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5강-YouTube강의(규칙 누가복음 12:15)20210608-이 근호 목사
제355강, 제목은 ‘규칙’. 목회하시는 분들에게 교인들이, 저한테도 마찬가지이지만 여러 가지 질문들을 많이 하는데 그 질문들을 압축하면 이렇게 돼요. “목사님, 예수 믿고 성령 받고 난 뒤에 앞으로 어떻게 살면 됩니까? 성도의 삶은 무엇입니까? 규칙을 얘기해주세요. 딴 소리, 골치 아픈 소리하지 말고 딱 이 규칙, 규칙을 제시해주시기 바랍니다.”라고 이야기하죠.
그 말은, “이제 새 사람 되었으니까 어떤 규칙이라도 악바리처럼 신경 바짝 세워서 늘 순수한 신앙심을 유지, 견지하면서 이젠 새 사람답게 지켜드릴 용의가 되어 있습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순종 안 해서 망한 것을 우리가 교훈적으로 너무나 잘 아니까 그러한 과거 역사의 실패를 우리가 염두에 두고 성령께서 우리 안에 관리하기 때문에 이제는 그런 식으로 실패 안하기로 다짐에 다짐을 하게 되면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이고 또 우리한테는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을 수 있는 그런 기회가 되리라고 저는 생각할 테니까. 문제는 규칙이 뭡니까? 어떻게 살면 됩니까?” 라고 이제 질문을 하죠.
그 규칙이 여기 누가복음 12장 13절에 나와 있습니다. 미리 말씀드리지만 그 규칙은 예수님 자신이 이 땅에 사시면서 스스로 가졌던 규칙이었어요. 너한테 필요한 규칙이 아니고 예수님 자신이 구주가 되고 주님이 되는데 필요한 그 규칙이 성도한테 성령을 통해서 그대로 확장됩니다. 예수님 본인은 스스로 어떻게 자기 규칙을 세워나가면서 사셨는가.
13절에 보면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업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 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 이 14절에 이미 규칙이 나와 버렸어요.
예수님이 주님으로서 이 땅에서 사람들과 만나고 사람 속에 사시면서 변치 않는 규칙은 뭐냐 하면 절대로 인간들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는 거예요. 결단코 들어주지 않아요. 여기 재판한다는 것, 물건 나누는 자, 이것은 인간 세계에서 justice, 정의로움, 인간은 하나님을 정의로운 하나님이라고 곡해를 해요.
정의로운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인간들은 무슨 생각을 하느냐 하면 나는 하나님이 정의로운 하나님이라고 생각하는 그런 마음을 갖고 있는 제가 하나님보시기에 참 정의롭죠, 그쵸? 라고 자기의 정당성을 깔고 하나님 즉 무한자와 유한자 사이에 어떤 동질성을 이끌어내려고 하는 거예요, 동질성.
천주교 교리나 개혁주의 신학이 그걸 핵심 교리처럼 잡고 있어요.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과 하나님이 공통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다. 그것이 의와 거룩이고 정의감이다 이거잖아요. 그게 다 안 끊어졌다. 연결고리가 있다 이 말이에요. 그게 하나님은 정의로운 하나님이다. justice, 정의롭다는 거죠. 정의롭다는 것은 하나님은 재판장이죠 뭐.
재판장장이라는 것은 선과 악을 나누시는 분이에요. 선과 악을 나눌 때 그게 정의롭다는 그것을 아담이 따먹은 선악 체제 안에서는 충분히 납득이 되는 겁니다. 인간의 인식의 고리, 인식의 그 구조체계 자체가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우리 행위의 모든 것에 양심이고 뭐고 이 밑에 다 깔려 있는 거예요.
그러면서도 겸손한 척 하면서 인간들은 선이 뭔지 알아도 못 지키고 무능하지만 우리 하나님께서는 선이 무엇이고 악이 무엇인지 알아서 지킬 겁니다. 저도 그 정도는 압니다. 그게 바로 욥기에 나오는 욥이나 욥의 친구들이 오해한 겁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에게 어떤 일이 생기느냐 하면 아버지 돌아가시면서 유산을 분배할 때 형이 몽땅 다 가져간 거예요. 그 때 동생은 이때다. 이게 justice, 드디어 살아계신 하나님이 정의가 무엇인가를 보여주실 수 있는 좋은 사례가 일어났다고 사례가 되었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런 경우의 수가 발생되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경우가.
자기가 아무리 생각해도 자기는 억울하니까. 자기는 가해자가 아니고 불쌍하기 짝이 없는 피해자라는 의식을 갖고 있습니다. 피해 입었으니까 정의감에 호소하는 거죠. 선생님 또는 랍비여 또는 주님 찾아와서는 자기가 너무 억울하게 형한테 모든 것을 빼앗겨 버렸으니까 우리 예수님은 참으로 하나님의 메시아고 정의로운 사람이니까 필히 저의 이 억울함을 풀어줄 것이다 라고 생각하고 찾아온 겁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인간들의 규칙에 주님께서 숟가락 하나 놓는다고 생각한 겁니다. 인간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동의가 될 수밖에 없는 그 진리체계에 이 땅에 오신 주님도 거기에 편들 것이라고 생각한 거예요. 이 동생은 그게 탐심인 줄을 몰랐던 겁니다.
인간들의 정의로움 안에 정의로운 하나님께서 일하실 때 생명 되시는 하나님이 그 안에 같이 들어있다고 본 거예요. 그러나 인간이 정의롭다고 생각할 때는 그 출발점은, 본인도 약간은 정의롭다는 그것을 빼기를 못했어요.
나는 태어날 때부터 불의한 인간이라는 것, 나는 뭘 생각해도 불의할 수밖에 없다는 것. 정의는 근처도 안 갔다는 사실을 인간 본인이 무슨 수로 그것을 깨닫습니까? 깨달을 수 없어요. 인간은 같은 인간과 비교하기 때문에 그래요. 네가 착하나 내가 착하나 배틀 한번 붙어봐? 이런 식이란 말이죠.
본인이 뭘 해도 불의하고 죄인이라 하는 것은 비교대상이 이 땅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비교대상이 없으니까 얼추 자기는 착실하게 살아왔으니까 이것이 결코 무가치하다고 생각을 못하는 거예요.
여러분 사람이 언제 화냅니까? 언제 분노하고 화를 냅니까? 본인만 착하다고 느낄 때 사람은 절로 화가 나요. 본인만 너무 착해서 쪼다된 거 아닌가 생각할 때 절로 화가 난다고요. 남은 재해기금 10만원 다 받았는데 저는 딴 짓하고 못 받고 기간 지났을 때 스스로 머리 쥐어박으면서 이 바보야 바보야. 식당 주인한테 주차 이야기했으면 7천원 벌건데 딴 이야기하다가 복음 이야기하느라고 7천원 날렸어요.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어떤 사람이 형한테 유산 다 빼앗기게 만들었습니다. 이게 복인 줄 몰랐던 거예요. 내가 누군지를 알 수 있는 절호의 찬스를 준 거예요. 만약에 본인이 형한테 정당하게 유산 받았으면 그 사람은 예수님을 찾아올 일도 없고 예수님 자체도 필요치 않아요. 멀찍이 예수님도 정의롭고 나도 얼추 정의롭다. 그것으로 예수님 안다고 생각한 거예요.
예수님께 꾸중들을 기회를 부여받지 못했어요. 예수님한테 묵사발 될 기회를 부여받지 못한 겁니다. 너 인간도 아니야. 그런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없었던 거예요. 복 받은 줄 알아야 돼, 이 사람아. 예수님 이용해서 결국은 인간은 소유로 살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15절에 너는 네 소유가 있으면 그걸 너는 생명으로 해석하고 있다는 거예요. 소유가 많은 것은 생명이 많이 유지될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네가 지금 해석하고 있는데 그 해석의 원천이 누구냐? 네 탐심에서 나왔다는 겁니다.
탐심은 뭐냐? 일단 살아야 되겠습니다. 그게 탐심이에요. 죄 지었으면 죽는 게 당연하지 죄는 죄대로 지어놓고 살아야 되겠다는 어디 이 본대 없는 싸가지 없는 생각이 왜 나와요? 죄인 같으면 지금껏 살아온 것도 덤으로 산 거예요. 내가 안 살아야 되는데 왜 살아있지? 이렇게 나와야죠.
예수님의 규칙은 뭐냐? 나는 이 땅에 죽으러 왔다. 그런데 너희는 지금 살고자 하는 거야, 소유로. 규칙은 뭐냐? 나랑 같이 내가 죽어야 생명이 있는 것처럼 너는 너 자신의 그 모습에서 이미 죽은 나라는 사실을 아는 것, 그것이 바로 주님 주시는 생명을 받은 사람의 결과입니다.
그러니까 뭐 자살할 필요 없어요. 그냥 덤으로 사는 거니까 살면 돼요. 그 다음에 이 사람은 형한테, 놀부한테 흥부가 있는 재산 다 뺏기거든 또 예수님 찾아와서 이렇게 이야기해야 돼요. “주님, 형한테 다 빼앗겼는데 그거 안 빼앗겼으면 이렇게 주님 찾아올 리가 없는데 주님, 다 빼앗겨서 감사합니다.” 옆에 사람이 미쳤다고 할 거예요. 바로 그런 사람, 그것이 바로 성령으로 새 사람 된 사람입니다. 이게 규칙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