장 24~30절입니다. 구약성경 790페이지입니다.
“내가 언제 금으로 내 소망을 삼고 정금더러 너는 내 의뢰하는 바라 하였던가, 언제 재물의 풍부함과 손으로 얻은 것이 많음으로 기뻐하였던가, 언제 태양의 빛남과 달의 명랑하게 운행되는 것을 보고, 내 마음이 가만히 유혹되어 손에 입맞추었던가, 이 역시 재판장에게 벌받을 죄악이니 내가 그리하였으면 위에 계신 하나님을 배반한 것이니라, 내가 언제 나를 미워하는 자의 멸망을 기뻐하였으며 그의 재앙 만남을 인하여 기운을 뽐내었던가, 실상은 내가 그의 죽기를 구하는 말로 저주하여 내 입으로 범죄케 아니하였느니라”
욥은 이 땅에 자기와 비교 대상이 없습니다. 자기만큼 철저하고 완전하게 산 사람이 없기 때문에 자신만만하게 나는 이런 나쁜 일도 안 하고 저런 나쁜 일도 안 했다고 생각합니다. 욥이 하는 이 모든 이야기와 행동은 결국 뭐냐 하면 ‘어쨌거나 나는 나쁜 사람 아닙니다’라는 쪽으로 결론이 다 맺어져요. 어떤 짓을 해도 나는 나쁘지 않습니다.
욥이 자꾸 이런 말을 내뱉는 것은 나쁘지 아니한데 왜 나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벌이, 저주가 저에게 찾아왔는지 그 문제가 자기에게 납득이 가질 않는 거예요.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신약 성도인 우리 입장에서 또는 욥의 전체를 내다보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하나님 자신의 뜻을 나타내지 않고 욥에게 감추고 있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욥에게 자기 본심을 나타내지 않고 감추어두시면서 하나님의 뜻이 도달하지 않는 상태에서 인간 착함의 극치와 인간이 뭘 지향하고 어떤 것을 노리면서 평소에 행동하고 있는가를 욥을 통해서 다 노출 시키는 작업을 하시고 있는 겁니다. 의도적으로 감추었다는 말은 욥으로 하여금 내가 어떤 정도의 사람이냐 하는 비교 대상에서 하나님이 쏙 빠져있다는 말이에요.
하나님 빼고 인간들끼리 배틀하고 붙어서 누가누가 착하고 누가누가 선하냐를 하나님께서 대조하게 되면 내가 더 나쁘다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고요, 사람은 이런 점에서 나는 너보다 더 장점을 갖고 있고 너보다 더 낫다는 것을 삶의 보람으로 삼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걸 사자성어로 ‘도장 깨기’라고 합니다. 각 도장에 돌아다니면서 ‘이 도장에 무술 고수 나와’라고 하는 거죠. 자신을 측량하는 방법은 도장 깨기에 나서는 겁니다.
복음 좀 알고 나서 ‘너희 교회에서 복음 안다며?’라는 식으로 우리 교회 복음이랑 누가 더 센지, 누가 더 바른 복음인지 도장 깨기 나서는 겁니다. 뭐라고 말하면 ‘그건 아니고. 너 이런 건 몰랐지?’라는 식으로 꼭 포커게임 하는 식으로 그렇게 살아가죠. 다시 말씀드리지만, 욥의 특징이 뭐냐 하면 주님은 쏙 빠지고 인간들만 있을 때 궁극적으로 인간들이 지향하는 거, 인간들이 노리고 있는 거, 추구하고 목표로 삼는 것이 뭐냐 하면 욥이 지향하는 바로 그것입니다.
더 완전하게, 더 완벽하게, 그렇게 시도하는 거예요. 오늘 본문 24절에 보게 되면, 제가 만약 욥 앞에 있다면 이렇게 시비 걸 거예요. “내가 언제 금으로 내 소망을 삼고 정금더러 너는 내 의뢰하는 바라 하였던가” 내가 언제 금덩어리 바라고 내가 언제 금을 얻는 것을 내 목적으로 삼았는가. 나는 그런 적 없다고 욥이 이야기한다면 저는 욥에게 이렇게 말할 겁니다. ‘그러니까 너는 네 잘못을 모르는 거야’라고.
왜냐 하면 욥은 아무 비교할 대상이 없다고 하는데 하나님과 비교 안 하고 인간과 비교하기 때문에 자신의 과거와 현재 자기를 비교하는 겁니다. 과거의 나는 이런 일이 없다. 따라서 과거에 비해서 과거가 가는 방향대로 나는 곧바로 가고 있다고 욥이 우기고 있는데 욥이 뭘 모르느냐 하면 과거의 방향이 지금 아무 죄 없는 나에게 고난이 왔던 쪽으로 가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수정해야 한다는 사실을 욥이 인정을 안 하고 있는 거예요.
현재의 내가 ‘과거의 나는 돈을 좋아하지 않는다’라고 자기는 지금 돈을 좋아하지 않는다, 않는다, 오늘도 좋아하지 않는다, 내일도 좋아하지 않는다, 이렇게 가는 그 방향의 끝은 뭐냐 하면 ‘하나님은 잘못되었다’라는 그런 방향으로 지금 가고 있는 거예요. ‘아무 죄도 없는데 왜 죄 있는 자가 받는 죄를 내가 받습니까. 이건 하나님 쪽에서 뭔가 행정처리 잘못한 겁니다’라고 지금 행정처리 잘못했다는 그 탓을 하나님께 돌리는 그 탓이 기다리는 쪽으로 욥은 지금 방향을 계속 끌고 가고 있는 거예요.
뭐 한번 따져보겠다는 거예요. 그 방향 자체가 다른 방향이 있다는 사실은 상상도 못 하고 있습니다. 제가 며칠 전에 꿈을 꿨는데 아주 이사한 꿈이 되어서 지금도 잊을 수가 없어요. 안방이 한옥 형태인데 저의 집입니다. 한옥인데 큰방 있고 또 작은방이 하나 있는데 거기는 잘 쓰지 않고 내버려 둔 방이에요. 어느 날 큰방에 있다가 작은방으로 가서 좀 쉬어볼까 하면서 쉬고 있는데 어디선가 청소기 소리가 들리는 거예요. 윙~~하고.
방을 보니까 방에 청소기 하나가 삐져나와 있어요. 누가 청소를 하고 있는 거예요. 내가 있는 방을. 보니까 뒷집에서 내 방을 청소하고 있었던 겁니다. 기분이 굉장히 이상했어요. 갑자기 이 방이 뒷집 방인지 내 방인지 혼동이 되었습니다. 꿈속이지만 제가 가만히 따져보니까 내가 하도 그 방을 안 쓰니까 뒷집에서 벽을 허물어서 자기 방처럼 평소에 사용했던 거예요. 그리고 나 있는지도 모르고 자기 방이라고 들어왔단 말이죠. 침해받는 느낌. 내 것인데 침범받을 때 그 더러운 기분, 이것을 꿈속에서 확 느꼈던 거예요.
지금 욥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제가 언제 남을 공격했습니까’라고 이야기해요. 21절에 보면 “나를 도와주는 자가 성문에 있음을 보고 내가 손을 들어 고아를 쳤던가”라고 지난주에 했고 오늘 본문에서도 “내가 언제 나를 미워하는 자의 멸망을 기뻐하였으며 그의 재앙 만남을 인하여 기운을 뽐내었던가, 실상은 내가 그의 죽기를 구하는 말로 저주하여 내 입으로 범죄케 아니하였느니라”라고 나와요.
지금 욥은 자신이 어려운 나그네를 도와주고, 과부를 도와주고, 어려운 사람을 도와줬고, 그 점에 대해서 나는 주저하지 않았다고 이것만 생각했지 내 영토에 누가 침범한 것에 대해서는 자기가 기분 나빴다는 경험이 없어요. 지금 하나님은 욥의 세계를 거침없이 침범했습니다. 욥은 지금 화를 내고 있는 거예요. 제가 꿈에서 본 것처럼. 어디 내 방에 기다란 청소기를 내밀어요.
이게 누구 집인데 자기가 청소를 해. 청소하는 것은 고맙지요. 그러나 너는 네 방이나 청소하지 내 집에 와서 자기 방처럼 벽을 헐어서 자기 방처럼 사용한 거예요. 기분 찝찝하고 더러운 기분. 여러분도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자기 방에서 자고 있는데 양말 신은 다른 사람 다리가 보인다고 생각해 보세요. 기분 나쁠 겁니다. 욥은 자기 단도리, 자기 영역을 철저하게 잘 관리해 왔습니다.
내가 내 관리를 철저하게 해왔지만, 욥은 그로 인해 뭘 발생시키느냐 하면 주변을, 주변이라는 경계선을 발생시켰습니다. 이것까지는 내 것이고 이것까지는 너의 것. 침범하지 마. 내 것에 대해서 내가 철저하게 책임지지만 잘잘못은 내가 알아서 평가할 것이지 네가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식으로 욥은 살아왔던 겁니다. 욥이 이렇게 사는 것이 뭐가 잘못되었느냐 하는 것은 신약성경 관점에서 봐야 밝혀지지 같은 인간들끼리 모여서는 성립이 안 돼요.
인간의 감정이라는 것은 흥분과 습관의 반복입니다. 갑자기 좋아서 흥분하게 되면 스스로 ‘캄다운(Calm down), 자제해야 해, 절제해야 해’라고 조절하고, 흥분하고, 조절하고 하는 것이 습관이 되면서 자기 인생을 조직화하게 되어있어요. 자기 인생을 조직화하는 거예요. 너무 격분하지도 않고 너무 나대지도 않고 항상 자기가 관리할 수 있는 역량 안으로 집어넣어서 이것은 내 것이라고 생각 하는 거예요.
이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성령님이 오시기 전에 육이 될 때 인간은 자기 자신을 껴안고 살아온 겁니다. 자기 자신을 껴안고 살게 되면 행복이 오래 가지 않고 여기에 항상 불행의식이 될 조짐이 굉장히 강합니다. 내 것과 네 것. 그러면 욥이 지금 구약이거든요, 구약이니 너무 탓하지 맙시다. 구약이니까 메시아 오시기 전이니까 비교 대상이 같은 인간들밖에 없기 때문에 자신이 최선을 다해 살았으면 자랑할 만하다고 이런 생각이 들 거예요.
그러면 신약의 차이점이 뭐냐. 구약의 차이점은 항상 과거-> 현재 -> 미래로 시간은 이렇게 흘러갔다고 보는 겁니다. 이걸 가지고 시간의 첫 번째 타입이라고 하는데 두 번째 타입이 뭐냐 하면 첫 번째 계열이 과거-> 현재 -> 미래로 시간은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미래로 흘러간다고 한다면 두 번째 타입은 뭐냐 하면 전과 후예요. 전과 후. 전의 나와 후의 나가 확연히 다르다.
신약성경에 하나님이 내려주신 성도의 특수한 시간론입니다. 옛사람과 새사람. 속은 후패하지만 속사람은 날로 새롭도다. 여기서 전과 후가 중요한 것은 전과 후가 이어지지 않는다는 거예요. 주님의 성령이 오시게 되면 전과 후로 나누는데 전의 인간성은 어떤 특징이 있느냐 하면 딱 욥같은 인간이에요. 나는, 나는 어떤데, 나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대해서 차근차근 미래에 보다 완벽한 완벽한 더 철저한 내가 되고 싶다는 것이 계속 이어져 나가는 것이 바로 옛사람의 특징입니다.
비교 대상이 남들과 비교하고 더 나아가서 남과 비교해서 내린 평가서가 현재 나의 행동을 결정짓는 나의 지침서가 되는 거예요. 전에는 이런 행동 했지만, 어제보다 나은 오늘, 오늘보다 나은 내일, 이것이 발전 발전한다는 거죠. 이게 욥이고 바로 성령 받지 않은 모든 사람들을 볼 때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삼 남매를 살해한 그 남자가 판사의 최종 구형 있기 전에 반성문을 열네 통 썼습니다.
열네 통 쓴 것이 감형되는데 하등 효과가 없어요. 우리는 우리의 철저함을 과거에 의해서 내가 이렇게 미흡함을 알면 그것 가지고 은연중에 하나님을 향해 반성문을 씁니다. ‘하나님, 다시는 이런 짓을 하지 않겠습니다. 다시는 이런 실수를 하지 않겠습니다. 내가 미워. 내가 왜 그런 짓을 했어. 제가 뭔가 잠시 정신이 나갔었나 봅니다. 하나님, 앞으로 주의하겠습니다. 앞으로는 성화하고 거룩한 하나님을 본받아 보다 거룩하고 거룩하게 매일같이 단계를 조금씩 향상하게 하겠습니다’
바로 이것이 전형적인 지옥 가는 사람입니다. 이게 지옥 가는 사람이에요. 자기반성 외에는 아무 생각이 없는 사람. 자기가 반성해서 거기 나오는 결과가 자기 자신을 스스로 만족하는 롤(role)모델로 삼는 식의 인생살이를 욥이 제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인간이 할 수 있고 저지를 수 있는 치명적인 그 한계를 욥이 다 보여줍니다. 전에는 교회 안 다녀서 개판으로 살았지만, 이제는 교회 다니면서 개과천선해서 전에는 악한 것이 80%인데 교회 다니면서 선한 일이 80%로 살아가겠다고 하는 거죠. 지옥이나 가세요~
그게 바로 예수님의 하나님의 원수입니다. 지금 욥은 자기를 위한 추도사를 쓰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자기를 위한 추도사. 맨날 무덤에 누워서, 가짜로 누워서 유언 써보는 그런 거 있잖아요. 그게 현재 자기의 흥분된 감정에 불과해요. 인간의 자기감정이 그게 자기 진짜 모습인 줄 알고 아주 착각합니다. 그것을 컴퓨터에서는 랜섬웨어(ransomware)라고 합니다. ‘랜섬’은 몸값이라는 뜻이고 ‘웨어’는 소프트웨어의 웨어 합성어입니다.
컴퓨터에 본인의 동영상과 귀한 정보를 인질로 잡아서 돈 내면 풀어주는 그게 랜섬웨어입니다. 저도 걸려서 동영상 다 날아갔습니다. 백날 해도 저는 돈 안 줍니다. 왜? 주의 뜻이기 때문에. 주의 뜻으로 걸렸는데 내 쪽에서 왜 풉니까. 내가 뭔데 풉니까. 주께서 걸리게 하셨는데. 이빨 사이에 음식 찌꺼기 있으면 사람들은 그때 그 순간 해결책이 뭐냐. 그냥 이빨 사이에 있는 찌꺼기를 뽑아내면 깔끔하게 해결되죠.
인간 사는 것이 전부 다 자기 자신이 인질 되어서 살아가요. 자기를 놔줄 줄을 몰라요. 다시 말해서 아무것도 없는 시절, 그때를 사람들은 모릅니다. 아무것도 없는 시절. 본인 스스로 우상이 된 겁니다. 그러면 이 문제를 신약에서는 어떻게 해결하는가. 그건 저에게 묻지 말고 주님에게 물어야 하겠죠. 누가복음 13장 4절에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라고 되어있어요.
갑자기 망대가 무너져서 그 밑에 있는 사람 18명이 깔려 죽었습니다. 그런 사건을 보시고 주께서 하시는 말씀이 안 죽은 사람이 죽은 사람보다 죄가 적다고 너희들이 생각할 수 있겠지. 바로 그것이 너희들이 안 털렸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망대가 무너졌다는 거예요. 누가 너 대신 죽는 사람이 있어 줘야 내가(주님) 너희들에게 할 말이 있다는 겁니다.
내가 누구냐. 그것은 본인이 몰라요. 그것은 남과 살아있는 인간과 살아있는 인간과 비교해서 나는 너보다 좀 더 낫다. 그래서 나는 너보다 제대로 살고 있다고 이렇게 하는데 왜 주변에 억울하게 죽어있는 사람들을 주변에 깔아놓지를 않느냐는 겁니다. 남에게 나쁜 짓 한 적 없고 착한 일만 했는데 졸지에 교통사고 나고 그것도 음주운전에 뺑소니 걸려서 보상도 받지 않고 죽는 사람, 그 사람을 네 앞에다 배치해 보자는 말이죠.
그 사람이 재수 없다고 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 사람 말고 네가 재수 없다는 겁니다. 인간은 하나님 보시기에 재수 더럽게 없는 인간인 것을 본인이 발견하지를 못해요. 전에도 몇 번 이야기 했지만, 인간은 하나님 앞에 신세 지고 있습니다. 신세 지고 있다는 말은 성경대로 이야기하면 로마서 1장이나 마태복음 5장에 의하면 빚지고 산다는 겁니다. 빚쟁이는 주님이고 인간은 빚지고 있어요.
햇빛과 공기를 그냥 은혜로 받고 있습니다. 그거 공짜 아니에요. 다 나중에 책임 묻습니다. 로마서 1장에 나오잖아요. 마태복음 5장도 나오고. 하나님이 선인과 악인에게 햇빛과 공기를 그냥 줬거든요. 그거 공짜 아닙니다. 주신 분을 알아야죠. 나를 이렇게 살게 하시는데 분명히 내 착함의 덕, 착함의 결과는 아니야.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 나를 살리지. 아, 주께서 너 주제 파악하라고 계속해서 은혜를 주시는 거예요.
주변에 있는 죽은 사람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순서상 내 앞에 앞선 거뿐이에요. 쉽게 말해서 우리는 나를 옛사람 관점에서만 보고 있고 보면서 살아가는 거예요. 새사람 관점에서 볼 줄을 모르는 겁니다. 새사람 관점은 뭐냐. 죄의 빚을 진 자를 내(주님)가 그 죄를 용서함으로 말미암아 죄 없는 사람으로 만들었다는 것이 새 사람 관점이에요. 욥은 그걸 모르고 있어요. 지금. 자기 도 닦기 바빠요. 깊은 산중에 자연인으로 살면서 ‘주여, 부족합니다. 반성합니다’라고 또 반성문 쓰고, 또 반성문 쓰고, 그 반성문 도대체 왜 쓰는데요. 왜 써요? 누구 좋으려고 써요?
본인이 본인에게 인질이 되어있는 거예요. 어쨌거나 나를 구원해야 할 텐데. 나라는 그 자체가 이미 우리는 시건방진 일입니다. 우리 몸과 마음은 우리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인이 따로 있어요. 사나 죽으나 주님이 주인입니다. 세상에 남의 방에 청소기 가져와서 청소하는 것이 어디 있습니까. 꿈이지만 아직도 생각하면 기가 차서 그 사람 만나면 한번 시비 걸 거예요.
이 빈 육신은 내 방이 아닙니다. 주님 방인데 시건방지게 내 몸이라고 우기는 거예요. 내 몸. 생각만 해도 헛웃음이 납니다. 기도에 대해서 가관인 것이 뭐냐면 ‘하나님, 어려울 때가 있는데 제가 기도를 해야 합니까, 말아야 합니까?’라고 묻는 거. 이 물음 자체도 참 자기 자신을 몰라서 그래요. 기도하면 뭐 응답해 준다고요? 주님은 우리 기도에 일체 응답 안 해 줍니다.
응답 안 해 줘도 공짜로 먹고 마시고 다 했잖아요. 하숙비 한 번도 안 내고 잠자고 먹고 마시고 다 했잖아요. 서른 살 되면 보통 엄마들이 자식이 애먹일 때 하숙비 내놓으라고 하잖아요. 그러면 아이들도 준비된 멘트가 있죠. ‘누가 낳아달라고 했나. 자기가 낳아 놓고’라고. 자기가 낳아 놓고 하숙비를 왜 달라고 하느냐는 거죠.
마태복음 5장에 보면 주님께서 빚쟁이로 나설 때는 뭐를 들이대느냐 하면 계산서 들이댑니다. 그게 율법이에요. 율법에 의하면 너는 지금이라도 빈대 죽이듯이 모기 죽이듯이 눌러 죽여도 마땅한데 지금 율법에 의하면 죽어 마땅한데 계속 율법 안에서 네가 나에게 갚아야 할 그 빚을 증거 하고 있다는 겁니다. 너는 언제 그거 갚을래?
로마서 1장에서 사도바울이 말합니다. “내가 너희들에게 복음으로 빚진 자다. 내가 너에게 복음 전한다고 대우받고 그럴 마음 없다. 내가 주님 앞에 그리고 너희들 앞에 내가 복음으로 빚진 자이기 때문에 그렇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사도로서 예수님을 대신해서 너희들이 나에게 빚졌고 그 빚진 것을 내가 인간을 대표해서 그 빚은 이미 갚아졌다는 소식을 전하는 것을 빚진 자에게 아직 빚이 남아 있는 자에게 전하는 그 일을 사도가 하고 있는 거예요.
사도는 싫으면 말고 이죠, 뭐. 좋은 소식 전했는데 안 들으면 어쩝니까. 그러면 좋은 소식 전하기 위해서 어떤 마음가짐을 전해야 합니까. 어떤 마음가짐을 가져야 합니까 한다면 바로 오늘 본문 욥의 이야기에 나오는 이 마음가짐을 유지하세요. 견지하세요. 나는 나쁜 짓 한 적 없고 좋은 일만 했고 행여나 내가 나쁜 짓 하면 그건 상황이 그래 되어서 어쩔 수 없었다는 그런 거.
변명을 지어내는데 사람들은 다 작가들 아닙니까. 변명, 핑계, 엄청나게 지어내면서 그래도 자기는 양심 이라는 것이 있다는 식으로 끝까지 양심이 있다고 하잖아요. 조폭들도 ‘차카게 살자’라고 말하잖아요. 맞춤법 막 틀리면서도 조폭들도 양심에 착하게 살고 싶은 마음 있어요. 사는 환경이 힘들어서 어쩔 수 없는 거지, 너도 나같은 환경에 있었으면 조폭 된다는 식으로 인간들과 인간들 상대해서 자꾸 변명들 하는데 그거 유지해주세요.
그거 유지해야 합니다. 유지해달라는 부탁하는 내가 잘못이다. 지금 다들 잘 유지하고 있어요. 그저 핑계 못 대서 환장한 채 살고 있습니다. 바로 그게 유지가 되어 줘야 복음이 환장할 정도로,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너무 놀라울 정도로 이게 웬 고마움이냐 하면서 거기에 어쩔 줄을 모르죠. 복음의 기쁨 때문에 어쩔 줄을 모르는 거예요.
이보다 더 망가진 들, 복음은 취소되지 않습니다. 지금 예배 마치시고 나가시거든 어디 망대 없는지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망대 밑에 서서, ‘망대야 나에게 무너져라. 나에게. 그래서 남들이 나에게 욕하라고 해. 저 인간은 지은 죄가 많아서 망대에서 일찍 죽었다고’ 남들에게 그런 욕을 듣는다 할지라도 주님께서 씻어준 죄 용서의 어쩔 줄 모름에 비하면 그건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야말로 아무 문제 없습니다.
내가 일부로 문제 만들지 마세요. 우리는 주님의 인질이고 새사람의 인질이지 옛사람의 인질이 아닙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욥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지금 우리가 하나님 앞에 하고 싶은 이야기를 어찌 그리 똑같이 해주는지요. 이것조차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욥 못지않게 잘난 맛으로 살아가는 저희들, 남 탓이고 불망과 원망으로 하루 종일 보내는 저희들 다시 한번 이런 인간에게 주께서 그 모든 죄의 빚을 갚아주었다는 해결해 주었다는 기쁜 소식이 늘 기쁘게 작렬하게 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