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강. 조직신학
양자 1-1
05. 12. 12 강의 이근호목사
오늘 이시간은 양자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교재 조직신학의 고속도로 273페이지 양자에 대하여 생각해 봅시다. 양자란 아들은 아들인데 정식 아들은 아닌 것입니다. 원래 출생은 아들이 아닌데 나중에 어떻게 하여서 아들의 신분이 된 자를 양자라고 합니다.
그러니 양자란 말에는 무엇이 포함되어 있는가 하면, 첫 번째는 아들이 결단코 아니다. 절대로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며 될 수가 없다는 것이 명확하게 들어있습니다. 두 번째 들어있는 것은, 아들 아닌데 아들이라고 하였기에 이제는 이 아들의 신분, 아들 됨은 결단코 변할 수 없다. 이 두 가지가 양자됨에 들어있는 것입니다.
아들이 절대로 될 수 없는 자가 아들이 된 것은, 본인이 원한 것도 아니고 아들이 되고 싶은 마음도 없었는데 나중에 아들이 되었기에 이 아들의 신분 된 것에 대하여서는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그 아들 됨의 신분은 확고하며 변하지 않는 것이 다 담겨있는 것이 양자라는 것입니다.
양자라는 말에 대하여 이렇게 말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 자를 하나님의 아들이 될 때는 외부의 능력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바깥에 있는 어떤 분이 계십니다. 그러므로 이 아들 됨에는 결단코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 양자됨이라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다를 공부해보아야겠지요! 로마서 8:15절에 보면,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른다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양자의 영을 받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왜 우리가 아들이 아닌가? 아들이 될 수 없는가 하는 그 이유가 있어야 합니다. 그 이유가 로마서 8장에 의하면, 옛날에 사람들은 집안에 아버지만 사는 것이 아들도 살고 딸도 삽니다. 집안에 아들딸만 사는 것이 아니라 그기에 종이나 노예들이 함께 살고 다른 식구도 함께 삽니다.
어린이 여러분들은 잘 모르겠지만 옛날의 한 집안에는 여러 식구가 살았어요! 목사님이 어릴 때에 집안의 식구가 13명이었습니다. 굉장히 많았지요! 왜 이렇게 많았는가 하면 자식을 많이 낳기도 하였지만 저희 할아버지가 좀 살았습니다. 촌에 있다가 도시에 와서 좀 잘 살게 되면, 촌에 있는 일가친척들이 가난한 자기 집의 식구들을 그 집에 자꾸 맡깁니다.
아이고, 아제요! 우리 아이 좀 맡아 주소! 형님요! 우리아이 식모살이해도 좋으니 밥이나 좀 먹여주소! 옛날에는 형제들이 많았어요. 여러분들은 형제들이 한두 명이지요! 그런데 옛날에는 낳았다 하면 서너 명이고 많은 집은 7명도 9명도 되었어요! 가난한데 아이들은 많으니 먹여 살릴 수가 없어서 좀 산다하는 집안에 맡겨서 허드레 일을 시키면서도 밥이나 먹고 잠이나 재워주면 된다고 맡긴 것입니다. 그래서 딸이면 나중에 커서 시집이나 가고 아들이면 공장에나 보내면 된다는 식으로 도시에 있는 친척들에게 그냥 맡긴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 집에는 아버지와 아들딸만 있는 것이 아니라 종은 아니지만 종 같은 분들이 많이 살고 있었어요! 그런데 아들이나 딸 같으면 나쁜 짓을 하게 될 때에 나무라면 아들딸이 그러면 나 아들딸 안할 거야! 그렇게 하여도 아니지 그래도 너는 내 아들이고 내 딸이야! 이미 태어날 때부터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태어났기에 어떤 잘못한 일이 있더라도 용서 해주고 계속 아들 되게 해 주는 것입니다.
만약에 종이나 노예가 잘못한 일이 있으면 그때 어떻게 합니까? 네가 내 자식도 아닌데 이렇게 도와주고 있는데 네가 그럴 수가 있느냐? 법을 한번 따져보아라. 너는 법에 어긋났기에 너는 나가! 나는 너를 내 보내겠다. 법에 어긋났다고 내어 좇기는 것입니다. 이것을 종이라고 합니다.
아들은 아버지가 낳은 자식이고 그 속은 사랑이기에 아들과 딸이 잘못해도 용서 해주지만 노예들이나 일꾼들은 법에 어긋나면 그 법에 의하여 가차 없이 벌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종입니다.
지금까지 한 것이 너무 어려웠지요! 그래서 새로 하겠습니다. 양자라 하는 것은 어떤 요소 어떤 요소가 있다고 하였습니까? 양자라는 것에는 첫째로 절대로 아들이 될 수 없었다는 것이 있었습니다. 양자는 누가 뭐래도 아들이 될 수가 없었다는 것이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또 있지요! 뭐냐 하면, 일단 양자가 되고 나면 그 아들 됨의 신분은 어떤 경우에도 변한다? 변하지 아니한다? 어떤 경우에도 변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아들 아닌 자를 아들 되게 한 그 외부 자가 아들 되게 하였기에, 그 분이 원해서 아들 만들었기에 이 양자 된 사람이 아들 되고 싶다고 되고 아들 되기 싫다고 안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무조건 하나님의 아들 되고야 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첫 번째 두 번째 순서를 다 알아야 됩니다. 첫 번째 아들이 결단코 아들이 아닌 이유가 무언가 하면, 식구들 가운데 부모와 자식이 있지만 부모 자식 외에도 종과 노예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부모 자식 간에는 법이 없지만 종과 노예에게는 법이 있습니다. 이 법대로 안 지키면 모든 법을 지키지 아니하면 그 집에서 쫓겨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구약 때에 하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가 하면, 법대로 살면 아들이고 법대로 살지 아니하면 아들이 아니라고 하시기 위하여 법을 주신 것입니다. 법을 주니까 이 법을 지켜야 하는데 로마서 8장에 보니 육신에 속한 사람은 법을 지킬 수가 없는 것입니다. 법을 지킬 수가 없기에 저주 받는 종으로서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8장에서 저희가 무서운 종, 무섭다는 말은 법대로 살지 아니하면 항상 벌이 떨어지는 그런 입장에 있는 것입니다. 누가? 종들은 법대로 안하면 항상 매 맞을 준비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린이 들 중에 여러분의 아버지가 학교 선생님이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여러분의 아버지가 여러분의 학교 선생님이라고 하면, 선생님이 숙제를 안 해 오면 벌 받는다고 매를 맞는다고 하면 다른 애들을 무서워요 그러는데 그 아들은 발 냄새나는 아버지, 술 먹고 늦게 오는 아버지, 아버지 다 알지 집에서도 안 때리는데 때릴 리가 있겠어! 하면서 웃을 거예요! 다른 아이들이 무섭지 그러면 하나도 무섭지 않다고 할 거예요!
이게 무어냐 하면 종은 무서운 영이고 아들은 사랑의 영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인간도 구약성경대로 아들이 될 수가 없습니다. 왜 그런다 하면, 지금까지는 어린이 여러분들도 이해하기가 쉬웠을 텐데 지금부터는 어른들도 이해하기 어려운 그런 이야기를 하겠어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을 사람들은 어떻게 들었는가 하면 아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주시고 그 아들을 인하여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구나! 하나님의 나라도 가족이 있구나! 이렇게들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잘못된 생각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라는 이 말씀은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알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에 아버지에 대하여 하나님에 대하여 아는 사람은 나 예수뿐이라는 것입니다. 그 외에는 이 세상의 어느 인간도 하나님을 알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굉장히 어려운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모르고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은 성경 출애굽기 4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자기 아들 삼기 위하여 출애굽 시켰다고 되어 있으니 자기들은 하나님의 아들이고 하나님은 자기들의 아버지인 줄 그렇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 오실 때 까지 그런 줄 알았습니다. 그들은 구약성경만 가지고 있으면 언제든지 하나님 아버지를 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를 알기 때문에 당연히 자기들이 아버지의 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여긴 것입니다. 아버지를 아는 사람이란 아들밖에 없다고 여겼기에 그들은 안심 푹 놓고 그들은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런 자들을 향하여 너희의 아버지는 마귀라고 하였습니다. 악마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유대인들만 해당됩니까? 모든 사람들에게 다 해당되는 말씀입니까? 모든 사람들에게 다 해당되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은 악마라고 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뭐든지 신성함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지금부터 어렵습니다. 사람들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온 뒤로 무언가 신성한 것, 무언가 거룩하고 신성한 것을 이 자연세계에서 계속하여 찾아왔습니다. 어떤 계시, 꿈, 위대한 조상, 위대한 기적, 장소, 위대한 산, 효과 있는 산, 어떤 성막기구, 모세의 지팡이, 그리고 언약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을 통해서 신성한 것에 대하여 접촉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을 신성시 하고 그런 것을 찾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만이 아니라 아브라함 이전에 셈과 함과 야벳이 이 땅을 통제할 때에 사람들은 바벨탑을 만들었습니다. 그 바벨탑은 그 당시에 최고의 신성한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우상을 만들었습니다. 인간들은 계속하여 신에 가까운 것을 만들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만났던 산 그 산이 무슨 산이죠? 시내 산이죠! 그 시내 산이 신성합니까? 거룩한 곳입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시내산 꼭대기까지 관광버스가 갑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시내산에 하나님께서 한번 오셨다고 해서 함부로 가면 안 되고, 자꾸만 무언가 특이하다 싶으면 신성시 하는 것입니다.
한국에 옛날 기독교가 오기 전에 1884년 아펜셀러와 언더우더가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들어오기 이전에 옛날 할머니들은 꼬부라진 그냥 밋밋한 나무가 아니라 꼬부라진 느티나무라든지, 아주 괴괴하게 생긴 바위덩어리라든지, 서쪽 하늘에 떠오르는 샛별, 그리고 자다가 꾼 희귀한 꿈, 그런 것들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였습니다.
만약에 비가 오지 않으면 그런 나무에 새끼줄을 쳐서 모든 사람들이 사물놀이도 하고 무당 불러서 굿도 하고 그렇게 신을 달래서 비가 오게 하려고 요청을 하고, 그리고 팥죽을 만드는데도 귀신이 끼이면 안 되고, 이사를 하는데도 귀신이 끼이면 안 되고, 결혼을 하는데도 날 받아야 되고, 전부다 사람들은 신성함에서 벗어날 생각을 안했습니다. 신성함이 없으면 허전해요!
축구시합을 하는 선수들도 안정환 같으면 무엇을 달고, 이천수 같으면 손을 안 씻는다든지, 박지성은 무엇을 하는지 모르겠어요. 어떤 사람은 손톱을 깍지 않는다든지 하면서 그런 것을 부적처럼 무언가 옆에 두어야 비로소 자기가 안심을 하는 것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인간들의 버릇이었습니다.
신성한 것을 찾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슨 신성한 것들을 찾는가 하면, 요단강을 건너온 것, 홍해를 건너 온 것, 하나님이 주신 십계명, 언약궤, 이런 모든 것들을 신성하게 본 것입니다. 거룩하게 본 것입니다. 그런 것을 소지하고 그것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그 자체가 누가 뭐래도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외치며 살아온 것입니다.
그러한 예가 있는데 날이 따듯하고 하니 잠이 오지요! 성경 한번 찾아봅시다. 사사기 8:22-27절까지 제가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22 ○때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이르되 당신이 우리를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셨으니 당신과 당신의 아들과 당신의 손자가 우리를 다스리소서 23 기드온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하겠고 나의 아들도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시리라 24 기드온이 또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한 일을 청구하노니 너희는 각기 탈취한 귀고리를 내게 줄찌니라 하니 그 대적은 이스마엘 사람이므로 금 귀고리가 있었음이라 25 무리가 대답하되 우리가 즐거이 드리리이다 하고 겉옷을 펴고 각기 탈취한 귀고리를 그 가운데 던지니 26 기드온의 청한바 금 귀고리 중수가 금 일천 칠백 세겔이요 그 외에 또 새 달 형상의 장식과 패물과 미디안 왕들의 입었던 자색 의복과 그 약대 목에 둘렀던 사슬이 있었더라 27 기드온이 그 금으로 에봇 하나를 만들어서 자기의 성읍 오브라에 두었더니 온 이스라엘이 그것을 음란하게 위하므로 그것이 기드온과 그 집에 올무가 되니라?�
전쟁에서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서 승리하게 되니 사람들은 기드온을 신성시 하고 그 가문을 신성시 하여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이 기 기드온 가정에만 임하는 줄 착각한 것입니다. 그리고 전쟁에서 승리한 기념으로 에봇을 만들고 그 거룩한 옷을 만들기 위하여 금귀고리 패물로 만들었습니다. 그것에서 하나님의 어떤 힘이 솟아나는 것처럼, 신기한 능력이 나오는 것처럼 그것을 음란하게 섬겼습니다.
이게 하나님의 아들답습니까? 이것이 하나님의 아들입니까? 이것은 인간들이 전혀 하나님에 대하여 아는 바가 없고, 그것은 스스로 신이 되고자 한 악마적인 본성을 유감없이 발휘한 것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본다고 해서 여러분 속에 있는 악마적인 본성이 사그러 들 거라고 생각하신다면 엄청난 오산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경책이 아니라 꿈에 예수님이 나타나신다고 하여도 사람들은 그 예수를 보고서 사람들은 자기 속에 있는 악마적인 속성을 유감없이 멋들어지게 발휘하는 것입니다. 신성한 것은 없습니다. 없는데 있었으면 좋겠다는 것이 우리의 본성입니다.
여러분 십자가를 아십니까? 십자가는 모든 신성한 것들을 자근자근 아예 박살을 내는 사건이 십자가 사건인 것입니다. 주님은 말도 다 할 수 없이 초라하셨습니다. 더 노골적으로 말해서 십자가 믿고 천당 갈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 믿고 천당 간다면 마치 십자가가 신성시 되고 십자가가 기드온의 에봇과 같은 것이 되는 것입니다.
가수들이 십자가 목걸이 하고 있고 차안에 십자가 달랑달랑 걸어놓는다고 해서 효과 보는 것 아닙니다. 십자가라는 것은 십자가조차 신성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사람들은 신성한 것들을 찾으려고 하지 말고 아예 내 쪽에서는 하나님을 알 수 없는 것이라고 마음을 다잡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하나님을 알다니! 그 자체가 사기이며 나답지 않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모릅니다.
그때그때 마다 하나님께서 알게 해주셔야지! 어떤 지식 하나 확보하였다고 그것 가지고 계속 세 차례 네 차례 우려먹고, 작년에 은혜 받은 것 올해까지 써먹고, 1월 달에 은혜 받은 것 12월 크리스마스 까지 써먹고, 그 사람이 하나님을 압니까? 이미 내부에서 신성시 된,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받을 수밖에 없는 가짜배기 하나님 상이 굳어져 버린 것입니다. 그런 쓰레기는 아침마다 오는 쓰레기 치우는 차에 버리시기 바랍니다. 한달에 3천원주면 시에서 와서 쓰레기 비웁니다.
생각한번 해 보세요! 주님을 우리로 하여금 매일같이 죽기를 원하시는데 우리는 하나님을 안다는 그것 가지고 살려고 버티고 있으니 어떻게 그것이 주님의 뜻과 같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야! 이근호, 너 뭐 아냐? 압니다. 너 죽어야겠구나! 너 뭐 좀 아니까 내 더 이상 필요 없네! 예 이 정도 알았으니 이제 주님이 필요 없습니다. 알아서 그러면 너 혼자 천당가봐! 그러면 지옥 갈 거야!
어이 이근호 너 뭐 좀 아냐? 제가 무엇을 알겠습니까? 주님께서 알려 주어야 알지요! 그러면 아직도 날 필요하나? 아직도 주님 없이는 안 되지요! 아직도 만이 아니라 지금도 주님이시고, 내일도 주님이어야 합니다. 그러고 싶습니다.
사람이 무언가 신성한 것을 잡겠다는 것은 그것이 신성한 것이 아닙니다. 이 자연세계는 신성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왜? 변명해야 되기 때문입니다. 여기 비타 500이 있습니다. 신성하지 않습니다. 이것 마셔버릴까? 신성하지 않습니다. 어떤 것도 신성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신성하게 본다는 것은 내 속에 진짜 예수님을 거역하는 진짜 예수님을 대적하는 어떤 요소가 들어있기에 우리는 자꾸만 자연 세계 속에서 신성한 것을 하나 붙잡고 고정시키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을 보고 주님께서는 우리를 향하여 너희 아비는 악마이며 너희는 악마의 자식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서기 200-300년 사이에 그 당시 교회는 많은 사람들을 교회로 끌어 모으기 위하여 교회에 여러 가지 신성한 용품들을 끌어 모으면서 그 항목이 늘어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촛불을 켜면 그 촛불이 신성한 것, 강대상도 신성한 것, 심지어 그런 물품만이 아니라 스케줄도 신성하게 만들었습니다. 11시 예배의 신성함, 그 다음 기도순서도 신성함, 예배순서도 신성하고 계속하여 신성한 것을 끄집어내는데 심지어 병자에게 뿌려준다는 물까지 신성하게 여겼습니다. 그것 조사해보세요! H2O 물밖에 없습니다.
거기다가 서기 500년이 되면 어떤 떡을 가지고 그 떡이 신성하다는 것입니다. 그 떡을 뭐라고 하는가 하면 자발적으로 활동한다고 한 것입니다. 성례식에 사용한 떡과 잔은 마치 귀신처럼 저 혼자서 돌아다니면서 활동한 다는 것입니다. 그 떡과 포도주가 돌아다니면서 다 한다는 것입니다. 마치 사사시대에 언약궤가 블레셋에서 적을 물리치고 돌아오는 것처럼, 그 뒤에 보면 성례식 하는 그 물도 신성한 물이라는 것입니다. 보통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냥 물로 있을 때는 물이지만 신부가 뿌리면 신성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왜 자꾸만 신성한 것들을 만들어 내는가 하면, 사람들이 교회에 올 때에 자기가 지옥 안가고 천당 가고 싶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싶어서, 신성한 것에 접촉을 하고 싶은 것입니다.
신부도 신성하고 목사도 신성하고, 나중에는 예배당 자체도 신성하고, 그 예배당의 벽돌 하나하나가 다 신성하고, 예배당의 샹데리아가 가게에 있으면 안 신성하지만 예배당이 들어오면 신성하고, 여기도 신성한 것이 세 개 있네요! 형광등도 신성하고 선풍기도 신성하고 에어컨도 신성하고, 저것은 무엇입니까? 온풍기도 신성하고, 심지어 쓰는 목사님이 쓰는 안경도 신성하고 여러분이 쓰면 안 신성하고 목사가 쓰면 신성하고,,,,
진짜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성령이 왔다면, 십자가 사건을 아신다면, 이 자연세계에 신성한 것은 이미 박살났다는 그런 인식을 평생 여러분들이 간직해야 합니다.
다시 이야기 합니다. 사람들이 신성한 것을 만들고자 하고 찾고자 하는 이유는 자신이 자기 힘으로 자기 인식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이미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뒤에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은 해당사항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해당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은밀하게 곱게 자기 아들만을 감추어놓고서는, 앞서서 율법을 던져놓고서 하나님의 아들도 아닌 자들이 내가 던져준 율법을 가지고 얼마나 하나님의 아들 되고 싶어서 환장하고 있는지를 똑똑하게 보게 하시고서는 마지막 때에 숨겨놓은 진짜 자기 아들을 보내셔서 너희 아비는 마귀라고 한 것입니다.
여호와 섬기고 십일조 하고 구제하고 종교적인 행사를 다 하는 너희들의 그 짓들이 너희 아비 마귀에게 배운 짓이라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자연물을 가지고 신성한 것으로 변모시키고자 하는 그들의 악마적인 품성을 유감없이 발휘한 증거물로 보는 것입니다.
여러분 회개하세요! 여러분 속에 신성한 것을 따로 숨겨 놓았다면 회개하세요! 회개하라는 말을 몇 십 년 만에 처음 씁니다. 부흥사도 아니고, 안 쓰려고 하는데, 너나 잘하세요! 할까봐서, 진짜 회개하세요! 여러분의 기도 시간이 신성하지 않았습니까? 여러분이 성경 읽은 것을 신성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하여튼 이 자연물 속에서 눈에 보이는 것들을 신성하다고 따로 분류한 것이 있다면 회개하세요! 그것이 다 여러분 속에 마귀가 만든 장난들 이었습니다.
몇 년 전에 은혜 받은 것을 신성시 여기고 있다면 그것 회개하여야 합니다. 지금도 날마다 햇빛과 공기를 주시고 지금도 별을 아름답게 빛나게 하시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신성한 것이 아니고, 몇 년 전에 은혜 받은 것 그것을 신성하게 여긴다면 여러분들은 그것 회개하여야 합니다.
서기 400년이 지나면 일년 카렌다 자체가 신성합니다. 동그라미 친 날이 왜 그렇게 많은지! 성 베드로 돌아가신 날, 그냥 바울이 아니라 성 바울 죽었던 무덤을 신성시 하지 않나! 그 무덤에서 샘이 나왔는데 그 물을 찍어 바르면 병자가 낫는다는 그런 기적을 만들지 않나, 성 바돌로메 축제, 마리아 생신날, 부활절 무슨 날, 맥추 감사 주일날, 추수 감사주일날, 일년 스케줄에 얼마나 동그라미 쳐진 날이 많은지,,,,
교회가 그럴 때에 민중들은 교회가 시키는 대로 하면 자기도 신부님처럼 하나님의 아들 되는 줄 알고 지켰습니다. 그런데 그 달력에 동그라미 쳐진 그 수많은 날들이 오딘, 게르만 민족의 자기 토속신들 영토의 신들의 탄생일들 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게르만 족의 신들은 어디서 나왔는가하면 별의 이동을 따라서 별이 뜨고 지는 것에 따라 태어나고 지는 것입니다. 크리스마스도 마찬가지 12월 25일 태양신을 섬기던 날입니다.
그런 것들이 교회에 수입된 것입니다. 왜 수입이 되었습니까? 교회의 목적은 사람 끌어 모으는데 있습니다. 넓은 지역에서 무언가 신적인 요소가 있다면 그것도 신적인 것이 잠재되어 있는 것이기에 인정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명칭만 바꾸라는 것입니다. 명칭만 바꾸고 세례만 받으면 다 기독교식으로 만들어 주겠다는 것입니다. 해서 로마 제국은 전 국토의 신자화를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생각해보세요! 주일 낮 11시에는 주님이 오시고, 수요일 저녁은 천사가 대리로 옵니까? 목사님은 안 그렇겠지만 일반 교인들은 수요일을 약간은 시시하게 보지요! 그리고 주일날은 사람들이 꼭 지키려고 그것도 양복입고 옵니다. 왜 그런 것입니까? 그것은 간단한 심리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고스톱을 쳐도 판이 크면 구경꾼이 많습니다. 그런데 세 명이 치다가 한 사람이 빠져 버리면 재미가 없어 치우라고 하는 것입니다.
도대체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 대하여 몰라요! 얼마나 신성한 것을 찾고자 하는지 그 종교성을 본인은 몰라요! 다만 자기 속에 신성한 것이 있다면 대견스럽게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입니다. 내가 신을 아는 구나! 그런데 이러한 사실을 마귀가 만들어 낸 것인 줄을 모르고 20세기에 들어가면 유명한 신학자 두 사람이 있습니다.
그 두 사람은 신 정통주의에 속한 한 사람인 부루너가 있고, 또 한 사람은 보수주의 곱하기 근본주의 할 만큼 보주적인 코넬리우스 벤틸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의 공통점이 무언가 하면 접촉점을 이야기 하였습니다.
그런데 칼 바르트는 신자와 비신자 간에 접촉점이 전혀 없다고 하는 반면에 부루너와 또 한 사람이 있습니다. 아브라함 카이퍼라는 사람 19말과-20세기 초의 네덜란드의 개혁주의자입니다. 이 아브라함 카이퍼의 이론은 고신측의 정통 이론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 아브라함 카이퍼의 제자가 누구인가 하면, 헤르만 바빙크입니다. 벤틸의 스승은 메이첸, 메이첸의 스승은 워필드, 워필드의 스승은 하지, 하지의 스승은 조나단 에드워드, 조나단 에드워드의 스승은 툴레티, 툴레티의 스승은 칼빈 이렇게 족보가 나옵니다.
그런데 칼 바르트는 말하기를 하나님의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간에는 어떤 접촉점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당신은 왜 전도하는가? 전도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증거 하는 그것이지 그 증거를 접촉점으로 보면 안 된다. 십자가가 그것을 보여 주었다고 하는 반면에 이 부르너라는 사람과 아브라함 카이퍼라는 사람은 일반 은총을 이야기 합니다.
일반은총이 무엇이냐 하면 인간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기 전부터 인간은 그 전에 다른 것을 받았는데 그것이 일반은총이라는 것입니다. 아담이 비록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도 가정을 만들고 사회를 만들고 열심히 일해서 빵이 생기니 이렇게 빵이 생기는 것이 하나님의 은총이라고 본 것입니다.
이렇게 일반은총을 이야기함으로 접촉점을 이야기 하는 코넬리우스 벤틸 같은 사람은 무엇이라고 하는가 하면, 모든 인간이 신을 알고 있다는 것을 접촉점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계시고 그 하나님 아래서 벗어날 수 없기에 인간이 어떤 신적인 존재를 안다는 접촉점을 말한 것입니다. 그런 접촉점이라는 종교성에 복음을 입혀버리면 그들이 예수를 믿을 가능성이 있다고 본 것입니다.
왜 사람들이 이런 접촉점을 주장하고 있는가 하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벌을 내리는 것은, 적극적으로 벌을 내리시는 것이 아니라 하다 하다가 안 되니 진짜 못된 놈만 골라서 벌을 내린다는, 하나님께서는 벌주는 것을 굉장히 소극적으로 하신다고 보기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너무나 자비로운 분이기 때문에 지옥을 만들어 놓았지만 될 수 있는 대로 지옥에 오지 마라는 쪽으로 사람들에게 사랑과 은총과 자비를 베풀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옥을 만들어 놓고도 여기에는 오지 말라고 당부를 하는데 그 당부마저 거절하는 그런 못된 놈은 집어넣어도 자기 책임으로 물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처음에 만든 그 인간이 아니라면 하나님은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은 인간이라는 쓰레기 더미로 보면 됩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하나님이 요구하는 사람이 없다면 그 자체가 쓰레기 더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면 대충 의인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진짜입니다. 의인은 없습니다. 한 사람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욕 얻어먹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면, 자기 빼 놓고 모든 사람을 죄인으로 몰아넣기 때문에 예수님이 욕 얻어먹은 것입니다. 심지어 사람들이 바나바를 원할 정도로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나쁜 인식을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좋아할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신성시 되었다면 누가 좋아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예수님은 절대로 신성한 것을 용납하지 아니하고 자기를 따르는 자들에게 같이 죽자, 자기 목숨을 얻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고자 하면 얻을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자기 목숨을 얻고자 예수님을 따른다면 잃어버린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위하여 죽자. 예수님을 위하여 죽는 자 만이 산다고 했을 때에 그 말이 십자가 앞에서 어느 누구도 지킨 자가 없고 심지어 수제자 베드로조차 도망을 다 간 것입니다.
모든 것이 헛방입니다. 예수님을 믿었던 3년 세월이 허구로 헛방으로 빈털터리로 다 날아간 것입니다. 그것이 후회스럽습니까? 그것이 무엇이냐? 예수님을 믿으면서 무언가 기대한 것이 있었다면 그 기대한 것이 나빴습니다. 내가 예수님 앞에 의롭기를 바랐다면 그것이 나빴습니다. 그것이 또 하나의 신성시였습니다.
분명히 구원이라는 것은 죄인을 예수님 쪽에서 나오는 십자가의 능력으로만 구원하여 주면되는데 그것이 아니라 무언가 내 쪽에서 기대한 것이 있으면 기대한 그것이 나에게 주어진다고 여기는 이러한 계산, 통박, 그것마저 버려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마저 욕 얻어먹을 신성한 것입니다.
지난주에 한 것인데 이 둘 중에 어느 것이 정답인지 여러분이 한번 답변해보세요! 어떤 사람은 칭의, 의로움에 대하여 예수님의 의가 우리 속에 주입되어서 그 주입된 의로서 우리가 의로운 행동을 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것을 칭의로 본 것입니다. 다시 말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의가 전적인 죄인 인 우리에게 주입이 되어서, 주입이란 주사기로 몸 안에 밀어 넣듯이 주입이 되어서 그 의가 우리 안에 있어서 그 의로 말미암아 의로운 행동이 나온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우리는 계속 죄인 인데, 의가 우리에게 주입되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주지 않고 의인으로 간주해 주신다고 했습니다. 둘 중에 어느 것이 맞습니까? 1번 2번 어느 것이 맞습니까? 3번 둘 다 틀렸다. 몇 번입니까? 3번이 수상하지요!
1번이 성화론입니다. 칭의 다음에 성화라는 것입니다. 칭의 된 사람은 그 다음부터 율대로 살수 있다는 것입니다. 율법대로 산다는 것은 율법을 문자적으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 율법이 사랑을 요구하기에 사랑을 보여 줄 수 있다는 것이 성화의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2번은 어떤 죄인이라도 의인이라고 간주하여 준다는 이 사고방식은 성경적 사고방식이 아니고 구원에 관심을 깊이 가지기 때문에, 마치 칭의가 구원에 관계되는 것처럼 생각하기에 이런 생각이 나오는 것입니다. 나 어떻게 구원받지? 의롭다고 간주하여 주면 구원 얻는구나! 야 신난다. 이런 식입니다. 둘 다 틀렸습니다.
세 번째가 무어냐 하면 주입도 아니고 간주도 아니고 주님께서 우리를 삼켜 버리지요! 주님의 의가 우리를 삼켜 버리는 것입니다. 그 순간부터 우리는 뭐가 되는가 하면 의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이 의는 우리가 착하게 한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통해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와 은혜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제가 지난 한달 전에 이야기 하지 않았던가요? 이것은 세 번째 이야기 하였습니다. 이것은 통치 개념입니다. 지배하는 것입니다. 통치하고 지배하는 것입니다. 야! 구원 받았다. 그런 뜻이 아닙니다. 이제는 주님에게서 못 벗어나게 되었구나! 그런 뜻입니다.
칭의 라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삼켜 버려서 심지어 우리 목숨까지 삼켜버린 것입니다. 너는 이미 죽었고 너 안에 사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산다. 삼키는 것입니다. 왜 3번에 대한 이야기를 저번에 하고서도 이번에 빼놓고 이야기 하였는가 하면, 칭의 라는 이 이야기 자체를 자기 구원론에 집어넣어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잘 들어보세요! 이번시간 제일 중요한 대목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의롭게 하시는 이 칭의가 자기 자신을 신성화 하는 그 버릇을 또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칭의가 왔기에 나는 너와 달라. 나는 하나님의 아들로 신성해 하면서 자신을 신성화 하는데 하나님의 아들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양자일 뿐입니다.
양자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하면, 우리는 절대로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었다는 내말을 알고 있는 사람이 진짜 양자입니다. 우리의 아비가 마귀였는데 지금은 아버지가 바뀌어서 하나님이 아버지가 된 것입니다. 이렇게 된 것은 나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절대로 나는 아버지를 알 수가 없었는데 다만 내가 아는 것은 예수님 안에 아버지가 있다는 것을 알뿐입니다. 그것이 바로 양자의 뜻입니다.
좀 쉽시다. 녹취 060427 이장우
양자, 성화 1-2
05. 12. 12 강의 이근호목사
두 번째 시간 시작합니다. 지난 시간에 십자가 사건이 무엇이라고 하였지요? 십자가 사건이란 십자가 밑에 모든 신성한 것, 거룩한 것들을 전부다 모조리 깨어버린 것입니다. 이 세상에 신성한 것들을 가라는 것입니다. 어떤 것도 거룩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늘에서 온 것이 아니라 땅에서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땅에 것만 생각하고 나는 하늘의 것만 생각하는구나! 그러니 기껏 땅의 것을 만들어 가지고 거룩하고 신성하다고 이 성전이 거룩하다고 이것을 헐어버려라 내가 진짜 신성한 성전을 3일 만에 다시 짓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기도하는 집을 3일 만에 짓겠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은 그 집은 부동산이나 건축물이 아닙니다. 건축물은 3일 만에 짓지 못합니다. 그것도 모르고 그 당시 유대인들은 성전을 거룩한 건축물로 생각하였기에, 예수님이 3일 만에 성전을 짓는다고 우리는 46년 만에 지었는데 3일 만에 지을 수 있느냐는 그런 오해가 십자가에 까지 따라옵니다.
십자가형에 처하라는 고소가 무엇인가 하면, 성전을 헐고 3일 만에 짓는 자라고 고소하여 십자가에서 죽게 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하였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하면, 자기들의 죄인인 것을 모르고 자기들에게서 거룩하고 고상하고 신성하고 위대하다고 여기는 것들을 근거로 해서 그기에 비하여 예수님은 모자라고 부족하기에 저런 인간은 죽어야 한다고 외쳐서 죽은 사건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따라서 십자가 사건을 가지고 다시 세상을 조명해 보면, 사람들이 이것은 거룩하다. 이것은 신성하다. 이것은 누가 뭐라고 해도 하나님의 뜻이다. 이것은 의로운 것이다. 라고 우긴 것 때문에 십자가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사건을 가지고 도로 그 쪽을 바라본다는 것은, 사람들이 끄집어내는 모든 거룩한 것은 십자가의 원수이며 하나님의 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거룩하고 깨끗한 것을 끄집어 낸 다는 것 자체가 잘못된 정도가 아니라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가려버리고 하나님의 일을 망쳐 버리고 훼방하는 적 그리스도적이요 악마적인 최후의 모습들이 신성한 것들을 찾는 그 모습들입니다.
그런데 세계의 교회는 어떻게 했습니까? 예수님께서 뭉개어버린 그것을 다시 신성한 포장지로 바꾸어서 온갖 이 세상의 더러운 것들을 다 끄집어내어서 그 더러운 것을 거룩한 것으로 바꾸어서 그것을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주워 모아서 그 기독교 없이는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그렇게 사기극을 쳐 온 것입니다. 거짓말 해 온 것입니다.
그러면 아들이 된다는 발판이나 바탕은 없는 것입니까? 없습니다. 그러면 아들이 될 수가 없겠네요! 아니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아들이 있는데 뭘 또 다른 아들이 필요한 것입니까? 보세요! 우리가 지금 하나님의 입장에서 생각하지 않은 것입니다. 내 입장을 생각한 것입니다.
어떤 재벌가정에 아버지가 있고 재벌 2세인 아들이 엄연히 있는데 어떤 이상한 놈이 와가지고 재벌님 저도 아들 되게 해 주세요! 저도 상속자 되게 해 달라고 한다면, 나에게 상속할 아들이 있다고 하면서 그 사람을 좇아낼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인간이 아들 된다는 것은 예수님만으로 충분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 밖에 없다고 해서 하나님이 슬퍼하시거나 섭섭해 하시지 않습니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하나님은 숫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아들다운 아들만 원해야 하나님답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내 아들을 보라! 내 기뻐하는 자를 보라! 그리고 모든 만물들아 내가 좋아하는 그 아들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면 그것이 나의 영광이다. 이걸로 모든 일은 종결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영광과 기쁨은 예수님으로 인하여 종결된 것입니다.
자 그러면, 첫 번째 양자 됨이란 무엇이라고 하였습니까? 그 누구도 아들이 결단코 될 수가 없었다. 하는 첫 번째 이야기를 지금까지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인간들 속에서 가짜 하나님 가짜 아버지를 자꾸 만들어 내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의 어떤 여성 신학자들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고 하지 말고 하늘에 계신 어머니라고 해야 한다고 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어머니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이렇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아버지라고 하게 되었는가 하면, 그 당시 로마시대에 아버지만 가장이 되고 어머니는 안 되기에 그렇게 되었는데 요즈음은 시대가 바뀌어서 하늘에 계신 어머니라고 하여도 무방하다고 그것을 새로운 신학이라고 선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까 제가 이야기를 하였지요! 예수님께서 아버지라고 하신 것은 무슨 뜻이라고 하였습니까? 어느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를 자격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왜? 율법에 의하면 저주를 받을 자이기에 감히 율법을 이루지도 못한 주제에 어디에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입니까? 율법의 저촉을 받는 자는 종이지 아들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주었다는 말은 이미 아들이 아니라 육신에 속하였고 종에 속하였고 죄의 종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려 주기 위하여 율법을 준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 아래 있는 인간은 어떤 인간도 하나님의 아들 될 생각을 아예 먹지 마세요! 어떤 인간도 율법에 안 속한 사람이 없고 어떤 인간도 율법에 안 속한 인간이 없습니다. 이것이 첫 번 째입니다.
그런데 로마서 8장에 보니까,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 등장한 것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무슨 영이라고 합니까? 양자의 영이라고 합니다. 양자의 영을 받았기에 아바 아버지라고 합니다. 아바 아버지라는 말은 친 아버지라는 말입니다. 아바란 친아버지를 말합니다. 아바 그룹이라고 옛날에 호주의 그룹을 알지요! 아바란 말은 자기 아버지를 친근하게 부를 때에 아바 아빠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분은 누구 밖에 없는가 하면 진짜 아들 되시는 예수님께서 지상에 계실 때에 평소에 아바 아버지라고 불렀습니다. 경상도 말로 하면 아버지예 이렇게 됩니다. 예수님만이 부를 수 있는 아바 아버지의 그 마음을 누구에게 집어 넣어주는가 하면, 예수님이 머리가 되고 그 몸을 이루는 많은 지체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만 하나님께 영광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몸을 구성하기 위하여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특권을 특정 사람들에게 성령을 통하여 집어 넣어주신 것입니다. 무엇하라고? 예수님의 자기 몸을 이루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몸은? 이제 우리 몸은 없습니다. 사나 죽으나 주의 것입니다. 사나 죽으나 주의 몸입니다. 우리 몸은 없습니다. 몸도 하나이요.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입니다.
예수님의 몸을 이루기 위하여 한 성령으로 마시게 하여 그 성령이 오게 되면 직업과 나이와 상관없이 예수님의 몸이 되며 그 예수님의 몸을 이루는 전체 사람들이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진짜 아버지를 부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과 예수님의 몸에 대한 관계를 성경에서 형제라고 부릅니다.
그 형제라는 말이 히브리서 2:11-12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 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 이렇게 되어 있지요!
내가 그들을 형제라 부르기에 부끄러워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세상적으로 봐서는 절대로 형제라고 간주 안할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세상적으로 봐서는 주님이 아니고 다른 사람이라면 어떤 경우에도 내 동생이라고 부를 수 없는 그런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봐서 우리가 잘나서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세상적으로 봐서는 저 같은 사람이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가 없습니다. 왜? 하나님의 법에 의해서 우리는 온유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산위에서 설교하신 말씀 중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온유하니 너희도 온유 하라.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들은 온전하게 되어야 한다. 세상에 온전하게 된다는 말이 얼마나 어려운지 아십니까? 내 말을 듣고 다 지키지 아니하면 모래위에 지은 집처럼 무너진다고 하였습니다. 먹을 것과 마실 것에 대하여 염려하면 그 사람도 안 됩니다. 원수를 미워하는 사람도 안 됩니다.
예수님은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너에게 잘해 주는 사람에게 잘해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그 은혜를 되갚을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하여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야 하늘나라의 상이 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 장난이 아닙니다. 정말 어렵습니다.
그보다 더 어려운 것은 나를 따르고자 하는 자는 모든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다 나누어 주고 빈털터리가 되어서 나를 따르라고 한 것입니다. 그렇게 따른 사람 손들어 보세요! 그렇게 따른 사람 아무도 없지요! 그렇다면 그렇게 따르고 싶은 사람 손들어 보세요! 얼른 내려야지요! 없어요! 아무도 없습니다.
영생을 얻는다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테레사 수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되지를 못했습니다. 슈바이처도 그렇게 되지를 못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인간은 정말 천국은커녕 지옥가도 맞습니다. 마땅합니다. 지옥을 천 번을 더 가도 마땅합니다. 하는 고백을 할 수밖에 없는 정도로 평소에 부끄럽게 살아가는 자들이 바로 너희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해도 이렇게 부끄러운 자들인데 주님께서 이런 부끄러운 우리를 부끄럽게 여기지 아니하시고 감히 너희는 내 형제라고 불러주시는 은총, 그 은총사이에 무엇이 있습니까? 제가 크게 쓰겠습니다. 고난입니다. 이것이 히브리서 2장에서 말하는 고난입니다.
여러분들이 예수님의 아픔 때문에 울어본 적이 있습니까? 돈 사기 당해서 울어본 적은 있을 것입니다. 아이들 공부 안 해서 성적 떨어져서 울어본 적은 많을 것입니다. 주여! 성적 올라가게 기도하였는데 이 기도가 허사로 끝났습니다. 40명 중에 39등 했으니 예수님 믿는 애가 이럴 수가 있습니까? 부끄럽습니다. 살아야 합니까? 죽어야 합니까? 하면서 통곡하며 울어본 경험이 있을 지는 모르겠습니다마는 예수님을 위하여 예수님 때문에 울어본 적이 언제입니까?
십 오년 전입니까? 예수님 때문에 나 같이 철없고 나 같이 죄 많은 인간을 위해서 내가 당할 고생을 다 당하시고 채찍에 맞았다는 그 사실로 인하여 미안스럽고 그 예수님께 누가 된다는 것 때문에 너무나 죄송해서 울어보신 적이 언젯적 경험입니까?
그래놓고도 IMF 터졌다고 짜증내고, 비정규직이라고 데모하고, 수당 안 나온다고 삐지고, 휴가 안준다고 뭐라고, 다방에서 커피 맛없다고 짜증내고, 차타고 가다가 퍼졌다고 신경질 내고, 목사님 축복이야기 적게 낸다고 짜증내고, 목사는 헌금 적게나온다고 화내고, 그 모든 것이 결국 무엇이냐 하면, 자기 신성화, 예수 잘 믿는 나를 왜 위대하게 하지 못합니까? 하는 자기 신성화의 옛 버릇이 되살아나서 일어난 현상이지 언제 예수님께서 부끄럽기 짝이 없는 창기와 세리 같은 나 같은 죄인을 위해 고난 받으신 것에 대해 죄송스러워 눈물 흘려본 적이 언제입니까?
그런 일이 한두 번이나 있었습니까? 그런 일이 있었다면 축하드립니다. 예수님의 아픔 때문에 울지를 않습니다. 일반교회에서는 금요철야를 합니다. 여기서는 하는지 모르겠는데 커피 마셔 가면서 철야 기도를 하는데 그 철야기도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런데 고린도전서 13장에 보시면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사랑은 자기의 유익, 자기의 이익을 구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에 대하여 우리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에게 보내는 사랑입니다. 그런데 금요철야 하면서 무엇을 구하고 있습니까?
주님이여 더 이상 나의 유익을 구하지 않게 하옵소서! 이것 때문에 철야하신다면 정말 훌륭하시고 대단한교회입니다. 그런 교회도 가끔 있겠지요! 하지만 제가 알기로는 대다수의 철야하는 사람들은 결코 우리 가정과 우리 교회와 나의 이익을 위해서 살지 않도록 그러한 욕망을 꺾기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기도하는 것 보이지 않습니까? 주님이시여! 제 기도하는 것 응답하시고 우리 가정에 이익이 되도록 놀랍도록 마음껏 능력을 발휘하여 주옵소서! 아마 그것 때문에 떼를 쓰는 것이 철야기도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듭니다.
여기 있는 애들이 자기 부모에게 떼를 쓸 때에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고 떼를 쓰는 애 봤습니까? 어린이 여러분들 그래요? 엄마 엄마 이제부터는 엄마 말 잘 들을게 하면서 울어본 적이 있어요! 엄마 돈 좀 줘! 하면서 떼를 쓰고 아이스크림 사달라고 떼를 쓰지 않았습니까?
다시 이야기 합니다. 양자라는 것은 왜 우리가 정식 아들이 될 수 없었던 가를 묵묵히 두고두고 되새기게 하는 한가지와 두 번째로 우리가 아들이라면 그것은 우리 공로가 아니라 천박하기 짝이 없는 우리를 아들이라고 해 주시고 우리를 위하여 자신의 귀한 목숨을 아낌없이 우리가 받을 저주대신 자신의 목숨을 대신 던져서 우리로 하여금 저주가 오지 않도록 커버해 주신 그 공로로 아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때는 어떤 의미를 담고 불러야 하는가 하면,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예수님이 아니었다면 저는 결단코 주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면서 주님의 고난에 대하여 고마워하고 감사하고 아파하는 그런 마음이 내장되어 있을 때에, 그런 마음으로 아바 아버지라고 여러분들이 부르시기를 바랍니다.
성령님께서는 십자가의 공로로 빼놓고 이야기하는 성령님은 없습니다. 성령님께서 일하실 때에는 반드시 예수님의 공로를 앞장세우시고 일하시는 분이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양자가 되었다는 것은 절대로 너는 아들이 될 수 없었다. 너는 저 자신의 신성함과 잘난 것을 빼놓고서 무슨 관심이 있었더냐?
그런데도 예수님 때문에, 정말 부끄러운 자이기에 부끄러워서 구석에 숨고 싶은데 예수님께서 후레쉬 들고 쥐새끼 찾듯이 찾아 오셔서 어이 빨리나와! 내가 너의 운명과 팔자를 다 고쳐놓았어! 빨리나와! 너는 나의 형제야! 한 몸이야! 빨리나와! 부끄러워하지 말고 하면서 불러내시는 것입니다.
좀 등신 같지요! 바보 같지요! 창세기 3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눈이 밝아져서 자기 몸을 볼 때에 자기의 부끄러움을 알았습니다. 눈이 밝아져서 자기의 부끄러움을 알았습니다. 그러면 눈이 안 밝아졌으면 그냥 벌거벗은 그 자체가 아름답고 좋았겠지요!
그런데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답고 좋았던 그것이 선악과 따먹고 눈이 밝아지고 나서 보니 부끄러운 것입니다. 왜? 자신의 신성함은 신성함대로 유지되면서 자신의 부끄러움은 부끄러운 대로 새어나오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신성함을 유지하기 위하여 부끄러움을 가려버리는 것입니다. 그것도 대충 가려버립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오셔서 그 무화과 나뭇잎의 치마를 벗겨버리시고 양을 잡아 양 가죽옷으로 입히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수치를 가려주지 아니하시면 하나님께서 부끄러움을 해소하여 주시지 아니하시면 어떤 인간도 하나님과 동행하여 살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사실입니다. 어떤 철학자에게도 물어보십시오! 당신이 벌거벗으면 왜 부끄럽습니까? 그거에 대하여 해답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성경을 모르면 왜 당신이 벌거벗고 세상을 돌아다니면 부끄럽습니까? 물어보면 그 이유를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정답은 무엇입니까? 선악과 따먹고 눈이 밝아졌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습니다. 눈이 밝아졌다는 것은 이제 내 인생은 내가 관리해야 하고 내 인생은 내가 인도하고 내가 책임져야 하고 내가 잘되고 못되는 것은 순전히 내 손에 달려있다고 하는 그런 사고방식으로 무장되어 있기에 자기를 보니 부끄러운 것입니다.
처음에 아담은 하나님께 맡겨진 인생이었습니다. 그러나 선악과를 따먹고 나서는 독립적인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지금 모든 인간이 독립적인 존재를 마치 위대하게 진화된 인간으로 여깁니다. 그 독립된 존재가 된 것이 과학의 발전이고 진화이고 철학의 발전이고 문명의 발전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것 다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제발 바보와 등신이 되십시오! 주님 앞에서, 주님 같은 바보가 어디에 있습니까? 자기 목숨조처 덜렁 주어버리고, 그러나 진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간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원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께 삼킨바 되고, 예수 없으면 나는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하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가 없다면 나는 희망이 없다는 것을 명심하고 예수님의 고난을 생각할 때마다 왠지 부끄럽고 고맙고 감사한 마음이 드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예수님과 한 형제이며 그리스도의 몸인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양자입니다.
이것으로 한 시간 넘게 한 양자에 대하여 끝내겠습니다.
그 다음 차례가 무어냐 그 다음차례 성화입니다. 그 다음차례라고 하면 양자에 대하여 다 잊으니 다시 한번 당부합니다. 우리가 양자 된 것은 예수님의 고난으로 부끄럽기 짝이 없는 우리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받아 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바보가 되어가지고 자기 자신에 대하여 부끄럽게 여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부끄럽게 여기지 아니하시고 받아 주셨다면 자기 자신에 대하여서도 너무 똑똑하게 굴거나 명철하게 굴지 마시고 좀 어설퍼지세요! 제 아는 사람 중에서 아주 명석한 사람이 있는데 지금 삼수합니다. 어려서부터 자칭 천재입니다. 컴퓨터를 해도 상을 타고 뭐를 해도 모르는 것이 없습니다. 그렇게 똑똑한데 학력고사 시험을 치면 자기 원하는 점수가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또 재수 한 것입니다. 올해가 삼수입니다. 마음에 차지를 않는 것입니다. 자기가 부끄러운 존재인줄 모르고 자기가 잘난 존재인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복음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에게 높임을 받는 것은 하나님께 미움을 받는다고 합니다. 이런 말씀이 성경이 분명히 나와 있건만 오늘도 교회마다 금요 철야기도해서 자기 자식을 높은 사람 되고 해 달라고 무려 세 시간 네 시간 간절히 목이 쉬도록 기도하니 어떻게 그 간구를 마귀가 들어주지 않겠습니까?
기도할 때 아까 말한 것처럼 이렇게 기도하세요! 주님이시여! 주님의 아픔에 대하여 제가 솔직하게 마음 놓고 신나게 울어볼 수 있는 그런 사람 되게 해서 세상에 주어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총임을 은은한 달빛도 찬란한 햇빛도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깨닫게 해 달라고, 아마 그 기도하는데 세 시간 네 시간 해도 모자라고 밤 새도록 해도 모자랄 것입니다. 그런 마음이 안 들겠지만 성령이 역사하시면 그런 기도가 되고 양자의 양자다움이 나올 것입니다.
양자를 끝내면서 하나 더 당부하고 싶은 것은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그 많은 신앙인들이 끝에 어떻게 살았는가 하는 것이 나옵니다. 톱에 켜임을 받았고 광야에서 유리함을 당하였습니다. 그러함에도 그들을 세상이 감당치 못할 정도로 믿음으로 버텼습니다.
그걸 보면서 오늘날 교회가 자기 자신을 너무 신성시 하지 않았는가 하는 반성이 되네요! 여기서 더 하면 잔소리 되니까 뚝! 잔소리 그치고 이번에는 성화에 대하여 하겠습니다.
성화
성화에 대하여서 두 가지 다른 뜻이 있습니다. 첫 번째 뜻과 두 번째 뜻이 있습니다. 이것을 혼동하면 안 됩니다. 첫 번째 뜻은 ?�거룩하게 되었음?� 이라는 뜻이 있고 두 번째 뜻은 ?�점차 거룩한 생활을 하게 됨?� 이 두 번째 뜻이 있습니다.
첫 번째 거룩하게 되었음이란 히브리서 10:10절에 나와 있습니다. 강의를 하다보면 내가 너무 나무라는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여러분의 분위기가 가라앉는 것 같기도 한데 여러분만 강의를 듣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20년 30년 후배들도 들을 수 있기에 여러분이 잔소리 같아도 좀 인내하여 주시고 참아주시기 바랍니다.
이왕 나무라는 김에 더 나무라면 속도 시원한 것입니다. 저만 시원한 것이 아니라 여러분도 시원한 것입니다. 아주 바닥을 긁어내어야 합니다. 찝찝하게 남겨두면 안 됩니다.
히브리서 10:10절에 보면,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여기서 거룩이란 어떤 상품 같습니다. 박스에 포장이 되어서 물체 같아서 받아 챙기면 그것으로 거룩 끝, 상황종료가 되는 것처럼 얻어 챙긴 것이 되는 것입니다. 얻었다는 것입니다. 받은 것입니다.
그러니 첫 번째 뜻으로 거룩함이란 변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변했어! 어떻게 변했어? 우리는 거룩한 사람이 되었어! 이것이 거룩함의 첫 번째 의미입니다. 앞으로 나의 신상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어떠한 타락과 방탕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과 상관없이 이미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룩함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어떤 일이 있더라도, 이것을 그림으로 그리면 이렇습니다. 우리 이 강의를 잘 듣는 사람 중에 한 사람이 광주에 계시는 어떤 집사님이 계시는데 그 집사님이 부러워하는 것이 무어냐 하면 강의는 잘 들리는데 그것을 그림으로 한번 그려 볼까요! 하면 그것이 그렇게 부럽다는 것입니다.
자 잘 보세요! 그림을 그려 보겠습니다. 거룩이라는 고무풍선 안에 우리가 이미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방팔방 날아오는 것이 무엇입니까? 거룩이 날아오지요! 우리는 거룩이 안 된 상태인데 날아오는 그 거룩을 안 받고 배길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거룩이 계속 날아오는 것입니다. 거룩! 거룩! 하면서 거룩 됨! 거룩 됨! 하면서 날아오는 것입니다.
이 거룩 됨이 무엇이냐는 조금 있다가 말씀드리겠는데 어쨌든 여러분이 아셔야 할 것은 우리가 예수님 안에 놓여 있기에 이 거룩함이라는 화살을 피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가슴에 배에 어깨에 거룩함의 화살이 막 박히는 것입니다. 거룩함의 화살이 마구 날아와 꽂히는 것입니다. 이 동네가 무슨 동네인가 하면 예수님이 활동하는 동네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활동영역이기에 거룩을 거부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미 거룩함이 되러 버렸고 예수 안에서 거룩함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일번 거룩을 안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믿지를 않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하면 기존의 교회에서 대부분 1번 거룩을 지워버리고 감추어 버립니다. 이상하지요! 심지어 개신교가 성경대로 가르친다고 하면서도 히브리서 10:10절을 이야기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말하지 않고 무슨 거룩을 이야기 하는가 하면 2번 거룩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점차 거룩한 생활을 하게 됨?� 이것을 가지고 거룩이라고 하게 된 것입니다. 칼빈도 이야기 하고 루터도 이야기 하고 교회사에서 유명하다는 사람들 전부다 이것을 이야기 하였습니다. 점차점차 거룩한 생활을 하게 된다고 이야기하는데 여기에 대하여 반대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자크 엘룰이라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뒤틀려진 기독교라는 책에서 무엇이라고 하는가 하면, 점차 거룩하게 됨이라는 이것이 어디에서 나왔는가 하면, 이것은 고대 철학에서 나온 사고방식이라고 합니다. 인간의 속성과 본질에서 나온 것이지 이것은 기독교가 아니라고 한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복음이 아니고 고대 철학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언제 점차 거룩하여 진다고 언제 이야기 한 적이 있는가? 예수님과 사도바울이 그렇게 말한 적이 성경 전체에서 한 대목도 없다는 것입니다. 점차 거룩해 진다는 것은 성경전체에 한 대목도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자크 엘룰에 대하여 그 사람이 어떤 마음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였는지 잠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부터 약 3분간 이야기 할 것은 자크 엘룰에 관한 이야기이기에 여러분이 귀담아 들어보세요! 이 사람이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사람들이 선이라고 여기는 것은 선악과를 따 먹고 난 뒤에 이미 자기가 악이 되었지요! 선악과를 따 먹는 자체가 악이잖아요! 이 논리를 잘 들으세요! 나중에 속았다 하지마시고 들을 때 잘 들으세요!
선악과 따 먹은 자체가 죄이지요! 맞지요! 그렇다면 선악과 따먹고 나서 눈이 밝아진 것이 죄의 결과지요! 눈이 밝아졌다는 것은 부끄러움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니 선과 악을 구분 했다는 자체가 죄를 지은 결과가 맞지요! 자크 엘룰은 말하기를 선과 악을 나눈다는 그 자체가 악인데 저가 무슨 자격으로 점차 거룩한 생활을 하게 되는가 하는 말입니다.
무슨 점차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제 이야기입니다. 선악과를 따 먹으면 차츰 차츰 죄인 됩니까? 아니지요! 선악과를 따 먹은 그 자체가 너는 이미 죄인이라는 신분이 되고 말았습니다. 점차 점차가 하나님 앞에서는 없지요! 아까 히브리서에서 뭐라고 하였습니까? 예수님을 믿음으로 거룩함을 얻는데 그것도 단번에 얻은 것입니다.
한번 실패하고 두세 번에 걸쳐서 하신 것이 아니라 단번에 이루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점차 점차가 빠진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인가 하면 아담이 죄 지을 때 로마서 5장에 나옵니다. 아담이 죄를 지을 때에 점차 점차 죄를 지은 것이 아니고 단번에 죄가 아담을 지배했고 아담의 후손도 지배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십자가 지심으로 모든 율법을 이루셨을 때에 그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점차 점차 의인 되는 것이 아니라 단번에 의인이 되는 것입니다. 점차 점차는 어디에서 생겼는가 하면 이미 선악과를 따 먹었기 때문에 선과 악의 괴리, 선과 악이 괴리되어 있기에 악에서 멀어져서 점차 점차 나아지겠다는 선을 하나의 목표점이 된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에게 선이 하나의 목표점이 될 때에 점차 점차가 성립됩니다.
이래도 모르고 저래도 모르고 오늘 제일 어려운 이야기를 해봅니다. 제가 어떤 사람을 사랑합니다. 그러면 간 내주고 쓸개 내주고 다 합니다. 왜? 사랑하게 되면 남에게 내어주는 그 자체가 희열이고 행복입니다. 나에게 남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하는 사람이 그것을 받고 픽 하면서 돌아섰다고 하면 내가 그 사람에게 간 내주고 쓸개내주고 다 내어주었으니 아무것도 없어야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몇 시간 지니자 않아서 다시 다 채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있는 것 없는 것 다 내어준다는 것이 거짓말이 되었지요!
사실은 거짓말 한 것이 아니고 사랑할 때는 다 내어줍니다. 다 내어주는데 이상하게 인간은 무엇을 모르는가 하면 다 내어 주었다고 생각하는데 이상하게 밑에서 또 무언가 차 올라오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을 라캉이라는 사람이 대문자 X로 표현합니다.
그림으로 그려보겠습니다. 그림을 보지 못하는 사람은 약 오르겠지만 할 수 없고 그림으로 그려보겠습니다. 사람들은 삽을 가지고 흙을 팝니다. 낑낑 되면서 동굴을 파 들어갑니다. 어떤 사람이 묻습니다. 당신은 왜 이 동굴을 팝니까? 막혔으니까 판다고 합니다. 누가 파라고 하더냐? 무언가 미지의 X가 자기를 당기고 있습니다. 더 파야지! 더 파야지! 하면서 계속 파라는 것입니다.
요게 무언가 하면 도박일 수도 있고, 술일 수도 있고, 여자 일수도 있고, 심지어 이것이 기도일 수도 있고, 전도일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성경공부도 될 수 있습니다. 무언가 앞에 막힌 것이 있으니까! 그 막힌 것을 판다고 파는데, 나는 이것을 한 오 분 동안 판다고 합니다. 그러나 오 분 동안 파면 또 막혀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낚시 일수 있습니다. 경마일 수도 있습니다.
이쯤 하면 내가 도사 일거야! 컴퓨터 게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쯤 하면 도사일 거야야 하고 들어 가보면 도사가 또 있는 것입니다. 바둑도 마찬가지 압니다. 사람은 무언가 미지의 X가 있어 가지고 자꾸만 나를 잡아 당기는 것입니다. 이만 하면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더 파야지 더 파야지!
이것이 직장일 수도 있습니다. 무언가 완벽하게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화론 할 때에 할 것입니다. 더 완벽해야지 더 착해야지 하루에 성경 석장씩 일었는데 내일부터 다섯 장씩 일어야지! 기도 두 시간 했는데 세 시간 해야지! 자꾸 파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을 라깡이라는 사람이 미지의 X라고 한 것입니다. 미지의 X가 무언지 모르지만 모든 인간에게 다 있는데 직장 따라 사람 따라 성향 따라 환경 따라 다를 뿐이지 다 있다는 것입니다. 황우석 교수가 인간복제를 안한 다구요! 그것은 지금까지의 이야기이고 만약에 원숭이 복제되고 다 복제되면 반드시 더 파게 되어 있습니다. 왜? 미지의 X가 자기를 잡아당기는 것입니다.
라깡이라든가 프로이드라는 사람들은 세계의 모든 학문을 섭렵한 철학자들입니다. 이 사람들이 미지의 X가 무엇인지 그렇게 연구하고 연구하여도 그것이 무언지 몰라요! 이제 제가 그 미지의 X가 무엇인지 이야기 해 보겠습니다.
모든 종교든 무엇이든 심지어 축구든 배구든 간에 끊임없이 계속하여 막다른 것이 다가오고 그것을 넘어가면 또 다가오고 하는 것입니다. 그 문제들을 또 파게 만들고 또 파게 만드는 것입니다. 철학자들은 철학을 하면서, 철학이 무엇입니까? 필로소피아, 진리를 사랑하는 것이지 않습니까! 무언가 진리를 사랑하였다면 그 사랑의 대상이 진리라는 것을 내 놓아야 하는데 그 진리를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지의 X인 것입니다. 결국 나는 모르겠다는 것이 진리입니다.
그 미지의 X 무언인가를 지금부터 알려드리겠습니다. 오른 여러분 잘 오신 거예요^^! 미지의 X가 무언가 하면, 사람들은 선악과 따 먹고 난 뒤에 내가 무언가를 파면 파는 것만큼 무언가 진리에 가까이 가게 된다는 착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위에서 하나님께서 들여다보시니 인간의 모든 신체와 환경이 이미 어디에 갇혀있는 말뚝에 매여 있는 꼴입니다.
마치 개를 말뚝에 묶어 놓으면 동쪽에 갔다가 서쪽에 갔다가 하면서 자신은 자유롭게 다니는 것처럼 생각하지만 주님께서 보시면 너는 그렇게 백날 해도 뺑뺑이 도는 것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말뚝에 박혀 있다는 것입니다. 해아래 새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어디에 갇혀있다는 우물이나 동굴에 갇혀있다는 이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왜 못하는가 하면 인간은 선악과를 따 먹었기 때문에 선과 악이 선과 악이 같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선과 악을 벌려 놓는 것입니다. 이 선이 무언가 하면 진선미입니다.
이것도 어렵지요! 진선미라는 것은 참되고 선하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이것은 진리의 대체물인 것입니다. 인간들이 진리를 찾을 때에 참되고 선하고 아름다운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참되다는 것은 3+5=8인데 7이 된다면 마음이 어때요? 무언가 기분이 나쁘지요!
우리나라 조선시대 때에 장군 중에서 왜군하고 싸우다가 총탄에 맞아 죽으면서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고 하신 분이 누구냐 하면 그 사람이 을지문덕입니다. 이 말이 굉장히 기분이 나쁘지요! 그 분이 누구입니까? 이순신 장군이지요! 이순신 장군인데 제가 을지문덕이라고 하니 굉장히 기분이 나쁘지요!
기분이 나쁠 때에 목사님! 을지문덕이 아니고 이순신입니다. 할 때에 을지문덕이 나쁜 것이고 죄악된 것이고 이순신은 어디에 가까운 것입니까? 진짜 참된 진리에 가깝지요! 나중에 보니 이순신 옆에 있던 부관이 한 말을 가지고 그것을 이순신이 한 것처럼 미화한다고 사기 친 것을 모르고-그런 것이 있다는 말이 아니라- 나중에 고고학자가 조사를 해보니 이순신이 말한 것이 아니라 이순신이 죽고 나서 그 죽음을 아름답게 미화하기 위하여 그렇게 사기 친 것이라고 하게 된다면 또다시 무엇이 됩니까? 진리를 다른데 있었구나!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지금 여기에 컵이 있습니다. 아름답습니까? 아름답지 않지요? 이것은 어떻습니까? 아름답지요! 그러면 아름답지 않은 것은 죄악에 가깝고 아름다운 것은 선과 가깝지요! 인간은 참되고 아름답고 선한 것을 추구합니다. 사람이 아무리 악한자라도 자기 자식에게는 나쁜 짓을 시키지 않습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은 도적질 하면서도 자기 자식에게는 도적질 하지 말라고 합니다. 물론 사정이 어려우면 자식을 앵벌이 시키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그것을 급할 때이고, 무언가 선에 대한 추구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착하여 보면, 나는 5미터만큼 착하게 되었다면 누가 나만큼 착한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그래! 그런데 6미터가 나옵니다. 그러면 다른데서 나는 7미터라고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5미터인 사람은 졸지에 나는 착한 사람이 안 된다는 것이 됩니다. 덜 착한 사람이 되겠지요!
선과 악에서 상대적으로 밀리게 되면 그 사이에서 무엇이 생기는가 하면 결핍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 결핍이 생기게 되면 신성화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무언가 다른 사람들보다 나락에 떨어진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자신이 위대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을 무엇으로 메우는 것입니다. 그것을 선으로 메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바쁘면 다른 것으로 매우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미지의 X가, 진선미가 자꾸만 나를 당기는데 이 진선미라는 것이 어디서 생겼는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그 진선미를 가지고 약을 올리는 자가 누구인가 하면 창세기 3:15절에 보면 그게 바로 뱀의 후손 악마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너희 아비가 악마이고 너는 그 악마의 자식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창세기 3:15절에 보시면, 이 세상에는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그 둘밖에 없습니다. 여자의 후손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 이외에 모든 아담의 후손은 죄의 종이고 뱀의 종인 것입니다. 율법의 종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창세기 3:15절은 예언입니다. 예언은 변경이 불가능합니다. 그 예언대로 성취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과정은 남아 있습니다. 모든 역사는 창세기 3:15절의 예언을 이어갑니다.
그것이 어디에 나오는가 하면 요한 계시록에 나옵니다. 요한계시록의 특징이 무엇인가 하면 성도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누가 다한 것입니까? 바다에서 나온 짐승과 하늘에 있는 어린 양, 짐승과 천사들이 싸우는 것입니다. 성도는 가만히 있다가 얻어맞고 가만히 있다가 목 달아나고 죽고 그랬습니다. 예수 믿고서 가만히 있다가 죽은 것을 무엇이라고 하는가 하면 첫 번째 부활이라고 합니다.
영생 얻는 것을 두 번째 부활이라고 합니다. 아무리 잘난 체 하더라도 예수 믿지 않는 자들은 첫 번째 사망이라고 합니다. 그 다음 영원한 지옥 불에 들어가는 것을 두 번째 사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점차 점차라는 개념이 없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하나님은 인간의 운명을 인간 손에 맡기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본성상 나의 운명은 내 하기 나름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나의 미래는 내가 채우기 나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식보도 열심히 공부하라고 합니다. 열심히 공부하라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면, 진선미 그것을 획득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진선미는 악마가 해놓은 덫입니다. 악마나 해 놓은 면류관입니다. 그래서 목사들이 심방을 가서 기도하기를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큰 일군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 말은 이 자식은 신성한 자식 만들어달라는 것입니다.
제가 첫 시간에 말씀드렸지요! 인간에게는 신성한 것이 없다. 무엇이 신성한 것을 다 부수어 버린 것입니다. 십자가 사건입니다. 십자가 사건 앞에서 어떤 신성한 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 어느 것도 신성하지 않습니다.
미지의 X에서 어떤 인간들도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철학자들이 밝혀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시 말해서 죄로부터 못 벗어납니다. 그 죄가 무엇인가 하면 선악이 죄가 아니라 그 죄란 하나의 권세자입니다. 왜 선악과를 따 먹었어 이놈아! 선악과를 따 먹은 자체가 죄인 것입니다.
제가 방금 이렇게 말씀드리면 이것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이렇게 공격합니다. 선악과를 따 먹은 것이 죄라고 어디에 적혀 있습니까? 성경에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성경이 엉터리라고 합니다. 불신자들은 성경 자체를 다 날려버리는 것입니다. 성경 자체를 다 거짓말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당신은 왜 벌거벗으면 부끄러워하는가? 몰라! 그러니 그들은 모르는 것이 진리인 것입니다. 이 모르는 것이 성경을 공격하는 것입니다. 그 모른다는 것이 너무나 당당해서 성경 전체를 부정하여 버리는 것이 오늘날 우리가 속하여 있는 이 세상의 현황입니다. 가봐야 안다는 것입니다.
거지 나사로와 함께 죽은 부자의 이야기가 이와 같습니다. 부자가 아브라함에 말합니다. 지금 제 동생이 이렇게 지옥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나처럼 까불며 살고 있는데 어떻게 나사로를 부활시켜서 지옥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어서 지옥에 오지 못하게 하면 안 되겠습니까?
이렇게 말할 때에 아브라함이 말하기를 성경책이 있다는 것입니다. 모세와 예언자가 기록한 성경책이 있는데 이것을 믿지 않으면 죽었던 나사로가 부활하여 가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 코앞에 있는 성경책 자체를 완벽한 하나님의 계시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에게 희망이 없습니다. 선악과 따 먹은 것이 왜 이유 없이 죄인가 하면, 이유 없이 죄 인줄 아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성화란 게 없어요! 점차 나아진다는 이런 성화는 없는 것입니다. 단번에 거룩함을 얻는 것이지 이런 성화는 없는 것입니다. 자끄엘룰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점차 나아진다는 것은 본인의 솔직한 표현인 것은 동의하지만, 그것이 진심이기에 동의는 하지만 진심이 진리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진리는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선악과 따 먹은 것이 죄입니다. 이유 없이! 이것이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의인 되는 것 이것이 진리입니다. 이것 외에는 없습니다. 이 정도하면 계속 밀어붙여야 하는데 어떻게 할까요? 오 분 쉴까요? 오 분 쉬고 하겠습니다.
녹취 060607 이장우
양자, 성화 1-3
05. 12. 12 강의 이근호목사
마지막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성화의 첫 번째 이야기는 거룩함 속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거룩함 속에 들어간 신분을 성화라고 합니다. 두 번째 이야기는 점차 거룩하여 지는 것이라고 봅니다. 이것은 자끄 엘룰이 말한 것처럼 이것은 인간의 철학인 것입니다.
그 철학은 진선미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칸트라는 사람이 이것을 추구하였습니다. 진선미를 천국으로 보았습니다. 니츨, 하르낙 이런 철학자들이 전부 이런 주장을 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필요도 없다고 본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진선미를 이룰 능력이 있다고 본 것입니다. 진선미의 추구 이것은 성화가 아닙니다.
성화란 이미 거룩함 속에 들어간 것입니다. 이 거룩함 속에 들어가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사방에서 무엇이 쏘아 댑니까? 거룩함이 막 쏘아 대는 것입니다. 거룩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거룩함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뜨거운 사우나에 가면 뜨거운 열기가 사방에서 나오는 것처럼 거룩함의 열기속에 놓이게 되면 그 자체가 거룩하게 됨, 성화됨, 그런 뜻입니다.
자 그러면 어떻게 해서 우리 인간에서 거룩함이 주어지는가? 그런 자격이 되는가? 우리는 그런 자격이 안 됩니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거룩함을 얻게 되었는가? 그것은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을 때의 일입니다.
흐르는 요단강 물에 예수님께서 물에 잠기시고 세례요한은 털옷을 입고 예수님의 머리에 손을 얹었습니다. 예수님은 물에 잠기시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이 예수님께 세례를 줄 때에 세례요한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님이곳은 죄인들만 오는 곳입니다. 회개할 거리가 있는 죄인들만 오는 곳입니다. 회개할 거리가 없는 사람은 여기 오시면 안 됩니다. 제가 주님에게 세례를 받아야지 어떻게 제가 주님에게 세례를 줍니까?
여기는 어떤 곳이라고요? 죄인만 오는 곳입니다. 저 죄인 맞습니다. 하는 사람이 물속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물속에 들어갔다가 나온다고 의인 되는 것이 아니라 저는 죄인임을 인정합니다. 하는 것이 물 속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예수님이 오셔서 나도 죄인이라고 하면서 물속에 들어오시는 것이기에 세례요한이 예수님은 죄인이 아니잖아요? 예수님은 들어오실 필요가 없습니다. 제가 오히려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하는 대목에 있습니다.
그럴 때에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죄인 속에 들어오신 것은 예수님이 회개하는 이 죄인들을 데려가기 위하여 죄 속에 들어오셔서 몽땅 끄집어내어 천국에 데려가기 위하여 죄인들 그룹에 죄인들 집단에 손수 자신해서 들어오신 것입니다.
이것이 아주 신비롭지요! 이것을 가지고 성경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냥 어린 양이 아니라 세상 죄를 짊어지신 어린 양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시라고요? 세상 죄를 짊어지신 어린 양입니다. 우리에게 적용을 하면 나의 죄를 짊어지신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면 어! 나의 죄가 저기에 있네! 나의 죄를 위하여 내 속에 친히 침투하여 들어오신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내가 죄 짓고 있을 때에 나는 죄 짓고 예수님은 바깥에 계신 것이 아니고 우리가 죄 짓는 그 현장에 들어오신 것입니다. 죄 지었다고 하니 이상한 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여! 입을 것 주옵소서! 먹을 것 주옵소서! 비록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지만 나도 답답해서 구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어떻게 일하시는가 하면 주여 입을 것을 구한 죄를 용서하시고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게 하옵소서! 이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속에 들어와서 데려가야 우리가 구원받는 것입니다. 제가 지금 하는 이야기는 어떻게 거룩이라는 공간이 마련되는가 하는 그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거룩이 쏘아대는 그 공간에 놓이게 되었는가 하는 그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죄 짓고 있는 이 세상에 자신해서 뛰어내려 오셨는데 왜 뛰어내려 오셔야 하셨는가 하면, 하실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하실 일이 무어냐 하면 세상 죄를 짊어지기 위한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 죄인데 어떤 세상 죄인가 하면, 구약 성경에 보니 자기 백성의 죄를 짊어지기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것이 어디에 나오는가 하면 마태복음 1:21절을 봅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자기 백성의 죄입니다. 하나님의 예언된 자기 백성입니다.
크리스마스가 되면 가슴이 아픕니다. 어떻게 가슴이 아픈가 하면 천사가 동방 박사 에게는 헤롯의 궁전으로 가지 말고 다른 길로 가라고 합니다. 또 천사가 요셉과 마리아에게도 아기 예수를 데리고 피하라고 합니다. 헤롯이 너를 노리고 있으니 애굽으로 도망치라고 합니다. 천사가 예수님을 애굽으로 피신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가슴 아픈가 하면, 예수님 하고 비슷한 시기에 출생한 베들레헴이라는 동네의 아이들은 아무른 천사의 음성을 듣지도 못하고 어떤 징조도 없었는데 갑자기 헤롯의 군사들이 들이 닥쳐서 베들레헴의 두 살 아래의 아이는 다 잡아 죽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군대가 철수하고 나서 그 아이들을 잃은 부모들은 대성통곡을 합니다. 그것이 슬픈 크리스마스입니다. 기쁘다 구주 오셨네! 하면서 찬송하는데 그들을 울고 있는 것입니다. 그 아이들이 누구 때문에 죽었습니까? 예수님과 함께 태어났다는 것 때문에 죽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위험합니다. 예수님이 보통 위험한 분이 아닙니다. 천사의 계시를 듣지 못한 사람은 죽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저는 크리스마스 때에 이 슬픈 기억이 있습니다. 기쁘다 구주 오셨네! 그 다음에 가사를 바꾸어야 할 것입니다. 기쁘다 구주 오셨네! 우리는 죽었다. 이런 식으로 바꾸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가사는 제가 지어낸 것입니다. 아무도 그런 가사로 노래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면 베들레헴의 아이들은 왜 죽었습니까? 그것은 예수님의 출생과 더불어서 이 세상이 왜 어두움이며 이 세상이 왜 지옥인지를 보여주어야 예수님 때문에 구원이라는 것이 의미가 있습니다. 여러분 극장에 가면 캄캄합니다. 극장이 캄캄해야 화면이 밝습니다.
예수님의 구원이 왜 그렇게 중요한 것인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세상에서 당했다. 세상 사람들이 이렇게 못됐다는 것을 절감하도록 우리 속에 그런 사건이 터지도록 하나님이 그렇게 조치를 하시는 것입니다.
별을 따라 온 사람들이 동방박사들입니다. 별이 낮에 뜹니까? 밤에 뜹니까? 밤낮으로 다 뜹니다마는 보이기는 밤에 잘 보입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은 마치 어두운 우리 마음에 떠오르는 별과 같다고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을 때에 까만 우리 마음에 반짝반짝 보석처럼 빛나는 그런 예수님으로 여러분 마음속에 새겨지기를 바랍니다. 보통은 주의 이름을 축원합니다하는데 그냥 바랍니다.
정말 예수님이 안개 낀 듯이 흐릿하지 말고 너무나 검은 우리 마음에 반짝반짝 빛나기를 바랍니다. 따라서 크리스마스가 되면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가 하면 예수님이 오셨다는 것만 좋아하지 말고 반대로 그토록 이 세상에 죄악 가운데 있다는 것을 부각해야 예수님이 증거 됩니다.
따라서 이것은 여담이고 제 생각입니다마는 믿지는 마세요! 크리스마스만 되면 더 온갖 죄악들이 흥청망청 다 모이지요! 주의 은혜인줄 아시기 바랍니다. 어두움이 짙을 때에 빛은 더욱 찬란하게 비치는 것입니다. 크리스마스 때에 술집이 장사가 잘 되고, 어두울수록 예수님의 빛은 더욱 반짝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글에서 제가 그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이 세상에 흐르는 어둠의 물결을 벗겨서 보는 눈이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1장에 보시면, 예야! 낮에 다니라고 합니다. 아니 낮에 다니는데요! 낮에 다니라니까! 낮에 다니고 있잖아요! 광명에 다녀! 지금 광명에 다니고 있는데요! 그런 뜻이 아니야! 지금 어둡기 때문에 세상의 어두움을 볼 수 있어야 해! 어둡기에 빛이 오셔서 빛의 사람을 삼으신다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께서 잔다고 합니다. 우리도 자지 않습니까? 자는 게 아니라 죽었다. 그러면 우리도 자는 게 아니고 죽었구나! 그러니 자로 가자하는 것이 아니라 죽으러 가자고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의미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말귀를 못 알아듣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이 얼마나 지옥인지를 압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오래 살다가 보니 살만한 곳이 되었습니다. 예수 안 믿고서도 큰소리치면서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건희같은 사람들 많이 있습니다. 이건희 딸 죽었을 때에 원불교 식으로 장례 치렀습니다. 그 사람들 예수 안 믿는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고 있습니다.
황우석 교수 불교식으로 도 닦는 사람 아닙니까? 예수 안 믿는 사람입니다. 그만큼 예수 믿는 다는 것은 요즈음 인기가 없어요! 그런데 그런 어둠이 있다고 해서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거나 수상하게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어두움이 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죽으심으로 이 세상을 밝히셨습니다. 이제 다시 들어가 봅니다. 예수님이 일단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 세례가 무슨 세례인가 하면 죄의 세례, 제로 덮어씌운 세례입니다. 죄 세례란 제가 지어낸 말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만 세례란 것은 합일되는 것입니다. 죄 세례가 무언가 하면 예수님께서는 죄인 속에 합일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실 때에는 죄 없이 태어났습니다. 죄 없으신 분입니다. 죄 없으신 분이 죄 세례를 받으시고- 죄 세례란 말을 가지고 이단소리 하겠는데- 무언가 덮어씌워 져서 죄인 속에 들어오셨는데 그 안에서 죄 안에서 무엇을 이루셨는가 하면,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와 사랑을 만들어내고 일구어 내는 그런 숙제를 아버지의 뜻에 의하여 드디어 출발하신 것입니다.
만약에 제가 하는 말이 거짓말이라면, 제가 하는 이런 이론이 거짓말이라면, 예수님이 구태여 세례요한 본인도 반대하는 세례요한의 세례를 받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을 때에 세례요한이 당신은 나에게 세례 받을 필요가 없고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하였는데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자신해서 세례를 받겠다고 하신 뜻은 그 세례를 끝이 있을 것입니다.
그 끝은 죽음 속에 들어와서 죽음을 이기고, 율법을 이기고, 마귀를 이기고 탈출하는 지하 탈출로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무언가 흐름이 있습니다. 이것이 다 성화론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지하라고 하지 지하상가가 생각됩니다. 들어가는 곳이 있으면 나오는 곳이 있지요!
예수님께서는 죄가 없으셨습니다. 죄가 없기 때문에 세례요한의 세례를 받지 않으시고 그냥 세상에 사셨다면 혼자 잘나서 혼자 구원받습니다. 나는 죄가 없네! 나 혼자 구원받아야지! 그렇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입니까? 공의의 하나님입니다. 무서운 하나님입니다. 정의의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보면 자비의 하나님도 있습니다.
율법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가 하면 공의의 하나님도 있지만 남에게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이웃 사랑이 들어있습니다. 이웃 사랑을 누가 성취할거예요? 예수님께서 산상설교에서 말씀하셨지요! 모든 율법과 선지자의 완성은 이웃사랑입니다. 남에게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에게 대접하라는 것이 이웃사랑입니다. 그 이웃 사랑과 하나님 사랑이 모든 율법의 완성입니다.
그러면 이웃사랑이란 이웃이 있어야 하고 그 이웃을 사랑했다는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냥 죄 없으신 분이 죄 세례 받으시고 이것을 죄 세례라고 하지 말고 죽음의 세례라고 합시다.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개핀 교수는 이것을 불세례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받을 불세례가 있다고 하시면서 그 다음에 답답하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누가 서로 높으냐고 길에서 싸우는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제자 된 자가 어떤 것을 기도해야 될지를 모른다고 하셨습니다. 너희가 구하여야 할 것은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도 마실 수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에 예수님! 예수님이 마시는 그 고난의 잔을 저도 마셔야 합니까? 라고 기도해야 하고 그 정답은 이미 나와 있습니다. 그래 마셔야 된다. 나의 잔을 마시기는 하겠지만 나의 좌우에 앉는 것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자에게 주어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또 답답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세례요한입니다. 세례요한은 자신이 안 죽고 있다는 것이 답답한 것입니다.
제가 지난 금요일 날 대구의 모 식당에서 환갑잔치에 참석했습니다. 다른 교회 목사님이 설교하시고 저는 가족이라서 군소리 없이 밥만 먹었는데 환갑잔치에서 이런 설교를 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 14장의 갈렙이 85세에도 강건하여서 모세의 유언 따라 전쟁을 하였듯이 오늘 환갑을 맞는 분도 앞으로 더 강건해서 주의 일 많이 하시고 축복을 많이 받으시기 바란다는 이런 설교를 하는 것입니다.
하~ 그렇게 성경해석 해서 죽은 자가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지 않습니까! 유대인들의 그런 해석이 예수님을 가린 것처럼 예수님을 십자가에 또 죽게 만드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그 저주받는 복음을 교인들에게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내용을 십자가의 복음으로 설교하면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처럼 지금 죽어서 천국에 사는 것이 본인으로서 좋으나 모세에게 주어진 언약이 있으면 죽든 살든 주님의 고난의 길을 가야만 합니다. 이 권사님아! 이래야 되는 것입니다.
권사님 60까지 고생 많이 하신 것 아시겠지만, 아직도 주께서 안 데려 가신 것을 보니까 고생 더 하라고 주님을 위하여 고생을 더 하라고 안 데려가신 것입니다. 본인은 지금 안 죽은 것이 섭섭하고 답답하겠지만 좀 더 참으시고 남은 목숨을 주의 복음을 위해서 십자가의 길로 가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해야 그 갈렙이 나오는 본문을 통하여 새 언약의 복음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고 봉사해서 복 많이 받으십시오! 그 복 많이 받는 것이 예수 믿는 것입니까? 그 말은 권사님 죽지 마시고 오래 사시기 바랍니다. 이 말입니다. 사는 목적도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권사가 신성화 되는 것입니다. 진선미입니다. 진선미가 복 받는 것 아닙니까! 그러면 그 교회는 무어냐? 예수님을 가리는 적 그리스도적인 교회이지요!
그러면 그런 목사를 누가 원하는 것입니까? 교인들이 원하는 것입니다. 왜? 교인들은 자기의 실체를 파헤치는 그런 목사를 제일 싫어하는 것입니다. 의존교회 교인들 목사님이 실체를 파헤치면 싫어할지 모르겠습니다. 교인들은 자기보다 좀 못한 목사를 좋아합니다. 가지고 노는 것입니다. 너무 아는 것이 많으면 부담되는 것입니다.
여기 김 목사님 말고 예수님이 목회하시면 다 달아날 것입니다. 제직회 한다면 다 달아날 것입니다. 부담 된다고! 부담 될 수밖에 없지요! 결혼한다고 아내를 위하여 반지를 준비하였는데 아내 있는 자는 아내 없는 자 같이 여겨라 그러면 김 다 새는 것입니다. 돈 벌어서 기분이 좋은데 돈을 사랑하면 일만 악의 뿌리라고 하시는데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그러니 예수님 같은 목회자는 단체로 나서서 반대하고 좀 어수룩하고 자기보다 못난 자를 목사 뽑아서 돈 가지고 마음대로 놀 수 있는 그런 만만한 목사를 오늘날 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목회 안 해보면 모릅니다. 이론상 이야기해서 모릅니다. 이것은 정말로 진짜입니다. 성경을 모르는 자는 대 환영이고 성경을 좀 알면 그 사람은 교회에서 퇴출감입니다. 그러니 한국교회 자체가 이단 인 것을 알아야 되고 명심해야 됩니다. 이런 마음자세가 되어 있지 않으면 너무 심하다고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들어오실 때에 답답함을 느꼈습니다. 우리는 못 느낍니다. 우리는 죄 짓는 것이 신나기 때문입니다. 죄 안 짓는 것이 서글픈 것입니다. 지금 떡을 먹고 있지만 몰래 먹는 떡이 더 맛있고, 몰래 먹는 사과가 더 맛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천성이고 본성입니다. 타고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무엇을 모르시는 분이십니까? 죄를 모르시는 분이 죄 속에 있어 보세요! 얼마나 답답하시겠습니까? 심지어 예수님은 광야에서 배가 고팠습니다. 배고픔을 압니다. 그리고 뛰어내리면 겁나는 것도 압니다. 세상의 부귀영화와 매력도 압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령님이 도우셔서 사탄아 물러가라고 하시면서 하나님만 섬겨라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성령이 역사 하시니 그런 놀라운 고백이 튀어나오는 것입니다.
스데반 집사님이 잘나서 그런 것이 아니라 성령님이 역사 하시니 차라리 죽는 것이 더 큰 해방의 기쁨을 아는 것입니다.
어쨌든 예수님은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이웃 사랑을 완성하기 위하여 죄인이 당하여야 할 그 저주스럽고 무서운 심판과 불세례를 향하여 죽 갑니다. 죽 가는데 갈 때에 처음에는 누구와 만났는가 하면 처음에는 평범한 사람들과 만납니다. 나중에 갈수록 이 사람들 배후에서 조종하는 실체와 만납니다. 이 이야기 하고 오늘 강의 마칩니다. 여러분 많이 피곤 하셨지요!
자 예수님께서 이 죽음의 지하상가 저주스러운 지하상가 끝 지점에서 아버지의 뜻을 만납니다. 그 아버지의 뜻이 무엇이냐 하면 본디오 빌라도라는 사람은 아무리 애를 써도 반드시 예수님을 팔아 넘겨야 될 그러나 사람인 것을 예수님이 압니다. 심지어 자기 부인이 여보! 여보! 여보! 당신이 무슨 재판을 합니까? 예수를 재판한다! 그 사람 함부로 재판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가 어제 밤에 잠을 못 잤다고 합니다. 그 사람 보통 사람이 아니라고 말렸습니다.
빌라도 이 사람이 양심이 고와가지고 예수님이 죄 없다는 사실을 알고서 그 당시에 제일 나쁜 사람 바라바라는 강도를 내 세워서 여러분 강도가 좋습니까? 예수님이 좋습니까? 아무래도 강도가 더 싫지요? 그랬더니 사람들이 바라바를 풀어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본디로 빌라도가 물 떠놓고 손을 씻습니다. 왜 손을 씻는가 하면, 주여 저는 죄가 없습니다. 저 사람을 살리기 위하여 저는 할 일을 다 했습니다. 만약 죄가 있다면 그 죄는 저 유대인들에 돌리시옵소서! 라고 손을 씻습니다. 손을 씻는 것이 아니라 목욕을 해 본들 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하시겠습니까? 모든 것들은 성경의 예언된 뜻대로 될 뿐이다. 마찬가지로 지금 내가 살기 위하여 천사가 올 수 있지만, 내가 죽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라면 아버지의 뜻이 그대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는 기도가 성령께서 피가 물처럼 흐르도록 기도하게 한 기도의 내용이 무엇이냐 하면, 거저 아버지의 뜻대로만 되게 하옵소서! 그 기도가 모든 성도의 기도의 정답입니다.
아버지의 뜻대로만 내게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원하나이다. 그 뜻이 무엇인지 자기도 모르지만 그러나 그 뜻대로만 되게 하옵소서! 그리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대로 죽으시고 뜻대로 삼일 만에 부활하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승천하시고 뜻대로 성령을 보내셔서 예수님의 십자가로만 구원받게 하시는 것을 알게 하십니다.
예수님이 죄를 아는데 있어서 예수님이 일방적으로 죄 속에 들어오신 것처럼, 우리는 가만히 있는데 아버지의 뜻대로 예수님이 홀로 아버지의 뜻을 이루셔서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과 함께 성령과 함께 지하 동굴을 빠져 나오게 하였다면 이것이 바로 거룩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거룩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선이라는 것은 선이 아니라 아버지의 영광이 되지 못하는 인간의 의입니다. 이런 선과 악의 굴레 자체로부터 예수님께서 벗어났다면 그것을 세례라고 합니다. 예수님과 연합이 된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성화라는 것은 단번에 거룩함은 얻었다는 것입니다. 단번에 얻었다는 히브리서 10:10절의 말씀이 맞잖아요! 이 지하에서 빠져 나왔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새삼스럽게 착해지려고 착한 일을 찾아 나설 필요가 없습니다. 무엇이 착하냐 아니냐 하는 것에 대하여 쟈크 엘룰에 의하면 착한 것을 해 보아도 그것이 착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선택한 착한 일은 착한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냐? 어떤 일이 있더라도 아버지의 뜻대로 되게 해 달라는 주님의 기도만이 착한 것이며 나머지는 착한 것이 아니라고 본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순간이라도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하면서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만 드러낼 때에 그것만이 거룩한 사람이 보여줄 수 있는 거룩한 모습입니다. 그것을 위하여 베드로전서에 보면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 하라는 말씀입니다.
베드로후서 1:5-7절입니다. 5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6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7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이 말씀이 무슨 말씀인가 하면 주어진 사건 하나하나에 주의 뜻대로 우리를 통하여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말씀은 공중에 떠 있어서 우리가 따 내려서 되는 일이 아니라 그 말씀이 우리를 사용하셔서 성령께서 그 말씀을 이용해서 이것이 우리 속에서 이룰 수 있도록 개입한다는 것입니다. 아~ 이것이 믿음이구나! 이것이 절제이구나! 이것이 형제우애이구나! 이런 말씀이 이루어질 때에 나타나는 현상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 밖에 없습니다. 철저한 자기 부인입니다.
따라 합시다. 자기 부인 철저한 자기 부인입니다. 이것은 주께서 그렇게 하셔서 일어난 일입니다. 철저한 자기부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는 그런 십자가와 동반해서 일어나면서 이 모든 말씀은 성도를 통하여 사건 사건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착하다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또 일을 벌이시네! 그러니까 이미 거룩함을 얻었지! 그것을 사건 사건 속에서 재확인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에게 받으시고 죄인 속에 들어오셔서 십자가로 튀어 나올 때 까지 그 모든 것이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한, 죽음에서 건져내기 위한 필연적인 절차인 줄 압니다. 우리가 그 예수님,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예수님과 더불어서 이 세상이 왜 죄악 되며 내가 왜 죄인인지를 날이 가면 갈수록 더욱 더 많이 깨닫는 이미 거룩한 사람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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