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형제(히 2: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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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 2:10) 만물이 인하고 만물이 말미암은 자에게는 많은 아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저희 구원의 주를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하심이 합당하도다
(히 2:11)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히 2:12) 이르시되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 하셨으며
(히 2:13) 또 다시 내가 그를 의지하리라 하시고 또 다시 볼지어다 나와 및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라 하셨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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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자녀 !!
우리는 성경을 진리라고 이야기하는데, 그러니 구원을 받는 것도 진리인 성경말씀에 있는 내용대로 되어야 구원을 받는다는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도, 자기 마음대로 자녀라고 우긴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성경에서 자녀라고 이야기할 경우뿐인데, 그 이외에는 안 된다는 말이죠.
물론 예수님의 형제라는 것도 성경에서 형제라고 할 때고, 자기가 스스로 형제라고 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닌데, 그렇게 나서봐야 헛수고라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라고 했을 때는, 성경에서는 형제로 출발하게 되는데, 그렇다면 성경에서 말하는 ‘예수님의 형제’ 라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그것은 모두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인데, 하지만 하나님의 아들은 인간 쪽에서 출발하면 백 날을 해도 아들이 될 수가 없어요. 하나님이 아들이 되는 경우는 한 가지 밖에 없는데, 그것은 바로 예수님과 한 형제가 될 경우뿐이라는 말이죠. 그때만 아들이라고 간주를 해주겠다는 것이죠.
물론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어떤 사람들은 “목사님, 그것은 이미 우리가 다 알고 있는 이야기가 아닙니까?” 라고 하면서 이의를 걸고, 또한 반문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과 만나서 이야기해 보세요. 분명히 그들은 다음과 같이 나올 겁니다.
“하나님이 창조했다면, 전부 하나님의 자녀이고 아들인 것이 분명한데, 거기에 무슨 토를 달 것인가? 부모가 자식을 낳듯 하나님이 사람을 낳았으면, 그것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닌가?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 라고 하면서, 그렇게 억지를 부린다는 말이죠.
그러나 전혀 그렇지가 않는데, 세상의 인간들 가운데는 물론 하나님의 자녀도 있지만, 그러나 더불어 마귀의 자녀도 있는데, 바로 이런 사실 때문에 하나님은 천국도 만들고 또한 지옥도 만드신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지옥을 만드신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으신다면, 가라지를 골라내어서 처리하기 위해서 만드셨다는 말이죠.
하나님이 지옥을 만드신 이유는?
물론 같이 섞여서 살 때는 ‘너’와 ‘나’ 할 것이 모두가 알곡인 줄로만 알았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거기에 속아넘어가지를 않고, 지금도 철저하게 분리하는 작업을 해내시고 있다는 겁니다. 그 심판의 기준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데,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형제’ 라는 조건인데, 여기에 부합되어야 알곡이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들이 제 아무리 교회라는 것을 많이 만들어 놓아도, 하나님은 그 분위기에 말려 들어가지 않는데, 성경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진짜로 하나님의 참된 아들이신 예수님의 형제인지 아닌지, 그것을 차별화를 하시고 골라내는 작업을 하고 계신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은, “예수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라는 것으로 결정을 짓겠다는 겁니다.
우리가 성경을 덮어버리고 상식 선에서 언급하게 되면, 교회에 나오면 다 하나님의 자녀라고 오해할 소지가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까? 하지만 전혀 그것이 아닌데, 그것을 사람들이 지어낸 것인데, 아니 마귀가 그런 함정을 파놓았다는 겁니다. 그러니 누가 뭐라고 해도 하나님의 자녀는 반드시 예수님과 한 형제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오늘 본문 11과 12절을 보면,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히 2:11)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히 2:12) 이르시되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 하셨으며
‘주의 이름’을 던져서 !!
여기 12절에 보면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라고 하는데, 그러니 “저 사람이 형제이냐? 아니냐?” 라는 것은, ‘주의 이름’을 던져서, 그 주의 이름이 가지고 있는 효과, 그 능력, 그것에 전적으로 의지하면 예수님과 한 형제고, 그렇게 의지할 마음이 없으면 예수님과 한 형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13절에 보면 “또 다시 내가 그를 의지하리라” 라고 한다는 말이죠.
(히 2:13) 또 다시 내가 그를 의지하리라 하시고 또 다시 볼지어다 나와 및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라 하셨으니
주의 이름을 거부하는 교회 !!
여기에 인용된 구약성경은 다 순서적으로 의미를 가지고 나열되어 있는데, 그러니 주의 이름을 교회 안에 던졌는데, 교회가 주의 이름을 거부할 때, 그것은 더 이상 교회가 아니라는 겁니다. 아무리 간판에 ‘교회’ 라는 명칭이 들어가 있더라도 말이죠. 주의 이름을 거부하는 이유는, 그것은 따로 의지하는 것이 있기 때문인데, 그것은 바로 교회가 교회 그 자체를 의지한다는 겁니다.
어떤 분이 우리교회 게시판에 이런 질문을 했는데, “목사님, 성찬식을 할 때 굳이 포주주스로 해야할 이유가 무엇이 있습니까? 약한 도수의 포도주를 사용하면 안 됩니까?” 라고 말이죠. 물론 심각하게 질문을 던진 것은 아닌데, 그래서 제가 다음과 같이 답변을 했는데, “오렌지주스로 성찬식을 해도 괜찮습니다” 라고 말이죠.
왜 그런고 하니, 교회는 성찬식의 유무로 결정되는 것이 아닌데, 오히려 교회가 성찬식을 하게 될 때, 그 성찬식에 참여하는 자기 행동을 스스로 의지할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겁니다. “하나님, 이 성찬식에 제가 참여하게 되다니, 제가 그 얼마나 대견스러운지 모르겠습니다” 라고 자화자찬을 하는데, 그러나 교회란 것은, 오늘 본문 12절의 말씀처럼, “주의 이름을 의지해야 한다” 라는 겁니다.
‘주의 이름’에 대해서 !!
이 ‘주의 이름’ 이라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모르는데, 그래서 제가 장문의 글을 쓴 적도 있는데 말이죠. 주의 이름이 성경에서 어떻게 발달이 되었고, 왜 인간은 다른 이름으로는 구원을 받지 못하고 오직 예수 이름으로만 구원이 되는지를 말이죠.
(행 2:21)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였느니라
(행 4: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도대체 그 주의 이름만 의지하면, 그 어떤 인간이든지 상관없이 구원되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겁니다. 주의 이름이 무엇이기에, 그동안 자기가 살아왔던 것과 아무런 상관도 없이 구원이 되느냐는 말이죠. 그러니 이게 얼마나 놀라운 능력이냐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구약전체를 통해서 세세하게 이 주의 이름에 관해서 언급을 했는데,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 말 자체가 무슨 뜻인지를 모르고 있어요.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머리가 나빠서 그런 게 아니라, 그것은 평소에 주의 이름 말고 따로 의지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주의 이름 말고 또 무엇을 의지하고 있다는 겁니까? 그것은 ‘자기 이름’을 의지하고 있다는 겁니다. 평소에 다른 생각도 없이 자기 이름만을 의지하면서 살았던 사람들에게, 주의 이름에 관해서 이야기를 하고 소개하니, “이게 무슨 소리인가?” 라고 하면서 어리둥절하게 된다는 겁니다.
이름 - ‘나는 나와 다른 독보적 존재이다’ !!
사실은 ‘이름’ 이라는 말 자체도 어려운데, 이름은 “나는 나와 다른 독보적 존재이다” 라는 것을 표현해주는 표시인데, 즉 “여기에 너와는 다른 하나의 존재가 따로 있다” 라는 겁니다. 이 말도 역시 어려운데, 즉 “이름이라는 것은 너와 나가 차이가 나는데, 너에게 예속도 되지 않고 굴복도 하지 않고 너에게 아부하지 않는, 너에게 구성되지 않는, 독보적인 ‘나’ 라는 것이 있을 때, 그때 비로소 그 사람에게 이름이 있다” 라는 겁니다.
김춘수의 ‘꽃’ 이라는 유명한 시가 있는데, “내가 너의 이름을 불러줄 때 너는 꽃이 되었다” 라고 하는데, 여기에는 참 어려운 철학적 의미가 담겨있다는 말이죠. 무슨 말인고 하니,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하나님과 차별이 되는, 하나님에게 예속이 되지 않는, 그런 또 하나의 ‘나’가 있는데, 그 ‘나’가 하나님에게 다가가서 식으로 구원을 받겠습니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는 별도의 ‘나’ 라는 독보적인 존재자가 뭐라고 하는고 하니, “내가 내 이름을 걸고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도를 다 취해서 내가 하나님께로 가까이 다가가겠습니다. 그렇게 내가 어떤 행동을 해서 구원을 받도록 하겠습니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하나님은 뭐라고 합니까? “너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고, 너 말고 따로 존재하는 주의 이름으로 구원받는 거야” 라고 하시는데, 그러면 우리는 이 말을 듣고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라고 합니까? “그러면 ‘나’ 라는 존재의 가치는 무엇이 됩니까? 있으나마나 하는 인간이 되지 않습니까? 그것은 정말 싫습니다” 라고 하면서 하나님에게 도전장을 내미는 겁니다.
주의 이름인가? 나의 이름인가?
우리가 성경을 펼쳐보면 두 가지 이름이 대결하는데, 하나는 ‘주의 이름’이고, 다른 하나는 ‘나의 이름’ 이라는 겁니다. 즉 “나의 이름의 자존심이냐? 아니면 주의 이름의 자존심이냐?” 라고 하는 싸움인데, 그런 싸움이 지금도 계속해서 진행되고 있다는 말이죠.
우리가 해석하기 어려운 것 중의 하나가 마태복음 6장에 나오는 주님이 가르쳐준 기도문인데, 제가 그 앞부분을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라고 한다는 말이죠.
(마 6: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마 6:10)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마 6:11)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마 6: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마 6: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
우리가 기도를 하면, 기도를 하는 본인이 애를 쓰는 것도 분명히 있는데, 그리고 남들이 그렇게 자기를 보고 기도를 열심히 한다고 평가를 해주면서 칭찬하는 것도 다 고려를 한다는 겁니다. 인간이기에 그런 면이 분명히 있다는 말이죠.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면서도 우리는 “하나님, 제가 살아가는 이유는, 주의 이름 때문에 살아갑니다” 라고 하는 기도를 한다고 하는 것은, 그것은 곧 주의 이름이 우리 성도들의 유일한 희망이고 낙이고 보람이라는 겁니다. 모든 상황에 있어서 주의 이름이 영화롭게 되면, 그것으로 성도의 기쁨이고 즐거움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진정한 기도가 무엇인고 하니까, “나의 모든 일에 있어서 내 이름이 아니라 오직 주의 이름이 영화롭게 되면, 그것이 저의 기쁨이고 만족입니다” 라고 하는, 거기에 자기의 몸을 던지는 것이 바로 참된 기도라는 겁니다. 이게 기도의 정신인데, 이것이 바로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라는 말이죠.
주의 신전 안에서는 자신을 불태워 버려라 !!
그러니 누가 과연 주기도문대로 살아갈 수 있습니까? 이것이 바로 자기를 부인하는 삶인데, 자기의 목숨을 버리는 말이죠. 지금까지 자기가 버티어 왔고 축적해 왔던, 그 모든 의로운 것으로 감겨있는 자기 이름을, 그 자기 이름을 주의 이름 앞에 과감하게 없애 버리고자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진정한 기도라는 겁니다.
(눅 9:23)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눅 9:24)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이런 말이 있는데, “주의 신전 안에서는 자신을 불태워 버려라” 라고 말이죠. 주님이 계시는 곳에서 자기가 걸치고 있는 것이 폭파되지 않는다고 하면, 그만 주의 이름이 가려지게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주의 이름을 영화롭게 한다는 무엇인고 하니, 지금 제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됩니까?
주의 이름과 한 형제가 될 경우에만 구원을 !!
하다가보니 그만 너무 어렵게 되고 말았는데, 설교를 다시 하겠습니다. 성경을 보면 구원을 받고 싶은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받는 사람은 이미 정해져있는데, 즉 “주의 이름과 한 형제가 될 경우에만 구원을 받는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누가 주의 형제인가 하면, 교회에 다니면 형제가 아니고, 일단 거기에 주의 이름을 집어넣어 보는 겁니다. 그리고 난 뒤에 반응을 보는데, 그렇게 해서 자기를 포기하고 주의 이름을 위해서 살아가는 자들이 있다고 하면, 그렇게 자기 이름을 포기한 자들만이 형제이고, 그런 자들만이 바로 교회라는 말이죠.
그런데 왜 이런 이야기가 오늘날 교회에서 낯설게 들리고 하니까, 위의 순서를 그만 뒤바꾸고 있기 때문이죠. 우선 교회부터 세워놓고, 그 다음에 찬양대로 하여금 찬양하게 하고, 또한 목사로 하여금 예수님에 대해서 설교하게 하고, 그러면 교인들은 그 예배에 참석해서 주기도문도 외우고 성찬식도 참여하면, 그것이 참 교회다운 것이 아니냐고 한다는 말이죠.
그렇게 “우리가 찬송하고 우리가 주의 이름을 한껏 높였잖아요?” 라고 하는데, 그렇게 자기의 행위를 고수하고 있으면서도 교회라고 여기고 있는데, 하지만 그것은 전혀 아니라는 겁니다. 즉 교회이니까 찬송해야 되고, 교회이니까 예배를 드리고, 교회이니까 주기도문으로 기도하는 것, 그것은 성경에서 말씀하는 예수님의 형제정신에 전혀 맞지 않다는 말이죠.
무슨 말인고 하니, 오로지 주의 이름을 의지해야만 교회인데, 교회이기 때문에 이런 저런 것을 해야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교회가 아니라는 겁니다. 이 차이점을 구분하는 게 매우 중요한 문제인데 말이죠. 쉽게 말해서, “교회가 되기 위한 구비요건을 하나님께서는 허락한 적이 없다” 라는 겁니다.
교회라는 것은, 주의 이름을 던져놓고 “누가 과연 이 주의 이름을 의지하는가?” 라는 것으로 판가름이 되는데, 그런데 자기 이름에 도움되기는커녕 자기 이름을 포기하게 하는 이 주의 이름을 누가 의지하겠습니까? 돈도 되지 않는데 말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지하는 자들이 있었다는 겁니다.
소경과 문둥병자와 창기와 세리들이 바로 그들인데, 그들은 예수님의 지상생활 당시에 주의 이름을 불렀던 자들입니다. 이게 바로 형제라는 말이죠. 예수님 당시에 주의 이름을 믿는 자들이 얼마나 대단치 않고 시시한 인물들인지, 그것을 마태복음 25장을 통해서 엿볼 수 있는데, 35절에서 41절까지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마 25:3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마 25:36)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 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마 25:37)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마 25:38)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마 25:39)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마 25:40)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마 25:41)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주의 이름 때문에 수모를 당하는 자들 !!
여기서 ‘내가’, ‘내가’ 라고 하는데, 이것은 예수님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형제를 말합니다. 예수님의 형제가 목이 마르고, 예수님의 형제가 나그네가 되었고, 예수님의 형제가 헐벗었고, 예수님의 형제가 옥에 갇혔고, 예수님의 형제가 병들었다는 겁니다. 왜 그런가요?
주의 이름 때문에 이런 수모를 당하고 있다는 것인데, 그런데 이런 사람들에게 해주는 것이 곧 주의 형제한테 해주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 해준 것이 된다는 겁니까? 그것은 곧 예수님에게 해주었다는 말이죠. 이렇게 형제 안에서 예수님을 발견한 사람은, 나중 최후의 심판 때에 양과 염소로 갈라지는데, 그런 자들은 염소가 아니라 양이 되어서 천국에 들어간다는 겁니다.
그러니 주의 형제라고 하는 자들은, 이 세상 사람들이 볼 때 흠모할 만한 아름다움을 구비한 자들이 전혀 아니더라는 겁니다. 초대교회는 이처럼 힘이 없고 아무 것도 내세울 게 없는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단지 주의 이름만 의지하는 사람들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모여도 힘이 되지 않는데, 그런 자들을 모아서 교회를 해봐야 전혀 별 볼일 없다는 겁니다.
고린도전서에도 이와 유사한 내용이 있는데, 1장 26절에서 29절입니다.
(고전 1: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고전 1: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고전 1: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고전 1:29)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요즘 교회가 금요철야를 하면서 기도하는 내용과는 전혀 다른데, 어느 교회에서 “우리가 아무 것도 아닌 것을 깨닫게 하소서” 라고 하면서 기도를 합니까? 물론 있을 수도 있겠지만, 하지만 대부분의 교회가 없는 것도 있도록 하기 위해서 기도하고, 자기 출세를 하기 위해서 기도를 한다는 말이죠.
없는 사람도 더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낮은 사람은 더 높은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또한 남들이 무시하지 못하는 대단한 존재가 되게 해달라고, 철야까지 하면서 기도를 하고 있다는 겁니다. “있는 권력도 아무 것도 아님을 깨닫게 해주세요” 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고 말이죠.
교회에서 말만 그럴싸하게 주기도문을 외웠지 속셈은 따로 있었는데, 그것은 “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해주세요” 라는 겁니다. 즉 ‘나’ 라는 이름이 유명세를 펼칠 수 있도록, 자기 가문이 크게 번창하도록 기도하고 있다는 말이죠. 전혀 주님의 이름과는 상관이 없는데, 그러면서도 그들은 교회라는 간판을 걸어놓고, 예배를 드리면서 성만찬을 하면서 주의 이름을 부르면서 나름 버티고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호락호락한 분이 전혀 아닌데, 그들과 한 통속이 되지 않아요. 이런 자들은 예수님과 한 형제가 아니라는 말이죠. 예수님과 한 형제가 되려면, 예수님이 이 땅에서 겪었던 똑같은 방식으로 거듭 태어나야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예수님과 똑같이 될 수 있는지, 그 방식은 무엇인가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예수님의 형제’ 라는 표현은, 모든 구약성경을 완성한 입장에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구약에 보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틀이 있어요. 그 틀대로 신약에서도 ‘아들 만들기’가 이루어진다는 겁니다. 그것을 예수님이 그대로 성취하신다는 말이죠.
그렇다고 하면, 구약에서는 어떻게 이 ‘아들 만들기’가 진행되는지, 여기에서 출애굽기를 잠시 살펴봅시다. 11장 4절에서 7절을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출 11:4) 모세가 바로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밤중에 내가 애굽 가운데로 들어가리니
(출 11:5) 애굽 가운데 처음 난 것은 위에 앉은 바로의 장자로부터 맷돌 뒤에 있는 여종의 장자까지와 모든 생축의 처음 난 것이 죽을지라
(출 11:6) 애굽 전국에 전무후무한 큰 곡성이 있으리라
(출 11:7)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에게는 사람에게나 짐승에게나 개도 그 혀를 움직이지 않으리니 여호와가 애굽 사람과 이스라엘 사이에 구별하는 줄을 너희가 알리라 하셨나니
하나님의 ‘아들 만들기’ !!
여기에 보면, 하나님이 애굽 사람들에게 10번째 재앙을 내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10번째 재앙에서, 모든 애굽 사람들의 장자를 그만 다 죽여버리고 말았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 하필이면 각 집안의 장자를, 큰아들을 다 죽이시는 겁니까?
예가 좀 그렇지만, 도둑놈도 집에서 물건 훔칠 때는 시시한 것은 남겨두고 그 집에 제일 귀한 것만 가지고 갑니다. 브라운 TV와 같은 것은 가지고 가지 않는데, 고물상에 가지고 가봐야 오천원도 주지 않아요. 그리고 수표도 가지고 가지 않는데, 추적을 당하면 곤란하다는 겁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인간 세계에서 무엇이 제일 중요한 것인가를 너무나 잘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가문과 대를 이어나갈 맏아들을 그만 쳐서 죽임으로 말미암아서, 나머지 모든 가족과 그 가문에 속한 미래의 모든 혈육을 다 한꺼번에 부정해 버리신 겁니다. 그래서 우리네 조상들이 아들을 그렇게 원했는데, 맏이가 없으면 가문이 끊어진다고 해서 말이죠.
그러면 반대로 하나님께서 왜 이스라엘의 맏이는 죽이시지 않는 겁니까? 그것은 바로 애굽의 아들과 전혀 차이나는 특별한 아들을 하나님이 친히 만드시기 위해서 그렇다는 말이죠. 애굽의 아들을 쳐서 죽임으로 말미암아서, 모두가 다 아들이 죽어야 하는데, 그런데 죽지 않는 집안이 있더라는 말이죠. 그러니 아들을 죽이지 않는 집안은 거룩한 집안이라는 것을 부각시키기 위함이라는 겁니다.
어제 밤에 갑자기 하늘에서 번개가 치는 것을 여러분도 잘 보셨지요? 그 번개를 누가 일으킨 겁니까? 대한민국 국회에서 가부를 물어서 번개가 주어졌습니까? 전혀 아닌데, 하나님께서 친히 내리치신 겁니다. 그렇게 번개를 내리치실 때의 그 무서움으로 하나님은 애굽의 장자를 내리치셨다는 말이죠.
내가 건져낼 자만 내가 건지겠다 !!
이것은 사람을 죽이는 것이 하나님의 취미라는 말이 아니라, “내가 건져낼 자만 내가 건지겠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장자라고 분리된 자만을 이 세상에서 들어내기 위해서, 반대로 저쪽을 쳐서 죽이겠다고 하신다는 말이죠. 그래서 하늘에서 죽음의 천사가 내려왔다는 겁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분명히 신비로운 분입니다. 그렇지요? 하지만 우리는 막연한 그 신비로움에 머물면 안됩니다. 그 신비로운 하나님께서 이 지상에서 구체적인 일을 일으킨 것이 있는데,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붙잡아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아들 건지기’ 라는 말이죠.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어떤 식으로 아들을 건졌습니까?
여기서 출애굽기 13장을 보겠습니다. 1절과2절입니다.
(출 13: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출 13:2) 이스라엘 자손 중에 사람이나 짐승이나 무론하고 초태생은 다 거룩히 구별하여 내게 돌리라 이는 내 것이니라 하시니라
계속해서 11절에서 13절을 보겠습니다.
(출 13:11) 여호와께서 너와 네 조상에게 맹세하신 대로 너를 가나안 사람의 땅에 인도하시고 그 땅을 네게 주시거든
(출 13:12) 너는 무릇 초태생과 네게 있는 생축의 초태생을 다 구별하여 여호와께 돌리라 수컷은 여호와의 것이니라
(출 13:13) 나귀의 첫새끼는 다 어린 양으로 대속할 것이요 그렇게 아니하려면 그 목을 꺾을 것이며 너의 아들중 모든 장자된 자는 다 대속할지니라
어린양으로 대속하지 않으면 !!
이게 무슨 의미입니까? 만약에 이스라엘 집안에서 생각하기를 “야, 내 아들은 살았다. 저 애굽 집안의 아들은 작살났는데, 내 아들은 살았다” 라고 하면서 좋아하다가, 어린 양으로 자기 아들을 대속하지 아니하면 그 아들마저도 어떻게 됩니까? 애굽의 장자 꼴이 되고 만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의 집안의 이름이나 그 아버지의 이름을 위하여 맏이를 죽이지 않고 살려두시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것이 아니고, 주의 이름으로 벌리신 그 이름을 위하여, 그래서 이스라엘의 각각 집안의 아들은 여호와의 소유로 돌아가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제부터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데, 어린양의 희생으로 말미암아서 말이죠.
지난 시간에 이것을 “예수님이 우리의 죽음을 미리 맛보았다” 라고 했는데, 그게 바로 구약에 나오는 어린양의 희생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죽었던 애굽 집안의 아들이나 죽지 않았던 이스라엘 집안의 아들이나, 모두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기는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아무리 교회에 열심히 다니고, 일요일은 하루종일 주일학교부터 성가대까지 봉사하고 해도, 그런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말이죠. 아무리 전도를 많이 하고 헌금을 많이 해도, 그리고 설교를 아무리 잘해도,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오히려 그런 것들은 자기 이름을 포기하지 못하는, 자기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죠.
오직 어린양으로 희생으로 인해서, 이제는 각 집안의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유의 아들로 바뀌게 해주시는 겁니다. 이러한 하나님 소유의 아들이, 하나님의 장자가 그 집안에 생기게 되면, 그 장자로 인해서 그 이스라엘 집안이 하나님의 복을 받는다는 겁니다. 부모는 물론이고, 그 모든 형제들까지도 말이죠. 심지어 시누이와 올케도 다 받는다는 겁니다.
유월절 사건, 십자가 사건 !!
이것이 조금 어려운데, 어린양의 희생으로 인해서, 그것을 ‘대속’ 이라고 하는데, 그 대속으로 인해서 아들이 살아날 때, 모두가 다 산다는 겁니다. 그것을 구약에서는 ‘유월절’ 이라고 하는데, 이 유월절에 일어난 일은 1400년 이후에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의미하는 겁니다. 그 십자가에 달려서 죽은 분이 누군가 하면, 그분이 바로 하나님의 맏아들이 되시는 분이라는 말이죠.
그 맏아들을 의지하는 자는 다같이 구원을 받는데, 이것 말고 달리 다른 방법이 있으면 제시해보라는 겁니다. 이것 말고 달리 천당에 갈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말이죠. 하나님이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을 이름을 준 적이 없는데, 우리가 우리 자신의 이름을 걸고, 자기 이름으로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왜 우리가 기도할 때 왜 자기 이름을 걸지 못하는 겁니까? 기도는 자기가 하는데도 불구하고 말이죠. “내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라고, 왜 그렇게 하면 안 되느냐는 겁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마련하신 구원방식 외에는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은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이죠.
여기서 로마서 8장 29절을 보겠습니다.
(롬 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옛날 구약시대에 하나님의 아들 만들기가 있었는데, 그 원칙이 무엇인고 하니, 그게 철칙인데 말이죠. 그 집안의 맏아들이 양의 피로 대속을 받을 때, 그 아들 덕분에 식구들도 덩달아서 같이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그런 놀라운 법칙이 있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을 때,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유일한 장자로 인정했는데, 하늘에서 음성이 들리면서 말이죠. “이는 내 아들이요, 내가 기뻐하는 자라” 라고 했다는 겁니다. 마태복음 17장의 변화산에서 구름 속에서 나온 음성도 역시 마찬가지의 내용이라는 겁니다. 베드로가 기분이 좋아서 초막을 세 채나 짓겠다고 하니, “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 내 기뻐하는 자니” 라는 소리가 들렸다는 말이죠.
(마 17:5)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오직 십자가의 신비로 !!
하나님이 신비롭다는 것은 사실인데, 그러나 일단 진리 속에 들어오면 신비로움이 없어집니다. 진리만 남고 말이죠. 주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그 모든 신비로움이 하나로 모이는데, 물론 우리가 하나님의 신비로움을 모두 알 수는 없지만 말이죠. 하나님께서 쏘옥 넣어주신 것, 즉 어린양이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신 것이 영생과 관련이 있다는 것인데, 그게 진리에 참여하게 된 사람이라는 말이죠.
그런 사람에게는 십자가 외에는 다른 신비는 없는데, 자기 나이가 70이 되든 80이 되든, 그것과 전혀 상관이 없이 이것만 붙잡으면 된다는 겁니다. 어린양의 피가 언약의 피고, 그 살이 언약의 살이라는 말이죠. 즉 “내 피는 언약의 피고 내 살은 언약의 살이다. 그러니 내 피와 내 살을 먹지 않는 자는 영생이 없다” 라고 하는, 그 예수님의 말씀만을 의지해야 한다는 겁니다.
(요 6:5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누가 예수님의 형제인가?
우리가 이것을 붙잡아야만 하는데, 이러한 말씀을 하시는 분이 누구입니까? 그것은 바로 ‘주의 이름’으로 오신 분입니다. 그러니 “주의 이름을 의지합니다” 라는 의미는, 그것은 바로 “내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라고 하는, 그것을 옛날 유월절의 아들 만들기에 근거해서 안다는 말이죠.
하나님께서 애굽의 모든 맏이는 다 죽였는데, 그런데 이상하게도 문설주의 피를 보고 죽음의 사자도 그냥 넘어갔다는 겁니다. 그 피가 바로 ‘내 이름’의 피가 아니라 ‘주의 이름’의 피라는 겁니다. “호산나, 그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라고 하는,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인데, 이렇게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전적으로 의지하는 자가 바로 예수님의 형제라는 말이죠.
(마 21: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질러 가로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여러분, 이것보다도 더 확실한 신비는 없는데, 그러니 우리는 이것만 붙잡으면 된다는 겁니다. 이런 무더운 여름철에 번개를 때리시는 하나님의 뜻을 우리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아무도 살지 않는 광야에 비를 내리시는 하나님의 뜻을 우리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주의 이름, 즉 예수님의 통해서 하나님은 모든 자기의 뜻을 다 펼치셨는데, 자기의 모든 속내를 다 드러내셨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다른 법칙은 없다는 말이죠. 그것이 바로 십자가인데, 그 피가 우리의 죄를 대속해주기 위해서 흘리신 어린양의 피라는 겁니다. 그것을 오늘 본문 10절에 보면 ‘고난’ 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히 2:10) 만물이 인하고 만물이 말미암은 자에게는 많은 아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저희 구원의 주를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하심이 합당하도다
과연 기독교만이 진리인가?
계명대학교의 교수로 있는 분이 하는 말이, 그래도 신학을 하는 분인데 말이죠. “기독교에만 진리가 있다고 하는데, 그것을 다른 종교를 몰라서 하는 말이다. 산의 정상에 올라가는 길을 한 쪽만 있다고 할 수 없지 않는가? 신을 우리 인간이 감히 어떻게 다 안다고 하겠는가? 기독교는 기독교 방식대로, 불교는 불교 방식대로, 그러니 종교적으로 바르게 살면 모두가 한 형제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성경말씀을 연구하고 신학을 한다는 사람이 그렇게 나오는데, 노골적으로 말을 하지 않아서 그렇지 지금 그런 목사들이 많아요. “니가 인간인데 하나님에 대해서 어떻게 다 안다고 할 수 있는가?” 라는 것인데, 하지만 성경말씀은 뭐라고 합니까? “배우고 확신한데 거하라” 라고 한다는 말이죠.
(딤후 3:14)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
(딤후 3:15)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하나님의 뜻이 모아진 십자가 !!
물론 우리가 모든 것을 다 알 수는 없지만, 사도바울은 뭐라고 합니까?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라고 하는데, 또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에 하나님의 모든 행위가 다 압축되어 들어있다는 말이죠. 만물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증거하기 위해서 존재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십자가가 핵심인데, 이것을 우리가 놓치면 안 된다는 말이죠. 하나님의 다른 계시는 없다는 것이죠.
(고전 1: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고전 2: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우리가 더운 여름철이 되면 매사가 흐리멍덩해지고 머릿속도 산란하기 쉬운데, 그래서 교회에 다니면서도 왜 다니는지, 그 이유가 무엇인지, 그 핵심을 놓치기가 쉽다는 말이죠. 그 핵심이 무엇입니까?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만이 형제가 되고, 그런 사람만이 구원을 받은 자라는 겁니다.
다른 경우는 전혀 없는데, 다른 이름은 결코 안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 주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주의 이름이 우리에게 하신 일이 있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어린양의 대속의 죽음인데, 그래서 오직 예수님의 피를 마시고 살을 먹어야 영생을 얻는다는 말이죠.
이제 마지막으로 오늘 본문 13절을 보겠습니다.
(히 2:13) 또 다시 내가 그를 의지하리라 하시고 또 다시 볼지어다 나와 및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라 하셨으니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 !!
여기 끝 부분에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라” 라고 하는데, 그러니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자기의 아들로 삼는 게 아니라, 예수님을 보내셔서, “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 내 기뻐하는 자니” 라는 소리가 하늘에서 들리게 해서, “맞다. 저분입니다. 저분이 하나님의 맏아들이 되시는 분입니다” 라고 하면서 전적으로 예수님을 의지하는, 그런 자들만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겁니다.
여러분, 구원은 아무나 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어린양의 피를 믿는 자들에게만 주어진다는 겁니다. 이 무더운 여름에 우리가 돈 계산이 틀릴 수도 있고, 차비를 두 번 낼 수도 있지만, 정신이 오락가락할 수도 있는데, 하지만 누가 뭐라고 해도 확실한 것은 우리의 능력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의 기도와 전도가 아니라, 오직 주의 이름으로, 즉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구원자임을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모든 것이 혼란스러운 세상입니다. 하나님의 신비로움을 우리 인간들이 감히 어떻게 알 수 있느냐고 하면서 달려드는데, 그런 것에 우리가 시험에 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유혹에 빠지지 아니하고 분명한 하나님의 뜻인 십자가만을 붙잡고 살아가게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6,12,10 오후 7시에 마침. - 녹취 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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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꽃 ]
김춘수 (1952)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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