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9강-YouTube강의(슬픔 마태복음 26:42)20210706-이 근호 목사
제359강, 제목은 ‘슬픔’. 인간들에게는 근원적으로 슬픔이 있어요. 슬픔이 있기 때문에 모든 활동이 좀 억지스러워요, 자연스럽지를 못하고. 그러니까 행동 하나 하면서 자연스럽게 행동하지 못하고 늘 불안 속에 있어요. 불안정하고 어떤 두려움 같은 것이 있고 그렇습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알고 있는 그 슬픔, 그 슬픔과 예수님께서 품고 있는 슬픔이 같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슬퍼했다는 대목이 여러 가지 나옵니다만 마태복음 26장에도 나오고 그 전에 예루살렘을 향하여 예언하실 때도 주님께서 그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해서 굉장히 슬퍼하시는 그 대목도 나와요.
특히 겟세마네 기도할 때, 마태복음 26장에 보게 되면 인간적인 슬픔과 예수님의 슬픔의 차이가 나옵니다. 마태복음 26장 37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기도하러 올라가면서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 새 고민하고 슬퍼하사” 38절,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예수님의 슬픔은 세상에서 주는 슬픔이 아니고 아버지와의 관계성에서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 중에 하나가 인간으로서 죄인으로서 가져야 될 슬픔을 체험하는 겁니다. 인간은 자기 슬픔의 원인도 모르고 어디서 오는가도 몰라요. 그냥 막연하게 그때그때 순간순간 자기 뜻대로 안되면 막 슬퍼하죠.
그러나 주님은 인간하고 비교 안 될 정도로 근원적이에요. 인간에게는 근원적인 슬픔이 있습니다. 그럼 예수님의 슬픔 안에는 인간들이 이 땅에서 겪는 모든 슬픔이 예수님의 슬픔 안에 다 담겨있다, 이렇게 보시면 되는 겁니다.
우리가 슬퍼할 때 우리는 흔히 이야기하잖아요. ‘그래,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기분이 좋지? 내가 얼마나 고민하고 슬퍼하는지 너희들은 모르잖아. 이 야박한 세상아, 너는 내 사정도 모르고 내가 인생 살면서 이렇게 힘든 걸 알아주는 사람도 없고.’ 그런 식으로 불만과 불평을 하죠.
그런데 히브리서에 보면 주님께서 우리가 무엇 때문에 슬퍼하는지 다 아시고 그 슬픔을 이미 예수님도 같이 먼저 체험을 했어요. 이게 기쁜 소식이에요. 이게 복음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슬픔에 참여가 되게 되면 주님의 기쁨에 이미 참여한 자라고 확정될 수가 있어요.
이 말은 만약에 개인적인, 사적인 슬픔에만 겁을 내서 두려워한다면 이것은 결국 무엇과 관련이 없느냐 하면 주님이 주시는 그 구원의 기쁨에 우리가 같이 놓여있지 않다는 뜻이 되어버려요. 주님이 주시는 그 기쁨은요, 주님의 겟세마네 슬픔, 십자가 슬픔을 통과해서 얻어낸 기쁨이에요.
그런데 우리는 반칙을 해서 주님의 슬픔도 모르고 주님의 고민도 모르고 그냥 열매 따먹듯이 주님이 우리를 구원해주신다 하니까 이게 내가 원했던 기쁨이야, 하고 넌지시 그 기쁨을 내 것으로 가져오려고 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복음의 기쁨을 가져오는 이것은 소유가 되고 우리가 소유라는 생각을 갖고 행동에 나서는 것을 ‘행함’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행함.
인간의 행함은 나중에 결과적으로 나에게 괜찮은 것을 내 소유화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모든 인간은 행하게 되어 있어요. 그 행함은 행동만 행함이 아니고 미리 생각하는 것도, 사고하는 것도 인간의 행함에 속하는 겁니다. 인간의 숨이 붙어있는 한 한시도 안 행할 때가 없어요. 안 행할 때가 없다는 말은 한시도 뭐든지 괜찮은 것을 내 것으로 만들겠다는 그러한 의도가 철회된 적이 없습니다.
항상 뭘 해도 저거 좋은 건 내 것, 주섬주섬 내 것으로 모으는 겁니다. 그런 인간이 성경을 봤다, 교회 나갔다. 또 뭘 하겠어요? 가만 있지를 않죠. 행하겠죠. 기도를 통해서 좋은 걸 내 것으로 만들든지 헌금을 하든지 전도를 하든지 봉사를 하든지 하여튼 내 것을 수북하게 모아 놓으면 그게 나를 살린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것은 하나님 아버지와 나와의 관계는 완전히 끊어진 채 내가 가지고 있는 불안과 공포를 해소해보려고 성급하게 성경에 나오는 괜찮은 것들을 억지로, 항상 억지에요, 억지로 내 것 만들려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베드로와 두 아들을, 그러니까 세 명이죠, 열두 제자 가운데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겠죠, 세 명을 겟세마네 동산에 데리고 갔습니다. 데리고 간 이유는 외부에서 남들이 보면 같이 기도하자, 이 말입니다. 그런데 같이 기도하러 데리고 갔는데 기도했습니까? 같이 데려간 세 명의 제자들의 모습은 딱 오늘날 우리의 모습을 미리 당겨서 보여주는 거예요, 미리 당겨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그들은 주님께서 ‘자기들을 기도하게 하려고 데려간다’ 라고만 생각했지, 주님의 사적인 고민과 슬픔에 참여하라고 데려가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거예요. 그러면 겟세마네 기도는 네 명이 갔지만 결국 누구만 하는 거예요? 예수님만 하시죠. 그렇잖아요? 예수님만 했죠? 그들은 자고 있으니까.
이 말은 모든 제자들과 모든 인간들에게 주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싶은 거예요. 기도는 오로지 예수님만 할 수가 있다, 그겁니다. 기도는 예수님만 할 수 있어요. 그것을 세 명의 제자와 더불어서 비교시키는 겁니다.
그들은 나름대로 기도할 줄 안다고 여길 게 아니겠습니까? ‘주님 기도 어떻게 합니까?’ 그걸 묻지는 않을 거예요. 아 기도하라고 하셨으니까 같이 옆에서 기도하자. 그러나 그들은 처음에 기도 흉내 내겠죠. 하나님 아버지 우리 일이 잘 되게 해주시고 예수님 일 잘 되게...... 하죠. 예수님 일 잘 되게 해주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예수님의 제자들 잘 되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치더라도 무엇이 빠졌습니까? 예수님이 겪는 그 슬픔과 고민이 누락된 거예요. 그게 빠져버린 거예요.
그걸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26장에서 딱 한 자로 이야기합니다. 이 ‘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이 잔을 내가 마시게 하옵소서. 예수님이 육신을 갖고 있는 이상은 이 잔이 굉장히 가혹한 거예요. 예수님이라 할지라도 혹독한 겁니다. 그러나 그것을 경과하지 아니하면 통과하지 아니하면 부활의 기쁨을 맛볼 수가 없어요.
그런데 인간들에게는 제자들에게는 무엇이 빠져 있느냐 하면 예수님이 마신 쓴 잔이 빠져 있습니다. 쓴 잔이 없는 채 두 시간, 세 시간 금식 기도해봐야 그건 아무 소용없는 거예요. 예수님이 마셨던 그 잔, 그 잔을 마실 수 있도록 기도를 할 수 있는 위인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기도해봤자, 뒤에 예수 이름으로 주문 갖다 붙여봐야 그건 다 헛방이에요.
그러면 우리 제자들은, 성령 받은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 먼저 구원의 기쁨을 줘요. 쉽게 말해서 구원을 주시는 거예요. 성령을 통해서 선물로 구원을 주시고 그 다음에 인생을 살면서 무엇 때문에 고민하느냐 하면, 자기 생계 문제 때문에 고민하는 게 아니고 자기 교회 교인 수 없다고 고민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마셨던 그 쓴 잔, 인간이 가지고 있던 근원적인 죄, 이 죄가 주님의 능력이 아니면 절대로 나에게서 떨어지지 않는다는 데에서 오는 그 고민과 슬픔을 겪게 만드는 그 기도를 하는 거예요, 그 기도.
그렇게 보게 되면 여러분, 이제 주기도문 내용에 대해서 생각하겠죠. 남을 용서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불가능하죠. 하지만 주님께서는 이미 구원을 받은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용서가 되도록 주의 기도 응답대로 우리를 그렇게 몰아세우는 거예요.
아, 주님이 나의 이런 행동 때문에 슬퍼하셨구나. 주님이 나의 이런 행동 때문에 고민하셨구나. 그렇다면 현재 나에게 일어나는 일은 나에게만 해당되는 일이 아니고 예수님이 다 가져간 예수님의 고민을 체험하라고 우리로 하여금 이런 일이 벌어졌구나. 그러면 그 일에 대해서 우리가 슬픔 가운데서 또다시 주님께 감사하는 일이 일어나게 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