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과 시작
2021년 10월 24일 본문 말씀: 욥기 31:31-40
(31:31) 내 장막 사람의 말이 주인의 고기에 배부르지 않은 자가 어디 있느뇨 하지 아니하였었는가
(31:32) 나그네로 거리에서 자게 하지 아니하고 내가 행인에게 내 문을 열어 주었었노라
(31:33) 내가 언제 큰 무리를 두려워하며 족속의 멸시를 무서워함으로 잠잠하고 문에 나가지 아니하여 타인처럼 내 죄악을 품에 숨겨 허물을 가리었었던가
(31:34) 내가 언제 큰 무리를 두려워하며 족속의 멸시를 무서워함으로 잠잠하고 문에 나가지 아니하여 타인처럼 내 죄악을 품에 숨겨 허물을 가리었었던가
(31:35) 누구든지 나의 변백을 들을지니라 나의 서명이 여기 있으니 전능자가 내게 대답하시기를 원하노라 내 대적의 기록한 소송장이 내게 있으면
(31:36) 내가 어깨에 메기도 하고 면류관처럼 머리에 쓰기도 하며
(31:37) 내 걸음의 수효를 그에게 고하고 왕족처럼 그를 가까이 하였으리라
(31:38) 언제 내 토지가 부르짖어 나를 책망하며 그 이랑이 일시에 울었던가
(31:39) 언제 내가 값을 내지 않고 그 소산물을 먹고 그 소유주로 생명을 잃게 하였던가
(31:40) 그리하였으면 말 대신에 찔레가 나고 보리 대신에 잡풀이 나는 것이 마땅하니라 하고 욥의 말이 그치니라
욥이 바라보고 있는 세상의 한계는 욥의 한계성으로 드러납니다. 욥은 자신이 세상을 제대로 보고 있다고 자부합니다. 자기 세상에서 제대로 살고 있다는 우기는 것은 욥은 나름대로 자신감이 있었던 겁니다. 즉 세상에서 원하는 도덕과 윤리 기준에 대해서 욥은 자신의 능력으로 다했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러나 욥은 자신이 보고 있는 이 세상이 그저 지나가는 과정 속에 있다는 것을 모릅니다. 그저 지금의 환경이 옛적으로 이대로 흘러왔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고요한 대양에서는 수시로 돌고래가 수면 위에 돌출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순식간에 나타났다가 다시 순식간에 사라집니다.
사람들은 그래놓고 다시 원래 상태로 돌아갔다고 오해합니다. 하지만 수면 아래에는 여전히 무한(無限)한 돌발사태가 예비되어 있고 잠복되어 있습니다. 즉 이 대양같은 넓은 세상은 결코 나의 정당성을 보장하기 위해 움직이는 세상이 아닌 겁니다. 인간은 유한(有限)합니다. 하지만 앞으로 벌어진 사태들은 무한합니다.
욥은 자신의 과거 일에 대해서 하자없다고 여겼습니다. 이점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바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욥에 찾아든 난데없는 고난과 고통과 죽음의 합박감은 기존의 과거 해석에서 욥이 도저히 파악할 수 없는 사태가 일어난 겁니다. 욥이 자기에게 찾아온 고통을 해석하면서 욥의 기본적인 ‘세상 보기 자세’가 드러났습니다.
그것은 전통과 관습으로 이어지는 세상관이었습니다. 인간들의 생각은 뭐가 마주침과 부딪침을 통해서 새로운 것들을 습득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저 남들 하는 식대로 살면서 별 하자없는 생활이라고 여깁니다. 아무리 이 세상에 돌고래 출몰같은 사태가 벌어지고 조금 지나면 다 소실될 것이라고 짐작합니다.
즉 잔잔한 물결이 일어나는 기본틀은 한결같이 진리일 것이라고 여깁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욥이 그 누가와도 부인할 수 없는 기본 윤리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이는 곧 욥 자신이 자신있게 출제하고 본인이 그 정답을 답하는 식으로 욥은 자신의 정당성을 이어갑니다. 욥은 문제점은 ‘최후’를 모른다는 점에 있습니다.
‘자신의 끝’을 모르고 있습니다. ‘자신의 끝’을 모르면 ‘자신의 시작’도 모릅니다. 즉 비교할 표준을 욥은 모르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 5:43-44에,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6:3에는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자신의 끝을 아는 자만 가능한 말씀입니다. 욥은, 자신은 허상에 불과하고 실체로 따로 계시다는 것을 모릅니다. 이 역사의 끝, 세상의 끝에 등장한 인간상이 어떠한 인간상인지를 모릅니다.
공자를 왈(曰), “원수를 만들지 말라”고 합니다. 원수가 생기면 우리들의 일상이 불편해지니까요. 하지만 주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쉴새없이 원수가 만들어지는 세상 속을 살게 된다는 겁니다. 이런 세상 속에서 인간이 자신을 주인이라고 자부한다면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낼 수가 없습니다.
지금 욥에게는 난데없는 고통이 왔습니다. 이는 그 고통으로 인하여 세상을 보는 자신에게 문제가 있음을 간파햌ㅆ어야 했습니다. 사도행전 9:3-9에 보면,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서 있더라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니라”
사울이라는 이 청년는 3일 동안 완전히 자아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상실했습니다. 그가 세상을 본다고도 말할 수 없습니다. 장님이 되고 말았습니다. 먹을 수도 없습니다. 더 이상 자신의 생명을 연명할 재간이 없습니다. 이렇게 되면 사울이라는 사람은 본인이 기대했던 현실이 무너져버린 겁니다.
이것이 주님과의 마주함입니다. 마주함은 곧 부딪침이었습니다. 생각을 달리해야 했습니다. 그 전에 내가 옳다고 여긴 것들을 배설물로 버려야 했습니다. 과거에 자신의 일은 자신이 옳다는 식으로 결말지어졌음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고부터는 자신이 의인이 아니라 죄인임을 자각하는 결말과 이어지게 됩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은, 나는 남에게 넘기므로서 가능함을 알게 됩니다. 기원전 570년 경, 이탈리아 남쪽 시칠리아 섬에 팔라리스라는 독재자가 살고 있었는데 이 사람은 자신의 권위를 과시하기 위해 지독하게 공포스러운 형벌도구를 만들라고 당시 아테네에서 유명한 펠리라우스라는 과학자에게 명령을 내립니다.
놋쇠로 만든 황소 안에 죄수를 가두어두고서는 놋황소 바깥 밑에서 불을 피어 죄수들이 서서리 신음하면서 죽게 한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속에 금속 관을 집어넣어 죄수의 초후의 고통소리를 바깥 사람들이 듣도록 한 잔인한 장치였습니다. 바로 이 놋황소를 제작한 과학자나 명령한 팔라리스왕 모두가 다 그 형틀 안에서 죽게 됩니다.
이처럼 욥의 최후는 ‘낯선 죽음’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 죽음이며 그 죽음에 하나님 자신도 참여됩니다. 이처럼 신약의 성도는 본인이 실체가 아니라 실체는 예수님이며 자신들은 밤 하늘 스크린에서 빛나는 별처럼 박혀서 주님의 이미지를 증거하는 자들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렇게 보면, 욥 자신이 곧 욥의 끝이요 욥의 시작입니다. 신약의 기준으로 봐서 메시야로부터 구원받은 자의 시범을 보인 사람인 겁니다. 하나님께서 미리 구약 시대때, 욥을 통해서 예수님의 구원을 드러내셨습니다. 욥은 그 시대의 돌고래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더 이상 내가 나의 주인이 없음을 분명히 하게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06강-욥기 31장 31~40절(끝과 시작)211024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욥기 31장 31~40절입니다. 구약성경 790페이지입니다.
“내 장막 사람의 말이 주인의 고기에 배부르지 않은 자가 어디 있느뇨 하지 아니하였었는가, 나그네로 거리에서 자게 하지 아니하고 내가 행인에게 내 문을 열어주었었노라, 내가 언제 큰 무리를 두려워하며 족속의 멸시를 무서워함으로 잠잠하고 문에 나가지 아니하여 타인처럼 내 죄악을 품에 숨겨 허물을 가리었었던가, 누구든지 나의 변백을 들을찌니라 나의 서명이 여기 있으니 전능자가 내게 대답하시기를 원하노라 내 대적의 기록한 소송장이 내게 있었으면, 내가 어깨에 메기도 하고 면류관처럼 머리에 쓰기도 하며, 내 걸음의 수효를 그에게 고하고 왕족처럼 그를 가까이하였으리라, 언제 내 토지가 부르짖어 나를 책망하며 그 이랑이 일시에 울었던가, 언제 내가 값을 내지 않고 그 소산물을 먹고 그 소유주로 생명을 잃게 하였던가, 그리하였으면 밀 대신에 찔레가 나고 보리 대신에 잡풀이 나는 것이 마땅하니라 하고 욥의 말이 그치니라”
여기에서 욥이 계속해서 붙는 단서가 ‘내가 언제 그랬는데, 내가 언제 그렇게 했는데’라고 하며 욥이 자기가 생각해 낼 수 있는 모든 악한 일을 다 끄집어 내놓고 그 악한 일에 대해서 내가 위반한 적이 없다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난 뒤에 욥이 그의 말을 그칩니다. 그런데 욥이 끄집어낸 악한 일이라고 하는 것은 본인이 일방적으로 정해놓은 악한 일이에요.
본인이 일방적으로 정했다고 하면 욥이 거기에 대해서 반대할 겁니다. 그거는 자기가 현재 살고 있는 모든 주변 사람들도 내가 악하다고 하는 것들에 동의한 이야기다. 사회는 그렇게 돌아가는 것이다. 32절에 보면 나그네로 밖에서 차가운데 자게 하면 악한 일이고, 31절에는 우리 집에서 주인이 내리시는 그 고기, 예를 들면 한우, 삼겹살 같은 그 고기를 안 먹은 종이 있느냐는 겁니다. 주인은 고기 먹고 살고 종은 고기도 못 먹고 살고 그것을 욥은 악한 일로 봤고 다른 사람도 그것을 악한 일로 동의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33, 34절에 나오는 악한 일은 뭐냐 하면 권세자가 무서워서 할 말 못 하고 숨어있는 그걸 악한 일로 봐서, 사회 정의가 실현되어야 하는데 자기 한 몸 살겠다고 몸 사리는 일을 보고 욥은 말합니다. 내가 언제 내 몸을 사리더냐. 내가 권세자 무서워서 할 말 못 하고 비겁하게 숨어있는 그런 악한 짓을 나는 한 적이 없다.
그리고 35절에 이야기하기를 내 말이 틀렸으면 반박해보라는 겁니다. 변백이라는 것은 변명하는 겁니다. 그리고 내가 변명하는 것에 대해서 그것이 네가 꾸며낸 일이다. 네가 하지도 않고 왜 착한 일 했다고 하느냐고 나에게 소송을 하고 소송이 정당하다면 그 소송장을 내 이마에 면류관처럼 내 이마에 붙이고 돌아다닐게.
나는 이 정도로 거짓말쟁이고 이 정도로 자기를 위장하고 하지도 않은 착한 일을 했다고 한다면, 나는 이 정도로 위선자라고 말하면서 돌아다닐 것이고 나를 고소한 그 사람을 나의 왕족처럼 그렇게 가까이할 것이다. 됐냐? 이 정도로 나는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내놓았으면 너희들이 마음껏 나에 대해서 공격하고 비난해 봐라. 그럴 수 있거든. 욥이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38절에 보면 내가 내 땅에 토지 하면서 내가 값을 치르지 않은 일이 있었던가. 소유자의 소유물인 남의 것을 빼앗고 돈을 지불하지 않아서 그 사람이 굶어 죽는 일이 있다면, 생명을 잃은 일이 있다면 내가 갚아줄게. 만약에 내가 안 갚으면 내 농장에 경작하는 밀 대신에 찔레가 나고 보리 대신에 잡풀이 난다 할지라도 나는 그것을 감수하겠다. 내가 잘못했는데 그렇게 해야지.
이런 식으로 욥은 자신만만하면서 말을 그쳤습니다. 엄청나게 많은 말을 했거든요. 아프면서도 무슨 말이 그리 많은지 벌써 10장부터 해서 욥이 말하는 거 따라온다고 우리는 거의 1년 넘는 동안 욥의 잘남을 따라온다고 애를 먹었어요. 욥의 문제점은 뭐냐 하면 시작도 안 했다는 겁니다. 지금 욥은 끝을 모르기 때문에 시작도 모른다는 사실을 몰라요.
그냥 자기가 중간에 들었던 중간에 경험한 한 토막에 불과한 자기 인생에 거기서, 나는 여기 있고 그 시대에 통용되는 선과 악, 사회적 윤리와 도덕, 그런 도덕과 윤리가 처음부터 어디서 비틀어져서 나온 윤리 도덕인지를 생각 못 하고 그게 정당한 줄로 알고 있어요. 남들 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사람들의 생각이요, 마주침이 없고 부딪힘이 없으면 자기가 줄곧 전통적으로 해 온 것이 옳다고 여기는 겁니다.
욥이 이렇게 큰소리치는데 사도행전 9장에서 다메섹에 내려가는 사울이라는 사람이 비슷한 사람이거든요.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열심 내는 것이 이게 뭐가 잘 못 되었느냐. 나는 세상 보는 눈은 정확하다고 생각했던 그 눈, 사울이라는 사람의 눈은 주님 만나고 난 뒤에 잠깐동안 장님이 되고 말았습니다. ‘너는 눈 달고 있을 가치도 없다. 너는 너의 시작도 모르잖아’ 시작 모르는 것은 끝을 모르는 거고, 끝을 모르면 시작도 모르는 거예요.
드라마 영화 처음부터 안 보고 중간부터 봐놓고 영화 이야기하는 것과 똑같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욥의 이러한 자기 정당성에 대한 이야기는 오늘날 우리에게 많은 것을 이야기해 줍니다. 그 뒷부분에 하나님이 욥에게 하는 이야기를 잘 들어보세요. “네가 천지 창조할 때 너 거기 있었어?”라고 물어요. 하나님께서 너는 이게 나쁜 짓이고, 너는 뇌물 주었고, 너는 비겁하게 말해야 할 때 입을 다물었다고 하시는 것이 아니에요. 출제를 욥이 출제하고 하나님이 답변하는 것이 아니고 출제 자체가 답변할 건더기도 없는 것을 너는 출제해 놓고 자기는 거기에 정답이라고 옳다고 우긴다고 욥에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의 출제는 뭐냐 하면 “별 만들 때 북두칠성 만들 때 너 거기 있었어?”라는 이게 문제입니다. ‘없었습니다’라고 말도 못 하죠. 그냥 입을 꽉 다물고 있죠. 입을 다물 때는 두 가지 경우가 있죠. 너무 부끄러워서 입을 다물 때가 있고 분노를 내재적으로 참는다고 억지로 이빨 부러질 정도로 입을 다무는 경우가 있어요. ‘나는 너와 이야기 안 해’라는 식으로. 욥은 부끄러워서 입을 다물었겠죠.
‘네가 시작한 것을 네가 모르잖아. 모르면 그동안 네가 안다고 하는 것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거야. 어디서 나온 건방짐이야’라고 되는 겁니다. 그걸 교만이라고 했어요. 하나님도 이야기했고 그 뒤에 32장에 나오는 엘리후도 욥에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교만하고 자기를 의롭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불의하다고 한 사람이라고 32장부터 엘리후라는 친구가 등장하는 겁니다.
이 네 번째 친구는 욥의 마지막에 가면 하나님으로부터 죄 있다고 인정하지 않고 욥이 제물을 드릴 대상에서 빠져있어요.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친구는 내가 뭣도 모르고 욥에게 그런 잘못된 이야기를 했으니까 자기들에게 피해를 입은 욥이 자기들을 위해서 대신 희생 제사 드려야 그 친구들은 용서를 받아요. 그러나 네 번째 친구는 욥과 관여할 필요가 없어요. 결국, 네 번째 친구 엘리후는 하나님이 직접 투입한 사람이라고 보면 됩니다.
욥의 처지에서 보면 인간이 알 수 있는 모든 것은 욥은 일단 다 안다는 것이 욥의 자세입니다. 그런데 이 천지창조의 시작과 끝을 모르고 있죠. 그러면 시작을 모른다는 것이 무슨 뜻이냐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창조의 원리 원칙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냥 만들어진 것이 아니에요. 세상의 모든 것은 그냥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안에 이 세상의 끝을 향하여 질주하는 원리 원칙이 들어있는 겁니다.
인간이라는 것은 처음도 모르고 마지막을 모르니까 처음도 모르고 처음도 모르니까 중간의 원리 원칙도 놓쳐버리고 그러면서 남는 것은 역사와 전통이라는 것이 있어서 인간에게 둘러치는 거죠. 인간의 생각, 사유라는 것은 그 범위 안에서 갇힌 채 나오는 것들에 불과한 겁니다. 그 안에서 욥은 열심히 하나님을 찾았어요. 열심히 하나님을 찾는데 사람이 하나님에게 모든 것을 매진하고 열심히 찾을 때는 자기의 육체나 육신에 대해서는 생각을 안 하게 되어있습니다.
사람이 어디 하나에 몰두하게 되면 시간 가는 줄 몰라요. 수학 시험을 칠 때 수학을 좀 하는 학생은 수학 시험 치는 시간이 굉장히 짧습니다. ‘언제 이렇게 됐지?’라고 하면서. 그런데 수학에 대해서 신경질 내는 학생은 수학 시험이 그렇게 지루해요. 참다 참다 못 참아서 이름 쓰고 나가려고 하면 감독하는 쌤에게 걸려서 “야, 네가 양심이 있으면 적어도 10분 뒤에는 나가야지 시험지 받자마자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느그 아버지 뭐 하시노? 맞아 볼래?”라고 이렇게 되죠. 그렇게 시간이 지루한 거예요.
사람이 어디에 몰두하면 시간이 훅 갑니다. 지금 욥은 평생을 하나님께 몰두했어요. 하나님께 몰두하고 하나님 생각만 했기 때문에 하나님 생각한 나에게 어떤 하자나 잘못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욥의 생각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 생각하는 입장에서 하나님의 뜻에 위반하지 않으려고 굉장히 조심스럽게 살았던 것이고 그리고 자기 자식 열 명을 위해서 제사 드리고 한 겁니다.
그런데 아무리 인간이 하나님 생각을 해도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한계를 건드려 버리죠. 그게 뭐냐 하면 육신의 고통이 와버리면 아무리 하나님 생각하고 아무리 생각해도 아픈 것을 어떻게 합니까. 아픈데. 아픈데 장사 없지요. 몸이 아픈데. 고통이란 것은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 욥으로 하여금 하나님 생각을 이제 멈추라는 뜻이에요. 다시 한번 하나님 생각을 멈추고 네가 아는 하나님을 이참에 한 번 달리 생각해 볼 수있는 기회를 주는 거예요.
이것은 인간이 서로 만나고 마주치면서, 다시 이야기 드리지만, 인간이 어떤 새로운 마주침이라고 하는 것은 새로운 다른 사고를 갖고 있는 사람을 만남으로써 알아야 하는데 욥은 그당시 모든 사람에 대해서 모르는 게 없어요. 다 알아요. 위반한 적도 없고.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제가 어릴 때 사회는 도시락에 소시지 가져오고 도시락 밥 위에 계란후라이 얹은 집은 딱 세 집이었어요. 과수원, 술도가, 정미소.
과수원, 술도가, 정미소 하는 집은 그 안방마님도 겨울 되면 하얀 털로 둘러친 조끼를 입는데, 예쁜 색동 조끼인데 하얀 털이 있어요. 요새 그건 무당만 입습니다. 요새 아무도 안 입어요. 저는 저 이쁜 한복 위에 입는 조끼를 구한말부터 입었는지 생각했는데 어떤 드라마를 보니까 세상에 조선 시대부터 그것을 전통적으로 입어왔어요. 그래서 제가 생각한 것은 인간은 시작도 모르고 끝도 모를 때 인간은 그냥 흘러오는 데로 모방과 흉내 내기로 모든 가치를 끝내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흉내 내기, 모방하기 해놓고 뭐가 잘못되었는데?
시작도 모르고 끝도 모르면서 뭐가 잘못되었는데 하는 거죠. 남들 다 하는 거 나도 했는데 뭐가 잘못돼? 유럽 사람들 기독교 국가잖아요. 기독교 국가면 일요일에 문을 연다고요. 독일같은 경우에도 가보니까 땡~땡~종을 치면서 저쪽 성당, 이쪽 성당, 루터교 요란스러워요. 전부 다 종을 치고 문을 여는데 그 시간에 뭘 하느냐 하면 프로축구 게임을 해요. 일요일에.
교회를 안 가요. 처음에 프로축구 할 때 교회 안 오고 경기장 가면 세속적이라고 얼마나 이야기를 했겠습니까. 처음에는 주춤주춤했겠죠. ‘이거, 진짜 신의 노여움을 받지 않을까. 내가 신자고 유아세례 받았고 모태신앙인데 교회 안 가고 축구경기 가면 벌 받지 않을까. 늘 빠지지는 말고 한 달에 한 번은 가자’라는 식으로 주춤주춤하다가 자꾸 모든 사람이 처음에는 평신도만 빠지다가 집사 빠지고 장로 빠지고 목사도 빨리 예배드리고 축구 중계방송 보고 있어요.
아, 이 세대가 흉내와 모방으로 ‘그래도 되는 거구나’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내가 욥처럼 말한다면 “내가 축구는 해도 담배는 안 피웠다”라고 하는 거예요. 내가 축구는 보지만 담배를 피웠거든, 신자가 담배 피웠다고 욕하는 사람 같으면 내가 왕족처럼 해 준다는 식으로 이렇게 나온다고요. 자기가 할 수 있는 역량대로 해놓고 그것이 자기 정당성을 그 시대에 풍토에 맞춰서 그렇게 내가 뭐가 잘못되었느냐고 하는 식이에요.
그렇다면 우리가 오늘 본문에서 알아야 할 것은 뭐냐 하면 과거에서 온 그 시대가 현재, 미래와 다르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과거에 별은 지금의 별과 달라요. 밤에 떠 있는 별도 시간마다 달라요. 그 말은 인간이 본인도 매일 달라져요. 그러면 뭐냐. 어제를 생각했던 어제라는 현재의 내가 보았던 현재와 오늘이 되어서 어제를 바라보는 어제의 모습은 내가 달라짐으로써 다 바뀌어 있습니다.
해석을 새로 해요. 오늘에 와서 어제의 해석을 새로 하고 일 년 전 해석을 새로 한다고요. 내일 되면 오늘 방금 내렸던 해석을 내일 되면 또 뒤집어 버릴 거예요. 또 바꿀 거예요. 바다가 있으면 인간은 고요한 바다처럼 되고자 합니다. 하지만 가끔은 돌고래가 출몰해요. 수면 위로 뛰어오르고 다시 수면 밑으로 빠진다고요. 그처럼 우리는 바다같은 인생을 살면서 뭐가 출몰하고 뭐가 소멸할지 우리는 아무도 장담하지 못합니다.
욥은 지금 자기가 자기 인생은 아무리 돌아봐도 고요한 바다가 자기에게 합당하다고 여겼는데 돌고래같이 자기 육신이 갑자기 아프고 죽어가고 있어요. 이런 문제에서 욥이 신약 입장에서 자기 자신을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게 오늘날 우리보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이에요. 욥은 신약 사람이 아니니까 신약에 있는 우리가 다시 욥을 봐야 해요.
그게 뭐냐 하면 신약에 나오는 성경 말씀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원수를 사랑하라”하는 말씀입니다. 지금 욥의 입장에서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될 수가 없어요. 원수를 사랑해야 한다는 율법의 말씀을 실현할 수 있는 자세가 안 되어있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려면 어디까지 가야 하느냐 하면 자기가 메시아를 만나야 해요. 메시아를 만나고 마지막을 통해서, 다시 이야기할게요, 오늘이 되면 어제를 재해석하듯이 마지막 세상 끝에 가서 지난날 모두를 다시 해석해야 만이 비로소 내 인생에 대해서 눈이 확 뜨이는 겁니다.
사도행전 9장에서 다메섹에 가는 사울이 주님 만나고 난 뒤에 알게 된 것은 자기가 장님이 된 후 알게 된 것은 사도바울 내가 실체가 아니라는 겁니다. 실체는 예수님이 실체예요. 유령처럼 부활한 예수님이 실체이지 내가 실체가 아니에요. 그런 사도바울 나는 뭐냐. 주님이 주인공이 된 스크린의 이미지가 영화 스크린에 비칠 때, 밤하늘에 별이 박혀있는 궁창 전체를 스크린으로 본다면 비칠 때 박혀있는 그것이 바로 내가 아니고 예수님의 이미지로써 나라는 사실을 사도바울의 편지에서 그걸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게 나의 마지막 모습이에요. 나는 없고 예수님의 일부예요.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한 것이 율법의 일종이거든요. 원수를 사랑하라고 할 때 이거는 공자의 말과 다릅니다. 공자는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공자 왈(曰), 원수를 만들지 말라’라고 했습니다. 원수를 만들면 인생이 자꾸 고달파지니까요. 아예 원수 안 만들고 친하게 지내는 것이 너에게 이익이 된다는 거예요. 그러나 성경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어요.
원수가 없는 것이 아니고 내가 너에게 원수를 계속 만들어 줄 테니까 만들어 주는 족족 네가 사랑하라는 겁니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지금 욥은 자기가 할 수 있는 괜찮은 거, 착한 일, 본인이 출제하고 본인이 정답이라고 우깁니다. 그러나 주님이 출제자인 것을 욥은 생각을 못 하고 있어요. “네가 북두칠성 만들 때 어디 있었느냐?”라는 질문이나 “원수를 사랑하라”라고 이야기하는 거나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라는 말씀에 욥은 지금 다 걸리는 거예요. 안 걸리는 것이 없습니다. 이거 모르니까 욥이 말이 왜 그리 많은지.
32장부터 갑자기 욥은 할 말을 잊어요. 할 말이 없어요. 부끄러워서도 그렇지만 신약적으로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나라는 것은 망각하라고 있는 겁니다. 잊으라고 있는 거예요. 내가 지금까지 나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내가 나에게 남이 되어야 해요. 여러분들이 부부 문제에 있어서 해결점이 뭐냐 하면 ‘나는 아내와 하나이다. 나는 남편과 하나이다’라고 하는데 그렇게 되면 부부 사이가 골치 아파요.
아내는 남이고 남편이 남이라고 했을 때 여기서 고마움이 생기는 겁니다. 아시겠지요? 남이에요. 남인데 왜 살아주는지 고맙기 그지없는 거예요. ‘아주머니 누구신데 밥을 해 줍니까?’라고 이렇게 되어야 해요. ‘당신이라는 남자는 뭔데 나에게 월급을 가져다 줘? 내가 노동하지 않았는데 네가 노동해놓고 돈을 왜 나에게 가져다 줘? 당신 미쳤어?’라고 이렇게 되어야 해요.
자식도 마찬가지예요. ‘부모님이 누구신데 세상에 저에게 밥을 해주고 공부를 시켜주고 학원 보내고 춥다고 내복 입혀주고. 누구세요? 왜 이렇게 저에게 잘해주는 거예요’라고 하는 그런 가정 보면 소원이 없겠다. 저에게 왜 잘해주는 겁니까? 주님께서 욥에게 이런 고통을 주는 것은 옛날 기원전 570년경, 이탈리아 남쪽 시칠리아섬에 팔라리스 황소라는 것이 있었는데 이게 뭐냐 하면 폭군같은 왕이 자기가 얼마나 무섭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서 ‘나에게 대들면 이런 형별을 받는다’에 적합한 지독하게 공포스러운 형벌도구를 만들라고 당시 아테네에서 유명한 펠리라우스라는 과학자에게 명령했어요.
그렇게 해서 만든 것이 팔라리스 황소인데 놋쇠로 만든 황소 안에 죄수를 가두어두고서는 놋 황소 바깥 밑에서 불을 피워 죄수들이 서서히 신음하면서 죽게 한 구조로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공포심을 극대화하려고 속에 금속관을 집어넣어 죄수의 최후의 고통 소리를 바깥사람들이 듣도록 한 잔인한 장치였습니다. 거기에서 관악기라는 것이 유래했다고 하는데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바로 안 죽고 고통스럽게 죽는 겁니다. 그 팔라리스의 황소에 제일 먼저 죽은 사람이 제작한 과학자가 제일 먼저 죽고요, 그다음에 명령한 팔라리스 왕이 죽게 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욥 자체를 그 팔라리스 황소가 되게 하는 거예요. 해결은 안 나고, 하나님은 잘 믿는데 내가 이렇게 지옥 갈 자들이 받는 저주를 온몸으로 받고 있으니까 욥은 본인의 육신 자체가 형벌이에요. 저주를 받고있는 거예요.
이것은 마지막에 올 십자가라는 하나님이신 예수님 자신이 스스로 받은,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저주를 내려버린 그 십자가 형틀을 미리 욥이 받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욥은 시작도 모르고 끝도 모르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욥이 곧 끝이고 욥이 바로 인간의 시작이었던 거예요. 욥은 그것을 전통에서 찾은 겁니다. 세상 돌아가는 환경 속에서 찾은 겁니다. 내가 뭐가 잘못되었습니까.
욥 너에게 하나님 내가 손댔다는 그 자체, 욥이라는 것을 만든 장인, 하나님인 내가 욥 네가 고통받는 것처럼 나도 죄 없는데 고통받는 십자가 형틀을 내가 나중에 이 땅에 와서 짊어질 거야. 그 이야기가 바로 히브리서 12장 4절에 있습니다.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 죄라는 것은 인간을 둘러싼 전통과 환경이죠. 죄는 환경에서 나온 전통을 말합니다.
피 흘리기까지 싸우지 않았다. 이거는 예수님만 싸운 거예요. 예수님만 싸우고 다른 사람은 싸운 적 없어요. 욥처럼 맨날 내가 뭘 잘못했냐는 식이죠. 하나님은 이 자아라는 것은 죽어 마땅한 것이라고 십자가를 통해서 이미 마지막 모습, 우리의 진짜 찐~찐 모습을 먼저 시범적으로 보여줬잖아요. 내가 문제라고. 내가 나에게 남이 되어야 하는데 내가 나에게 주인이 되고 만 거예요. 맨날 하는 이야기가 ‘내 인생 왜 괴롭게 하십니까’만 하는데.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자신을 죽을 몸으로 만들어놨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이런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죽은 몸이기에 표정이 있다. 주께서는 그 표정을 끄집어내시는 거예요. 그 표정들이 뭐냐, 이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을 죽일 수밖에 없는 그러한 죄의 속성을 낱낱이 끄집어내는 그것이 우리가 참 힘든 인생을 살아가면서 나타내는 표정들입니다.
조금 좋으면 좋다고 까불까불, 드디어 삼성이 프로에서 1등 했다고 대구 삼성 팬들은 좋다고, 그렇게 조금만 좋은 건더기 있으면 좋다고 하고 조금만 실망하게 되면 삐지고, 내년에 누가 삐지고 누가 웃는지 한번 보자고 우격다짐하고. 우리는 흉내 내고 모방하는 그 방법 외에 아무것도 없거든요. 아무 해결책이 안 됩니다. 사과하려거든 개에게 사과하세요. 우리는 어떠한 사과할 마음도 없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해답은 바로 신약에 하나님이 직접 오셔서 인간이 해내지 못한 것, 바로 죄와 싸워서 이긴 사람은 나밖에 없다는 주님의 그 피의 효과가 욥조차도 구원하고 오늘날 우리도 구원하는 겁니다. 사도바울은 자기가 실체가 아니에요. 실체는 주님이고 자기는 주님이 이 땅에 있는 이미 죽은 몸이지만 주님의 표정과 나의 육적인 표정이 함께 드러나는 그걸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나에게 일방적으로 임했다는 것을 주님이 그렇게 구원해 내셨다는 것을 증거 하는 일, 그게 욥의 일이고 오늘날 우리들의 일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욥이 보통사람 아닌 것을 우리는 짐작했습니다. 그런데 뭣이 욥의 문제이며 또한 우리의 문제인가는 십자가를 통해서 그 내막을 통해서 연결해 봐야 비로소 드러나는 사실이기에 오늘날 성령을 주셔서 십자가 안에서 이러한 기쁜 소식과 우리 자신의 본질이 드러나는 것을 감사히 받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