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평가
2020년 12월 20일 본문 말씀: 욥기 18:1-7
(18:1) 수아 사람 빌닷이 대답하여 가로되
(18:2) 너희가 어느 때까지 말을 찾겠느냐 깨달으라 그 후에야 우리가 말하리라
(18:3) 어찌하여 우리를 짐승으로 여기며 부정하게 보느냐
(18:4) 너 분하여 스스로 찢는 자야 너를 위하여 땅이 버림을 당하겠느냐 바위가 그 자리에서 옮기겠느냐
(18:5) 악인의 빛은 꺼지고 그 불꽃은 빛나지 않을 것이요
(18:6) 그 장막 안의 빛은 어두워지고 그 위의 등불은 꺼질 것이요
(18:7) 그 강한 걸음이 곤하여지고 그 베푼 꾀에 스스로 빠질 것이니
욥의 친구 빌닷이 화가 났습니다. 욥의 말이 진리가 아니라서가 아니라 감히 자기 자신을 건드렸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인간은 자기 자신을 건드리면 안되는 것입니까? 왜 인간은 자신을 절대화시킵니다. 만약에 인간이 자기를 절대화하게 되면, 신이 둘이 되는 셈입니다. ‘나’라는 신과 그리고 그것을 옹호하는 신 말입니다.
빌닷은 욥을 공격합니다. 즉 ‘나를 공격했다’는 그 사실만으로 충분히 욥을 악인으로 규정해도 무방하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 것입니다. 누가 보면, 오늘 본문의 내용은 서로 말 통하지 않는 두 사람이 서로 잘 났다고 싸우는 것으로 볼 것입니다. 이런 수준의 글이 왜 거룩한 성경에 기록남아야 하는지 의아해 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욥에게 있습니다. 욥은 욥의 친구들처럼 지금 자기 주장을 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에게는 선행되는 체험이 있습니다. 그것은 일방적으로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고통을 주고 있다는 이 사실입니다. 욥은 자기 안에 들어온 이질성을 근거로 세상을 평하려 합니다. 반면에 욥의 친구에게는 이런 체험이 없는 상태입니다.
추가적인 이질성이 없으면 순전히 자기 과거에 준해서 세상을 평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처럼 인간들의 자아성은 곱게 간직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늘 방어체제가 가동중입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나쁘게 평한다고 단호하게 저주로 되받아줄 태세가 갖추어져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전혀 보편성 있는 진리를 인간은 갖고 있지 않다는 겁니다.
두 사람이 대화가 안 되는 이유는 과거사가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은 자신의 과거를 가지고 매일같이 예술작업을 합니다. 어떤 이는 머리로 그림을 그리고, 어떤 이는 작곡을 하고 변주를 늘어놓습니다. 어떤 이들은 자신의 과거사로 소설을 씁니다. 인간이 일상이 이러합니다.
자신을 끊임없이 미화하는 작업을 하는 겁니다. 그러나 욥은 하나님으로부터 이런 작업이 방해받고 무산된 형편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한 고통으로 인해 욥이 그릴 수 있는 것은 곧 들이닥칠 자신의 죽음뿐입니다. 즉 욥은 하나님으로부터 최종적인 평가에 노출되어 있다고 믿고 있는 겁니다.
따라서 자기 잘남을 지키려는 욥의 친구와 욥이 대화가 될 리가 없습니다. 이러한 대치가 신약에서 어떤 식으로 완성형을 보일까요? 마태복음 3:7에 보면,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베푸는 데로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고 되어 있습니다.
즉 세례요한은 세상과 탸협하거나 협상할 의사가 전혀 없습니다. 도리어 먼저 선방날립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을 요즈음 식으로 말하면, 신학교 교수나 목사들이라고 보면 됩니다. 혹은 말씀에 관심 많은 장로들이라고 보면 됩니다. 이들은 세례요한 시대에 지도자급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일반 서민들에게 귀신을 쫓아내어주지만 지도자들급에서는 그냥 저주하십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그들의 위상 때문입니다. 즉 공격받은 자만이 공격을 할 수 있다는 원칙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공격할 공격자가 엄연히 존재해야만 합니다. 세례요한은 의도적으로 바리새인들로 하여금 자신을 부정하고 공격하도록 유도합니다. 그것은 그당시 외부적 사회 질서가 그대로 세례 요한의 내재성으로 자리잡기 위해서입니다.
세례 요한 내부에는 예수님의 ‘소리’가 흐르고 있습니다. 이 ‘소리’와 바리새인의 공격성이 그대로 만나서 결국 충돌이 일어나야만 합니다. 그래야 심판의 당위성이 성립됩니다. 즉 인간들이 선입견으로 갖고 있는 윤리, 도덕적 기준 말고 다른 기준에 준해서 하나님은 심판하십니다.
마치 어린아이들이 놀이 삼아 검은 비닐 봉지 안에서 자기 머리를 처박고 “나 안 보이지?”하고 장난질하는 것처럼, 사람들은 자신의 과거에 준해서 과거와 연결고리를 갖는 식으로 세상을 대하게 됩니다. 이러한 인간들의 세상 견해는 출생하면서부터 경험한 것들이 누적된 데서 나옵니다.
하지만 인간들이 모르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죽음이 나중에 오는 것이 아니라 미리 와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인간은 죽기 위해 태어난 겁니다. 인간의 ‘짐승됨’을 타고난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욥의 친구 빌닷은, 욥이 친구들보고 짐승같다고 말해서 화를 낸다고 하는데 실은 인간은 짐승과 다를 바 없습니다.
일단 욥이 친구들보고 짐승같다고 한 대목을 보겠습니다. “이제 모든 짐승에게 물어 보라 그것들이 네게 가르치리라 공중의 새에게 물어 보라 그것들이 또한 네게 말하리라” 즉 친구들이 욥에게 말한 수준은 짐승의 수준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시편 49:12에 보면, “사람은 존귀하나 장구하지 못함이여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시편 49:20에도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고 되어 있습니다. 즉 ‘짐승’이라는 단어 앞에 ‘멸망하는’ 말이 들어가 있습니다. 결코 인간을 의도적으로 나쁘게 평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을 제대로 봐야 합니다. 인간의 죽음은 나중에 오는 것이 아니라 벌써 인간의 토대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인간들은, 짐승같은 인간들은 자신이 평생에 쌓아놓은 그 어떤 체험과 지식으로도 왜 태어날 때부터 인간은 죽음이 바탕이 되어야 하는지 그 연유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굴렁쇠를 굴리는 아이처럼 처음에는 본인이 굴렁쇠를 굴리지만 나중에는 굴렁쇠에 허겁지겁 뒤따라가는 형국이 되는 것처럼, 세상의 모든 일도 그러합니다.
본인이 개시한 일에 본인이 예속되는 사태를 맞이하게 됩니다. 자기에게 유리하다고 여기면서 여기저기서 좋은 평가를 고대하고 기웃거려보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타인의 평가의 종이 되는 겁니다. 사진작자가 자연 그대로 찍는 듯 하지만, 장소 물색까지 이미 해석이 시작된 겁니다. 얼굴을 처박고 있는 그 비닐 봉지 안의 세계는 ‘타인의 평가’가 쏟아지는 세계입니다.
보다 더 좋은 평가에 굶주려가면서 자신의 머리를 굴립니다. 하지만 몸통 전체는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습니다. 세상 평가에 관심 갖다보니 정작 중요한 하나님께서는 어떤 식으로 자신을 해석하고 평가하는지 전혀 모르고 살아왔던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처럼 예수님에게도 억울한 고통을 주셨습니다.
그 고통을 근거로 우리 자신을 다시금 평가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죄를 인하여 받으신 고통을 예수님은 나타내고 있는 겁니다. 더 이상 세상 평가에 신경쓰지 마시기 바랍니다. 도리어 복과 저주가 갈수록 벌어지는 그 간격을 즐기시기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나보다 주님께서 더 아신다는 사실을 즐거워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
62강-욥기 18장 1~8절(타인의 평가)20201220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욥기 18장 1~8절입니다. 구약성경 778페이지입니다.
“수아 사람 빌닷이 대답하여 가로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말을 찾겠느냐 깨달으라 그 후에야 우리가 말하리라, 어찌하여 우리를 짐승으로 여기며 부정하게 보느냐, 너 분하여 스스로 찢는 자야 너를 위하여 땅이 버림을 당하겠느냐 바위가 그 자리에서 옮기겠느냐, 악인의 빛은 꺼지고 그 불꽃은 빛나지 않을 것이요, 그 장막 안의 빛은 어두워지고 그 위의 등불은 꺼질 것이요, 그 강한 걸음이 곤하여지고 그 베푼 꾀에 스스로 빠질 것이니, 이는 그 발이 스스로 그물에 들어가고 얽는 줄을 밟음이며”
빌닷이 약이 올랐습니다. 한 성격 합니다. 욥이 하는 말 가운데서 하나님의 진리가 무엇이냐는 그런 것은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고 저 인간이 나를 어떻게 폄하하고 개무시하느냐는 그 소리만 이상하게 쏙쏙 잘 들리는 거예요. 본래 욥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그 뜻은 전혀 없고 ‘네가 나를 짐승으로 봐. 그렇다면 우리도 가만히 있을 수 없지. 너도 한번 당해봐라’라는 그런 식으로 자기가 알고 있는 모든 저주의 개념들을 전부 다 모아서 욥을 향하여 퍼부어대고 있습니다. 이런 것을 정치가 중 한 사람이 표현한 유명한 말이 있어요. “막 가자는 이야기죠? 이거”라는 노무현 대통령이 한 말인데요. “막 가자는 이야기죠?”
노래할 때 노래를 잘하게 되면 반주가 안 들려요. 그런데 노래를 못 하는 사람의 특징은 뭐냐 하면 반주만 들려와요. 반주만. 그래서 욥의 오늘 본문을 통해서 오늘날 우리에게 아주 간결하게 이야기한다면 사람과 사람의 만남은 결국 대화를 시도해도 궁극적으로 대화가 안 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인간은 개체 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각자 자기의 과거사가 다르기 때문에 어느 정도 맞춰주려고~ 맞춰주려고 애를 써도 나중에는 삑사리 나죠.
삑사리가 아주 고급진 단어인데 이게 어깃장이 나는 겁니다. 맞지를 않아요. 그래서 어떤 아가씨가 결혼한다고 하니까 듣고 있던 사람이 “네가 미친 짓을 하는구나”라고 하는 거죠. 그 남자와 맞는 거 같은데 3개월, 4개월, 5년, 6년 살아보면 이게 어긋나는데 분명히 그때 연애할 때는 대화가 됐는데 그다음부터는 대화가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이 과거사를 하나의 숙변으로 봅니다. 꽉 차 있어서 이게 빠져야 하는데 빠지기는커녕 점점 더 각자의 변이 쌓이는 겁니다. 이것을 오늘 본문에서는 이렇게 설명할 수 있어요. 사람은 자기가 보고 싶은 거만 본다는 그 말이죠. 카메라를 가지고 아무리 어디를 찍어도 왜 카메라를 다른 곳 놔두고 그쪽만 향했는지는 그 카메라 포인트를 잡는 것조차도 이미 해석은 시작된 거예요.
인간이 자기 해석이 개입되지 않는 말은 전무합니다. 없습니다. 그래서 제3 자가 보기에는 욥은 자기 말을 하고 욥의 친구는 자기의 주장하고 그렇게 해서 뭐 대화가 되겠느냐고 생각하지만, 대화가 되지도 않고 서로 말도 안 되는 의미 없는 이야기가 왜 성경이라는 거룩한 책 욥기에 나왔느냐고 여러분들이 의문점을 갖는다면 그것은 공격받은 자가 공격하는 원칙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그냥 하늘에 계시면 심판할 이유가 없어요. 공격받은 하나님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심판할 수 있는 권한을 획득하게 된 겁니다. 세상은 주님에게 공격할 빌미를 제공했거든요. 그냥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인간은 인간 세상에 살아서 서로 접촉점이 없었으면 심판도 성립 안 되는데 주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말미암아 가는 곳마다 예수님의 하는 그 말에 대해서 그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예수님을 공격했습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죠. 여기 본문에서 빌닷이 성질나게 된 이유가 3절에 나옵니다. 3절에 보면 “어찌하여 우리를 짐승으로 여기며 부정하게 보느냐”라고 나오죠. 욥이 언제 그 사람들보고 짐승이라고 한 적이 있던가요. 욥기 12장 7절에 보면 욥이 이런 식으로 그들에게 실례를 범했습니다. 말을 잘못한 것이 아닌데. “이제 모든 짐승에게 물어보라 그것들이 네게 가르치리라 공중의 새에게 물어보라 그것들이 또한 네게 고하리라”
그러니까 욥은 너희들이 지금 나에게 훈계조로 한다고 썰을 푸는데 그거 집에 있는 개나 고양이에게 물어봐라. 너보다 더 훌륭한 교훈을 줄 것이다. 네가 공부해서 연구해서 내놓은 그것이 소 뒷걸음치는 것보다 더 못하다는 이야기입니다. 다시 말해서 “네가 지금 인간이냐? 어디를 봐서 인간이냐. 도대체 뭘 보고 내가 너를 인간이라고 불러줄까?”라고 한 거죠. 갑자기 내 속이 시원해지는데요.
“네가 어디를 봐서 사람이냐는 겁니다. 어디를 봐서. 나는 지금 하나님에게 직접 고통을 받고 있어. 너는 지금 하나님에게 고통 안 받는 상태에서 하나님을 언급하지. 내가 너를 인간으로 볼 상 싶으냐?”라고 나오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 때는 어떻게 나오시느냐. 예수님도 만만치 않으시죠. 우선 예수님의 욕설을 듣기 전에 먼저 마태복음 3장에서 세례요한이 어떻게 욕을 했는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은 ‘독사의 자식이 아니고 독사의 새끼는 아니다’라고 말을 하는데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죠. 여기 마태복음 3장 7절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세례 베푸는 데 오는 것을 보고”라는 여기서 바리새인 사두개인 항목을 이렇게 바꾸세요. 신학박사와 신학교 교수와 목사들이라고. 신학박사와 목사들 또는 말씀에 관심 있는 학식 많은 장로로 바꾸세요. 그다음에 나오는 단어가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라고 합니다.
네가 남을 가르친다고 해서 네가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에서 면제될 거라고 생각 하면서 그렇게 이야기하지? 다시 말해서 너는 지금 하나님의 저주가 너무 무서워서 하나님의 저주를 피하는 방법으로 백성들에게 바른 교훈을 가르치게 되면 혹시나 하나님의 저주가 피해갈 수 있지 않을까 해서 가르치는 너희들이여 너희들이 직격탄을 맞은 것이다. 하나님의 진노가 너희들부터 떨어질 것이다.
‘코로나 백신을 만든다고 하는데 택도 없다. 너희들부터 코로나 걸릴 거야’라는 이런 악담과 똑같은 말이에요. 그러니 여기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은 멀쩡하게 있으면서 디스 당한 거예요. 아무 짓도 안 했어요. 그냥 세례요한이 어떤가 싶어서 흘긋 구경하러 왔는데 날리는 선방에 맞은 겁니다. 먼저 욕을 해놓고 성질나서 욕을 하는 것은 예상하는데 방어 커버하는 주먹이 내려가 있는데 선방이 팍 날아온 겁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이 말이 뭐냐 하면 너희들이 아무리 용을 쓰고 애를 써도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쨉이 못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저주를 받기 위해 이 땅에 태어났다는 겁니다. 저주받는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는 겁니다. 인간을 이 정도로 일괄적으로 규정을 했으면 이것은 뭘 유도하는 경우냐 하면 흔히 연세 많은 사람 부부싸움 할 때 하는 말이 있잖아요. 특히 여자분들이 남자가 술 먹고 패면 뭐라고 합니까. “죽여라! 죽여라”라고 하죠.
이건 세례요한이 어떤 점에서는 유도한 거예요. “그래. 죽여. 죽여. 뭘 검사하고 검토하고 그렇게 살펴보지마. 내가 선방 날릴테니까 나를 죽여. 죽여”라고 나온 거예요. 오늘날 곱게 살아가는 것과 영 방식이 달라요. ‘곱게 안 다치고 살지 뭐. 그게 행복이지’라는 것과 선지자 세례요한이 사는 방식과 달라도 너무 다릅니다. 복장부터가 다르고요. 다르거든요.
그런 것에 대한 제 나름의 적합한 용어라고 하는 것이 부산강의 할 때 한 거예요. 외재적 질서가 내부성을 상쇄한다. 세례요한을 장식하는 외부적인 정치적 사회적 질서가 밀려 들어오는 거예요. 밀려 들어와서 세례요한 본인의 속성은 없습니다. 그냥 하나님 보시기에 외부의 심각한 환경이 세례요한 내부에 들어왔고 거기서 기다리는 것은 예수님의 보이스(목소리), 예수님의 해야 할 입지와 세례요한 사이에서 충돌을 일으키면서 세례요한에게서 거침없이 심판의 소리가 날리는 겁니다. 거침없이 하이킥 하듯.
왜 그러냐 하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그 시대에 정신 사조를 장악하고 있는 지도자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백성들은 그들의 사고방식을 모방하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일대기는 바로 세례요한을 그대로 이어갑니다. 마태복음 23장 32~33절 “너희가 너희 조상의 양(분량)을 채우라,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끝났어. 끝났어’라는 뜻이거든요. 끝났다는 거예요. 독사의 새끼들아. 뱀의 자식들아. 그러니까 마귀 자식인 거예요. 예수님이 서민들에게는 귀신을 쫓아내며 낫게 해주었고 소위 그들의 지도자급에 대해서는 아예 병 고치고 낫게 하는 그런 거 없어요. “너의 갈 길로 그냥 가”라고 하시죠. 왜냐 하면 하나님이 주신 그 프로젝트가 그들은 예수님을 향하여 사형선고를 내려야 해요. 그들이. 그래야 예수님과 그들이 지도자급으로 짝이 맞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렇게 제가 말씀드리면 세상이라 하는 것은 결국 성도와 한바탕 해보겠다는 거죠. 결국. 성도가 출생을 하는데 있어서 이 세상은 먼저 성도를 공격하는 그런 속성들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여기서 1988년 올림픽 시기로 잠시 돌아가 봅시다. 올림픽 개회식 할 때 이어령 교수가 아이디어를 내서 그 큰 운동장 메인스타디움에 소년 하나가 반바지 입고 굴렁쇠를 굴리는 장면이 개회식에서 나왔어요.
거기에 보게 되면 처음에는 굴렁쇠를 아이가 굴리지만, 나중에 점점 가면 갈수록 굴렁쇠를 아이가 따라가게 되어있습니다. 그 원칙에 의하면 이 세상에서는 인간이 세상을 주도하는 것이 아니고 점점 뭔가 인간이 뒤따라 가는 식의 인간사가 그렇게 진행되게 되어있습니다. 그렇다면 욥이 말하는 너희들이 짐승보다 더 못하다는 말이, 짐승에게 물어봐도 너희보다 나은 이야기를 한다는 것에 대해서 먼저 욥이 선방을 이미 날린 것이 말이 맞아요.
그리고 욥보다 나이 많은 욥의 친구들은 가만있다가 얻어맞은 겁니다. 얻어맞았을 때 오늘 본문 5절에 보면 “악인의 빛은 꺼지고 그 불꽃은 빛나지 않을 것이요”라고 나오는데 너희 목숨의 불꽃이 죽는다는 말씀이죠. “그 장막 안의 빛은 어두워지고” 어두워지면 모든 것이 무가 되지요. “그 위의 등불은 꺼질 것이요, 그 강한 걸음이 곤하여지고 그 베푼 꾀에 스스로 빠질 것이니”라고 비로소 잠복 된 감추고 있었던 그들의 기본적인 선과 악에 대한 대비가 노골적으로 다 끄집어내진 겁니다.
하나님이 기다린 거죠. 욥의 친구들이 아무 소리 안 하고 가만히 밑에 딱 감추고 있는 그 본심이 욥을 통해서 딱 건드리니까 그들은 노골적으로 그것이 다 나왔던 거예요. 그러면 그렇게 그들이 욥에 대해서 이렇게 악담과 저주를 퍼붓는 이유에 대해서 이유가 뭐냐. 제가 설교 처음에 이야기했죠. 신의 뜻이냐, 하나님의 깊은 진리냐? 아닙니다. ‘네가 왜 나를 건드렸느냐. 왜 나를’ 이겁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욥의 친구 편을 들지 않고 욥의 편을 들었는데요 그 이유는 인간의 악이라는 것은, 인간의 잘못이라는 것은 본인의 해석과 판단에 주인공으로 자처하고 있다는 그것이 문제가 되고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그러니까 모든 시작이 자기로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자신의 죽음은 자기에게 나중 문제라고 여기죠. 하나님께서는 욥을 통해서 나의 죽음이 내 나중에 일어날 일이 아니고 애초부터 이미 일어난 일인 것을 이걸 순서를 욥을 통해서 바꾸는 겁니다.
나중 일 같으면 대비하면 되지만 그래서 인간들은 자꾸 죽음에 대비하고 죽음에서 피하려고 하는데요. 될 수 있는 대로 오래 살려고 하고. 그러나 뭐 약을 먹는다든지 보약을 먹는다든지 링거를 맞는다든지 해서 될 수 있는 대로 죽음을 지연시키려고 하고 안 죽으려고 돈을 모은다든지 보험 든다든지 뭐 대책이 있는데 그게 욥 보기에는 참으로 어리석은 거예요.
왜냐 하면 죽음은 나중에 오는 것이 아니고 애초부터 인간은 죽어있었던 거예요. 처음부터 죽어있었기 때문에 어디를 찾아야 하느냐 하면 내 시작을 내가 태어난 것부터 하지 말고 나의 죽음의 사건부터 시작해야 하는데 그 죽음의 사건을 욥의 친구 앞에 있는 욥이 그것을 이야기해주는 겁니다. 인간이 뭘 모르느냐 하면 태어나면서부터 지금까지는 인간이 다 알아요. 왜? 본인이 다 경험했으니까 알아요.
그럼 뭘 모르느냐. 죽고 난 다음 어떻게 되는가는 모르겠다는 거예요. 하지만 죽고 난 뒤에 어떻게 되느냐에 대해서는 욥의 친구가 모르는 그것을 욥이 앞당겨서 보여주는 겁니다. 욥은 미리 죽어가면서 왜 죽어가는지를 도통 모르겠다는 거예요. 죽는다는 것은 확실해요. 죽는다는 것은 확실한데 뒷북치듯이 죽는 거 확실하면 그냥 죽으면 되는데 거기서 이유를 억지로 한번 찾아보는 거예요.
죽음 이후에 내가 태어나서 죽음에 근거하고 토대로 바탕으로 해서 내가 태어났을 때 태어날 때 내가 알았던 모든 지식으로도 왜 내가 처음부터 죽도록 태어났느냐에 대해서 어떤 해답도 제공하지 못합니다. 그걸 욥이 우리를 대신해서 말해주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구약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구약이란 자꾸 의문점만 질문만 던지는 거죠.
그러면 질문을 던졌으니 해답이 있어야지 않겠습니까. 해답은 어떻게 제공되는가. 어린아이들 장난칠 때 보면 검은 비닐봉지에다가 머리를 쏙 집어넣는 게 있어요. 시커먼 봉지 속에서 아이들 놀라게 하기도 하고 영구 없다고 하면서 자기 얼굴 없으면 자기가 없는 것처럼 장난치는 거 있잖아요. 몸뚱아리는 밖에 다 내놓고요.
인간이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은 뭐냐 하면 태어나서 자기가 경험한 것이 누적된 것이 인간의 전부입니다. 이것은 마치 어린아이가 자기 머리를 검은 비닐봉지 안에 넣고 그 봉지 안에서 두리번거리는 거, 그 한계성을 갖추는 것처럼 인간이 태어나서 자기가 알아봤자 그것이 전부예요. 내가 경험한 거. 자기가 각자 과거사가 다르니까.
그러면 그 비닐봉지에 뭐가 들어있는가. 그 비닐봉지에는 타인의 점수가 들어있어요. 타인의 점수. 노래 부르고 난 뒤에 9점, 8점, 7점 이렇게 점수 주잖아요. 그러면 오디션에 나와서 열심히 노래 부를 때 뭘 제일 신경 쓰느냐 하면 그 심사위원들이 내가 노래 부르고 난 뒤에 진성이는 몇 점 주고 설운도는 몇 점 줄지 그게 되게 신경 쓰이거든요. 합격해도 순위가 5등이라고 나오는 그런 거.
인간은 어디에 신경 쓰느냐 하면 자기 행동할 때 타인이 나를 심사하는 심사위원이에요. 주변 식구들, 같은 교인들, 목사님들, 그리고 다른 사람이 내가 행동하게 될 때 ‘나는 당신이 빵점이야, 5점이야, 10점이야...’라는 것이 평생을 70, 80을 살아도 이 채점 당하는 거, 제발 여기서부터 좀 벗어나면 안 될까요. 욥에게 하나님께서 욥이 원치도 않는 고통을 주고 여기 채점하는 사람이 세 사람이 해요. 욥의 친구 세 사람이.
자기는 뭐 알고 채점합니까. 모르잖아요. 그러니까 욥이 하는 말이 ‘이 짐승만도 못한 인간아. 너희들이 나를 채점해? 네가 인간이냐’라고 나온 거예요. 그러니까 오늘 본문에서 ‘그래, 내가 채점할게. 너는 빛처럼 없어지고 너는 악인이야’라고 자기 나름대로 채점을 하는 거예요. 그러면서도 욥은 이 고통에서 이 비닐봉지에서 목을 빼지를 못하는 겁니다. 그게 자기가 아는 세계의 전부이기 때문에.
아무리 봐도 내가 나에게 점수 줄 때는 100점이라고 하면 너무 오버이고. 여러분도 마찬가지잖아요. 내가 보기에는 92, 96, 나름대로 자기를 자기가 채점해 보세요. 자식 잘 키웠지, 파출소 간 적 없지, 음주운전 안 하고, 주차 위반 좀 하고 과속 좀 하지만 그것 가지고는 흠이 안 되고. 여러분이 점수를 줘보세요. 아무리 봐도 90점 이상이잖아요.
그런데 조두순 보세요. 32점. 정치인들 50, 60점 하고 장관 된다면서 뒤에서 부동산 투기 하고 하니까 42점, 거기에 비해 우리는 본의 아니게, 돈 있으면 우리도 할 텐데 본의 아니게 깨끗하게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그게 바로 우리를 숨 막히게 하는 비닐봉다리예요. 오늘 설교 제목은 비닐봉다리.
점수에 웃고 점수에 우는 거. 그 좁은 세계, 숨 막히는 산소도 희박한 그 세계가 기껏 우리가 평생 살아온 세계 전부입니다. 이 엉덩이를 뺄 줄 몰라요. 이거 빼는 것을 누가 가르쳐 본 적이 없어요. 그런데 부모가 그렇게 가르쳤어요. 영어 해야 하고, 뭐 해야 하고, 안 하면 인간 대접 못 받는다는, 항상 비닐봉지에 더욱더 처박으면서 뒤에서 밀어붙였어요. 영어 과외, 태권도 과외.
일방적인 해석을 강요받은 거예요. 일방적인 해석. 주님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고 해석하는가는 도무지 우리는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지금도 마찬가지고요. 사람은 자기 과거 가지고 무슨 장난질을 하느냐 하면 예술을 해요. 어떤 사람은 자기 과거 가지고 그림을 그리고 어떤 사람은 자기 과거를 가지고 작곡을 하고 대부분 사람은 자기 과거로 소설을 쓰고요.
작곡해도 그냥 하는 것이 아니고 변주를 해요. “여러분은 하루 죙일 뭐하십니까?”라고 물으면 “나는 나의 과거 가지고 예술 합니다”라는 말이 정답일걸요. 나는 나의 과거 가지고 아름답게 그림 그리고, 아름답게 작곡하고, 노래 부르고, 아름답게 나는 소설 쓰고. 노래라고 하니까 생각납니다만 노래 부르면서 항상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나의 이 좋은 평가를 더욱 좋은 평가 받도록 이 비닐봉지 안에서 누가 나를 안 도와주느냐는 겁니다.
거기에 감동하고 그런 드라마나 노래를 들으면서 위로받고 그 검은 비닐봉지에서 목을 뺄 줄을 몰라요. 바깥에 주님의 평가가 있거든요. 바깥에는 지금 누가 기다리느냐 하면 예수님 기다리고 선지자가 기다립니다. 바깥에는 심판뿐이에요. 심판을 피해서 자기 잘난 척한다고 비닐봉지속에 들어가서 남에게 좋은 평가 받기를 고대하고 있는 겁니다.
몸뚱아리는 추운데 다 내놓고, 엉덩이 다 내놓았어요. 우리는 이미 죽기 위해 심판받기 위해 태어난 것을 모르고 그걸 애써 피하려고 인간들이 만든 가짜 평가에 자기 점수를 생각하는 겁니다. 누가 나를 도와주기를 기다리고요. 전부 다 자기 잘못된 해석에서 나오는 겁니다. 그 유명한 ‘웬 다이아~’라는 노래 있잖아요. 그 노래 모르시죠. ‘I will always love you’라는 노래인데 케빈 코스트너와 휘트니 휴스턴 나오는 ‘보디가드’라는 영화 주제곡입니다. 그러니까 그 비닐봉지 안에서 주님이 누구냐 하면 나의 보디가드예요. ‘웬 다이아~’라고 하면서 맨날 나를 지켜달라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그냥 엉덩이 잡아당겨서 모가지 빼게 되면 거기에 우리에게 얻어맞은 주님이 기다리거든요. 주님은 비닐봉지가 없어요. 비닐봉지 덮어쓴 사람에게 비닐봉지 없는 사람이 말을 하니까 ‘독사의 자식들아’라고 하니까 그들은 성질만 내고 성질나니까 그들이 누구를 죽였느냐 하면 세례요한 죽였죠. 세례요한 곱게 안 죽었습니다. 목 떨어져 죽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인간의 출생은 바로 세례요한을 목을 베 죽이는 세계이고 그 세계가 인류의 기원이고 바탕이라는 겁니다. 그게 인간의 바닥이에요. 인간은 하나님 말을 하는 사람에게 공격하는 성향을 지녔다는 것을 정신 차리고 우리가 그것이 느껴져야 해요. 우리는 그 바닥에 누워서 다시 한번 세상을 봐야 합니다. 주일학교 때 그 이야기했지만, 저 바닥에 누워서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 한다고요. 주님 가신 그 길, 십자가에서 누워서 한번 보세요. 무슨 평가가 효과적이냐. 무슨 평가가 유효합니까. 여기서도 심판, 저기서도 심판, 오직 심판뿐이고 모든 것이 심판뿐이에요. 모든 게.
오늘 본문에서 욥과 욥의 친구들은 점점 더 간격이 벌어집니다. 제가 말씀드릴 것은 이 벌어진 간격을 즐기세요. 답답한 비닐봉지를 칼로 잘라서 너희들이 나에게 점수를 몇 점 줘도 나는 그딴 거에서 벌써 벗어났음을 알려주는, 그걸 이미 성령을 통해서 알려주는, 십자가 안에서 이미 그런 평가는 더이상 우리에게 표적지가 되지를 못합니다. 쏴대도 사람 있지도 않은데 엉뚱한데 쏘아댄 겁니다. 나에게 해당하지도 않는 것을 평가하고 있어요.
아침에 이야기했듯이 기생 라합은 항복했잖아요. 항복했다고요.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같은 마을에 사는 사람들은 끝까지 반항하다가 다 죽었어요. 반항을 왜 하느냐. 윤리 도덕으로 저항하는 요소가 있어서 그래요. 저항할 때 윤리 도덕으로 저항하는 거예요. 나는 그다지 나쁜 점수 받을 이유가 없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 앞에 지옥 갈 이유도 없고 남에게 나쁜 소리 들을 이유도 없고 나는 죄인 중의 괴수, 짐승이라는 소리를 세례요한이나 욥에게 들을 이유 없다는 겁니다.
나는 빌닷이고, 나는 이만큼 남에게 해코지한 적도 없고 내 기억에 내 과거사에 남을 해롭게 하거나 남을 구박한 적이 없는데 왜 나에게 죄인이라고 하느냐는 겁니다. 그건 비닐봉지 때문이죠. 우리보다 먼저 심판받은 분, 공격받은 분이 있어서 그분이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았는가를 좀 볼 줄 알아야 하는데 자기가 자기를 바라보니까 자기평가 외에는 다른 평가는 전혀 없는 겁니다. 이제 말씀 맺고자 합니다.
이런 빌닷이 여러분들을 공격하거든 우리는 이 공격을 즐기세요. 같이 달려들고 ‘내가 뭐 잘못 했는데, 나 복음 아는데’라고 달려들지 마세요. 그래, 나 복음 아는데 복음이 나를 통해 동시통역 되기 위해서는 복음이 재현되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받았던 그 수모와 욕설을 그대로 같이 받을 때 마태복음 5장의 말씀처럼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선지자들도 이와 같이 고난을 받았느니라” 이게 바로 팔 복, 복이 있는 사람들이 가는 운명이고 팔자고 이건 빼도박도 못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잘못된 평가에 얼마나 애를 쓰고 신경 쓰고 예민하게 굴었는지 이것은 남을 욕할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참으로 어리석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이미 흑암의 세계, 죽음의 세계에 태어났기에 하나님께 용서받는 것이 얼마나 큰 선물인지를 두고두고 세상과 간격을 벌려가면서 즐거워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