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7강-YouTube강의(닫힘 창세기 7:16)20210622-이 근호 목사
제357강, 제목은 ‘닫힘’. 사람들이 가정에서 식구들과 같이 살고 식사하면서 다정스럽게 식구들과 이야기하죠. 그러나 부모 입장에서 자식들에게 섭섭한 게 있다면 식사하고 난 뒤에 자식이 제 방에 가서 문을 닫아버린다는 거예요.
문을 빼꼼히 좀 열어놓으면 좋고 엄마가 수시로 들어가서 “애야, 지금 뭐하나? 공부하나? 공부하면 과일 썰어서 갖다 줄 건데.” 이렇게 소통이라 할까요, 늘 닫히지 않고 서로가 눈에 다 훤히 보일 때 부모 자식 간에 허물이 없다, 잘 통한다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문을 딱 걸게 되면 그 순간만큼은 자식과의 관계가 단절된 섭섭함이 있기 마련이거든요. 다 컸다고 저녁에 늦게 오면서도 늦게 온다는 전화도 없이 늦게 온다든지 이런다면 부모 입장에서 좀 섭섭하겠죠. 많이 섭섭하고 그럴 거예요.
부모 앞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개방할 때 부모가 신뢰를 안 줄래야 안 줄 수가 없어요. 속으로 이야기하죠. ‘너 필요한 것 내가 팍팍 밀어줄게. 왜? 네가 마음 문을 다 열어놨으니까. 마음 문을 열어놨다는 것은 엄마한테 맡겼다는 것으로 내가 받아줄게. 이해할게. 따라서 네가 필요한 것 있으면 내가 도와줄게.’ 그런 사이가 좋은 사이죠. 그런데 문을 딱 닫아놓게 되면 결별 또는 헤어짐, 영원히 단절된 이별, 갈라섬 뭐 이런 섭섭함 같은 마음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땅에서 하나님께서 언약을 주실 때는 세상 사람들끼리 서로 사이좋고 친하게 지내고 이웃사촌이라고 서로 정을 나누더라도 언약이 딱 개입해버리면 사정없이 하나님의 강제 조치에 의해서 문이 닫히게 되어 있습니다.
언약이 들어오는 건 다 마찬가지인데 최초 언약이 노아 언약이거든요. 창세기 7장 15절에 보게 되면 방주 이야기가 나옵니다. “무릇 기식이 있는 육체가 둘씩 노아에게 나아와 방주로 들어갔으니” 16절, “들어간 것들은 모든 것의 암 수라 하나님이 그에게 명하신대로 들어가매 여호와께서 그를 닫아 넣으시니라” 닫아버린 거예요. 닫아 넣으신 거예요.
문이라는 경계선을 가지고 폐쇄조치를 한 겁니다. 그러면 닫아놓은, 닫긴 그 안은 언약이 작용하는 세계가 되고 문을 닫아놓은 방주 밖에는 언약에 들어가지 못하고 버려진 자들의 세계가 되겠습니다.
조금 전까지, 홍수가 오기 전까지 방주가 생기기 전까지만 해도 서로 사이좋게 지내던 그 이웃사이가 언약이라는 것이 딱 들어와 버리면 언약 안과 언약 밖으로 완전히 아주 차갑게, 냉혹하게 선 그어져 버리죠. 그 언약의 완성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의 개입으로 말미암아 같은 식구끼리 일가친척들끼리 같은 교우들끼리 그리고 같은 주민들끼리 직장 사람들끼리 동창생 친구끼리 이것은 본인의 마음이 아니라 주님의 사정 봐주지 않는 냉혹함이 차가운 얼음장 같은 칼날로 그냥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쫙 갈라버리죠.
우리가 세상에서 뭐 귀신이 겁난다, 밤에 혼자 자는 게 겁나요, 부도난 게 겁나요, 여러 가지 장사했는데 손님 안 오는 것이 겁난다 하지만 진짜 겁나는 것은 그 사람들이 접해보지를 못했어요. 진짜 겁나는 것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가 왜 겁나느냐 하면 십자가는 일체 우리의 의사를 사전에 물어보지 않고 내린 처단이거든요. 십자가를 다른 말로 하면 최후의 심판. 더 노골적으로 최후의 판결. 최종 판결이에요. 대법원까지 항소할 그런 기회도 전혀 없어요. 부자와 거지 나사로가 죽는 순간에 완전히 갈 길이 달랐던 것처럼 명백하게 나뉘어지는 것처럼 우리가 나누는 게 아니고 주님의 일방적 조치에 의해서 딱 나누어진 겁니다.
옛날 국민학교 다닐 때, 3학년 때 한 반이 되어서 그렇게 애들끼리 친했는데 선생님들이 아주 냉정하게 4학년 올라갈 때 반을 섞어버리죠. 너는 4학년 1반, 너는 4학년 2반. 감정이 격한 애들은 막 웁니다. 복도에서 만나면 될 것을 영원히 헤어지는 것처럼 막 울어요. 선생님 원망하고. 쉬는 시간에 만나면 되잖아요. 그런데 수업시간도 같이 못 보는 그것이 섭섭해서 그간의 정이 섭섭해서 울겠죠.
그런데 사람들이 십자가가 꽂혀버리면 그건 아무것도 아니죠, 영원히 갈라서니까. 그런데 십자가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이 별로 섭섭해 하지 않는 것은 십자가를 모르기 때문에 그러는 거예요. 십자가가 장난인 줄 알고 목걸이 걸고 차에 걸고 다니면 흔하고 흔한 게 십자가인줄 알고 그게 얼마나 무서운 하나님의 실재적 현실적인 작용인 줄 모르고 뭐 안 해도 되는 걸 하나 믿어 얻어걸린 것처럼 그렇게 착각하고 있으니까 십자가의 그 냉혹함을 몰라서 그렇습니다.
성경이 어려운 게 아까 선취라는 말을 했잖아요. 이 세상을 심판하는 그 선취를 주님께서 십자가를 통해 이미 선취해서 보여줬습니다. 사람들은 아무 감정도 없겠죠, 십자가 보고 그냥 그러나 싶지만. 그러나 예수님 입장에서는 엄청나게 무서운 일이 예수님 자신의 몸을 통해 하나님께서 확장해 내린 것이 십자가입니다.
하나님 앞에 저주 사건이 실제로 터진 거예요. 긴장 이상입니다. 이것보다 심각한 일은 없죠. 긴장 되죠. 예수님께서는 이 십자가가 그 정도로, 극한적으로 뭐 무서움의 극한이죠, 극단, 그 정도로 무섭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수시로 제자들에게 여러 가지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그 중 하나가 마태복음 25장 10절에 나옵니다. 마태복음 25장 8절에 보게 되면 예수님께서 천국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달라 하거늘” 무슨 일이 벌어졌어요. 신랑이 온다는 소리가 들렸어요. 그제야 다급한 거예요. 기름 준비를 제 때 안 해서 당황하기 시작합니다. 어떤 위기의식을 느낀 거예요.
예수님께서 이 이야기를 만들어냈으니까요, 심판에 대해서. 천국 이야기하면서 천국은 심판과 동반해서 일어난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천국은 그냥 가는 것이 아니고 갈라짐을 통해서 천국 갈 사람과 지옥 갈 사람이 정해진다는 겁니다. 그 갈라짐. 그 갈라짐은 신랑의 있음과 신랑의 존재유무와 관련되어 있죠.
10절에 보면 “저희가 사러 간 동안에 신랑이 오므로 예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아, 이런 황망한 경우가 같은 촌사람들끼리 오랜만에 마음 맞춰서 놀러간다고 전세버스 해놨는데 전세버스 타기 위해 마을회관 앞에 모이라 하면 꼭 그런 사람 있어요. 마을회관 앞에 10시에 오라 하면 10시 반 이후에 오는 사람들 꼭 있어요.
그런데 안 기다려주고 딱 10시 되어서 전세버스 기사가 “오늘 스케줄 바쁩니다. 이거 뛰고 또 다른 데 뛰어야 됩니다. 할 수 없습니다. 떠납시다.”하고 떠나버렸을 때 그 떠나고 난 뒤에 떠나는 버스 뒷자석에 앉아서 조그만 창문 열고 뒤에 한번 돌아보세요. 팔 내밀면서 세워달라고 황급하게 쫓아오는 아줌마들, 아저씨들이 있을 거예요. 그런데 기사는 너무나 냉혹해서 “거기 뒤에 창문 닫으세요.” 버스 출입구 닫고 그냥 떠나버린 거죠.
이것은 다 가고 난 뒤에, 버스 가고 난 뒤에 늦게 온 사람이 11시 반 되어서 온 게 아니고 10시 2분에 오고 10시 30초에 오게 만드는 광경을 예수님께서 묘사하신 거예요. 중요한 것은 신랑이 문을 닫았다는 거예요. 이것은 누구 멱살 쥐고 목사보고 원망하지 마세요.
주님이 문을 닫은 거예요, 주님이. 노아의 방주를 하나님이 닫으신 거예요. 그게 십자가의 위력입니다. 뭐 친하게 지내고 좋게 지내고 소용없어요. 십자가는 주님께서 친히 손 대지 인간이나 목사가, 사도바울이 손 못 대요. 그냥 닫아버려요, 십자가는. 그냥 문 닫은 거예요.
닫으니까 십자가 안에 들어온 사람은 “어? 내가 십자가 안에 왜 들어왔지?”, 십자가 밖에 있는 사람은 “기다려 주세요!” 이렇게 되는 거예요. 못 기다려줘요. 십자가 문 닫아버렸어요. 이것이 얼마나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이야기입니까? 코로나 백신 이야기는 그 앞에서 아무것도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