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강의

희생물 181214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8. 12. 18. 07:53
2018-12-15 00:29:48조회 : 133         
희생물 181214이름 : 이근호 (IP:119.18.87.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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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아 (IP:122.♡.170.138)18-12-17 22:39 
서울의존강의20181214a 베드로전서2장 13-20절(희생물)-이 근호 목사 

  

베드로전서 2장 13-20절 

  

13절,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복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14절, 혹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장하기 위하여 그의 보낸 방백에게 하라 

15절, 곧 선행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막으시는 것이라 

16절, 자유하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 우는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 

17절, 뭇 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공경하라 

18절,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복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19절,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20절,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베드로전서 2장 13절이죠. 13절,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복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14절, “혹은 악행 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장하기 위하여 그의 보낸 방백에게 하라” 그렇게 되어 있죠. 여기 베드로가 이야기할 때,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라고 했으니까,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라는 그 뉘앙스가, 우리 성도는 남의 나라에 살고 있습니다, 라는 뉘앙스가 강렬해요. 

  

베드로전서 1장에 보면 우리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나그네로 살아가거든요. 나그네로 살아갈 때는 이 사람들의 나라, 국가는 따로 있어요. 성도들의 집합, 단체가 따로 있어요. 그거는 하나님나라입니다. 그러면 하나님나라에 대해서, 거기에 비해서 반대가 되는 나라가 어디에 있느냐, 보통 하나님나라의 반대가 세상나라라고 하잖아요. 베드로는 그렇게 보지 않고 하나님나라에 반대되는 세계는 없다고 보는 겁니다. 

  

하늘나라에 반대되는 것은 없고, 하늘나라를 위해서 봉사해야 될 나라는 있는 거죠. 하늘나라는 보이지 않는다고 하는 말 자체가 잘못된 거예요. 하늘나라가 꼭 보일 필요가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늘나라를 좀 보여주면 좋겠다고 하는 것은 보고 믿겠다는 심보인데, 그거는 신앙의 원칙에 어긋납니다. 신앙은 보이지 않는 것을 믿어야 되기 때문에, 보고 믿겠다는 자체가 신앙 아닌 것을 나는 가지겠다는 그런 취지밖에는 안 되기 때문에, 그걸 용납될 수는 없죠. 허용하면 안 됩니다. 

  

어차피 하늘나라는 보이지 않아요. 여기 그러면 하늘나라의 반대가 인간나라가 아니라고 했는데요, 지금 하늘나라는 인간나라하고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마귀하고 싸우죠. 마귀하고 싸워요. 그래서 인간에 세운 제도는 주를 위하여 순복하되, 라는 이 말은 주님이 빠진다면 그 나라는 존재할 이유가 없습니다, 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인간이 세운 나라라고 하니까, 쉽게 대한민국이라고 합시다. “주가 없다면 이 대한민국도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라고 지금 베드로가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러면 “대한민국과 주님과 연관 지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라고 묻는 것과 같은 이야기에요. 보통 정치학 공부할 때에 주님 살아계심과 부활하심과 민주주의를 연관시킵니까? 안 시키겠죠. 안 시킵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나라가 없기 때문에 연관시키지를 않죠. 

  

어거스틴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거스틴은 이 세상에 두 개의 나라로 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도성이 있고, 이 세상나라가 있다고 이래 이야기했어요. 그래서 이 세상 버리고 하늘나라를 위해서 살자고 이야기했습니다. 믿음이 되게 좋아 보이는 것 같은데, 비겁한 도피 같은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이 세상나라가 자기 성에 차지 않으니까, 이 세상나라에서 영원한 행복을 추구하지 못하니까, 나는 행복을 추구해야 되겠고, 이 세상은 자기 행복에 만족을 시키지 못하니까, 그 다음 대안이 뭐예요? 에라, 모르겠다. 나는 보이지 않는 나라에 모든 것을 걸겠다. 이 수법이다 이 말이죠. 이게 성경적일까요? 복음적일까요? 아니죠. 오늘 본문에는 순복하라고 했는데요?

  

지금 우리가 골라! 골라! 골라잡을 문제가 아니에요. “이 세상나라가 마음에 안 들거든 하늘나라에나 가세요.”라고, 지금 우리보고 통촉하고 촉구하는 것이 아니에요. 베드로전서 1장부터 나온 것은 1절에 나그네라고 되어 있죠. 벌써 잊으면 안 되는데. 흩어진 나그네라고 되어 있고, 나그네라고 하는 것은 내 동네가 아닌 곳을 지금 떠날 채비를 하고 있는 중이라는 그런 뜻이고, 2절에 보면 성령의 거룩하심이죠. 성령의 거룩하심. 그렇잖아요. 

  

성령의 거룩하심인데, 그 성령에 속했냐, 안 속했냐 하는 것은 2절에 보면 뭘 얻기 위해서 라고 되어 있어요? 예수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해서, 피 뿌림의 취지를 알리기 위해서 성령이 우리한테 온 것입니다. 우리가 달라고 했어요? 피 뿌림을. 아니에요. 생뚱 맞는 겁니다. 피 뿌림가지고 천당 갈 줄을 누가 알겠어요? 이게 인간의 아이디어에요? 세상이 만든 제도에서, 국회의원들이 모여서 이 피 뿌림으로 용서받자라는 그 법률을 제안했습니까? 자기들 세비나 올리자고 그런 거나했지, 피 뿌림하자, 뭐 이런 것은 안 한다 이 말이죠. 

  

다시 정리해보면 하나님나라는 없는 나라에요. 성령이 오기 전까지는. 근데 성령님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다 이루시고 성령님이 옴으로서 비로소 있는 나라에요. 성령이 오시기 전까지는 없는 나라에요. 그럼 성령이 오시기전까지는 무슨 나라가 있습니까? 성령이 오지 않으면 뭐가 있느냐 하면 천국이 있죠. 하나님나라가 있죠. 왜? 가짜니까. 

  

그 천국, 하나님나라는 어떤 대안입니까? 세상나라가 너무 힘드니까, 죽어서 좋은데 가자고 제시한 대안이, 성령 없는 상태에서 주어진 천국과 하나님나라의 개념이라 이 말이죠. 중간에 뭐가 빠졌죠? 성령 빠졌죠. 또 뭐가 빠졌죠? 성령 빠지면 뭐가 빠진다고 했어요? 피 뿌림 빠지죠. 피 뿌림 빠지고. 그 피가 우리 피 입니까?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예수님 피 뿌림 빠지고 성령 빠져버리면 이 세상에 있는 것은 뭐냐 하면 종교적인 나라, 천국밖에 없어요. 하늘나라. 거기에 뭐 보탤까요? 삼위일체까지 보태서 삼위일체교리 이런 것 남는 거예요. 교회나. 

  

교회에서 삼위일체 가르치는 이유가 뭐냐 하면 좋은 나라 있으니까 가자는 겁니다. 그러나 성령이 와야 그 나라에 간다는 말은, 성령이 오지 아니하면 너희들이 추구하는 나라는 애당초에 그런 나라가 있었다는 말이에요? 없었다는 말이에요? 없는 거예요. 없는 거. 제가 이래 이야기하면, “그러면 성령 받으면 될 게 아닙니까?” 라고 하는데, 성령을 받는다는 말은 피 뿌림을 받은 거예요. 피 뿌림을. 

  

“그러면 피 뿌림 받으면 될 거 아니냐?”라고 하는데, “피 뿌림을 왜 받아야 하는데? 그 이유를 대봐라. 당신 피 뿌림을 왜 받아야 되는데?” 피 뿌림은 주님이 원하는 거예요? 인간들이 원했던 건가요? 주님이 원했던 거잖아요. 그러면 인간들이 원하는 것은 아니죠. 그러니까 인간들이, 본인이 원하지 않은 것을 원할 리가 있느냐 이 말입니다. 평소에 교회에 가서 주시옵소서! 라고 원할 때, 본인이 원하는 것을 주시옵소서! 라고 해요. 본인이 원하지 않는 피 뿌림 주시옵소서! 라고 하지는 않는다 이 말입니다. 

  

피 뿌림을 달라고 할 때는, 피라고 하는 것은 제가 주일 낮에 설교한 것처럼 그냥 피를 한바가지 들고 온 게 아니잖아요. 피가 발생되려면 그 현장에 누가 있어야 돼요? “당신은 우리가 원하는 메시야가 아니요.”라는 그 요소가 집어넣어져야 피 뿌림이 돼요. 예수님 등짝이 채찍 맞았잖아요. 그럼 등짝이 채찍 자국이 나려면 누가 있어야 돼요? 때리는 자가 있어야 되죠. 그럼 누가 때렸겠어요? 인간들이 때렸잖아요. 인간들의 원함이 때렸다고요. “우리가 원하는 것을 달란 말이야!”라고 때린 것이 채찍이라 이 말이죠. 

  

주님이 그 채찍을 맞고 등장했다는 말은, 일체 우리가 원하는 것을 제공한다? 안 한다? 제공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논리가 따지고 보면 간단한 논리에요.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익히 아는 것을 요구해요. 익히 아는 것을 요구한다고요. 만약에 여기에 있는 물이 다 떨어졌으면 물 달라고 하잖아요. 그러면 그전에 뭐가 있었다? 물이 있었다. 물이 있었는데 물이 없다는 뜻이잖아요. 그래서 자, 물 여기 있다고 주잖아요. 

  

피라는 것이 하나의 물건이라면, “어! 피 없이는 천당 못 가니까 피 주세요.” “피 여기 있다.” 마치 물처럼. 그렇게 제공되는 것이 아니다 이 말입니다. 왜냐하면 피라는 것은 어떤 요소가 거기에 반드시 섞여 있어요. “당신이 싫단 말이야. 나는 예수가 싫어. 나는 내가 좋아. 예수와 나 사이에서 내가 더 좋고 나는 예수 싫어.”라는 요소가 가미될 때 피가 나오는 거예요. “니 나쁜 놈 맞지?” 이래야 피가 나온다 이 말이죠. 무슨 논리인지 아시겠죠? 

  

제가 계속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뭐냐 하면 인간나라에는 하늘나라 있고, 천국 있고, 삼위일체 있는데 정작 뭐는 없다? 진짜 하늘나라는 없다는 말을 계속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성령이 없으니까. 그러면 성령이 나타날 때 비로소 있는 거예요. 그분이 가시면 또 다시 없는 거예요. 바람을 어떻게 보자기에 담습니까? 바람을 못 담잖아요. 성령은 마치 그대 이름은 바람, 바람, 바람이라니까요. 그대 이름은 바담, 바담, 바담, 바람도 아니고 바담이에요. 왔다가 그 다음에 뭡니까? 왔다가 가버리는 바람이라니까요. 어? 가시면? 내가 쥐어야 하는데? 성령은 처음부터 우리가 쥘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에요. 

  

하나님은 우리를 붙잡을 수는 있어도 우리는 하나님을 붙잡지를 못합니다. 왜? 너무 빨라서. 날아가는 총알을 잡으라고 하세요. 못 잡습니다. 잡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신앙생활은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하는 거죠. 신앙생활은 당하는 거지 내가 계획 잡고 추진하는 것이 신앙이 아닙니다. 그냥 당하는 거예요. 마치 강간당하는 것하고 똑같아요. 강도당하는 것, 강간당하는 것하고 똑같아요. 

  

그 성령이 오심으로서 비로소 하나님 백성이 발생되었습니다. 그 백성들에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인간나라라는 개념이 등장하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나라는 우리나라 아니에요. 우리나라는 아니지만, 우리가 거기에다가 신경 쓸 문제는 아니지만, 필요에 의해서 하나님께서 허락한 나라에요. 나중에 소멸될 거예요. 예를 들면 결혼식을 하는데, 예식장 같은 겁니다. 그 예식장 한 모퉁이에다가 살림 차립니까? 아니죠. 

  

그냥 예식 하는 장소잖아요.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아가는 장소지, 거기에 머물러서 거기서 살림 차리고 거기서 살라고 하는 것이 예식장이 아닌 겁니다. 한 30분하고 빨리 밥 먹고 떠나야 돼요. 빨리 비워줘야 뒤에 있는 사람이 주례하니까, 빨리 비워줘야 하잖아요. 그래야 뒷사람이 예식 하니까. 대한민국에 살면서 늙어죽으면 대한민국을 떠나야 되죠. 왜? 어차피 우리의 본향이 아니니까. 잠시 머물다가 가는 나라기 때문에. 

  

그런 나라 같으면 우리가 신경 안 써도 되는데, 오늘 본문에 인간에 세운 제도, 내 나라 아닌 나라, 내 나라 아닌 국가에게 주를 위하여 순복하되, 주를 위하여 순복하라는 이 말은 주님의 필요에 의해서 이 나라가 있어야 했다는 것을 니가 받아들이라 이 말입니다. 니가 내 백성이라면 주님이 의도해서 생긴 나라에 대해서 니가 그걸 막 무시하고, 이런 나라를 왜 주십니까? 라고 할 그럴 필요는 없다 이 말입니다. 

  

하나의 예를 들어볼게요. 북한에 신자가 있는지는 모르겠어요. 저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북한지하교회에 있는 신자가 들었으면 또 개무시 한다고 하겠는데, 없다고 봅니다. 만약에 신자 하나가 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김정은 정권에 대해서 순복해야 될까요? 말아야 될까요? 질문은 간단한데요. 수능처럼 다섯 문제가 아닌데요. 달랑 두 개인데요. 순복해야 될까요? 말아야 될까요? 틀려도 벌금 안 냅니다. 순복해야죠. 순복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김정은을 세운 것은 주님이 세웠지, 악마가 세운 것이 아니기 때문에 순복해야 돼요. 그걸 왜 순복해야 되는가, 이제부터 그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여기에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복하되, 순복하는 이유에 대해서 베드로 사도는, 주님께서는 국가를 긍정적으로 봐요. 꼭 필요하다는 쪽으로 봐요. “더러운 이 세상, 불심판 받을 이 세상, 꺼져라!”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그게 반드시 꼭 필요해서 주께서 주셨다는 겁니다. 

  

이 대목을 이야기할 때 여러분들이 항상 같이 봐야 될 유명한 대목이 바로 로마서 13장에 나오죠. 오늘 그 대목이 아니기 때문에 제가 살짝 읽고 그냥 지나가겠습니다. 1절,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 2절,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리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림이니 거스리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3절, “관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 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 이래 되어 있어요. 

  

지금 이 로마서 13장의 이야기는 베드로전서 2장의 이야기와 같은 취지로 이야기하고 있죠. 그러면 우리가 이 제도를 알기 위해서는 국가의 제도, 국가의 역사, 뭐 이런 것을 다 알아야 됩니까? 정치사까지 다 거론해서 알아야 됩니까? 뭐 이런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할 수 있는데, 저는 간편하게 가겠어요. 간편하게 갑니다. 간편하게 가는데, 뭘 끄집어내느냐 하면은, 아까 로마서 13장에도 나오고 하지만, 여기에 인간에 세운 제도에 순복하되, 라는 것에 뭘 쓰고 싶은가 하면은 이걸 쓰고 싶어요. “권세” 

  

권세라는 말을 했거든요. 권세라는 그것을, 하나님의 권세를 미리 이 땅에서 체감하도록 해줍니다. 일단은 권세가 성립이 되려면, 인간이 제멋대로 살 권세를 허용하지 않을 권세를 이 세상 왕들에게 주었다. 정치가들에게 주었다. 이래 보시면 되는 겁니다. 제멋대로 살아가는 것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거예요. 

  

그러면 인간의 몸이 왜 럭비공처럼 어디로 튈지 모르는 제멋대로이냐, 그거는 우리가 애 키워보면 알겠죠. 왜 제멋대로인지. 상황판단이 안 되죠. 애를 키울 때에 애들의 특징은 권세라는 것을 처음 어릴 때는 몰라요. 권세는 몰라요. 모르고, 뭐는 아는가 하면은 이 몸이 원하는 대로 지금 움직인다고요. 원하는 대로. 

  

그러니까 권세가 있다는 것은 뉘앙스가 무슨 뉘앙스냐 하면, 취지가 인간의 몸은 그냥 방치대상이 아니라는 뜻이에요. 인간은 정상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근데 인간의 그 몸 안에 권세와 관련된 사항이 있어요. 굉장히 복잡해지죠. 하나님이 지상의 인간들을 다스리기 위해서 권세를 주었다는 말은, 권세부리는 그 권세의 내용과 인간의 몸에 장착된, 인간의 몸을 움직이는 그 욕망의 원리와 관련성이 있다는 이야기에요. 연관이 있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서 식물이나 사료 주는 동물 같은 경우에, 콩나물은 물만 주면 돼요. 그것도 좋은 물 줘야 하고. 이 화초 같은 것은 물을 주면 크잖아요. 그죠. 꽃을 키우는데 애를 먹는다. 이런 일은 별로 없어요. 꽃 키울래? 애 키울래? 하면 꽃 키운다고 하죠. 꽃은 점잖잖아요. 가만히 있잖아요. 때 되면 꽃 피고 묵묵히 자라고. 

  

애는 천방지축이라니까요. 어디 가면 불인지 물인지, 2층인지 3층인지 분간도 못하고. 어떤 애는 9층에서 놀다가 겨우 살고. 베란다에 올라갈 때 할머니는 뭐 했느냐, 애가 자고 있는 줄 알았다는 거예요. 애가 잠에서 깨서는 할머니 일어났다고 이야기해야 되는데 그게 아니고, 잠에서 깨어났으니까 또다시 몸의 본능은 작동해가지고 하늘이 보고 싶었던 모양이죠. 그래서 창문열고 바깥에 나간 거예요. 9층에서. 

  

다시 이야기할게요. 권세라는 요소가 인간의 몸의 요소와 관련성이 있다는 겁니다. 근데 권세라는 것은 다스리는 용도거든요. 뭔가 통치하는 용도. 지배하는 용도라는 말이죠. 그러면 개인적으로 개인의 욕망을 다스릴 수 있다는 말이에요? 없다는 말이에요? 없다는 말입니다. 개인은 개인적으로 다스릴 수가 없다. 인간이 갖고 있는 욕망은 인간의 사적인 욕망보다 더 크다. 더 힘이 세다. 이래 보시면 되는 겁니다. 

  

여기에 두 사람이 있다고 봅시다. 두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은 키가 190센티미터고 덩치가 120킬로그램 나간다. 근데 이 사람은 몸무게가 35킬로그램이고 나이도 많고, 나이가 70세다. 근데 술 먹고 와서 때려버리니까 죽었다 이 말이죠. 얼마 전에 있었던 사건인데, 폐지 줍는 할머니 맞아서 죽었죠. 살살 때렸는데 죽은 거예요. 힘이 셌으니까 죽은 거예요. 그럼 여기 있는 이 사람의 욕망이 있죠. 술 먹겠다는 자체가 욕망 아닙니까? 술 먹고 때린 자체가 욕망이잖아요. 그럼 여기 이 사람의 욕망은 폐지 주워서 살겠다는 욕망이죠. 그게 한 순간에 맞아죽음으로서 끝났죠. 그럼 이 사람이 뭐가 되느냐 하면은 욕망의 희생물이 되는 겁니다. 욕망의 희생물, 악의 희생물이 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두 종류의 희생물을 나누고 있습니다. 첫째는 악의 희생물, 두 번째는 하나님의 의의 희생물. 악의 희생물, 의의 희생물의 공통점이 있어요. 둘 다 사적으로는, 개인적으로는 조절이 안 돼요. 조절 안 됨. 둘 다 개인적으로 조절이 안 되는 상태입니다. 자, 오늘 제목을 ‘희생물’로 하겠는데요. 자, 이 희생물이 나왔다는 것은 이 세상이 이미 희생물을 낳게 하는 요소가 작렬하고 있다는 뜻이죠. 희생물이. 

  

그럼 결국 희생물이 되었다는 것은 죽었다는 뜻이잖아요. 주님께서는 하나의 죽음만 원해요. 하나의 죽음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와 다른 성질의 죽음을, 하나의 의로운 죽음을 위한 예비단계로서 다른 죽음과 차별화시키려고 애를 쓰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시도하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나중에 연세가 많으면 죽잖아요. 그럼 죽음이죠. 그 죽음이 뭐라고 했습니까? 희생이죠. 

  

그럼 여러분이 죽는다면 그거 왜 죽어요? 의의 희생물이에요? 죄의 희생물이에요? 죄의 희생물이죠. 죄의 값은 사망이기 때문에 죄의 희생물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멀쩡하게 살아있다고 거기에 모든 의미를, 가치를 종결시키면 안 돼요. 계속 변화되어 가고 있어요. 어디로? 죄의 희생물로. 죄가 우리보다 더 세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창세기 2장에서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당부한 법이 있죠. 선악과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했죠. 하나님의 선악과를 건드린 대가는 죽음으로 오는 겁니다. 죽음으로 와요. 그렇다면 선악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는 이 문장, 이 명제, 보다 확실한 진리체계, 그 진리체계를 분명하게 실시한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뭐가 필요 하느냐 하면 인간이 필요하고 인간의 제도가 필요했던 겁니다. 그리고 주님이 필요하고.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벌일 때는 그걸 하나도 버릴 것이 없이 다 필요해요. 창세기 4장을 한번 봅시다. 가인과 아벨, 두 형제가 있죠. 둘 다 욕망을 갖고 있어요. 근데 어느 욕망이 더 셌느냐 하면은 가인 욕망이 아벨 욕망을 덮쳐서 이겼습니다. 죽였습니다. 그러면 아벨은 악의 희생물이 된 겁니다. 

  

그렇다면 가인을 어떻게 처리하느냐, 그렇다고 죽여 버릴까요? 가인은 그냥 죽이지 않아요. 그냥 죽이지 않고 가인이 번창하게 만들어요. 번창하게 만들어서, 그 속에서 악의 구조가, 악이 어떻게 체계적으로 구조화되느냐를, 거기다가 시간요소를 집어넣어서 악의 정체를 분명히 밝힙니다. 밝혀보면 가인의 7대손인 라멕이 나오죠. 라멕이 뭐라고 합니까? 자기 자신의 가치를 위해서 자기 아내가 둘이 있었는데, 아내 둘에게 하는 말이 나를 조금만 건드리면 죽여 버리겠다는 식으로, 그게 마치 자랑인양 그렇게 하는 겁니다. 

  

그게 권세에요. 이 땅의 권세의 정체에요. 상당히 권세가 긍정적이에요? 부정적이에요? 상당히 부정적이죠. 부정적인데, 그 부정적인 권세가 완전히 어디서 몰살을 당하느냐 하면 창세기 6장에서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약속한 홍수를 내려버립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보세요. 하나님께서 홍수를 내리는 이유가, 창세기 6장에 보면 죄가 관영하기 때문에 홍수를 내린다는 겁니다. 죄가 관영하기 때문에. 

  

그럼 죄가 관영하게 되면, 아까 논리에 의하면 죄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뭐가 있느냐 하면 희생자가 있죠. 그럼 그 희생자가 누구죠? 노아는 은혜를 입었더라. 이 노아잖아요. 노아와 가족이죠.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무슨 일을 할 때 하나도 버리지 않아요. 요모조모 다 쓸모 있게 하십니다. 무엇을 보호하기 위해서 심판을 내리신 겁니까? 결국 노아를 부각시키기 위해서 심판을 내리고, 노아는 뭐냐 하면 그 당시 당대에 악의 희생물로서 드러나게 하시는 거예요. 

  

그러면 뭐 해답은 다 드러난 거죠. 두 가지 종류의 권세가 있다고 했죠. 하나는 뭐냐 하면 의를 위한 희생, 또 하나는 죄를 위한 희생. 이 두 가지가 병행해서 하나님의 의의 희생물을 드러내는 겁니다. 다시 한 번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의라는 것은 반드시 죄가 없는 곳에는 의가 등장하지 않습니다. 죄의 희생물이 없는 이상은 하나님의 의의 희생물이 등장하지 않아요. 이 죄악 된 세상에서 하나님나라의 언약이 뽑혀져 나오려면, 반드시 이 세상이 부정적인 역할을 충실하게 해줘야 해요. 

  

자, 다시 본문 베드로전서 2장 13절로 돌아가 보면, 그렇다면 인간이 세운 제도, 인간이 세운 제도라고 해서 이거는 하나님이 좋아하는 제도는 아니라는 뜻이겠죠. 인간에 세운 제도에 순복하라고 했다고요. 그러면 뭘 남기기 위함인가, 결국 이거는 희생물을 내가 만들어내겠다는 거예요. 세상권세를 통해서 희생물을 만들어내겠다. 국가권세는 죄인에 대해서 강렬하게 처벌하고 의인에 대해서는 포장, 또는 포상하는 제도 때문에 생겼다고 이야기해요. 

  

그럼 그 제도가 천국까지 계속 이어집니까? 안 이어집니까? 안 이어지죠. 그럼 중간에 왜 그렇게 건전한 의도가, 보람된 일을 하는 제도를 천국에서는 용납하지를 않는가? 왜 연속성이 끊어져있는가? 그 자체는 뭐냐 하면 인간이 세운 제도 그 자체에서 인간이 세웠다는 이유 때문에 한계성을 갖고 있어요. 

  

그 한계성이 18절에 나옵니다. 18절,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복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19절,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20절,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이래 되어 있죠. 

  

지금 이 이야기를 보게 되면 악한 자에게 벌을 주고 착한 자에게 포상하는 일을 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하늘나라에 갈 수 있는 요건이 충족이 될까요? 안 될까요? 안 된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애매하게 고난 받는 사람들만 천국가요. 애매하게 고난 받는 사람만. 애매하다는 것은 억울하다는 뜻이죠. 억울하게, 아까 이야기한 희생물입니다. 

  

20절에 봅시다. 20절,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이래 되어 있단 말이죠. 쉽게 합시다. 개인에게 욕망이 있어요. 어느 개인도 자기 욕망을 못 이깁니다. 그리고 그 욕망은 긍정적이 아니고 부정적이에요. 인간의 몸은 지 맘대로 해요. 지 맘대로 하는 인간이 영원한 나라, 주님의 나라에 간다는 것은, 사실은 이건 허용될 수 없는 겁니다. 허용될 수 없는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지금 천국에 보내려고 해요. 

  

그러면 그 사람에게는 두 개의 성격이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돼요. “하나님나라는 어떻게 들어갑니까?”라는 말 자체가 성립이 안 돼요. 그럼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어떤 모습을 띱니까? 이 땅에서 그리스도 때문에 고난 받는 경우를 당할 경우에만 하늘나라에 갈 수가 있습니다. 21절을 한번 봐요.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자,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예수님에게 권세를 행사한 자가 누굽니까? 천사들이에요? 아니면 세상 권세자들입니까? 세상 권세자들이잖아요. 그럼 주님께서 천사를 보내가지고 “빌라도 이리 나와! 바리새인들 나와! 너희들은 다 죽었어!” 이렇게 했을까요? 아니죠. 만약에 어떤 강도가 있는데 경찰이 강도를 잡을 때, 강도가 하는 말이 “어이, 경찰! 니는 죽어서 천당 가나? 못 가나? 천당도 못 가는 주제에 나를 왜 잡느냐?”라고 하는 이 말이 정당성 있다고 할 수 있습니까? 없죠. 

  

그래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죄가 있어 매를 맞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라고 한 거예요. 근데 인간들은 기본적으로 착한 일 해서 매를 맞지 않고 매 맞을 경우는 대부분이 뭡니까? 매 맞을 짓을 해서 매 맞아요. 매 맞을 짓을 해서. 따라서 매 맞을 짓을 해서 매 맞으면, ‘아, 내가 매 맞아도 마땅하구나. 지옥가도 마땅하구나.’라는 것을 누가 알려주는가? 하나님께서 주를 위해서 세운 권세자들이 그 역할을 하라 이 말입니다. 

  

권세자들이 하는 일이 완벽하고 철저하고 하나님 앞에 너무나 멋지다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고, 한계를 갖고 있다니까요. 그래서 인간이 세운 제도에요. 인간이 세운 제도는 있되 불필요한 것은 아니다 이 말이죠. 뭐냐 하면 인간이 갖고 있는 욕망은, 이거는 짐승과 같은 욕망이기 때문에 팰 때는 패야 된다 이 말이죠. 팰 때 패야 되고 상 줄 때 상 주는데, 상 받았다고 천당 가는 것도 아니고, 맞았다고 해서 천당 가는 것도 아니고, 그런 거예요. 맞았다고 해서 또 지옥 가는 것도 아니고. 

  

어쨌든 간에 하나님께서는 권세자를 통해서 철저하게 인간은 근원적으로 악하다는 점을 인간의 권세와 결합시켜서, 분명하게 평생 동안 살면서 보여주겠다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취지입니다. 뜻입니다. 인간은 못됐다. 뭐 문재인 물러가라, 박근혜 물러가라고 하는데, 그럼 니가 한번 대통령 해보지. 지지율 몇 퍼센트가 나오는가. 지가 대통령하면 자기 아들, 친척들, 제2의, 제3의 최순실이 쭉쭉 다 딸려올 거예요. 어떤 인간도 한계가 있기 때문에 뭘 증거를 잡아도 반드시 부정부패가 다 있기 마련이에요. 

  

근데 그 부정부패가 있는 것이 어떻게 나를 유치장에 집어넣느냐? 그런 소리는 하지 말라 이 말이죠. 그거는 누가 할 소리냐 하면 의인이 할 소리에요. 예수님만 할 소리지, 죄지은 것밖엔 없는 인간이 같이 죄를 다스리고 있는 권세자보고, “니 나보다 착하냐? 판사 니 나와!” 이런 식으로, “판사 니는 바람 안 피웠어? 판사 니는 뭐 어떻게 아내한테 폭행 안 휘둘렀어?” 이런 식으로 판사한테 대드는 것이 아니에요. 판사는 공연히 칼을 가진 것이 아니고 공연히 권세를 가진 것이 아니다 이 말이죠. 

  

이야기가 굉장히 복잡해졌는데, 간단히 하면 이렇습니다. 구원받는 사람은 없어요. 없는데, 권세자에 의해서 착하면 상 받고 나쁘면 매 맞는데, 그 매 맞는 가운데 애매하게 매를 맞는 경우가 발생하도록 주께서 살짝 집어넣는 거예요. 예를 들면 광주사태라고 봅시다. 광주사태 때 시민군 제압했던 부대가 공수부대죠. 자, 내가 공수부대의 중사다. 하사관이다. 그래서 이 빨갱이 새끼들이라고 막 팼다 이 말이죠. 데모하는 학생들 빨갱이 사주 받아서 했기 때문에 다 죽어야 된다고 해서 총검으로 패고 총으로 죽이고, 빨리 제압 안 하면 니가 죽는다고 해서 자기도 살기 위해서 제압할 수밖에 없죠. 안 그러면 자기도 총 맞아 죽으니까. 군대는 명령이 아닙니까? 

  

그래서 어떤 애를 때리고 보니까 안면이 있는 거예요. 뭐 자기 조카라. 이래 나온 거예요. 애매하게 맞았죠. 애매하게. 근데 맞은 애가, 뭐 그럴 리가 없겠지만 자기 아들이다. 그러면 진짜 자기 아들이, 무조건 다 때리는데 무작위로 때릴 때 자기 아들이 맞아서 죽었다고 하면, 그 사람은 계속 그 직위에 있겠습니까? 사표 내겠습니까? 사표 내겠죠. 자기 부인이 가만히 안 두죠. “니 이래도, 내 아들 죽인 일을 계속 할래?” 사표 내겠죠. 

  

사표 왜 내요? 내가 하는 일이 옳았는데, 옳다고 생각하는 그 안에 뭐가 들어있었다? 이게 치지 말아야 될, 죄가 없는 사람까지도 내가 쳐서 뭘 낳았느냐 하면 희생물을 낳은 거예요. 이 제도의 한계를 확연하게 드러내주는, 인간의 한계를 드러내주는 희생물을 그만 희생되게 만들어버린 겁니다. 

  

강릉의 ktx직원이 마이너스 플러스를 잘못 연결해서 기차가 철로에서 탈선했어요. 철도회사 사장이 그렇게 했습니까? 사장이 잡고 기어가서 이렇게 했습니까? 사장은 서울에 있었다고요. 자기는 구경도 못했다고요. 비전문가니까. 철도회사에 낙하산인사로 들어왔으니까. 근데 사표는 누가 냈습니까? 자기가 사표 낸다고요. 구경도 못했는데. 케이블이 뭔지도 모르는데 왜 사표를 내요? 상식이 이상하잖아요? 

  

그게 권세기 때문에 그래요. 권세기 때문에. 왜냐하면 케이블 고장 난 문제는 개인과 개인의 문제지만, 권세는 개인과 개인의 레벨을 능가하는, 넘어서는 책임자로서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철도공사 사장이 직원들 다 쫓아다니면서, “이걸 이렇게 바꿔야 된다. 전부 다 기차사고 나야 된다.” 이렇게 했습니까? 아니죠. 훈계를 얼마나 했겠어요. “정신 바짝 차리고, 인원수 적더라도 국민의 안전은 여러분 손에 있습니다.”라고 얼마나 했겠어요. 지 할 도리는 다 했죠. 근데 바꿔서 연결했다 이 말이죠. 근데 지가 사표 냈다 이 말이죠. 

  

억울한 일을 당하고 희생물로 당했을 때는, 그 희생물에 대해서 권세자가 권세로 덮어야 될 위치에서 그 희생물로 인하여 권세가 찢어진 거예요. 온전한 권세가 되지 못하고 찢어진 거예요. 다음 철도공사 사장이 오면 제일 먼저 뭘 하겠어요? 우선 부상을 입은 부상자들에게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고 해가지고, 희생물이 등장한 이것이 사실은 우리의 한계를 드러낸 의로운 것이라고, 사장이 먼저 수긍하고 인정하고 들어가야 돼요. 인정하고. 권세라는 게. 

  

자, 그럼 하나의 예를 들어봅시다. 이런 겁니다. 박정희 정권시대 때에 간첩도 아닌데 고문해서 간첩이라고 해가지고 사형을 시켜 놨다 이 말입니다. 죽어버렸어요. 나중에 조사해보니까 이 사람은 무죄에요. 그럼 누가 사과해야 합니까? 대통령이 사과해야 되겠죠. 지금은 사과 안 하지만 나중에 정권 바뀔 때 다음 대통령이 대통령 입장에서 사과하겠죠. 

  

이 말은 뭐냐 하면 애매하게 고난 받는 것에 대해서는 모든 권세의 위쪽에서, 그걸 초월한 새로운 권세가 등장해야 하는 거예요. 그것 때문에 잘난 사람에게 상주고 못난 사람에게 벌주라는 그러한 하위권세, 하급권세를 주께서 허락하신 겁니다. 이제 아시겠죠. 어차피 성도는 그걸 뚫고 올라가야 하니까. 그 두꺼운 권세도 뚫고 올라가야 하니까. 

  

자, 북한에서 어떤 사람이 예수를 믿는다. 그러면 김정은이가 예수 믿지 말라고 했어요. 예수 믿지 말라고 하는 이 말이, 실제로 예수 믿지 말라고 이야기하겠어요? 물론 종교는 그러한 하나의 미신이라고 뭐 그런 요구는 하겠지만. 노골적으로 예수 믿지 말라고 하면 김정은이가 종교박해자로 걸려가지고 또 비난받고 그러니까 노골적으로 그런 이야기는 안 하죠. 예수 믿지 말라고 하면 평양에도 뭐가 없어야 돼요? 평양교회도 없어야 되잖아요. 근데 교회 있잖아요. 

  

그러니까 예수 믿는 게 누가 믿으라고 해서 믿고 믿지 말라고 해서 안 믿는 거예요? 아니죠.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에게 예수 안 믿었으면 좋겠다는 식으로 뉘앙스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눈치도 없이 그냥 성경책을 보고 있다. 그러면 그 사람이 예수 믿는 것 가지고 시비를 걸까요? 아니면 나라에서 금하는 성경책을 가지고 있다는 것 때문에, 그 불온서적 때문에 금할까요? 불온서적 때문에 금하겠죠. 불온서적 때문에. 

  

그런 것이 뭐냐 하면 북한은 전지전능한 권세도 아니면서 전지전능한 권세를 흉내 내는 겁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그것 때문에 세상권세가 지옥불에 가요. 지옥에 간다니까요. 다 덮을 수 없어야 되는데 건방지게 덮는다고 여기는 거예요. 모든 인간은 이 국가의 권세 아래 있다고 까불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이 성경말씀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예수 믿고 바르게 살라고 하는 것을 요구하지 않고요, 뭘 하느냐 하면은, 첫째시간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대목입니다. 두 개에요. 성경이 바르게 살라고 하는 게 아닙니다. 바르게 살라고 한 게 아니고, 뭐냐 하면 희생물이 되라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 본성상 어느 쪽을 더 하게 될까요?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으로서 어느 쪽이 더 가까울까요? 선악을 따먹었기 때문에 우리는 날이 갈수록 자기가 대단하고 가치 있고 이렇게 훌륭하고 우수한 존재인 것을 과시하고 싶은 거예요. 우리는 바르게 살고 싶은 거예요. 그런데 희생물이 된다는 것은 너무 억울하지 않습니까? 근데 희생물이 뭘 희생하느냐 하면은, 내가 죄지어서 희생하는 것은 희생물로 취급을 안 해요. 죄지어서 하는 것은 매 맞아도 마땅하죠. 그런 것 때문에 세상권세가 있으니까. 

  

이 희생물은 뭐냐, 자기 의가 희생이 되어야 해요. 자기 의가. 그런데 교회에서나 사회에서는 뭐냐, 의로우면 무슨 값을 하냐면 의로운 값을 내고 꼭 티를 내요. 의로운 값을 낸다고요. 

  

오늘 십자가마을에 늘 하시는 분 말고 다른 분이 질문을 올렸죠. 성령을 소멸치 말라고 하는 내용에 대해서 올렸는데, 그래서 거기에 대한 답변을 해드렸고요. 다시 두 번째 댓글을 달았어요. 자기는 선교단체에 있는 학생이라는 겁니다. 선교단체에서 아무리 시키는 대로 오래해도 이건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거예요. 그래서 답변에 대해서 너무 어렵다고 ㅠㅠ하고 막 해놨어요. 저는 무지무지하게 쉬운데. 

  

왜 어려우냐 하면은 자기가 희생물이 되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의롭게 되려고 하는 거예요. 하나님 안 믿다가 지금은 하나님 믿었으니까, 안 믿었을 때보다 지금 더 월등하고 우수하고 훌륭하고 의로운 사람이고자 그걸 목표로 잡은 거예요. 목표로. 그걸 목표로 잡다보니까 자기가 쌓아놓은 선이 아까워서라도 희생되는 것에서 점점 더 멀어지는 거예요. 

  

사람이 서른 살 되기까지 얼마나 힘들게 삽니까? 근데 스무 살에 살았던 그 모든 가치가 날이 갈수록 다 허물어진다면, 그거는 서른 살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는 거예요. 점점 더 멀어져가네~~ 점점 더 멀어져가는 거예요. 그 고왔던 시절, 최정점의 시절, 잘났던 시절, 자기가 점점 더 망가지고 있는 거예요. 가장 희생물이 되기 싫다는 가장 극단적인 선택이 자살입니다. 

  

자살은 왜 하느냐, 죽으면 죽었지 누구의 희생물이 되는, 이 의가 아까워서라도 나는 못 죽는다. 이 의를 품고 죽을란다. 나 아직도 열두 척의 배가 있다. 나의 잘남을 내 목숨을 바쳐서라도 사수하겠다. 이게 무슨 희생자입니까? 이게. 이게 무슨 희생자에요? 그 사람은요, 세상이여! 나를 좀 알아달라고 그거 하소연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의롭게 되려고, 선하게 되려고 선을 자기의 이상적인 목표로 자꾸 내세워요. 이왕 사는 거 짐승처럼 살 필요가 뭐가 있느냐, 천사처럼 사는 것이 내 목표다. 그게 잘못된 거예요. 그 목표가 마귀의 목표에요. 왜냐하면 선악의 체제에서 벗어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선악체제를 자기의 유일한 인생으로 굳히는 계기가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착하면 복 받겠지. 나쁜 일하면 벌 받고 착한일하면 복 받겠지. 이왕 착한 것 복 더 받기 위해서는 철저에 철저를 기하고 조심스럽게 행동해서 하나라도 허점이 없이 반듯하게, 누가 털어도 먼지하나 없이 깨끗하게 살고 싶다. 근데 먼지 없으면 사람이 죽어요. 먼지가 없으면 우리 속에 있는 면역체계가 할 일이 없고, 박테리아가 할 일이 없는데요. 깨끗하게 살면 사람이 표백상태에 들어가서 죽게 됩니다. 뭐든지 깨끗하면 죽어요. 

  

전에 제가 오후설교 때 했죠. 히틀러가 깨끗한 나라 만들기 위해서 다 죽여 버렸잖아요. 저능자, 여호와증인 그리고 정박아들, 미쳐 보이는 이런 사람들 다 죽었습니다. 부랑자들, 노숙자들. 우리는 더러운 것 없다. 북한도 다 죽여 버렸잖아요. 죽이든지 안 그러면 요덕수용소에다가 다 집어넣었어요. 그래도 우리나라는 너무나 백퍼센트 행복한 나라기 때문에 거지가 있을 리가 없다는 거예요. 다 죽여 버렸으니까 있을 리가 있어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이 세상 인간이 세운 제도 자체를 백퍼센트 절대화시키겠다는 겁니다. 절대화시켜서 이 자체를 하늘나라로 삼겠다는 겁니다. 제가 이런 말을 할 때 북한에는 강도도 봐준다는 이런 말을 하면 안 돼요. 북한도 철저하게 나쁜 짓 했을 때 처벌하는 제도가 있고, 한국도 마찬가지고, 히틀러도 마찬가지에요. 도둑놈을 잘했다고 해주는 나라는 아니에요. 전부 다. 선한 자에게 상을 줘요. 열심히 공부 잘하고 희생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는 사람에게 주는 효도상이 북한에도 있습니다. 잘해줍니다. 하지만 그들의 한계를 그들이 모른다는 게 문제거든요. 그건 10분 쉬고 합시다.

 이미아 (IP:122.♡.170.138)18-12-17 22:42 
서울의존강의20181214b 베드로전서2장 13-20절(희생물)-이 근호 목사 

  

첫째시간에서 상당히 중요한 것은 뭐냐 하면 사람들은 자기를 미워하고 자기 가치를 극대화시키려고 애쓰지, 애매하고 억울한 일을 당하려고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근데 인간이 자기 가치를 극대화하는 거나 권세가, 권세자들이 자기 가치를 극대화하는 거나 똑같은 속성이잖아요. 똑같은 의도잖아요. 그런 사람이나 그 사람이나 전부 다 똑같은 사람들이에요. 뭐, 가치를 높이겠다는 거예요. 

  

그러나 구원받는 사람은, 그런 자아의 가치, 자기 권세의 가치를 높이려는 그런 사람들의 틈바구니에서 비로소 없던 백성이 등장하는 겁니다. 애매한 고난, 억울한 죽음을 당하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은 것이 나쁜 사람에게 죽었습니까? 착한 사람이라고 자인하는 사람들에게 죽었습니까? 자처해서 천하에 최고의 선한 사람에게 죽었잖아요. 누구든지 바리새인보다 더 의가 낫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간다고 할 정도로 바리새인들은 다른 어떤 누구하고 비교해도 월등한 선과 의로움과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이라 이 말이죠. 그 사람이 가장 악마적이었다는 겁니다. 너희 애비는 악마라고요. 

  

왜냐하면 아무리 가치를 높여봐야, 높이면 높일수록 점점 더 뭐가 힘들어지느냐 하면은 너무나 귀하고 귀하기 때문에 이 귀한 것을 스스로 쓰레기취급하기에는 점점 더 멀어지는 거예요. 아까워서라도 못 버려요. 아까워서라도. 이만한 경건, 거룩을 유지하고 키우는데 얼마나 내가 조심스럽게 살아왔는데 졸지에 나보고 죄인이라고? 니가 죽어라! 이래 나온다고요. 

  

복음 앞에서 누가 가장 극렬한 반대를 하느냐 하면은 자기 가치를 평소에 포기 못하겠다는 사람이 가장 극렬하게 십자가 피를 반대합니다. 그중에 하나가 권세자들이고요. 왜냐하면 우리는 바른 행동, 진리대로 잘한 자에게는 상주고 못한 자에게는 오늘 본문처럼 벌을 주는 그런 선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런 일을 한다는 자체가 곧 우리의 가치라고 인정해달라고 요구할 게 뻔하기 때문에 그래요. 

  

따라서 이 권세를 방금 우리는 세상권세로 이야기를 했는데, 세상권세 말고 세 가지 권세를 한 번 더 해봅시다. 첫째시간에 이야기한 것은 세상권세죠. 세상권세는 선악의 기준에 의해서 선한 자에게 상을 주고 악한 자에게 벌을 주는, 선악체제의 최고의 구현체죠. 구현체. 구현체입니다. 그런데 이 국가권세 말고 다른 세 가지 권세는, 교회권세, 그 다음에 직장권세, 가정권세, 가정권세는 고린도전서 11장에 나와요. 교회권세도 나오고. 

  

직장권세를 예를 들어봅시다. 가정권세는 에베소서 5장에 있고 직장권세는 에베소서 6장에 있네요. 아까 쉬는 시간에 좋은 이야기가 나왔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 분명히 계약을 할 때 화요일에 쉰다고 했는데 한 사람이 나가고 난 뒤에 못 쉰다는 겁니다. 사람 더 못 뽑겠다. 여기서 더 뽑으면 적자가 더 난다. 니가 다 하라고 할 때에 그 총괄하는 사람이 사범으로 취직한 그분에게 예수 믿지 말라고 합니까? 어떻습니까? 

  

예수 믿지 말라고 이야기를 해요? 아니면 우리영업에 방해하지 말라고 하는 겁니까? 어느 쪽입니까? 영업에 방해하지 말라는 거죠. 왜냐하면 직장에서의 선은 수익이 창출되는 것이 선이고 손해나는 것이 바로 악이 되는 거예요. 선악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식으로 항상 모양이 바뀐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겁니다. 사업을 하는 사람에게 선과 악은 수입이 늘어나면 선이고 수입이 줄어들면 악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예수 믿지 말라고 하는 소리는 아니라고요. 예수를 믿든 부처를 믿든 관계없이 니는 무조건 12시부터 밤 12시까지 해라. 이래 하는 거예요. 그러면 거기에 대해서 일종의 권세잖아요. 근데 거기에 취직한 사람이, 예를 들어서 그렇다면 나는 여기서 그만두겠다고 이렇게 나올 수가 있죠. “그만두겠습니다.” 그러면 총괄하는 그 사장이 “왜 그만두려고 하는데?” 답변하기를 “돈보다 더 귀한 것이 있습니다.”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사장이 “돈 싫다는 사람 처음 봤다. 갈라면 가라. 니 아니면 일할 사람 없나.” 이러거든요. 이렇게 했을 때, 뭐 어떻게 희생된 겁니까? 희생 안 된 겁니까? 그 사람이. 질문 참 어렵다. 수능 국어 31번보다 더 어렵다. 그 사람은 희생된 거예요? 희생 안 된 거예요? 희생 안 된 거죠. 왜? 그 사장이 예수 믿지 말라고 하지는 않았으니까. 사장이 예수 믿지 말라고 한 것은 아니다 이 말이죠. 근데 그 사람이 낮 12시부터 밤 12시까지 하고 있는데, 사장이 “이거 뭐야? 성경이네? 예수 왜 믿어?” 이런 식으로 나오면 이건 애매한 게 되는 거예요. 애매한 고난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 했다고, “더러워라 이거 아니면 내가 밥 먹고 못 사나.”하고 나왔다고 하면, 자기가 예수 믿는 선행을 하나 더 추가한 게 돼버려요. “더러워서 원, 내 자존심이 있지. 여기 안 다닌다.”하고 나와 버린 것은, 돈보다 예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고 돈보다 지 자존심을 선택한 거예요. “내가 더럽게 니한테 꿇릴까 싶어.” 꿇리기를 싫어하는 거예요. 희생되기를 싫어하는 거예요. 사람한테 사람취급 못 받는 것이 싫어서 사표 내던지고 나오는 겁니다. 

  

그러면 에베소서 6장에 이래 되어 있어요. 5절,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여” 6절,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 7절, “단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래 되어 있다고요. 직장생활에서.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니가 돈보고 일하지 말라는 뜻이에요. 왜냐하면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의 자존심은 뭐로 측정이 될까요? 돈으로 측정되죠. 돈으로. 돈으로 측정하면서 마치 예수복음을 위해서 사는 것처럼 그렇게 구라 떨지 말라는 겁니다. 속을 것을 속지 주님은 안 속아 넘어가요. 돈보고 하면서도 주님 앞에 희생한다고 그렇게 거짓말하지 말라는 거예요. 

  

우리는 희생할 줄 모르는 인간입니다. 희생은 주님이 알아서 희생할 뿐이지, 우리가 자진해서 희생한다는 이것은, 지 자존심을 순교라는 이름으로 안 다치려고 하는 야비한 수법에 지나지 않는 겁니다. 그리고 그 직장에서 일할 때에, “내가 이 직장에서 더럽지만 버티는 것은 내 가족들을 살리기 위해서 나 하나 성급하게 사표내면 안 되지.”라는 것입니다. 

  

이것은요, 주님의 복음을 위한 것이 아니고 가장이라는 자기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 가장이라면 가장으로서 아낌없이 내 가정을 위해서 희생하겠다고 했지만, 그 희생은 어디에 붙는 희생이냐 하면 주를 위한 희생이 아니고, 자기가 이정도로 가장답다는, 다시 말해서 희생이라는 이름으로 나의 고귀한 가치를 한층 더 높이기 위한 기회가 돼버려요. 

  

그리고 그 직장에서 상사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 9절, “상전들아 너희도 저희에게 이와 같이 하고 공갈을 그치라 이는 저희와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는 일이 없는 줄 너희가 앎이니라” 자기가 갑의 자리에 있다고 갑질하지 말라는 겁니다. 니 상전은 어디에 있다? 하나님이 앞에 계시기 때문에, 니도 니 마음대로 하는 것이 상전이 아니고 주님이 허락한 자리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아라. 니가 주님 앞에 종이라면 그런 입장에서 종들을 대하라 이 말이죠. 

  

호텔에 어떤 젊은 직원이 들어왔는데, 여자 사장이 호텔 직원하고 썸 타고 친구가 될 수 있겠어요? 없겠어요? 드라마문제입니다. 박보검정도가 되니까, 이거는 나이든 동화호텔 사장도 박보검이니까 썸 타는 거예요. 인물이 박보검이 아니면 썸 탈 일이 없죠. 이슈화되고, 우연도 뭐 쿠바 가서 만나고, 거리작품하면서 만나고, 왜 그렇게 잘 만나는지. 인연도 그런 인연이 없어요. 그래서 그 드라마에 나오는 대사가 뭐냐 하면은, 인물이 저 정도 되면 인생이 엉망이어도 괜찮지 않느냐? 라는 겁니다. 인물이 박보검정도 돼야, 아무리 송혜교지만 박보검이니까 남자친구가 되는 거예요. 

  

인간의 희생물이 된다는 것은 자신의 고유한 가치를 스스로 인정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언제 갖다가 버려도 나는 마땅한 존재입니다, 라고 하는 겁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가 마태복음이나 공관복음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과 딱 결부시켜야 해요. 그게 뭐냐 막달라 마리아의 향유입니다. 그게 비록 천하디 천한 여인이지만, 바리새인들은 그걸 보고 “아이고 저 여자가 예수님 섬기는 것을 예수님이 좋다고 받는 것을 봐라.”했습니다. 

  

옛날에 율법에 보면 더러운 여자가 더러운 물건을 만져버리면 이게 같이 부정이 전염이 되어서, 같이 더러워져서 그걸 거룩으로 바꾸려면 더 막대한 희생제물이 필요했던 거예요. 될 수 있는 대로 제사장들은 부정 타는 것을 만지지 않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그것도 모르고 질 나쁜 여자가 눈물을 쏟아가면서 자기를 만지니까, 그걸 떡하니 허용하는 것을 보니까, 바리새인들이 기가 찬 거예요. 

  

그럴 때 예수님이 뭐라고 했습니까? 이 여자가 누구보다 낫다? 너희들보다 낫다는 거예요. 너희들은 너 자신을 위해서 살지만, 이 여자는 나를 위해서 아낌없이 모든 것을 희생했다는 거예요. 그러면 그 여인의 모습은 곧 누구의 모습이냐, 예수님 본인이 지금 죄인을 위해서 희생하는, 예수님 자신의 마음을 여자가 대변해주고 있는 거예요. 

  

성도나 예수님이나 공통점이 뭐냐, 둘 다 어디서 만나느냐, 둘 다 내 귀한 것을 도리어 폐기할 용의가 되어있다는 데서 이게 한통속으로 같이 엮이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하고 주님은. 그래서 항상 설교할 때 제가 여러 번 이야기를 해요. 제발 지킬 것을 간직하지 말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아직도 나한테 지킬만한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거는 정말 주님을 슬프게 하는 일입니다. “이것만큼은 지켜주옵소서.” 이런 소리를 주님 앞에서 하면 안 돼요. 

  

집에 어디 금송아지 있습니까? 어디 보배 있어요? 예수님 피 외에는 다른 보배는 필요치 않아요. 오히려 다른 게 있으면 그것을 훼방하죠. 주님을 상대적으로 낮춰보는 겁니다. 사람은 두 주인을 못 섬기니까. 하나를 사랑하면 반드시 하나를 덜 사랑하는 것이 아니에요. 미워하게 되어 있어요. 주님은 희생자를 찾지, 착한 사람을 찾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아주 착한 사람 경쟁을 시켜요. 아주 대회를 만들어요. 누가누가 착하나 이런 거요. 누가누가 바치나, 누가누가 섬기나, 그 짓하고 있어요. 이것은 인력으로 되지를 않습니다. 

  

두 번째 생각할 것은 교회권세. 이거 문제 크죠. 교회권세. 교회권세를 어디를 보느냐 하면은 요한계시록 1장, 2장, 3장에서 나오죠. 요한계시록 1장에 보게 되면 거기에 누가 나오느냐 하면 예수님이 나와요. 예수님이 제사장 형상을 띠고 나옵니다. 상당히 무섭습니다. 1장 13절,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14절,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같고” 

  

이거는 레위기 21장에 나오는 제사장복장이거든요. 제사장복장이 극대화된 거예요. 영광스럽게 된 겁니다. 예수님 빛나는 모습이 영광스럽다는 것이 아니고 그 복장이 영광스럽다는 겁니다. 그 복장이. 제사장의 복장은 제사장이 하는 모든 일을 대변해주는 요소가 그 복장에 다 이렇게 거기에 담겨있어요. 예수님의 복장이 이렇다면, 그러면 교회는 뭐예요? 교회의 몸은 주님이고, 교회는 뭐가 되겠습니까? 방금 이야기했잖아요.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복장이 돼야죠. 옷이 돼야 될 거 아니에요. 

  

그런데 에베소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해가지고 그 교회에 사자들에게 편지하잖아요. 사자는 천사죠. 담당천사. 천사에게 편지한다는 말은 이게 칭찬하기 위해서입니까? 지적하기 위해서입니까? 지적하는 거예요. 그리고 마지막 벌칙이 뭐냐 하면, 뭘 옮긴다? 촛대를 옮기는 거예요. 요한계시록 1장에 보면 촛대와 촛대사이에 인자가 거닐잖아요. 촛대가 없으면 거닐 수 있는 인자가 함께 거닐 수가 없어요. 

  

촛대라고 하는 것은 성전이고, 촛대가 영광스럽게 됐다는 것은 성전이 완공되었다는 것입니다. 완성되었다 이 말입니다. 완성된 성전에서는 완성된 인자와 함께 영원한 예수님의 복장 같은 영광에 같이 동참하게 된다. 이런 논리거든요. 요한계시록 1장, 2장, 3장이. 그런데 교회가 값을 해야지. 값을. 그러면 교회가 왜 제대로 안 했나? 교회가 제대로 안 한 게 아니고, 교회는 잘리게 되어 있다니까요. 지적받고 촛대를 옮기도록 교회가 된 거예요. 교회는 촛대를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촛대가 옮겨지기 위해서 교회가 있는 거예요. 진짜 교회주님의 성전에 있는 일곱 교회가 진짜 교회니까. 

  

이 세상은 뭐냐 하면 진짜 교회가 있고, 그게 진짜 교회하고 맞는지 안 맞는지 대조해보다가 빠지고 대조해보다가 빠지고 하는 거예요. 일종의 러시안룰렛게임 같은 거예요. 총알이 들어있는가 한번 쏘아보고, 쏘아보고, 계속 퍽퍽 헛방이 난다는 말은 다음번에 총알이 들어있을 가능성을 높이는 거죠. 퍽퍽! 룰렛게임은 총알이 있어가지고 어디에 들어있는지 아무도 모르죠. 그냥 사람이 죽는 것을 보고 총알이 있었네. 이래 되는 겁니다. 

  

뭐라고 했느냐 하면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주리라(계2:10)”했잖아요. 아니, 죽은 다음에 생명의 면류관을 받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죽고 난 뒤에 1계급특진하면 무슨 소용이 있어요? 죽고 난 뒤에. 뭐 남은 가족 준다는 거예요. 아무도 생명의 면류관을 위해서 죽을 사람 없습니다. 아무도 없기 때문에 그런 사람이 생기게 하시는 거예요. 누가? 주님께서 그렇게 희생하도록 하시는 거예요. 주변상황이. 

  

자, 이러면 쉬워요. ‘내가 이걸 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얻겠지’라고 하는 원인과 결과관계를 주님께서는 용납을 안 해요. 원인은 엉망인데 결과가 생명의 면류관이라면 주님께서 그렇게 하게 하신 거예요. 주께서 그렇게 하게 하셨다 이 말이죠. 어떻게? 요한계시록 2장, 3장 내용대로. 그대로 우리에게 말씀이 주어지게 되면 생명의 면류관을 받기 싫어도 다 받아야 돼요. 주께서 그렇게 순교자로 만들었기 때문에. 

  

다시 이야기합니다. 나는 순교하기 싫어요. 나는 순교대신에 멋진 사람이 되고 싶죠. 아주 완벽한 의인이 되고 싶지, 무가치하게 인생이 종치기를 우리는 원치 않아요. 그런데 주님이 누구십니까? 안 되는 것을 되게 하시잖아요. 그게 바로 권세위에 권세에요. 그리고 아래의 권세는 우리가 얼마나 겁쟁이인가를 폭로하기 위해서 권세를 주죠. “낮 열두시부터 밤 열두시까지 일해라.” “싫어요.” “싫으면 나가고.” “안돼요. 겁나요.” 겁주는 거예요. 

  

역시 돈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돈을 벌어서 돈맛을 봐야 돼요. 안 벌어본 사람은 돈맛이 중요한지 몰라요. 돈을 벌어봐야 돈이라는 것이 목숨보다 그만큼 중요한 것이라는 것을 아는 거예요. 돈을 뺏는 것은 목숨을 뺏는 것하고 똑같은 거죠. 우리 외손녀한테, 올 겨울에 외손녀 있을 때 돈을 줘봤어요. 돈을 주니까 외손녀가 돈을 갖고 놀아요. 하나하나 세는 것을 어디서 봤는지 드르륵 세요. 돈을 빼앗아도 울지도 않아요. 그런데 요구르트 뺏으니까 울어요. 자기 목숨은 요구르트에 있어요. 돈에 있는 것을 모르고. 

  

그런데 그 애가 커서 돈맛을 알았다. 돈맛을 아는 것은 목숨 뺏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더 단순하게 이야기해서 자기의 가치를 쳐주지 않는다는 어떤 무시, 모욕감을 느끼는 거예요. 모욕감을. 그만큼 인간은, 이미 우리는 직장권세에 같은 편이 되어 있어요. 교회권세에서 우리가 교회 붙들고 교회하겠다는 것도 이미 망해버린 일곱 교회와 같은 류類에 속했다는 것을 요한계시록을 통해서 알 수가 있죠. 

  

그러면 마지막으로 볼 것은, 마지막이 깁니다마는, 고린도전서 11장을 한번 봅시다. 가정권세가 나옵니다. 여기는 좀 난해해요. 이 가정권세를 하고 다시 국가권세로 넘어가겠습니다. 3절에 보게 되면,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4절, “무릇 남자로서 머리에 무엇을 쓰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요” 5절, “무릇 여자로서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니 이는 머리 민 것과 다름이 없음이니라”라고 되어 있어요. 

  

그 이유가 나와 있어요. 6절, “만일 여자가 머리에 쓰지 않거든 깎을 것이요 만일 깎거나 미는 것이 여자에게 부끄러움이 되거든 쓸지니라” 10절, “이러므로 여자는 천사들을 인하여 권세 아래 있는 표를 그 머리 위에 둘지니라” 여자에게는 내 것이 되지 않는 권세가 나를 지배하는 티를 내라. 이게 여자의 마땅한 역할이라는 겁니다. 내 것이 되지 않는, 내 것이 되지 않는 권세니까 이거는 나의 의로움과 내 선과 악과는 상관이 없죠. 

  

인간이 선과 악에서 농락당하는 입장에서의 구원은 뭐냐 하면 선악자체로서는 구원이 된다? 안 된다? 구원이 안 되는 겁니다. 그럼 뭐가 되어야 되겠어요? 권세, 이걸 지남철이라고 합니다. 지남철. 자석이라고 하는데. 외부적 권세가 뭘 인정하지 않는 거예요? 인간의 사적인, 니가 얼마나 선을 행했느냐, 얼마나 악을 행했느냐, 이걸 일체 묻지도 않고, 만약에 여자가 교통사고 나서 여자 머리의 일부에 쇠가 있다고 칩시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네. 

  

그러면 여자를 강제로 바깥으로 끄집어내려면 쇠는 어디에 당겨집니까? 강력한 자석이 되겠죠. 그 자석가지고 하게 되면 여자가 착한 일 하나 나쁜 일 하나 관계없이 거기에 끌려가겠죠. 그래서 구원받는다는 거예요. 그러면 남자는? 남자도 마찬가지로 누가, 예수님에 의해서 강력하게 있어야 돼요. 그럼 남자는 왜 쇳덩어리 머리가 없느냐, 남자는 여기에 나오죠. 남자는 이 지상의 가정에서 예수님의 역할을 하기 때문에, 남자 자체가 여자에게 권세기 때문에 할 필요가 없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방금이야기한대로 가정에서의 권세는 뭐냐 하면은 구원의 체인입니다. 누가 누구를 잡고 당기고, 잡고 당기고, 주님이 남자를 잡고 당기면 그 남자에게 속한 여자는 주님에 의해서 남자와 같이 구원받는 그러한 구조로 되어있다는 겁니다. 상당히 여러분에게 이 이야기가 낯설어 보이죠. 에베소서 5장을 봅시다. 에베소서 5장에 보면, 권세에 대해서 계속하고 있어요. 거기에 부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22절,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여러분들이 이 성경 보면서, “부부이야기 하겠습니다. 여러분, 둘이 싸우지 말고 행복하게 사세요. 그래야 가정이 행복하게 됩니다.”이래 되잖아요. 근데 가정행복은 성경에 필요치 않아요. 가정은 교회에요. 가정은 신비고 비밀인데, 이번 주일 낮에 이야기를 할 거지만. 가정은 비밀이에요. 신비고. 가정자체가 교회 같아요. 구원이 어떻게 형성되는가를 보여주기 위한 그러한 역할들이, 역할을 맡은 사람들끼리의 단체. 이게 가정 같습니다. 

  

아내 된 자들은 누구한테 복종한다? 남편. 그걸 남편이라고 보지 말고 주님이라고 보자. 주께 복종하자 이 말입니다. 그리고 남편 된 자들은 아내 사랑하기를, 아내로 보지 말고 뭐로 봅니까? 주님의 입장에서 교회를 위해서 자기 몸을 드렸죠. 희생을 하죠. 결국은 직장에서나 교회에서나 그리고 가정에서나 공통점이 있어요. 

  

전부 다 이게 뭡니까? 전부 다 자진해서 뭘 해라? 희생물이 되라는 그 원리가 주께서 이 지상에 남긴 것입니다. 인간의 제도에 남긴 원리는. 어쨌든 간에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나 교회에서나 국가에서나 항상 너는 희생물입장에서 살아가주는 그것이 구원받은 사람의 본모습이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희생물. 

  

참, 평소에 교회 나가면, 교회에서 얼마나 구원론을 강조하고 있습니까? “이렇게 예수 믿으시고 바르게 사시면 여러분 천국 갑니다.”라고,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하다보니까 사적인 욕망을 갖고 온 사람들이 교회에 가서 사적인 욕망을 점점 더 확고히 하는데, 자기 것 챙기는데 더 급급해하고 있고, 그것으로 아주 더 단단한 믿음을 확보한 것처럼 좋아들을 하잖아요. 

  

근데 성경은 어떻습니까? 비슷한 정도가 아니라 정반대죠. 쌓아놓은 것도 어떻게 하라? 그까짓 것 해가지고 전부 다 갖다 버려버려라. 온전히 그걸 없다고 여겨버려라. 그걸. 사람들은 이런 희생이야기를 굉장히 듣기 싫어하는 이유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을 때에도 그 취지가 자기는 살겠다고 해서 죽였잖아요. 예수님 따라서 희생하겠다고 하는 사람은 열두제자 가운데서도 한명도 없었습니다.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다 도망가고 말았죠. 

  

혹시 사람들이 희생할 수 있어요. 로마서 5장에 보면 나오죠. 희생할 수 있는데, 이거는 뭐냐 하면 내 가족이라든지 나하고 아는 사람들 같으면 나 죽고 너 살라고 할 수 있지만, 죄인을 위해서 희생한다는 것은 이건 언어도단입니다. 죄인은 지옥가야죠. 왜 천국가려고 합니까? 이게 인간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소리입니다. 그래서 아무도 천국 갈 자격이 없어요. 전부 다. 예수님의 취지를 자기가 지식으로 알아서 챙길 위인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왜? 주님이 너무 터무니없이 행동을 취하기 때문에 그래요. 죄인을 위해서 죽는 사람 없거든요. 하나님의 원수 된 자를 위해서 죽는 사람 없어요. 

  

그런 철학을 펼친 사람이 있어요. 레비나스 라는 철학자가 있는데, “타인은 나의 지배를 받아서는 안 된다. 우리는 남을 이용하기에 급급한데, 타인이 낯선 타인으로 올 때 그 모습은 일그러진 모습이고 흉악한 모습이고 나 때문에 상처받은 모습이다. 이렇게 타인이 낯선 존재로 다가올 때 그것은 우리가 평소에 우리 자신이 사는 윤리성을 타인이 강요하고 있다. 따라서 무조건 잘해줘야 한다.”라는 그런 윤리를 이야기했어요. 

  

뭐냐 하면 이 자본주의가 전부 다 자기밖에 모르잖아요. 그러니까 “이 각박한 세계에서 제대로 철학가로서 윤리를 하려면 타인을 위해서 희생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게 레비나스입니다. 이 철학을 기독교나 천주교에서 많이 가져갔어요. 이게 메시야일 것이다. 그런데 그 레비나스의 주장에 대해서 라캉이나 지젝, 이런 사람들은 이렇게 놀립니다. “그 타인이 너의 재산을 뺏고 너를 악하게 하는 강도고 부랑자라도 사랑할 용의가 있나?” 이래 물어요. 

  

사람이라는 게 누굴 도와주게 되면, 도와줄 때는 반드시 희생을 동반하죠. 도와줄 때는 어떤 보람 같은 것이 생겨야 도와줄 마음이 들죠. 홍탁집 하는 사람의 아들, 골목식당에서 백종원 셰프가 자기돈 30만원에서 50만원까지 해가면서 애 하나, 인간 하나 개과천선 만들겠다고 했잖아요. 일단은 개과천선했어요. 거기 식당에다가 각서를 써놨어요. 내가 다시 당구장엘 가든지 딴 마음먹고 다시 게으르면 나에게 욕해주시고, 나보고 문 닫으라고 해도 나는 감당하고, 내가 그동안 셰프한테 받았던 돈에 5배를 돌려드리겠다고 각서를 하나 붙여 놨다 이 말입니다. 

  

사람이 도와줄 때는, 이게 도와준 사람에게 어떤 오기 같은 것이 있어요. “니가 내 사랑의 희생에 안 변하고 배기는가 한번 보자.” 이런 식으로 하는데, 인간세계에서는 이게 혹시 통할지는 모르지만 주님은 이런 식으로 천당 보낸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주님이 우리를 감동시켜서 천당 간 사람이 아무도 없다니까요. 주님은 우리가 의인될 가능성을 보고 희생한 것이 아니잖아요. 주님의 구원은요, 주님 자신의 희생에 있어요. 자신의 피에 있다니까요. 

  


우리보고 믿으라고 하는 것은 니가 잘났다가 아니라 니 때문에 내가 죽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한 거예요. 예수님의 피에 증인이 되라고 한 거예요. 그럼 끝까지 우리가 “내가 잘났다. 내가 잘났는데 이걸 희생하겠다.”라는 이 자체도 시건방진 태도입니다. 뭐 잘난 게 있어야 희생하죠. 희생할 만한 게 있어야 희생하죠. 우리는 희생할 것도 없어요. 없으면서도 우리는 마귀한테 빠져가지고, ‘그래도 착한데 아까워서 우에 희생하나?’ 이런 식이라. 아직도 자기가 누군 줄 몰라요. 

  

성령께서 예수님의 피를 우리한테 들이댄다고 했죠. 아까 베드로전서 1장에서 했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피 뿌림이라고, 성령은 그리스도의 피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피를 우리한테 딱 제공해버리면, 제시해버리면 우리는 그 앞에서 희생한다는 자체도 정말 시건방진 짓이라는 것을 몸서리치게 깨닫게 되는 겁니다. 

  

베드로전서 4장에 보면 이런 게 나와요. 나중에 할 거지만 미리 한번 봅시다. 12절,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13절,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뭐 자기가 주님의 일에 큰 공로를 했기 때문에 즐거워하라는 말입니까? 아니에요. 자기 자신이 고난 받는다고 할 때는 처음에는 좀 아깝지만, 나중에 고난 받고 나면 이런 영광이 없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13절,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14절,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그러면 성령이 하시는 일이 뭐예요? 우리로 하여금 자발적으로 할 수 없는 일을 성령에 의해서 졸지에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서 고난 받는 자로 일방적으로 그렇게 변화시키는 겁니다. 일방적으로. 뭐 한 것도 없는데 그리스도를 위해서 고난 받았어요. 뭐 한 게 있어야죠. 아무것도 한 것도 없는데요. 

  

아까 첫째시간에도 이야기를 했지만, 결국 주님의 세계에서는 하나의 원칙만 통하죠. 뭐냐 하면 희생자가 되어라. 창세기 4장의 누굽니까? 가인한테 죽은 사람이 누구에요? 아벨이죠. 아벨이 바로 믿음의 계열이에요. 아브라함도 믿음의 조상이고. 거기에 애매하고 억울한 죽음을 당한 거예요. 아벨은. 그러면 주님, 우리는 어떻게 됩니까? 우리는 벌써 죽었어요. 

  

우리가 예수복음을 믿는 순간부터 우리는 이미 순교자가 된 거예요. 예수님 믿고 골프 쳐도 순교입니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예수님 피 믿고 백화점에 가서 물건사면 그것도 순교에요. 돈 좀 많아서 자주 순교 좀 하고 싶어요. “어느 거 입을래? 이거 입을래? 이거 잘 어울리네.” 보니까 450만 원정도. 이왕 순교하는 거 500만 원짜리 하지 왜? 순교라는 것은 우리의 의사나 뜻이 아닙니다. 희생 같은 소리하고 있네? 우리는 아까워서 미치는 인간이에요. 

  

자, 그러면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 봅시다. 이제 남은 중요한 것은 뭐냐, 그러면 우리가 희생할 마음도 없고 희생할 의사도 없는데 어떻게 희생자가 되느냐, 베드로전서 2장 21절 말씀처럼 우리가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아서 어떻게 십자가 그 자체에 갈 수 있느냐, 그 역할에 중요한 역할을 하기 위해서 세상 권세자들이 있는 겁니다. 세상 권세자들이. 세상 권세자들이 있으면 우리는 뭐냐, 내가 어느 정도밖에 안 되는 시시한 존재인가를 깨닫게 해요. 

  

자, 희생이 되려면 우선 우리가 뭐가 돼야 하느냐, 우리는 우리 스스로 가치 있다고 여기죠. 이 가치 있는 우리를 뭐로 전락시키느냐 하면은 시시한 존재, 우리가 하찮고 시시한 존재가 되는 겁니다. 아니, 겸손을 떠는 것이 아니에요. 겸손을 떨면 시시한 존재로 겸손을 떤 만큼 가치가 있어요. 이거는 말이 안 돼요. 아까 십자가마을에 질문한 사람이 참 어렵다고 ㅠㅠ하죠. 왜 어려운가 하면 본인은 가치 있는 존재로 계속 고수하고 싶은 거예요. 가치 있는 인간으로서. 

  

그런데 제 답변은 뭐냐 하면은, 선악에 대해서 니가 손을 떼라고 하니까 이게 미치는 거예요. 그동안 내가 가치가 있었던 것은 내가 나쁜 일은 멀리하고 선한 일에 촉구하고 매진했기 때문에 이정도로라도 됐다 이거에요. 이정도로라도. 남 앞에 내세울 때에 어느 정도 얼추 내울만해서 남 앞에 나서잖아요. 

  

언젠가 그런 강의했는데. 강남강의에서 했죠. 사람에게 대결할 때 상대방을 이기는 방법은 그 상대방의 뭘 잡는다? 약점을 잡으면 끝이에요. 그 영화가 뭐냐 하면 ‘완벽한 타인’이라는 영화에요. 약점이 없을 때는 우러러봤는데, 약점을 들키고 난 뒤에는, ‘아이고 별존재도 아닌 게 나한테 갑질하기는..’ 갑자기 고만 살맛이 확 나버리죠. 

  

상대방의 갑질, 사장이나 부장이 나를 굉장히 괴롭힐 때는, 업무에 대해서 잘 아니까 어쩔 수 없다고 이래 했는데, 뭐 이렇게 나중에 보니까 약점이 잡혔어요. 그 부장이 우리 형님한테 돈 빌려가서는 돈 1억을 안 갚은 거예요. 갑자기 부하직원이 갑이 돼버렸어요. “부장님, 돈 언제 갚을 겁니까?” 이런 소리가 막 나올 정도로 갑이 됐어요. 그러니까 뭐 시키는 것도 그렇고, “니 빨리 퇴근해라. 니 말고 일하는 사람 없나?” 갑자기 이렇게 됐어요. 

  

사람의 경쟁은 뭐냐, 다들 잘난 체하기 때문에, 아킬레스건이라고 하죠. 치명적인 약점만 잡으면 그 사람은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 부릴 수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약점잡기죠. 약점잡기. 드라마에 많이 나오죠. 어떤 형사가 재벌 집을 수사하니까 그쪽에서 사람들을 보내서 그 형사 약점 잡으라고 하죠. “니 계속 우리 집 털면 니가 먼저 털린다.”라고 약점을 잡죠. 그런 드라마 보고 있으면 이제는 나쁜 놈 잡히겠다고 희망하고 있는데, 갑자기 저쪽으로 역전되어 약점 잡히면, “아이 참 또 꼬이네.” 이래 되잖아요. 

  

그래서 그걸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우리의 평소의 행동은 뭡니까? 약점숨기기에 나서요. 약점 감추기. 약점 감추기라는 말은 곧 뭐다? 나는 누구한테 씹히지 않겠다. 누구의 희생물이 되지 않겠다. 왜? 나는 잘났으니까. 제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사람에게 문제는 지킬만한 게 아직도 있다는 겁니다. 아직도 배 열두 척이 남아 있는 게 문제에요. 지가 알아서 배에다가 불 질러야 돼요. 

  

나한테 내세울 게 있다는 그것이 나의 치명적인 악마한테 노출된 약점이에요. 악마가 모를지 싶어요? 착하십니까? 그러면 그 착한 것을 희생하세요. 착한 것을 불 질러버리세요. 어떻게 뭐 나보다 못난 사람은 어떻게 하느냐? 못난 사람이 하는 게 아니고, 요한계시록 2장, 3장에 나오는 교회보고 지적하는 거 있죠? 누가 감히 거기에 대해서 “저 했습니다.”라고 하는 사람이 누가 있어요? 아무도 없어요. 목사님 따님 애 둘이 약점이라 지금. 애 둘 간수하는데 정신없어요. 약점이라. ‘니 오늘 공부 끝나고 좀 한번 보자.’이러고 있을 거예요. 

  

엄마가 애를 키우면요, 어느 집 애보다 내 애가 더 반듯하고 착하고 우수하고 자랑스러울만한, 영광스러운 집안의 영광, 내 영광이고 싶어요. 우리 애가 세월호 물 빠져가지고 맥도 없이 청춘을 차가운 물속에 빠트리고 싶은 부모는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이게 우리가 악마한테 잡힌 약점입니다. 이거 어떡하면 좋아요??? 

  

세상권세가 우리를 길들입니다. 뭐냐 하면은 세상권세 앞에 우리는 내가 갖고 있던 약점을 그대로 노출시킵니다. 물론 그게 안 됐던 사람이 있었죠. 요셉 같은 경우에는 요셉 본인이 한 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지만. 분명히 요셉이 자기의 꿈 때문에 출세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출세하고 난 뒤에 요셉 본인은 완전히 개무시한 거예요. 얼마나 답답했겠어요. 

  

요셉이 느낀 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꿈이 있고 하나님의 계시가 있다할지라도 실제의 삶은 완전히 바닥 삶이었습니다. 언제 출세할까? 출세는커녕 점점 더 나락으로 빠져요. 출세는 점점 더 멀어져갑니다. 저 높은 곳하고 나하고 상관없을 것 같아요. 그러나 누가 개입합니까? 주님이 딱 개입하니까 요셉은 출세했다는 생각이 전혀 없어요. ‘이거는 아니야. 이거는 아니야. 이거는 분명히 나의 출세를 위한 계시는 아니야. 그럼 뭐지? 아! 아버지와 형제들을 살리기 위해서 내가 하나의 매개로, 중보자로 나선 것뿐이야.’라는 것을 알게 되죠. 그래서 형들에게 말하죠. “형들이여, 나를 형들이 팔았음으로 내가 보복할까봐 걱정하지 마세요. 이건 주께서 하신 겁니다.” 

  

주님한테도 시시한데 우리가 시시 안 하려고 버틸 이유는 하나도 없어요. 세상권세를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완전히 개무시 당하게 만드는 거예요. 그게 우리한테는 행운이고 복입니다. 왜? 비로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어느 정도밖에 안 되는 인간임을 내가 납득이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거는 그냥 이론이 아니에요. 실제로 여러분들의 일이 잘 풀리고, 잘 풀리는 집 휴지 한 열통 사고, 승진하고 출세하고 칭찬받고 해보세요. 건방짐이 하늘을 찌릅니다. 

  

이게 인간이에요. 그게 인간입니다. 이거는 어쩔 수 없어요. 집에 돈이 막 생기고 갑자기 갑부 되고 하면, 콩나물 아끼다가 콩나물 장사하는 아줌마 불쌍하다고 그냥 돈도 막 주고요. 기마이(돈이나 물건을 선선히 내놓는 기질)라는 기마이는 다 쓰고 해요. 소위 안 치던 골프치고. 골프 쳐도 괜찮은데, 골프 쳐도 순교인데, 그야말로 이거는 주의 지시에 의해서 말고 건방떨라고 골프 치는 것, 지금 제가 말을 조심해야 돼요. 

  

그러니까 뭐냐 하면 항상 의외의 상태로 주어지는 것은 감사하는데요. 노리고, 나는 이정도 착하고 나는 이정도 넓은 아파트 이정도 성공해야 마땅하다고 한다면, 그것은 세상권세에 의해서 아주 작살이 나야 정신을 차립니다. 믿는 사람한테 배신당하고 사기당해야 해요. 그게 행운입니다. 그래도 자기 자신이 시시한 것을 알면 그건 천만다행이고요. 그래도 모른다면 애초부터 주의 백성이 아니죠. 

  

그래서 성경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세상권세가 있다. 그러나 세상권세는 한계가 있다. 인간이 세운 제도기 때문에. 그럼 성도는 뭐냐 애매한 억울함, 애매한 고난을 여러분들이 각오하셔야 합니다. 바르게 살면 복 준다, 그런 공식 믿지 마세요. 세상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아요. 오히려 바르게 살았다는 이유 때문에 잘 되게 되면 이거는 위험한 거예요. 이건 시건방질 가능성이 많고, 이거는 뭐 하늘나라보다도 세상이 좋다고 간증집회하고 돌아다닐 그럴 가능성이 있어요. 

  

지금 주님께서 우리에게 간증꺼리를 안 준 것을 제가 천만다행으로 여깁니다. 이 교회 간증할 거 뭐가 있어요? 뭐 홀에서 있다가 집에서 드린다고 그거 간증할까요? 왜 간증꺼리가 없느냐, 시시하기 때문에 그래요. 시시하기 때문에. 정말 시시하기 때문에. 아무것도 아니에요. 오늘 죽어도 괜찮아요. 왜? 그 정도 시시하기 때문에. 내일 꼭 살 이유 없습니다. 그렇다면 특별한 일이 없어도 그 마음 자체가 이미 희생이에요. 

  

그게 빌립보서 2장 5-7절에서 하신 그 말씀입니다. 니가 이 마음을 품으라. 무슨 마음입니까? 곧 예수의 마음이니. 자, 주의 마음이 어떻다는 말입니까?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그 다음에 뭐가 나옵니까? 완전히 내려앉았죠. 낮아졌죠. 성령이 그렇게 하신 거예요. 알아서 한 게 아니고 성령이 그렇게 낮춘 거예요. 

  

자, 어디까지 낮아졌습니까? 낮아지기 전에 그때 약간 브레이크가 있죠. 할 수만 있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겨달라고, 십자가라는 잔을 안 마시면 안 되겠습니까? 하고 한번 버텼죠. 버티다가,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아버지의 뜻이 뭡니까? 십자가에 죽으심이죠.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있으나마나한 존재로 전락한 겁니다. 죽었습니다. 영화 끝났어요? 

  

그렇게 죽었기 때문에 부활한 게 아니고, 그렇게 돌아가셨기 때문에, 그렇게 낮아졌기 때문에, 비로소 그 낮은 곳에서 천국은 시작이 되는 거예요. 낮은 쪽에서. 우리가 천국을 골라가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끌어당기기 때문에, 시시하게 했기 때문에, 우리가 막달라 마리아기 때문에, 비싼 향유가 있더라도 예수보다는 더 귀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눈물을 흘리면서, “이 귀한 분에게 천한 것을 바치게 된 것이 영광스럽습니다.”라고 하는 거예요. 

  

자, 한번 정리해봅시다. 희생이란 희생하는 기쁨보다도 더 큰 기쁨이 있기에, 희생이 희생인줄 모르고 할 때에 그게 희생입니다. 더 큰 기쁨. 제가 질문하겠습니다. 여러분, 착한 일을 한 게 기쁩니까? 주님이 기뻐요? 주님이 기쁘죠. 그러면 또 질문 나갑니다. 여러분이 악한 일을 했는데 안 들킨 게 기쁩니까? 주님이 기쁩니까? 당연히 주님이 더 기쁘죠. 

  

그러면 선악이라는 것을 생각할 필요가 있어요? 없어요? 필요 없죠. 선악을 생각하는 이유는, 내가 선했을 때 복이 온다는 기쁨을 예상하기 때문에 그래요. 그 예상은 주님의 기쁨 앞에서 다 없어져야 돼요. 사라져야 돼요. 오늘 죽는다 할지라도 주님이 죽이신다는 그것이 내 사랑보다 더 기뻐해야 해요. 참, 이 말을 들으면 이 목사 말을 함부로 한다고 하는데, 함부로 하던 두부로 하던 간에 맞는 것은 맞는 거예요. 지키고 안 지키고 간에 맞는 말은 맞는 말이에요. 이게. 

  

사도바울의 소원이 뭐였다고요? 사는 거였습니까? 죽는 거였습니까? 죽는 거였죠. 왜 죽는 거였습니까? 죽는 게, 주님과 함께 하는 게 더 기뻤기 때문에. 그래서 사랑은, 이거 수련회에서 할 건데, 수련회 참석할지 안 하지 모르겠습니다만, 수련회고 뭐고 간에, “사랑은 죽음보다 더 기뻐요. 죽어도 좋아.” 이런 사랑! 하고들 계십니까? 안 한다고요? 그럼 여러분은 지금, 자신을 더 대단하게 여기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참 주님, 주님, 입에 발린 소리, 주님이 어떤 마음으로 가셨는지는 관심이 전혀 없고, 주님 이용해서 주님 덕분으로 형편나아지고 행복하려고 시도하는 것이 저희들 본성이 아닙니까? 주님처럼 닮아서 저희도 자기가 얼마나 시시한 존재인가를 깨닫는 기쁨을 허락해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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