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죽음에서의 구원(히 2: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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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 2:14)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히 2: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히 2:16)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히 2:17)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
(히 2:18)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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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길 !!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가셨는데, 그런데 그 길은 예수님만이 가셔야 될 길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가신 그 길은, 성도들에게 본을 끼쳐 그 길을 따라오라고 미리 가신 길이라고 성경은 말씀을 합니다. 그러니 십자가의 길은 예수님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니고, 예수님을 믿고자 하는 자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길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과연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자본주의의 풍요로운 생활 때문에 그런지는 몰라도, 그만 십자가의 길을 잊어버리고 거부하는데, 그래서 십자가의 길을 우리가 가야되는 길이 아닌, 예수님에게만 해당되는 길이라고 여긴다는 말이죠. 그렇게 남의 길인 양 여기려고 한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길을 가신 이유가 오늘 본문에도 있는데, 15절에 보면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라고 한다는 겁니다. 일생 죽는 것을 무서워하는 자기 백성을 위해서, 그들이 더 이상 마귀의 노리개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거기서 벗어나게 해주기 위해서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을 가셨다는 말이죠.
(히 2: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하지만 이런 하나님의 뜻이 사람들에게 잘 먹혀들지 않는데, 오히려 “예수님이 가신 길이 비정상이고 우리가 사는 이 길이 정상이다” 라고 나옵니다. 또한 더 나아가서, “저렇게 사서 고생할 필요가 뭐가 있는가? 요령만 부리면 얼마든지 편안하게 살 수 있는 인생인데, 하나밖에 없는 인생인데, 예수님이 너무 과한 행동을 하시는 게 아닌가?” 라고 하면서 측은히 여기기까지 한다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전혀 다른데, 하나님은 이러한 예수님 일생 이외에 다른 인생은 일체 인정해주지를 않는다는 말이죠. 즉 예수님께서 다스리는 세계 이외에는 다른 세계는 없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런 사실에 대해서 우리 모두가 다들 모르고 있었는데, 우리는 그저 예수님을 불쌍히 여기려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의 길이 사람들이 보기에는 뭔가 잘못된 길로 가는 것 같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 이 길만이 유일하게 부활로 이어진 길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것이 지극히 정상적인 생명의 길이고, 반면에 우리가 가는 길은 죽음의 길이고 지옥으로 가는 길이라는 말이죠.
그것을 예수님은 자기 일생을 통해서 온 몸으로 호소하고 있는데, 그러니 우리는 이런 예수님을 언뜻 이해하기가 곤란하다는 말이죠. 오늘 본문에도 보면 그런 납득되지 않는 대목이 나오는데, 여기에서 14절과 15절을 보겠습니다.
(히 2:14)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히 2: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너희들을 대신해서 내가 죽겠다 !!
조금 전에도 살펴보았지만, 여기 15절에 보면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라고 하는데, 그러니까 예수님은 죽음에 대해서 어떻게 대처를 하셨다는 겁니까? 우리처럼 죽기를 무서워해서 죽는 장소에서 피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만 그냥 죽어버리셨다는 겁니다.
여기에 비해서 우리 인간들은 어떻게 행동을 하느냐 하면, 죽기가 무서워서 자기가 사는 쪽으로 피하려고 한다는 겁니다. 사실은 이게 당연한데, 그러니 예수님과는 정반대라는 말이죠. 어떻게 하면 죽지 않을지, 거기에 힘을 끌어 모으려고 급급해한다는 말이죠. 물론 죽기를 무서워한다는 점에서는 동의를 합니다만, 거기에서 벗어나는 방법에 있어서는 차이가 난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이미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에, 이미 하늘의 지시를 받고 있기에, 영생을 품고 있기에 그냥 죽어버리면 그만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믿는 구석이 없기 때문에, 그래서 죽는 것에서 벗어나려고 아등바등 몸부림을 치는데, 죽음에서 오는 그 무서움을 감소시키는 방향으로 말이죠. ‘나’ 라는 존재가 분해되는 것, 그것은 참을 수 없는 자기에 대한 모독으로 본다는 겁니다.
쉽게 말하면, 예수님은 다 빼앗겨도 괜찮다고 하는, 그런 빼앗기는 재미로 살아가는데, 그런데 우리는 얻고자 하는 재미, 즉 가지려고 하고 획득하는 재미에다가 목숨을 맡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누구든지 얻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잃고자 하면 얻을 것이다” 라고 말이죠.
(마 16:2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우리가 생각하기에 참으로 이상한 말씀인데, 이것을 무엇을 의미합니까? 마귀에 의해서 장악되어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인데,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들이 사는 길은 계속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잃어버려라”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마귀로부터 죽기를 무서워하는 현실 속에서, 유일하게 살 수 있는 것은, 예수님처럼 모든 것을 빼앗기고 잃어버리면 된다는 말이죠.
예수님은 또 말씀하시기를, “내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내 몸을 대속물로 주로 함이라” 라고 하셨다는 겁니다. 사람들에게 아무리 인기가 좋아도 그게 그리 오래가지 않는데, 인기란 허망하다는 말이죠. 그러니 차라리 “이것은 소중해. 이것은 빼앗기기 싫어!” 라고 하는 것이 그만 날아가 버릴 때, 그게 오히려 편하다는 겁니다.
(마 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여러분이 목숨을 걸고 사수하는 것이 있습니까? 차라리 그것마저도 잃어버리는데서 오는 홀가분함을 맛보시기를 바랍니다. 그 홀가분함이 우리는 편하게 해준다는 말이죠. 쥐고 있는 것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힘을 주고 빼앗는 승리감보다도, 차라리 그것이 자기 품에서 날아가는 편이 훨씬 더 낫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럴 때에 “나는 누구의 힘으로, 누구의 은혜로 사는가?” 라고 하면서, 자기 자신을 다시 재조명할 수 있기에 말이죠.
그래서 ‘어리석은 부자’ !!
자기의 귀한 것을 다 잃어버려서 그것을 되찾기 위해서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이 있었는데, 이 사람은 아버지로부터 받도록 기대된 유산을 형에게 빼앗기고 말았다는 겁니다. 이 사람에게 예수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그게 누가복음 12장에 나오는데, “모든 탐심을 물리쳐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않다” 라고 하셨다는 겁니다.
(눅 12:13)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업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
(눅 12:14) 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
(눅 12:15) 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이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생명이란 소유의 넉넉함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라는 겁니다. 그러시면서 예수님께서는 한 예를 드시기를, 어떤 부자 이야기를 하십니다. 그 부자가 소출이 많아서 창고를 다시 크게 짓고 그 안에 곡식을 가득 가득 넣어두었는데, 그리고 말합니다. “내 영혼아, 편히 먹고 마시자” 라고 말이죠.
그러면서 자기 생명도 자기 소유와 함께 비례할 것이라고 여겼는데, 그때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이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하나님이 데리고 가면 저 많은 곡식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그러니 지금 이 부자가 살아가는 방식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어리석은 부자’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눅 12:16) 또 비유로 저희에게 일러 가라사대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눅 12:17) 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눅 12:18)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이 어리석은 부자는 자신의 생명이 창고에 가득한 곡식으로 보호를 받는 줄 알았는데, 그런데 이것이 어떻게 이 부자에게만 국한된 일이고, 그리고 생명을 소유에서 찾으려는 사람이 어떻게 예수님을 찾아온 그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일이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이런 예를 드신 것은, 인생을 살아가는 방식 자체가 그만 틀려먹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라고 하는 본문 말씀이 여기에 있는 이유는, 우리가 우리의 사고방식과 생활방식을 바꾸지 아니하는 이상, 우리는 교회에 다니나 다니지 않으나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죽기를 무서워하기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인데, 평생을 다 가도록 죽음의 공포에서 꼼짝달싹 못하기는 마찬가지라는 말이죠. 마귀의 종이 바로 이런 모습인데, 그러니 사람이 그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이 행동으로 얻은 힘으로 죽음을 물리칠 수 있을까?” 라는 것과 연관되어있다는 말이죠.
10개 가운데서 5개가 날아가도 넉넉하다고 여기면 되는데, 그게 아니고 5개가 있는 것을 8개로 만들면 죽음의 그림자가 그만큼 더 지워질 것이라고 여긴다면, 그러면 신앙이라는 세계의 기쁨을 누리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성경말씀을 보면서도, 지식을 하나 더 챙기려고 보는 것이 아니라, 성경말씀 자체가 평생을 살아온 자기 인생관 자체를 도려내는 것으로 보자는 말이죠.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
오늘 본문이 사람이 사는 현실을 이야기한다고 하는데, 14절에 끝에 보면 우리가 평소에 잘 듣지 못하던 말씀이 나오는데, 즉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라고 한다는 겁니다.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가 바로 마귀라고 한다는 말이죠.
(히 2:14)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그렇다면 어째서 인간은 생명으로부터 주관을 받지 못하고, 사망으로부터 주관을 받게 되었습니까? 왜 그런 현실이 인간에게는 떨어지지 않는, 우리 인간은 그런 불쌍한 존재가 되었느냐 겁니다. 인간의 약점은 죽는다는 것인데, 어떻게 이런 운명이 주어졌느냐는 말이죠.
사람이 무슨 행동을 하더라도 소신 있게 하지를 못하고, “이 행동이 나를 살릴 것인가? 아니면 죽일 것인가?” 라고 따져야 하는데, 그것 자체가 얼마나 커다란 고통이냐는 겁니다. “교회에 나오는 것이 나로 하여금 더 살게 만들까? 아닐까?” 라는 것을 따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 얼마나 큰 비극이냐는 말이죠.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 우리는 그런 현실이 미울 수밖에 없는데, 그래서 단 한 번이라도, “나에게는 죽음과 같은 것은 없다. 단지 쉬는 것이고 잠자는 세월이다” 라는 생각을 해보고 싶지는 않느냐는 말이죠. 그러면 오늘밤에 죽어도 어디에 간다는 겁니까? 낙원에 간다는 말이죠. 정말이지 우리가 그렇게 한 번 살아보자는 겁니다.
물론 여기에 대해서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는데, 우리가 하는 행동이 당장에 그런 추상적인 죽음과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다는 말이죠. 하지만 따져보면, 결국 인간의 모든 행동은 “죽느냐? 사느냐?” 라는 것과 관련이 있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교회에 나오는 것도 따지고 보면, 더 살고 싶어서 나오는 것이지, 더 살기 싫어서 나오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죠. 그러니 “내 목숨을 잃어버리기 위해서, 더 빨리 천당에 가기 위해서 교회에 나온다” 라고 하는, 그런 믿음을 가진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그야말로 하늘의 놀라운 축복을 받은 사람이라는 겁니다.
하지만 살려고 교회에 나오면, 돌아가면 다시 악마의 종이라는 말이죠. 살려고 하는 것을 바꿔치기를 한 적이 없기 때문에, 살려고 하는 것을 더 멋지게 살려고 교회에 나왔기 때문에, 집으로 가면 전혀 달라진 것이 없이, 그 인생은 그대로 그렇게 살아간다는 겁니다.
왜 인간은 죽음을 극복하지 못하는가?
그래서 성경은 친절하게도 인간들이 죽음을 극복하지 못하는 이유를 말씀하고 있는데, 그것을 말하기 이전에 출애굽 이야기를 잠시 해보겠습니다. 히브리인들은 바로 왕의 권세가 지겨웠는데, 그래서 거기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정작 자기들은 그럴 힘이 없었다는 겁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은 무엇인고 하니, 바로 왕의 권세에게 굴복하고 고개를 숙이는 것이었다는 말이죠. 이러한 히브리인들 위에 군림하는 바로 왕의 권세, 그것이 신약 때는, 특히 오늘 본문에서는 그게 마귀의 권세이고 죽음의 권세라는 겁니다.
우리는 이런 권세에서 벗어나고 싶은데, 우리는 죽음의 공포가 없이 살고 싶다는 말이죠. 교통사고가 나서 죽어도, 그 길로 천국에 간다는 기쁨으로 거리를 걷고 싶은데, 아내가 죽어도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쁘게 살고 싶은데, 하지만 그것이 됩니까? 안 된다는 말이죠. 이것이 바로 과거 히브리들의 출애굽 때의 모습이라는 겁니다.
출애굽 당시에는 여호와 하나님이 히브리인들을 살렸는데, 맞지요? 그리고 신약 때는 예수님이 와서 우리를 살리는데, 맞지요? 그러니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살렸다는 이야기가, 그게 단지 그 당시 남의 나라의 이야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러면 무엇입니까? 그것이 놀랍게도 오늘날 우리의 운명을 이야기하고 결정하는 말씀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극복할 수 없고 우리가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을, 그것을 누가 하셨다는 겁니까? 바로 그것을 하나님이 하셨고, 또한 예수님이 해내셨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때나 지금이나 문제점이 무엇인고 하니, 왜 우리의 힘으로 우리가 구원받지 못하느냐는 겁니다. 애굽에 있던 히브리인들이, 왜 자기들의 기도와 헌신으로, 자기들의 선행으로 애굽에서 벗어날 수 없느냐는 말이죠. 그것은 바로 사망의 세력을 인간이 잡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마귀가 쥐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슬그머니 들어온 다른 말씀 !!
마귀라는 존재, 물론 현대인들은 인정하지 않는데 말이죠. 하지만 창세기 3장에 보면, 거기에 분명히 뱀이 살고 있었는데, 즉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낯선 존재가 치고 들어온 것이죠. 그러면 인간은 그런 낯선 존재의 의견을, 그런 이물질의 말을 듣지 않아야 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말씀만으로 충분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과연 어떻게 되었습니까? 뱀이 그만 말씀 가운데로 슬그머니 치고 들어오고 말았다는 말이죠.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오직 말씀만 있어야 하는데, 그런데 그 사이에 뱀이 그만 들어오고 말았다는 겁니다. 물론 다른 말씀을 가지고 말이죠.
그래서 뱀이 인간에게 말하기를 “인간아, 네가 선악과를 따먹으면 신처럼 되어서 죽지 않는다” 라고 했는데, 그러나 하나님은 죽고 사는 것에 대해서 이미 따로 인간에게 이야기를 해놓은 것이 있는데, 즉 “선악과를 먹게 되면 반드시 죽는다” 라는 겁니다. 그리고 사는 방법은 무엇인고 하니, 바로 옆에 있는 생명나무라고 불리는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어려울 것이 아무 것도 없는데, 하지만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그것은 단 한가지, 인간이 그만 악마의 사고방식을 통째로 받아들였다는데 사태의 치명적인 심각성이 있다는 겁니다. 즉 “선악과를 따먹어도 죽지 않는다” 라는 것을 그만 받아들였다는 말이죠.
하지만 선악과는 단순한 음식물로서 과일이 아니라, 그것은 바로 선악을 아는 새로운 세계를 받아들이는 것인데, 선과 악의 세계를 말이죠. 그래서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은 뒤부터는 선악의 세계 안에서 생각하고, 그리고 선악의 세계 안에서 행동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것이 완전히 인간의 사고방식을 그만 뒤엎어 버렸다는 말이죠.
그것은 바로 죽음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으로 나타나는데, 인간은 거기에 따라서 행동하게 되어있고 말이죠. 그렇게 모든 인간의 속성이 그 순간에 달라지고 말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들 인간은, 아담과 하와는, 이들 부부는 선악과를 따먹고 난 다음에 두려워서 어떻게 합니까? 그만 하나님의 낯을 피하게 되는데, 그렇게 자기들이 숨는 모습을 보이게 된다는 말이죠. 즉 하나님을 의도적으로 기피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이제는 사망이 왕 노릇을 !!
이것이 바로 달라진 인간의 모습인데, 이것이 바로 악의 모습이라는 겁니다. 이것을 로마서 5장에서는 “사망이 왕 노릇을 한다” 라고 하는데, 즉 이미 죄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말이죠. 우리는 누구의 후손인고 하니, 그 아담 속에 우리의 씨앗이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아담이 범죄를 했다는 것은, 우리도 함께 범죄한 것이 되고 만다는 겁니다.
(롬 5:14)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행동도 아담의 행동이고, 죽음을 의식하고 움직이는 모든 행위도 아담 안에서 나온 행동이란 겁니다. 달리 어디를 가지 않고, 그 아담 안에 있다는 말이죠. 그 안에서 새끼를 치고 말이죠. 그래서 우리는 “너 나 할 것 없이 살아한다” 라고 하는, 그게 진리가 되고 말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죽는다는 것은 우리의 운명이 되고 말았는데, 한 걸은 더 나아가서 죽는다는 것이 우리의 공포가 되고 말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의 모든 행동은 죽음에 맞서서, 죽음을 우리를 죽이려고 하고, 반면에 우리는 살려고 하는, 그러한 피곤한 인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그런 운명과 팔자로 고정이 되고 말았다는 겁니다.
자네의 꿈이 무엇인가?
우체국보험 CF에 보면, 장인이 사위가 될 사람에게 찾아오니까, “자네의 꿈이 무엇인가?” 라고 묻는 멘트가 있는데, 이게 바로 가정교육의 모토라는 겁니다. 우리가 이런 죽음의 애굽에서, 이런 죽음의 현장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단지 이것밖에 없다는 말이죠.
그래서 온 가정의 교육방침이, 그리고 온 나라의 교육방침이 이것입니다. “오 신이시여. 저의 건전한 비전을 이루어주옵소서. 하나님이여, 제 꿈을 이루어주옵소서” 라고 말이죠. 그게 바로 “나는 살아야 한다!” 라는 것인데, 그것을 외치기 위해서 교회를 세우고, 거기에 눈물과 콧물을 쏟으면서 매달리고 있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찾고, 또한 예수를 찾는 악마의 종들이라는 말이죠.
예수님이 오신 것은 지식이나 한 수 가르치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모습을 자신의 온 몸으로 보여주기 위해서, 즉 진리를 보여주기 위해서 오셨는데, 그것이 곧 십자가의 길이라는 겁니다. 악마의 종들이 가지고 있는 진리관으로 예수님을 바라보니, 예수님의 생활조차도 비정상으로 보이는 겁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의 길은 예수님이 가야할 길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가야하는 길이라는 말이죠.
에스겔아,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에스겔서 37장에 보니, 하나님이 에스겔을 데리고 어느 골짜기로 갑니다. 거기에는 전부가 해골 밖에 없는데, 그것도 바짝 마른 해골 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하나님이 묻습니다. “에스겔아,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라고 말이죠.
(겔 37:1)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하시고 그 신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겔 37:2) 나를 그 뼈 사방으로 지나게 하시기로 본즉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
(겔 37:3)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여러분,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물으시는 질문입니다. 만약 여기서 “예!” 라고 대답을 한다면, 여러분은 한 평생 죽음의 공포가 두렵지 않는 사람이 됩니다. 왜냐하면 바짝 마른 뼈들도 사는데, 그러니 우리도 또한 분명 다시 살게 된다는 말이죠. 예수님 안에서는 모든 것이 ‘예’가 된다는 말이죠.
그런데 만약에 대답하기를, “그럴 리가 없습니다. 뼈들이 어떻게 삽니까? 나는 믿을 수가 없습니다. 거기에 물을 뿌리든지 해서 일단 축축하게 만들고, 그 다음에 어떤 조치라도 취해야만 합니다” 라고 나온다면, 여러분은 행복을 그만 마귀에게 반납해버린 겁니다.
에스겔이 하나님과 함께 한 이 죽음의 현장을 우리에게 소개하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그것은 바로 우리의 구원은 결코 우리의 힘이나 행위로 얻어질 수 없다는 것을, 그것을 분명히 알려주려고 그렇게 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사망에 포로가 되어서 잡혀있기에, 거기에서 도저히 빠져나올 수가 없다는 말이죠.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
그래서 성경은 무엇이라고 하는고 하니, “가만히 있거라. 누가 어떤 일을 해서 은혜를 내려주시는지, 그것을 지켜보아라!” 라고 한다는 말이죠.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같이, “이것을 행하면 구원을 얻는다. 저것을 행하면 영생을 얻는다” 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말이죠.
그래서 출애굽기 14장에 보면 뭐라고 합니까? 그 당시 히브리인들이 모세와 함께 있어도 죽는 것 때문에 무서워하는데, 그것도 그럴 것이, 앞에는 홍해바다가 있고, 뒤에는 애굽 군사들이 쫓아오고, 그야말로 진퇴양난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모세를 보고 “당신이 우리를 죽이려고 작정을 했구나” 라고 하면서 모세를 원망을 한다는 말이죠. 그러자 모세가 뭐라고 하는고 하니, 13절과 14절입니다.
(출 14:13)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출 14:14)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인간이 개입할 수 없다” 라는 겁니다. 심지어 구원받는 당사자도 자기 구원에 개입할 수 없다는 말이죠. 그래서 “가만히 있거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신다” 라고 하는 겁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말씀인지 모른다는 말이죠.
이들 히브리인들이 그것을 경험하고 난 뒤에, 출애굽기 15장에서 어떻게 합니까? 다음과 같이 고백하면서 여호와를 찬양하는데, 2절에서 5절입니다.
(출 15:2)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내 아비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높이리로다
(출 15:3) 여호와는 용사시니 여호와는 그의 이름이시로다
(출 15:4) 그가 바로의 병거와 그 군대를 바다에 던지시니 그 택한 장관이 홍해에 잠겼고
(출 15:5) 큰 물이 그들을 덮으니 그들이 돌처럼 깊음에 내렸도다
그들은 새로운 현실에 눈을 떴는데, 애굽군대에 의해서 물에 수장될 위기만이 현실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친히 개입해서 살려주시는 것도 현실로 받아드렸다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 자신의 능력을 바라본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이것이 바로 신앙이라는 겁니다.
조금 전까지 그렇게 모세에게 덤비던 자들이, 성경을 한 장만 더 넘기면 어떻게 됩니까? 여기 3절에 보면, “여호와는 용사시니, 여호와는 그의 이름이시로다” 라고 하는데, 그러니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가 누구이지?” 라고 하면서, 오직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본다는 말이죠. 정말 제대로 고백을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참된 믿음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어떻게 하셨는고 하니, 그 히브리인들로 하여금 자신의 깊은 원망과 불평을 모두 다 토할 수밖에 없는 환경을 조성하시는데, 모든 가능성을 다 차단을 시켜버린다는 겁니다. 그래서 정말 구원은 순전히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신다는 말이죠.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 !!
인간의 죄와 하나님의 은혜가 다같이 나오는데, 그러니 인간에게 가장 기본적인 것은, 결국 “죽느냐 사느냐, 이것이 문제로다!” 라고 하게 된다는 겁니다. 모든 것을 다 빼앗기니 마지막에는 이게 남는다는 말이죠. 바로 이 문제의 해답을 제공하기 위해서 여호와 하나님이 나섰는데,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주님보다 더 소중한 분은 없다는 겁니다.
자기 백성을 극한 상황에 몰아넣어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자기 백성들이 퍼붓는 모든 원망들이 터져 나오는 그 현장에서, 거기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은혜의 놀라움을 펼쳐 보이시는 겁니다. 그들의 죄악된 본성들과 함께 말이죠. 그래야 이들이 자기 힘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헛소리를 하지 않기 때문에 말이죠.
또 다른 현실이 있음에 눈을 뜨면 !!
열왕기하 6장을 봐도 이런 경우가 또 나옵니다. 아람군대가 엘리사 선지자와 그 종이 살던 도성을 완전히 포위를 했는데, 그러자 엘리사의 종이 기겁을 하고 말았는데, 그게 게하시인데 말이죠. 즉 죽기를 무서워했다는 것이죠. 그러자 엘리사는 기도해서 게하시의 눈을 뜨게 해주는데, 하지만 그때 게하시는 이미 눈을 떴는데, 평소에 봉사가 아니었다는 겁니다.
그렇게 눈을 떴는데, 그런데 또 다시 눈을 뜨게 해주니, 엘리사와 함께 있는 천군 천사가 저 아람군대보다도 훨씬 더 많다는 것을 알았다는 겁니다. 즉 새로운 현실에 눈을 떴다는 말이죠. 그러자 그 다음 날에 그 아람군대가 그만 박살이 나고 말았다는 겁니다. 새로운 현실을 알면 그게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닌데, 이처럼 현실을 제대로 보면, 구원이란 것이 인간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드러난다는 말이죠.
(왕하 6:15) 하나님의 사람의 수종드는 자가 일찍이 일어나서 나가보니 군사와 말과 병거가 성을 에워쌌는지라 그 사환이 엘리사에게 고하되 아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
(왕하 6:16) 대답하되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한 자가 저와 함께한 자보다 많으니라 하고
(왕하 6:17)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원컨대 저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사환의 눈을 여시매 저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
열왕기하 19장에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랍사게’ 라는 못된 앗수르의 장군이 유대나라와 히스기야 왕을 협박합니다. “우리 앗수르 대왕이 얼마나 무서운지 아나? 너희들이 대들면 다 죽는다. 너희들이 성문을 열지 아니하면 너희들은 자기 소변과 대변을 먹으면서 지낸다” 라고 말이죠. 그러자 온 백성들은 죽는 것이 두려워서 벌벌 떤다는 겁니다.
이 소리를 듣고서 히스기야 왕이 하나님께 기도를 하는데, 그러자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구원의 처방을 전달하십니다. 즉 “잇수르 왕은 본국으로 돌아가서 죽게 된다” 라는 겁니다. 그리고는 밤에 하나님의 천사가 나타나서 앗수르 군대를 무려 18만 5천명이나 한꺼번에 죽여버린다는 말이죠.
(왕하 18:27) 랍사게가 저에게 이르되 내 주께서 네 주와 네게만 이 말을 하라고 나를 보내신 것이냐 성 위에 앉은 사람들로도 너희와 함께 자기의 대변을 먹게 하고 자기의 소변을 마시게 하신 것이 아니냐 하고
(왕하 18:28) 랍사게가 드디어 일어서서 유다 방언으로 크게 소리질러 불러 가로되 너희는 대왕 앗수르 왕의 말씀을 들으라
(왕하 18:29) 왕의 말씀이 너희는 히스기야에게 속지 말라 저가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내지 못하리라 …
(왕하 19:35) 이 밤에 여호와의 사자가 나와서 앗수르 진에서 군사 십팔만 오천을 친지라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보니 다 송장이 되었더라
우리가 죽기를 무서워하는 경우를 이렇게 성경에서 끄집어내지 않더라도, 우리가 매일 아침에 눈만 뜨면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 이런 죽기를 무서워하는 감정이라는 겁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현실을 현실의 전부로 알고 있는데, 하지만 또 다른 현실, 즉 “죽어도 괜찮아. 다 빼앗겨도 괜찮아!” 라고 하는 새로운 현실도 봐야한다는 겁니다. 이것을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말씀을 하시고, 그리고 십자가에 지고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셨다는 말이죠.
그리고 마태복음 10장 28절과 29절에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오는데, 이것은 자기의 택한 백성에게 하시는 말씀인데 말이죠.
(마 10: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마 10:29)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오늘 본문, 즉 히브리서 2장 18절에 나오는 말씀에 합한 말씀이라는 겁니다. 거기 18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있는데 말이죠.
(히 2:18)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
그러니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택한 백성, 즉 아브라함 자손을 도와주시는데 어떤 식으로 도와주시는고 하면, 예수님은 말씀을 주셔서, “너희들이 이 말씀을 믿느냐?” 라는 것으로 도와주신다는 말이죠. 그래서 “몸을 죽이는 자를 두려워하지 말고, 몸과 영혼을 지옥에 멸하는 자를 두려워하라. 그리고 참새를 봐라. 참새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떨어지지 않는다”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진짜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 “예수님, 그것이 진짜 현실입니까? 제가 믿고자 합니다” 라고 할 것이고, 이런 사람들은 시험을 이기도록 도움을 얻는다는 겁니다. 그렇게 마음이 믿음으로 가득할 경우에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자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하나님이 도와준다고 해서 갑자기 바다가 갈라지는, 그런 것을 기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환경이나 다른 사람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들 자신이 문제라는 겁니다. 자기가 싸워서 혹시나 더 살려고 것은 아닌지, 그렇게 죽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 우리 자신의 가장 큰 원수이고 약점이라는 말이죠. 그것이 종교적 행동으로 나오고 윤리적 행동으로 나온다는 겁니다.
“하나님, 제가 이렇게 착한 일을 했는데, 그러니 더 오래 살게 해주시겠지요?” 라고 하는 게 무엇인고 하니, 마음 자체는 달라지지 않고, 그저 착한 일을 하고 교회에 잘 다녀서 오랫동안 잘 살려고 하는, 그러니 그것은 아직도 마음이 바꾸어지지 않은 상태라는 말이죠.
야들아, 다 빼앗겨 살아도 괜찮은 인생이다 !!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십자가를 지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십자가를 지시면서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주셨습니까? “야들아, 빼앗겨서 살아도 괜찮은 인생이다. 몸이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라. 부활이 있지 않느냐? 그러니 그런 것으로는 낙담하지 마라” 라고 하시는데, 그렇게 택한 자들에게 도움을 주시고자 십자가의 길을 가셨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인데도 불구하고 십자가의 길을 가셨는데, 그런데 우리는 죄를 한 바가지씩 짓고 있으면서도 왜 십자가의 길을 마다합니까? 이 세상에서 예수님보다 더 고생하신 분은 없는데, 인자는 머리를 둘 곳도 없다고 했다는 말이죠. 그러나 주님의 실패한 인생입니까? 예수님이 지옥에 갔습니까?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니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지금도 우리를 도우시는 그 구원의 현실에 우리가 눈을 뜨지 않고 있다는 겁니다. 눈에 보이는 이것이 현실이 아니라, 지금도 열심히 우리를 도와주는 분이 계시는데, 그러니 우리는 다 빼앗겨도 괜찮고, 없어도 괜찮고, 그리고 죽어도 괜찮다는 말이죠. 바로 그런 인생을 저와 여러분이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과연 예수님을 믿기는 믿는 겁니까? 예수님과 친하게 지내려고 하지말고, 전적으로 의지하고 그 길을 기쁘게 갈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간구하는 저희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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