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하나님의 원수와 구원(히1: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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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 1:10) 또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
(히 1:11)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그것들은 다 옷과 같이 낡아지리니
(히 1:12) 의복처럼 갈아 입을 것이요 그것들이 옷과 같이 변할 것이나 주는 여전하여 연대가 다함이 없으리라 하였으나
(히 1:13)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느뇨
(히 1:14) 모든 천사들은 부리는 영으로서 구원 얻을 후사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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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비상상태 !!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교회에 나오는 것은 인간으로서 참으로 정상적인 일이라고 여기는데, 또한 그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도 사람이 보기에도 바른 일이라 보여진다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에 나오는 것은 왠지 당당하고 자부심까지도 들게 되는데, 남들은 산과 바다에 놀러 가는데, 우리는 그런 것을 마다하고 교회에 나왔다는 말이죠.
그러나 교회에 와서 제대로 성경을 보게 되면, 무엇인가 사태가 예상 밖으로 심각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오늘 본문의 경우에도, 13절에 보면 ‘원수’ 라는 말이 나오는데, 좀 당황스럽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싸우려고 교회에 나오는 것이 아닌데, 하나님과도 친하게 지내고, 다른 사람들과도 사이좋게 지내고 싶다는 말이죠.
그런데 성경에 이렇게 원수가 나온다는 것은, 정작 싸워야하는 적이 있다는 겁니다. 우리는 한 평생을 살아가면서 대인관계를 원만하게 하려고 무척 노력을 하는데, 적을 만들지 않으려고 말이죠. 그것이 제대로 인생을 사는 것으로 여기는데, 그런데 성경은 전혀 엉뚱한 이야기를 한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원수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죠.
너희가 하나님의 원수를 알아?
그것이 바로 “너희가 교회에 와서 하나님의 원수를 발견하는가?” 라는 것인데, 그러니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바라보는 것과, 그리고 우리가 자연스럽게 교회에 나온다고 여기는 이 세상과는, 즉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것과 평소에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이 세상과는 서로 큰 차이가 난다는 말이죠.
그러니 우리가 성경말씀을 펼치면서, 미처 우리의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뭔가 영적인 세계가 있다는 것을 눈치를 채야한다는 겁니다. 그저 안일하게 자기가 정상적 행동을 하는 것의 연장선으로 교회에 나오는 것이 전부라고 여기지 마시고, 미처 몰랐던 것을, 즉 성경 속에 또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발견해야 한다는 겁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원수가 있다는 것이 의미하는 것은, 우리가 보기에는 이 세상이 정상적이지만, 그게 전혀 아니라는 말이죠. 모든 것이 그만 뒤죽박죽이 되어버리고 잘못되었다는 겁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왜 그것을 정상이라고 여기느냐는 말이죠. 그러니 그런 생각자체가 전혀 옳지 않다는 것을 깨우치기 위해서 우리는 교회에 와서 말씀을 들을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원수’ 라는 것이 처음 등장하는 것이 창세기 3장인데, 거기에 보면 무엇이 나옵니까? 거기에 뱀이 등장하는데, 그 뱀으로 인해서 우리 인간이 엉망이 되고 말았다는 겁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이 세상이 참으로 아름답고 깨끗해 보여도, 하지만 하나님은 이미 “처음부터 이 세상은 망가져 있다”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창 3:1) 여호와 하나님의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너희는 구원을 받아야 한다 !!
그리고 오늘본문 14절에 보면 ‘구원’ 이란 용어가 나옵니다. 여러분, 구원을 받아야한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뜻입니까? 여러분은 하도 많이 들어서 별로 감각이 없는 것 같은데, 얼른 들으면 상당히 기분이 좋은 말로 들리겠지만, 그런데 곰곰이 새겨듣게 되면 우리 인간을 대단히 모멸하는 말이라는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히 1:14) 모든 천사들은 부리는 영으로서 구원 얻을 후사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뇨
한 번 생각해보세요. “너는 지금 구원을 받아야 한다” 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너는 지금 내가 보기에 인간도 아니고 돼 먹지를 못했어. 그러니 구원이 안 되면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겠어” 라는 뜻이라는 겁니다. 그니 ‘구원’ 이란 말은, 이처럼 우리의 입장에서 보는 것과는 전혀 다른 관점에서 봤을 때나 파악이 되는 상황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와 하나님과 견해가 서로 맞지 않고 차이가 난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심각한 일입니까? 우리는 자기 자신을 늘 좋게 보려는 경향이 있는데, 하지만 이런 잘못된 생각이 구원이라는 상황을 결국에는 파괴하게 되는 경향으로 나타나게 되어있다는 겁니다.
그것들은 다 옷과 같이 낡아지리니 !!
그리고 우리의 잘못된 선입감이 여기에 머무는 것이 아니고, 오늘 본문 10절을 보게 되면, “또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 라고 되어있죠. 이것은 우리가 익히 아는 내용인데, 그런데 그 다음 내용은 낯설어요. 11절에,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그것들은 다 옷과 같이 낡아지리니” 라고 한다는 겁니다.
(히 1:10) 또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
(히 1:11)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그것들은 다 옷과 같이 낡아지리니
이게 무슨 엉뚱한 소식입니까? 하나님께서 친히 만드신 세계가 왜 멸망을 당해야 합니까? 천지를 창조하실 때의 마음이 무엇이며, 이제 와서 멸망시키겠다는 마음은 또 무엇입니까? 왜 옷과 같이 낡아져야 합니까? 처음부터 튼튼하게 지시면 되는데, 하나님에게 그만한 능력이 처음부터 없었던 겁니까? 주님과 같이 영존하도록 하면 되지 않느냐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상치도 못한 진실에 접근하게 되는데, 주님이 만드신 세상을 주님이 멸망시킨다는 것에 대해서 여러분은 동의할 수 있습니까? 아니면 반발을 합니까? 당연히 반발을 하겠죠. 왜냐하면 우리가 어릴 때부터 배워왔던 습성들이 바로 피조세계에서의 우리 삶에 관한 것들이었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자기가 공부를 한다든지, 혹은 사업을 한다든지 하는 것은, 그것은 모두 어디에 바탕을 두고 있는고 하니, 현재 피조세계가 있고, 그 세계를 인정하고 긍정하는 가운데, 거기서 자기가 어떻게 버티고 살아남을 것인지, 여기에 관한 모든 것이 우리의 희망이고 목표가 되고 말았다는 겁니다.
그것을 물리적으로는 에너지의 세계라고 하는데,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에너지로 만들었는데, 그 에너지의 바탕 위에서 우리가 밥을 먹고 숨을 쉬면서 살아간다는 말이죠. 우리가 생각하고 계획하는 모든 것들이, 현재 있는 이 세계를 더 키우고 확대하기 위해서 모든 노력을 다한다는 것이죠.
우리가 그렇게 이 세상에 매달리고 그야말로 혼신의 노력을 다하는데, 그러한 세상을 왜 주님께서는 멸망을 시키려고 하느냐는 겁니다. 그것도 주님께서 만든 세상인데 말이죠. 그러니 여기서 자연적으로 반발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는데, 우리는 우리의 모든 꿈이 이 세상에 있으니까 말이죠.
우리는 이 세상에 모든 희망을 다 걸고 살았는데, 그런데 그것을 그만 부수어 버린다고 하니, 이것이 말이 되느냐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의 그동안 수고와 노력은 다 헛것이 되고 마는데, 그러니 하나님을 상당히 괘씸하게 여길 수도 있다는 말이죠.
여기서 고린도후서를 보겠는데, 4장 18절에서 5장 3절입니다.
(고후 4:18)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고후 5:1)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고후 5:2)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고후 5:3)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여러분, 이 말씀을 들으니 기분이 좋습니까? 아니면 씁쓸합니까? 이상하게도 성경은 우리가 교회에 오기 전에 태평스럽게 있던 마음과는 전혀 다른 마음을 촉구하고 있다는 겁니다. 8절에 보면,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니라” 라고 하는데, 지금 우리는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고 있는데, 주님은 ‘차라리!’ 라고 한다는 겁니다.
(고후 5:8)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니라
여러분, 과연 이런 마음이 듭니까?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살아남으려고 하는데, 그렇게 이 세상을 붙들려고 애쓰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성경말씀을 통해서 엉뚱한 이야기를 하신다는 겁니다. “차라리 죽는 것이 좋다” 라고 하던지, 아니면 “주님이 만드신 이 세상을 부순다” 라고 말이죠. 그렇게 하나님께서 당황스러운 말씀을 하시니 우리는 몸둘 바를 모르게 되는데, 그래서 아예 외면하고 싶다는 겁니다.
내 마누라, 어디로 갔나?
이 점을 설명하기 위해서 예를 하나 들겠는데, 어느 늙은 시인의 시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이 시인은 약 2년 전에 50년 동안이나 같이 살았던 아내가 위암으로 먼저 보낸 입장인데, 그래서 너무나 외롭고 쓸쓸해서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는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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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전까지 거기 있었는데
어디로 갔나
밥상을 차려 놓고
어디로 갔나
넙치 지지다가
어디로 갔나
조금 전까지 거기 있었는데
어디로 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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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젊은 사람들은 그 심정을 잘 모를 겁니다. 노 시인은 아내가 자기와 늘 같이 생활하니, 아내가 평생 같이 있을 줄로 알았는데, 그런데 늘 밥상을 차려주던 아내가 어느 날 그만 없어졌어요. 그래서 노 시인은 절망과 절망에 빠져들게 되었다는 말이죠. 자기는 자기만 있다는 것으로서 사는데 충족이 되는 줄 알았는데, 그러나 곁에 아내가 없다는 것으로 자기가 무너지는 것을 느꼈다는 겁니다.
그런데 노 시인은 뭔가 모르고 있었던 것이 있었는데, 사람은 자기가 잘났다는 것만으로 살아갈 수가 없었던 겁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가 중심이 되어서 사는 것이 아니었다는 말이죠. 자기 자신도 모르고 세상도 모르고, 그렇게 아무 것도 모르고 살아왔는데, 그래서 아내의 죽음을 통해서 이 세상과 자기 자신을 살펴보게 되었다는 말이죠.
하지만 우리는 성경말씀을 통해서 자기를 되돌아보는 것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더 나아가서 왜 몸을 떠나서 주와 함께 거하는 것이 더 좋은지, 그리고 이 피조세계를 왜 주님께서 멸망을 시키는 것인지, 말씀을 통해서 그러한 하나님의 참 뜻을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에덴동산에 있었던 일을, 즉 하나님의 원수가 있었다는 것에 대해서 감각이 없어요. “성경에 있으니 있었겠지!” 라고 하면서 그냥 넘기고 만다는 겁니다. 귀신 이야기는 어디에 많이 나옵니까? 보통 무더운 여름철에 방영하는 납량특집 영화 안에서 만나는 가상 인물인 줄로 알고 있는데, 그러나 전혀 그렇지가 않다는 겁니다.
그게 영화 속의 일이 아니라, 우리가 실제로 죽는다는 말이죠. 어제까지 밥상을 차려주던 아내가 어디로 갔느냐는 말이죠. 도대체 그 원인이 어디에 있을까요? 그게 모두 뱀 때문인데, 마귀 때문에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원수 때문에, 우리의 인생의 모든 것이 그만 꼬이고 뒤죽박죽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죠.
교회 다니기 !!
어떤 가수는 “청춘을 돌려다오” 라고 하면서 열심히 부르짖고 있는데, 물론 자기는 그렇게 하면 돈이 생기겠지만, 우리는 지금 모든 것이 엉망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물론 성경을 펼치면 그게 나오는데 말이죠. 우리는 일상에서 있다는 것이 주는 혼잡함과 분주함으로 인해서, 마치 놀려고 하듯이 교회에 나오는 경향이 있다는 겁니다.
초등학교를 다닐 때는 통지표를 받아보는데, 거기에 나온 항목들을 보면, 국어도 있고, 산수도 있고, 사회도 있고, 자연도 있어요. 그리고 국어항목에도 보면 읽기, 쓰기, 듣기, 말하기, 감상 등등, 그렇게 여러 가지의 항목으로 칸을 지어놓는다는 겁니다. 어떻게 기억이 납니까?
바로 이런 식으로 교회 다니기, 종교 갖기, 하나님 믿기 등등, 그렇게 우리가 하는 일상적인 일 중의 하나로 분류시켜 놓는다는 겁니다. 그것도 제일 끝 부분에 놓는데, 즉 해도 되고 무슨 일이 생기면 안 해도 되는 것으로 여겨서 말이죠. 등산이나 골프와 같은 일종의 취미생활과 같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렇게 분류를 한다고 해서 근본적으로 엉망이 되어버린 우리 인생의 문제가 해결이 됩니까? “내가 누구인가?” 라는 것에 대한 해답이 나옵니까? 그렇게 하면 진리가 붙잡힙니까? 아내가 죽고 난 뒤에 “어디로 갔어?” 라고 탄식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라고 하면, 이제는 진리를 가정에서 찾지 말고, 믿어지지는 않지만 성경말씀으로 들어와서 찾아야하지 않겠느냐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의 원수가 나오고 자기 원수가 나오는데, 그러면 우리는 왜 이런 원수가 있어야 하고, 예수님은 왜 오셔야 하는지, 그 이유를 우리가 알아야 한다는 말이죠. 그래야 자기가 누구인지 알고, 또한 진리가 무엇인지 안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악마와 만나도록 하신 이유는?
이런 하나님의 원수에 대해서 우리의 체험이나 경험은 아무런 소용이 없는데, 그래서 저는 이 시간에 성경에 나오는 것을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그것이 마태복음 4장에 나오는데,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복음을 전하기 이전에 하나님은 누구를 만나게 해주셨는고 하니, 하나님께서 일부러 악마와 만나도록 주선하셨다는 겁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지금까지 마귀가 이 세상을 장악했는데, 그래서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기 이전에 이 세상이 어떠한 질서로 유지되고 있었는지, 이미 굳어져버린 세상의 속성을 알리기 위해서 예수님과 마귀가 만나도록 조치를 하셨다는 겁니다. 그래서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하는데, 그 시험은 예수님 외에는 그 어떤 인간도 극복하지 못한다는 말이죠. 그게 악마의 세 가지 유혹이라는 겁니다.
(마 4:1)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마 4:2)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마 4:3)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가서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
여러분, 이 시점에서 여러분에게 당부합니다. 절대로 자신의 기도나 금식이나 전도나 헌금으로 구원을 받으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곧 악마가 여러분으로 하여금 또 다시 악마의 굴레에 영원히 매이도록 하는 조치라는 겁니다. 이 세상을 과연 어느 인간이 이길 수가 있겠습니까? 아무도 없는데, 그래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 즉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다는 겁니다.
그렇게 마귀의 유혹을 아무도 이길 수 없다는 것인데, 그래서 ‘구원’ 이라는 것이 그렇게 중요하다는 말이죠. 조금 전에도 이야기를 했지만, 오늘 본문 14절에도 그런 말씀이 나오죠. 모든 천사들은 부리는 영으로서 구원 얻을 후사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셨다는 겁니다.
(히 1:14) 모든 천사들은 부리는 영으로서 구원 얻을 후사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뇨
여러분은 구원받기를 원하고, 그래서 교회에 나오니 목사가 구원을 하면 기분이 좋지 싶은데, 하지만 구원에 대해서 조금만 생각해보면, 즉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라는 것을 달리 말하면, “너는 인간도 아냐” 라는 것이죠. 즉 주님께서 구원해주시기 이전까지는 인간취급도 받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이것이 얼마나 기분이 나쁜 이야기인지 모르는데, 구원을 받아야 한다는 것은, “니가 교회에 나오고 말고 하는 것은 취미가 아니라, 이것은 너의 운명에 관한 것이다. 니가 구원받지 못하면 이 세상에서 아무리 폼을 잡고 살아도, 그것은 인간이 아니다” 라는 것인데, 그게 바로 “구원을 받아라!” 라는 의미라는 겁니다.
타이타닉호 선상에서 아무리 사랑을 나눈들 !!
그러면 우리는 “아하, 나에게 심각한 문제가 있구나” 라고 깨닫게 되는데,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것처럼 이 피조세계를 멸망시키겠다고 하시는 겁니다. 하나님은 지금 피조물 세계가 멸망으로 침몰하고 있다고 하시는데, 그게 바로 하나님의 원수가 지닌 무게 때문이라는 말이죠.
여러분, ‘타이타닉’ 이라는 영화를 아시죠? 침몰하는 배인 타이타닉호 선상에서 디카프리오가 아무리 사랑을 나눈들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 침몰하는 배 위에서 파티를 하고 즐기고 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냐는 겁니다. 다같이 침몰하고 가라앉는 입장에서 말이죠. 그러니 중요한 것은 구원이라는 것이죠.
다시 말씀드리지만,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기 이전에 미리 마귀와 만난 것은, 현재 이 세상의 형편을 우리에게 제대로 알리고자 함인데, 예수님 외에는 그 누구도 마귀의 시험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말이죠. 그러니 구원을 받아야 하는데, 그래서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게 낫다는 말이죠. “차라리 너의 형편에는 죽어서 영생을 얻는 것이 낫다” 라는 마음으로 성경을 보아야 한다는 겁니다.
첫째, 사람은 떡으로 산다 !!
그러면 우리가 이길 수 없는 첫 번째 유혹이 무엇인고 하니, “사람은 떡으로 산다” 라는 것인데, 이게 얼마나 실감이 납니까? 우리 몸은 60에서 65조개의 세포로 구성되어있는데, 각 세포들은 입을 벌이고 먹을 것을 달라고 합니다. 그래서 단백질, 탄수화물, 지방이라는 영양분이 공급되어야 활동할 수 있고, 세포 속에 있는 미토콘드리아는 산소를 만들어서 영양분을 분해해서 에너지를 창출해낸다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배가 고프면 예배고 이웃 사랑이고 기도고 헌신이고 간에, 아무 것도 안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배고픔의 문제는 자기 마음대로 되는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각 세포들이 입을 벌리고 있기에 말이죠. 그래서 돈을 주고 양식을 사서 그들에게 공급해주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배가 고프면 목사가 설교도 할 수 없는데, 그러니 교인들도 역시 교회에 와서 아무리 은혜를 받고자 해도, 배에 뭔가 조금이라도 들어가야 힘이 나서 은혜도 받을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하루하루를 벌어서 먹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교회에 다닌다는 것은 일종의 사치가 아니냐는 말이죠.
그러니 마귀가 이야기하는, 사람은 떡으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진실한 말입니까? 그 얼마나 현실감이 돈독한 말이냐는 겁니다. 그러니까 어느 인간이 이 현실과 진실에서, 그게 아니라고 하면서 극복해갈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교육을 받아서 익히 알고 있는 것이 마귀의 생각과 합치가 된다는 것이죠.
둘째,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 !!
두 번째의 유혹은, 이 세상에서 무슨 일을 하던지 성공해야 한다는 겁니다. 이왕 메시야로 이 세상에 와서 메시야의 일을 한다면, 그러면 성공해야 되지 않겠느냐는 말이죠. 성경말씀대로 성전 꼭대기에 뛰어내려도 발바닥이 땅에 닿지 않게 되면, 그러면 얼마나 많은 자들이 “야, 참된 메시야답다!” 라고 하면서 추종하고 환영하지 않겠느냐는 겁니다.
그러니 이 두 번째는 성공에 대한 유혹인데, 우리가 이 세상을 사는 이유와 포부가 무엇입니까? 바로 이 유명세가 아닙니까? 자기 이름을 내는 것이 아닙니까? 목회를 하든 무엇을 하든 누가 감히 성공이라는 유혹을 극복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성공하는 것이 기적이지, 성공하지 못하는 것을 기적이라고 누가 믿겠습니까? 그렇지요?
그러니 이런 유혹을 우리 힘으로 전혀 이길 수가 없다는 말이죠.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신 이유는 그 어떤 인간도 이런 유혹을 이길 수가 없다는 것인데, 다른 이름으로 구원을 받을 이름을 준 적이 없다는 겁니다. 다른 인간은 그 누구도 안 된다는 말이죠.
셋째, 예수 당신도 같이 누리자 !!
세 번째가 무엇인고 하니, 이게 참으로 노골적인 유혹인데, “이 세상 영광과 부귀를 누리는데 있어서 예수 당신도 같이 참여하라” 라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한 가족으로 살자는 말이죠. 죽더라도 이 세상에서 같이 죽고, 다른 세상에는 눈독을 들이지 말라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본문 11절에서 무엇이라고 합니까? “그것들은 다 옷과 같이 낡아지리니” 라고 한다는 말이죠. 우리는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교회에 왔다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교회에 와서 성경말씀을 보니, 그래서 이런 말씀이 나오니 그야말로 황당하다는 겁니다.
우리는 도저히 어떻게 할 수가 없는데, 뾰족한 방법이 없어요. 그렇게 우리는 마귀를 이길 수가 없기 때문에, 그런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것은 구약의 출애굽 때 마치 홍해가 갈라진 것과도 같다는 겁니다. 그야말로 기적인데, 마치 여리고 성이 무너진 것처럼 말이죠. 정말 기적이 아니라면 결코 구원이 될 수 없다는 겁니다.
믿는다는 것은 곧 기적 !!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믿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기적인지, 그것을 다음과 같이 예를 들어서 설명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7장에 보면, “너희가 겨자 씨 만한 믿음이 있더라도 나무가 산에서 뽑혀서 저 바다에 빠트리게 하면 할 수 있다” 라고 하셨다는 말이죠.
(마 17:20) 가라사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그런데 여러분은 이게 너무 과장된 말씀처럼 들리지 않습니까? 아마 우리가 그 자리에 있었다고 하면, 예수님에게 이렇게 항의할 겁니다. “예수님, 우리나라에만 해도 교회가 수 만개나 되고, 지금 이 시간에도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 것이 무엇이 그리 어렵습니까? 말씀을 듣고 수용하면 되지 않습니까?” 라고 말이죠.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시는데,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기적에 속하는지 모른다. 산에 있는 나무가 바다에 빠지는, 그런 수준에 있는 것이 믿음이다” 라고 말이죠. 그러니 믿지 않다가 믿는다는 것은,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것을 믿는다는 겁니다. 물론 우리가 보기에는, 그게 말도 안 되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믿을 만해서 믿는다고 여기는데 말이죠.
그렇다고 하면, 조금 전에 이야기한 노 시인의 경우에는, “조금 전까지 거기 있었는데 어디로 갔나?” 라고 하면서 슬퍼했는데 말이죠. 제가 그분에게 이야기하기를,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것이 시인님에게 낫습니다” 라고 하면, 그 시인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이보게 목사 양반,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야. 사는 것이 너무나도 괴롭고 힘들어서,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렇게 산다는 것에 오는 괴로움과 고통을 잊어버리기 위해서 믿는다고 하는 것이야”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물론 이것은 노 시인이 아닌 마르크스가 한 이야기인데 말이죠. 여러분은 이렇지 나오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만약에 여러분은 노 시인이나 마르크스와 같은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고 하면, 그러면 그것은 그야말로 나무가 뽑혀서 바다에 빠지는 것과 같은 기적을 받은 겁니다.
그러니 그 어떤 인간이라도 마귀의 세력을 결코 이길 수가 없다는 말이죠. 전혀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우리는 어떻게 구원을 받습니까?” 라고 하겠지요? 그것을 제가 지금부터 요한복음을 가지고 설명을 해드리고 드리려고 합니다.
요한복음 17장 1절과 2절을 보겠습니다.
(요 17: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요 17:2)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예수님의 기도덕분에 !!
이게 예수님의 게세마네 기도인데, 여기 2절에 보면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시려고” 라고 하는데, 그러니 믿는다는 기적은 아무나 받는 것이 아니고, 따로 정해져있다는 겁니다. 아버지에 의해서 말이죠. 그러면 어떻게 그들에게 믿을 주시는고 하니,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아버지께서 택한 자에게만 영생을 주기 위해서 어떻게 했는고 하니, 주님께서 이 세상의 모든 미묘한 일들까지 다 다스리고 관리하는 힘을 주셔서, 어떻게 되던 간에, 사업이 망하든 가정이 깨어지든 간에, 아무튼 그 귀한 영생을 주시기 위해서,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 기쁨을 주시기 위해서 지금도 주님께서 일하고 계신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7장에서 그런 기도를 하셨고, 그 기도의 응답으로 일이 모두가 제대로 진행되었다는 말이죠. 그러니 이것이 얼마나 큰 기적인지 모르는데, 그러면 우리는 거기에 대해서 “예수님, 저는 이런 기적을 받았습니다” 라고 하지 싶은데 말이죠. 그러면서 우리는 자기 자랑을 하고 싶어한다는 겁니다.
요나의 기적은, 곧 십자가 !!
그런데 마태복음 16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는데, “내가 악하고 음란한 세계에서 내가 보여줄 기적은 요나의 기적 밖에 없다” 라고 말이죠. 그렇다면 그 요나의 기적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라는 겁니다.
(마 16:4)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저희를 떠나가시다
그러니 십자가 죽음 안에서 영생을 발견해야만, 그것이 믿는 자의 죽음이 되는데, 이 땅에서 목회에 성공을 하고 사업에 성공하는 것이 아니고 말이죠. 그러니 그런 것을 통해서 자기가 믿음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하면, 그것은 전혀 요나의 기적이 아니라는 겁니다.
진짜 영생을 받은 믿는 자의 기적은 오직 십자가로만, 그 피로만 “아하, 우리가 이 악마의 세계에서 벗어나서, 떠돌아 살아가는 이 세계에서 벗어나서 영생의 세계로 들어왔구나” 라고 하게 되는데, 그게 바로 택함을 받은 백성이라는 겁니다. 다른 것은 전혀 아니라는 말이죠.
제가 요즘 대구시내로 이사를 와서 헷갈리는 것이 있는데, 그게 무엇인고 하니, 버스번호가 복잡하다는 겁니다. 제가 시골에 있을 때는 1번, 2번, 30번, 그렇게 간단했는데, 그런데 이제는 너무나 복잡하다는 말이죠. 이게 무엇인고 하니, 우리가 영생을 얻었지만 아직도 옛 질서를 잊지 못한다는 것인데, 즉 과거에 쓰던 것이 더 정감이 가고 푸근하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왜 죽었습니까? 그것은 곧 요나의 기적처럼, 예수님의 죽으심 자체를 통해서, “아하, 이 세상은 멸망을 당해야하고, 우리는 주님으로 인해서 이 세상에서 벗어났구나. 그래서 우리가 홍해바다의 이쪽에 있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겁니다.
그 기준이 바로 십자가인데, 그 십자가는 모든 사람이 외면하는, 돌아보고 싶지 않은 죽어가는 모습이라는 겁니다. 그 모습을 통해서 “아하, 진짜 영생을 저렇게 해서 주어지는구나” 라고, 즉 “내 생명은 없어지고 주님의 생명이, 그 보혈의 피가 내 속에 들어와서 내가 비로소 영생을 얻게 되는구나” 라고 하게 되는데, 그것을 믿는 자가 바로 진정한 기적을 체험한, 즉 영생을 받은 자라는 겁니다.
침몰하는 배, 그러나?
여러분, 지금 우리는 침몰하는 배 위에 살고 있는데, 그게 저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 본문이 그렇게 말씀하고 있다는 말이죠. 주님이 친히 만든 것은 분명하지만, 그러나 지금 그 세계가 침몰하고 있는데, 그러면 무엇만 살아남습니까? 14절을 보면, “구원 얻을 후사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뇨” 라고 한다는 것이죠.
(히 1:14) 모든 천사들은 부리는 영으로서 구원 얻을 후사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뇨
그러니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이 세상의 사정을 너무나도 잘 아시고, 이 세상이 마귀의 지배아래에 있다는 것을 아시고, 또한 그 어떤 인간도 마귀의 지배에서 벗어나지를 못한다는 것을 아시고, 그런데 놀랍게도 그런 가운데서, 예수님은 구원의 기적을 베풀어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직접 오셨다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는 주님의 영생을 주시는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지를 알아야 하는데, 그게 바로 십자가의 능력이고 곧 부활의 능력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무엇이라고 합니까? “이제는 우리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 라고 하는데, 그러니 이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엄청난 행운인지 모른다는 겁니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여러분, 우리가 정말로 구원을 얻었고 영생을 받은 성도라고 하면, 이 말씀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 얼마나 기적 덩어리입니까? 그래서 차라리 몸을 떠나서 주와 함께 거하고 싶다는 말이죠. 그리고 이 세상의 멸망도 기쁘게 반길 수가 있는데, 그게 바로 성도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습이라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이 잘못 생각한 것을 용서해 주옵소서.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다 아시고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셨는데, 그런데 우리는 그 죽으심의 의미도 모르고, 이 세상에서 출세하고 성공하기 위해서 주님에게 다가갔던 것을 용서해 주옵소서. 그래서 저희들의 인식이 언제나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서 출발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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