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2강-YouTube강의(숨어있는 것 마태복음 10:26)20200915-이 근호 목사
제322강, 제목은 ‘숨어있는 것’.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인간들이 숨기는 것, 또는 스스로 드러내지 않으려고 하는 것들을 주님께서는 다 끄집어내기 위해서 오신 겁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오지 않으면 인간 본인이 숨긴 것은 들통나지 않겠죠. 예수님이 오시지 않으면.
만약에 이런 형사가 있다고 칩시다. 길가는 사람 딱 보기만 하면 당신이 지난 여름에 뭐했는지 다 아는 형사. 그런 형사가 있을 수 있겠는가. 없죠. 없는데 이건 돼요. 만약에 시간여행을 해서 일찍 미래를 맛본 형사가 다시 과거로 오는 거예요. 그러면 과거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미래에 있는 사람은 거쳤으니까 다 알게 아니겠습니까. 그럼 그 사람들을 다 알아맞히는 거예요. “너는 앞으로 2개월 뒤에 범죄 저지를 것이다.” 다 알게되면 “내가 뭐? 나는 생각도 없는데.” 이렇게 하다가 결국 2개월 후에는 그 범죄를 저지르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미래라는 것이 과거한테는 공포의 대상이에요. 미래를 미리 정했다는 것은 주께서 모든 것을 다 아신다는 뜻입니다. 성경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예수님께서 일하실 때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보이고자 하는 것은 그건 안 받습니다.
오히려 내세움으로써 뒤로 감추려고 하는 게 있어요. 발이 앞으로 나가면 한 쪽 발은 오히려 반대로 더 뒤로 나가죠. 그래야 걸으니까. 발이 앞에 한 발 대고 뒷발이 더 뒤로 가야되죠. 사람의 모든 행동이라는 것은 사실은 자기가 보이고자 하는 그것이 자기 본심이 아니에요. 본심을 감추기 위한 가식이 앞에 드러나게 되어있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세리와 창기가 너희들 잘난 체하는 사람보다 먼저 하늘나라 간다고 이야기했을 때 바로 그 말씀이 그런 말씀이에요. 세리와 창기를 보고 사람들이 나는 저들과 같지 아니하다고 자부했는데 그러면 세리와 창기는 뭐냐. 그 당시 모든 인간이 자신이 감추고 싶은 본심을 노출시킨 표본이 바로 세리와 창기에요.
그 사람들은 감출래야 감출 게 없고 일반인들은 그걸 교묘하게 감추고 있다는 그 차이뿐이지 그 차이만 벗겨버리면 사람은 똑같습니다. 왜냐하면 아담으로 태어난 인간은 날 때부터 죄인이기 때문에 모든 것이 자기 안에는 죄밖에 없는 거예요.
그래서 마태복음 10장 26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그런즉 저희를 두려워하지 말라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데서 이르는 것을 광명한데서 말하며 너희가 귓속으로 듣는 것을 집 위에서 전파하라”
우리 안에 확성기, 앰프같은 게 있다는 겁니다. 소곤소곤소곤 이야기하는 것이 하늘나라에서는 시끄럽게 왕왕왕왕 들리는 거예요. 은밀하게 한 것은 하늘나라 큰 스크린에, 59인치 삼성TV에 그냥 다 드러난다고 보면 돼요.
그러기 때문에 차라리 ‘주여, 저 이 마음입니다.’ 하고 노출시키면 되는 거예요. 어차피 우리는 의로운 사람 없고 죄밖에 없기 때문에 순간순간 ‘나는 이런 죄밖에 내놓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바로 그 사람이 세리와 창기이고 그 사람이 바로 하늘나라 먼저 가는 거예요.
마태복음 6장에 어떤 사람이 금식하는 것을 보고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18절에 보면,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려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금식한다고 동네방네 광고하면서 티 다 내고 “나 금식하고 있지롱” 뭐 이런 거 있잖아요. 주님한테는 통하지 않죠.
“금식하고자 하는 네 의도가 뭐냐?” 이렇게 물어요. 금식하고 욕 얻어먹는 거예요. 금식하고자 하는 의도가 뭐냐. 금식하고 난 뒤에 그 다음 네가 얻고자 하는 게 뭐냐 이 말이죠. 자기 욕심이겠죠.
따라서 이런 것은 주께서 금식하는 그 고상한 것조차 주께서는 겉으로 드러난 걸로 치부하기 때문에 속을 내놔라. 네 속을 내놔봐라. 겉 자꾸 내놓지 말고 속을 내놔봐라, 속을. 세상에 겉옷을 안에 입고 속옷을 밖에 입는 사람은 슈퍼맨 빼놓고는 없어요. 그러니까 슈퍼맨은 날아다니잖아요.
마태복음 10장은 방금 했고 11장을 보면서 바로 속에 있는 것을 어떻게 드러내는가를 위해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고 열두제자를 보냈습니다. 여기 11장 20절에 보면,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베푸신 고을들이 회개치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 화가 있을찐저 고라신아 화가 있을찐저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이게 굉장히 잘 먹고 잘 사는 동네에요. 그러니까 꿀릴 것이 없는 거예요. 사람이 꿀릴 것이 없다는 말은 많이 가졌다는 뜻이죠. 상대적으로 남보다 나는 복 받았다는 것을 자부할 수 있다고 본거죠. 그러나 주님께서 거기를 떴습니다. 제자들과 함께 떴다는 말은 그럼 주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게 뭐에요? 그렇게 당당하고 스스로 자부하지만 주님께서는 뒤쪽을 치는 거예요. 뒤쪽을 치니까 그들은 소돔과 고모라의 벌을 받아야 마땅한 자로 드러나는 겁니다.
마태복음 11장 23절에 보면,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모든 사람이 부러워한 거예요. 아, 난 언제 저 사람처럼 살아보느냐. 여유있게 살아보느냐. 코로나 이런 판국에서도 얼마나 여유가 넘치는지...나는 언제 저 정도 사느냐 하는데, 가버나움아 네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가 소돔과 고모라의 유황불 대상이 된다는 것을 네가 왜 모르느냐 이 말이에요.
그 다음에 13장을 보게 되면 거기에 씨 뿌리는 비유가 나와요. 보통 13장에 씨 뿌리는 비유부터 해서 비유가 많이 나왔잖아요. 이 비유의 뜻은, 취지는 뭐냐? 비위를 상하게 하는 거예요. 인간의 비위를 상하게 하는 겁니다. 감추고 있는 이 돌짝밭아, 감추고 있는 이 바윗덩어리야, 감추고 있는 이 가시덤불아, 내가 네 속, X-ray한번 찍어봐? 예수님께서 하시는 것은 인간의 비위를 다 뒤틀리게 만들어버리는 겁니다.
내가 온 것은 바로 가라지와 알곡을 내가 임의로 결정짓기 위해 왔다. 네가 나댄다고 해서 내가 너를 알곡이라고 쳐준다는 생각은 아예 하지마라. 내 말씀에 준해서 알곡은 알곡대로 가라지는 가라지대로 가른다. 내가 온 것은, 보기는 보아도 깨닫지 못하는 그런 말씀을 주신 것은, 주님께서 우리가 미처 모르는 우리의 속마음, 나의 본성을 주님 자신의 몸에다 담아서 그걸 화끈하게 다 보여주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십자가 길을 갈 때 주님이 가신, 아버지께 버림받은 그 길이 사실은 우리가 지금 가고 있는 길이라는 것. 버림받아 마땅한 그러한 본성을 우리가 지니고 있다는 것을 예수님이 대신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주님의 고난과 서러움, 억울함, 그 모습을 보면서 이걸 진상같은 너 때문에 내가 이렇게 어려운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을 너와 나의, 주님의 고난을 비교해볼 수 있는 안목이 있어야 된다는 거죠.
‘진상’은 본래 ‘진귀한 물품이나 지방의 특산물을 윗사람에게 바치는 행위’를 의미했으나, 진상이 지닌 폐단이 부각되면서 ‘허름하고 나쁜 것을 속되게 이르는 말’로도 사용되었다. 최근 유행하고 있는 ‘진상’은 이 말의 부정적 의미를 차용하여 ‘못생기거나 못나고 꼴불견이라 할 수 있는 행위나 그런 행위를 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고 있다. ‘진상 떨다’라는 말은 ‘유독 까탈스럽게 굴다’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진상 (대중문화사전, 2009., 김기란, 최기호)
그래서 마태복음 13장의 모든 비유는 35절, 이는 선지자로 말씀하신바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한 이유가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 우리는 스스로 드러낼 수 없는데 주의 영, 주님께서 십자가로 올 때, 우리 속에 있는 내 속옷을 드러낼 때 어떻게 해야 돼요?
고맙고 감사해야 되죠. 주님 아니었으면 나는 위선자로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주여, 남 손가락질할 필요도, 그런 자격도 없고 우리는 바로 내가 죄인중의 괴수라는 것을 고백하기 위해서 주님께서 오신 거예요.
323강-YouTube강의(자기변명 시편 42:5)20200915-이 근호 목사
제323강, 제목은 ‘자기변명’. 자기변명이 언제 일어나느냐 하면 자기 계획대로 안될 때 변명해요. 인간은 자기를 자꾸 좋은 쪽으로 이끌려고 합니다. 불행에서 행복으로, 비극에서 희극으로, 망한 데에서 성공한 걸로 그렇게 가다가 자기 뜻대로 안되면 “내가 최선을 다했는데 내 능력이 그것밖에 안돼서 그렇습니다.” 하고 변명들을 하는데 주님한테는 변명할 필요가 없어요. 왜냐하면 어떤 일이 일어나도 주께서 유발한 일이기 때문에 변명하면 안됩니다.
변명이라 하는 것은 전적으로 본인이 계획해서 본인의 의지대로 뭔가 일이 벌어졌을 때, 그리고 그것이 남들에게 무슨 비난을 받을 일이 있을 때는 이제 변명을 하는데 나의 모든 일이 내 일이 아니고 주의 일이라면 변명하는 것 자체가 수상하잖아요. 주님이 조성한 상황인데 마치 내가 일을 잘못해서 일을 망친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굉장히 겸손해 보이는데 겸손이 아니고 불신이에요.
마음을 낮추라고 되어 있다고요, 성경에 보면. 그런데 사람들은 마음을 그냥 안 낮춰요. 마음을 낮출 테니까 일 틀어지지 않게 해달라 뭐 이런 식으로 마음 낮추면서 딴 걸 또, 자기의 성공사례를 자꾸 얻으려고 하는 겁니다.
시편 42편에 보면 주님께로 가는 사람은 변명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내가 내 조치를 하고자 하는 그 모든 것을 주님께서 허락을 안 해요. 시편 42편 5절에 보면,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그렇게 되어있죠.
이거 뭐 대학생 선교 단체할 때 유명한 구절이죠, 시편 42편 5절. 취직문제 때문에 불안하고 결혼문제 때문에 불안하고 가정문제 불안하고 장래문제 불안하고 그럴 때 적어도 선교단체 간사쯤 되게되면 이 말씀 하나는 비상용으로 딱 장착했다가 탁탁 던져주죠.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가스펠송에도 뭐 이런 가사들이 아마 동원될 겁니다.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이렇게 되어있죠.
우리가 젊은 사람들에게 그리고 미래가 불완전한 사람, 흔들리는 사람, 보이지 않는 사람들에게 위로삼아 이런 구절을 자꾸 거론합니다. 특히 기독교서점에 보면 ‘사람을 위로하는 방법’ 해가지고 토정비결 보듯이 어떤 구절이 위로가 되느냐 하는 거죠.
성경은 토정비결이 아닙니다. 재수 좋으라고 보는 책이 아니에요. 근본적으로 성경은 인간이 가는 길이 아니에요. 인간이 갈 수 있는 길도 아니고. 인간이 갈 수 있는 지침서도 아니에요. 주님 혼자 가신 길을 소개한 게 성경입니다. 주님 혼자 가신 길, 아무도 갈 수 없는 길. 주님을 증거 하기 위해서 성경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따라 붙이려고 자꾸 성경구절해가지고 ‘주님 같이 갑시다’ 이럴 잽이 못돼요. 우리는 그럴 위인들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꾸 우리 존재의 권리를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또 다른 사람에게 요청하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가짐 자체가 어떤 권리가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거예요.
나는 행복할 권리, 구원받을 권리, 20대 초반에 벌써 취직할 권리, 20대 후반에 멋진 남자 만나 시집갈 권리. 어떤 말을 한다든지 어떤 태도를 볼 때 ‘나는 당연히 이런 권리가 있습니다’ 라는 것을 뒤에 갖다 붙여서 요청해요.
교회 나왔으니까 목사님, 복 주시옵소서. 이런 거요. 그럼 목사는 허겁지겁 무슨 복을 줄까. 그래, 청년아 네가 낙망하지 말고 불안해하지 말라. 이걸 복으로 주는 거예요, 시편 42편.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인하여 오히려 찬송하라. 하나님께서 늘 도울 준비가 되어있기 때문에 너는 찬송할 준비만 해라. 네가 하나님을 믿으면 네 불안도 없어지고 네 영혼의 낙망도 없어지고 하나님께서 착착 도와주신다. 그러니까 나중에 찬송만 하면 된다.
“그럼 도움받기 위해서 어떻게 합니까?” 하면 “네가 말씀보고 기도하고 두 개의 수레가 있으니까 균형을 맞춰서 말씀도 보고 기도도 하고 기도하고 또 말씀보고 그렇게 하라.” 이렇게 하죠. 그러면 그렇게 “네, 목사님 시키는 대로 말씀도 보고 기도 하겠습니다.”
결국 이런 결심을 한다는 것은 기도자체, 말씀자체가 뭔가 내가 얻고자 하는 수단이 되어버려요. 아직도 자기 포기, 자기 권리를 여전히 주장하고 싶은 겁니다. 이걸 뭐라고 하느냐면 전에 어떤 강의에서도 얘기했지만 내가 나다울려고 하는 거예요.
서울강의에서 그런 얘기했잖아요, 자아표준모델. 나는 이 정도 되어야 나답다는 겁니다. 나는 이 정도 안 되면 나는 낙망할거야, 절망할거야. 이렇게 되는 겁니다. 자기 모델을 자기가 이렇게 정했어요. 구색 맞춘다고 하죠. 이것저것 구색 맞춰서 이 정도는 되어야, 이 정도는 되어야, 이 정도는 되어야 그게 나답다고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시편 42편에 이 말씀은, 이 뜻은 뭐냐. 주님 가신 길이 이런 길로 너희를 인도할 것이라는 겁니다. 낙망하고 절망하고 불안할 수밖에 없는 그 길을 주께서는 강제로 질질 끌고 가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낙망하고 절망할 때는 여전히 내 생각을 포기 못한 상태에요.
그런데 내가 지금 가는 그 길이 주님께서 나를 주시해서 불러가는 길이 아니고 먼저 가신 예수님의 십자가 길에 합류하라고 나를 거기다가 강제로 집어넣은 길이에요. 집어넣은 길이라고요.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도 모르고 ‘아이고, 내가 이 길로 가는 것 보니까 내가 문제가 있는 모양이다’하고 자기 딴에 ‘최선을 다해 기도했습니다. 목사님 시키는 대로 기도하고 말씀 봤습니다. 그런데 왜 이런 어려움이 주어집니까?’ 하고 자꾸 자기 변명조로 나오는 거예요.
마치 중간에 누가 없고 하나님하고 자기하고 직접 상대하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시편은 누구 이야기이냐 하면 내 이야기 아니고 예수님 자신이 어렵게 힘들게 가셨던, 이 땅에서 가신 그 길을 시편에서 미리 우리에게 알려주는 거예요. 주님도 낙망하고 주님도 절망하고 주님도 불안하고. 비록 예수님이지만 이 땅의 삶을 살면서 그것을 경험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만 경험하는 게 아니라 주님도 경험했습니다. 하지만 그 때마다 주님은 아버지의 도움을 인하여 찬송한 거예요.
무슨 말이냐 하면 예수님께서, ‘기도할 게 뭐 있나 아버지 뜻대로 하면 되지’ 이게 아니고 기도해야 될 이유가 예수님의 육신 자체가 죄 있는 육신이기 때문에.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진 육신이에요.
물론 인간은 죄가 주장하지만 예수님은 성령께서 주장하기 때문에 죄를 안 지었어요. 안 지었지만 죄의 결과에 대해서는 온 몸으로 느끼는 겁니다. 불안하고 절망할 때마다 예수님 뭐했습니까? 히브리서에 나온 말씀처럼 그때마다 주님께서 아버지에게 간절히 기도했다고 되어 있어요.
왜냐하면 바로 그 길, 그 길이 주님께서 꼭 가셔야 될 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길을 가면서, 예수님께서 먼저 그 길을 가면서 아버지의 도우심으로 인하여, 잘 들으세요, 내가 설정한 나다운 길을 아버지께서는 일체 허락지 아니하시고. 일체 허락지 아니하셨어요.
왜냐하면 우리는 날 때부터 천국이 아니고 가짜 천국을 기대하는, 내가 잘되는 엉터리 가짜 천국을 내다보면서 악마가 시키는 대로 그 길을 갈 수밖에 없었죠.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이 가는 길이 천국이 되게 하신다는 말이죠. 그러면 우리는 가짜 천국이니까 우리의 마음가짐을, 내 뜻을 포기하게 되어야죠. 예수님도 마찬가지고.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셨잖아요.
이것이 지금 천국 가는 모든 사람에게 교체되는 경험을 하게 하는 겁니다. 사람이 왜 불안합니까, 왜 낙망합니까? 자기 뜻이 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걸 주님께서 강제로 사태를 일으켜서 없애버립니다. 그러면 우리는 절망하고 낙망하고 불안하죠.
그런데 다시 한번 주께서 이끄시면 ‘아, 이 길이 정답이다. 이것은 내가 몰랐던 길인데 야, 목자가 되셔서 이 길을 가게 하시는구나.’ 그러면 도리어 누구한테 찬양합니까? 오직 아버지께, 하나님께 도리어 찬송하리로다.
그러니까 말씀대로 사는 거예요. 불안하고 절망감을 겪어야 하고 아, 나 진짜 미치겠다. 해놓고 나중에 예상 못한 주님의 도우심으로 인하여, 여호와의 도우심으로 인하여 나는 도리어 찬송하리로다. 날마다 새로움이 우리에게 유발되는 겁니다. 그것은 혼자 가는 길이 아니고 주께서 가신 길을 우리에게 체험케 하시는 이게 바로 잘 된 것이고 이게 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