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지옥생활
2021년 10월 3일 본문 말씀: 욥기 31:9-15
(31:9) 언제 내 마음이 여인에게 유혹되어 이웃의 문을 엿보아 기다렸던가
(31:10) 그리하였으면 내 처가 타인의 매를 돌리며 타인이 더불어 동침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31:11) 이는 중죄라 재판장에게 벌 받을 악이요
(31:12) 멸망하도록 사르는 불이라 나의 모든 소산을 뿌리까지 없이할 것이니라
(31:13) 남종이나 여종이 나로 더불어 쟁변할 때에 내가 언제 그의 사정을 멸시하였던가
(31:14) 그리하였으면 하나님이 일어나실 때에는 내가 어떻게 하겠느냐 하나님이 국문하실 때에는 내가 무엇이라 대답하겠느냐
(31:15) 나를 태 속에 만드신 자가 그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우리를 뱃속에 지으신 자가 하나가 아니시냐
가진 자로서 욥은 자신의 기억을 좋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복받은 상황이라고 여기고 지금의 형편의 고통스러운 환경은 복이 아니라고 간주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데서 욥의 한계가 드러납니다. 인간의 세상관은 그림 액자처럼 제한한 공간으로 형성되어 있습니다. 거기서 자신의 위치를 찾으려고 합니다.
이게 바로 ’좌표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좌표계‘란 지형상 가로와 세로가 그어졌다고 상상하고 그 상상된 촘촘한 만남의 점들로 자신의 위치를 파악하는 겁니다. 이것은 평면적으로 그러한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이런 좌표를 가지고 자신의 위상을 정하려고 합니다. 소위 ’계급‘이라고 하는 겁니다.
욥은 사회적 직위상 최고 부유층에 해당됩니다. 거부이지요. 많은 농토를 관리하고 경작하기 위해 많은 일꾼들과 그 가족들도 필요했을 것입니다. 바로 이들 종들이나 다른 여인에게 자신은 마음 빼앗기지 않았다고 자기를 평가합니다. 이것이 욥의 세상관입니다. 프레임, 곧 인식의 틀입니다.
즉 자신의 위치에서 자신은 최선을 다해 상대를 무시하지 않고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자신에게 준 여인말고 다른 여인을 더 갖겠다고 욕심내지 않았다는 겁니다. 즉 욥은 의로운 사람은 남들보다 많은 것을 소유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여기는 세계관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집에 벤츠가 있는데 벌써 3년이 지났지만 자신을 불평하지 않고 신형 벤츠를 또 구입하지 않고 그냥 3년 전의 것을 타고 다니는 겸손함을 보인다고 남들에게 자랑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욥이 과거에 자신이 대단한 칭송과 부를 누렸다는 사실에 대해서 자신의 선함으로 인해 얻은 당연한 대가로 여기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즉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 알지 못하고 과거의 것을 바탕으로 장래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인간들은 소망은 자꾸만 미래에다 둡니다. 스스로 ’최후의 인간‘으로 나아가는 식으로 살아갑니다. 문제는 그 ’최후의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늘 미지의 사항으로 남겨지고 있다는데 있습니다. 따라서 지금 자신이 붙잡고 있는 삶의 원리를 그냥 붙들고 있으면 뭐라도 될 것이라고 여깁니다.
욥은 신약의 성도들이 어떤 자들인가에 대해서 전혀 아는게 없습니다. 그 증거가 욥기 31:15에 나옵니다. “나를 태 속에 만드신 자가 그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우리를 뱃속에 지으신 자가 하나가 아니시냐” 즉 욥은 종에 대해서 나름대로 잘 해주는 근거가 바로 이점입니다. ’네나 나나 모두 하나님께서 친히 만드셨다‘는 겁니다.
그러나 신약에 들어오게 되면, 기존의 인간들 말고 따로 주님이 만드시는 새로운 피조물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기존의 인간들이 만들어졌던 그 원리와 다른 원리로 만들어집니다. 기존의 아담 계통의 인간들은 만들어졌을 때부터 ’소유 의식‘으로 무장되어 있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가 인간 밖에 있었지만 인간은 자기 내부로 집어넣었습니다.
처음 인간은 아무 것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뭐든 하나님 보시기에 필요하다고 여기는 것은 하나님께서 다 제공해주셨습니다. 단, ’하나님께서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에 국한됩니다. 그러나 범죄한 아담의 후손들은, ’하나님이 필요하신 것‘ 말고 ’본인이 필요한 것‘을 자기쪽으로 자꾸 채우려고 합니다.
이러다 보니 과거의 좋았던 그 시절에 가졌던 것들에 미련 두기 마련입니다. 그런 좋은 것들은 욥이 생각하기에 자신이 나쁜 짓을 하지 않는 한 안 빼앗긴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러니까 욥은 줄곧 ’소유‘를 통해서 자신의 의로움과 악함을 구분지으려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선악 프레임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살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소유해서 형성된 그 자기를 진정한 자기라고 여기는 것은 일종의 정신병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정상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어떤 임금님이 있습니다. 그는 자신을 그 나라에서 모든 권력을 가지는 것이 마땅하고 신하들은 무조건 왕 자신의 비위를 맞춰 주는 것이 당연한 임무처럼 여겼습니다.
어떤 옷 만드는 재단사가 이런 임금을 골탕 먹이기 위해 속이 훤히 다 들여다보이는 얇은 옷을 지어서 임금에게 입히면서, “이 세상 어디에게 찾아 볼 수 없는 최고의 옷입니다”고 치하합니다. 그리고 신하들보고 확인해 보라고 말합니다. 신하들이 임금님은 새 옷을 보고 무조건적으로 ’좋은 옷‘이라고 칭찬이 자자합니다.
하지만 임금님은 순진한 어린아이의 마음까지 권력으로 누를 수 없습니다. 어린 아이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 임금님은 벌거벗었다”고 말입니다. 이 세상의 프레임에서는 권력 가진 자가 서열상 최고층에 포진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그들과 같은 마음이 안 되면 결코 그들이 누리는 성공에 합류될 수 없습니다.
욥이 보기에 이 세상의 모든 재물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질 때, 하나님께서 어떤 원칙에 준해서 주시는데 그것이 바로 착한 자에게는 많은 재물과 가정의 행복과 건강을 주신다는 겁니다. 욥에게는 어린아이가 보는 순전한 눈을 가진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바로 ‘이 세상이 파괴되고 난 뒤의 새로운 세상’의 원리에 해당되는 사람의 눈입니다.
하나님께서 개개인을 평가하시는 식으로 찾아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아예 다른 프레임(틀)으로 짜여진 세상을 갖고 오십니다. 좌표계란, 개개인의 사정이 전체 질서를 잡는데 참여되는 입장에 있다는 겁니다. 즉 따로 ‘나의 것’을 프레임에서 떼 낼 수가 없습니다. 프레임 자체가 그런 의도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기존 세계의 기억을 갖고 있는 욥의 입장에서 어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의로움을 돌아보사 거기에 합당한 것을 복으로 보상해 주기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존 세계관은 새로운 세계관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지옥’으로 전환됩니다. 따라서 기존 세계관을 진리라고 여기는 자들은 이 세상을 살면서 ‘슬기로운 지옥생활’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신세계는 예수님의 고난을 중심으로 형성된 세계이며 성도는 그 세계의 재료로 가담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결코 자력으로 자리에게 일어나거나 눕거나 밥을 먹을 힘도 허용받지 못했습니다. 모두가 주님께서 이끄시는 기적의 순간입니다. 따로 자기만의 세계를 구상하기 위해 망상과 망상으로 대체하면서 도피하는데 급급하면 아니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내가 견디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모든 것을 십자가 의미로 모아지게 하심에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103강-욥기 31장 9~15절(슬기로운 지옥생활)211003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욥기 31장 9~15절입니다. 구약성경 789페이지입니다.
“언제 내 마음이 여인에게 유혹되어 이웃의 문을 엿보아 기다렸던가, 그리하였으면 내 처가 타인의 매를 돌리며 타인이 더불어 동침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는 중죄라 재판장에게 벌받을 악이요, 멸망하도록 사르는 불이라 나의 모든 소산을 뿌리까지 없이할 것이니라, 남종이나 여종이 나로 더불어 쟁변할 때에 내가 언제 그의 사정을 멸시하였던가, 그리하였으면 하나님이 일어나실 때에는 내가 어떻게 하겠느냐 하나님이 국문하실 때에는 내가 무엇이라 대답하겠느냐, 나를 태속에 만드신 자가 그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우리를 뱃속에 지으신 자가 하나가 아니시냐”
욥은 부자였기 때문에 그에게는 많은 종이 있었고 종의 아내들도 있었습니다. 부자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한집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면서 욥은 자기 자신을 이렇게 돌아봅니다. 내가 남의 아내 탐내지 않았고 내 종들에게 갑질하지 않았다. 내가 종들에게 함부로 하지 않는 이유가 뭐냐 하면 나는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나를 만드신 분도 하나님이고 종들을 만드신 분도 하나님이니 같은 하나님이 만드신 그들을 내가 어떻게 함부로 대하고 무시하겠냐고 합니다.
내가 당한 이 어려움을 너희들은 내가 죄지어서 벌 받는다고 자꾸 몰아세우는데 나도 그렇게 이해하고 싶지만 아무리 봐도 나에게는 흠잡을 것아 아무것도 없는데 흠잡을 것이 없는 것을 가지고 벌 받았다는 이유 때문에 그 벌과 흠을 억지로 연결시키기 위해서 없는 잘못을 일부로 끄집어 낼 수는 없지 아니한가. 이 답답함을 너희가 좀 알아줘. 이런 식으로 하소연하고 있습니다.
욥은 마치 요새 식으로 하면 집에 에스컬레이터가 자꾸 고장 나고 집에 있는 네 번째 벤츠가 자꾸 바퀴에 바람이 빠지는데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 벤츠를 무시하고 그러지는 않고 ‘우짜노, 내가 그냥 타고 다녀야지. 3년이나 지난 벤츠를 내가 아직도 무시하지 않고 타고 다녔다. 다른 사람들은 전부 다 신형이고 신상 벤츠 탔지만 나는 3년 지난 것을 타고 다녔다. 왜? 저 벤츠나 이 벤츠나 전부 한 공장에서 나왔기 때문에’라는 이야기로 들리는 거예요.
나에게 종이 많은데, 요새 말하면 정원사도 많고 일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내가 그들을 무시하지 않았다. 그들도 다 하나님이 만들었기 때문에. 그래서 자기는 지금 노동문제에 대해서 어떤 하자도 없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내가 그들을 먹이고 살리고 했기 때문에. 그리고 여기에 9~10절에 보면 “언제 내 마음이 여인에게 유혹되어 이웃의 문을 엿보아 기다렸던가, 그리하였으면 내 처가 타인의 매를 돌리며 타인이 더불어 동침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내가 다른 기혼녀에게 마음을 빼앗겼으면 내가 정말 그렇게 마음을 먹었다면 내 아내도 남에게 빼앗겨서 동침해도 내가 할 말이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여성가족부에 의하면 이것은 철저하게 욕 얻어먹을 거예요. ‘아내가 네 것이야? 아내가 남편 꺼야? 이거 왜 이래?’라고 이런 식으로 욕 얻어먹을 거예요. “내가 남의 아내를 탐내지 않았다. 정말 탐냈으면 내 아내 누가 가져가라”라고 하면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는 줄 알아요?
그거 뭔데 가져가라고 하나? 내놔도 안 가져가요. 내놔도. 내놓고 싶기도 해요. ‘아무나 처리해 가라. 많이 살았다. 이제 고만 살자. 누가 와서 가져가서 동침했으면 좋겠다’라고 해도 안 가져가요. 고물이라고 안 가져가요. 그러니까 욥의 이 사고방식, 이걸 경상도 말로 시근머리라고 하는데 이 시근머리를 아주 고상하게 표현하면 욥은 프레임이 다르다. 그림같은 것을 둘러싼 액자 틀 있죠? 그게 프레임입니다. 그걸 더 어렵게 하면 좌표계라고 합니다. 좌표계.
인간은 어떤 지점에 있으면 자기가 어디있는지 전체 좌표계를 펼쳐놓고 ‘X = 6, Y = 7’ 이런 식으로 동서남북 따져서 내가 이 지점에 있다고 하는 거예요. 이건 지형적으로만 그런 것이 아니고요,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의 수입, 자기 자산, 재산같은 것도 좌표계로 설명하는 거예요. 우리나라 건강보험료 기준으로 소득이 80% 아래쪽이 되지 못하고 위쪽에 있는 사람은 재난지원금 한 사람당 25만 원을 받지 말라고 했을 때 어떤 사람은 그걸 아주 자랑을 하고 있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상위 20%는 진골이고 아래쪽은 평민. 갑자기 재난지원금 못 받는 사람은 이 세상을 인도하고 지도하고 있는 엘리트계층에 속하고 아래쪽은 평민들이에요. 그냥 평민이 아니죠. 무식한 평민들. 우리가 주는 대로 먹어야 할 평민들. 20% 이상은 ‘음메~기살아’이고 아래쪽은 ‘음메~기죽어’ 그게 좌표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욥에게 고난을 줄 때는요, 고난 중심의 새로운 좌표계를 하나님께서 제시한 거예요.
지금 욥의 이 주장은 철저하게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을 때 있던 그 시근머리, 그 세계관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그게 어디 나오냐 하면, 아주 어려운 말인데 15절에 나옵니다. “나를 태속에 만드신 자가 그(종들)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우리를 뱃속에 지으신 자가 하나가 아니시냐” 그러니까 한 분이 만들었다는 거예요. 이게 욥이 잘못된 겁니다. 한 분이 두 종류를 만든다는 생각을 상상도 못 한 거예요.
모든 인간은 하나님이 하나로 만들었습니다. 그 말은 맞습니다. 그래서 욥은 자기가 선하면 복 받고 나쁜 짓 하면 벌 받는다는 이 전체가 지금의 이 원리원칙도 맞고 이 우주가 사라지고 세상에 종말이 와도 그 원칙은 그대로 간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런데 욥은 마지막 그 위, 위, 그러니까 마지막 그다음의 세계에 대해서 전혀 아는 것이 없었습니다. 선하면 복 받고 악하면 벌 받는다를 계속해서 간다고 생각해요.
지금의 내 모습이, 지금 내가 속해있는 이 세계가 내가 최후의 인간이 될 때도 동일한 좌표계, 동일한 환경이 유지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중간에 하늘에서 누가 와서 이 좌표계를, 인간이 생각하는 선악 체계를 빵구를 내고 완전히 뒤집어 버릴 다른 세계가 온다는 것을 욥은 상상도 못 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이 만드신 거 맞습니다.
그런데 모든 인간을 만드시고 모든 인간에 속하지 않는 다른 인간도 만드셨어요. 욥은 거기에 대해서 모르는 겁니다. 욥은 자기를 중심으로 해서 모든 의미를 발산하고 있습니다. 발산(Divergence)하는 거죠. 자기로부터 풍기는 거예요. 그래서 자기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은 뭐가 궁금하냐 하면 최후가 궁금해요. 그래서 인간은 최후의 인간이 되려고 굉장히 노력하거든요. ‘마지막 때 잘 봐라. 마지막에 내가 이런 인간이다’라는 것을 사전에 예측하고 싶어 하는 거예요.
막 노력하고 달려가죠. 그런데 지금의 이 인간이 어디에 속하느냐 하면 기존의 좌표계, 기존의 하나님께서 버릴 카드, 버릴 패, 멸망시킬 상황 안에서 같이 놓여있는 존재라는 것을 욥은 몰라요. 좌표라는 말이 여러분 보기에는 쉬워 보이지만 어려운 이유가 제가 좌표계라는 말을 쓰는 이유가 내가 여기 있고 둘러싼 상황, 이러한 환경으로 되어있다는 뜻으로 말한 것이 아니고 그 환경 자체가 나를 위해서 환경이 있는 것이 아니고 환경 자체를 구성하기 위해서 내가 거기에 하나의 좌표로 끼어들고 있는 거예요. 그 말이나 이 말이나 비슷한 듯하지만 같지 않습니다.
소위 ‘너는 분위기 파악을 못 하냐’라는 말을 듣잖아요. 어디 놀러 가면 ‘왜 너는 놀 줄 모르느냐’라는 이야기가 너는 지금 이 환경을 구성하는 한 요소인데 지금 분위가 흥을 돋우고 노는 회식 분위기인데 거기서 지금 찬송가를 부르면 되느냐는 뭐라 하는 거죠. 그것도 “무거운 짐을~ 나 홀로 지고~” 그걸 부르냐고 상사가 회식 온 신입에게 그렇게 이야기할 때 그 말은 지금 환경 속에서 너 자신을 부인하라는 말이에요.
너는 회사를 위해서 존재하지 너를 위해서 회사가 있는 게 아니잖아요. 전에 설교시간에 이야기했는데 또 하려고 하니까 민망해서 못하겠어요. 존 F. 케네디가 한 말이 있죠. ‘국가가 나를 위해서 뭘 해줄까 생각하지 말고 네가 국가를 위해서 뭘 해줄까 생각해라’ 이게 좌표계라는 거예요. 동화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전부 간신배만 있는 나라에 임금이 무서워 아부만 하는 그런 간신배만 있는데 임금의 옷을 만드는 어떤 재단사가 임금에게 엿 먹이기 위해서 임금에게 속옷도 안 입고 있는데 다 비치는 시스룩 옷을 입혀놓고 임금을 놀리는 거예요. “임금님 옷은 이 세상 어떤 임금님 옷보다 최고입니다. 제 말이 안 믿어지거든 여기 영의정, 좌의정, 내무대신 다 있으니 물어보세요”
그러니까 임금님이 안이 다 비치는 옷을 입고, 거의 벌거벗은 건데 그 옷을 입고 “여봐라. 내 옷이 어떠냐?”라고 물으니까 “임금님은 최고입니다. 최고! 딸랑~딸랑~최고입니다!”라고 신하들이 아부한 겁니다. “좀 비치는 거 같은데...” “아닙니다. 전혀 비치지 않습니다. 누가 감히 임금님 옥체를 보겠습니까. 최고입니다” 그러니까 재단사가 속으로 ‘내가 그럴 줄 알았다. 이 좌표계에서 돌아가는 세상 분위기가 내가 그럴 줄 알았다’라고 생각한 거죠.
그런데 거기에 어린아이가 하나 있었어요. 그 아이가 하는 말이 “임금님 벌거벗었는데. 다 비치는데. 벌거벗었어요”라고 말을 한 거예요. 그 임금님에게 진짜 필요한 것은 자기 권세와 현 자리를 옹호해주는 사람이 필요한 것이 아니고 어린아이 눈같이 솔직하게 보는 그 눈이 필요한 겁니다. 인간들은. 인간은 기존의 선악 체제에 있는 좌표계에 물들어서 자기 자신이 누군 인지를 몰라요.
이게 오늘날 이 세상에 우리가 사는 현실입니다. 현실에서는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자기 자리가 없으면 어린아이로 취급합니다. “너 요새 뭐하나? 논다. 그러면 누가 너를 부양하나?”라고 이렇게 되거든요. 이 세상에서는 이 세상에 규칙같은 것이 있어요. 몇 살 때 뭐 해야 하고 몇 살 때 뭐 해야 한다고요. 사람들은 이미 좌표계가 선악으로 되어있어요. 착하면 복을 받아서 잘 된다.
복이 뭔데? 복은 우리가 욕망하는 것이, 그것들이 많이 모여서 밀도가 높아지면 복이고 내가 원하는 것에 대해 밀도가 희박해지면 그거는 저주받은 것이고 벌 받은 것이고 그렇다.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그래서 욥은 왕년에 잘 살았잖아요. 잘 살았는데 어떻게 하나님께서 다 빼앗아 가버린 거예요. 다 빼앗아 가셨지만 무엇을 안 빼앗아 가셨느냐면 과거에 나는 잘살았고 행복했다는 거.
그 행복한 것은 나의 의로움 때문에 행복했다는 그 기억만큼은 안 빼앗고 놔두신 거예요. 그래서 욥은 발악하고 있습니다. 이 좌표계에서, 내가 아는 이 현실 속에서 지금 나는 분명히 죄가 없으니까 언젠가는 나를 빼앗아가신 하나님께서 다시 나를 찾아오시면 이 복을 그대로 다 보상해 주실 것이라고 믿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욥은 행복이 저 멀리 있다고 본 겁니다.
욥은 아예 인간에게 행복은 없다는 좌표계를 몰랐던 거예요. 인간의 이 좌표계는 행복이 없습니다. 사는 거 자체가 저주예요. 행복, 이거는 환상입니다. 이 땅에서 운명을 믿는 것은 환상을 믿는 거예요. 잘~ 될 거야. 어디 백날 기다려 보세요. 잘 되는가. 제가 울산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이 세상 사람들은 천국같은 지옥을 가고 있다고요. 천국을 계속 꿈꾸는데 그게 지옥이에요. 그게 지옥인지를 몰라요.
그저 빌고, 절에 가서 빌고, 교회 와서 빌고, 계속 빌면서, 기존의 좌표계, 기존의 환경 속에서, 내가 행복할 거리를 빨리 회복해 달라고 자기 기억에 근거해서 그것을 원하고 있습니다. 욥이 그대로 다 보여주죠. 행복이 뭐냐. 궁금해요? 500원 안 받고 그냥 알려드리겠습니다. 행복은 뭐냐. 두 다리를 딛고 섰잖아요. 이게 행복이에요. 관절 나쁜 사람은 계단에 못 올라갑니다.
우리가 흔히 아무 생각 없이 그냥 편하게 앉고 일어서는 거, 이거 요양병원에 한번 가보세요. 이거 되는 사람 몇 명이나 되는지. 침대를 못 내려와요. 죽어서 굴러 내려오면 내려오지 그냥은 못 내려와요. 백날 자식 와서 요구르트 준다고 손만 뻗어요. 내려오지를 못하니까. 요양사들이 와서 부축해 주고 “힘내세요. 자식들 왔잖아요”라고 마음에 위로해주면 낑낑거리고 내려옵니다.
물론 그 몸뚱아리는 내용이 아니고 형식입니다. 형식도 너무 많이 튀어 나와서 무거워요. 그럴 때 우리 어머니가 젊을 때 날아다녔다는 거예요. 우리 공부시킨다고 막 날아다니면서 물건하고 장사하고 그럴 때는 팔팔했다는 거예요. 문제는 젊을 때 팔팔했다는 것이 아니고 젊을 때 그것이 행복인 줄 몰랐다는 것이 더 큰 문제가 되는 거예요. 당연하게 걷고 당연하게 잠자리에서 일어나는 줄 알았어요.
그게 아닙니다. 천사가 와서 요양사가 되어서 천사가 받들어서 모셔야 두 다리로 걸을 수가 있어요. 계단을 오를 수가 있다고요.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한 지점에서 한 지점으로 옮기는 이것조차도 주님의 도움 없이는 단 한 순간도 움직일 수 없습니다. 심지어 숨 쉬는 것까지도. 헥~헥~헥. 지금 천사가 도와주는 중입니다. 복이라는 것은 내 요소가 빠지면 빼기 하면 할수록 복은 점점 더 깊어지고 넓어지고 커지는 거예요.
복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고 지금 이 자체가 나한테는 아예 복이 없음을 알 때 살아가는 그 자체가 복으로 느껴지게 되는 겁니다. 그러나 지금 욥은 신약에까지 접근하지 못해요. 욥은 굉장히 슬기롭게 죄 안 짓고 바르게 살려고 애를 씁니다. 그걸 가지고 일명 슬기로운 지옥 생활이라고 하는 거예요. 인간은 규모 있고 예절 바르고 자기 관리 철저하게 하고 아주 슬기로운 지옥 생활이에요.
그렇게 하겠다는 이유가 뭐냐. 내 것을 내가 계속 소지하겠다는 그런 뜻이거든요. 그렇다면 욥의 이 문제, 욥이 제시한 이 의문, 이 모든 것은 욥은 이러한 자기 자신의 모습이, 내가 종에게 함부로 하지 않았고 남의 여자를 보지 않았다는 이것이 네 여자는 내 것이고, 그 종도 내 것인데 내 것을 착한 내 것에 부합되도록 내가 그들을 잘 관리해서 그들을 통해서 나의 착함은 계속해서 저축하듯이 적금 넣듯이 계속 이만큼 모아놓았다는 그 생각, 그 소유적 생각, 그것이 정신병입니다. 그게 바로 마귀 병이에요.
전에 이야기했잖아요. 선악과 따먹을 때 선악 지식을 갖다 버린 것이 아니고 내 것 만들었다고. 저쪽에 있는 선악 지식, 나무에 달린 선악 지식을 나에게 이전시키는 거, 그게 마귀 짓이에요. 에덴동산은 소유할 필요가 없어요. 그냥 다 줍니다. 코로나 양성 걸려서 어떤 건물에 격리되었을 때 거기서 농사를 지을 수 있습니까, 거기서 밥벌이를 할 수 있습니까? 아침 되면 격리된 문 앞에 컵라면부터 해서 간식까지 다 주는데요.
다 줘요. 당신은 밖에 나오지 마라. 다 주는 겁니다. 욥의 문제점은 내 인생은 내가 관리한다는 거예요. 이게 정신병이라는 생각을 상상도 못 한 거죠. 이게 처음 인간이라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처음 인간은 그게 아니에요. 처음 인간은 되돌아갈 수 없습니다. 이미 인간 망쳐버렸어요. 망쳐버린 것을 어떻게 치료하려고 하지 말고 망쳐버린 거 그냥 버려버리세요. 그냥 버리세요.
국 상한 거 또 먹으려고 하지 말고 그냥 버려야 해요. 세균이 득실득실한 데. 신약의 성도, 성령 받은 성도는 어떠냐 하면 언젠가 행복이 올 거야, 보상이 올 거야, 자꾸 따지는데 신약 성도의 시간 개념은 한마디로 말해서 “오늘이 며칠입니까”라고 물으면 성도하는 말이 “오늘은 Someday입니다”라고 해요. 어떤 날이야. 어제도 어떤 날이고 오늘도 어떤 날이고 내일도 어떤 날이야. 왜? 다 환상이기 때문에.
내가 이 세상에 산다는 것이 이미 내가 살고 싶은 대로 가는, 그것을 허용하는 좌표계가 아닙니다. 주님이 새롭게 준 좌표계는 주님의 고난으로 형성되고 구성된 좌표계예요. 일종의 거미줄인데 그 중심에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이렇게 하지 않습니다. “예수 믿고 여러분들이 행복하죠? 예수 믿고 여러분들이 평안하죠?”라고 묻는 것이 아니고 “여러분, 예수님의 십자가를 아십니까?”라고 물어요.
내가 얼마나 편하냐, 내가 얼마나 행복하냐가 아니에요. 내 것을 얼마나 관리하느냐가 아니라 주님의 일에 주님의 자유와 주님 주신 생명에 우리가 거미줄처럼 얽혀서 들어간 거예요. 좌표계라는 것이 뭐냐면 나 위주로 좌표가 있는 것이 아니고 새로 형성된 좌표계에 내가 일부로 참여된 것이 좌표계라는 거예요. 좌표계 형성에 내가 참여된 거예요. 나로 하여금 뭘 갖겠다는 그 자체가 허망하고 그것이 내 것이 아니고 주의 것이라는 거고 따라서 내 이름으로 내 의를 굳이 내가 만들 이유가 없어요. 의로운 인간을 내가 굳이 만들 필요가 없다고요.
이 세상에서 사람들을 가만히 보게 되면 자기 희망이 좌절되니까 그 희망을 다른 희망으로 대체해요. 아내가 뭐라고 하면 또 다른 희망으로 대체합니다. 계속 꿈에서 꿈으로 도피하고 도망치고 있어요. 그러나 신약의 성도는 뭐냐 하면 나는 주님의 재료라는 겁니다. 재료. 대체할 필요 없어요. 이걸 해도 주님의 재료였고 저걸 해도 주님의 재료였어요. 보통 여자들이 결혼해서 잘 나가는 남편을 원하잖아요. 남편이 잘 나가면 그 옆에 있는 아내는 망하는 중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피식 웃으면서 망해도 좋으니 남편이 잘 나가면 좋겠다. 정말 잘 나가는 남편이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여러분은 잘 나가는 남편 없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시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나라도 살아야지 어쩌겠나. 자기 자신의 문제를 본인이 얼마나 이 선악 체제에서 다시 뭔가 문제 있다는 것을 돌이켜 보는 기회를 못난 남편 만나서 그걸 알게 되니 말입니다. 그렇다고 남편에게 고맙다고 하지 말고요. 그것도 감사할 일이잖아요.
끝으로 이 말씀 드리겠습니다. 우리는 언약에 주먹밥이에요. 언약의 주먹밥. 이게 내 것을 따로 뽑아낼 수가 없어요. 주님의 주먹밥이기 때문에 같이 동그랗게 같이 굴러갑니다. 우리는 나 혼자서 단독의 내 인생 없습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주님이 그렇게 굴러가게 하셔서 네가 이루는 인간의 최후 꿈은 선악 좌표 내에 있었던 원래부터 갖고 있지 않아야 하는 정신병 질환이었던 것을 성령을 통해서 오늘 말씀인 복음, 십자가를 통해서 미리 알려주는 거예요. 그렇게 너의 우수함에 애달지 말고 우수함에 목매지 말아라. 너는 주님을 증거 하는 재료다. 이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신약과 구약에 사는 성도의 차이점을 보았습니다. 자기 관리 철저히 하는 것이 숨길 수 없는 본심이고 본능인 것을 저희들이 인정하게 해주시고 이러한 희망 없고 좌절된 저희들을 주께서 어떤 식으로 우리를 안아주시고 사랑으로 용서했는지 날마다 주님의 용서하심에 감사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