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인
2010년 11월 29일 본문 말씀: 욥기 16:17-22
(16:17) 그러나 내 손에는 포학이 없고 나의 기도는 정결하니라
(16:18) 땅아 내 피를 가리우지 말라 나의 부르짖음으로 쉴 곳이 없게 되기를 원하노라
(16:19) 지금 나의 증인이 하늘에 계시고 나의 보인이 높은 데 계시니라
(16:20) 나의 친구는 나를 조롱하나 내 눈은 하나님을 향하여 눈물을 흘리고
(16:21)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와 인자와 그 이웃 사이에 변백하시기를 원하노니
(16:22) 수 년이 지나면 나는 돌아오지 못할 길로 갈 것임이니라
욥은 보통 인간의 바닥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욥의 경험을 거치지 않고서는 주님께 나아가는 길은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욥은 ‘자기를 변호할 증인’을 본인이 요청합니다. 하나님께 당부하고 있습니다. 과연 인간에게 그만큼 권한이 있는지를 욥은 스스로에게 물어보지 않습니다.
‘나의 정당하다’ 따라서 나는 ‘나의 정당함을 보장해줄 증인을 요청할 권한이 있다’는 식으로 밀어붙입니다. “왜 그래야 하는데?”라고 물으면 욥은 이렇게 대답할 겁니다. “내가 그러고 싶어서” 따라서 욥은 자아 안을 못벗어나고 있습니다. 즉 자아의 정당성을 본인이 나서서 증명하고 싶은 겁니다.
‘증인을 달라’는 요청은 실은 이미 본인만으로 증인으로 충분하다는 심정을 토로한 겁니다. 그런 욥이 하나님을 거론합니다. 과연 욥이 제대로 하나님을 알까요? 욥이 거론하는 하나님은, 이 지상에서 인간 대 인간의 관계에서 성립된 그 관계를 그대로 들이밀어서 만나고자 하는 하나님입니다.
쉽게 말씀 드려서, “너희들 보기에 나 어때? 나 정당하지? 그렇다면 하나님도 나를 정당하게 보시는 것이 분명해”라는 식입니다. 사람 사이의 관계성과 다른 관계성으로 하나님과 이어진다는 사실을 욥은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신약에 오면 이 전혀 다른 관계성이 밝혀집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버리시는 작업을 통해서 찾으시는 자’가 곧 하나님 사람이 됩니다.
욥의 위상은 이런 신약의 정답 노선에 이미 들어선 사람입니다. 본인이 아직 그 내부 사정을 모르고 오해하고 있지만 언제가 하나님께서 직접 찾아오시면 욥도 자신이 어떤 처지에 있는가를 압니다. 즉 본인은 ‘나의 정당함’을 우길 자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당한 사람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선택을 당하게 되면 더 이상 그 사람은 ‘나의 권리’ 주장을 성립될 수 없습니다. 도리어 진정 영원히 선택하신 분의 지상 라인에 참여하는 자가 됩니다. 이는 자신이 자기 운명을 계산할 권한이 없다는 말입니다. 자기가 자신 인생을 설계할 처지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즉 ‘나를 위한 증인’은 더 이상 필요치 않다는 말입니다.
도리어 반대입니다. 나를 선택하신 분의 증인으로서 본인이 그 노선에 말려들어가 버린 겁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지 않아야 될 자’로 선택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아도 상관없는 자’로 선택받은 겁니다. 욥의 외침 속에서 문제점은, 고통을 당하는 현실이 거짓이라는 말이 아니라 고통을 받으면서 욥 자아가 슬퍼한다는 점입니다.
[너희 마음에 슬픔이 가득 차도]라는 찬송가 가사 후렴에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십자가 지고 가라 네가 기쁘게 십자가 지고 가면 슬픈 마음이 위로 받네” 십자가 지면서 어떻게 즐거운 마음이 될 수 있을까요? 고통스러우면 마땅히 내 마음이 슬퍼야 한다는 것이 우리네 상식입니다.
이 찬송가 가사는 일반적 상식을 비켜나갑니다. 다른 세계를 알려줍니다. 욥이 고통 속에서 슬픈 것은 ‘고통받는 내가 슬픈 것이 마땅하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욥이 하나님을 찾는 것은, 자신의 이런 억울함을 해소해 달라고 요청하고 싶어서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더나아가 봅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욥의 요청대로 욥의 정당성을 위로하여 인정한다면, 욥에게 무거운 고통을 주신 하나님의 정당성은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요? 욥도 맞고 하나님도 맞고 할 수가 없습니다. 방법은 단 하나입니다. ‘버림받기 위해 이 땅에 오셔야 할 분이 욥을 선택했다’입니다. 욥은 지금 버림받아야 합니다.
욥 뿐만 아니라 모든 성도들은 이 땅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 라인에 합류된 자로 증명됩니다. 하나님께서 욥의 정당성을 증명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욥이 하나님의 정당성을 위해 증인으로 합세된 겁니다. 욥처럼 성도로서 버림받은 자가 이스라엘 역사 속에 나옵니다. 다윗입니다.
시편 22:1-2에 보면,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치 아니하오나 응답지 아니하시나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분명 ‘나의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버림받음’으로 관련되어 있습니다.
특히 시편 22:18에 보면,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뽑나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의 성취성은 요한복음 19:24에 나와 있습니다. “군병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 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저희가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군병들은 이런 일을 하고”
유일하게 하나님으로부터 선재적으로 선택받으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이 예수님의 운명에 합세하기 위해 다윗도 선택되었고 욥도 선택되었습니다. 이 선택 노선 속에서 ‘버림받음’이 성립됩니다. 즉 ‘버림받도록 선택되지 않는 자는 구원된 자가 아니다’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모든 인간은 결코 자신을 버리지 않으려 합니다.
이는 자신의 결정을 최종적 결정으로 여기기에 하나님이든 누구든지 본인의 선택하려고 합니다. 그 결과로서 자신의 삶을 특정해서 도모합니다. 오로지 내 인생은 내가 지켜보겠다는 오기 같은 것이 작용합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지금 욥에게 고통이 온 것은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악마 앞에서 하나님 자신의 성과를 드러내고 싶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이미 이 인간 세계의 악마의 주장이 진리처럼 퍼져있음을 전제로 합니다. 즉 모든 인간에게 그의 소유를 뺏어버리면 하나님께 화내도록 악마가 이미 인간 세계를 꽉 잡고 있음을 악마는 하나님 앞에서 과시하고 싶어 합니다. 이 두 주장의 격돌로 인하여 욥에게 고통이 주어진 겁니다.
욥은 이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입장에서는, 욥이 자기 주장의 옳음을 일관되게 주장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에 주도권을 넘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편들어주는 증인노릇 해주시라고 요청할 것이 아니라 현재 자신의 처지가 곧 하나님의 선택의 증인임을 알아채야 했습니다.
그렇게 되면. 나에게 고통이 옴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노선에 합류되어 하나님의 선택하심의 증인이 되는 신분이 더 영광스럽다는 사실을 즐겁게 받아들이게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는 것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지를 늘 실감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59강-욥기 16장 17~22절(증인)20201129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욥기 16장 17~22절입니다. 구약성경 777페이지입니다.
“그러나 내 손에는 포학이 없고 나의 기도는 정결하니라, 땅아 내 피를 가리우지 말라 나의 부르짖음으로 쉴 곳이 없게 되기를 원하노라, 지금 나의 증인이 하늘에 계시고 나의 보인이 높은 데 계시니라, 나의 친구는 나를 조롱하나 내 눈은 하나님을 향하여 눈물을 흘리고,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와 인자와 그 이웃 사이에 변백하시기를 원하노니, 수년이 지나면 나는 돌아오지 못할 길로 갈 것임이니라”
여기 욥이 하나님에 대해서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어요. “내 눈이 하나님을 향하여 눈물을 흘리고 사람과 하나님 사이와”라고 되어있는데 지금 욥이 사용하는 하나님을 언급할 때는 욥은 어디까지나 지상의 사람입니다. 친구와 친구 사이, 대인관계,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던 그런 관계가 전혀 수정되지 않고 그대로 하나님 관계로 사다리를 놓으려고 지금 욥이 시도하고 있는 겁니다.
‘친구들아 네가 보기에 뭐 나쁜 짓 한 거 없지’라는 자세를 그대로 견지해서 그 친구 자리에 하나님을 두면 되는 거죠. ‘하나님 저 별로 나쁜 거 없지요’라고 나오는 겁니다. 사람 대 사람에서 형성된 그 관계가 과연 하나님에게도 먹히느냐는 그 문제를 우리에게 알리고 있습니다. 사람들 앞에 17절에 보면 “내 손에는 포학이 없고”라고 되어있는데 내 손에 죄가 없다는 말이죠.
“나의 기도는 정결하니라”라고 되어있습니다. 자기 기도를 자기가 들을 수 있으니 정결하죠. 정결하지 않은 기도를 본인이 입으로 할 리가 없죠. 자기 기도를 자기가 귀로 들으니까 들어보게 되면 이게 뭐 엉터리라는 생각을 본인이 본인 입으로 기도하면서 계속할 리가 없죠. 대번에 수정에 들어가죠. ‘아차, 잠깐 기다려 보세요. 주님 잘못했습니다. 수정해서 말씀드릴게요’라고 하니까 자기 기도는 자기가 정결한 거예요.
욥의 정결함이라 하는 것은 같은 인간이 봐도 그 과오를 뽑아낼 수가 없어요. 깨끗합니다. 이 깨끗한 욥에게 가장 최악의 죄인들에게 가해지는 어떤 저주, 징벌, 심판의 증거, 이런 것이 딱 떨어지니까 욥은 강력하게 뭘 요청하느냐 하면 증인을 요청합니다. 여기 19절에 보면 “지금 나의 증인이 하늘에 계시고 나의 보인(보호자)이 높은 데 계시니라”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이건 뭐냐 하면 내가 증인을 요청할 수 있는 자격이 나에게 있고 나는 보호받아야 할 위치에 있음을 나는 누구에게도 정당하게 요청할 수 있다는 그 말입니다. 그러니까 신약적 입장에서 봐서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라는 그 말에 대해서 지금 욥은 신약적 입장이라면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을 거예요. “내가 있잖아. 의인은 없다니 무슨 말이냐. 내가 의인이잖아. 내가”라고 되는 거예요.
욥의 이러한 이야기가 왜 성경에 있느냐 하면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나아가고자 할 때는 반드시 욥을 거쳐서 나가야 해요. ‘욥은 잘못이다. 욥은 시근 되게 없다. 자기 잘난 척한다. 욥 친구들처럼 욥은 우리 제치고 나가자’라는 식으로 하면 안 돼요. 욥의 친구들도 욥을 경유 해야만 비로소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보느냐가 드러나게 되어있어요.
그래서 욥은 일종의 인간성의 바닥이다. 인간 본인이 밝혀내지 못한 바닥을 욥에 의해서 다 보여주는 거예요. 욥이 자기를 변호하다 변호하다 이제 안되니까, 내가 내 증인 해봐야 안 먹히니까 이제 따로 아예 내 편에 섰다고 여기는 나를 위한 변호인을 내가 청구하겠다고 하는 겁니다. 그렇게 자기 변호할 변호사를 하늘에 청구할 권한이 있는가를 욥에게 물어보게 되면 욥은 아마 할 말이 없을걸요. “내가 그냥 그러고 싶어”라고 할 거예요.
나는 나를 변호할 만한 그만한 권리가 있다고 했을 때 다른 사람이 너에게 그런 권리가 있다는 것은 그 근거가 뭐냐고 물으면 욥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그러고 싶어. 내가. 나는 정당하고 싶어. 나는 부당하기 싫어”라고 하면 다른 사람이 “네가 왜 부당하면 안 되는데”라고 하면 “몰라. 나는 그냥 그러고 싶어. 그냥 정당하고 싶어. 묻지도 따지지도 마. 그냥 이유도 없어. 그냥 나는 정당한 존재라고 내가 그러고 싶어”라고 이야기할 거예요.
그런 점에서 인간의 막장을 보여주고 인간이 모르는 마지막 모습을 욥이 보여준다고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이걸 한마디로 말해서 인간의 속에는 또 하나의 인간이 있는데 그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다가설 수 없는 미지의 물음표, 미지의 물음표를 친 그런 나가 하나의 괴물처럼 담겨있다. 어떤 학자는 그걸 오브제 a라고하는데 나의 대상이 되는 내가 내 안에 있는데 나는 그 대상으로 아무리 달려가도 하나가 될 수 없는, 없으면서도 그러고 싶은 내가 있다는 겁니다.
남들이 안 알아줘도 내가 그러고 싶은 나, 나는 저런 인간이 되고 싶은 나가 내 안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욥을 보면서 이렇게 신약 입장에서 단정 지어도 무방합니다. 욥이 지금 안 아픈 것이 아니에요. 욥이 아픈 것에 대해서 동의합니다. 그런데 욥은 지금 아픈 것과 슬픈 것과 지금 혼동하고 있어요. 내가 아프니까 내가 슬퍼야 한다는 겁니다.
내가 아픈 것은 내가 아는 나고 내 아픔으로 말미암아 슬퍼하는 내가 있는데 그건 내 손이 닿을 수 없는 또 하나의 괴물같은 나는 내가 아프니까 그쪽이 슬퍼하는 거예요. 아파도 기뻐할 수 없을까요. 그건 우리 인간에게는 성립이 되질 않습니다. 내가 아픈데 이게 기쁘다는 인간의 능력으로는 성립이 안 됩니다. 성립 안 되는데 놀랍게도 옛날 찬송가 513장에 후렴에 보면 이렇게 되어있어요.
“즐거운 마음으로 십자가 지고 가라, 네가 기쁘게 십자가 지고 가면 슬픈 마음이 위로받네”라고 십자가 지고 가는데 즐거운 마음과 십자가가 매치가 되느냐입니다. 구약 입장에서는 불신자에게는 매치가 안 됩니다. 근데 신약에서는 매치가 됩니다. 왜냐 하면 십자가 자체가 선택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무나에게 짊어지는 십자가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기서 선택이라는 거, 택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욥에서 하나 끄집어내야 해요. 욥이라는 존재가 우리에게 무엇을 알려줘야 하느냐 하면 그 많은 인간들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욥을 선택했다는 겁니다. 욥이 훌륭하다 잘났다는 이전에 뭐가 의미 있는 거냐 하면 욥이 잘났다, 훌륭하다, 믿음 좋다가 아니라 욥을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선택해서 악마 앞에 세웠다는 겁니다.
악마가 보란 듯이 내가 선택한 욥은 어떠냐를 악마보고 주시하게 하는 겁니다. 악마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모든 인간에게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라고 보는 겁니다. 악마 말이 맞죠. 모든 인간은 범죄 했으니까 맞는 이야기예요. 모든 인간은 지금 악마와 노닥거리고 악마가 다루고 있는 그 현장을 딱 쥐고 있기 때문에 악마로서는 자신만만한 거예요.
어느 누가 잘난체하는 인간 어디 있냐. 그 소유를 한번 빼앗아 봐? 원망하지. 그 사람의 건강을 빼앗아 봐? 원망하지. 어느 인간도 인간은 완전할 수 없다. 왜? 인간이기 때문에. 피조물이기 때문에. 그 피조물중에 피조물의 오야붕이 악마는 본인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내가 천사 중에 천사장이고 악마라는 것은 피조물 대표해서 주님께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에 자기는 자신만만한 거예요.
그런데 악마가 놓친 게 있어요. 그건 뭐냐 하면 하나님의 선택이라는 것이 죄인 속까지 침투하는 선택이고 그냥 겉으로 선택하고 돌아가는 선택이 아니고 끝까지 그 인간 운명 마지막까지 책임지는 선택이라는 그 침이 욥에게 박혀있다는 사실을 악마는 알 수가 없어요. 악마는 모르고 있습니다. 알더라도 강력하게 반발하죠.
그래서 여러분들이 이 욥기를 보고 오늘 오후에 3시 되면 집에 가시잖아요. 가실 때 세상을 볼 때 이런 관점으로 보시기 바랍니다. “너희들은 선택받았냐”라고 물어보세요. 너희들은 선택받았냐. 결국 여기서 욥이 말하는 오늘 본문에 ‘나의 증인’이라고 할 때 나를 빼세요. 나를 빼시고 나의 증인 하지 말고 신약적 정답은 뭐냐 하면 “선택받은 증인은 하늘에 계시다”라고 바꿔야 합니다.
선택받은 증인. 선택받은 증인은 선택받은 본인을 증거 하지 않습니다. 제가 신학교 다닐 때부터 지금까지 한국 교회를 상대로 싸운 것이 있다면 주가 뭐냐 하면 ‘예수 믿는 나를 믿으면 안 된다’라는 그것 때문에 싸웠습니다. 예수 믿는 나. 십자가 마을 갈라설 때도 그것 때문에 갈려졌어요. 예수 믿는 나를 내가 믿을 수 있느냐. 예수를 믿느냐 아니면 예수를 믿는 나를 믿느냐.
이걸 달리 이야기하면 내가 나를 선택할 수 있느냐 아니면 내가 나를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이 없느냐는 그 싸움이에요. 복음적으로 이야기하게 되면 선택을 받은 것이지 내가 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예수님을 골라잡는 것이 선택이 아니에요. 선택의 좋은 점은 뭐냐 하면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내 쪽에서는 포기를 못 한다는 겁니다.
포기는 하는 것이 아니고 포기는 되는 거예요. 많은 사람들이 선택되지 않고 흉내 내는 사람들은 많은 사람들이 예수 믿으려고 하다가 어디로 빠지느냐 하면 예수 믿는 나를 내가 믿어버렸어요. 줄곧 쥐고 있는 것이 뭐냐 하면 나 예수 믿는다를 증거 해요. 꼭 욥 같아요. 지금 욕하는 거 아닙니다. 꼭 욥 같아요. 나는 나를 변호할 권한이 있고 나는 나를 선택해서 내 인생을 책임질 자격이 있다. ‘하나님이여, 나를 위해서 증인을 세워주세요’라는 요청을 하나님 앞에 욥이 지금 하고 있습니다.
네 번째 친구는 지금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걸 가지고 굉장히 건방지다고 했어요. 네 번째 친구가 엘리후인데 엘리후가 말하기를 “네가 진짜 건방지구나”라고 합니다. 주님의 핵심이 주님이 욥을 선택했다는 것에 있는데 주체가 주도권이 주님에게 있어서 주님이 욥을 선택했다고 했는데 욥은 마귀와 주님이 내기한다는 까맣게 모르기 때문에 “제가 뭐가 잘못되었습니까”라는 거죠.
“제가 뭐가 잘못되었습니까”라는 말이 뭐냐 하면 ‘내가 나를 늘 측정하고 평가해 왔는데 하자가 없었습니다. 따라서 나는 나의 정결함을 내가 선택하고 유지하고 보존할 수 있는 그만한 권한은 제게 있습니다’라고 우기는 것밖에 안 됩니다. 이런 식으로 신약 성도에게 적용한다면 그것을 바로 복음 이기주의라고 보고 싶어요.
온 복음은 다 아는데 그게 자기를 위한 복음이 되고 말았어요. 그렇다면 욥에서 신약으로 가려면 무슨 과정이 필요하냐. 이제는 버림받는 증거가 필요한 거예요. 하나님의 선택이 선택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진짜 선택한 예수님에게 아버지께서 어떤 과정을 거쳤느냐 하면 버림받는 과정을 거쳤습니다. 그것이 마태복음 27장 46절에 나옵니다.
“제구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라고 나옵니다. 수요설교를 듣거나 보신 분들은 수요설교에 마태복음 16장 이야기를 제가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품어줬어요. “베드로야, 네 위에 교회를 세울게”라고 하니까 베드로가 기분이 좋았어요.
그래놓고 하시는 말씀이 그다음에 뭐냐 하면 베드로를 버리십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라고 품어놓고 그다음에 베드로보고 사탄아 뒤로 물러가라고 했거든요. 이것은 바로 품어준 사람은 필히 이런 체험을 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내가 내 구원받기 위해서 예수를 선택한 인간성의 기본 바닥이 계속해서 유지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것을 뭔가 중간에 끊어 줘야 했어요. ‘나는 버림받아야 할 자구나’라는 것을 알기 위해. 그런데 인간이 태어나서 어느 누구도 자기가 버림받아야 한다는 생각을 어린 아이들도 안 해요. 만 4살 먹은 누나가 장난감 레미콘 들고 놀고 있을 때 이제 갓 돌 지나서 뒤뚱뒤뚱 걸어 다니는 동생이 있어요.
얼마 전에만 해도 기어 다녔는데 뒤뚱뒤뚱 걸어 다니면서 뭘 하느냐 하면 누나의 장난감 아지트에 돌격합니다. 돌격해서 누나가 다른 장난감을 줘도 다 거부하고 지금 누나가 갖고있는 것을 달라는 거예요. 그 애가 장난감을 뺏고자 하는데 누나가 안 뺏기니까 엄마를 쳐다보면서 슬픈 얼굴을 짓고 엄마가 대신 내 것 뺏어달라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나는 태어날 때부터 버림받을 존재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누나가 엄마를 쳐다보니까 엄마가 곧 장난감을 줄 것 같은 거예요. 그러니까 누나가 하는 말이 “엄마, 나 지금 슬픈 마음에 울 것 같아”라는 아주 고상한 시어를 딱 날리니까 엄마가 둘 다 같이 품에 안아 줬어요. 바로 이렇게 인간은 날 때부터 엄마가 나를 품어주는 것이 품어주는 대상이 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 거예요. 본인 자신을.
그러니까 다시 말씀드립니다. 욥을 경유 하지 않으면 우리는 자신을 몰라요. 나는 무조건 사랑받아야 하고 나는 무조건 하나님께 이쁨 받아야 한다. 이러한 욥의 고집, 자기에 대한 집착, 이 모든 인간은 아담에 속한 아담의 강둑에 속한 모든 인간은 여기에서 못 벗어납니다. 그것을 제가 어느 설교에서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인간은 자기에게 속고 있다고.
인간은 끊임없이 자기가 만든 자아에 본인이 속고 있어요. 본인 자신이 가상이에요. 허상인데 그게 진실 된 줄 알고 있습니다. 저만 이렇게 자기가 자기에게 속고 있다고 이야기한 줄 알았는데 어느 가사에 보니까 이런 비슷한 것이 있어요. “이젠 알아요. 너무 깊은 사랑은 외려 슬픈 마지막을 가져온다는 걸. 그대여 빌게요. 다음번에 사랑은 우리 같지 않길. 부디 아픔이 없이...”라는 가사가 나와요.
이 가사에 보면 재미있는 것이 나오는데 “그대여 빌게요. 다음번에 사랑은 우리 같지 않길. 부디 내 아픔이 없이. 이젠 알아요. 영원할 줄 알았던 그대와의 사랑마저 날 속였다는 게”라고 나오는데 왜 속였냐 하면 나와 헤어지고 당신이 슬픈지 알았더니만 슬픈 것이 아니고 나와 헤어지고 난 뒤에 다른 사람 만나서 행복하게 지낼 먼 훗날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슬픈데 나와 헤어진 그 사람은 나 말고 다른 사람 만나서 그렇게 행복하고 깔깔거리고 행복하거든요.
그러면 자기는 닭 쫓는 개 신세밖에 안 되잖아요. 그걸 보고 나는 뭔가 착각 속에 살고 있다는 겁니다. 이 노래가 ‘다시 사랑한다면’인데 김필이 불었던 노래예요. 그런 노래가 있어요. 그리고 마지막에 ‘내 마음은 하늘이 알기를’이라는 가사의 대목이 욥기 16장 19절입니다. “나의 증인은 하늘에 있다”라고.
그러니까 다시 말씀드려서 아픈 건 맞아요. 아픈 건 맞는데 아픈 것은 아픈 것으로 이게 선택되어서 아프다는 것으로 그쳐야 하는데 이게 슬픈 나가 따로 존재한다는 거. 이 존재하는 슬픈 나가 존재한다는 것이 욥은 지금 처리를 못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욥은 아까 말씀드렸던 것처럼 뭐가 처리되어야 하느냐 하면 욥은 증인을 찾지 말고 내가 버림받아 마땅함을 알아야 되겠죠.
그 버림받아 마땅함을 욥 시대는 아니지만, 이스라엘에서 그 해답을 찾으라고 했지요. 항상 욥에게 이방 민족에게 일어난 일들은 그 당시에 이스라엘이라는 언약 안에서 해답이 있다고요. 그 해답 중 하나가 시편 22편에 나옵니다. 시편 22편 1절에 보면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나옵니다. 여기서 다윗이 사울에게 쫓기면서 왜 나는 하나님께 버림받습니까.
6~8절에 보면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 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나를 보는 자는 다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이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저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저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라고 이런 식으로 조롱하는 거예요. 12절에 보면 “바산의 힘센 소들이 나를 둘렀으며” 14절에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촛밀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라고 내 마음이 짜부러졌다는 말이죠. 15절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잇틀에 붙었나이다, 이제 말도 못 하겠다는 말이죠, 주께서 나를 사망의 진토에 두셨나이다” 16절에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라는 이런 모습을 보면 이것은 제가 아까 본 마태복음 27장에 예수님 십자가 사건에서 벌어진 이야기를 시편 22편에서 모조리 다 나옵니다.
특히 시편 22:18에 보면,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뽑나이다”라고 되어있습니다. 이 말씀은 바로 요한복음 19:24에 예수님이 십자가 달릴 때 바로 “군병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 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저희가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욥이 우리를 대신해서 바닥을 보여줬다면 예수님도 역시 욥이 넘어서지 못한 자기라는 한계를 넘어서서 예수님께서 드디어 인간의 본색을 보여줍니다.
이제 우리가 그다음에 지켜볼 것은 자기의 모든 본색을 보여줄 예수님께서 아버지께서 그 예수님을 어떻게 받아줬는가 하는 겁니다. 그거 없으면 절망이죠. 그거 없으면 절망이에요. 버림받았다. 끝. 이건 아니거든요. 예수님의 십자가 그리고 빈 무덤 부활을 통해서 버림받는 확률이 곧 구원의 확률이라는 거. 선택된 자의 확률이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이 모든 세상 모든 사람에게 예수그리스도의 정보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그것은 성령에 의해서 주어지는데 성령에 의해서 주어진 정보가 모든 사람이 아니라 오직 선택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이건 특별한 혜택입니다. 이 특별한 혜택으로 말미암아 옛날 찬송가 513장 말씀처럼 “주가 베푸신 은혜에 감사하며 너 십자가 지고 가라, 즐거운 마음으로 십자가 지고 가라, 네가 기쁘게 십자가 지고 가면 슬픈 마음이 위로받네”
이제는 십자가와 기쁜 마음이 매치가 될 수 있는 겁니다. 선택된 자에게만 해당되는 자기 십자가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 하는 그 말씀이 하나의 말씀이 아니고 우리 속에서 현실이 되는 겁니다. 환상과 현실 속에서 눈에 보이고 안 보이고가 아니고 말씀이 내 안에서 십자가 다 이루심과 십자가 죄 용서가 우리 속에 이루어진다면 우리는 진정 하나님의 초청받은 하나님의 선택된 실제 현실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현재 이 세상 사람들 한번 보세요. 한쪽에서 이렇게 성도에게 성령이 와서 선택이 시작되었으면 이것은 안 믿는 사람에게는 재난의 시작입니다. 여러분들이 제가 과제를 한번 내드릴게요. 일주일 동안 숙제를 한번 해보세요. 무슨 숙제냐면 복음은 전혀 모르는데 얼굴이 참 고운 사람을 찾아보세요.
복음은 전혀 모르는데 정말 행복하고 모든 매사에 맘 편하게 사는 사람을 한 열 명정도 찾아보세요. 많습니다. 많아요. 요새 추워서 돌아다니기 싫으면 티비 켜놓고 보세요. 복음은 전혀 모르는데 너무너무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 재난의 시작입니다. 욥의 친구들이에요. 인생 끝난 거예요. 선택 없는 사람들의 마지막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배려조치입니다.
잡아먹기 전에 살찌우자는 식이죠. 얼굴이 너무 고와. 복음을 모르는데. 말도 얼마나 인격적으로 하는지. 하지만 그 사람에게 욥같은 고난이 오게 되면 그 사람에게 곤조가 나옵니다. 일본말로 근성이죠. 근성이 나와요. 근성 나와요. 곤조 나옵니다. 만사가 태평하니까 얼굴이 곱고 마음이 행복한 거죠.
그 사람들 비 오는 날 개인택시 타고 11시나 새벽 2시 되어서 공동묘지 가보세요. “어머나, 무서워요”할거예요. 그럼 공동묘지 귀신이 뭐라고 하는지 아세요? “네가 더 무서워. 네가. 남 죽은 거 무서워하지 말고 너 죽었다는 것을 왜 무서워하지 못하냐”라고 하죠. 얼굴은 정말 고와요. 그런데 자기가 죽었다는 사실을 몰라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고 죄인밖에 없다는 걸 저주받을 사람밖에 없다는 걸 몰라요.
예수님의 정보, 곧 십자가 정보가 꽂힌 사람이 선택된 사람입니다. 얼굴은 별로 안 곱지만, 우리 안에 예수님의 죽음이 들어와 버리면 이건 아주 두꺼운 스펀지 같은 죽음이라서 위에서 쇳덩어리를 떨어뜨려도 아프지 않아요. 죽음이라는 피가 젖어있는 스펀지에서 심지어 내가 죽는다 할지라도 전혀 아프지 않습니다. 500만 원 날려도 뭐 팅~하고 튕겨나가 버려요. 아프지 않아요.
선택되었으니까. 주님 하시는 일에 증인이니까. 나의 증인이 아님을, 나의 증인에서 벗어난 그 기쁨, 그 해방감, 그 자유, 그것은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습니다. 끝으로 요한복음 12장 보고 마치겠습니다. 요한복음 12장 28절에 보게 되면 예수님께서 설교하시다가 아버지의 음성을 듣는 순간이 왔었어요. 음성을 들을 때 제자들에게도 다 들렸어요.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신대, 곁에 서서 들은 무리는 우레가 울었다고도 하며”라고 했어요. 곁에 서서 들은 무리는 우레가 울었다고 했어요. 우레. 천둥소리가 우르르~하고 들렸는데 무슨 소리인지 못 알아들었고
“또 어떤 이들은 천사가 저에게 말하였다고도 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소리가 난 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이니라”라고 하셨는데 다시 말해서 너희가 나의 일어난 일에 증인 되라고 주께서 너희에게 소리로 전달했다는 겁니다. 똑같은 현상이 사도행전 9장 7절에 나옵니다. 거기 보면 사도바울이 예수님 만날 때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 하고 섰더라”
다시 말해서 성도로 선택받은 사람은 이처럼 예수님께서 인간의 바닥을 통과해서 아버지께로 갔다는 그 정보의 흐름이 이미 선택된 자에게 그 노선을, 라인이 중요하거든요, 그 라인에 들어서게 되면 항상 우리는 세상 사람들은 세상을 보지만 우리는 주님의 하시는 일에 소리로써 이 땅에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 속에 있는 게 다 주님 은혜의 흔적들이 붙어 있다가 떨어질 때는 흔적들이 떨어지는 거예요. 나중에는 뭐가 흔적이냐 하면 내 몸 자체가 흔적이에요. 100만 원, 200만 원 나가는 거 그동안 주님의 은혜로 왔던 것이 떨어져 나가면서 우리는 슬프고 아픈 거예요. 나중에는 내 몸 자체가 떨어져 나가도 우리는 기쁘게 십자가 질 수 있도록 주께서 그렇게 선택하셨습니다.
사도바울에게 하셨고 사도바울의 복음을 듣는 오늘날 성도들에게 성령 받은 성도들에게 그렇게 해내시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몸이 우리를 위한 몸이 아니라 예수님 증거 하라고 주신 몸인 것을 평생 살아가면서 이것저것 다 뜯겨 나가면서 주님의 소리로써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