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운명과의 싸움

아빠와 함께 2021. 9. 26. 23:48

운명과의 싸움 

2021년 9월 26일                  본문 말씀 : 욥기 31:1-8

(31:1) 내가 내 눈과 언약을 세웠나니 어찌 처녀에게 주목하랴

(31:2) 그리하면 위에 계신 하나님의 내리시는 분깃이 무엇이겠으며 높은 곳에서 전능자의 주시는 산업이 무엇이겠느냐

(31:3) 불의자에게는 환난이 아니겠느냐 행악자에게는 재앙이 아니겠느냐

(31:4) 그가 내 길을 감찰하지 아니하시느냐 내 걸음을 다 세지 아니하시느냐

(31:5) 언제 나의 행위가 허탄하였으며 내 발이 궤휼에 빨랐던가

(31:6) 그리하였으면 내가 공평한 저울에 달려서 하나님이 나의 정직함을 아시게 되기를 원하노라

(31:7) 언제 내 걸음이 길에서 떠났던가 내 마음이 내 눈을 따라갔던가 내 손에 더러운 것이 묻었던가

(31:8) 그리하였으면 나의 심은 것을 타인이 먹으며 나의 소산이 뿌리까지 뽑히는 것이 마땅하니라

사람에게 기대를 걸고 산다는 것은 곧 자기 자신에게 계속 기대를 걸고 집착하는 것을 반영합니다. 욥은 자신에게 어떤 문제가 있다는 것을 감을 잡지 못합니다. 그는 자기 충실성 일변도로 나갑니다. 자기 철저함과 완벽함으로 자기를 사수합니다. 이토록 자기 완벽함으로 나아가는 자들은 ‘착하면 복받는다’는 원칙을 스스로 허물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자꾸만 자기 내부적으로 힘이 모아지니 자신의 삶의 무게는 점점 증강됩니다. 자체 붕괴현상이 일어날 판이다. 욥이 참으로 하나님에게 정당하다면 왜 자신이 순전하다는 사실을 꼭 그렇게 말을 내뱉아야 할 필요가 있을까요? 주님 홀로 알고 계시면 되잖아요. 왜 남들이 다 알아야 될 사항처럼 떠벌립니까?

이것은 욥이 제대로 마음 정리가 되지 않고 있음을 반영해주고 있습니다. 혼란스러워하고 있습니다. 혼란스러우면 그냥 그대로 자신이 무너지면 될터인데 마음은 정돈 안 되면서 자아를 그런 식으로 포기하지는 못하겠다고 나옵니다. 욥이 지닌 모순점은, 자기에 대한 원망이 결국에는 자신이 사랑하는 하나님에 대한 원망으로 이어지는데 그 코스 중간을 자기 힘으로 끊지를 못하겠다는 겁니다.

암벽을 타는 자는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무작정 올라갑니다. 저 최정상의 자리가 아랫 자리보다 더 가치있고 더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줄로 기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막상 암벽타기를 하면서 높은 곳에 올라가면 갈수록 도리어 천장에 가까워질 뿐입니다. 막혀 있다는 절망을 만날 뿐입니다.

오늘 본문 1절에서, 욥은 ‘자신의 눈과 언약을 맺었다’고 말합니다. 이는 곧 자기가 자기와 언약을 맺었다는 말입니다. 바른 것만 보고, 바른 것만 말하고, 바른 것만 생각하고 등등의 바른 생활을 하는 것이 피조물로서 하나님에 대한 마땅한 것이라고 말입니다. 마치 불교의 8정도를 그대로 말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아예 인간하고 언약을 맺지를 않습니다. 인간을 상대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그 어떤 것도 의미있는 것은 없습니다. 즉 ‘인간이 하나님을 믿는 것’과 하나님께서 ‘친히 자기 백성을 이끄시는 것’과 하나님께서는 구분 짓습니다. 이 구분을 인간들이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알려면 욥이나 모든 인간들은 ‘자기 바깥’으로 나와야 합니다. 자기 안에 갇혀서는 이런 사실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역사에서 하나님께서 자아를 자아 속에서 빼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느헤미야 1:8-9에 보면, “옛적에 주께서 주의 종 모세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만일 너희가 범죄하면 내가 너희를 열국 중에 흩을 것이요

만일 내게로 돌아와서 내 계명을 지켜 행하면 너희 쫓긴 자가 하늘 끝에 있을지라도 내가 거기서부터 모아 내 이름을 두려고 택한 곳에 돌아오게 하리라 하신 말씀을 이제 청컨대 기억하옵소서” 느헤미야 총독은 이스라엘 외부에 자리잡은 바사나라에서 파견된 총독입니다. 즉 이는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의 문제를 자체적으로 해결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한 조치입니다.

이는 곧 그동안 이스라엘이 자체적으로 자신을 구원하고 유지하려고 복받을려고 애쓴 모든 것이 다 소용없었다는 말입니다. 우리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은 자기를 지키려고 하다면서 자신의 미래의 운명까지 현재 자신이 미리 조정하고 싶은 생각을 갖습니다. 즉 현재 처신을 잘하면 찬란한 미래가 보장받는다는 원칙을 믿고 싶은 겁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정반대입니다. 미래는 지금의 자아성이 망하지 않고서는 찾아오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욥처럼 자신이 자기하고 언약을 유지하면서 버티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에게서 있어 진리는 이스라엘이 망하는 일입니다. 이스라엘은 망해버려야 더는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을 관리하지 않을 겁니다.

이는 곧 인간은 자신이 자기에게 손을 떼야 비로소 제대로 된 자기를 발견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자신과 언약을 맺었습니다. 그래서 이 하나님끼리의 관계를 이스라엘 역사에게 새겨넣었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됩니다. 일단 이스라엘을 망해서 그 내부를 드러나고, 그 다음에는 완료된 완전한 언약으로 흩어진 이스라엘 모아서 완전한 이스라엘을 수립하는 겁니다.

느헤미야는 그 당시 이스라엘에게, 이스라엘이 망한 이유를 명심해야 한다는 측면에서 율법을 해석하게 됩니다. 즉 “우리들이 망하는 것은 하나님의 정당한 조치였다‘는 겁니다. 즉 망하는 과정을 통해서 비로소 우리는 우리 자신을 바로 볼 수 있는 여지가 생기는 겁니다. 망하기 위해 태어난 우리 자신을 안 망하겠다는 식으로 살아왔으니 자연적으로 자신의 인생을 무거워질 뿐입니다.

자신에 대한 집착이 강렬하면 할수록 자아의 무게는 증가합니다. 이렇게 되면 자기 자신을 괴롭히는 원인이 곧 본인에 대한 과도한 기대에 있는 겁니다. 자신을 대단하게 여기고 무거운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이방민족들이 하는 일입니다. 그들은 경쟁적으로 힘들을 끌어모아 저장하는 식으로 국가를 꾸려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이스라엘에게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자기를 포기하는 변화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이스라엘은 대단히 가볍게 됩니다. 마치 납작한 뻥튀기 과자처럼 되어서 더 이상 자기를 괴롭힐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가벼움이 늘 유지된다는 말은 기존의 자기 잘남을 목표가 제거되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즉 자신이 나서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은 결국은 하나님을 쟁취하는 방식으로 자기 손아귀에 넣겠다는 뜻입니다. 이는 미래의 운명을 자신이 책임있게 관리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 됩니다. 운명과의 싸움은, 그 운명이 제공된 결과를 자신이 저지하겠다고 나서는 바람에 예상보다 일찍기 운명대로 실현되는 결과를 낳게 될 겁니다.

내 자신을 위험에서 지켜보겠다고 나설 것이 아니라 ”내 자식들아, 이 엄마만 믿어. 엄마가 악당들을 물리치고 올게“라는 용감한 외부인의 활약에 맡겨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인간에게는 외부 언약이 필요한 지를 알리기 위해 욥처럼 ’자기와의 언약자‘를 활용하십니다.

인간들의 자기를 위한 모든 노력에는 반드시 욥의 갈등이 피어난다는 점을 알려주시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타인에게 우리 자신의 잘남을 광고하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02강-욥기 31장 1~8절(운명과의 싸움)210926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욥기 31장 1~8절입니다. 구약성경 789페이지입니다.

“내가 내 눈과 언약을 세웠나니 어찌 처녀에게 주목하랴, 그리하면 위에 계신 하나님의 내리시는 분깃이 무엇이겠으며 높은 곳에서 전능자의 주시는 산업이 무엇이겠느냐, 불의자에게는 환난이 아니겠느냐 행악자에게는 재앙이 아니겠느냐, 그가 내 길을 감찰하지 아니하시느냐 내 걸음을 다 세지 아니하시느냐, 언제 나의 행위가 허탄하였으며 내 발이 궤휼에 빨랐던가, 그리하였으면 내가 공평한 저울에 달려서 하나님이 나의 정직함을 아시게 되기를 원하노라, 언제 내 걸음이 길에서 떠났던가 내 마음이 내 눈을 따라갔던가 내 손에 더러운 것이 묻었던가, 그리하였으면 나의 심은 것을 타인이 먹으며 나의 소산이 뿌리까지 뽑히는 것이 마땅하니라”

욥은 자기 눈에 보이는 시선을 자기의 관리하에 있다고 생각하고 여기에 “내 눈과 언약을 맺었다”라고 했어요. 똑바로 옳은 것만 보고, 옳은 것만 생각하고, 옳은 것만 듣고, 옳은 것만 말하고, 옳은 것만 행동하는 거, 마치 불교에 팔정도 비슷한 논리가 여기 나옵니다. 그러면서도 내가 뭐가 잘못되었는가, 내가 옳게 건사해왔는데, 이런 이야기를 하거든요.

왜 그런 이야기를 굳이 친구들에게 하느냐는 겁니다. 옳았으면 친구들에게 입 다물고 주님이 다 알아 모시잖아요. 다 알고 계셔요. 굳이 자기가 옳다고 옳다고 자꾸 주장하는 이유는 이렇게 옳게 살았는데 내 몸은 왜 망가지냐는 어떤 앞뒤가 안 맞는 상황이, 저주받을 자들의 심판을 왜 내가 받느냐는 거예요. 그런데 결국 욥은 하나님 앞에 바르게 살았다고 해놓고는 자기 현재 상황에 대해서 불만을 품는 그것이 하나님 앞에 욕이 된다는 사실을 생각 못 하고 있어요.

욥의 문제점이 뭐냐 하면 자기가 틀릴 수 있다는 생각을 지금도 못 하는 겁니다. 할 수가 없어요. 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걸 한마디로 말해서 욥은 지금 정리정돈이 안 되고 있습니다. 마음 정리가 안 되고 있어요. 욥이 택한 백성이니까 이런 혼란이 주어지는데 만약 택한 백성 아니라면 다른 사람 같으면 욥같은 이런 고민도 없어요.

‘나는 원래 바르게 사니까 이 정도 인생 사는 것은 당연히 내가 받을 복 맞다. 바르게 살았으니까 이 정도 복 받는 것은 하나님께서 정당한 조치를 내게 해주는 거다. 그래서 하나님께 내가 감사하다’라고 지금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모순되거나 혼란스럽다든지 뭔가 앞뒤가 안 맞는다든지 그런 계기같은 것이 없어요.

그래서 여기에 욥이 하는 주장들을 보게 되면 “내가 내 눈과 언약을 세웠나니 어찌 처녀에게 주목하랴”라고 했어요. 욥이 지금 자기 딴에 세상을 안다고 아는데 욥이 자기가 자기를 깨끗하게 보니까 남들도 자기처럼 깨끗하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이게 욥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되지 않는데 여기 처녀가 나와요. 깨끗한 여인, 아무 탈이 없는 여인이라고 그렇게 생각을 하겠지만 인간이 생각하는 것처럼 남들도 그렇게 깨끗하지 않습니다.

본인이 세상에 깨끗한 것만 있다면 세상은 깨끗해지는 것처럼 그런 이론을 펼치는데 세상은 계속해서 사건, 사건이 터지는 이유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공정하고 깨끗하지 않아요. 하나님 보시기에 이 세상 자체가 다 추하고 더럽습니다. 욥은 자기가 깨끗하게 살았으니까 남들도 그런 사람이 있을 거라고 확장 시켜서 이야기해요. 그것은 잘못된 겁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이러한 불만의 요소를 끄집어내는 것은 바로 욥같이 이런 식으로 구원을 받겠다는 것이 사실은 모든 인간이 그러하기 때문에 욥을 대변자로 세웠거든요. 설교 초반이지만 결정적인 핵심을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욥이 뭐가 문제냐 하면 내가 하나님 믿는 것과 하나님이 나를 이끄는 것과 구분을 못 하고 있어요. 열심히 바르게 착하게는 내가 하나님을 잘 믿는 거예요.

그러나 신약에 보면 우리가 하나님 믿는 것을 하나님은 거부합니다. 하나님이 친히 자기 택한 백성을 이끄십니다. 이끄시면서 비로소 무슨 생각이 드느냐 하면 내가 구원받을 사람이 못 된다는 것을 최초로 들게 만들어요. 욥은 ‘왜 나같은 인간에게 복을 안 주십니까? 왜 구원을 안 해주십니까?’라고 하는 것이 구약의 욥이라면 신약의 성도는 반대로 생각해요.

‘그 잘난 사람 놔두고 왜 저에게 찾아오십니까?’라고 하는 거예요. 주님께서 ‘왜? 싫어?’라고 하시면 ‘아니, 싫은 건 아니고요. 너무 그렇게 나가시면 안 되고요. 싫은 건 아니에요. 너무 놀랍다는 이야기죠. 제가 너무 생소합니다. 내가 천국 갈만큼 깨끗하지 못한 것을 내가 너무 잘 아는데 어떻게 저를 구원하십니까’라고 하면 그럴 때 하나님은 욥을 근거로 제시하는 거죠.

31장 1절에 “내가 내 눈과 언약했다”라는 이 말은 내가 내 착함과 내 완벽함과 약속을 했다고 이렇게 되거든요. 신약에서 네가 구원받는 이유는 내가(주님이) 너와 언약을 안 했기 때문에 구원받는 거예요. 내가 너와 상대 안 했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받는 겁니다. 다른 분과 언약을 맺었어요. 주님과 언약을 맺었어요. 그런 예는 요한복음 5장에도 나오죠.

38년 된 병자가 나오는데 38년 된 병자, 37년도 아니고 39년도 아니고 38년 된 병자, 아주 오랫동안 병든 사람, 이 병든 사람은 본인도 그렇고 외부 사람 누가 봐도 저 사람은 가망 없다는 그런 사람이에요. 저 사람은 가망 없다고 그렇게 진단 나고 그렇게 사람들에게 확정 난 그런 자가 바로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받을 평을 그 38년 된 병자가 받는 그런 평가와 동일한 평가로 예수님은 지금 자기 길을 가시려고 하는 거예요.

“너 나와 하나 되자”라는 이런 말입니다. 일체감이죠. 너 나와 하나 되자. 그러니까 38년 된 병자가 군시렁군시렁 “내가 먼저 나가려고 했는데 어떤 사람이 더 빠르게 잘해서 얼마나 빠른지 저는 느림보 되어서 뒤에 가니까 벌써 은혜의 가게가 문 닫아버리고 번번이 실패했습니다”라고 하는 이거는 아직도 내가 먼저 가게 되면 뭔가 낫는다는 거, 자기가 자기에게 처방을 내릴 수 있는 권한이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내가 나를 치료할 수 있고 회복 할 수 있는 방안은 내가 알고 있는 게 맞을 거라는 자기에게 기대를 거는 겁니다. 바로 그것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그렇게 인간은 자기를 몰라요. 자기를 모르는 자에게 주께서 찾아오셔서 ‘아, 나는 알았다’가 아니라 이제는 주님만 누구신지 알면 되는구나. 내가 나에 대해서 굳이 연구해서 알 필요 없이 주님만 알면 되고 예수님만 알면 돼요. 다른 것은 필요 없어요. 일체감을 느끼니까요.

이뿐만 아니고 마태복음 8장에 나오는 문둥병자도 마찬가지예요. 문둥병자가 와서 예수님에게 아주 불쌍한 태도를 보이면서 공손히 하면서 ‘한 푼 주세요’라는 표정을 하면서 ‘예수님은 착한 분이시니 저에게 어떤 혜택을 주시겠지요?’라고 했을 때 예수님께서 일방적으로 그 문둥병자를 낫게 해줘요. 낫게 해주고 뒤에 하는 이야기가 뭐냐 하면 나는 너를 낫게 한 것이 아니고 ‘너 문둥병자이지? 저주받았지? 네가 받을 저주를 내가 가져온 거야’라는 식으로 저주받지 않을 주님이 문둥병자로 변하신 겁니다.

그러니까 문둥병자는 이제 자기 인생이라는 것은 없어진 거예요. 문둥병자에게 일어나는 모든 상황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 지고 부활하신 상황을 거기에 그냥 복사한 거예요. 베낀 거예요. 문둥병의 일대기와 예수님의 일대기가 일치하는 겁니다. 이게 성도의 일대기예요. 욥은 전혀 자기 정돈을 못 합니다. 그저 자꾸 자기 안으로 모아져요.

자기 자신의 상황만 몰두하다 보니까 자기 바깥 세계를 아는 게 없어요. 인간의 바깥 세계라 하는 것은 나는 나뿐이라는 정신을 가지고 관찰하면서 주워 모은 겁니다. 끌어모은 거예요. 인간 세계라 하는 것은 각자 자기 기분 나는 대로만 인생을 살아왔기 때문에 일종에 남과 만나면 내가 한평생 만들어 놓은 딱지와 네가 인생 살아온 딱지와 그 딱지에 그려진 만화캐릭터 가지고 서로 누가 잘났는가 비교하는 식의 인생이에요.

인간 세계라 하는 것은 딱지치기예요. 딱지놀이. 제가 어릴 때 딱지놀이를 많이 했는데 막 치는 놀이가 아니고 서로 그림을 보여주면서 “너 별 몇 개야? 나는 세 개”라고 하면 상대가 “나는 총사령관. 별 다섯 개. 다 가져와”라고 하는 것처럼 그게 커서 어른 되어도 마찬가지예요. 자기 인생 캐릭터 딱지에다가 다 집어넣어서 “너는 무슨 카드 써? 나는 VVVIP카드. 내가 긁을게”라는 식으로 하죠. 그런데 그 딱지에 있는 이미지 그림이 퇴색한다는 거예요. 이게 지워져 버려요.

자기가 자기에게 전부를 걸었는데 전부를 걸은 자기가 위기를 맞이한 거예요. 지워지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욥도 마찬가지로 아주 발악을 해버려요. 내 평생에 이만하기도 힘든데, 이거 가꾸기도 힘든데, 이것에 대해서 아무런 해답이 없는 거, 해결책이 없는 거. 나는 분명히 복 받을 만하다고, 정당하다고 자부한 것이 내가 그린 그림인데, 그 그림과 실제 자신의 인생이 이게 일치되지를 않으니까 여기서 괴리현상이 벌어지는 거예요.

이걸 한마디로 말해서 선악 체계라고 합니다. 선과 악의 균형을 맞춰서 악 쪽으로 안 가고 내가 나에게 약속을 하는 거예요. 절대 악에 물들지 말고 선한 쪽으로 모든 선한 것은 다 하라. 그래서 선한 쪽으로 선과 악의 경계선만 정하고 안심 푹 놓을 수 있게 아예 안쪽으로 선한 쪽으로 푹 들어가서 어지간해서는 악 쪽으로 넘어가지 않도록 너를 잘 관리해라.

이것이 뭐냐 하면 세상을 볼 때 균형 맞추기, 또는 대칭성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 대칭성이라는 말이 굉장히 어렵거든요. 선은 악이 없으면 선이 안 되니까 악을 염두에 두고 선이 선일 때 의미가 부여되니까 인간에게 대칭성이 필연적인 거예요. 내가 잘사느냐 못 사느냐는 스스로 잘 살아서 되는 것이 아니고 못난 사람들을 계속 찾아보는 거예요. 나쁜 짓 하는 사람을 계속 보면서 내가 어느 소속이며 내 위치는 어느 정도며 내 계급은 어느 정도인지를 아는 겁니다.

제가 올림픽 암벽타기를 보는데 선수들이 우리나라 선수들도 참여해서 희망 있다고 해놓고는 메달 하나도 못 따고 올라가는데 올라갈 때는 잘 올라가요. 그런데 올라가니까 위가 구부러져서 천장처럼 되어있어서 다시 내려와야 해요. 지금 욥이 난감해하는 이유가 자기 딴에 암벽을 탔어요.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저 높은 곳을 향하여 계속 노력하고 요새 같으면 가스펠 송만 부르고 팝송도 모르고 유행가도 모르고 젊음의 노트도 무슨 노트인지 모르고 그냥 계속 착한 거, 착한 짓만 하고 올라갔는데 가보니 천장이 있네요.

지금까지 올라온 것이 있는데 이거 아까워서 어떻게 해요. 오가도 못하죠. 주께서 거의 자기는 다 왔다고 천국 다 왔다고 비교해 보니 나처럼 착한 사람 없었으니까, 나에게 주어진 것은 하나님의 복이니까, 복 받을 만한 짓을 했으니 복이 오는 것에 하나님의 공의로움과 정의로움을 자기 몸으로 몸소 실현해 보였다는 거죠. “나를 봐라. 이렇게 착하니까 복 받잖아. 너희들도 힘내. 나처럼 부자 되어 봐. 나처럼 착하게 살면 너희들이 원하는 부자 될 수 있어. 행복해질 수 있어”라고 하면서.

아들이 일곱이고 딸이 세 명이거든요. 전부 다 잘 되었어요. 요새 말하면 전부다 ‘사’자 돌림 직업 가지고. 물론 세신사는 빼고 목사도 빼고 전부 다 잘 되었는데 이게 하루아침에 다 죽네요. 하루아침에 다 나쁜 짓 할 일은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착하면 복 받는다는 룰(rule)이, 평생 자신을 지탱한 룰이 먹히지를 않는 거예요. 인형 가운데 안에 공기를 집어넣는 사람처럼 생긴 인형이 있어요.

공기를 집어넣어서 사람처럼 생겼다고 좋아하지만, 거기에서 단 하나의 바늘구멍만 있어도 다 푹 꺼져버립니다. 뭔가 그럴싸해 보이는 것이 다 꺼진다고요. 30년 공직생활, 40년 공직생활, 흠잡을 데 없이 돈 안 챙기고 전세 생활하면서 오직 국민을 위해서 바르게 공직생활 했으니까 저를 뽑아 달라고 하는데 나중에 어디서 바늘구멍 하나만 터져버려도 그렇게 공직생활 한 거 한꺼번에 뿌지직~~전부 다, 암벽타기고 뭐고 한꺼번에 전부 다 날아갑니다.

욥은 지금 무리하게 자신의 운명과 싸우고 있습니다. 싸움의 대상이 안 되는데 지금 운명과 싸우고 있어요. 짜증을 내면서. 이런 모습이 자신을 좋게 본 모든 인간에게는 결국에 궁극적으로 욥같은 그런 결과에 그런 딜레마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욥이 이렇게 성경에 나와 있는 거예요. 그렇다면 여기서 어떤 해결책이 있어야 하겠지요.

이런 이야기가 있어요. 이것도 운명에 관한 이야기인데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비행기를 같이 타고 가는데 아들에게 저승사자가 아들에게만 찾아와서 “네가 지금 이 순간 오늘 너의 목숨을 가지고 가야 하겠다”라고 하니까 아들이 자기만 보이니까 “안돼! 안돼! 나 죽기 싫어”라고 했다고요. 그걸 보고 옆에 있던 아버지가 자기 아들이 뭔가 영적 기운에 빠진 것을 알고 본능적으로 꽉 안아서 보호해 줬어요. 그렇게 해도 결국 아들은 죽고 말았어요.

왜냐 하면 아버지가 아들을 보호한다고 너무 아들을 꽉 조여서 질식사했어요. 저승사자가 데려간 것이 아니고 아버지가 자기 아들 지킨다고 졸라서 죽게 하고 말았어요. 오늘날 교회 다니는 부모들이 자식들 보호를 이렇게 합니다. “나중에 대학 들어가면 그때 교회 나와라”라는 이런 식으로. ‘하나님이 보우하사’가 아니라 내가 지켜줄게. 사람이 사람을 욕할 때는 주춤해요. 욕한 거 나중에 보복 들어가는 식으로.

그런데 사람들이 하나님 욕하는 것은 아무 부담을 느끼지 않습니다. 만만해요. “그냥 나중에 믿으라니까. 우선 수능 잘 쳐야지”라고 하는데 그게 자기 아이를 자기가 죽이는 거예요. 그 말은 뭐냐 하면 하나님 입장에서 볼 줄 모르는 거예요. 욥도 마찬가지예요. 자기 입장에서 ‘나는 아이가 예수 믿게 하려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자기가 안 믿는 것을 가지고 나보고 어쩌란 말입니까’라는 이게 결국은 뭐냐 하면 ‘나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러니까 아이가 지옥 가는 것은 나는 모르겠고 아이에게 교회 가라고 여러 번 이야기한 나는 지옥 보내지 마시옵소서, 주여. 나는 복음 전했어요. 자기가 성의가 없어서 안 받는데 뭐 어쩌란 말입니까’라고 하는 것은 결국 누구 탓이냐면 성령 안 주신 하나님 탓이에요.

하나님은 왜 성령 안 주시느냐고 자기가 하나님에게 손가락질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 본인이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어떤 경우라도 알 수가 없어요. 역시 해답은 구약 이스라엘로 돌아가야 해요. 왕짜증만 올라오죠. 느헤미야 1장 8~9절에 보면 “옛적에 주께서 주의 종 모세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만일 너희가 범죄하면 내가 너희를 열국 중에 흩을 것이요, 만일 내게로 돌아와서 내 계명을 지켜 행하면 너희 쫓긴 자가 하늘 끝에 있을찌라도 내가 거기서부터 모아 내 이름을 두려고 택한 곳에 돌아오게 하리라 하신 말씀을 이제 청컨대 기억하옵소서”

느헤미야라는 사람이 총독이거든요. 총독이 자기가 이스라엘 옛날 하나님이 싹쓰리한 곳에 돌아온 이유가 이건 내가 가고 싶어서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가 자기에게 하는 언약을 이루는 절차 중의 하나가 나를 여기 총독으로 파견했다고 이야기해요. 그러니까 시작을 ‘내가 뭐가 잘못되었는데. 나는 정당합니다’라고 시작하는 것이 아니고 말씀부터 시작해요.

사람들은 어떤 냄새를 맡으면 냄새를 맡는다고 하잖아요. 냄새를 맡는다는 것보다 더 절실한 표현이 있어요. 냄새를 먹는다는 표현이 더 절실합니다. 인간은 자기가 입체적이라고 생각해서, 맥주캔처럼 자기를 입체적으로 생각해서, 자기 내부를 있다고 생각해서, 자기를 단도리하고 관리에 나섭니다. 그런데 맥주캔을 재활용할 때는 그냥 하지 말고 굴러다니니까 발로 확 밟아 버리죠.

맥주캔을 밟아 버리면 입체가 표면이 됩니다. 입체일 때는 ‘내가 말씀을 지킨다, 안 지킨다, 지킨다...’라는 게 성립되지만, 평면이 되면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그 평면에 말씀을 새긴다는 것이 돼요. 하나의 종이니까. 주님께서는 우리를 평면으로 보고 거기에 말씀을 새기는 거예요. 말씀을 새긴다는 이 말이 뭐냐 하면 느헤미야 입장에서는 내 것이 없다는 거예요. 내 것.

따로 내가 이루어낸 나의 공간은 마치 공기 빠진 인형처럼 푹 꺼져서 3차원이 아니고 2차원처럼 평면이 되는 거예요. 그냥 주님의 빈 노트로 사용하는 거예요. 빈 노트 또 나온다. 주께서 그걸 일기장이라고 생각하고 거기에 새겨주옵소서. 이렇게 되는 거예요. 주님의 자기가 계획한 자기 절차. 자기 절차가 뭐냐 하면 그것이 오늘 본문에서는 욥이 자기가 자기 눈과 언약을 맺었는데 주님은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과 언약을 맺었어요.

욥과 상대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은 자기 아들과 상대하는 거예요. 오늘날 성도도 마찬가지예요. 성도는 아들이 아니고 성도는 양자입니다. 아들 축에도 못 들어가요. 아버지를 알아야 아들이죠. 아버지도 모르는데 만들어졌다고 아들 되고 하는 건 아니죠. 그런 것은 이방 민족이 이방 철학에서 이야기하는 거고요. ‘하나님이 창조자니까 우리는 아들이겠지’라는 이런 거 아닙니다. 그건 피조물이고요. 아들은 따로 있어요.

유대인들도 바리새인들도 아들이 왔는데 아들인 줄 몰랐어요. 왜냐 하면 본인이 본인을 몰라서 본인이 아들인 줄 알았어요. 출애굽기 4장 22절에서 “이스라엘은 내 아들이라”라고 할 때 ‘오케이. 옳다구나. 우리가 하나님 아들이구나’라고 했어요. 그런데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아들이 아니에요. 예수님 중심의 이스라엘은 신약의 마지막 때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준비된 이스라엘 따로 있고 인간들 역사 속에서 가짜 이스라엘 등장했고요. 그걸 광주강의에서 이질성이라고 이야기했어요.

이스라엘을 바늘로 구멍 내듯 찔러버리는 거예요. ‘너는 헛방이다’ 우리에게 바늘로 쑤시며 ‘너는 인간도 아니야. 너는 흙이야. 너는 짐승이야. 너는 개야’라고 하시는 거예요. 그걸 수로보니게 여인에게 하면서 ‘너는 개야’라고 하시니까 여인이 ‘딩동댕~제가 개 맞습니다’라고 한 거죠. 우리는 밟힌 맥주캔이에요. 제가 보기에 욥이 답답한 것은 욥 본인이 본인에게 위협 대상이에요.

자기 인생을 망치는 것은 욥 본인이에요. 제가 어느 강의를 할 때 제가 예상 못 한 말을 툭 던졌는데 사람들이 웃었어요. 뭐냐면 ‘조직 폭력배가 마을 공터에서 싸울 때 1번 벽돌 들고 싸운다, 2번 스티로폼 들고 싸운다, 몇 번일까요’라고 할 때 그걸 듣고 웃는 거예요. ‘아, 이게 웃을 수 있는 이야기구나’ 생각했어요. 깡패가 스티로폼 들고 때리진 않잖아요.

우리는요 주님 보시기에 뻥튀기 과자입니다. 납작한 과자. 뻥튀기 과자 보고 ‘어머머, 너무 무서워요’라고 우는 아이들 봤습니까? 그거 뭐 이빨 안 생겨도 깨물면 녹아지게 되어있어요. 우리네 인생은 비록 원반처럼 생겼지만 가벼운 뻥튀기, 아무것도 아닌 뻥튀기라 때려도 위협이 안 됩니다. 아프질 않아요. 왜? 인생은 헛방이니까요. 인생은 70~80세까지 살아도 헛방이에요.

아무것도 아니라니까요. 자식들도 그걸 알아요. 그래서 추석날 조상 제사 드리고, 1부 예배드리고 2부에서 싸웁니다. 왜? 아버지는 아무것도 아니니까. 그 어머니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내가 죽거들랑 제발 형제간에 싸우지 마라”라고 했거든요. 돌아가시면 헛방이에요. 뻥튀기 말 안 듣습니다. “벌초 누가 할 건데?”라고 방금 추수 감사 예배하고 형제간 싸웁니다.

벌초 누가 할 건데? 1번 안은 돈 가져간 맏이가 한다, 2번 안은 무덤 엎자. 왜냐 하면 맏이가 벌초하게 되면 맏이는 동생들에게 내가 묘지 관리한다는 그걸 위세로 돈을 삥땅을 뜯어내요. 아버지, 어머니 돌아가시고 형이 돈 달라고 하는 것보다 더 귀찮은 것은 형에게 전화 오는 거예요. ‘아예 관계 끊자, 우리. 제발 우리 아는 사이 하지 말자. 아버지, 어머니 있을 때는 구차없이 형제간 만났지만, 아버지, 엄마 돌아가셨는데 이제는 추석이고 뭐고 나도 손자들 있다. 거기도 바빠. 너하고는 아예 만나지 말자’라고 하는 거예요.

촌이야 외삼촌 만나고 하겠지만 도시에는 외삼촌이고 뭐고 안 만납니다. 부모 계실 때는 부모님 봐서 ‘형님 오십니까. 동생아~고생 많았지’ 이런 농심 정신으로 대하지만 그거는 딱 아버지, 어머니 살아 계실 때까지만이고 돌아가시게 되면 같은 도시에 살아도 2년째 3년째 얼굴 안 봅니다. “동생아, 밥 먹으러 얼굴 한번 볼까?”라고 하면 “문화센터 가야 한다”라고 하죠.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안 봅니다.

왜냐 하면 형제간에 못 살면 도와줘야 한다는 심리적 압박감을 느끼기 때문에 그래요. 남이라도 완전 남도 아니고, 결국 관계라는 것은 거래거든요. ‘동생아, 나는 너를 사랑한다’라고 백날 해도 소용없어요. 돈을 줘야 해요. 돈을 줘야 좋은 형님이고 안 주면 나쁜 형님이기 때문에 가만있다가 나쁜 형님 될 일이 뭐가 있습니까. 그냥 안 만나는 것이 좋지요.

그러니 이 세상에서 어떤 인간도 자기 자신을 포기하고 살 위인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욥이 정답이에요. 욥의 이야기가 우리 이야기를 대신해 줍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에게는 어떻게 하느냐. 하나님께서 하나님에게 이야기할 때 어떻게 하느냐는 건데 바로 이겁니다. “엄마가 악당 물리치고 올게”라는 이거. “엄마가 악당 물리치고 올게”라고 어린아이들 옹기종기 세 명이 모여있는데 “걱정 하지마” 엄마가 수퍼우먼이거든요. “엄마가 악당 물리치고 올게”

이 말을 다른 말로 번역하면 “주님인 내가 악당 물리치고 올게” 그 정도로 너는 내 새끼라는 이런 뜻이에요. 이게 이스라엘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이 느헤미야에게 뭐라고 하느냐 하면 주님께서 악당과 결합 된 가짜 이스라엘 보내고 내가 다시 불러 모을 게. 불러 모을 때 뭐라고 불러 모으느냐 하면 네 고민에 대해서 무겁게 여기지 말고 네 자체가 뻥튀기 과자처럼 가볍다고 생각하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같이 느끼지 말고 가볍게 여기고 내가 이끄는 데로 불러주면 구원받는 거예요.

네가 암벽타기 하지 말고 내가 이끌어주고 불러주게 되면 그러면 구원받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가정에 아이들이 있을 때 그 안 믿는 아이들 모습 속에서 자기의 과거 모습을 발견하세요. 자기의 모습을 발견하고 마치 본인이 예수님처럼 된 것처럼 그 아이를 불쌍히 여기면 되는 겁니다. 그 운명을 너무 졸라서 죽이지 말고 그저 불쌍히 여길 수밖에 없어요. 그게 바로 성도가 할 수 있는 복음 전파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늘 우리 자기중심밖에 모르는 인간이 결국 딜레마에 빠진다는 사실을 욥이 대신해서 보여주게 하셔서 감사합니다. 내 문제 내가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자기를 잘난 자로 여기는 모습인지 주께서 새끼 돌보듯이 대신 악당을 물리치신, 다 이루신 그것만이 우리에게 찾아올 때 우리는 솜사탕처럼 뻥튀기처럼 우리 자신이, 우리 존재가, 우리에게 무게감을 느끼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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