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뿌리
2021년 1월 3일 본문 말씀: 욥기 19:1-6
(19:1) 욥이 대답하여 가로되
(19:2) 너희가 내 마음을 번뇌케 하며 말로 꺾기를 어느 때까지 하겠느냐
(19:3) 너희가 열 번이나 나를 꾸짖고 나를 학대하고도 부끄러워 아니하는구나
(19:4) 내가 과연 허물이 있었다 할지라도 그 허물이 내게만 있는 것이니
(19:5) 너희가 참으로 나를 향하여 자긍하며 내게 수치될 행위가 있다고 증명하려면 하려니와
(19:6) 하나님이 나를 굴하게 하시고 자기 그물로 나를 에워싸신 줄은 알아야 할지니라
욥은 친구들에게 말합니다. “니네들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다고 간섭질이냐?”라는 겁니다. 아무 상관도 없는 자들이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하는 이 모습은 장차 예수님께서 세상 사람들에게 둘러 싸여서 수모를 당하는 상황을 미리 보여주시는 겁니다. 단지 하나님에 의해서 다루어진다는 그 이유만으로 이런 어려움을 당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왜 욥의 친구들은 열 번이나 욥을 꾸짖고 학대하고자 하는 겁니까? 그것은 그들이 무섭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의 존재에 대해서 해명할 수 있는 모든 원리원칙으로서는 욥의 경우를 전혀 해명할 수 없다는 데서 오는 두려움이 있는 겁니다. 즉 인간들은 자신들의 뿌리를 그대로 두고서 세상을 이해하고 분석하려고 합니다.
여기에 비해서 하나님께서는 욥을 그의 존재의 고향으로부터 뿌리 채 뽑아내려고 합니다. 그래서 욥은 하나님을 향하여 울부짖는 겁니다. “왜 저를 곱게 놔두지 않는 겁니까?”라고 말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욥은 그냥 두지 않고 움켜쥐고 마구 흔드는 겁니다. 바로 이런 상황을 욥이 친구들에게 그대로 말해주니, 욥의 친구들은 공포에 잡히는 겁니다.
복음의 기쁨이란 고난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공포로부터 주어지는 겁니다. 공포란 찾아오는 것이고 어떤 식으로 내가 손댈 수 없는 정도로 뿌리 채 뒤흔드는 것이 공포입니다. 공포란 이유를 찾지 못하는데서 오는 두려움입니다. 해명되지 않는 사태를 직면하고 마주하는데서 오는 불안정감입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은 자신이 자신을 도와줄 수가 없습니다. 자신의 한계에 직면하게 됩니다. 욥을 통해서 알다시피 하나님의 찾아오심은 원래 이렇습니다. 인간들이 평소에 지켜온 모든 것들을 다 동원해서 결코 이 공포를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왜 해결되지 않는지 조차 알 수 없습니다.
그냥 무서운 겁니다. 그냥! 다음에 제시하는 예를 유념해보시기 바랍니다. 열왕기하 6:28-30에 보면, “ 또 가로되 무슨 일이냐 여인이 대답하되 이 여인이 내게 이르기를 네 아들을 내라 우리가 오늘날 먹고 내일은 내 아들을 먹자 하매 우리가 드디어 내 아들을 삶아 먹었더니 이튿날에 내가 이르되 네 아들을 내라 우리가 먹으리라 하나 저가 그 아들을 숨겼나이다 왕이 그 여인의 말을 듣고 자기 옷을 찢으니라 저가 성 위로 지나갈 때에 백성이 본즉 그 속살에 굵은 베를 입었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람나라가 북이스라엘 수도 사마리아성을 포위했습니다. 성 안에서 양식이 다 떨어져 아비규환이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백성들이 보여준 바는, 서로의 자식을 차례로 내어놓으면서 산 사람이나 살자는 식입니다. 여기서 인간의 존엄성은 사치입니다.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상황을 ‘극한’이라고 여깁니다.
하지만 이것마저 어디까지나 구약의 한계에 불과합니다. 구약 때 인간들이 보여주는 것은 여전히 이 땅에서 뿌리를 두고 살 권한과 자격이 자기에게 있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구약을 지나서 신약에 오면, 인간들은 더 이상 땅에 뿌리를 박고 사는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뿌리는 그들이 다룰 대상자들이 아니었습니다.
마태복음 12:43-45에 보면,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이에 가로되 내가 나온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소제되고 수리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인간들은 주체적으로 자기 인생을 관장할 처지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땅에 뿌리를 박은 것이 아니라 귀신에 뿌리를 박고 살고 있습니다. 인간은 아무리 ‘완전한 자아’를 구현하고자 해도 귀신이 그냥 두지 않습니다. 이런 인간들을 외부에서 뭐라하면, 인간들 속에 있는 귀신들이 ‘정의(正義)’를 부르짖습니다.
즉 인간들 나름대로 정의를 외칠 자격이 있다고 나오는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달리 보십니다. 욥의 경우처럼 욥과 욥의 친구의 차이는 곧 인간과 하나님의 격차를 말해주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시고 내뱉은 모든 말씀들은 인간들 입장에서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내용들입니다.
주님은 우리들로 하여금 ‘네 자신과 네가 작별하라’는 겁니다. 이는 인간의 존재는 해리되고 해체되어야 함을 말하는 겁니다. ‘너를 붙드는 일을 그만두라’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보면, ‘티T-셔츠’는 외부에서 보면, 그냥 하나의 개별단위체입니다. 하나, 둘 셈이 가능한 대상입니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거기에는 씨줄과 날줄이 만들어낸 격자구조입니다.
즉 아무 것도 중심이 없다는 말입니다. 인간의 뿌리는 악마에 박혀있기에 악마의 소리와 생각이 고스란히 인간을 통해서 밖으로 표출됩니다. 쉽게 말해서 인간들에게 있어 악마의 말은 틀린 말이 하나도 없습니다. 다 지극히 지당한 말이 되고 진리가 됩니다. 마태복음 4:3에서 악마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
이 악마의 말씀을 예수님은 이렇게 이해했습니다. “비록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떡없이는 못산다”라고 말입니다. 이 악마의 주장이 우리 인간들이 세상에 살아가면서 매일같이 절실하게 다가오는 말씀이 됩니다. 즉 천하의 하나님이라도 떡이 우선이고 떡이 더 중요하다는 겁니다. 악마는 그 뿐만 아닙니다.
사람들이 다쳐 죽는 것이 공포를 갖고 있으며 인간은 세상의 부귀와 권력에 대해서 욕망을 내고 있다는 겁니다. 어느 하나 거짓된 말이 없습니다. 이러나 이 모든 참다운 말도 예수님에게라만 거짓말이 됩니다. 너무나도 바른 소리하는 악마(곧 자신의 존재 뿌리)의 소리를 인간들은 거부하기 싫은 겁니다.
왜냐하면 악마의 소리에 인간 입장에서 반박이 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떡(돈)으로 사는 것이 맞지 그것말고 무엇으로 사는데요? 만약에 이런 인간성에 예수라는 분이 와서 엉뚱한 소리를 하게 되면 사람들으로서는 공포스러운 겁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과 좋게 지내고 싶고 좋은 관계를 맺고 싶은 겁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16:18-19에 보면,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인간은 애초부터 음부, 곧 악마의 권세에 묶여 벗어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여기에 ‘천국의 열쇠’가 필요합니다. 그 천국의 열쇠는 주님쪽에서 먼저 우리에게 관계맺는 겁니다. 죄사함으로 말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죄사함’이 새로운 고향, 새로운 뿌리가 되면서 성도안에 선악지식과 거저 주시는 생명나무가 취지가 교차를 이루는 새로운 질서가 형성됩니다. 즉 성도만이 자신이 죄인됨을 아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을 세상 협박과 공포를 지나 그것마저 기쁨의 이유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64강-욥기 19장 1~6절(존재의 뿌리)20210103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욥기 19장 1~6절입니다. 구약성경 778페이지입니다.
“욥이 대답하여 가로되, 너희가 내 마음을 번뇌케 하며 말로 꺾기를 어느 때까지 하겠느냐, 너희가 열 번이나 나를 꾸짖고 나를 학대하고도 부끄러워 아니하는구나, 내가 과연 허물이 있었다 할지라도 그 허물이 내게만 있는 것이니, 너희가 참으로 나를 향하여 자긍하며 내게 수치 될 행위가 있다고 증명하려면 하려니와, 하나님이 나를 굴하게 하시고 자기 그물로 나를 에워싸신 줄은 알아야 할지니라”
욥과 욥 친구의 차이가 실은 하나님과 우리 인간의 차이를 미리 앞당겨 보여주고 있습니다. 욥의 형편은 그 당시 그들에게 찾아온 메시아의 형편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메시아가 당했던 그 수치와 모멸과 수모와 오해를 앞당겨서 욥이 선지자기 때문에 친구들에게 둘러싸여서 그대로 당하고 있습니다. 시편에 보면 시편 22편에 다윗도 누구에게 당하고 있다고 고백하고 있느냐 하면 친구가, 가까운 나의 측근이 나를 공격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팔아먹은 사람은 바로 예수님의 제자 가롯유다가 팔아먹었습니다. 몰라서 팔아먹었다고 말할 수 없지요. 최대한도로 메시아 자기 스승에 대해서 안다고 자부하기 때문에, 충분히 내가 파악했다고 자부하기 때문에 예수님이라는 존재는 당신은 쓸데없다고 단정 내렸기 때문에 가롯유다가 팔아먹은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이해할 때는 가롯유다의 심사, 가롯유다의 마음 상태를 경유를 해줘야 해요. 가롯유다는 나쁜 사람이니까 몰라도 되고, 연구 대상 아니라고 재치면 안 되고 가롯유다를 통과해서 예수님을 발견해야 합니다. 배신하는 베드로를 경유 해서 예수님에게 다가가야 해요. 그래야 예수님이 우리에게 얼마나 필요치 않은 존재인 가를 우리가 절감하게 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이게 기이한 현상이 되어야 해요. 주님께서 나에게 귀한 것 주셨기 때문에 믿는다는 것은 그 당시 제자들이나 유대인들이 들으며 정말 웃을 일입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인간에게 해준 것이 뭐가 있습니까? 근원적으로 우리의 자리, 근원을 파괴 시킨 일 외에는 없어요. 인간들이 예수님께 정을 주고 사랑한다고 해도 결국 예수님은 가까이하기에는 너무나 먼 당신입니다.
인간들은 남에게 배려심이 있고 동정심이 있다고 자부하지만, 인간들이 주장하는 정의로움이라는 것은 자기 고향이 파괴될 때 비로소 내 중심의 정의감이 거기서 시작되는 겁니다. ‘그래. 양보해 줄게. 양보해 줄게. 나는 정이 많은 사람이니까 다 가져가’라고 아무리 남에게 양보하고 배려해도 가장 내가 챙기는 가장 기본 출생지, 고향, 나의 자리, 이것을 건드리면 정의의 이름으로 상대를 용서치 않겠다고 칼 들고 나서게 되어있어요.
인간의 정의라는 것은 바로 나의 자리를 건드렸기 때문에 그때부터 정의라는 말이 나오는 거예요. 정의로움, 의로움이 나오는 거예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나는 정의롭다는 겁니다. 그래서 지금 욥도 마찬가지죠. 욥도 화내고 이유가 주님이 내 기본 자리를 건드렸다는 거예요. 그러나 주님은 욥으로 하여금 무를 뿌리째 뽑는 식으로 그걸 뽑아서 욥이 구경도 못하고 경험도 못 한 다른 고향, 예상도 못 한 다른 자리에다 욥을 옮겨 놓으려고 하는 거예요.
아프지요. 그 작업이 바로 욥에게 일어났다면 오늘날 주님께서 그 작업을 우리 성도에게 하는 거예요. 우리는 자신의 기억 속에 자신의 태생을 알고 있습니다. 그 태생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의 정의로움이 나온다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나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정의로운 존재야’라고 우기는 그런 지점이 있다고요. 누구나 그런 지점이 있어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나를 정의롭다고 하라는 말이거든요.
미국에 상당히 의식 있고 관심 끄는 영화가 있는데 ‘바그다드 카페’라는 옛날 영화예요. 바그다드라는 것은 서남아시아 바그다드 말고 미국의 바그다드가 있어요. 라스베가스에서 한 60~100킬로쯤 떨어진 사막에 있는 조그만 마을인데 거기에 허름한 카페가 있어요. 영화도 얼마 돈도 안 들여서 만든 저예산 영화로 길가에 카페 하나 지어놓고 찍은 영화예요.
거기에 흑인 여자가 카페 주인인데 집안 꼴이 말이 아니죠. 딸이고 아들이고 애 하나 낳고 들어와서 살고 집안 꼴은 엉망이고 남편은 내보내고 살고 있는데 거기에 우연히 남편과 여행 왔던 아주 뚱뚱한 독일 여자가 그 집 카페에 들어와서 자기 남편과 싸워서 헤어지는 그 처지에 비해 지금 흑인 여자가 쓰레기 더미인 허름한 카페지만 식구들이 같이 있는 것을 보고 그게 부러워서 그다음부터는 손님으로 와서 손목 걷어붙이고 청소를 다 해줘요.
카페 주인이 어디 다른 곳에 갔을 때 완전히 청소를 깨끗하게 추잡한 것을 다 치웠을 때 그 카페 여자가 돌아와서 고맙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역정을 내는 겁니다. “네가 뭔데 손님으로 와서 주인도 아닌 게 이 카페를 깨끗하게 하느냐. 누가 너에게 청소해달라고 하더냐”라고 따집니다. 그걸 ‘천상천하 유아독종’이라고 합니다. 유아독종. 독종. 이게 내 자리인데 왜 내 허락 없이 청소를 깨끗하게 해주느냐는 겁니다. 이방인이라고 무시하는 이방인이 바로 우리가 손댈 수 없는 추잡한 것을 정화 시켜 준다는 것이 바그다드 카페라는 영화의 주제입니다.
지금 오늘 본문에서 욥이 말하기를 오늘 본문의 핵심은 어디 있느냐 하면 5절에 핵심이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뭐냐 하면 내가 하나님 앞에 아픈데 너희들이 무슨 상관이 있다고 이렇게 나를 열 번이나 꾸짖고 나를 학대하느냐는 겁니다. 욥이 기가 차서 친구들에게 이야기합니다. 지금 학대받는 것은 나야. 너희들이 언제 내 인생 도와준 적 있느냐는 말이죠. 내 인생에 언제 협조한 적 있다고 네가 나에게 간섭 질을 하느냐는 말이죠. “너는 네 인생이나 사세요. 그냥 네 인생이나. 너나 잘하세요”
내가 주님에게 학대받는 거 보고 죄지어서 학대받는다고 이렇게 끼어들지 말고 무슨 상관이 있는데 나에게 이렇게 책망하느냐는 말이거든요. 이것이 오늘날 예수님이 십자가 지신 이 땅에서 중요한 복음이라는 내용을 설정하는데 중요한 이야기가 됩니다. 욥은 말합니다. 너하고 나하고는 상관이 없다고. 얼마나 제대로 욥은 현실을 보는 거예요.
전에 본 마태복음 4장에서 악마가 예수님을 시험할 때 사람은 떡으로 산다고 했잖아요. 사람들은 그걸 허투루 듣는데 악마가 하는 말 치고 틀린 말이 없습니다. 귀담아들어야 해요. 사람이 떡으로 살지 그럼 뭐로 사는데요. 교회 왔다고 떡 줍니까? 얼마 줄 건데요. 자꾸 예수님은 엉뚱한 소리를 하니까 사람에게 맞아 죽어도 싼 거예요. 악마가 지배하는 세계에서 예수님은 맞아도 싸요.
예를 한번 들어봅시다. 얼마 전까지 교인들끼리는 마스크하고 식구들끼리는 마스크 할 필요 없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예수님이 뭐라고 하겠어요. 마태복음 12장에 나온 말씀입니다. 말씀 좀 적용할 줄 아세요. “누가 내 모친이며 누가 내 형제냐” 식구를 연장시켜 보세요. 눈에 있을 때, 살아있을 때만 식구가 아니고 죽어서도 함께 영원한 천국 가는 것이 진정한 패밀리 아닙니까? 식구 아니에요?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2장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누가 내 모친이며 누가 내 형제냐”라는 말씀은 여러분 식구들과는 마스크 하시고 교회 오면 마스크 벗으세요. 왜? 식구니까. 모든 것을 뒤집어서 이야기하니까 사람들은 예수님을 안 죽이려야 안 죽일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런데 그분을 믿는다고요? 와, 그거 미친 거 아니에요. 아마 예수님을 모르니까, 모르니까 믿는 거예요.
악마가 조작한 예수를 우리가 조작된 예수를 설정하니까 믿는 예수가 되어버린 겁니다. 악마가 조작한 가짜 예수 있잖아요. 우리에게 잘 해주는 예수, 복주는 예수, 천국 보내주는 예수, 이렇게 나에게 이익이 되는 예수를 설정하니까 믿어 볼까 하는 말을 하지만 실제 있는 예수님은 욥 친구에게 실제 예수님은 욥 같은 존재입니다. 욥 같은 존재.
욥의 친구들에게 욥은 말대로 아무 상관이 없는데 왜 상관 하고 싶은가. 욥의 친구들은 공포를 느낀 겁니다. 공포. 고난 다음에 기쁨이 오는 것이 아니에요. 공포 다음에 기쁨이 오는 거예요. 공포를 느껴야 기쁨이 생기는 겁니다. 고난 다음에 기쁨을 가지면 자기가 신앙의 영웅이 되어버립니다. 역시 나도 이 정도 이겨낼 수 있다는 식으로 자기에게 집착하게 되어있어요.
그러나 공포는 손댈 수 없는 것이 공포예요. 그냥 찾아오는 것이 공포예요. 구약에 열왕기하 6장 28절에 보면 아람 군대가 북이스라엘을 완전히 포위했어요. 엘리사가 살고 있는 그 시대에 사마리아 땅을 아람 군대가 완전히 포위했어요. 아람 군대는 지금의 시리아를 말합니다. 나라 개판 된 시리아. 그 시리아가 북이스라엘 수도 사마리아를 포위했습니다. 포위하면서 협박을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복음이라는 기쁜 소식은 고생 가운데 오는 것이 아니고 고생 가운데 낙을 보는 것이 아니고 협박과 공포 속에서 벗어날 수 없는 상태에서 벗어났을 때 예상 못 한 큰 기쁨이 오는 겁니다. 항상 협박이 있고 공갈이 있어요. 협박 공갈이지만 우리는 그걸 협박 공갈로 보지 않고 현실 그 자체로 이해하죠. 거기서 포위하니까 어떤 일이 벌어지느냐 하면 28절에
“또 가로되 무슨 일이냐”라고 이스라엘 왕이 순찰 나갔다가 보니까 성에 갇혀 있으니까 성 내부에 어떤 사태가 있는지 봤어요. “여인이 대답하되 이 여인이 내게 이르기를 네 아들을 내라 우리가 오늘날 먹고 내일은 내 아들을 삶아 먹었더니 이튿날에 내가 이르되 네 아들을 내라 우리가 먹으리라 하나 저가 그 아들을 숨겼나이다”
어른들이 먹을 게 없어서 어린아이를 고기로 먹기로 한 거예요. 아이는 다시 낳으면 되니까. 그래서 이웃집에 우리가 먹을 게 다 떨어졌으니까 갓난아이를 삶아 먹자고, 인육을 먹자고 약조를 했단 말이죠. 네 아이 먼저 먹자고 해서 먹었는데 그다음 날에 상대방 아이 내놓으라고 하니까 내놓지 않는 거예요. 이걸 보고 임금이 이렇게 이야기했습니까? “그러면 약속대로 너의 아이를 줘라”라고 했을까요 아니면 가슴을 쳤을까요.
“엘리사가 있은들 무슨 소용이 있느냐”라고 갑자기 그 왕이 엘리사에게 탓을 합니다. 엘리사와 하나님과 결부되어 있거든요. 하나님이 있다면 어떻게 이렇게 처참한 상황이 일어나느냐는 말이죠.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이 두 아주머니가 아이들 먹는 이런 상황에서 우리 아이 이번 주간 태권도 학원 못 보낸다고 걱정하겠습니까.
지금 코로나 때문에 아이들 태권도 학원 못 보냈다는 생각이 들었다면 아이들 성적이 떨어져 학습량이 떨어진다는 걱정을 한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아직도 악마에게 제대로 겁박을 안 당해봐서 그래요. 제대로 시달려보지 않아서 아직 여유가 있다는 뜻이거든요. 아직 먹을 것은 있다는 뜻이거든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통해서 인간이 극한으로 내몰릴 때 극한의 공포, 극한의 상황에서 인간성이라는 것이 과연 남아 있을까를 보게 하는 겁니다. 인간성, 인격성, 인권은 없습니다. 없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다시 한번 광야에서 말했던 악마에서 나오는 그 사실, 사람은 떡 없으면 인간성도 없다는 그 말이 얼마나 옳은 말인지, 얼마나 틀린 말이 하나도 없는지요. 우리가 틀린 말 하나 없다고 보는 말은 전부 다 악마의 말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러면 그동안 신앙생활 어떻게 했습니까. 도대체. 아이 태권도 보내고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했습니까.
아직 숨 쉴만하니까 예수님보다는 내 몸도 챙기고 내 가정 챙기고 이렇게 한 거죠. 그래도 아직 구약은 이렇게 극단적인 양식문제까지만 들어가죠. 신약은 그보다 더 나갑니다. 마태복음 12장 43~45절에 보면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이에 가로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소제되고 수리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
현재 이 세상 인간들은 어떻게 살아가느냐 하면 여기를 치면 다른 데로 메뚜기 튀듯이 다른 데서 살면 된다는 생각으로 계속해서 내가 갖고 있던 나의 고향과 내 뿌리는 절대로 이 땅에서 뿌리박아야 한다는 그런 사고방식으로 사는 거예요. 그런데 이 세상 사람들이 모르는 것은 이 세상 사람들이 뿌리를 땅에 박았다고 자기들은 생각을 하는데 예수님은 아주 극한으로 몰아세웁니다.
네 뿌리는 땅이 아니고 귀신이라는 거예요. 아무리 네가 청소하고 귀신 나가라고 해도 소제되면 귀신이 일곱 친구 귀신 데리고 와서 또 들어가는 겁니다. 신앙생활하고 기도하고 열심히 은혜받았다고 하고 돌아서면 또 마찬가지 되거든요. 이걸 가지고 이렇게 표현할 수 있어요. 수건 돌리는 게임. 수건돌리기 어릴 때 많이 해보셨죠.
“비바람이 치는 바다~”라고 기타 치면서 노래 부르고 있으면 뒤에서 한 명이 딱 와서 수건 놓고 가고 신나게 노래 부르다가 자기 뒤에 수건 있으면 술래가 한 바퀴 돌고 오기 전에 수건 들고 일어나야 게임에서 안 지거든요. 수건 쥐고 후닥닥 돌리면 수건 돌리고 있는 사람의 빈자리를 빨리 남의 자리라고 해도 차지해야 수건돌리기 게임에서 벌칙을 안 받는 거예요.
이 세상은 수건돌리기 게임이에요. 공무원시험이고 대기업 시험이고 뭐고 모든 것이 빈자리 있으면 다 차고 들어가잖아요. ‘일산 아파트값이 얼마냐’라는 것이 전부 다 혹시 돈 벌 수 있는 틈이 있는지, 유동자금이 어디에다 빈자리 치고 들어가면 떼돈을 벌 수 있는가만 눈뜨고 하는데 그거 모르고 빈자리 있는지 두리번거리고 있으면 벌써 다른 사람이 자기 자리 차지하고 있는 거예요.
이 땅이 자기가 뿌리니까. 내가 알고 있는 나는 이 세상이 전부니까요. 그러니 이 세상이라는 것은 예수님 보기에 땅에 뿌리를 둔 것이 아니고 바로 귀신에 뿌리를 둔 겁니다. 귀신은 이미 하나님 앞에 확정 난 존재예요. 지옥 가기로 확정 난 존재가 귀신입니다. 그래서 귀신에 뿌리를 둔 인간들은 악마 따라서 같이 지옥 가서 몰살당하게 되어있어요. 영원한 지옥 형벌을 받게 되어있습니다.
마태복음 16장 18~19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열쇠. 이 열쇠. 갇혀 있다는 뜻이에요. 천국 열쇠라는 말은 베드로에게 주게 되면 이 말은 뭐냐 하면 다른 사람에게는, 그러니까 인간들 너희가 귀신에게 박혀있는 이 형편을 열고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열쇠는 너희에게 없다는 거예요.
없으니까 계속 귀신에게 시달리란 말이죠. 지금은 뭐 돈 좀 있다고 좋다고 하지요. 나중에 마지막에 심판 날에 뭐했나 봐도 아무것도 없어요. 제가 오늘 주일학교 설교할 때 이야기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하나님께서 계명 주니까 이걸 어떻게 다 지키냐, 이걸 지켜야 하냐 했지요. 그러나 주께서 준비하신 게 있어요. 그게 성막인데 성막은 죄 씻어주는 시스템입니다.
율법 주시고 성막 주었다는 것은 죄지으라고 하고 죄 사해주는 장치를 따로 엮어서 만나게 해주신 것은 자기 죄를 모르는 사람은 이 죄 사함의 기쁨도 없는 거예요. 나쁜 짓 해서 죄짓는 것이 아니고 나쁜 짓 해서 죄지었다고 하는 것은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자기가 자기를 평가한 거예요. 이건 아무짝도 소용없어요. 우리 곁에 욥이 와야 해요.
뿌리째 뽑힌 사람, 분명히 같은 인간인데 자기 고향을 놓쳐버린 사람, 주님께서 강제로 와서 조지는 사람, 아주 작살 내는 사람, 아무 죄도 없는데 우리보다 더 심한 매를 맞고 고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 우리보다 죄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아무 죄도 없는데 세상에 온갖 처벌을 다 받는 사람, 여러분은 그런 분을 친구로 삼아야 해요. 그런 분을 여러분이 만나셔야 합니다.
똑같은 인간들 만나지 말고 돈 자랑하는 인간들 만나지 말고 해명되지 못하고 납득되지 못하는 사람을 그런 분을 만나야 해요. 성령께서 우리에게 소개시켜 줍니다. 매일같이 소개 시켜줘요. 너는 너 자신을 모른다. 사실 예수님과 우리는 상관없어요. 오늘 본문처럼 욥의 친구는 욥과 상관없습니다. 욥이 구약 사람이기 때문에 내가 고난받는 것을 왜 너희들 앞에 고난받게 하고 또 너희들은 나를 가만두지 왜 자꾸 나에게 질책을 하고 열 번이나 나를 심하게 학대하느냐.
그건 제가 아까 말씀드렸습니다. 욥의 친구가 욥을 보면서 자기들이 공포를 느끼는 거예요. 왜? 자기가 아는 신학과 지식으로 해명되지 않는 존재가 하나님에 의해서 고통을 받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인간이 이해가 안 된다는 말은 하나님이 지금 욥과 상대하고 있다는 말이거든요. 그러면 하나님이 욥을 상대로 한다는 말은 욥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나타난다는 말은 나를 통해서는 하나님의 뜻이 끊어졌다는 뜻입니다. 나를 통해서는.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되죠. 그러면 하나님의 뜻이 어디 있느냐. 아침에도 이야기했지만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요한복음 14장에 나온 말씀입니다. 나를 본 자가 아버지를 본 거예요. 너희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죠. 이건 지어낸 거죠. 차이가 없는 거예요. 내가 아는 하나님과 나와 차이가 나야 하는데 차이가 없는 거예요.
예수님과 우리와는 차이가 너무 나는 거예요. 너무 나기 때문에 그분 쪽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 되는 거예요. 인간은 그냥 이 세상에서 뺑뺑이 도는 거, 그것밖에 모르지만 지금 욥은 욥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뜻은 한마디로 뭐냐. 욥아 너와 작별해라. 네가 너와 작별해라. 네가 알고 있는 너와 빠이빠이 하라는 겁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 자체를 놓고 주께서 십자가를 가지고 우리 자체를 해부하는 겁니다.
예를 들면 예쁜 티셔츠가 있죠. 우리는 전체를 티셔츠라고 합니다. 이걸 개별 단위체라고 하고 그건 셈하기 대상이 됩니다. 하나, 둘, 셋, 넷,...셈하기 대상이 됩니다. 그러나 그 한 장의 티셔츠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거기에는 가로세로 실로 엮여있어요.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떤 질서가 있어요. 존재가 해체되면 거기에 어떤 힘의 질서가 있어요.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엮여있다고요.
빈공간에 주께서 하신 일로 가로세로 엮인 것이 바로 성도의 아담이라는 몸의 내부구조입니다. 주께서 하신 일과 악마가 하는 일이 가로세로 날줄씨줄로 엮여있는 그 그물구조가 멀리서 보니까 이게 나라는 개별 단위체가 되는 거예요. 모듈(module)이라고 하죠. 개별 단위체. 욥은 자기 내부를 파고 들어갑니다. 어디를 봐서 뭘 봐서 내가 이런 고난을 받습니까.
욥은 해답이 없습니다. 왜? 욥은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에요. 언약이 없어요. 약속이 없어요. 약속이 없다는 것은 비 약속도 없어요. 약속은 비 약속을 겨냥해서 하거든요. 약속된 것과 약속이 안 된 거. 주님 쪽으로 흐르는 것과 악마 쪽으로 흐르는 거. 둘 다 서로 대립 되는 씨줄날줄이 욥은 속에 들어있지 않으니까 전체를 하나의 단위체로 보는 겁니다. 내가 뭐가 잘못되었습니까.
그러나 그 단위체에 보면 인간은 단위체로 보지 말고 해체해 보면 우리 속에 악마에 의해서 생겨난 생각이 있어요. 선과 악으로 모든 것을 본다는 선과 악. 그리고 거기에 성도라면 들어온 것이 뭐냐 하면 생명 나무 과실을 거저 주시는 쪽으로 거저 주심, 은혜, 사랑이 또 하나의 씨줄이 되어서 우리 속에 구조를 이루는 거예요. 사랑이 들어와야 예수님께서 값없이 대신하신 죄 사함의 장치에 의해서 그분이 죄를 사하기 위해서 왔다는 말은 그 말은 뭐냐 하면 우리 자신이 죄 사함의 대상이 된다는 겁니다.
마태복음 9장에 병든 자라야 의원이 필요한 것처럼 내가 병들지 않았다고 굳이 우기는데 예수가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의 필요성을 위해서 굳이 우리로 하여금 매일같이 우리 자신을 네가 선악에 의해서 놀아나고 있고 악마에 의해서 놀아나고 있는 것을 알려주는 그런 사태나 일들을 우리에게 계속해서 부여해주시는 겁니다. 더 쉽게 말씀드릴까요. 갖다 버리라는 말입니다. 너라는 인생 갖다 버려. 갖다 버릴 데가 있어야지.
인간이 주님을 못 믿는 이유는 자기 자신을 해체 안 하고 단위체로 보니까 자신에게 비밀번호를 걸어놓은 거예요. 그런데 그 비밀번호를 풀 수가 없네. 자기가 비밀번호 걸어놓고 ‘몇 번이었더라’ 이러고 있는 거예요. 풀리지를 않는 거예요. 내가 누구인지를 나라는 것이 분명 있는 것 같은데 내가 누구인지를 모르는 겁니다.
그러나 정답을 말씀드리면 나라는 것은 없어요. 마귀에 의해서 나라는 것을 구축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걸 어떻게 푸느냐. 바로 천국의 열쇠로 풀어버리는 겁니다. 천국의 열쇠로.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한다는 말은 더이상 선악이라는 그것으로 네 비밀은 풀리지 않는다. 네 속에 창세 전의 비밀이 담겨 있도록 주께서 그렇게 하신 겁니다.
그것은 갈 수 없는 생명나무에 합류해 주시는 그 비밀, 그 비밀은 바로 감추어진 비밀, 십자가의 비밀, 대신 죽는 것이 비밀이에요. 예수님이 대신 죽으니까 이제는 제발 네 일은 그만 거들고 제발 너 자신을 그만 옹호하라는 그 말입니다. 나 자신을 건들지 말라는 그 말은 이제 그만하라는 거죠. 너 자신을 방어하거나 지키는 그런 쓸데없는 짓은 그만하란 말이죠. 네가 너를 지키는 짓은 이제 그만해라. 그거 피곤한 짓이거든요.
자기가 자기를 단위체로 여기고 지키니까 무서운 거예요. 혹시 내가 부서지고 깨질까 봐. 그러나 사도바울은 복음 안에서 삽니다. 마지막으로 이 말씀 하고 마치겠습니다. 사도바울처럼 성령을 받은 사람은 성령을 받았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이것은 바로 세상을 역겨운 것으로 볼 줄 알아야 그게 성령 받은 사람입니다. 나 자신을 포함해서 내가 하는 짓이 토해내고 싶을 정도로 역겨운 짓이 된다는 거예요.
나를 무시하지 말라는 것이 눈에 막 보이거든요. 눈에 들어오니까 역겨운 거예요. 그냥 복음 받았으면 복음 이야기하면 되는데 자기가 복음 안다고 우기니까 토하려고 하는 거예요. 제발 우리 사이 이야기할 때 복음만 이야기하면 안 되겠어. 나 무시하지 말라는 그런 소리 하지 말고. 왜 복음 이야기가 안 나오느냐. 주님을 안 만났으니까 주님이 나를 얼마나 역겨워하는지를 모르니까 자기는 자기 지키기에 벌벌 하며 공포에 잠겨 있는 거예요.
“가까이하지 마세요”라고 하는데 뭐 가까이해 봐야 실타래 밖에 안 되는데 뭐 있다고. 우리는 생명 나무를 받고 영생을 받았으면 그야말로 사도바울처럼 겁 없이 살아야 해요. 겁 없이 사는 비결 알려 드려요? 천국의 열쇠를? 나를 포함해서 모든 인간은 살아 생전에 역겹다고 보세요. 나이 80 되어서 사진관에서 사진 찍어보세요. 자기 사진 보고 역겨워서 두 번 다시 사진 안 찍는다고 하죠.
인간은 누구나 우리가 모래 위에 집을 짓게 되면 그렇게 모래와 더불어서 악마와 더불어서 악마 존재와 더불어서 닮아가면서 역겨운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우리는 기쁘게 그걸 알려준 주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 너무 안일하게 보았습니다. 그저 잘난 체하면서 누가 누가 잘하나 그거 보았습니다. 아직까지 네 아이 내놓고 내 아이 내놓는 식이 아니라서 우리는 아직 여유 만만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십자가 현장에서 전혀 만만하지 않음을 우리는 몰랐습니다. 날마다 십자가 현장이 우리 삶의 현장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