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강. 조직신학
성령론 1-1
06. 3. 13 강의 이근호목사
오늘은 성령론에 대하여 할 차례입니다. 성령론은 지금까지 한 것과 많이 다릅니다. 무엇이 다른가 하면, 성령님은 입도 없고, 코도 없고, 몸체도 없고, 발도 없고 성령님은 형체라는 것이 없습니다. 사람이 움직인다고 할 때는 사람의 몸이 움직입니다. 사람의 몸과 눈코입이 막 동작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행동에 나설 때는 신체가 있고 행동에 나서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무엇이 없다고 하였습니까? 눈도 없고 발도 없고 신체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분이 무엇을 하겠느냐? 어떤 일을 하겠느냐? 그것부터 생각해 봅시다. 아무것도 없는 분이 무엇을 하겠느냐?
우리는 몸을 가지고 있습니다. 눈 코 입이 있고 팔다리가 있기에 가라고 하면 우리의 신체들이 움직여서 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걸어가면 누가 걸어가는 것입니까? 몸이 걸어가는 것입니다. 오늘 이야기는 성령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데, 성령님에 대하여 어린아이한테 이야기 한다는 것이 보통 힘이 드는 것이 아닌데, 성령님은 몸체가 없으신데 일을 하셨는지 아니하셨는지 어떻게 압니까?
몸이 있으면 A지점에서 B지점으로 옮긴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성령님은 이런 몸이 없는데 일하시는 것을 어떻게 알 수가 있습니까? 굉장히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성령님이 일하십니까? 안하십니까? 일하십니다. 그러면 성령님을 어떤 할아버지라고 생각해보세요! 세상의 할아버지는 주름살도 있고 머리카락이 허옇습니다. 그런데 성령님이라는 할아버지는 머리도 허옇지도 않고 눈에 보이지도 않는데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일을 하는지 설명하기가 굉장히 힘이 듭니다. 그러므로 먼저 몸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어떻게 일하는가를 먼저 설명을 드리고 성령님에 대하여 이야기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설명하기가 힘이 듭니다.
사람은 어떻게 일하는가 하면, 사람은 먼저 주인공이 있습니다. 내가 나의 주인공입니다. 일을 해도 내가 일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한번 물어봅니다. 어떤 사람의 등이 가려운데 다른 사람이 자기 등을 긁으면 자신이 시원하여 집니까? 다른 사람이 자기의 등을 긁는데 나의 등이 시원해지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만약에 목욕을 하지 않았다고 합시다. 목욕을 하지 않았는데 다른 사람들이 대신 목욕을 한다고 여러분이 시원하여 집니까? 아니지요! 목욕한 사람이 시원한 것입니다. 여러분의 머리가 길어서 답답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자기 머리카락을 잘랐을 때에 내가 시원한 것입니까? 그 사람의 머리카락이 잘라져서 시원한 것이지 내 머리카락은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이해가 되겠지요!
이발을 한다든지 목욕을 한다든지 할 때에 남이 여러분을 대신 할 수가 없지요! 여러분이 목욕을 하기 싫은데 여러분의 형이 목욕을 갔다 왔다고 해서 여러분이 목욕한 것이 됩니까? 안됩니다. 백 명이 와서 백번을 대신 목욕하여 주어도 나는 목욕한 것이 아닙니다.
방금이야기 한 것이 유명한 실존주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실존주의를 모르니 이렇게 이야기 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신일과 사람이 하는 일이 이렇게 다르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는 일은 아무리 하여도 남을 대신하여 해 줄 수 없는 것이 사람과 사람들 사이의 일입니다.
이것을 여러분들이 이해하시겠지요! 옆 사람이 아무리 훌륭해도 나를 대신해서 해 줄 수가 없어요! 내 대신 천국가주고 내 대신 지옥가주고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성령님은 이런 신체, 몸이 없기 때문에 우리가 해야 할 일도 성령님께서 신체가 없기 때문에 우리 속에 들어와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대신 해 줄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좋아요 안 좋아요? 좋지요! 이렇게 묻는 내가 나쁜 놈이지만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의 차이점을 말씀드렸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사람의 일은 내가 할 일을 남이 대신하여 천 번을 하여도 내 대신 할 수 없는 것이 사람의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일은 사람이 하지 못하는 일을 하시는데 우리가 꼭 해야 하는 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 대신 다 해치울 수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래서 이번 시간에 우리가 공부를 하려고 하는 것은 어떻게 해서 하나님이 내가 안 해도 하나님이 다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을 우리 어린이들과 같이 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지금부터 어린이가 아무리 생각해도 못 알아먹는 이야기를 해보고자 합니다. 자 여기의 그림이 사람이지요! 이 사람을 점점 눌러서 납작하게 되면 납작한 사람이 되겠지요! 이 납작해 진 사람을 더 납작하게 누르면 없어집니까? 더 납작해집니까? 더 납작해지지요! 더 납작하게 만들면 무엇이 되겠습니까? 점이 됩니다.
코끼리를 납작하게 하고 더 납작하게 하면 무엇이 되지요! 점이 됩니다. 그러면 사람과 코끼리는 같습니까? 다릅니까? 같습니다. 이번에는 코스모스를 말합니다. 코스모스를 납작하게 하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점이 되는 것이지요! 그러니 코스모스나 코끼리나 사람이 다 같아요! 눌러버리면 점이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제일 적은 것을 점이라고 합니다. 물리학에는 분자원자라고 하지만 여기서는 제일 적은 것을 점이라고 하였습니다. 자 그러면 여기 이 점이 되는 것이 사람 코끼리 코스모스 다 점이 되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바닷가에 가 봅니다. 바닷가에 가면 무엇이 칩니까? 파도가 칩니다. 어린이 여러분들이 바닷가에 서 있는데 파도가 칩니다.
파도가 칠 때 물방울이 튀어서 여러분의 얼굴에 닿으면 차가움을 느낍니다. 그럴 때에 어 파도가 친다고 합니다. 그러면 이 물방울은 어디에 소속이 되어 있습니까? 이 물방울은 어디에 소속이 되어 있습니까? 파도에 소속이 되어 있습니다. 이 파도를 찌그리면 무엇이 됩니까? 찌그러진 파도가 아니라 그냥 파도입니다.
코끼리를 찌그리면 찌그러진 코끼리가 되고. 코스모스를 찌그리면 찌그러진 코스모스가 되고, 사람을 찌그리면 찌그러진 사람이 되지만 파도는 아무리 찌그려도 찌그러진 파도가 아니라 그냥 파도가 치는 것입니다.
여러분 친구들끼리 서로 좋아하는 것을 무엇이라고 합니까? 우정이라고 합니다. 코끼리를 찌그러뜨리면 찌그러진 코끼리가 됩니다. 우정을 찌그리면 무엇이 됩니까? 아무리 찌그려도 우정입니다. 이 강의가 어려운 것입니다. 강의를 아무리 찌그려도 그냥 파도치는 것입니다. 이것을 점이라고 하지 않고 사건이라고 합니다.
여러분이 신문이나 방송에서 사건이라는 말이 나오지요! 돌발적인 사건이라는 말이 나오지요! 학교를 가는데 차와 차가 박았다고 하면 학교 갔다 와서, 엄마! 엄마! 사건이 벌어졌어! 세상에 일어나는 것을 사건이라고 합니다. 또는 사태라고 합니다. 차끼리 박아서 사람이 죽었어! 그러면 큰 사태가 일어났구나! 그러는 것입니다.
또는 여러분들이 성적표를 보고서 엄마! 엄마! 사건이야 사건, 왜? 지난번에 10등 하였는데 이번에 1등하였어! 이것은 사건이야! 엄마 약속한 대로 컴퓨터 사줘! 여러분들이 1등 한 것을 찌그러뜨리면 무엇이 됩니까? 그것은 그대로 1등입니다. 사건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사람을 찌그러뜨리면 무엇이 됩니까? 점이 됩니다. 그것을 사건이 아니라 물체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신체이기에 사물이기에 눈에 보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닷물은 물체입니다. 그런데 바닷물이 울렁거리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파도가 친다고 합니다. 파고가 치지만 사실은 파도가 보이는 것이 아니라 푸른 물이 보입니다. 푸른 물이 보이지만 넘실되는 것을 파도라고 합니다. 이 두 가지 차이를 알겠습니까? 이것 알겠지요! 의존교회 어린이들 천재인줄 알지만 이것 알면 정말 천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점이 아니라 사건을 통하여 뜻을 우리에게 전달하십니다. 하나님은 사건을 통하여 우리에게 의미를 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보고 기뻐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감사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기뻐하고 감사하라고 합니다.
여러분 키 작은 사람을 무엇이라고 합니까? 난쟁이라고 하지요! 이제 여러분이 대답을 해 보세요! 어떤 난쟁이가 십자가의 피로 용서받은 것을 기뻐하는 것과 키 큰 사람이 십자가의 피로 용서받은 것 중에서 어느 쪽이 더 기쁩니까? 똑 같습니다. 키가 작은 난쟁이가 예수님 믿고 천국 가게 된 그 기쁨이나 키 큰 아저씨가 예수님 믿고 천국 가는 그 기쁨은 똑같은 것입니다.
다 동의하십니까? 반대하는 사람이 없지요! 반대한다면 반대한다고 이야기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부자가 예수님 믿고 천국 간 기쁨과 가난한 사람이 예수님 믿고 천국 간 기쁨과 꼭 같습니까? 다릅니까? 똑 같아야 되지요!
어떤 사람이 대학 시험에 똑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믿고 천국 가는 기쁨과 어떤 사람은 제일 좋은 대학 서울대학에 합격하였는데 그것도 수석합격을 하였습니다. 그 사람이 예수님의 피를 믿고 천국 가는 기쁨과 똑 같아요 똑같지 않아요? 똑 같습니다. 똑 같아야 합니다.
좀더 심하게 나가봅시다. 어떤 사람의 집에 불이 나서 홀랑 다 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고 천국 간다고 기뻐합니다. 그 사람의 기쁨과 어떤 사람은 아파트가 10채나 있습니다. 그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기뻐하는 것과 똑 같습니까? 똑 같지 않습니까? 똑 같아요! 정말 의존교회 어린이들은 천사들입니다.
진짜 천사인지 아닌지 한 번 더 물어봅니다. 어떤 어린이는 날 때부터 쌍꺼풀이 있어요! 그 아이가 예수님 믿고 기뻐합니다. 어떤 아이는 쌍꺼풀도 없고 뱃살도 있고 뚱뚱해요! 그 어린이가 예수님 믿고 기뻐하는 것과 똑 같아요 똑 같지 않아요? 똑 같아요! 정말 천사 같습니다.
성령님은 사람들의 신분이나 직업이나 나이나 키나 어떤 것도 구분하지 아니하시고 똑 같이 항상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고 기뻐할 수 있고 기도할 수 있는 그런 것들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누가요? 성령님께서! 무엇을 통하여? 사건을 통하여 우리에게 천국 가는 그 기쁨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 코끼리 코스모스를 점으로 생각한다면 다 같다고 하였습니다. 이제는 이 점을 죽죽 늘여봅시다. 죽죽 당겨보니 어떤 점은 사람이 되고 어떤 점은 코끼리가 되고 코스모스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면 점이 있을 때는 반대로 잡아 당겨서 사람과 코끼리와 코스모스가 되었다고 할 때에, 안경 낀 어린이 천사에게 물어봅니다.
너 코끼리 될래? 사람 될래? 사람! 코끼리가 아무리 덩치가 커지만 코끼리 되기를 싫지요! 사람이 더 멋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나는 코끼리도 코스모스를 무시하면서 그런 것은 되기 싫다고 합니다. 이렇게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남을 무시하고 미워하는 것은 나를 중심으로 하였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나는 아주 값이 싼 옷을 입었는데 내 옆의 친구가 갑자기 비싼 옷에다가 비싼 신을 신고 오면 갑자기 기분이 나쁩니다. 공부도 못하고 얼굴도 못생겼는데 그런 옷과 신발이 어울리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이나 입어도 예쁜데 그것 오히려 남이나 줘라! 폼 나지 않아! 이런 식으로 자꾸만 미워지는 것입니다.
그 미워지는 것이 누구 때문에 미워지는 것입니까? 나를 보니까 그런 것입니다. 내 중심으로 보니까 감사하지도 않고 기뻐하지도 않고 미워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무엇이라고 하였습니까? 항상 기뻐하고 감사하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미워지는데 하나님은 항상 기뻐하고 감사하라고 하시는데 어디에서 어디로 바뀌어야 하는 것입니까?
점에서 사건으로 바뀌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 묻기가 힘 드는데 이것 이해가 됩니까? 이것이 이해가 됩니까? 자신이 없습니까? 그렇다면 이해할 때까지 다시 하겠습니다. 점이 있을 때는 사람이나 코끼리가 똑같았는데 점을 잡아 당겨보니 한 쪽은 사람이 되었고 한 쪽은 코끼리가 된 것입니다. 사람이 되고 보니 코끼리가 되기 싫고 코스모스가 되기 싫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나는 사람이다?�에서 멈추면 괜찮은데 내가 예쁜가? 저애가 예쁜가? 저희 집에 돈이 많은가? 우리 집에 돈이 많은가? 저애가 똑똑한가? 내가 똑똑한가? 달리기를 누가 잘하는가? 항상 이렇게 자기를 먼저 생각하면서 남과 비교하고 대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까 사건을 이야기 할 때에 무엇이라고 하였습니까? 얼굴 못 생긴 사람이나 잘 생긴 사람이나 성령이 임하여 천국가게 되었다면 똑 같이 기뻐하고 감사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어린아이! 아까 분명히 들었지요! 거짓말하지 않습니다.
얼굴이 예쁘거나 아니거나 좋은 옷을 입었거나 아니거나 간에 똑 같이 감사합니다. 그렇게 해 놓고서는 막상 자기중심으로 돌아오니까 갑자기 자기보다 공부도 못하는 아이가 좋은 옷을 입으니 기분이 나쁜 것입니다. 미워하거나 싫어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닌데, 그러면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뜻으로 돌아올 수가 있겠어요?
점으로 생각하지 말고 나를 하나의 파도처럼 보는 것입니다. 파도에서 튕겨져 나오는 물방울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러면 파도는 누가 일으킬까요? 하나님이 일으키시고 하나님이 일으키시는 파도에 탁 탁 튕겨지는 물방울은 누가 될까요? 바로 내가 되는 것입니다.
안경 낀 학생! 한 학급에 몇 명입니까? 33명입니까? 그렇다면 33명중에 누가 일등이고 누가 꼴등인지 일등부터 33등까지 정해지겠지요! 선생님은 다 알고 계시고 학생들은 대충 압니다. 쟤는 대게 공부 못한다. 또는 공부 잘한다는 것은 대충은 알고 있는데 자세히는 모릅니다.
그런데 몇 학년 몇 반이지요! ?�5학년 4반입니다.?� 그러면 5학년 4반 33명하고 옆의 5학년 5반하고 축구시합을 하면 33명이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라 한명처럼 됩니다. 너는 몇 반이니? 4반이야! 그러면 우리는 한 편이니 우리는 하나야! 그래 하나야! 그때는 일등 이등 차이가 없습니다. 하나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예수님과 한 반이고 저쪽 5반은 마귀가 담임이고 지옥 갈 아이들이 모였다면 여러분은 예수님과 하나가 되었어요? 안 되었어요? 하나가 된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하시는 일에 기뻐하겠지요? 항상 기뻐하고 항상 감사하겠지요! 비록 5학년 4반 안에 나보다 공부도 잘 못하고 성적이 떨어지는 아이가 있더라도 이제는 너 나가 없이 한편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무엇을 일으키시는가 하면 예수님이 사건을 일으키시는 것입니다. 그 사건으로 파도를 일으키신다면 나는 파도에 의하여 탁탁 튕겨나가는 물방울 하나하나가 하나님의 성도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성도가 되는 사람은 누구를 보고 기뻐하겠습니까? 이것을 이해하면 여러분이 이해가 다 될 것입니다. 사건, 즉 파도를 일으키는 분은 누구라고 하였습니까? 예수님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무어라고 하였습니까? 파도에 실려 있는, 파도를 구성하고 있는 물방울이라고 봅시다.
예수님이 흔들면 흔들어지는 것이고 예수님이 잠잠 하라면 잠잠해지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과 함께 5학년 4반 같은 반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지금 누구와 싸우는 것입니까? 5학년 5반 마귀하고 싸웁니다. 우리는 예수님 편이기에 같이 싸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물방울이 탁탁 튀는데 어떤 물방울이 툭 튀는데 재어보니 지름이 5센티미터입니다. 그런데 나는 재어보니 3센티미터입니다. 화가 날까요? 안 날까요? 화 안 납니다. 왜요? 지름이 5센티가 되든 3센티가 되든 누가 이것을 만들었습니까? 누가 흔들어댔습니까? 예수님께서 흔들어댄 것입니다.
그런데 한 번 더 흔들어대니 5센티가 된 물방울에는 스티로폼 같은 쓰레기가 붙어 있고 3센티 밖에 안 되는 나에게는 그런 쓰레기가 안 묻어있는 것입니다. 또 한번 흔들어대니 나는 15센티가 되고 5센티는 1센티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나는 15센티이고 쓰레기도 묻지 않았다고 자랑하고 있는데 또 한번 흔들어버리니 나는 0.1센티가 되고 저쪽은 500센티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만약에 그냥 우리가 점에 불과하다면 수시로 기분 나쁘고 수시로 기분 좋고 매일 그럴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를 지금 우리의 모습대로 만드신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어떤 유명한 예수 믿는 철학자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이 세상에서 궁금한 것도 많고 알고 싶은 것도 많지만 제일 궁금한 것은 왜 하나님께서 나를 이 모양 이 모습으로 왜 만들어놓았는지, 어떻게 해서 나는 이 모습으로 왔는지? 내가 왜 남자로 왔는지? 여자 같으면 내가 왜 남자가 아니고 여자로 왔는지?
여러분 같으면 여러분 친구 중에 부자 집이 있을 것입니다. 의존교회는 부자 집이 별로 없습니다만 나는 왜 부자 집에서 태어날 수가 없었는가? 이런 생각을 어려서부터 천재적으로 생각한 사람이 평생토록 연구해서 해결하였을까요? 못 하였을까요?
해결 하였습니다. 왜 나는 코끼리가 아니고 사람인가? 왜 나는 코스모스가 아니고 사람인가 이렇게 보면 해결점이 없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 나라는 것이 태어나는 것은 예수님께서 사건으로 흔들다보니 툭툭 튀어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나라는 것도 나오고, 동생도 나오고, 형은 나왔다가 죽었고 주께서 쉬지 않고 열심히 일하시다 보니 이러한 물방울 노란색 물방울 무지개 같은 물방울이 튀어나오는 것입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어제 목사님이 사는 동네에 사방으로 산불이 났습니다. 목사님께서 아침마다 산책을 하는 곳인데 전경들이 막아서서 들어가게 하지 못하고 20시간 동안 불에 탔습니다. 사방에서 목사님의 집은 평안하시냐? 교회는 괜찮은가 하면서 전화가 왔는데 서울에서는 전화 온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왜 서울에서는 전화가 안 왔는가 하면, 속으로 그것은 주님께서 일으키신 사건입니다. 불이 나든 어떻게 되든 항상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생각하며 천사같이 사시기에 전화 안했을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
사건이기에 어떤 사람은 천국가고 어떤 사람은 지옥 가는 것이 누구 손에 달렸는가 하면 사건을 손에 쥐고 계시는 예수님에게 달려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천국 갈 사람을 생산해 내시고 또 지옥 갈 사람도 쉬지 않으시고 생산해 내시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지옥 가거든 주님께서 그렇게 하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지옥 가도록 만들어 내셨기에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성경 잠언 서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악한 것도 다 쓸모 있게 하시기 위하여 적당하게 지어놓으셨다고 말씀합니다. 악한 자도 악마도 하나님께서 다 쓸모가 있어서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예수님을 팔아먹은 가룟 유다도 하나님의 뜻이 있어서 태어나야 했고 그 사람은 예수님을 팔아버리는 그러한 사건에 휘말려야 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가룟 유다가 팔았고 예수님은 그 죽음을 딛고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다 이루었다고 십자가에서 하셨습니다. 내가 다 이루었다는 것은 내가 다 흔들어 놓았다는 것입니다. 흔드는 것이 너희가 아니라 나라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가 되었던 누가 되었던 흔들면 흔들리게 되어 있고 그 흔들림에 따라서 앞으로 태어날 사람은 태어나고 죽을 사람은 죽고 그렇게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다고 하신 것입니다.
자 이렇게 하니 여러분이 다 이해가 되지요! 처음에 이해가 잘 안 되었는데! 그러나 내가 아버지 어머니를 만난 것도 다 배후에서 일하신 예수님의 은혜이구나! 그리고 예수님을 믿게 된 것도 다 예수님께서 천국 오라고 인도하기 위하여 이런 환경을 조성하셨구나! 하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쉽게 알았으니 다시 어려운 것 시작하겠습니다. 파도니까 쉬운 것 했다가 어려운 것 했다가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무엇을 갖고 있다고 했습니까? 사람은 신체를 갖고 있습니다. 몸을 갖고 있습니다. 자기 몸을 만지면 누가 만지는 것입니까? 자기가 만지는 것입니다. 사람은 신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내 몸은 내가 알아서 한다는 것입니다.
다 잊어버렸지요! 다시 하겠습니다. 남이 여러분을 대신하여 목욕 할 수가 있습니까? 없지요! 여러분이 이발하여야 하는데 여러분 대신에 남이 해 줄 수가 없지요! 여러분이 배가 고픈데 옆 사람이 아무리 먹어도 여러분의 배는 부르지 않습니다. 내 배 고픈 것은 내가 챙겨서 집어넣어야 배가 부른 것입니다. 남이 네 대신에 먹어준다고 한다고 해서 배불러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약 올리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신체를 가지고 있으면 내가 하지 않으면 내가 필요한 것을 채워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신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나에게 어떤 행동을 가해야 됩니다. 제가 여기서 저곳까지 가고 싶다고 할 때에 가만히 있어도 가게 해달라고 해서 가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걸어가면 가는 것입니다. 내가 실제로 행동을 해야 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해가 되지요!
그런데 여러분 천국을 걸어서 가시겠습니까? 여러분이 하늘나라를 가는데 어떻게 갑니까? 하늘나라가 어디에요? 몇 킬로미터입니까? 버스타고 갑니까? 택시타고 갑니까? 실제로 여러분의 몸을 옮겨서 갈수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어떤 줄을 그어놓고 여기서부터 천국이라고 해서 내가 몸을 옮겨 공간이동을 하면 그곳이 천국이 됩니까? 안됩니까?
안됩니다. 천국이라는 곳은 우리가 현재 가지고 있는 신체를 가지고서는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자기 힘으로 자기가 자기에게 행동을 해서 그래서 자기 몸을 가지고 천국에 들어가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고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정말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천국에 우리의 몸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그런 천국은 이 우주 어디에도 그런 천국은 없습니다. 천국은 사건 속으로 빨려 들어가야 그래야 천국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아까 말한 사건입니다. 그런데 그 사건은 우리 힘으로 만들어 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오늘 작심하고 왔는데, 목이 마를 때는 내가 물을 마셔야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어이 이 목사! 천국에 오너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에 제가 어떤 행동을 해야 갑니까? 물을 마실까요? 춤을 출까요? 없다는 것입니다.
목이 마를 때에 내가 물마시면 그만입니다. 해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천국 가는 것은 내가 몸을 쥐어뜯고 때린다고 하여도 천국에는 못 들어갑니다. 옛날에 성경에 보면 엘리야라는 선지가 있을 때에 그때 가짜 신인 바알과 아세라를 믿는 종교인들이 850명이 있었습니다.
그 850명의 종교인들이 신의 뜻을 받고자 무엇을 했습니까? 온 하루를 자기 몸을 쥐어뜯고 막대기로 때리며 몸에 피까지 내어가면서 오 신이시여! 기적을 베풀어 달라고 하였지만 실패하였습니다. 인간의 힘으로 하나님을 부를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개나 소가 아닙니다. 부른다고 오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건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일으킨 사건 안에 포획이 되고 하나님 일으킨 그 사건의 파도에 말려들 때 비로소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만나고 천국을 만나고 구원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사건이 될 때에!
자 그렇다면 지금까지 한 것을 간단히 정리해보면, 하나님의 천국이라고 하는 것은 신체에 파급되는, 파급이라는 말이 어렵지요! 신체에 부닥치는, 사건이 어디를 공격하는 것입니까? 우리 신체에 부닥쳐서 우리의 신체, 우리의 몸이 자기의 몸 됨을 포기하고 사건 속에 휘말리게 될 때에 여기서 구원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하나 물어봅시다. 여러분들이 성경을 달달 외운다고 구원받습니까? 아니지요! 그것은 내가 내 머리를 채우기 위하여 머리 속에 넣어도 그것은 내가 만든 사건입니다. 내가 내 잘되기 위하여 만든 사건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다가와서 사건을 일으키게 되면 성경 공부를 하여야 하겠다는 마음이 들고 그렇게 되면 아 예수님께서 성경의 이 말씀을 이루시기 위하여 기록이 되었구나! 하는 것을 알고 또 이 말씀에 비추어 보니 내가 죄인인데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로 용서받았구나! 하는 것이 이해가 되고 납득이 되고 믿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옆의 친구가 너 성경공부 잘하구나! 성경을 몇 번이나 보면 그런 은혜를 받지! 그렇게 말하면 아니야! 내가 성경을 많이 보아서가 아니라 예수님이 찾아오셨기에 내가 성경이 납득이 되고 이해가 된다고 그렇게 솔직하게 고백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 예수님의 영이 찾아오셨기에 이렇게 성경이 이해가 되고 천국이 있다는 것이 믿어지고 지옥이 있다는 것이 믿어져! 그것은 내 능력이 아니고 예수님의 능력이 나에게 와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면 옆의 친구가 야 그렇게 된 것은 사건이야 사건! 네가 거듭나게 된 사건이야! 네가 구원받게 된 사건이야! 그래 그 사건은 바로 주님께서 일으킨 사건이야! 이렇게 될 때에 서로 이야기가 되고 소통이 됩니다.
그러니까 제가 지금 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내가 나에게 힘을 가해서 나를 천국에 보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울고불고 금식하고 자기를 때린다고 해도 그것으로 천국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주기도문을 천 번을 외운다고 해도 안 됩니다. 심지어 신학교를 간다고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애를 쓴다고 해도, 신학교를 안가도 소용없고, 교회를 다녀도 소용이 없고 안 다녀도 소용이 없고, 현재 여러분이 어떨 때에 구원받았는가 하면 지금 내가 현재 이 자리에 와서 성경을 듣고 있다는 이것도 주님께서 마련하신 사건인 것이 이해가 될 때에, 이것도 주님의 은혜로, 주님의 뜻대로, 이렇게 모인 것도 주님의 덕분으로 알고 이것은 주님의 힘이었습니다. 라는 것을 알 때에 이미 주님께서 일으키신 사건 속에 파도 속에 한 물방울로서 자리 잡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한 물방울로서 이 험한 세상에서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때는 옆 사람과 누가 잘했는가하면서 비교하시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다 5학년 4반인 것입니다. 어느 초등학교입니까? 신남 초등학교! 신남초등학교 5학년 4반 오늘 유명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이것을 듣는 사람이 많습니다. 5학년 4반 33명 하니 독립선언서 33명이 생각나는데 유명하게 되었습니다.
이미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예수님과 한편 하라고 우리가 이 세상에서 태어나게 하는 사건과, 신남초등학교 다니게 하는 사건과, 그것도 5학년 5반이 아닌 4반에 집어넣으신 것과, 그리고 이렇게 의존교회 다니게 하신 하나하나의 사건이 다 주님께서 진행시키시고 흔들어대시는 파도의 일종입니다. 사건 사건의 연발입니다. 파도와 파도의 연발입니다.
자 이렇게 보게 되면, 다음시간부터 할 것이 무엇인가 하면 그렇다면 성령님께서는 신체가 없으시기에 사건을 일으키시는 것입니다. 자 다시 물어봅니다. 바람을 축소하면 무엇이 됩니까? 그냥 바람입니다. 코끼리를 찌그러뜨리면 찌그러진 코끼리입니다. 그런데 바람을 축소하면 그냥 바람입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키가 작다고 안 들오시는 분이 아닙니다. 공부를 못한다고 안 들어오시는 분이 아닙니다. 키가 작든 공부를 못하든 간에 성령님께서 이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공부를 못하게 된 것도 성령님의 뜻이라고 하면 그러면 이제 나는 안하고 놀래요! 그렇게 놀다가 매 맞는 것도 주의 뜻이다 알겠느냐! 그러면 공부 할래요! 그렇게 정신 차리고 공부하는 것도 주의 뜻이다.
성령님께서는 우리가 키가 작든, 얼굴이 못 생겼든, 공부를 못하든 간에 우리 자체가 성령님이 만들어놓은 흐름이고 파도고 파동이고 사건이고 일이고 벌어진 사태입니다. 보잘 것 없는 우리를 앞장세워서 성령님께서는 일을 하신다는 것을 믿습니까?
성령님께서는 보잘 것 없는 여러분들을, 우리 가운데 똑똑한 사람도 없고 가진 것도 없지만 보잘것없고 연약한 여러분을 앞장 세우셔서 성령님께서 사건을 일으키신다는 것을 증거 하는 그러한 일꾼으로 삼으셨다는 것을 믿습니까?
우리 교회에서 조 장로님이 기도를 얼마나 잘하시는지 그런데 무제는 아멘 소리가 적다는 것입니다. 가끔 새로 온 사람이 아멘 하다가 한 2주 되면 조용합니다. 기도하고 나면 조용합니다. 그것이 우리교회의 사건이며 특징입니다. 일부러 강요하거나 분위기를 조성하지 말라는 깊은 뜻이 있겠지요! 저는 그것도 성령님께서 일으키신 사건으로 봅니다. 감사해야지요!
어제 우리교회 인터넷 하시는 김대식 형제님께서 새로 산 건전지 네 개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공중 기도할 때에 새로 산 건전지 잃어버려서 기분이 나빠 죽겠습니다하면서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건전지 네 개 잃어버려도 예수님 재림하십니다. 선문답 하는 것 같은데 예수님 재림하시면 건전지 잃어버린 것이 큰 문제가 아니지요!
첫째 시간을 요약하라면, 적어두세요! ?�성령님께서는 점 같은 우리를 사건으로 바꾸는 일을 하시는 분이 바로 성령님이시다.?� 우리가 점이라고 생각하면 남과 비교를 합니다. 네가 잘났나! 내가 잘났나! 점으로 보면 몸이기에 자기가 자기에게 행동을 가해서 자기를 구원하려고 하는 아주 악마적인 행동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점이라는 인식, 양적인 인식, 수자로 환원될 수 있는, 이 교회는 몇 명이고 저 교회는 몇 명이고, 하는 숫자와 숫자로 환원될 수 있는 그런 점과 점의 요소에서 벗어나서 세상 모든 것을 성령님이 춤추는 사건의 파도로서 바꾸어서 볼 수 있는 눈을 성령님께서 부어 주신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라며 첫 시간 마칩니다.
녹취 060725 이장우
성령론 1-2
06. 3. 13 강의 이근호목사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중요한 것을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우리 몸을 다룬다고 천국에 갈 수가 있습니까? 안되지요! 천국은 이 몸으로 가는 천국이 아니고 어떤 사태, 사건이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건이 일어나야 천국이 되는데, 어떤 사건이 일어나야 하는가 하면, 마귀가 하나님의 아들 되시는 예수님에게 완전히 굴복되는 사건이 일어나야 비로소 천국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마귀를 졸졸 따라 다니는 졸개들이 누구인가 하면 떡을 먹고 있는 저와 여러분들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마귀가 이 세상에 들어오고 나서는 어떤 인간도 죄인 아닌 인간이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기에 죄의 지배를 받고 죄에게 눌려서 살게 된 것입니다.
죄에 눌려서 산다는 말이 무엇인가 하면 이렇습니다. 십계명의 제일 마지막 계명이 탐내지 말라는 말씀이 기억나지요! 탐내지 말라는 말씀을 알고 내가 백화점 가면서 탐내지 말아야지 하고 백화점을 갔습니다. 그곳에서 내가 사려는 옷이 50만 원 짜리인 인 것을 보고서 나중에 돈을 벌면 저 50만 원 짜리를 살 것이라고 생각을 하였는데, 이 백화점에서 그 옆에다 마네킹에 백만 원짜리 옷을 입혀 놓을 것을 보니 갑자기 백만 원짜리를 갖고 싶은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 마음속에서 ?�이런 마음은 마귀의 역사야! 탐을 내지 말라고 하였는데 그래 탐을 내어서는 안 되지, 탐내는 일은 나쁜 일이야 하면서도 그러나 갖고 싶은 것을 어떻게?� 하는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학교 마치고 올 때에 어머니는 미리 말하지요! 학교 갔다 오다가 컴퓨터 게임 방에 가지 말고 숙제부터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친구가 옆에서 딱 한 게임만 하고 집에 가자고 할 때에, 여러분은 속으로 이러면 안 되는데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게임 방에 가지 않아도 이러면 안 되는데 하는 마음이 들고, 백화점에 가지 않아도 이러면 안 되는데 하는 마음이 드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아니고 약간은 불평을 갖는 마음인데 그 마음은 나도 모르게 마귀가 원하는 마음이 생기고 만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얀 떡을 먹고 있습니다. 이 떡도 맛있습니다마는 이 보다 더 맛있고 비싼 빵이 옆에 있다면 어떤 아이라도 이 떡에 손이 가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지금 죄를 안 짓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나를 유혹하는 것이 지금보다 더 좋은 것이 옆에 있다면 그때부터 갑자기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이 시시해 보이면서 다른 것이 마음이 빼앗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잘 빼앗기도록 준비되어 있는 마음이 우리의 마음입니다. 죄를 얼마나 짓는가의 문제보다 우리의 마음에 늘 죄를 지을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다는 자체가 하나님보시기에 이것이 죄인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의 시험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에게 물어봅시다. 마귀의 시험을 이긴 분이 한 사람뿐입니다. 누구십니까?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무슨 몸이라고 합니까? 새 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아담의 새로운 몸인 것입니다. 이 새 몸은 어디로 연결되어야 하는 몸인가 하면 죽여도 안 죽는 몸입니다. 새 몸은 죄가 없는 몸이기에 죽여도 안 죽어야 될 몸, 이 몸은 예수님의 몸, 예수님의 신체밖에 없습니다.
다른 신체 즉 우리 같은 몸은 죽으면 죽어야 됩니다. 죄의 값은 사망이기에 우리의 몸은 죽어야 됩니다. 그러나 오직 한 분의 몸은 죽여도 죽여도 다시 살아나는 몸이 있습니다. 밟아도 밟아도 다시 살아나는 몸입니다. 누구 몸입니까? 예수님의 몸입니다.
그래서 마귀는 딴 몸은 다 이기지만 예수님에게는 집니다. ?�아이고, 예수님에게는 졌다?�고 합니다. 마귀의 무기는 죽이는 것인데 예수님은 죽으신지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
여러분 죽은 지 나흘 만에 살아난 사람이 있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의 오빠인 나사로라는 사람인데 그 사람이 죽어서 몸이 썩었습니다. 박테리아가 우글거리고 분명히 썩었음에도 불구하고 나흘 만에 멀쩡하게 다시 살아났습니다.
왜 그럴까요? 자기가 자기에게 무엇을 가해서 그렇습니까? 자기가 자기에게 무엇을 한 것이 아무것도 없지요! 그러면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 만에 살아난 것은 누구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까? 그 능력이 외부에서 온 것입니다. 예수님이 새 몸이 되셨습니다. 이 새 몸은 부활의 몸이 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몸에서 나온 영을 성령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몸이 부활의 몸이 되어서 성령이 나오게 되어서 나온 몸이 5학년 4반인 것입니다. 성령님은 신체가 없다고 하였지요! 성령님은 몸이 없기에 찌부러져도 점이 됩니까 안 됩니까? 점이 안 되고 사건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어떤 사건을 일으키는가 하면 예수님의 몸이 되게 하는 5학년 4반 1번에서 33번까지 예수님의 몸이 되게 하는, 자기 학급을 모으는 그 사건을 일으키다 보니 그 사건에 휘말린 한 사람이 누구인가 하니 바로 마리아와 마르다의 오빠 나사로가 나흘 만에 살아난 것입니다.
누구 능력입니까? 예수님의 능력입니다. 누가 일으킨 사건입니까? 예수님이 성령을 통하여 일으키신 사건입니다. 그 예수님이 파도요 마르다와 마리아의 오빠 나사로는 파도가 튕기는 물방울에 해당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마르다 마리아의 오빠에게만 부활의 사건을 일으키시겠습니까? 다른 사람도 일으키시겠습니까?
다른 사람도 일으키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5학년 4반을 불러 모으시는데 그것을 미리 아신 자를 불러내시고, ?�나사로야 나오너라!?� 죽은 자를 불러내시고 나는 부활의 능력이다. 부활의 능력으로 불러내시는 사건을 통하여 미리 아신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고, 의롭게 하신 자를 영화롭게 하셨다고 로마서 8:28-30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미리 아신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자를 영화롭게 하셨다는 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건, 사건 하나하나가 다 선이라는 것입니다. 이 교회 오게 된 것도 사건이요, 복음을 알게 된 것도 파도의 사건의 일부인 것입니다.
그래서 어렵게 이야기를 하면 애들이 알아들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원인이 있어서 결과가 있는 것이 아니고, 서로가 서로에게 원인이 되고 서로가 서로에게 결과가 되고, 모든 것이 믿음과 소망이 다 한분에 의해서 저질러진 하나의 사태가 지금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지금도 주님에 의하여 일어나고 있습니다.
다시 하겠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몸들은 이미 선악과를 따 먹었기 때문에, 선악과 제일 먼저 따 먹은 사람들이 누구이지요? 아담과 하와이지요! 우리는 누구의 후손입니까? 아담의 후손이지요! 그것은 성경은 아담 안에 있다고 합니다. 어디에 있다고? 아담 안에 있습니다.
우리가 눈 코 입을 가지고 있지만 이것은 아담의 몸인 것입니다. 아담이 새끼를 쳐서 똑 같은 몸이 나온 것입니다. 아담의 몸에서 원숭이 나온 것이 아닙니다. 코끼리가 나온 것이 아닙니다. 아담의 몸에서 5학년 4반 저와 여러분들, 사람이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아담이 무언가 하면, 아담이 매일 같이 무엇을 짓고 있습니까? 백화점 이야기를 했습니다마는 매일같이 죄를 짓고 있습니다. 자기가 원하지도 않는데 죄가 나옵니다. 죄 지으려고 원하지 않는데도 죄가 나옵니다. 탐내고 싶지 않은데도 탐나는 것입니다. 거짓말하기 싫은데도 거짓말이 나옵니다. 남을 미워하기 싫은데도 자꾸만 미움이 나옵니다.
여러분 북한의 김정일이 미워요 안 미워요! 김정일이 누구인지 몰라요! 김일성의 아들인데 사람을 죽이고 남북을 가로막아요! 그래서 사람들이 미워해요! 그런 미움이 나와요! 여러분들을 해코지 하는 사람이 있으면 미워요! 미워하는 것이 나쁜 줄 알아도 왠지 미워요! 이유 없이 미워요!
좋은 것도 왠지 좋아져요! 이유 없이 좋아져요! 아담에게서 나온 것으로 이것은 안돼 저러면 나쁜 것이야 하는 것을 이성이라고 합니다. 여러분은 그냥 들어두세요! 이성 때문에 이것은 나쁘다는 것을 아는데 그런데 이성이 도저히 감당을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감정입니다. 영어로 필링 우리말로 느낌입니다.
여러분이 음악이 나와서 춤을 출 때에 손과 발을 따져가면서 움직입니까? 그냥 흔들리는 대로 흔들지요! 따지는 것은 이성입니다. 꼬치꼬치 따지는 것이 이성입니다. 감정은 느끼는 것입니다. 느끼는 것은 아무리 똑똑하여도 그 느낌을 다 흡수하거나 정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미운 것은 그냥 미운 것이고, 좋은 것은 그냥 좋은 것입니다. 싫은 사람은 싫은 것입니다. 공부를 많이 한다고 해서 싫은 사람이 좋아지지 않습니다. 흔들리는 대로 흔들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마음대로 안 됩니다.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아담 안에 있으면 누구나 정리가 안 되는 이런 대목이 많이 나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귀한테 끌려 달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귀에게 끌려 다니는 것은 두렵고 무서운 것입니다.
마귀에게 끌려 다닌다는 것을 조금 어렵게 해 봅시다. 아담과 하와가 무엇을 따 먹었습니까? 선악과를 따 먹었습니다. 선과 악이 같습니까? 다릅니까? 다릅니다. 다른 것을 동시에 받아들였기 때문에 이것이 정리가 안 되고 결합이 안 되는 것입니다. 결합이 안 되니 선은 여기에 있고 악은 저기에 있어서 뚝뚝 떨어져 있는 것입니다.
서로 대립되는 것이 한꺼번에 들어왔으니 사람들은 감당이 되지를 않는 것입니다. 감당이 안 되니 어떻게 했는가 하면, 악에서 떠나서 점차 선으로, 선으로 나가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악에서 떠나 점차 선으로 나가려고 하는데 문제는 마귀가 약을 살살 올리는 것입니다.
어떻게 약을 올리는가 하면, 너 거지에게 얼마를 주었어? 백 원 주었어! 너 그러면 되는가? 그렇게 잘 먹고 잘 살면서 백 원을 주어서 되나! 천원은 주어야지! 그러면 열배나 더 착해지는 것이니 다음에는 천원을 주어야지! 그래서 천원을 주었습니다. 그러자 마귀가 다시 야야 얼마 주었어! 천원 주었는데! 천원으로 되겠어! 만원 주어야지! 그렇지 만원을 하면 열배나 더 착하기에 그렇게 해야지!
다음에 마귀가 무어라고 하겠습니까? 저 이웃에 신장이 상한 사람이 있는데 신상 하나 떼 주어야 하지 않겠어! 그래서 더 착한 사람이지! 그렇지 두개 있으니 하나를 떼 주어야지! 하나 떼 주고 나면 다시 와서 나머지 하나도 떼어 주어야지! 그러면 나는 죽는데 네가 죽더라고 남을 살리는 것이 착한 일이지 않겠어! 그것이 예수님의 정신인데! 마귀가 성경말씀까지 총동원하면서 나로 하여금 못살게 굽니다. 더 착해야지 하는 것입니다.
선악과를 따 먹고 나서 서로 맞지를 않기에, 서로 만날 수 없는 대립적이고 이질적인 요소가 한꺼번에 들어왔기에 사람을 자꾸 악에서 선으로 나아가도록 마귀가 뒤에서 엉덩이를 때리며 자꾸 더 착해지도록 때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느 정도 선을 행하면 마귀가 떨어져야 하는데 아무리 선을 행하여도 떨어지지 않고 또 다른 선을 내 놓으면서 이 선도 행해여야 악을 이기지! 그러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의 마음에 이중성이 있어 가지고, 이중성이란 두 가지 마음입니다. 외부용이 있고 내부용이 있는 것입니다. 외부용은 바깥에 남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나의 정당성, 나는 이렇게 한 것이 최선을 다했다. 자기변명, 나는 이 정도 한 것이 대단히 수고한 것이며 착한 것이라고 외부용으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쁜 것은 내부용으로 꼭꼭 숨기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을 누가 알아채겠습니까? 바깥으로는 착하다고 자랑하고 속으로는 더러운 것을 차곡차곡 쌓아놓고 이런 마음을 알아채시는 분은 이 세상에서 누구 밖에 없겠습니까? 예수님이지요! 예수님이라고 하면 정답입니다.
이 예수님께서 이런 사람의 마음을 알아채시고 그 당시에 착한 훈련을 시키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에게 이야기하기를 너희의 마음에는 독사가 들어있다고 하였습니다. 너희들 속에는 독사를 키우고 있으면서 겉으로는 말씀을 지켜서 하늘나라 천국을 간다고? 정말 너희들이 솔직하게 너희들의 잘못을 안다면 너희들이 범죄 한 오른 손을 톱으로 잘라버리라고 한 것입니다.
여러분 톱 가지고 다닙니까? 오른 손이 범죄 하면 잘라 버리고 오른 눈이 범죄 하면 뽑아버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바리새인에게 이야기 하였습니다. 아이고, 무서워라 누가 그 말씀을 지키겠는가? 좁은 길로 가라 사람들이 많이 가는 길은 그것은 분명히 멸망의 길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먹을까 염려하지 말라 그런 것은 다 지옥 가는 사람들이 구하는 것이다. 진짜 달라고 할 것은 하늘의 의를 달라고 해야지, 공중의 새를 보라! 문제 냅니다. 공중의 새가 높이 솟을 때도 있고 밑에 내려 갈 때도 있지요! 새가 올라갈 때 성공한 것입니까? 내려 갈 때에 성공한 것입니까?
새는 창공을 마음대로 날기에 올라가거나 내려가거나 그것이 성공이나 실패가 아니지요! 그런데 참새는 올라가던 내려가던 다 주님의 은혜로 여기고 있는데, 왜 인간은 올라가면 야 성공이다. 하면서 내려가면 아 실패라고 왜 그렇게 생각하는가 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 속에 있지 않고, 점처럼 자기가 스스로 자기를 구원하려 시도하려고 하다가 보니까 남과 비교하면서 조금 성공했다고 싶으면 기분 좋고 조금 실패하였다 싶으면 낙담을 해가지고 교회도 안 나오고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새보다 못한 것입니다.
들풀은 어떻습니까? 자기들끼리 서로 시합을 합니까? 서로 비교하지 않습니다. 너는 너, 나는 나입니다. 둘 다 내일 베여서 불쏘시개로 들어간다고 할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않습니다. 실망하지 않습니다. 자기 인생에 대하여 스스로 나는 왜 불쏘시개가 되는가 하면서 자탄하지 않습니다. 그것도 다 주님께서 주신 사건으로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살다가 죽으면, 아이고! 원통해라 내가 이것도 못해보고 저것도 못해보고 원통하다고 하는 사람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솔로몬이 화려하게 입은 옷도 하나님께서 친히 입혀주신 들풀 하나만 못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말씀인가 하면, 사람의 마음속에는 자기 잘난 것을 앞세우고 못난 것은 감추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신 것은 잘난 것에 대하여 자랑하라고 오신 것이 아니고, 진짜 못난 것 꼬깃꼬깃 숨겨놓은 나쁜 것을 현미경과 돋보기로 들이대면서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 옆에서 구원받은 사람의 직업이 무엇이었습니까? 예수님 십자가 옆에서 같이 죽은 사람 두 사람 중에 구원 받은 한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평소에 하던 무엇입니까? 공무원? 아닙니다. 강도입니다. 평소에 강도짓을 하던 그 사람에게 예수님은 오늘밤에 너는 나와함께 낙원에 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천국에 간다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강도가 무슨 수로 갈 수가 있습니까? 첫 시간 잘 배우고 둘째시간 지금까지 잘 들었으면 답변할 수가 있습니다. 강도가 어떻게 해서 천국에 가게 되었습니까? 강도가 자기가 한 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강도가 죽은 장소는 십자가 위입니다. 천국이 아닙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곳이 천국이 되는 것입니까?
사건, 예수님이 일으킨 사건에 휘말려 들어가다 보니 강도가 죽는 것도 예수님을 증거 하기 위한 예수님의 일로 죽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내가 나쁜 일 한 것으로 죽는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증거 하라고 예수님이 천국의 주인이라고, 예수님만이 죽었다가 부활하시는 분임을 증거 하라고 그리고 예수 믿는 자만이 구원받는 다는 것을 증거 하라고 옆의 강도지만 살아났다는 것을 그 강도가 알았습니다.
그게 5학년 4반입니다. 같이 노는 것입니다. 생각이 다 통하는 것입니다. 나에게 일어난 것은 다 예수님의 사건입니다. 알파와 오메가입니다. 처음과 나중에 다 똑 같은 것입니다. 이 쟁반을 달라고 한 이유가 있습니다. 여기에 무엇을 놓는지 보세요! 안경을 놓습니다. 건전지입니다. 그다음에 컵입니다. 이것이 따로 따로 있으면 안경과 컵이 누가 잘났는지 하면서 서로 싸울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예수님 안에서 쟁반에 같이 담겨버리면 컵은 컵 되어야 예수님을 증거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안경은 안경이 되어야 하고 건전지는 건전지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쟁반이 움직이는 대로 움직여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컵이 건전지보고 너 키가 작다고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같이 가는 것입니다.
여기서 더 어려운 이야기를 합니다. 오늘이 며칠입니까? 2006년도 3월 13일 같은 컵이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공간적으로 같이 있는 정도가 아니라 시간적으로도 나중 태어난 것이 먼저 태어난 것과 같이 있습니다. 이것을 이해하라고 하는 내가 나쁜 놈입니다. 시간적으로도 아담 안에 있지 않고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이것이 어디에 나오는가 하면 마태복음 17장에 보면 변화산이 나오는데,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가십니다. 그 산에서 예수님께서 졸지에 하나님의 모습으로 변하였습니다. 그때 누가 함께 있었습니까? 모세와 엘리야가 함께 있었습니다.
모세는 B.C 1200년에서 1100년 사이의 사람입니다. 엘리야는 B.C 800년 정도의 사람입니다. 무려 400년 정도의 간격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보다 800년이나 더 뒤에 오셨지만 그러나 이러한 간격과 상관없이 함께 있는 이것이 천국인 것입니다. 너희들 중에 천국을 볼 자가, 천국의 능력을 볼 자가 있을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천국의 능력이 임하게 되면 이것은 선배도 후배도 없습니다. 옛날 아브라함도 만납니다. 거지 나사로가 누구 품안에 갔습니까? 아브라함 품에 갔습니다. 나사로가 사는 것과 아브라함이 시간과 공간이 달랐지만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공간과 시간을 초월하여 함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이 일으키신 사건 안에 들어있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죽으시면 아담을 만날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도 만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내가 육체를 벗어버리면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있을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지금부터 2천년 전에 돌아가신 분입니다. 사도 바울보다 40년 먼저 돌아가신 분이지만 같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2천년 지난 지금도 우리가 죽으면 예수님과 같이 있습니다. 왜 지금 같이 있으니 그때도 같이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공간과 시간을 전혀 무시하고 함께 할 수 있도록 해 주시는 분을 요한복음 14장 16절에서 성령님이 즉 보혜사가 오시면 그렇게 하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보혜사가 오시게 되면 그 분은 하나의 처소가 되는데 어떤 처소가 되는가 하면 아버지가 내 안에 너희들이 내 안에 있도록 조성해주는 새로운 처소를 성령님이 오시면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지 말라 내가 처소를 준비하면 다시 오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세상 끝날 까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라고 마태복음 28:20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구름타고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하늘을 쳐다보고 있으니 천사들이 제자들에게 말하기를 왜 쳐다보느냐? 예수님께서 세상 끝날 까지 함께 계신다고 하셨는데, 너희를 떠나지 않는데 왜 떠난다고 여기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령 안에서 떠나지 않았는데 사람들은 신체를 가지고 있기에 몸을 가지고 있기에 몸이 보이지 않으면 자꾸 떠난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손과 발이 안 만져지면 여기 없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용서하시는 방식으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날마다 용서 하시는 것은 우리가 날마다 죄 짓기에 날마다 용서하셔서 의인되게 하시는 그런 방식으로 계속하여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크면 알겠지! 나중에 크면 틀어 봐요! 아 그때 그 말씀이 이런 뜻이었구나! 비록 그분은 갔었어도! ??
자 접시 이야기 다시 해 보겠습니다. 이 사람은 천년 전에 죽은 사람, 이 사람은 오백년 전에 죽은 사람, 이 사람은 작년에 죽은 사람, 이 사람은 지난달에 죽은 사람, 그러나 이렇게 함께 모일 수 있는 것은 같은 쟁반 안에 있으면 모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쟁반이 무엇입니까? 성령님입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의 파도입니다. 파도가 치면 A라는 지점에 있으나 B라는 지점에 있으나 C라는 지점에 있으나 함께 흔들리는 것입니다. 함께 웃고 함께 탄식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아는 다른 교회의 한 청년이 와 있습니다. 나이가 어려보이지요! 28살이나 됩니다. 지금 멀리 가려도 준비하고 있는데, 제가 기뻐요! 왜 기쁜가 하면, 너 교회 내 교회가 없고 다 한 사건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흔들어대시는 사건 때문에 복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것을 지체라고 합니다. 같은 몸이고 손가락이고 발가락이기에 같이 슬프고 같이 기쁜 것입니다. 같이 휩쓸려서 같이 예수를 믿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칼빈이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저항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구원받았다고 합니다. 그 사람이 대충은 압니다. 인간의 행함이 아니라 무언가 저항할 수 없는, 쉽게 말해서 못 말리는 능력으로 예수님의 사건에 휘말리게 된 것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나 혼자의 파도가 아닙니다. 전체가 합해서 하나의 파도를 예수님은 자신의 몸을 통해서 구원받을 자기 지체들을 모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내가 애쓴다고 구원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그 사건에 휩쓸릴 때 구원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진짜 이야기 할 것은 지금부터입니다. 지금까지는 하나의 토대며 바탕인 것입니다. 지금 제가 진짜 설명하려는 것이 나오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아까 이야기 한 것을 다시 반복해야 이해가 될 것입니다. 사람은 마귀한테 이기지 못합니다. 사람은 선악과를 따 먹었는데 그 반대가 되는 것이 한꺼번에 들어오게 되니 마음이 괴로운 것입니다.
왜 괴로운가 하면 선을 행하여야 하겠는데 나오는 것은 악밖에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 선을 쫓아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러다가 죽지! 이러다가 죽지하고 있으니 마귀가 자꾸만 놀리는 것입니다. 그래도 선한 쪽으로 최선을 다했으니 구원받을 거야라고 속이는 것입니다.
사람은 어떻게 하여도 자기로서는 구원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구원이 됩니까? 제가 첫째 시간에 무엇이 와야 구원이 된다고 하였습니까? 사건이 덮쳐야 구원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이번에 두 번째 시간에는 그것에다 하나를 붙입시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약속사건이 덮쳐야 합니다. 그것이 창세기 3:15절입니다.
사람이 죄를 짓고 나서 사람이 하나님을 찾아 갔습니까? 하나님이 사람을 찾아 왔습니까? 하나님이 찾아오신 것입니다. 사람은 죄 짓고 나서 자신을 가리고 숨었습니다. 죄 짓고 나서 부끄러워서 자기가 자기를 덧입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꾸 자기의 부끄러움을 가리기 위하여 직업을 이야기 하고, 인물을 이야기 하고, 학교 출신을 이야기 하고, 나는 시시한 나라가 아닌 아주 큰 미국에 산다는 식으로 자꾸 자기를 위장을 하는 것입니다.
특히 여자들이 나이가 좀 많은 여자들이 성질이 나면 집에 가서 자면 될 텐데, 집에 가서 벌건 립스틱을 가지고 입술을 진하게 바르는 것입니다. 남자들은 성질난다고 벌겋게 매운 것을 먹으면서 스트레스를 풀고 그러는 것입니다. 어떤 식으로 자기를 가리지 않으면 참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가리는 것이 하나님이 영광이 되는 것이 아닌데 그 가리는 재료를 옆에서 마귀가 제공해주는 것입니다. 술 먹고 달래라, 도박해서 달래라는 식으로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인간은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고 그냥 순간순간 넘어가기에 급급한 것입니다. 그러니 제가 하고자 하는 말은 사람은 아무리 하여도 원상복귀가 안 된다는 이 말입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여러분이 어린애들이지만 죽습니다. 죽음을 돌이킬 수가 없습니다. 원상복귀가 안 됩니다. 이래나 저래나 죽습니다. 김형곤이라는 개그맨도 죽었습니다. 다 죽습니다. 그런데 살려달라고 먼저 내미는 것은 백날 해보아야 소용없는 짓이고 하나님께 먼저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찾아오시는 가하면, 창세기 3:15절을 찾아봅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누가 예언하신 것입니까? 사람이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지요! 그러면 이 예언대로 될까요? 안될까요? 반드시 되게 되어있습니다. 이 예언에 등장하는 네 사람이 등장합니다. 한 사람은 아담 다른 사람은 아담의 아내 하와, 또 한 사람은 뱀의 후손이라고 하니 악마, 또 한사람은 뱀의 머리를 쳐부술 하나님의 아들 이렇게 네 사람이 약속이라는 한 접시에 담겨서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사건을 일으키면서 지금 운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네 파트가 죽 움직이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 쟁반 안에서 아담과 하와가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죄 짓는 일을 합니다. 그 다음에 예수님은 이 약속 안에서 무엇을 하겠습니까?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으면 그것을 용서 해주시는 일을 합니다. 그 다음에 악마인데 이 악마는 무엇을 하겠습니까? 예수님의 용서에 대하여 시비 걸고 달려드는 것입니다. 사람이 아무것도 행한 것이 없는데 왜 용서 해주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이왕 선악과를 따 먹었는데 착하면 구원받지, 착해야 천당 가지 이것이 무엇이 나쁜데 왜 그것을 미워하고 착하지도 않은 자를 천국가게 하는가하면서 시비 거는 역할을 이 악마가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이 교회 다니면서 착해야 구원받지 하는 그런 교회가 있으면 악마가 만든 교회라고 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가르치지 않고 우리 인간의 죄를 이야기 하고 그 모든 죄를 예수님의 피로 용서 받았다고 예수님의 공로에 대하여 이야기 하거든 참 교회인줄 아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약속 속에 놓여있는 사건들이기 때문입니다.
욥기서에 보면 빌닷이라는 사람이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이것을 그림으로 그려보면, 선악과를 따 먹었으니 이 빌닷이라는 사람이 복음을 모르고 선악과만 알고 있으니, 악을 버리고 선으로 나가면 하나님께서 점차점차 많은 복을 내려주는데 이 바보 같은 욥아! 너는 악이 많기 때문에 병들고 마누라 도망가고 자식들 열명 다 죽고 재산 다 날아갔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저주를 받은 것은 네가 악하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욥아 이제 내 말을 듣고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면 비록 시작은 미약하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이 맞습니까? 맞지 않습니까? 악에서 선으로 나아가는 이것은 인간이 이미 타락하고 난 뒤의 품성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아무리 악에서 벗어나 선에 가고자 하여도 못 가는 것임을 아십니다. 아시기 때문에 욥에게 무엇을 주시는가 하면 약속을 주십니다. 제가 약속 뒤에 무엇을 붙였습니까? 약속 뒤에 사건을 일으키시는 것입니다.
사건을 일으키면 예수님처럼 고난을 받는 것입니다. 욥은 자신에게 일어난 그 고난이 나중에 예수님에게 일어날 사건 인 것을 몰랐습니다. 나중에는 하나님께서 알려주십니다. 욥아 다 내가 일으켰다. 황무지에 비 내리는 이유를 아느냐? 황무지에 비 내리는 사건도 이 하나님이 일으킨 거야!
네가 별이 창조될 때 네가 거기에 있었느냐? 하마가 새끼 낳을 때에 너 거기에 있었느냐? 몰랐지! 그것이 너의 관심사가 아니었으니, 하지만 내 관심사였어! 하지만 네가 하마를 좋아하든 아니하든 하마는 새끼를 놓게 되어 있어! 마찬가지로 네가 원하든 원하지 않던 이 사건은 나 때문에 일어난 거야!
자식 죽은 것도 내가 그렇게 한 것이고 재산 날아간 것도 친구들로 하여금 너를 욕하게 한 것도 다 내가 한 것이야! 그러면 이것은 무엇이냐? 바로 하나님의 약속, 용서 하신다는 약속을 보여주기 위해서 한 것이다. 그러니 친구들을 용서해주라. 그것이 용서의 사건을 받은 자의 합당한 자세다. 이렇게 해서 욥은 자기를 비난한 친구들을 대신하여 제사를 드려주고 욥은 더 예쁜 마누라 더 예쁜 자식들 더 많은 재산을 받아서 행복하게 살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욥이 잘해서 행복하게 된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된 것입니까? 하나님이 주신 약속 때문에, 하나님의 약속 속에 있는 사람은 이렇게 행복해 진다는 보여주기 위하여 욥이 상상도 못할 극도의 영광스러움을 제공하여 준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라고 하는 것은, 제가 첫째 시간에 이야기 하였지요! 사람들은 자기만 생각하면, 그것을 찌그러뜨리면 하나의 점이 되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이란 하나의 점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기 위하여 약속 속에 놓여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질문하나 해 봅니다. 지옥 갈 사람도 이 접시에 담겨있을까요? 담겨 있지 않을까요? 담겨 있습니다. 지옥 갈 사람은 철저하게 악마의 말을 듣고 누구를 핍박하게 되어있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도록 약속 사건에 의하여 정하여져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단들은 열심히 이단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믿습니다. 하면서 열심히 이단 소리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서 지옥가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 사람에게 말해보아야 알아듣지도 못합니다. 착해야 구원받고 성화되어야 구원받는다고 설쳐 되고 있으니 그대로 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성화가 무엇인가 하면 악에서 점점 선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잘난 체 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죄가 더한 곳에 하나님의 은혜가 넘친다고 하였습니다. 죄가 있는 곳에 하나님의 은혜가 더 넘친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약속은 시도 때도 없이 살려내는 못 말리는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죄도 용서되는 능력이 예수님에게서 나온다고 믿는 사람이 바로 예수님과 함께 5학년 4반에 해당되는 사람입니다. 십분 쉽시다.
녹취 060727 이장우
성령론 1-3
06. 3. 13 강의 이근호목사
세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첫 번째 시간에 한 것은 우리는 파도와 같아서 예수님이 흔들다 보니 우리는 이 땅에 태어났고,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은 예수님이 본인이 하셔야 할 일, 그 사건 속에 휘말리다 보니 학교도 다니고 성경공부도 하고 이렇게 모이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두 번째 시간에는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우리가 우리 신체에 무엇을 가하여 우리가 구원될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는 선악과를 따 먹었기 때문에 아무리 선을 좇아가려고 하여도 우리 속에 죄가 자꾸 나오기 때문에, 율법 때문에 죄가 더욱 많이 나옵니다. 그래서 우리 힘으로 구원될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구원이 되는가 하면, 죄가 있는 곳에 예수님이 하신 일이 은혜로 임하게 되면 그 예수님이 용서하시는 능력으로 우리가 의인 되었고 구원되었고 부활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그 용서 하는 바탕이 어디에 나오는가 하면 이 접시를 가지고 설명을 하였습니다. 창세기 3:15절에 나오는 그 약속을 인하여 나왔다고 하였습니다.
이 접시 안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하면 예수님은 우리를 용서하시는 일을 하고 우리는 죄 짓을 일을 하게 되고 마귀는 우리가 예수님의 그 공로를 안 받아 들이고 그냥 선악 쪽으로 나가라고 자꾸 부추기고 약을 올리는 그런 일을 하고, 마귀는 어떻게 하든지 예수님의 공로로 구원받는 다는 것을 못하게 만들고 너 스스로의 노력으로 구원을 얻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까지 이야기 하였습니다.
이제 오늘 마지막 시간에는 그것이 구약 전체 역사 가운데 신구약 역사 전체를 통하여 마귀가 어떻게 예수 믿는 사람들을 못 믿게 방해하였는지를 이야기 해 보겠습니다.
마귀에 속한 사람이라고 하였는데 사람은 누구나 태어날 때부터 마귀에게 속하였습니다. 물론 창세전부터 예정된 사람이 있는데 성령님이 찾아오시기 까지는 마귀가 좋아하는 행동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소위 하나님께 속하였다고 여겼던 사람들이 도리어 누구를 공격하는가 하면 진짜 하나님의 편을 공격하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 편이다. 나는 구원되었다고 하는 그 사람들이 자기 생각에 의하여 누구를 공격하는가 하면 진짜하나님께 속한 사람을 공격하게 됩니다. 그것이 성경 전체 역사 속에서 죽 나옵니다.
가인이라는 사람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려고 했던 사람인데 그 사람은 누구를 죽였습니까? 동생 아벨을 죽였습니다. 하나님께 제사한다고 그렇게 성의를 표한 그가 오히려 동생을 들에 나가서 죽여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그가 믿던 하나님이 가짜 하나님인 것이 들통 나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진짜 하나님을 믿던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하면 이렇게 가짜 하나님을 믿던 사람들에게 공격당하는 식으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고난이라고 합니다. 성경 전체는 이 땅에서 누가 힘이 센 것처럼 보이는가 하면 진짜 하나님을 믿는 사람보다 가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더욱더 힘이 센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누가 찾아왔는가 하면 천사 세 명이 찾아왔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이야기하기를 내년에 당신이 아들을 갖게 될 것이라고 말하자 아브라함도 믿지 않고 그 부인 사라도 믿지 않았습니다. 믿지 않고 웃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방금 웃었지? 안 웃었습니다. 웃었잖아?
사람은 어떻습니까? 속으로는 죄를 짓고 겉으로는 잘난 체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거짓말하는 것입니다. 너 웃었으니 네가 아들을 낳으면 이름을 이삭이라고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아들의 이름이 웃음이라는 이삭입니다. 그러니 우리 식으로 말하면 김 웃음 최 웃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아브라함조차 자신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하여 비웃음이 나올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무엇 하시는 분이라고 하십니까? 용서하시는 분이십니다. 아브라함이 죄 없다고 하면 안 됩니다. 아브라함 곁에 있는 분이 중요한 분입니다. 아브라함을 버리지 않는 분이 중요한 분입니다.
아브라함이 완벽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은 비웃었고 자기 아내를 누이동생이라고 속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덕분에 구원받았습니까? 이 쟁반 속에 있는 것들이 누구 덕분에? 예수님 덕분에 이 쟁반 속에 속한 아브라함이 용서를 받아서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에 대하여 로마서 4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경건치 않는 자가 용서를 받고 불법을 행하던 자가 의롭다 함을 받았으니 이보다 더 큰 복이 또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죄인이 용서 받은 이 축복보다 더 큰 축복이 있다면 나와 보라는 것입니다.
운전하는 집사님이 속도위반 하였을 때 교통경찰관이 용서 해주시던가요? 용서 안 해줍니다. 범칙금 통지서만 줄 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과속했습니다. 걱정하지 마! 내가 있잖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는 이 큰 복을 네가 받았다.
그래서 예수 믿는 자의 특징이 무엇인가 하면 나는 훌륭하다 완벽하다는 것이 아니라 나는 용서 받은 복된 자라고 예수님을 자랑하는 자가 바로 성도인 것입니다. 예수님께 용서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용서를 모든 사람에게 다 해줄까요? 안 해줄까요?
용서 받을 사람 따로 있고 용서 안 해줄 사람 따로 있습니다. 예수님 자기 마음대로입니다. 용서 하고 안하고는 예수님 마음대로이기에 거기에 대하여 화내면 안 됩니다. 자신은 용서 받을 입장도 되지못하기에 거기에 대하여 아무 소리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신은 원래 죄지었기에 벌 받는 것이 당연하고 오히려 용서 받은 것이 행운을 잡은 것이지 용서 안 해준다고 달려드는 것은 마귀의 짓입니다. 어디 감히 죄수의 입장에서 예수님의 고유권한에 대하여 항의할 수가 있습니까? 그것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떻든 간에 아브라함은 용서 받았다는 것으로 믿음의 조상이 된 것입니다.
그 다음에 야곱과 에서가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참 재미가 있는데, 여기에 형제간들이 있지요! 여기에 귤이 있는데, 형이 귤이 되게 먹고 싶은데 동생이 귤을 가지고 약을 올리는 것입니다. 형은 귤이 없지? 엄마가 날 먹으라고 귤을 주었다. 형은 늦게 와서 귤도 없지 하면서 놀리는 것입니다. 형이 좀 달라고 해도 안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귤을 좀 주겠니?
그러면 형이 내 동생해라 그러면 줄게! 그러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귤이 먹고 싶어서 그렇게 하라고 합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그렇게 해 봤자 형은 형이고 동생은 동생이기 때문입니다. 그래 그렇게 해라고 하는 것입니다. 잠시 야자 타임을 하는 것처럼 그렇게 해서 귤만 먹었습니다.
그때부터 동생이 이제부터 내가 형이고 너는 내 동생이라고 하니 형이 웃기고 있네! 한번 태어난 것은 영원한 것이야! 너는 나에게 속았어! 귤만 빼앗긴 거야 이 바보야! 그러면 약속이 틀리잖아! 그런다고 해서 내가 먼저 태어났는데 어떻게 동생이 될 수가 있는가! 그래서 팥죽만 빼먹고 말았습니다.
그 다음에 동생은 또 욕심을 내었습니다. 결국 내가 형이 되고야 말거야! 왜 자꾸 형이 되려고 하였는가 하면 옛날에는 아버지의 재산을 형이 동생보다 두 배나 더 가지게 됩니다. 만약에 아버지가 3억을 남기면 형은 2억 동생은 1억이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것을 위하여 형이 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드디어 아버지가 상속을 하기 위하여 축복을 하겠다고 하면서 내가 좋아하는 별미를 만들어 주어야 내가 축복을 해준다고 한 것입니다. 이 아버지가 이삭입니다. 이렇게 말하자 아들 둘 다 아버지가 원하는 음식이 무엇입니까? 그때 아버지는 형에게 축복하려고 동생은 아무리 해도 못 만들고 형은 너무나 쉽게 만들 수 있는 것은 말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형은 사냥을 잘하고 동생은 집안일만 했습니다. 그래서 사냥한 고기를 가지고 요리해 오면 축복을 해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공평한 것입니까? 공평하지 않습니다. 한 사람은 중국 갔다 와서 중국 말 잘하고 한 사람은 한국에 있어서 중국말을 잘 못하는데 아버지가 지금부터 중국말 잘하는 사람에게 복을 내리리라고 하면 공평하지 않는 것이지요! 아버지 나는 중국말 못하는 데요 하여도 그것은 아버지 마음인 것입니다.
그러자 형은 신나게 말 타고 가서 사냥하러 갔습니다. 사냥하러 간 뒤에 엄마가 동생에게 빨리 형으로 변장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형은 털이 많은 사람인데 어떻게 하느냐고 하자 걱정하지 말라고 하면서 염소 털을 붙이면 된다고 한 것입니다. 그때 아버지는 눈이 어두워서 누가 누구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다만 맛있는 음식만 만들어주면 축복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야곱이 변장을 하고서 엄마가 만들어주는 음식을 만들어 아버지에게 갔다 바쳤습니다. 아버지 저에게 축복하여 주세요! 네가 에서가 맞느냐? 맞습니다. 음식은 어디에 있느냐? 여기에 있습니다. 음식을 먹고서 모든 축복을 다 주노라고 축복하고나자 말자 형에 그제야 사냥하고서 돌아온 것입니다.
아버지 드디어 사냥한고기 가져 왔습니다. 너 누구냐? 에서입니다. 동생이 다 가져갔어! 그러면 저의 축복은요? 그러면 저는 요? 너는 저주를 받아야지! 이것이 하늘의 약속인 것입니다. 그만 형이 동생이 되고 동생이 형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자 그러면 누가 그렇게 한 것입니까? 야곱이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런 야곱이 복 받았다고 기고만장 해가지고 사는데 나중에 야곱이 하나님을 하나님인줄 모르고 자기를 죽이러 온 형의 군사인줄 알고 네 죽고 내 살자면서 씨름을 하다가 한대 맞고 나자 당신은 사람이 아니지요! 당신은 하나님이 맞지요? 그래 맞다! 아이고 내가 욕심 때문에 하나님과 싸웠구나! 그래서 야곱은 하나님을 공격한 사람이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야곱의 죄를 용서해주신 것입니다.
그때부터 야곱은 하나님이 벌이시는 사건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 사건이 무엇이냐 하면,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서로 싸우는 사건에 돌입하게 됩니다.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싸운다는 것이 어디에 나옵니까? 창세가 3:15절에 약속이라는 접시에 담겨있습니다.
아까 이야기 한 것처럼 이 약속은 반드시 약속대로 이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반드시 아담과 하와의 죄를 용서하게 되어 있고, 악마에 속한 사람은 그것을 비웃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약속입니다. 반드시 그렇게 되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된 야곱은 그때부터 자기 자랑하지 않고 지금 이 세상에 용서 받은 사람을 모으기 위하여 악마의 민족들과 싸움을 벌인다는 것을 굳게 믿고 산 것입니다. 그러한 야곱의 아들이 열 두 명입니다. 그 중에 하나님의 뜻이 담긴 아들은 한 아들 요셉 밖에 없습니다.
요셉은 자기가 원하지도 않았는데 중요한 두 가지 꿈을 꾸었습니다. 그것이 꿈 사건입니다. 이것도 사건입니다. 꿈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 꿈 사건을 일으키신 내용대로 요셉이 말하고 나니 요셉은 형들에게 지독하게 미움을 받고 심지어 요셉을 나쁜 상인들에게 팔아먹은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형들이 모의해서 팔았던 것입니다. 꿈을 꾸고 건방지게 말한 저 요셉을 팔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요셉은 죽어야 하는데, 하나님께서는 요셉으로 하여금 십자가의 길로 가게 하시고, 나중에는 요셉이 애굽 나라의 국무총리가 됩니다. 그 국무총리는 너무나 훌륭한 총리가 되어서 3,1절 골프도 치지 않는 총리입니다. 칭송을 받는 총리입니다. 정치적인 발언을 해서 죄송합니다.
그 국무총리가 되고 나서 누가 살았습니까? 동생을 팔아먹은 야곱의 11아들과 야곱과 그 부인까지 몽땅 요셉덕분에 가뭄에서 구원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요셉이 전에 형들에게 지독하게 미움을 받은 것입니다.
보세요! 하나님의 뜻이 담긴 사람, 하나님의 사건이 담긴 사람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지독한 미움을 받지만 그러나 미움을 받은 그 사람이 오히려 미워한 사람을 용서해서 구원하는 식으로 하나님의 약속은 진격 또 진격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창세기 3:15절에서 여자의 후손이 발꿈치를 상한다는 것은 여자의 후손이 마귀로부터 이 세상으로부터 상처를 입을 것입니다. 예수님께는 어떤 상처가 있겠습니까? 우리 죄를 위하여 대신 찔리신 창 자국이 있고 손과 발에는 십자가에 못 박힌 못 자국이 있습니다.
도마라는 사람은 딴 것을 보고서는 예수님인줄 모르고 창자국과 못 자국을 보고서 예수님인줄 알았습니다. 자기 죄를 다 가져가신 그 창자국과 못 자국을 보고서 비로소 주는 나의 구세주요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이 도마가 다른 것을 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창 자국과 못 자국을 보고서 자신의 죄를 해결하여 주신 것임을 믿고 그 예수님의 사건에 합류하게 된 것입니다.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3:15절의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에 이스라엘이 애굽에 있다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낸 지도자가 누구입니까? 모세이지요! 사람들이 모세를 처음에는 좋아하였습니다.
특히 모세가 지팡이를 가지고 홍해 바다를 갈랐을 때에 얼마나 모세를 좋아하고 모세의 하나님을 높였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것은 잠간 이었습니다. 그 때는 모세와 이스라엘의 백성이 한 마음이 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 이스라엘 백성을 모세가 어디로 인도하였는가 하면, 물 없는 곳으로 양식 없는 곳으로 인도하자 말잘 모세를 미워하였습니다.
조금전에 모세를 좋아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모세를 죽이라고 난리입니다. 우리가 죽을 곳이 없어서 이곳에 데리고 와서 죽게 하느냐며 모세를 죽이고 차라리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하였습니다. 모세를 얼마나 미워하였는지 돌을 들고 모세를 때려죽이려고 하였습니다.
그때 모세는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일부러 이곳으로 인도하였음을 저 어리석은 자들이 깨닫게 하옵소서! 하면서 기도하였더니 하늘로부터 새벽부터 생전에 보지도 못한 양식이 땅에 떨어지게 하였습니다. 그것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만나지요! 먹어보니 맛있는 과자와 같습니다. 어떤 사람은 욕심껏 거두어 남겨 두었더니 썩어나갔습니다.
또 고기가 먹고 싶다고 해서 원망하면서 또 모세를 죽이려고 하고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할 때에 하나님께서 또 모세의 기도를 들어주셔서 이번에는 고기가 내려왔습니다. 광야에서 고기가 어디에서 왔겠습니까? 갑자가 동쪽에서 메추라기가 새까맣게 날아와서 그곳에 와서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배불리 먹었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좋아하겠습니까? 싫어하였겠습니까? 그런데 또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야 하는데 그 땅이 좋은지 아닌지 정탐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정탐하지 않고 그냥 들어가면 될 텐데 모세가 그들의 말을 들어줍니다. 그래서 한 지파에 한 사람씩 12명을 대표로 뽑아서 정탐꾼으로 보냅니다.
정탐꾼이 가나안에 들어갔다 와서는 낙심을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이쪽의 사람은 키가 160센티라면 저쪽의 사람은 키가 2미터인 것입니다. 이것은 강호동과 아이와 씨름을 붙인 것과 같습니다. 시합이 되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막 울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고 울었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가자니 힘센 사람들이 있고 후퇴하자니 맛없는 만나와 메추라기만 있고,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하면서 원망을 많이 하였습니다. 그런데 단 두 사람이 다르게 말하였습니다.
그들이 비록 힘이 강하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까지 힘으로 왔느냐? 힘으로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기 맹세 때문에 하나님의 약속이 하나님의 사건이 파도처럼 우리를 쥐고 있기에 우리보다 강한 사람을 붙여준 것도 하나님의 뜻이 있다고 본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알기 위하여 한번 붙어보자 붙어보아서 깨어지면 깨어지더라도 일단 하나님을 믿고 한번 붙어보자고 하였으니 사람들이 그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화가 나서 삐졌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가나안에 못 들어가고 누가 가나안에 들어가는가 하면 들어가면 된다고 한 갈렙과 여호수아만 들어가는 것입니다.
모세는 광야를 헤매다가 그리던 약속의 땅에는 못 들어가 보고 죽고 갈렙과 여호수아가 앞장서서 요단강을 건넜습니다. 건너는데 과연 성공하였을까요? 실패하였을까요? 다리도 없고 물은 홍수가 나서 넘치는데 어떻게 건넙니까?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언약궤를 앞장세워서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저 땅은 하나님의 땅이기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넣어준다고 믿고 요단강에 발을 담그니 물이 끊어져서 요단강을 통과한 것입니다.
그 요단강을 건너니 여리고성이 버티고 있습니다. 이 성이 얼마나 튼튼한지 이것은 수 천 명 수 만 명이 달려들어도 안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너희가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고 하시면서 그 성을 돌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13바퀴 돌고 나니 그 성이 무너졌습니다.
여리고성이 무너지니 저절로 다 무너뜨려져서 결국은 그 땅을 이스라엘 백성이 차지하여 지금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 건너 팔레스타인 땅을 지금도 차지하고 있습니다. 누구 덕분입니까? 하나님 덕분입니다.
그렇다면 그 땅에 들어온 사람들이 이제는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을 잘 믿었겠습니까? 안 믿었겠습니까? 또 대들었습니다. 누구에게 대 들었는가 하면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여 하나님의 사건이 임하여 하나님이 시키시는 대로 하는 사람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미워하고 싫어하면서 자꾸 공격하였습니다.
그렇게 공격하면서 우리에게 왕을 달라고 한 것입니다. 왕이 없으니 우리가 다른 나라에 당한다고 하면서 왕을 달라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왕을 주도록 허락하십니다. 그래서 세운 처음 왕이 사울입니다. 사울은 처음에는 나는 부족합니다. 하나님이 하세요! 그렇게 나오다가 갑자기 사람들이 자기를 사울! 사울! 하면서 인기가 높아지니 교만하여져서 내가 없으면 이 나라가 안 된다면서 건방을 떨며 나오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되면 안 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골리앗을 보내신 것입니다. 그러자 그렇게 잘난체 하던 사울이 골리앗 앞에서 꼼짝을 못합니다. 골리앗은 키가 3미터 30센티나 됩니다. 서장훈 선수보다 훨씬 더 큽니다. 그 엄청난 거인을 사울이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골리앗을 누가 이겼습니까? 다윗! 그냥 다윗이 아니라 소년 다윗입니다.
사울 왕은 칼과 활로 이기는 줄 알았는데 다윗은 그것이 필요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무엇으로 싸울래? 돌멩이만 있으면 됩니다. 하고서 돌멩이를 휙휙 돌리다가 던지니 그 거대한 골리앗에 애한테 돌멩이 맞고 죽었습니다.
그때부터 이스라엘이 와~ 다윗이라는 사람이 있구나 하면서 사울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다윗을 연호한 것입니다. 그때부터 누가 싫어하였습니까? 사울이 싫어하였습니다. 내가 왕인데 나보다 인기가 높다니 다윗 너 두고 보자고 한 것입니다.
그때부터 사울에게 악마가 임하여 무조건 이유 없이 다윗을 미워한 것입니다. 그래서 방에서 다윗을 부르고서 다윗을 향하여 사울이 창을 던지자 다윗이 창을 피하자 창이 벽에 박힌 것입니다. 또 하루는 다윗이 잠을 자고 있으니 자객을 보내어 다윗을 찔러 죽이려고 칼로 찌르고 보니 이미 다윗의 아내가 다윗을 빼돌리고 다윗이 있는 것처럼 꾸며 놓았습니다.
그때부터 더 다윗을 미워하여서 다른 나라 사람들과 싸워야 하는데 오히려 자기 나라에 충성하고 하나님을 잘 믿는 이 다윗을 죽이려고 온 나라를 뒤지면서 다윗을 죽이려고 쫓아다닌 것입니다. 그때 다윗이 얼마나 억울하였겠습니까?
그 억울한 심정을 표현한 것이 시편입니다. 시편에 보면 여호와께서 나의 목자가 되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렇게 노래한 것입니다. 다윗이 이유 없이 무조건 쫓겨 다닐 때의 심정을 나타낸 것인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장차 오실 예수님도 사람들에게, 용서 받아야 될 사람들에게 미움 받고 업신여김 당하고 예수님이 그렇게 고생한다는 것을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자신이 용서해야 하는 사람에게 그렇게 미움을 받습니다. 저나 여러분도 평소에 예수님을 많이 미워할 수 있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것을 다 감수하시고 사랑으로 다 감싸주기 때문에 여러분이 구원받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잘나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고 여러분이 공부 잘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용서 해 주셔서 구원받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나중에 사울은 저 나쁜 적에게 죽어버리고 다윗이 왕이 되었습니다. 다윗이 왕이 되고 나서 잘했어요? 못했어요? 잘했는데 다 잘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야 라는 장군이 있는데 그 장군을 죽이고 그 아내를 차지한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다윗이 깨달았습니다. 나는 훌륭한 성군인줄 알았는데 내 속에 아담의 피가 흐르고 있구나! 내 속에 타락의 피가 흐른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말합니다. 하나님이여 그 억울한 자의 피에 의해서 내가 그 피로 말미암아 용서 받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임을 알았습니다. 우슬초를 나를 정하게 하여 달라고 한 것입니다.
그때부터 다윗이 죄인인줄 알고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은 사람인 임금님이 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 임금님이 하셔야 된다는 것을 안 것입니다. 그 임금님은 어떤 임금님인가 하면 우리의 죄 때문에 대신 고난당하신 경험이 있는 그런 임금님이 진짜로 우리의 임금님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분이 누구냐면 바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으로 오신 예수님입니다. 이것 하고 마치겠습니다. 그 임금님이 이 땅에 태어날 때에 어디에 태어났습니까? 가짜 임금님은 왕궁에 있었지만 진짜 임금님은 마구간에서 태어난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진짜 임금님을 무시 하겠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남들이 가기 싫어하는 제일 낮은 자리에 태어나셔서 죽을 때도 아주 처참하게 돌아가셨습니다. 그분은 그런 고생을 안 하셔도 되는데 그분이 그런 고생을 하신 것은 우리가 죄를 지어서 가야하는 길을 함께 가셨기에 그런 고생의 길을 가신 것입니다.
이제부터 제가 하는 말을 잘 들어보세요! 그렇게 해서 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신 담당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죽고 난 뒤에 어디로 갑니까? 구름타고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그것을 끝입니까? 아니지요 그곳에서 무엇을 보내주십니까? 바로 오늘 공부할 성령을 보내주시는 것입니다.
성령을 보내 주시면 이 성령은 하늘에 계시는 예수님과 땅에 있는 우리를 서로 연결하여 의사소통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서로 연결하여 한 몸이 되게 하는 것을 성령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무엇을 통하여? 사건을 통하여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금과 은은 내가 없거니와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하니 걸은 것입니다. 이것은 성령께서 그렇게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예수님과 땅에 있는 우리가 성령을 통해서 사건을 통해서 하나가 된 것입니다. 하늘에서 흔들면 땅에서도 흔들리는 것입니다. 땅에서 흔들면 하늘에서도 흔들어지는 것입니다. 하나의 사건 통째로 하나의 운동 속에 한 몸 속에 움직이는 것입니다.
어린이 여러분 여러분의 이빨이 아프면 다른 곳이 아픕니까? 안 아픕니까? 다른 곳도 다 아프지요! 이빨이 아픈데 발가락도 안 좋고 다른 곳도 안 좋습니다. 같은 몸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만약에 지금 예수님이 승리하였다. 마귀를 이겼다고 하면 누구의 승리가 됩니까? 우리의 승리가 되는 것입니다.
누가 그랬습니까? 우리 승리가 된다고 한 사람? 아무도 없어요! 내가 환청을 들었나! 예수님의 승리가 우리의 승리가 된다는 것을 알면 오늘 강의는 백점 만점에 백점입니다. 이것을 이야기 하고 싶은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승리할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이미 지나간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승리하였으면 이미 승리한 것이고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고 하면 우리도 다 이룬 것입니다. 우리가 새삼스럽게 이룰 것이 없습니다. 괜히 고민하지 마세요! 걱정하지 마세요! 고민하고 걱정하는 것은 마귀가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기뻐하고 감사하면 됩니다.
우리는 항상 기뻐하고 감사하면 되지 우리가 쓸데없이 걱정하고 고민하는 것은 이것은 무언가 같은 몸이 아닌 것입니다. 같은 5학년 4반이 아니라 5학년 5반일 수 있습니다. 같은 학급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성령님을 보내주게 되면 어떤 일을 하시게 되는가 하면, 네가 하는 일이 아니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이 이제 너의 것이 되었다는 것을 알려주십니다.
이 귤껍질을 누가 깠어요? 목사님이 까셨지요! 자 이 귤 한번 받아보세요! 이 껍질을 누가 깠어요? 앞에 계시는 목사님이 깠지요! 그것이 바로 승리한 것입니다. 내가 깐 것도 아닌데 주님께서 죄 용서 하신 것이 내 속에 들어왔습니다. 그 다음부터 죄와 불법을 다시는 기억하지 아니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끝으로 성경 한곳을 찾아봅시다. 히브리서 10:16절입니다. ?�주께서 가라사대 그날 이후로 저희와 세울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저희 생각에 기록 하리라 하신 후에 또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누가 이렇게 하십니까? 예수님께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미 승리한 것입니다. 다시는 우리의 죄와 불법을 주님께서 기억지도 아니하시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령이라는 사건이 오게 되면, 순간순간 마다 성령님이 일으키신 사건이 오게 되면 우리는 새롭게 그때그때 마다 이점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24시간 기억할 수가 없어요! 하지만 성령께서 역사하실 때마다 죄와 불법을 기억지도 아니하신다고 하셨는데 주께서 이미 용서하셨는데 왜 내가 또 걱정하고 있는가! 왜 내가 악에서 선으로 가지 않는다고 걱정을 했을까! 아~ 주께서 이미 용서하신 것을.... 이것을 수시로 성령께서 사건을 일으켜서 사건마다 예수님의 용서하심이 이미 내 속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누가 그렇게 하셨습니까?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예수님 증거 하는, 예수님께 공로를 돌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기에 내가 용서를 받았습니다. 하는 고백을 하는 하늘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체를 가진 우리를 신체가 없는 성령께서 오셔서 우리도 예수님의 몸처럼 새 몸 되게 하기 위하여 우리에게 찾아오신 내력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과 성령님이 하신 일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는 남과 비교하여 누가 잘났느냐 못났느냐 따지지만 이제는 그런 것조차 다 주님의 십자가 속에 묻히게 하시고 이제 그런 것은 사라지고 주님의 십자가의 용서와 의 되게 해 주심만이 우리의 자랑거리로 남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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