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주유발자
2020년 12월 13일 본문 말씀: 욥기 17:8-16
(17:8) 정직자는 이를 인하여 놀라고 무죄자는 사곡한 자를 인하여 분을 내나니
(17:9) 그러므로 의인은 그 길을 독실히 행하고 손이 깨끗한 자는 점점 힘을 얻느니라
(17:10) 너희는 다 다시 올지니라 내가 너희 중에서 지혜자를 찾을 수 없느니라
(17:11) 나의 날이 지나갔고 내 경영, 내 마음의 사모하는 바가 다 끊어졌구나
(17:12) 그들은 밤으로 낮을 삼고 빛이 어두운데 가깝다 하는구나
(17:13) 내 소망이 음부로 내 집을 삼음에 있어서 침상을 흑암에 베풀고
(17:14) 무덤더러 너는 내 아비라, 구더기더러 너는 내 어미, 내 자매라 할진대
(17:15) 나의 소망이 어디 있으며 나의 소망을 누가 보겠느냐
(17:16) 흙 속에서 쉴 때에는 소망이 음부 문으로 내려갈 뿐이니라
욥은 선지자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사람이지요. 하지만 본인은 이러한 사실을 모릅니다. 그저 주어진 현실 속에서 반항할대로 반항할 뿐입니다. 욥이 반항하는 것이 취미가 아닙니다. 외부에서 건드리니까 자연스럽게 반발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반발로 인해 욥은 자기 존재에 추가적 의미를 부여합니다.
자신이 무조건 의롭고 무죄한 자라는 겁니다. 따라서 자기 사명은, 자기를 건드리는 자를 저주받게 하는 것이라고 여기게 된 겁니다. 이왕에 욥은 이제 죽습니다. 자기가 가고 난 뒤에 후임자 의인이 또 올 것이라고 장담하면서 장렬하게 죽고자 합니다. 그럼에도 이 친구들은 죽는 그 마당까지 악담을 늘어놓습니다.
욥을 우리가 선지자로 이해해야 하기 때문에, 이 저주유발자 기능은 인정해야 합니다. 실제로 창세기 20장에서 아브라함은 아비멜렉 마을에 ‘저주유발자’로 다가섭니다. 아브라함은 창세기 12:3에 보면, 복과 저주의 기준점으로 나타남을 알 수 있습니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이 말씀에 대해서 아브라함 쪽에서 할 수 있는 바는 아무 것도 없어 보입니다. 그저 외부에서 아브라함을 어떤 감정으로 건드리냐에 따라 혹은 저주로, 혹은 복이 온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창세기 20장에서 나오는 아브라함 가정과 아비멜렉의 만남은 이런 선입견을 부인합니다. 아브라함쪽으로 움직입니다.
그것도 정당하지 않게 움직입니다. 속이는 쪽은 아비멜렉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쪽입니다. 자기 아내를 자기 누이동생으로 말하니 아비멜렉은 솔깃하게 기대를 하게 만듭니다. 이것이 화근이었습니다.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건드리지 못했습니다. 단지 시도는 해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집안에 저주가 내려졌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비멜렉이 저주받을 짓’을 해서 저주받았다고 우겨서는 아니됩니다. 우격다짐으로 아비멜렉 집안에 저주가 임하게 된 것입니다. 아비멜렉 집안이 받았다는 저주는 그 집안에 모든 여인들이 아기를 낳지 못하게 된 것을 뜻합니다.
달리 말해서 아비멜렉 집안은 벌을 받은 겁니다. 그런데 보통 상식으로서는 나쁜 짓을 하고 난 뒤라면 벌을 받는데, 하나님의 언약의 관점에서 보면 저주부터 먼저 받고 그 다음에 왜 그 저주가 합당한 조치인가를 보여주기 위해 벌이 내리는 겁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운명에 대해서 그 어떤 선택권을 허락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냥 하나님께서 저주의 지옥불을 주면 그것을 받아야 하고요, 생명나무 과실을 주면 그것을 받으면 될 일입니다. 복을 주면 복받으면 되고 저주 주면 저주받으면 됩니다. ‘나는 신으로부터 아무 것도 안 받았다’고 말하는 것은 성립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 세계는 이미 저주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저주 아래 있기에, 저주의 티를 내는데 그것이 바로, 나름대로 자기 정당성을 고집하는 겁니다. 예를 들면, ‘나는 완전하게 살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망해야 될 정도로 악한 짓은 아니했다’는 식으로 버티게 마련입니다. 이것을 달리 표현하면 이러합니다. ‘나보다 악한 사람보다더 인생을 더 고생스러워하고 하고 나보다 착한 이보다는 더 고생하는 것이 하나님의 정의로운 조치에 부합된다’는 겁니다.
이런 세상이라는 기꺼이 살겠다는 식입니다. 따라서 인간들은 자기 보다 더 망한 자들을 통해서 자신의 위상을 정하려고 합니다. 그래야지만 조금이라도 자신의 정당함을 붙잡아 둘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의 경우, 아브라함쪽이 도리어 난처할 지경입니다. 왜냐하면 잘못은 자기쪽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잘못한 자기 쪽을 꾸짖으시는 것이 아니라 잘못을 안 한 아비멜렉쪽으로 꾸짖으니 그 꾸짖는 것이 꼭 자신을 나무라는 것같았을 겁니다. 그러나 바로 이런 방식이 복과 저주가 분배되는 방식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이나 아비멜렉쪽이나 모두 본인들의 행위에 따라 비로소 복과 저주가 가름되는 것이 아님을 체험한 겁니다.
욥이 구약 인물이니 신약에 와서 밝혀지는 복음의 깊이에 이르지 못하는 점도 있습니다. 그것은 본인이 죽어가면서도 자신을 놓지 못하고 가치의 최후 기준으로 붙들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인간으로서 자신을 안다는 것은 충분한 지식을 많이 확보하는 식으로 진행합니다. 즉 엉뚱한 지식에 불과하다고 내치게 되면, 그 내친 지식으로 인하여 자기 정립에 오류나 미흡함이 될 수도 있는 겁니다.
욥은 이점을 알지 못한 겁니다. 즉 정보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지난날의 정보의 정당함을 더욱 보장해주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의심들게 만들어 버립니다. ‘저것은 필요없다’고 내치는 동시에 그 내침을 당한 사실이 지금의 ‘내가 누구냐’를 정립하는데 혼선을 야기할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나’라는 것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자신을 최종 가치 기준으로 우기게 됩니다. ‘내 생각은 옳다’를 유지하려면 도대체 얼마나 많은 지식으로 확보해야 될까요? 아무리 많은 것을 알아 실수의 여지를 줄이고 줄인다 할지라도 매일같이 새롭게 벌어지고 일어나는 사건을 인간은 다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방식은 이러합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개입하시는 겁니다. 마태복음 6:30에 보면,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라고 되어 있습니다. 들풀은 들풀이 아닌 것으로 되지 못하게 하므로서 들풀되게 하시는 겁니다.
즉 들풀의 가치는 들풀 자체에서 내세울 것이 없게 하시는 겁니다. 성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나라와 의를 바라보게끔 하는 식으로 주님께서 만드신 겁니다. 성도 자체의 훌륭함이나 옳은 선택의 여지는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에게, “선이 좋아 악이 좋아?”를 묻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인간 자체가 이미 악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도의 자아정립은 본인이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준비된 저주를 배급하는 배급자로 살 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내가 누구냐를 아는 것보다 주님이 누구시냐를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61강-욥기 17장 8~16절(저주유발자)20201213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욥기 17장 8~16절입니다. 구약성경 777페이지입니다.
“정직자는 이를 인하여 놀라고 무죄자는 사곡한 자를 인하여 분을 내나니, 그러므로 의인은 그 길을 독실히 행하고 손이 깨끗한 자는 점점 힘을 얻느니라, 너희는 다 다시 올찌니라 내가 너희 중에서 지혜자를 찾을 수 없느니라, 나의 날이 지나갔고 내 경영, 내 마음의 사모하는 바가 다 끊어졌구나, 그들은 밤으로 낮을 삼고 빛이 어두운데 가깝다 하는구나, 내 소망이 음부로 내 집을 삼음에 있어서 침상을 흑암에 베풀고, 무덤더러 너는 내 아비라, 구더기더러 너는 내 어미, 내 자매라 할찐대, 나의 소망이 어디 있으며 나의 소망을 누가 보겠느냐, 흙 속에서 쉴 때에는 소망이 음부 문으로 내려갈 뿐이니라”
욥이 자기 친구와 대비를 시키면서 현재 자기 느낌을 말하고 있습니다. 자기를 어느 쪽에 속한다고 하냐면 무죄한 자에 속하고 이 무죄한 자를 지적질하는 그 친구들을 사곡한 자로 분류를 시킵니다. 9절에 보면 자기를 의인으로 칭하고. 그래서 너희들이 나에게 아무리 구박을 하고 핍박을 한다고 해도 나의 손은 점점 더 깨끗해지고 나의 손은 힘을 얻게 되어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서 “내가 떠나고 난 뒤에 너희들은 지혜자를 찾을 수 없을 거다”라고 하면서 욥은 자기 사명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너희들이 얼마나 악하냐를 드러내기 위해서 내가 죽을 때까지 나는 이 길을 가야만 하는 사람이라는 식으로 자기 마지막을 정리하게 됩니다. 어쨌든 간에 자기는 무죄하고 죄가 없고 어쨌든 간에 자기는 의인이고 내가 의롭고 내가 무죄하다는 것을 동조하지 못한다면 너희들은 악인이고 자동적으로 너희들은 죄 많은 자가 된다는 겁니다.
이 취지로 내가 있기 때문에 내가 가는 마지막 길에서 너희들은 맘껏 욕을 하라는 이 말이죠. 14절에 보면 “무덤더러 너는 내 아비라, 구더기더러 너는 내 어미라”라고 하는데 이건 “너는 죽어 마땅하다”라는 식으로 나에게 욕을 하는데 그것이 내가 존재해야 할 이유이기 때문에 그 점에 대해서 맘껏 나에게 퍼부으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 욥의 기능이 창세기에 보면 아브라함의 기능과 맥락을 같이하고 있습니다. 둘 다 선지자니까 맥락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아브라함은 가는 인생을 보게 되면 아브라함에게 잘못했을 때 그들이 저주받는 것이 아니고 의도적으로 아브라함이 저주를 만들어내요. 아브라함이 저주를 만들어낸다는 말은 아브라함의 기능 중 하나가 아브라함 본인도 자기 자신을 그렇게 생각하기 싫은데 일방적으로 아브라함은 무조건 복이 돼요.
아브라함이 복이 되는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어떤 식으로 이 복된 아브라함을 사용하느냐 하면 저주 유발자로 사용합니다. 저주 유발자. 창세기 20장에 보면 아비멜렉이라는 사람이 나오는데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이 오기 전까지는 아비멜렉은 그 집안에 아무 저주가 없었어요. 아브라함이 저주 유발자가 되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저주 유발자가 되어서 자기 아내를 누이동생이라고 속여서 그 집안이 저주로 모든 집안 여자들이 태가 닫히면서 저주받게 되어요.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저주의 숙주라 할까, 저주 바이러스를 퍼뜨리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아브라함에게 해코지하면 저주받는 것이 아니고요, 가만히 있어도 “기다려봐. 내가 너에게 저주를 갖다 줄게”라고 친절하게 아브라함이 나서서 저주를 유발시킵니다. 그런데 그 점에 대해서 아브라함은 본인이 자기 의도가 아님을 이야기해요.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홀로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겁니다. 오늘날 우리 신세와도 잘 연결시켜 보세요.
사람들 모였을 때 절대로 내가 복음 이야기 안 하고, 종교 이야기 안 하고, 입에 지퍼를 채워서 입을 다물고 싶어도 하나님이 가만히 두지 않고 기어이 복음 이야기가 나와서 나중에 분위기 다 망치고 저주받게 하신다니까요. 그것은 ‘나는 복이 있다’라는 생각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겁니다. 나는 복을 받았다는 생각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거예요.
내가 복을 받은 것이 아니고 주께서 강제로 저주 유발자 되게 하신 사람이 곧 복을 받은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주께서 네가 ‘천국 간다. 지옥 간다’ 선택하라는 말이 아니고 ‘내가 지옥 주면 지옥 받고 내가 천국 주면 천국 받아라. 인간아’라고 되는 겁니다. 복음이라는 것이. “성도 여러분, 천국은 이렇게 좋고 지옥은 이렇게 불바다인데 어느 것 하십니까?”라고 묻는 것 자체가 잘못이에요. 어느 인간이 그 앞에서 ‘지옥 갈래요’라고 하겠어요.
지옥을 안 가고 싶어도 배급을 주는데 배급 보니까 저주의 불을 배급받은 거예요. 그걸 누구에게 하느냐면 아브라함에게 하게 하신 거예요. 아브라함이 창세기 20장에서 아비멜렉을 그렇게 속이고 가니까 속인 사람은 아브라함 쪽이고요. 그것도 모르고 너무 이뻐서 아내로 삼으려고 하는데 하나님께서 밤중에 그 여인을 가까이 못 하게 했단 말이죠.
그러면 이 이야기는 범죄 직전에 그만두었으면 저주가 안 와야 하잖아요. 그런데 갑자기 저주가 온 겁니다. 건드리지도 않았는데 저주가 와 버렸어요. 너무 억울해요. 건드리고 저주가 와야 하는 건데 건드리지도 않고 저주가 왔어요. 죄를 짓지도 않았는데 저주가 온 거예요. 죄라는 것은 저주받았음을 드러내기 위해서 후차적으로 짓게 된 것이 죄이지, 죄 안 지어서 저주를 안 받는 그런 것은 이 세상에서 해당되는 원칙이 아닙니다.
이 세상은 그냥 저주예요. 왜? 창세기 3장에 쫓겨났으니까. 그냥 저주라고요.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분이 말하기를 “목사님, 제가 과거에 상처가 많습니다”라고 하는데 과거에 상처 많으니까 위로해 달라는 식으로 이야기하는데요. 과거에 상처 많은 그런 일은 없어요. 주님이 주신 은혜를 상처라고 해석하고 이해하는 본인의 자아가 그것을 문제 삼을 줄 모르고 있는 거예요.
은혜 줬는데 그걸 상처라고 이해하는 거예요. 이거 미친 거 아니에요? 다른 집은 아이 없어도 행복한데 이 집은 아들 없다고 난리니 본인이 상처 유발자예요. 자아를 몰라도 너무 몰라서 그래요. 주신 은혜마저 전부 다 상처로 해석할 정도로 우리의 자아는 악마와 결탁되어 있습니다. 이거 못 고칩니다. 상처받았다고 내 안에 가시가 많다고 노래 듣고 울고불고.
처음부터 이야기했지만, 욥은 선지자입니다. 선지자라는 것은 훌륭하다 착하다는 자꾸 그런 개념으로 생각하지 마시고 주께서 언약대로 저주를 줄 자에게 저주를 주시고 은혜를 줄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그 점에 대한 기능을 하기 위해서 욥을 선지자로 택한 거예요. 아까전에 집에서 오전 설교한 것을 정리하고 있는데 보니까 벌써 어떤 문자가 와 있어요.
아침 9시 36분에 온 문자 내용이 뭐냐 하면 ‘마태복음 1장에 나오는 예수님 이름이 예수라고 했는데 왜 임마누엘로 되어있습니까. 그 이유가 뭡니까’라고 주일 날 아침 9시 36분에 그 문자가 온 겁니다. 어떤 목사님인데 급했던 모양이죠. 설교 앞두고. 저는 주일에 휴대폰 안 가져오거든요. 제가 답변을 해 드렸습니다. ‘인간들의 문자 이해를 공격하는 기능으로 주께서는 함께 계신다는 뜻입니다’라고.
인간의 문자 기능이 뭐냐 하면 ‘예수’거든요. 예수가 문자 기능입니다. “우리 죄에서 구원할 자구나. 나는 신난다”라는 것이 문자 기능이에요. 그게 문자거든요. 문자. 인간은 그렇게 해석하잖아요. 그 해석을 뭐가 쳐버리냐 하면 ‘임마누엘’로 쳐버리는 거예요. 임마누엘이 뭐냐 하면 바로 인간들이 구원받고자 하는 그 의도를 주께서 완전히 무산시켜 버리는 거예요.
그게 바로 네가 몰랐던 저주야. 너는 이미 저주 편이야. 저주 편이면 저주다워야지. 왜 구원을 언급합니까. 그러면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이라 하는 것은 없는 백성이에요. 없는 백성인데 천국을, 생명 나무를 주면 천국 백성 되고 안 주면 그냥 저주 백성 되는 거예요. 그 기능은 누가 와야 해요. 임마누엘. 누가 함께 있어야 해요. 누가 함께 있어야 하냐.
예수님이 함께 있어서 새삼스럽게 새롭게 자기 백성을 죄에서 건지기 위해서 자기 백성이라는 것을 일부러 만들어요. 자기 백성을 만드는데 어떻게 만드느냐. 십자가 끝나고 난 뒤에 만들어요. 십자가 끝나고 만들면 십자가 전에는 아무도 자기 백성 없어요. 십자가 끝나고 난 뒤에 성령을 주게 되면 성령 받은 자가 원래 아닌데도 자기 백성이 되어 버렸어요. 창세 전부터 자기 백성이라고 드러난단 말이죠.
그러면 성령 받은 사람은 뒤돌아보면서 발견하는 거예요. 아, 주께서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하는 그 죄 문제, 구원문제, 자기 백성이라는 그 모든 개념은 죄 속에 있는 우리는 도통 모르고 성령 받고 난 뒤에 보니까 이것이 예수님의 임마누엘, 그러니까 하나님이 함께 계신 고유 기능을 위해서 우리가 증거물로 생산되는 거예요. 우리가. 자기 백성이라는 것이 생산되는 거예요.
죄에서 구원받은 자가 생산된 거예요. 원래 나이어야 하는 것이 아니고요. 지금 욥의 기능이 저주 유발자 기능을 하기 때문에 복된 사람이라는 그 기능은 보여주지만 구약적 한계 때문에 자꾸 어디로 가느냐 하면 ‘그래. 나는 잘났다. 너는 악하다. 이게 나의 할 일이잖아. 나는 이제 끝났다. 죽음이 나를 기다린다’라는 식으로 욥은 본인 잘났다를 유지하면서 죽는 죽음이지 다른 사람의 죄를 위해서 내가 죄인 되는 죽음은 아니라는 말이죠.
욥의 한계가 그렇지요. 욥은 자기 신체가 결백하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어떤 인간도 결백한 신체를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적이 없습니다. 욥은 지금 존재의 뿌리까지 내려갔는데 뿌리까지 가면서 신약적 입장에서 보면 그가 아는 신학과 모든 그의 착함과 성실함은 존재의 뿌리까지 가더라도, 존재의 뿌리가 뭔지를 아는데 전혀 보탬이 안되고 도움도 안 돼요.
전에 이야기했지만 ‘그렇다면 욥은 실패자입니까’라고 하는데 욥은 실패자가 아니고 욥 자체가 하나의 말씀이 되고 기호가 돼요. 상형문자라는 것이 보통 나오잖아요. 상형문자가 뭐냐 하면 최초에 나온 문자예요. 상형문자가 실은 그림문자입니다. 그림. 그게 발달해서 ㄱ, ㄴ,...하지만 원래 처음에는 전부 다 상형문자거든요. 상형문자는 그냥 눈에 보이는 대로 의사 표시하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그럼 의사를 표시하는 상형문자가 문자 최초가 아니고 최초의 문자는 이 신체 덩어리가 최초예요. 글자는 없어도 서로 “응, 응”하면 다 통하잖아요. 옛날 할머니들 글자 모르는 사람 있지요. 글자 없어서 못삽니까? 아니죠. “이거, 이거”라고 하면 다 통하잖아요. 우리 몸이 문자예요. 우리 몸이 나중에 신약에서 성령을 받으면 말씀이 되거든요. 물론 잘난 말씀이 아니고 진짜 죄인인 것을, 찐찐 진짜 죄인인 것을 처음으로 아는 거예요.
그전까지는 ‘나쁜 짓 많이 했지’라는 이 정도인데 성령 받고 난 뒤에는 처음부터 뭘 해도 먹든지 마시든지 뭘 해도 그 자체가 탐욕이고 죄라는 것을 처음으로 아는 겁니다. 이게 얼마나 큰 기쁨인지 너무너무 기쁜 거예요. 그러면 성령 받지 않은 사람은 타인을 공격하는데 욥처럼 욥의 친구를 공격하고 있어요. 나중에 이 공격을 엘리후라는 친구가 와서 또 공격할 거예요. 마지막 친구가 공격하는 겁니다.
그런데 욥은 자기가 공격받을 일이 없다고 우기고 있습니다. 내가 뭐 잘못했는데 공격할 것이 있느냐. 그 점에 대해서 좋은 예가 있는데요. 경산 진량에 사는 14세 중학생 네 명이 서울에 상경했어요. 상경해서 고민을 털어놓는데 무슨 고민이냐 하면 네 명 중에 친구 하나가 그렇게 남자를 밝히는데 그게 고민이에요. 그런데 상담을 하면서 다른 친구가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송가인과 홍자가 싸웠다는 이야기를 했어요. 송가인과 홍자가 싸웠다는 이야기를 설교시간에 하게 되면 이게 무슨 이야기인지 여러분이 해독이 안 될 거예요. 해석이.
송가인은 누구며 홍자는 누구며 왜 싸웠느냐. 그 친구는 뭐냐 하면 이처럼 친구끼리 싸울 수 있다고 했는데 그 이야기를 누구에게 했느냐 하면 선녀 보살과 동자보살 앞에 이야기했어요. 그러면 이 스토리를 이해하려면 동자보살, 선녀 보살이 누구냐를 또 이야기해야 해요. 선녀 보살은 서장훈이고 동자보살은 이수근이라는 것을 이야기해야 해요. 그러면 서장훈은 또 누굽니까. 이런 식이 된다고요.
이 말이 뭐냐 하면 어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해요. 저거는 몰라도 돼. 저 이야기는 몰라도 돼. 그런데 ‘저 이야기는 몰라도 돼’라고 하는 순간 내가 나를 제대로 정립하는데 정보가 미흡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송가인 모르고, 홍자 모르고, 동자보살 모르고, 선녀 보살 모르는 상태에서 그걸 몰라도 나는 나를 알 수 있다는 것이 가능하냐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이것저것 다 빼도 나는 나를 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게 뭐냐 하면 오늘 본문에 욥과 같은 거예요. 나는 일단 정당하다. 나는 죄인이 아니다. 나는 죄인 되는 요소는 사전에 가위로 다 잘라냈기 때문에 나쁜 친구도 안 만나고 술 담배도 전에는 했는데 이제는 안 하기 때문에 나는 정당하다. 나는 정당하다가 나오면 그다음에 감사와 고마움이 나오는 것이 아니에요.
정당하게 되면 ‘주여, 왜 저 아픕니까. 저 왜 죽이십니까. 아직 죽을 때도 안되었는데 제가 왜 일찍 하직해야 합니까’라고 하며 기껏 그다음에 나오는 아이디어가 뭐냐 하면 ‘그래, 내 존재 의미는 나는 무조건 복 받았고 나를 알지 못하고 나를 비난하는 모든 사람은 나를 건드렸다는 이유 때문에 저것은 저주받아야 해. 저 집안은 망해야 해’라는 식의 본능이 자연스레 나옵니다.
욥 끝에 가면 욥의 친구와 욥에게 하나님이 하는 이야기가 딱 하나예요. “네가 전부를 알아?”라는 이 말입니다. “네가 송가인과 홍자가 싸운 것을 알아?”라고 묻는 식이에요. 네가 전부를 알아. 다시 말해서 “욥아, 네가 착하냐?”라고 묻는 것이 아니고. 다시 말을 쉽게 해봅시다. “아빠가 좋아? 엄마가 좋아?”라고 하나님이 욥에게 묻겠습니까? 이건 아빠나 엄마가 아이를 앉혀놓고 묻는 거예요.
엄마 없을 때 아빠가 묻는 거예요. 손에 과자 하나 들고 “너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라고. 그리고 아빠 없어지고 엄마가 장난감 하나 들고 “너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라고 하는 질문 자체가 상형문자라니까요. 나는 내 말씀 자체가 최종값이 여기 있어요. 절대값. y= ax + bx 의 절대값을 구하라고 수학에 나오잖아요. 최고 정점의 값은 항상 나의 정당성이에요. 내가 옳다는 거예요.
티비 뉴스에 보면 부부들 나오는데. 동치미에 보면 동치미가 뭔지도 모르겠지만 동치미에 부부 이야기 나오는 거 보면 그 이야기는 뻔해도 진짜 뻔합니다. 누가 옳으냐. ‘하나님 제가 옳습니까, 저 남편이 옳습니까?’라고 묻는 거예요. 말은 안 하지만. 하나님보고 이 말은 안 하죠. 종교 시간이 아니기 때문에. 하지만 보면 뭐냐 하면 내가 모든 의미가 도착 되는 유일한 상형문자, 움직이는 최종 진리값, 절대값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난 적이 없어요. 이게 욥의 한계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범위를 넓히시는 거예요. “네가 어느 근거에서 그 말을 하느냐. 네가 북두칠성을 만들었느냐? 네가 염소 새끼 낳을 때 옆에서 보았냐?”라고 묻는다고요. 이건 생뚱 맞는 질문이에요. “네가 오늘 추미애가 아침을 뭐 먹었는지 아느냐?”라는 것과 똑같은 질문이에요. “입원한 거 아느냐?”라고 하시면 그걸 내가 왜 알아야 합니까.
나는 내 일만 하면 된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게 오늘 욥 같은 한계에 부딪히면서 모든 것은 내가 잘되는 중심으로 세상은 돌아가야 이게 옳은 세상이라는 일방적인 우김, 이 우김이 나중에 신약 되면 누구를 만나느냐 하면 바로 임마누엘 되시는 십자가와 만나게 돼요. 십자가와. 그러니까 ‘우리는 우기지 말자’가 아니라 말씀을 잘 들어야 해요.
‘우리는 우기지 말자. 나는 나만 챙기지 말자’가 아니라 ‘나 이제부터 제대로 나만 챙기고 이제는 정답 알고 죄인 줄 알아서 나만 챙기는 것이 내 한계며 내가 나만 안 챙기는 그런 일은 내 신체에서 일어나지 못한다. 왜? 나는 결백하지 않기 때문에. 나는 절대로 결백하지 않기 때문에. 어떤 일이 벌어져도 나는 그걸로도 감사해야 한다’라는 겁니다.
그게 마태복음 6장에 보면 나옵니다. 마태복음 6장 26절 보면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라고 되어 있지요. 그다음에 30절에 보면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라고 나옵니다.
들풀이 들풀 아닌 것이 될 수 없도록 하기 때문에 들풀이 되는 겁니다. 들풀이 들풀 아닌 것으로 들풀이 깊은 생각을 하면 안 돼요. 왜냐 하면 들풀이 들풀 아닌 것이 아니라고 하나님이 되게 하신 겁니다. 반어법 천지예요. 지금. 나는 지금 이 나이에 이 순간 이 상형문자 나는 나밖에 모르는 이런 인간이 아니 되라고 나를 만든 것이 아니고 이런 인간 되라고 만드신 이유가 십자가 때문이에요.
하나님의 언약 완성을 위해서 참새는 참새 아닌 것이 되지 못하도록 주께서 참새 되게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방인들은 뭐냐. 이방인들은 절대로 축복받으면 안 돼요. 왜? 그저 먹을 거, 입을 거, 마실 거만 생각해야 해요. 그러면 성도는 뭐냐. 그 나라 의를 안 구하면 안 되도록 주께서 개입하신 거예요. 아주 박살을 내죠. 그렇다고 우리 신체는 결백하지 않습니다. 우리 이 타고난 죄는 죄를 지을 수밖에 없으니까 결백하지 않은 거예요.
나에게 실익이 있지 아니하면 우리는 개뿔도 돌아보지 않습니다. 실익이 없는데 왜 내가 신경 써야 합니까. 안 그래도 나의 일도 골치아픈데. 집에 강아지도 신경 써야 할 판인데. 남의 강아지까지 왜 신경 써야 합니까. 개 대통령이 개 다루는 방식이나 사자머리 교수가 아이들 다루는 방식이나 인간은 똑같아요. 전부 다 짐승입니다. 다 같은 한 날에 만들어졌기 때문에.
개가 훌륭한지 어떤지 잘 모르겠지만 ‘아빠가 좋아, 엄마가 좋아’라는 이것은 우리 육체에서 타고난 겁니다. 이거 주께서 고치라고 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께서는 선이 좋으냐 악이 좋으냐를 우리에게 물으신 적이 없습니다. 너는 너로 말미암아 네 주변에 저주 유발자이다. 저주를 줄 사람은 너를 통해서 저주를 줄 것이고 천국을 받을 사람은 너를 통해서 천국을 받을 것이다. 딱 거기까지만 우리가 할 일이에요.
그러면 저쪽에서 얼마나 욕하겠습니까. “네가 뭔데 저주를 주느냐?”라고. 거기에 대해서 우리는 할 말이 많죠. 내가 잘나서 저주를 주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그 일을 하게 하시면서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 다 이루시는 일에 참여를 시키시는 거예요. 참여를 시키다 보니까 우리는 내가 남에게 미안스러울 정도예요. 사람 참 좋은데 복음 전하니까 개돼지처럼 이걸 갖다가 버리는 거예요.
차라리 복음을 안 전했으면 같이 좋은 관계 맺을 건데 이상하게 복음 안 전하고 싶어도 툭 튀어나오는 순간 그다음부터는 분위기 싸해지면서 서늘해지는 거예요. 그러면 주님께서 그 일 하라고 그일 외에 다른 거 못하도록 하는 거예요. 그러면 또 이 소리 듣고 남 약 올리기 나서지 마세요. 그건 또 주제넘는 일이에요. 우리 한계를 벗어나는 거예요.
욥은 메시아 아닙니다. 제한적이에요. 자기 아는 것밖에 없는 그것만 아는 인간이에요. 우리 자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아는 것밖에 몰라요. 송가인과 홍자 싸우든 말든 그건 나와 상관없는 이야기예요. 그런데 내가 만약 홍자의 사촌 오빠쯤 되었다 싶으면 열 받지요. 그러니까 이 세상 모든 것은 우리에게 부딪혀오는 모든 것이 욥처럼 우리 의사가 아니고 주님의 의도에 의해서 부딪힐 때 그때 하나님께서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는 거고 지옥 갈 자에게 그냥 지옥을 주는 것이 주님의 고유 권한임을 우리 인생을 통해서 드러내면 그만인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상처받았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게 하옵소서. 우리가 상처 유발자였습니다. 지나고 보면 다 하나님의 은혜이고 선물이고 사랑인데 상처 대신 고맙고 감사 함이 나오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