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각 정리

죄로 죽은 자

아빠와 함께 2020. 10. 4. 08:50

죄로 죽은 자  (엡2:1)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우리 자신을 성경에서 바로 알려주어도 그 성경을 대하는 우리 자신이 그 결정을 강력하게 거부합니다. 왜냐하면 평소에 세상 살아가는 방식에서 누구의 지시에 따르는 것이 자신의 자존감과 충돌이 되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 자신은 장담합니다. “내가 누구이며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내가 너무 잘 알고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런 태도 바닥에는 ‘죽음’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죽음’을 용납하지 않으려고 막강한 저항심이 작동합니다. ‘산다는 것은 죽음과 다르다’는 겁니다. 하지만 성경 말씀에 의하면 그 생각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산다든 것은 죽음이 살아 있음을 드러내기 위해 살아있다’가 됩니다. 

현재 살아 있는 이 상태를 계속 이어나가려고 합니다. 따라서 만약에 지금 이 상태가 ‘죽어 있는 상태’이라는 이는 ‘죽은 상태’를 마냥 이어가는 것이 됩니다. 이어간다고 해서 그것을 ‘살아 있다’고 말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 위주로 ‘삶과 죽음’에 관심두는 것이 아닙니다. 정작 살아 있어야 할 것은 인간이 아니라 ‘죄와 허물’입니다. 

왜 그래야만 할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모든 일이 예수님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1:10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즉 모든 피조물들은 그리스도에게만 의미를 두기 위해서 나타난 것들입니다. 

사도행전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사도 바울은 각양 사람들을 다 만났습니다. 그들의 사정들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 정리된 바는 간단합니다. “그 어떤 인간도 죄와 허물로 죽은 자들”이라는 겁니다. 즉 그들은 ‘산 자’로 봐서는 아니된다는 겁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과 관련해서 ‘최초 조건 하의 상황’에서만 모든 것이 설명이 되기 때문입니다. 

즉 ‘죽으심과 살으심’의 원형은 예수님이 이 땅에서 오셔서 보여주시기 됩니다. 모든 인간은 그 원형에 준해서 각기 용도가 펼쳐집니다. 하지만 범죄 하의 인간들은 오로지 자신을 자기 용도에 준해서 발휘하려고 합니다. 즉 ‘내가 나를 살리는 방법’에 몰두하는 겁니다. 이 땅을 살다가 죽어서는 좋은 곳에 가려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죽으심’이 빠져버리게 됩니다. ‘죽으심 없이 살으심’이 없는 이유는 바로 예수님에게 일어난 그 일이 원형이 되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의 사적인 기대감은 소용없습니다. 하지만 인간들은 그 ‘최초의 상황’으로 가지 않을려고 합니다. 즉 자신이 계속 자기에 대해서 주인공 행세를 하고 싶어하는 겁니다. 

나 말고 다른 이가 내 인생의 주인공이 되는 것을 강력하게 반발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말씀을 배타시합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눈에 보이는 것들을 이동하면서 움직입니다. 그 이유는 자기 자신이 눈에 보이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말씀에 기대를 걸지 않으려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말씀’는 ‘눈에 보이는 말씀으로 전환시키십니다. 다니엘 5:5-6에 보면, “그 때에 사람의 손가락들이 나타나서 왕궁 촛대 맞은편 석회벽에 글자를 쓰는데 왕이 그 글자 쓰는 손가락을 본지라 이에 왕의 즐기던 얼굴 빛이 변하고 그 생각이 번민하여 넓적다리 마디가 녹는 듯하고 그의 무릎이 서로 부딪친지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는 인간들이 생각하는 그 종말(끝)을 넘어서는 끝의 광경입니다. 즉 인간들이 살기 위해서 염두에 둔 그 삶의 공간을 너머서 등장되는 사태입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현상이 일어납니다. 야고보서 1:15에 보면,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욕심’과 ‘죄’로 인해 눈에 보이는 ‘사망’들이 이 세상에 널부러지게 됩니다. 그리고 조금씩 사람들은 누구나 늙어가고 있습니다. 다 욕심 때문이며 죄 때문입니다. 왜 사람은 죽어야 할까요? 죄와 허물을 살려내기 위해서입니다. 왜 ‘죄와 허물’을 살려야 할까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말씀의 완성상태가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자기 운명에 대해서 새삼스럽게 나설 것은 없습니다. 죄와 허물을 매일같이 지을 수밖에 없습니다. 마치 진흙에 찍힌 발자국에 빗물이 고이면 그 자체로서 숨겨진 발자국의 의미가 나타나는 것처럼, 인간은 하나님을 죽이고 싶어합니다. 

하나님과 인간은 경쟁관계에 있습니다. 인간의 자아는, 자신이 살고 싶은대로 살고싶어합니다. 참으로 ‘나 답게’ 살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그 ‘나’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초기조건에서 악마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자아와 그 자이의 세계’를 허물고자 하십니다. 허무시는 것은 하나님의 일이요 세우고자 하는 것은 악마의 일입니다. 

어차피 이 세상은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 손댈 형편이 못됩니다. 사건이 날아들어야 합니다. 사건이란 내가 미처 관여하지 못하는 형편을 말입니다. 주님은 세리와 창기와 강도와 문둥병자와 죄인들의 친구였습니다. 그들은 자기 인생에 대해서 손을 대어서 개선할 여지가 없음을 아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일종의 ‘움직이는 무덤’입니다. 이 세상이 죄와 허물로 죽으심을 보여주는 광고판입니다. 오늘날 성도가 보여줄 것도 바로 이것입니다. 자기 안에 자아가 숟가락으로 다 긁어지는 것이 구원 작업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로 인한 빈 무덤’이 되는 겁니다. 창조의 초기조건입니다. 

요한계시록 11:8에서는 이것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그들의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라” 지리적으로 소돔과 애굽과 갈보리 언덕이 다른 지점이라고 할지라도 동일한 사건으로 간주되어 그 사건에 집결되어야 하는 것이 성도의 운명입니다. 

‘살아났다’는 것은 ‘주님과 더불어 살아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즉 내가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신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성도는 주님의 일하심을 보이는 용도로서 벌써 살아 있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나를 위한 개선책을 구할 것이 아니라 조건 따지지 말고 모든 일에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우리교회 주일설교 190127 "죄로 죽은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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