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존강의20181214a 베드로전서2장 13-20절(희생물)-이 근호 목사
베드로전서 2장 13-20절
13절,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복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14절, 혹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장하기 위하여 그의 보낸 방백에게 하라
15절, 곧 선행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막으시는 것이라
16절, 자유하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 우는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
17절, 뭇 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공경하라
18절,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복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19절,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20절,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베드로전서 2장 13절이죠. 13절,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복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14절, “혹은 악행 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장하기 위하여 그의 보낸 방백에게 하라” 그렇게 되어 있죠. 여기 베드로가 이야기할 때,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라고 했으니까,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라는 그 뉘앙스가, 우리 성도는 남의 나라에 살고 있습니다, 라는 뉘앙스가 강렬해요.
베드로전서 1장에 보면 우리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나그네로 살아가거든요. 나그네로 살아갈 때는 이 사람들의 나라, 국가는 따로 있어요. 성도들의 집합, 단체가 따로 있어요. 그거는 하나님나라입니다. 그러면 하나님나라에 대해서, 거기에 비해서 반대가 되는 나라가 어디에 있느냐, 보통 하나님나라의 반대가 세상나라라고 하잖아요. 베드로는 그렇게 보지 않고 하나님나라에 반대되는 세계는 없다고 보는 겁니다.
하늘나라에 반대되는 것은 없고, 하늘나라를 위해서 봉사해야 될 나라는 있는 거죠. 하늘나라는 보이지 않는다고 하는 말 자체가 잘못된 거예요. 하늘나라가 꼭 보일 필요가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늘나라를 좀 보여주면 좋겠다고 하는 것은 보고 믿겠다는 심보인데, 그거는 신앙의 원칙에 어긋납니다. 신앙은 보이지 않는 것을 믿어야 되기 때문에, 보고 믿겠다는 자체가 신앙 아닌 것을 나는 가지겠다는 그런 취지밖에는 안 되기 때문에, 그걸 용납될 수는 없죠. 허용하면 안 됩니다.
어차피 하늘나라는 보이지 않아요. 여기 그러면 하늘나라의 반대가 인간나라가 아니라고 했는데요, 지금 하늘나라는 인간나라하고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마귀하고 싸우죠. 마귀하고 싸워요. 그래서 인간에 세운 제도는 주를 위하여 순복하되, 라는 이 말은 주님이 빠진다면 그 나라는 존재할 이유가 없습니다, 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인간이 세운 나라라고 하니까, 쉽게 대한민국이라고 합시다. “주가 없다면 이 대한민국도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라고 지금 베드로가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러면 “대한민국과 주님과 연관 지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라고 묻는 것과 같은 이야기에요. 보통 정치학 공부할 때에 주님 살아계심과 부활하심과 민주주의를 연관시킵니까? 안 시키겠죠. 안 시킵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나라가 없기 때문에 연관시키지를 않죠.
어거스틴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거스틴은 이 세상에 두 개의 나라로 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도성이 있고, 이 세상나라가 있다고 이래 이야기했어요. 그래서 이 세상 버리고 하늘나라를 위해서 살자고 이야기했습니다. 믿음이 되게 좋아 보이는 것 같은데, 비겁한 도피 같은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이 세상나라가 자기 성에 차지 않으니까, 이 세상나라에서 영원한 행복을 추구하지 못하니까, 나는 행복을 추구해야 되겠고, 이 세상은 자기 행복에 만족을 시키지 못하니까, 그 다음 대안이 뭐예요? 에라, 모르겠다. 나는 보이지 않는 나라에 모든 것을 걸겠다. 이 수법이다 이 말이죠. 이게 성경적일까요? 복음적일까요? 아니죠. 오늘 본문에는 순복하라고 했는데요?
지금 우리가 골라! 골라! 골라잡을 문제가 아니에요. “이 세상나라가 마음에 안 들거든 하늘나라에나 가세요.”라고, 지금 우리보고 통촉하고 촉구하는 것이 아니에요. 베드로전서 1장부터 나온 것은 1절에 나그네라고 되어 있죠. 벌써 잊으면 안 되는데. 흩어진 나그네라고 되어 있고, 나그네라고 하는 것은 내 동네가 아닌 곳을 지금 떠날 채비를 하고 있는 중이라는 그런 뜻이고, 2절에 보면 성령의 거룩하심이죠. 성령의 거룩하심. 그렇잖아요.
성령의 거룩하심인데, 그 성령에 속했냐, 안 속했냐 하는 것은 2절에 보면 뭘 얻기 위해서 라고 되어 있어요? 예수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해서, 피 뿌림의 취지를 알리기 위해서 성령이 우리한테 온 것입니다. 우리가 달라고 했어요? 피 뿌림을. 아니에요. 생뚱 맞는 겁니다. 피 뿌림가지고 천당 갈 줄을 누가 알겠어요? 이게 인간의 아이디어에요? 세상이 만든 제도에서, 국회의원들이 모여서 이 피 뿌림으로 용서받자라는 그 법률을 제안했습니까? 자기들 세비나 올리자고 그런 거나했지, 피 뿌림하자, 뭐 이런 것은 안 한다 이 말이죠.
다시 정리해보면 하나님나라는 없는 나라에요. 성령이 오기 전까지는. 근데 성령님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다 이루시고 성령님이 옴으로서 비로소 있는 나라에요. 성령이 오시기 전까지는 없는 나라에요. 그럼 성령이 오시기전까지는 무슨 나라가 있습니까? 성령이 오지 않으면 뭐가 있느냐 하면 천국이 있죠. 하나님나라가 있죠. 왜? 가짜니까.
그 천국, 하나님나라는 어떤 대안입니까? 세상나라가 너무 힘드니까, 죽어서 좋은데 가자고 제시한 대안이, 성령 없는 상태에서 주어진 천국과 하나님나라의 개념이라 이 말이죠. 중간에 뭐가 빠졌죠? 성령 빠졌죠. 또 뭐가 빠졌죠? 성령 빠지면 뭐가 빠진다고 했어요? 피 뿌림 빠지죠. 피 뿌림 빠지고. 그 피가 우리 피 입니까?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예수님 피 뿌림 빠지고 성령 빠져버리면 이 세상에 있는 것은 뭐냐 하면 종교적인 나라, 천국밖에 없어요. 하늘나라. 거기에 뭐 보탤까요? 삼위일체까지 보태서 삼위일체교리 이런 것 남는 거예요. 교회나.
교회에서 삼위일체 가르치는 이유가 뭐냐 하면 좋은 나라 있으니까 가자는 겁니다. 그러나 성령이 와야 그 나라에 간다는 말은, 성령이 오지 아니하면 너희들이 추구하는 나라는 애당초에 그런 나라가 있었다는 말이에요? 없었다는 말이에요? 없는 거예요. 없는 거. 제가 이래 이야기하면, “그러면 성령 받으면 될 게 아닙니까?” 라고 하는데, 성령을 받는다는 말은 피 뿌림을 받은 거예요. 피 뿌림을.
“그러면 피 뿌림 받으면 될 거 아니냐?”라고 하는데, “피 뿌림을 왜 받아야 하는데? 그 이유를 대봐라. 당신 피 뿌림을 왜 받아야 되는데?” 피 뿌림은 주님이 원하는 거예요? 인간들이 원했던 건가요? 주님이 원했던 거잖아요. 그러면 인간들이 원하는 것은 아니죠. 그러니까 인간들이, 본인이 원하지 않은 것을 원할 리가 있느냐 이 말입니다. 평소에 교회에 가서 주시옵소서! 라고 원할 때, 본인이 원하는 것을 주시옵소서! 라고 해요. 본인이 원하지 않는 피 뿌림 주시옵소서! 라고 하지는 않는다 이 말입니다.
피 뿌림을 달라고 할 때는, 피라고 하는 것은 제가 주일 낮에 설교한 것처럼 그냥 피를 한바가지 들고 온 게 아니잖아요. 피가 발생되려면 그 현장에 누가 있어야 돼요? “당신은 우리가 원하는 메시야가 아니요.”라는 그 요소가 집어넣어져야 피 뿌림이 돼요. 예수님 등짝이 채찍 맞았잖아요. 그럼 등짝이 채찍 자국이 나려면 누가 있어야 돼요? 때리는 자가 있어야 되죠. 그럼 누가 때렸겠어요? 인간들이 때렸잖아요. 인간들의 원함이 때렸다고요. “우리가 원하는 것을 달란 말이야!”라고 때린 것이 채찍이라 이 말이죠.
주님이 그 채찍을 맞고 등장했다는 말은, 일체 우리가 원하는 것을 제공한다? 안 한다? 제공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논리가 따지고 보면 간단한 논리에요.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익히 아는 것을 요구해요. 익히 아는 것을 요구한다고요. 만약에 여기에 있는 물이 다 떨어졌으면 물 달라고 하잖아요. 그러면 그전에 뭐가 있었다? 물이 있었다. 물이 있었는데 물이 없다는 뜻이잖아요. 그래서 자, 물 여기 있다고 주잖아요.
피라는 것이 하나의 물건이라면, “어! 피 없이는 천당 못 가니까 피 주세요.” “피 여기 있다.” 마치 물처럼. 그렇게 제공되는 것이 아니다 이 말입니다. 왜냐하면 피라는 것은 어떤 요소가 거기에 반드시 섞여 있어요. “당신이 싫단 말이야. 나는 예수가 싫어. 나는 내가 좋아. 예수와 나 사이에서 내가 더 좋고 나는 예수 싫어.”라는 요소가 가미될 때 피가 나오는 거예요. “니 나쁜 놈 맞지?” 이래야 피가 나온다 이 말이죠. 무슨 논리인지 아시겠죠?
제가 계속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뭐냐 하면 인간나라에는 하늘나라 있고, 천국 있고, 삼위일체 있는데 정작 뭐는 없다? 진짜 하늘나라는 없다는 말을 계속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성령이 없으니까. 그러면 성령이 나타날 때 비로소 있는 거예요. 그분이 가시면 또 다시 없는 거예요. 바람을 어떻게 보자기에 담습니까? 바람을 못 담잖아요. 성령은 마치 그대 이름은 바람, 바람, 바람이라니까요. 그대 이름은 바담, 바담, 바담, 바람도 아니고 바담이에요. 왔다가 그 다음에 뭡니까? 왔다가 가버리는 바람이라니까요. 어? 가시면? 내가 쥐어야 하는데? 성령은 처음부터 우리가 쥘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에요.
하나님은 우리를 붙잡을 수는 있어도 우리는 하나님을 붙잡지를 못합니다. 왜? 너무 빨라서. 날아가는 총알을 잡으라고 하세요. 못 잡습니다. 잡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신앙생활은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하는 거죠. 신앙생활은 당하는 거지 내가 계획 잡고 추진하는 것이 신앙이 아닙니다. 그냥 당하는 거예요. 마치 강간당하는 것하고 똑같아요. 강도당하는 것, 강간당하는 것하고 똑같아요.
그 성령이 오심으로서 비로소 하나님 백성이 발생되었습니다. 그 백성들에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인간나라라는 개념이 등장하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나라는 우리나라 아니에요. 우리나라는 아니지만, 우리가 거기에다가 신경 쓸 문제는 아니지만, 필요에 의해서 하나님께서 허락한 나라에요. 나중에 소멸될 거예요. 예를 들면 결혼식을 하는데, 예식장 같은 겁니다. 그 예식장 한 모퉁이에다가 살림 차립니까? 아니죠.
그냥 예식 하는 장소잖아요.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아가는 장소지, 거기에 머물러서 거기서 살림 차리고 거기서 살라고 하는 것이 예식장이 아닌 겁니다. 한 30분하고 빨리 밥 먹고 떠나야 돼요. 빨리 비워줘야 뒤에 있는 사람이 주례하니까, 빨리 비워줘야 하잖아요. 그래야 뒷사람이 예식 하니까. 대한민국에 살면서 늙어죽으면 대한민국을 떠나야 되죠. 왜? 어차피 우리의 본향이 아니니까. 잠시 머물다가 가는 나라기 때문에.
그런 나라 같으면 우리가 신경 안 써도 되는데, 오늘 본문에 인간에 세운 제도, 내 나라 아닌 나라, 내 나라 아닌 국가에게 주를 위하여 순복하되, 주를 위하여 순복하라는 이 말은 주님의 필요에 의해서 이 나라가 있어야 했다는 것을 니가 받아들이라 이 말입니다. 니가 내 백성이라면 주님이 의도해서 생긴 나라에 대해서 니가 그걸 막 무시하고, 이런 나라를 왜 주십니까? 라고 할 그럴 필요는 없다 이 말입니다.
하나의 예를 들어볼게요. 북한에 신자가 있는지는 모르겠어요. 저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북한지하교회에 있는 신자가 들었으면 또 개무시 한다고 하겠는데, 없다고 봅니다. 만약에 신자 하나가 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김정은 정권에 대해서 순복해야 될까요? 말아야 될까요? 질문은 간단한데요. 수능처럼 다섯 문제가 아닌데요. 달랑 두 개인데요. 순복해야 될까요? 말아야 될까요? 틀려도 벌금 안 냅니다. 순복해야죠. 순복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김정은을 세운 것은 주님이 세웠지, 악마가 세운 것이 아니기 때문에 순복해야 돼요. 그걸 왜 순복해야 되는가, 이제부터 그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여기에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복하되, 순복하는 이유에 대해서 베드로 사도는, 주님께서는 국가를 긍정적으로 봐요. 꼭 필요하다는 쪽으로 봐요. “더러운 이 세상, 불심판 받을 이 세상, 꺼져라!”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그게 반드시 꼭 필요해서 주께서 주셨다는 겁니다.
이 대목을 이야기할 때 여러분들이 항상 같이 봐야 될 유명한 대목이 바로 로마서 13장에 나오죠. 오늘 그 대목이 아니기 때문에 제가 살짝 읽고 그냥 지나가겠습니다. 1절,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 2절,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리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림이니 거스리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3절, “관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 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 이래 되어 있어요.
지금 이 로마서 13장의 이야기는 베드로전서 2장의 이야기와 같은 취지로 이야기하고 있죠. 그러면 우리가 이 제도를 알기 위해서는 국가의 제도, 국가의 역사, 뭐 이런 것을 다 알아야 됩니까? 정치사까지 다 거론해서 알아야 됩니까? 뭐 이런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할 수 있는데, 저는 간편하게 가겠어요. 간편하게 갑니다. 간편하게 가는데, 뭘 끄집어내느냐 하면은, 아까 로마서 13장에도 나오고 하지만, 여기에 인간에 세운 제도에 순복하되, 라는 것에 뭘 쓰고 싶은가 하면은 이걸 쓰고 싶어요. “권세”
권세라는 말을 했거든요. 권세라는 그것을, 하나님의 권세를 미리 이 땅에서 체감하도록 해줍니다. 일단은 권세가 성립이 되려면, 인간이 제멋대로 살 권세를 허용하지 않을 권세를 이 세상 왕들에게 주었다. 정치가들에게 주었다. 이래 보시면 되는 겁니다. 제멋대로 살아가는 것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거예요.
그러면 인간의 몸이 왜 럭비공처럼 어디로 튈지 모르는 제멋대로이냐, 그거는 우리가 애 키워보면 알겠죠. 왜 제멋대로인지. 상황판단이 안 되죠. 애를 키울 때에 애들의 특징은 권세라는 것을 처음 어릴 때는 몰라요. 권세는 몰라요. 모르고, 뭐는 아는가 하면은 이 몸이 원하는 대로 지금 움직인다고요. 원하는 대로.
그러니까 권세가 있다는 것은 뉘앙스가 무슨 뉘앙스냐 하면, 취지가 인간의 몸은 그냥 방치대상이 아니라는 뜻이에요. 인간은 정상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근데 인간의 그 몸 안에 권세와 관련된 사항이 있어요. 굉장히 복잡해지죠. 하나님이 지상의 인간들을 다스리기 위해서 권세를 주었다는 말은, 권세부리는 그 권세의 내용과 인간의 몸에 장착된, 인간의 몸을 움직이는 그 욕망의 원리와 관련성이 있다는 이야기에요. 연관이 있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서 식물이나 사료 주는 동물 같은 경우에, 콩나물은 물만 주면 돼요. 그것도 좋은 물 줘야 하고. 이 화초 같은 것은 물을 주면 크잖아요. 그죠. 꽃을 키우는데 애를 먹는다. 이런 일은 별로 없어요. 꽃 키울래? 애 키울래? 하면 꽃 키운다고 하죠. 꽃은 점잖잖아요. 가만히 있잖아요. 때 되면 꽃 피고 묵묵히 자라고.
애는 천방지축이라니까요. 어디 가면 불인지 물인지, 2층인지 3층인지 분간도 못하고. 어떤 애는 9층에서 놀다가 겨우 살고. 베란다에 올라갈 때 할머니는 뭐 했느냐, 애가 자고 있는 줄 알았다는 거예요. 애가 잠에서 깨서는 할머니 일어났다고 이야기해야 되는데 그게 아니고, 잠에서 깨어났으니까 또다시 몸의 본능은 작동해가지고 하늘이 보고 싶었던 모양이죠. 그래서 창문열고 바깥에 나간 거예요. 9층에서.
다시 이야기할게요. 권세라는 요소가 인간의 몸의 요소와 관련성이 있다는 겁니다. 근데 권세라는 것은 다스리는 용도거든요. 뭔가 통치하는 용도. 지배하는 용도라는 말이죠. 그러면 개인적으로 개인의 욕망을 다스릴 수 있다는 말이에요? 없다는 말이에요? 없다는 말입니다. 개인은 개인적으로 다스릴 수가 없다. 인간이 갖고 있는 욕망은 인간의 사적인 욕망보다 더 크다. 더 힘이 세다. 이래 보시면 되는 겁니다.
여기에 두 사람이 있다고 봅시다. 두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은 키가 190센티미터고 덩치가 120킬로그램 나간다. 근데 이 사람은 몸무게가 35킬로그램이고 나이도 많고, 나이가 70세다. 근데 술 먹고 와서 때려버리니까 죽었다 이 말이죠. 얼마 전에 있었던 사건인데, 폐지 줍는 할머니 맞아서 죽었죠. 살살 때렸는데 죽은 거예요. 힘이 셌으니까 죽은 거예요. 그럼 여기 있는 이 사람의 욕망이 있죠. 술 먹겠다는 자체가 욕망 아닙니까? 술 먹고 때린 자체가 욕망이잖아요. 그럼 여기 이 사람의 욕망은 폐지 주워서 살겠다는 욕망이죠. 그게 한 순간에 맞아죽음으로서 끝났죠. 그럼 이 사람이 뭐가 되느냐 하면은 욕망의 희생물이 되는 겁니다. 욕망의 희생물, 악의 희생물이 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두 종류의 희생물을 나누고 있습니다. 첫째는 악의 희생물, 두 번째는 하나님의 의의 희생물. 악의 희생물, 의의 희생물의 공통점이 있어요. 둘 다 사적으로는, 개인적으로는 조절이 안 돼요. 조절 안 됨. 둘 다 개인적으로 조절이 안 되는 상태입니다. 자, 오늘 제목을 ‘희생물’로 하겠는데요. 자, 이 희생물이 나왔다는 것은 이 세상이 이미 희생물을 낳게 하는 요소가 작렬하고 있다는 뜻이죠. 희생물이.
그럼 결국 희생물이 되었다는 것은 죽었다는 뜻이잖아요. 주님께서는 하나의 죽음만 원해요. 하나의 죽음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와 다른 성질의 죽음을, 하나의 의로운 죽음을 위한 예비단계로서 다른 죽음과 차별화시키려고 애를 쓰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시도하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나중에 연세가 많으면 죽잖아요. 그럼 죽음이죠. 그 죽음이 뭐라고 했습니까? 희생이죠.
그럼 여러분이 죽는다면 그거 왜 죽어요? 의의 희생물이에요? 죄의 희생물이에요? 죄의 희생물이죠. 죄의 값은 사망이기 때문에 죄의 희생물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멀쩡하게 살아있다고 거기에 모든 의미를, 가치를 종결시키면 안 돼요. 계속 변화되어 가고 있어요. 어디로? 죄의 희생물로. 죄가 우리보다 더 세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창세기 2장에서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당부한 법이 있죠. 선악과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했죠. 하나님의 선악과를 건드린 대가는 죽음으로 오는 겁니다. 죽음으로 와요. 그렇다면 선악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는 이 문장, 이 명제, 보다 확실한 진리체계, 그 진리체계를 분명하게 실시한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뭐가 필요 하느냐 하면 인간이 필요하고 인간의 제도가 필요했던 겁니다. 그리고 주님이 필요하고.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벌일 때는 그걸 하나도 버릴 것이 없이 다 필요해요. 창세기 4장을 한번 봅시다. 가인과 아벨, 두 형제가 있죠. 둘 다 욕망을 갖고 있어요. 근데 어느 욕망이 더 셌느냐 하면은 가인 욕망이 아벨 욕망을 덮쳐서 이겼습니다. 죽였습니다. 그러면 아벨은 악의 희생물이 된 겁니다.
그렇다면 가인을 어떻게 처리하느냐, 그렇다고 죽여 버릴까요? 가인은 그냥 죽이지 않아요. 그냥 죽이지 않고 가인이 번창하게 만들어요. 번창하게 만들어서, 그 속에서 악의 구조가, 악이 어떻게 체계적으로 구조화되느냐를, 거기다가 시간요소를 집어넣어서 악의 정체를 분명히 밝힙니다. 밝혀보면 가인의 7대손인 라멕이 나오죠. 라멕이 뭐라고 합니까? 자기 자신의 가치를 위해서 자기 아내가 둘이 있었는데, 아내 둘에게 하는 말이 나를 조금만 건드리면 죽여 버리겠다는 식으로, 그게 마치 자랑인양 그렇게 하는 겁니다.
그게 권세에요. 이 땅의 권세의 정체에요. 상당히 권세가 긍정적이에요? 부정적이에요? 상당히 부정적이죠. 부정적인데, 그 부정적인 권세가 완전히 어디서 몰살을 당하느냐 하면 창세기 6장에서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약속한 홍수를 내려버립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보세요. 하나님께서 홍수를 내리는 이유가, 창세기 6장에 보면 죄가 관영하기 때문에 홍수를 내린다는 겁니다. 죄가 관영하기 때문에.
그럼 죄가 관영하게 되면, 아까 논리에 의하면 죄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뭐가 있느냐 하면 희생자가 있죠. 그럼 그 희생자가 누구죠? 노아는 은혜를 입었더라. 이 노아잖아요. 노아와 가족이죠.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무슨 일을 할 때 하나도 버리지 않아요. 요모조모 다 쓸모 있게 하십니다. 무엇을 보호하기 위해서 심판을 내리신 겁니까? 결국 노아를 부각시키기 위해서 심판을 내리고, 노아는 뭐냐 하면 그 당시 당대에 악의 희생물로서 드러나게 하시는 거예요.
그러면 뭐 해답은 다 드러난 거죠. 두 가지 종류의 권세가 있다고 했죠. 하나는 뭐냐 하면 의를 위한 희생, 또 하나는 죄를 위한 희생. 이 두 가지가 병행해서 하나님의 의의 희생물을 드러내는 겁니다. 다시 한 번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의라는 것은 반드시 죄가 없는 곳에는 의가 등장하지 않습니다. 죄의 희생물이 없는 이상은 하나님의 의의 희생물이 등장하지 않아요. 이 죄악 된 세상에서 하나님나라의 언약이 뽑혀져 나오려면, 반드시 이 세상이 부정적인 역할을 충실하게 해줘야 해요.
자, 다시 본문 베드로전서 2장 13절로 돌아가 보면, 그렇다면 인간이 세운 제도, 인간이 세운 제도라고 해서 이거는 하나님이 좋아하는 제도는 아니라는 뜻이겠죠. 인간에 세운 제도에 순복하라고 했다고요. 그러면 뭘 남기기 위함인가, 결국 이거는 희생물을 내가 만들어내겠다는 거예요. 세상권세를 통해서 희생물을 만들어내겠다. 국가권세는 죄인에 대해서 강렬하게 처벌하고 의인에 대해서는 포장, 또는 포상하는 제도 때문에 생겼다고 이야기해요.
그럼 그 제도가 천국까지 계속 이어집니까? 안 이어집니까? 안 이어지죠. 그럼 중간에 왜 그렇게 건전한 의도가, 보람된 일을 하는 제도를 천국에서는 용납하지를 않는가? 왜 연속성이 끊어져있는가? 그 자체는 뭐냐 하면 인간이 세운 제도 그 자체에서 인간이 세웠다는 이유 때문에 한계성을 갖고 있어요.
그 한계성이 18절에 나옵니다. 18절,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복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19절,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20절,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이래 되어 있죠.
지금 이 이야기를 보게 되면 악한 자에게 벌을 주고 착한 자에게 포상하는 일을 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하늘나라에 갈 수 있는 요건이 충족이 될까요? 안 될까요? 안 된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애매하게 고난 받는 사람들만 천국가요. 애매하게 고난 받는 사람만. 애매하다는 것은 억울하다는 뜻이죠. 억울하게, 아까 이야기한 희생물입니다.
20절에 봅시다. 20절,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이래 되어 있단 말이죠. 쉽게 합시다. 개인에게 욕망이 있어요. 어느 개인도 자기 욕망을 못 이깁니다. 그리고 그 욕망은 긍정적이 아니고 부정적이에요. 인간의 몸은 지 맘대로 해요. 지 맘대로 하는 인간이 영원한 나라, 주님의 나라에 간다는 것은, 사실은 이건 허용될 수 없는 겁니다. 허용될 수 없는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지금 천국에 보내려고 해요.
그러면 그 사람에게는 두 개의 성격이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돼요. “하나님나라는 어떻게 들어갑니까?”라는 말 자체가 성립이 안 돼요. 그럼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어떤 모습을 띱니까? 이 땅에서 그리스도 때문에 고난 받는 경우를 당할 경우에만 하늘나라에 갈 수가 있습니다. 21절을 한번 봐요.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자,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예수님에게 권세를 행사한 자가 누굽니까? 천사들이에요? 아니면 세상 권세자들입니까? 세상 권세자들이잖아요. 그럼 주님께서 천사를 보내가지고 “빌라도 이리 나와! 바리새인들 나와! 너희들은 다 죽었어!” 이렇게 했을까요? 아니죠. 만약에 어떤 강도가 있는데 경찰이 강도를 잡을 때, 강도가 하는 말이 “어이, 경찰! 니는 죽어서 천당 가나? 못 가나? 천당도 못 가는 주제에 나를 왜 잡느냐?”라고 하는 이 말이 정당성 있다고 할 수 있습니까? 없죠.
그래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죄가 있어 매를 맞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라고 한 거예요. 근데 인간들은 기본적으로 착한 일 해서 매를 맞지 않고 매 맞을 경우는 대부분이 뭡니까? 매 맞을 짓을 해서 매 맞아요. 매 맞을 짓을 해서. 따라서 매 맞을 짓을 해서 매 맞으면, ‘아, 내가 매 맞아도 마땅하구나. 지옥가도 마땅하구나.’라는 것을 누가 알려주는가? 하나님께서 주를 위해서 세운 권세자들이 그 역할을 하라 이 말입니다.
권세자들이 하는 일이 완벽하고 철저하고 하나님 앞에 너무나 멋지다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고, 한계를 갖고 있다니까요. 그래서 인간이 세운 제도에요. 인간이 세운 제도는 있되 불필요한 것은 아니다 이 말이죠. 뭐냐 하면 인간이 갖고 있는 욕망은, 이거는 짐승과 같은 욕망이기 때문에 팰 때는 패야 된다 이 말이죠. 팰 때 패야 되고 상 줄 때 상 주는데, 상 받았다고 천당 가는 것도 아니고, 맞았다고 해서 천당 가는 것도 아니고, 그런 거예요. 맞았다고 해서 또 지옥 가는 것도 아니고.
어쨌든 간에 하나님께서는 권세자를 통해서 철저하게 인간은 근원적으로 악하다는 점을 인간의 권세와 결합시켜서, 분명하게 평생 동안 살면서 보여주겠다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취지입니다. 뜻입니다. 인간은 못됐다. 뭐 문재인 물러가라, 박근혜 물러가라고 하는데, 그럼 니가 한번 대통령 해보지. 지지율 몇 퍼센트가 나오는가. 지가 대통령하면 자기 아들, 친척들, 제2의, 제3의 최순실이 쭉쭉 다 딸려올 거예요. 어떤 인간도 한계가 있기 때문에 뭘 증거를 잡아도 반드시 부정부패가 다 있기 마련이에요.
근데 그 부정부패가 있는 것이 어떻게 나를 유치장에 집어넣느냐? 그런 소리는 하지 말라 이 말이죠. 그거는 누가 할 소리냐 하면 의인이 할 소리에요. 예수님만 할 소리지, 죄지은 것밖엔 없는 인간이 같이 죄를 다스리고 있는 권세자보고, “니 나보다 착하냐? 판사 니 나와!” 이런 식으로, “판사 니는 바람 안 피웠어? 판사 니는 뭐 어떻게 아내한테 폭행 안 휘둘렀어?” 이런 식으로 판사한테 대드는 것이 아니에요. 판사는 공연히 칼을 가진 것이 아니고 공연히 권세를 가진 것이 아니다 이 말이죠.
이야기가 굉장히 복잡해졌는데, 간단히 하면 이렇습니다. 구원받는 사람은 없어요. 없는데, 권세자에 의해서 착하면 상 받고 나쁘면 매 맞는데, 그 매 맞는 가운데 애매하게 매를 맞는 경우가 발생하도록 주께서 살짝 집어넣는 거예요. 예를 들면 광주사태라고 봅시다. 광주사태 때 시민군 제압했던 부대가 공수부대죠. 자, 내가 공수부대의 중사다. 하사관이다. 그래서 이 빨갱이 새끼들이라고 막 팼다 이 말이죠. 데모하는 학생들 빨갱이 사주 받아서 했기 때문에 다 죽어야 된다고 해서 총검으로 패고 총으로 죽이고, 빨리 제압 안 하면 니가 죽는다고 해서 자기도 살기 위해서 제압할 수밖에 없죠. 안 그러면 자기도 총 맞아 죽으니까. 군대는 명령이 아닙니까?
그래서 어떤 애를 때리고 보니까 안면이 있는 거예요. 뭐 자기 조카라. 이래 나온 거예요. 애매하게 맞았죠. 애매하게. 근데 맞은 애가, 뭐 그럴 리가 없겠지만 자기 아들이다. 그러면 진짜 자기 아들이, 무조건 다 때리는데 무작위로 때릴 때 자기 아들이 맞아서 죽었다고 하면, 그 사람은 계속 그 직위에 있겠습니까? 사표 내겠습니까? 사표 내겠죠. 자기 부인이 가만히 안 두죠. “니 이래도, 내 아들 죽인 일을 계속 할래?” 사표 내겠죠.
사표 왜 내요? 내가 하는 일이 옳았는데, 옳다고 생각하는 그 안에 뭐가 들어있었다? 이게 치지 말아야 될, 죄가 없는 사람까지도 내가 쳐서 뭘 낳았느냐 하면 희생물을 낳은 거예요. 이 제도의 한계를 확연하게 드러내주는, 인간의 한계를 드러내주는 희생물을 그만 희생되게 만들어버린 겁니다.
강릉의 ktx직원이 마이너스 플러스를 잘못 연결해서 기차가 철로에서 탈선했어요. 철도회사 사장이 그렇게 했습니까? 사장이 잡고 기어가서 이렇게 했습니까? 사장은 서울에 있었다고요. 자기는 구경도 못했다고요. 비전문가니까. 철도회사에 낙하산인사로 들어왔으니까. 근데 사표는 누가 냈습니까? 자기가 사표 낸다고요. 구경도 못했는데. 케이블이 뭔지도 모르는데 왜 사표를 내요? 상식이 이상하잖아요?
그게 권세기 때문에 그래요. 권세기 때문에. 왜냐하면 케이블 고장 난 문제는 개인과 개인의 문제지만, 권세는 개인과 개인의 레벨을 능가하는, 넘어서는 책임자로서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철도공사 사장이 직원들 다 쫓아다니면서, “이걸 이렇게 바꿔야 된다. 전부 다 기차사고 나야 된다.” 이렇게 했습니까? 아니죠. 훈계를 얼마나 했겠어요. “정신 바짝 차리고, 인원수 적더라도 국민의 안전은 여러분 손에 있습니다.”라고 얼마나 했겠어요. 지 할 도리는 다 했죠. 근데 바꿔서 연결했다 이 말이죠. 근데 지가 사표 냈다 이 말이죠.
억울한 일을 당하고 희생물로 당했을 때는, 그 희생물에 대해서 권세자가 권세로 덮어야 될 위치에서 그 희생물로 인하여 권세가 찢어진 거예요. 온전한 권세가 되지 못하고 찢어진 거예요. 다음 철도공사 사장이 오면 제일 먼저 뭘 하겠어요? 우선 부상을 입은 부상자들에게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고 해가지고, 희생물이 등장한 이것이 사실은 우리의 한계를 드러낸 의로운 것이라고, 사장이 먼저 수긍하고 인정하고 들어가야 돼요. 인정하고. 권세라는 게.
자, 그럼 하나의 예를 들어봅시다. 이런 겁니다. 박정희 정권시대 때에 간첩도 아닌데 고문해서 간첩이라고 해가지고 사형을 시켜 놨다 이 말입니다. 죽어버렸어요. 나중에 조사해보니까 이 사람은 무죄에요. 그럼 누가 사과해야 합니까? 대통령이 사과해야 되겠죠. 지금은 사과 안 하지만 나중에 정권 바뀔 때 다음 대통령이 대통령 입장에서 사과하겠죠.
이 말은 뭐냐 하면 애매하게 고난 받는 것에 대해서는 모든 권세의 위쪽에서, 그걸 초월한 새로운 권세가 등장해야 하는 거예요. 그것 때문에 잘난 사람에게 상주고 못난 사람에게 벌주라는 그러한 하위권세, 하급권세를 주께서 허락하신 겁니다. 이제 아시겠죠. 어차피 성도는 그걸 뚫고 올라가야 하니까. 그 두꺼운 권세도 뚫고 올라가야 하니까.
자, 북한에서 어떤 사람이 예수를 믿는다. 그러면 김정은이가 예수 믿지 말라고 했어요. 예수 믿지 말라고 하는 이 말이, 실제로 예수 믿지 말라고 이야기하겠어요? 물론 종교는 그러한 하나의 미신이라고 뭐 그런 요구는 하겠지만. 노골적으로 예수 믿지 말라고 하면 김정은이가 종교박해자로 걸려가지고 또 비난받고 그러니까 노골적으로 그런 이야기는 안 하죠. 예수 믿지 말라고 하면 평양에도 뭐가 없어야 돼요? 평양교회도 없어야 되잖아요. 근데 교회 있잖아요.
그러니까 예수 믿는 게 누가 믿으라고 해서 믿고 믿지 말라고 해서 안 믿는 거예요? 아니죠.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에게 예수 안 믿었으면 좋겠다는 식으로 뉘앙스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눈치도 없이 그냥 성경책을 보고 있다. 그러면 그 사람이 예수 믿는 것 가지고 시비를 걸까요? 아니면 나라에서 금하는 성경책을 가지고 있다는 것 때문에, 그 불온서적 때문에 금할까요? 불온서적 때문에 금하겠죠. 불온서적 때문에.
그런 것이 뭐냐 하면 북한은 전지전능한 권세도 아니면서 전지전능한 권세를 흉내 내는 겁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그것 때문에 세상권세가 지옥불에 가요. 지옥에 간다니까요. 다 덮을 수 없어야 되는데 건방지게 덮는다고 여기는 거예요. 모든 인간은 이 국가의 권세 아래 있다고 까불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이 성경말씀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예수 믿고 바르게 살라고 하는 것을 요구하지 않고요, 뭘 하느냐 하면은, 첫째시간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대목입니다. 두 개에요. 성경이 바르게 살라고 하는 게 아닙니다. 바르게 살라고 한 게 아니고, 뭐냐 하면 희생물이 되라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 본성상 어느 쪽을 더 하게 될까요?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으로서 어느 쪽이 더 가까울까요? 선악을 따먹었기 때문에 우리는 날이 갈수록 자기가 대단하고 가치 있고 이렇게 훌륭하고 우수한 존재인 것을 과시하고 싶은 거예요. 우리는 바르게 살고 싶은 거예요. 그런데 희생물이 된다는 것은 너무 억울하지 않습니까? 근데 희생물이 뭘 희생하느냐 하면은, 내가 죄지어서 희생하는 것은 희생물로 취급을 안 해요. 죄지어서 하는 것은 매 맞아도 마땅하죠. 그런 것 때문에 세상권세가 있으니까.
이 희생물은 뭐냐, 자기 의가 희생이 되어야 해요. 자기 의가. 그런데 교회에서나 사회에서는 뭐냐, 의로우면 무슨 값을 하냐면 의로운 값을 내고 꼭 티를 내요. 의로운 값을 낸다고요.
오늘 십자가마을에 늘 하시는 분 말고 다른 분이 질문을 올렸죠. 성령을 소멸치 말라고 하는 내용에 대해서 올렸는데, 그래서 거기에 대한 답변을 해드렸고요. 다시 두 번째 댓글을 달았어요. 자기는 선교단체에 있는 학생이라는 겁니다. 선교단체에서 아무리 시키는 대로 오래해도 이건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거예요. 그래서 답변에 대해서 너무 어렵다고 ㅠㅠ하고 막 해놨어요. 저는 무지무지하게 쉬운데.
왜 어려우냐 하면은 자기가 희생물이 되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의롭게 되려고 하는 거예요. 하나님 안 믿다가 지금은 하나님 믿었으니까, 안 믿었을 때보다 지금 더 월등하고 우수하고 훌륭하고 의로운 사람이고자 그걸 목표로 잡은 거예요. 목표로. 그걸 목표로 잡다보니까 자기가 쌓아놓은 선이 아까워서라도 희생되는 것에서 점점 더 멀어지는 거예요.
사람이 서른 살 되기까지 얼마나 힘들게 삽니까? 근데 스무 살에 살았던 그 모든 가치가 날이 갈수록 다 허물어진다면, 그거는 서른 살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는 거예요. 점점 더 멀어져가네~~ 점점 더 멀어져가는 거예요. 그 고왔던 시절, 최정점의 시절, 잘났던 시절, 자기가 점점 더 망가지고 있는 거예요. 가장 희생물이 되기 싫다는 가장 극단적인 선택이 자살입니다.
자살은 왜 하느냐, 죽으면 죽었지 누구의 희생물이 되는, 이 의가 아까워서라도 나는 못 죽는다. 이 의를 품고 죽을란다. 나 아직도 열두 척의 배가 있다. 나의 잘남을 내 목숨을 바쳐서라도 사수하겠다. 이게 무슨 희생자입니까? 이게. 이게 무슨 희생자에요? 그 사람은요, 세상이여! 나를 좀 알아달라고 그거 하소연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의롭게 되려고, 선하게 되려고 선을 자기의 이상적인 목표로 자꾸 내세워요. 이왕 사는 거 짐승처럼 살 필요가 뭐가 있느냐, 천사처럼 사는 것이 내 목표다. 그게 잘못된 거예요. 그 목표가 마귀의 목표에요. 왜냐하면 선악의 체제에서 벗어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선악체제를 자기의 유일한 인생으로 굳히는 계기가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착하면 복 받겠지. 나쁜 일하면 벌 받고 착한일하면 복 받겠지. 이왕 착한 것 복 더 받기 위해서는 철저에 철저를 기하고 조심스럽게 행동해서 하나라도 허점이 없이 반듯하게, 누가 털어도 먼지하나 없이 깨끗하게 살고 싶다. 근데 먼지 없으면 사람이 죽어요. 먼지가 없으면 우리 속에 있는 면역체계가 할 일이 없고, 박테리아가 할 일이 없는데요. 깨끗하게 살면 사람이 표백상태에 들어가서 죽게 됩니다. 뭐든지 깨끗하면 죽어요.
전에 제가 오후설교 때 했죠. 히틀러가 깨끗한 나라 만들기 위해서 다 죽여 버렸잖아요. 저능자, 여호와증인 그리고 정박아들, 미쳐 보이는 이런 사람들 다 죽었습니다. 부랑자들, 노숙자들. 우리는 더러운 것 없다. 북한도 다 죽여 버렸잖아요. 죽이든지 안 그러면 요덕수용소에다가 다 집어넣었어요. 그래도 우리나라는 너무나 백퍼센트 행복한 나라기 때문에 거지가 있을 리가 없다는 거예요. 다 죽여 버렸으니까 있을 리가 있어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이 세상 인간이 세운 제도 자체를 백퍼센트 절대화시키겠다는 겁니다. 절대화시켜서 이 자체를 하늘나라로 삼겠다는 겁니다. 제가 이런 말을 할 때 북한에는 강도도 봐준다는 이런 말을 하면 안 돼요. 북한도 철저하게 나쁜 짓 했을 때 처벌하는 제도가 있고, 한국도 마찬가지고, 히틀러도 마찬가지에요. 도둑놈을 잘했다고 해주는 나라는 아니에요. 전부 다. 선한 자에게 상을 줘요. 열심히 공부 잘하고 희생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는 사람에게 주는 효도상이 북한에도 있습니다. 잘해줍니다. 하지만 그들의 한계를 그들이 모른다는 게 문제거든요. 그건 10분 쉬고 합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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