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강의

최종성 190111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9. 1. 15. 19:26
2019-01-12 00:33:54조회 : 143         
최종성 190111이름 : 이근호 (IP:119.18.87.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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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아 (IP:122.♡.170.138)19-01-13 00:22 
서울의존강의20190111a 베드로전서2장 20-21절(최종성)-이 근호 목사 

베드로전서 2장 20-21절 

20절,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21절,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베드로전서 2장 20절을 제가 읽습니다.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이래 되어 있죠. 여기 성경에 죄라는 것이 등장합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날 때 앞장세우는 것이 있어요. 앞장세울 때 나오는 그 개념은, 니 돈 많냐? 니가 얼마나 건강하냐? 니가 몇 평짜리 아파트 사느냐? 자식은 공부 잘해? 이렇게 다가오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다가올 때는 최종성을 가지고 다가옵니다. 최종성. 최종성은 쉽게 말하면 마지막이죠. 무엇의 최종성이냐 하면 모든 가치, 모든 의미, 모든 진리, 모든 판단의 최종성이에요. 하나님께서는 나는 이런 식으로 심판하고, 나는 이런 식으로 저주하고, 이런 식으로 복주고, 나는 이런 식으로 의미와 가치와 진리와 판단을 드러낸다는 것을, 사람에게 의논하지 않고 최종적으로 확정지었습니다. 죄가 뭐냐에 관해서 나는 너희들의 의견을 들을 의사가 없다는 겁니다. 죄가 뭐냐에 관해서. 

“내가 살면서 죄 안 짓고 싶었는데 자식 키우면서 살다보니까 어쩔 수 없이 죄 지었습니다.”라든지, “내가 이만큼 살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약간의 죄가 있겠지만 내가 내 가정을 먹여 살렸으니까 나는 바르게 살고 있었습니다.”라는 것을 가지고, 자기 판단을 가지고, “약간의 죄는 지었지만 나머지기 대부분의 영역은 성실했고 의롭고 착했습니다.”라는 그것을, 주님은 그게 최종성이 아니라는 거예요. 

최종성은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은 21절에 나오죠.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누가 죄냐 아니냐, 누가 진리냐 아니냐, 누가 의미 있느냐 라는 것에 최종성의 판단은 누구 몫이냐 하면은 사람들의 의견을 규합해서 내릴 것이 아니고 일방적으로 예수님을 통해서 결정지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만날 때는 그냥 만나는 것이 아니고 죄라는 개념을 가지고 만난다고 했습니다. 죄라는 개념을 가지고. 죄를 앞장세워서 만나는 거예요. 

그렇게 볼 때에 그 기준이 뭐냐 하면 예수님 본인이 기준이에요. 그게 마태, 마가에서 나로 인하여 언약을 세운다는 것이 그 말이에요. 인간 대 인간의 만남에서는 죄를 가지고 안 만나죠. 돈을 가지고 만나잖아요. 내가 봉사할 건데 얼마 줄 거예요? 일당 얼마 줄 거예요? 내 노력, 내 노동력과 저 사람의 노동력이 만난다 이 말이죠. 내 노동력의 구입을 원하십니까? 아닙니까? 그런 것을 묻는 거예요. 

그리고 인간 대 인간의 만남에는 자기의 실적을 가지고 만나죠. 나는 이 정도의 실적을 가지고 있는데 너는 어느 정도의 실적을 얻었느냐? 세상 살면서. 그런 것을 가지고 만나는데, 거기서는 업적 같은 것, 실적 같은 것의 만남이기 때문에 거기에는 자연적으로 뭐가 빠져 있느냐 하면 죄라는 것이 빠져있죠. 죄를 좀 짓더라도 성공하는 게 이게 남는 장사라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는. 사람 대 사람의 만남에서는. 

부부가 한 20년 30년 살면서 밥상머리 앞에서 대화할 때, “우리는 평생에 죄 짓지 않았습니다.”라고 남편이 이야기할 때, 아내가 “그래서? 죄 안 지어서 얼마 벌어왔는데?” 이러거든요. “그래, 당신 죄 안 지어서 한 달 수입이 얼마 벌어왔는데?”라고 묻는 거예요. 이게 이 세상의 가치라 이 말이죠. 그리고 죄의 기준은, 내가 앞으로 잘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라고 하는 것은 죄의 계열에 들어가지를 못해요. 죄의 항목에 섞어놓지를 못해요. 앞으로 잘하겠다는 것이 없어요. 

왜냐하면 죄는 최종성이기 때문에. 그리스도 빼놓고는 다 죄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게 되면 “저는요?” 이래 나오겠죠. ‘그리스도 빼놓고’에 우리는 포함이 되니까 우리는 자연적으로 죄인이 되었죠. 그게 죄의 최종성이니까. 그렇게 죄의 최종성을, 예수님 빼놓고 다 죄인으로 규정할 수 있는 이유는 예수님만 의롭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만 의롭기 때문에. 

우리의 죄를 드러내는 것이 주의 목적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의를 드러내기 위해서, 이 죄악 된 세상에서 드러내기 위해서 하나님이 일하신다 이 말이죠. 따라서 우리가 개인적으로 죄인이냐, 죄인 아니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우리는 뭐를 발견해야 되고 찾아야 되고 따라가야 됩니까? 예수님만이 의롭다는 것을 따라가면 돼요. 

그 의가 어떻게 생산되는가는 베드로전서 1장에 나옵니다. 2절에 피 뿌림으로, 그런 식으로 거룩하심을 얻은 거예요. 피 뿌렸다 하는 것은 내 피를 섞은 것이 아니잖아요. 일방적으로 예수님 쪽에서 날아온 피다 이 말입니다. 예수님 쪽에서 피가 날아올 때 그 피가 날아온다고 생각하지 말고 의가 날아온다고 봐요. 어디에 뿌려지는가? 이 죄 속에서 뿌려지는 거예요. 카더가든의 명동콜링 들어보셨어요? 하얀 눈 위에 하늘에서 별빛이 떨어지죠. “새벽별빛 고운 흰 눈 위에 떨어져~~” 

죄 속에 주님의 피가 뿌려진다는 것은 죄 속에 하나님의 의가 뿌려지는 거예요. 그게 죄의 최종성, 의의 최종성, 주님의 가치의 최종성, 주님의 구원의 최종성입니다. 최종성이라는 말을 바로 풀이하면 이게 마지막이라는 것입니다. 마지막. 근데 인간들은 마지막을 인정 안 해요. 마지막을 인정 안 할 경우에 있어서의 세상을 보는 형식에 있어서 차이가 납니다. 

마지막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형식이 적절한 예가 되느냐 하면은 바로 스크린입니다. 스크린. 영화관에 가면 스크린에서 요란스럽죠. 총 쏘고 여러 가지하고 또 보헤미안랩소디라는 영화에 보면 그 막에서 퀸이 공연한 게 막 나와요. 라디오까까~~하거든요. 과자 좋아하는 애들은 그게 라디오까까에요. 라디오가가~ 라디오구구~ 라디오 블라블라~ 막 노래 나온다고요. 그러면 따라하고 굉장해요. 

근데 그거는 어디입니까? 스크린 위에 나타나요. 스크린은 막이거든요. 막 뒤에는 뭐가 있습니까? 막을 들춰보면 거기에서 퀸이 나옵니까? 퀸의 퀸이고 뭐고 아무것도 안 나오죠. 아무것도 없죠. 하나님이 이 세상을 최종성이라고 한 것은 하나님이 이 세상을 뭐로 삼겠다는 겁니까? 이 세상을 스크린으로 간주하겠다는 거예요. 스크린에 뒤에서 영사기로 비춰버리면 얼룩덜룩한 이미지만 남죠. 이 세상은 주님을 비추는, 그리스도의 통일성을, 최종성을 비추는 하나의 이미지의 흔적들이죠. 이 세상이. 이 세상이 그렇다 이 말이죠. 

그런데 ‘레이더스’라는 영화에 보면, 인디아나 존스 나오는 탐험하는 영화잖아요. 아주 오래된 영화인데. 그 영화에 보면 고대 유물을 찾아가는데 막혀있어요. 동굴의 입구가 막혀있어요. 근데 어떤 주문을 외운다든지, 여기에 남겨진 정보나 비밀암호 같은 것을 돌문에 문지르고 하게 되면 갑자기 이 돌이 굴러 떨어지면서 없던 길이 새로 나오죠. 없던 길이. 그러니까 이거는 마지막이 아닐 때는 여기서 뭐를, 자꾸 무슨 이미지를 새로 그리느냐 하면은 길을 이미지로 그리는 거예요. 이게 오늘날 교회에서 가르치는 겁니다. 

길이 있다는 말은 우리가 이 지점에 있으면 저 지점까지, 미래의 목표지점까지 여분이 남아있다고 보는 거죠. “앞으로 잘할게요. 앞으로..”라는 거예요. 남아있다는 말은 스크린을 거부하는 거죠. 스크린을 거부한다는 말은 자기는 스크린에 있는 얼룩덜룩한, 해병대 군복에 있는 얼룩덜룩한 무늬에 지나지 않는, 자기의 실체성이 있다? 없다? 전혀 실체성이 없거든요. 개인의 실체성이 없는 거예요. 

그냥 얼룩덜룩한 무늬, 여성들 원피스나 치마에 보면 무늬가 있잖아요. 여기 벽지에도 무늬가 있네요. 이거 꽃그림이잖아요. 향기 납니까? 향기 안 나죠. 이걸 긁어내면 꽃잎이 떨어지는 것이 아니고 벽지가 떨어지는 거예요. 재료는 종이고 이미지만 꽃이잖아요. 이게 원래 꽃이 아니라 이 말이죠. 우리 인간은 재료만 흙이고 이미지만 인간인 것처럼 보인다 이 말이죠. as if ~인 것처럼. 영어에서 말하는, 아닌데 ~인 것처럼. 왜? 이 자체가 스크린, 막이니까. 막이 얇다면 두께가 있을 수가 있어요? 없어요? 두께가 있을 수가 없죠. 막인데. 

그런데 인간은 최종성을 인정하지 않으면 뭔가 그 뒤에 무한한 길이, 천국으로 가는 길이 뚫려있다고 보는 거예요. 그래서 나는 어디쯤 가고 있을까? 가수 전영이 부른 노래가 있어요. 어디쯤 가고 있을까~ 맨날 교회에 와서 나는 어디쯤 가고 있을까? 에요. 어디쯤 가고 있을까? 어디쯤 가고 있을까가 돼버리면 본인은 이미지가 아니고 하나의 단독자, 개체를 갖고 있어요. 내가 열심히 하게 되면 앞으로 천국 가는 쪽으로 가까이 갈 것이고, 내가 농땡이 부리면 지옥 가는 쪽으로 갈 것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럼 뭐가 날아가 버려요? 완전히 주님의 최종성은 무시되는 거예요. 그야말로 자기가 도 닦는 겁니다. 교회가 수련장소가 돼요. 자, 교회와 태권도 학원과의 공통점은? 송판 하나 깨면 노란 띠 준다는 거예요. 송판 하나 깨면 노란 띠 준다는 것하고 십일조 하면 장립집사 시켜준다는 것하고 이게 같은 급입니다. 우리 의존교회는 노란 띠 될 사람이 한 사람도 없어요. 뭐 십일조를 안 하니까 노란 띠가 될 수가 없죠. 하는지 안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안 한다 치고. 안 한다고 해야 편하니까. 애야! 니 장립집사 될래? 권사님 될래? 그럼 십일조 해야 된다. 검은 띠 하려면 보통 노력해야 되는 게 아니다. 

태권도 도장하고의 공통점을 아시겠죠? 인간에게 발전의 여지를 주는 거예요. 희망의 여지를 주는 겁니다. 그리고 그만큼 띠가 노란 띠에서 검은 띠가 되면 가정이 복을 받는다? 안 받는다? 복을 받는 거예요. 자기 가정이 이미지가 아니고 자기 가정이 독자적인 실체라고 보는 겁니다. 내 가정 잘 되면 더는 소원이 없다 이래 되는 거예요. 내 가정 잘 되면. 그 가정이 잘 되고 합심이 될 거예요. 

그 단합이 어디까지 가능한가 하면 지옥가도 같이 가는 거예요. 지옥 가서 한 가정 모였으니까 사이좋다. 거기 동서부터 올케까지 다 모였네. 여기 시장에 가보세요. 시장에 가보면 내가 보기에 전부 다 지옥 가는 사람 같아. 내가 잘못 봤는지는 모르지만. 물건 사고팔고 하면서 지옥가고 있는 거예요. 좀 깎아주소~ 이러면서 지옥가고 있는 거예요. 깎은 사람이나 깎아주는 상인이나 같이 지옥가고 있는 거예요. 

이미지를 위해서 산다는 것은 이미지가 투영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아가는 거예요. 근데 이미지가 아닌 사람은 실체가, 그리스도가 실체가 아니고 누가 실체냐 하면 자기 자신이 최종 실체기 때문에 장사를 하던 무엇을 마시든 무엇을 먹든 무엇을 하든지 간에 나의 영광을 위해서, 내가 실체니까 내 영광을 위해서 매진할 뿐이에요. 교회가든 기도를 하던 뭘 하든 간에 전부 다 나 잘되기 위해서 살아가는 겁니다. 

자, 여러분한테 물어봅시다. 구원은, 사람이 구원해요? 하나님이 구원합니까? 진짜 골목식당 백종원이 묻는 식으로 물어봅시다. 장사 할 거예요? 말 거예요? 라는 그 물음이거든요. 피자 만들지도 못하면서 피자집 하는 사람인데, 이래서 니 장사 할 거야? 말거야? 라고 묻는 것처럼. 정말 구원할 거예요? 말 거예요? 아니 천국 갈 거예요? 말 거예요? 제가 묻는 겁니다. 그러면 천국가고 싶어요. 그럼 그 다음 질문이에요. 그럼 누가 구원해요? 인간이 구원합니까? 주님이 구원합니까? 

주님이 구원합니다, 라고 하지 말고 이렇게 하세요. 인간은 구원을 못합니다. 이렇게 답변하세요. 인간은 구원 못하죠. 근데 구원도 못해주는 인간에 대해서 왜 그렇게 의식하고, 왜 그리 예민하게 처신하고, 아양 떨고, 구원해주지도 못한 인간에게 왜 그리 눈치를 보며 삽니까? 사도들이 그렇게 살았어요? 여기 있던 애 둘이 어디에 갔어요? 저쪽으로 들어갔네요. 자식이 날 구원해요? 근데 엄마는 누굴 눈치를 봅니까? 애 눈치 보죠. 왜 그럴까요? 애가 무서워서가 아니라 내 가정에 하나의 최종성을 두기 때문에. 나 있는 곳을 최종성을 두기 때문에. 

그러면 구원은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하신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하지 못하죠. 인간이 하지 못함 속에 뭐도 포함이 되어 있느냐 하면은 내가 나를 구원하지 못한다, 라는 것도 포함이 돼요. 내가 나를 구원하지 못한다. 내가 나를 천국에 보낼 수가 없다. 그렇다면 그걸로 마감되면 안 되겠죠. 그 이유가 무엇인가도 알아야 되죠. 두 가지를 알아야 돼요. 내가 나를 구원하지 못한다. 이 나 속에다가 인간을 집어넣어 봅시다. 나에다가 인간, 인간 공동체, 다 집어넣어 봅시다. 인간세계는 나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두 번째 알아야 될 것은, 왜? 왜 구원하지 못하느냐? 이것을 알아야 돼요. 왜? 그냥 구원하지 못한다. 주님이 구원한다. 이렇게 돼버리면 내가 주님을 믿는 그것이 구원한다가 돼버려요. 이거는 교회에서 저지른 사기 아닙니까? 당신이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거예요. 아니에요. 끝까지 주님이 구원해야 돼요. 내가 예수 믿는 내 믿음으로 구원되면 안 된다 이 말입니다. 

내가 예수 믿으면 출발점이 내가 이미지가 아니고 뭐가 됩니까? 내가 실체가 된다고요. 우리는 아까 재료가 뭐라고 했어요? 흙이다. 흙이 자기가 알아서 인간되는 것이 아닙니다. 흙이 인간될 때 누가 개입했어요? 창세기에서 누가 개입했습니까? 성령이 개입했잖아요. 하나님의 성신이 있으매 인간이 흙에서 인간됐잖아요. 

그 말은 뭐냐 하면은 인간이 스스로, “아이, 나 흙이 지겹다. 인간 좀 되자.” 알아서 대충 진흙가지고 터덕터덕 발라서 눈 코 입 만들어가지고 이래가지고 인간됐습니까? 아니죠. 우리가 성경을 평소에 너무나 모르고, 성경을 모르는 이유가 성경을 거부하기 때문에 그래요. 성경에 다가서지 않고 성경을 내던져버려서 그래요. 왜 성경을 안 보고 던지느냐 하면은 돈이 안 되거든요. 돈이 안 되는 이유 때문에 왜 던지느냐, 나는 돈이 나를 살릴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그래요. 누가 그렇게 가르치던데? 세상 모든 사람들이. 

어떻게 알았는데? 사회 나가보니까 그것만이 대화내용이 돼요. 어느 정도하면 돈을 벌고 어느 정도하면 돈을 절약하고 어디 가면 출세하느냐? 그것만이 대화내용이 되었어요. 자 그렇다면 인간과 인간 사이의 대화내용은 이미 결정되었어요. 한 자로 뭐였어요? 인간과 인간 사이에. 돈이죠. 부부사이도 마찬가지입니다. 돈 벌어오니까 아내가 좋아서 보너스 탔다고 “당신 이뻐요. 귀여워요.” “여보, 사기 당했어.” “죽어라.” 모든 대화내용이 상대를 이용가치로 보는 거예요. “나 살기 위해서 당신은 나 필요한 조건을 갖추어 다오.” 이 말입니다. 

그러면 남편이 짜증이 나죠. 그것도 한 두 번이 아니니까. 그렇다면 나보고만 돈 벌라고 하지 말고 당신도 돈 벌면 안 되느냐? 그럼 아내가 하는 말이 내가 돈 벌거면 미쳤다고 당신하고 사나? 돈이 필요하기 때문에 당신이 남편이지, 내가 돈 벌어서 뭐가 이쁘다고 당신한테 퍼 주냐 이 말이죠. 내가 힘들게 내가 벌었는데. 자식 내가 키운다. 그래놓고 하는 말이 돈 버는데 열심히 했기 때문에 이걸 죄라고 자꾸 몰아붙이지 마세요, 라고 나와요. 돈 번다고. 

그래서 돈 벌어서 뭐 할 건데? 뭘 건졌다? 목숨을 건졌다는 거예요. 돈 벌어서 목숨을 건졌다는 거예요. 여러분, 목숨을 건지는 방법은요, 목숨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목숨을 버릴 때 목숨을 건져요. 지금 현대인들의 문제는 뭐냐 하면 제가 주일 낮 설교도 했지만, 지금 현대인들은 목숨을 버릴 장소를 못 찾고 있어요. 목숨마저 바꿀만한 가치 있는 것을 찾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안중근이가 괜찮죠. 유관순이는 괜찮아요. 왜냐하면 유관순이나 안중근이는 어디에다가 목숨을 바쳤습니까? 대한독립만세 일제해방에 목숨 바쳤죠. 물론 그 사람들이 무식해서 그래요. 대한독립이라는 실체는 없어요. 있지도 않은 허황된 데에다 목숨 걸은 거예요. 대한민국은 어디에서 생겨나느냐 하면은 대한민국을 거론하는 그 사람의 소유가 될 때 비로소 대한민국이 생기는 겁니다. 아, 이거 어렵다. 

정치하는 사람들이 있을 때 대한민국이 있어요. 정치하는 사람이 정치해서, 밥벌이해서 밥 먹고 살겠다고 할 때 대한민국이 성립하는 겁니다. 제 말이 어렵습니까? 그럼 쉽게 해드릴게요. 우리나라에 피자가 맛있다고 소문이 난 이유가 뭐냐, 피자집을 한 사람이 있기 때문에 그래요. 만약에 우리나라에 피자집을 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면 피자 맛있다는 사람도 한 사람도 없어요. 제가 오늘 오다보니까 길에 하늘색 오토바이가 여러 대가 있어요. 보니까 하늘색 페인트칠해서 피자집이 새로 생긴 모양이라. 전에 없던 피자집이에요. 

왜 자꾸 피자가 맛있다고 합니까? 피자가 있으니까 그래요. 피자집이 먼저 있어야 돼요. 국민은행 근처에 조그만 피자집이 있었는데 그거는 망했어요. 내가 망할 줄 알았어요. 몸빼바지, 몸빼바지가 편하다고 하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은 몸빼바지를 만든 제조업자가 있어서 그걸 누가 입어 착용해봐서 그래요. 대구 서문시장에 가보니까 몸빼바지 석장에 만원해요. 세상에 그렇게 헐은 바지를 처음 봤어요. 세장에 만원. 몸빼바지 한 장 입는데 1년 걸리니까 한 3년은 편하게 입겠어요. 

다시 돌아가서 정치는, 왜 대한민국이 있다? 대한민국 만듭시다! 라고 하는 정치꾼들이 나타날 때 대한민국이 있는 거예요. 그 정치꾼을 만들자고 나선 사람이 바로 내가 하고 싶은 일에 목숨 걸자고 나선 유관순과 안중근 때문에 그래요. 그리고 그 사람 죽여서 덕을 보는 33인들. 상하이 임시정부. 김구부터 해가지고 이승만이 아니죠. 리승만부터 해가지고. 그들의 생산된 게임에 다른 사람들이 현혹돼서 그것이 있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있다고. 우리나라에 국회가 있는 이유는 국회의원을 하고 싶은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북한이 존재하는 것은 김정은 때문에 그런 거예요. 김일성 일가 때문에 있는 겁니다. 김일성 일가 때문에. 

이 말은 뭐냐 하면 세상이라는 것은 세상이 있고 인간이 있는 것이 아니고, 인간들이 뭘 만든다? 세상을 만들고 거기에 사람들을 복속시키고 복종케 한다 이 말입니다. 회사에서 꼴 보기 싫으면 사표내면 그만이죠. 사표내면 그만입니다. 한국이 살기 싫으면 캐나다로 이민가면 그만이에요. 요새 이민 한 백만 명 모집한다고 하니까. 한 1억 내지 들고 나가면 받아줄지 모르겠어요. 돈 없는 것은 캐나다에서 받아주지도 않아요. 이민자 원한다는 말은 그냥 투자자 원한다는 뜻으로 보면 돼요. “캐나다라는 회사에 주식사세요. 그러면 일단은 영주권 줄 용의가 있습니다.” 그런 뜻이에요. 

그래서 캐나다라는 회사에 더욱더 충성해서 발전시킨 공로가 있다면 영주권에서 시민권으로 전환시킬 용의가 있습니다. 그래서 캐나다에 갔는데, 캐나다 어떤 외딴 곳에 불이 났는데 캐나다 할머니가 못 빠져나왔다. 그럼 한국 사람이 들어가서 자기가 화상을 당하면서까지 그 할머니를 건진다면 그 한국 사람은 캐나다에 간지 얼마 안 돼서 불법이민자라도 그 사람이 시민권을 얻을 가능성이 많아요. 그런 일이 우리나라에 있었잖아요. 우리나라에서 스리랑카 청년이 불속에서 할머니 구해가지고 졸지에 영주권을 얻었죠. 그 회사에 공로가 있을 때 빨리 승진이 되는 겁니다. 

세상은 인간이 만든 거예요. 그럼 우리 있을 때는 왜 있었습니까? 그거는 여러분들이 만든 것이 아니고 여러분 아버지가 이미 소속이 대한민국 소속이기 때문에 그래요. 만약에 여러분 아버지가 캐나다나 미국 이민 갔다고 하면 우리는 한국하고 관계가 없습니다. 미국영주권, 캐나다 영주권 얻었을 거예요. 그래서 부모 잘못 만나서 내 인생 조졌다고 이야기를 하잖아요. 부모 잘못 만나가지고. 

문제는 이러한 인간의 나라만 있느냐 하는 거예요. 인간의 나라를 유지하려면 여기에 동원되는 게 뭐냐 하면 경찰이에요. 자, 문제 내겠습니다. 경찰과 예수님의 차이점은? 오늘 문제 너무 많이 낸다. 경찰과 예수님의 차이점은 경찰은 안 죽고 예수님은 죽었다. 경찰은 피를 안 내고 예수님은 피를 내었다는 거예요. 경찰은 피를 안 내고 의롭게 되는 방법을 이야기해줘요. 

사기 치는 사람은 경찰이 와서 잡아줘야 해요. 왜냐하면 경찰의 임무는 개인의 사유재산과 생명을 보호하는데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면 경찰 위에 뭐가 있습니까? 경찰을 하도록 지시하는 법이 있겠죠. 그 법은 어디서 만듭니까? 국회에서 만들고 그 행정은, 경찰법의 행정은 우리나라에서 옛날 같으면 내무부에서 하죠. 지금은 행정안전부소속이죠. 그 법은 뭐냐 하면 하나의 국가, 사회자체에서 각자가 한 노동력의 가치를 인정해주자. 왜? 노동력에서 나온 게 뭐냐 하면 사유재산입니다. 

그 사유재산 중의 하나가 뭐냐 하면 사립유치원이에요. 사립유치원은 뭐냐 사유재산이에요. 자기 재산 한 오억 들어가고, 은행 대출 한 이십억 내서, 이십오 억을 해가지고 유치원 했습니다. 땅 사고 집지으려고 하면 그만큼 들거든요. 유치원 했는데 지 월급만 받으면 안 되겠죠. 은행이자가 들어가야 하니까. 이것도 투자니까. 나라보증해서 몇 천 만원 벌어야죠. 안 그러면 안 되니까. 

벌려면 교사들 월급 줘야 돼요? 안 줘야 돼요? 여기 유치원 관련된 사람이 있어요? 교사들 월급 백만 원 주는가, 더 주는가 모르겠다. 이것도 4년제 2년제 따져가지고 좀 더 주는가 모르겠어요. 하여튼 이거는 엄청나게 적게 주고 유치원 원장은 몇 천 몇 백, 지 사업이니까 막 가져가는 거예요. 왜? 지가 투자한 게 있으니까. 사유재산이니까. 그걸 누가 보호해요? 국가가 보호해야 되고 그거 침해받으면 경찰이 동원돼야 해요. 

그러니까 경찰법은 뭐냐, 산 사람을 살리자는 거죠. 산 사람을 괴롭히는, 생명을 공격하는 사람, 예를 들어서 시장터에 불을 지른다든지, 사람 팬다든지, 이런 사람은 가차 없이 어떻게 해요? 경찰이 동원되는 거예요. 내가 힘센 사람에게 벌을 못 주잖아요. 경찰한테 신고하면 되죠. 연약한 어떤 여자가 얻어맞았다. 그래서 경찰에 신고하게 되면 경찰이 와서 그 사람을 잡아가지고 벌을 주잖아요. 치료비 다 물어내고, 정신적 치료비 다 물어내고 그렇게 해야 되겠죠. 

그 역할을 누가 합니까? 경찰이 한다고요. 경찰이 그렇게 하는 이유가 뭡니까? 우리나라보호하세가 아닙니까? 우리나라보호하세. 그렇게 우리나라가 보호되는 것을 우리나라에서는 뭐라고 합니까? 그것을 선이라고 합니까? 악이라고 합니까? 우리나라가 보호되는 것을? 이게 선이죠. 그러면 예수님 당시에 유대사회에서 어느 나라가 보호가 되는 것이 선이 돼요? 유대사회 질서가 유지가 되는 것이 선이죠. 

그 유대사회의 질서를 어지럽힌 사람이 누굽니까? 예수님이죠. 세례요한이고. 세례요한이 어떻게 죽었어요? 목 날아가서 죽었죠. 그때 세례요한의 목을 친 사람이 누구죠? 왕이죠. 왕은 그 나라의 정신적인 중추가 돼요. 모든 법의 정신, 모든 의로움과 정의로움과 진리의 중심부에 왕이 있어요. 따라서 왕이 결정하는 것은 곧 진리가 되고 정의가 되는 거예요. 

어떤 차이가 있느냐 하면은 나봇이 있는데, 나봇의 포도원이 있죠. 아합이 나봇의 포도원을 사려고 할 때, 나봇이 포도원을 자기가 경작해서 자기의 사유재산으로 봤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대대로 주신 상속이라고 봤어요? 상속이죠. 상속이라는 말은 주신분과의 교제와 연결이,  지금 땅에서 하나님과 계속 연결된다고 보는 겁니다. 이런 게 제가 설교하면서 굉장히 어려워요. 

왜냐하면 우리가 워낙 내 재산, 내 돈, 내 것, 여기에 있다고 보니까 누구하고 연결이 없어요. 나한테 이득이 있을 때만 일시적으로 내 사람이라고 간주하지만 내 재산이나 내 생명이나 내 목숨에 위협을 가하면 이건 남이 되는 거예요. 그러나 이스라엘에 있어서 나봇의 포도원이나  재산은 자기가 개간해서 열심을 내서 이룬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이어주는 매개라고 합니다. 매개. 두 바벨을 이어주는 역기봉처럼. 철봉처럼 매개라니까요. 매개가 없어지면 관계가 끊어지는 거예요. 

아모스, 하박국 이런 선지자들이 계속 이스라엘을 공격할 때에 하나님이 주신 상속을, 부자들이 그걸 자기 사유재산으로 착복했기 때문에 고발하는 겁니다. 왜 가난한 사람을 억압하느냐가 아니라, 가난하더라도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연결고리는 있어야 되는데, 연결고리 그걸 끊어버린 거예요. 방해한 겁니다. 오늘날 신약시대에 하나님과 우리와의 연결은 뭡니까? 한자로? 피죠. 피. 예수님의 능력이 아니에요. 피에요. 

일반교회에서는 주님의 전능하신 능력이에요. 능력이 아니고 피라니까요. 능력이 의가 아니에요. 부자 되게 만들고 건강하게 만드는 능력이 의가 아니고 뭐가 의입니까? 의는 피 안에 있어요. 왜 피냐? 능력 같으면요? 이게 부자일 것 같으면요? 둘 다, 인간과 하나님 둘 다 멀쩡해요. 그러나 피의 관계라고 하는 것은 한쪽은 의가 되고, 희생자가 되고 한쪽은 뭡니까? 죄인이 되는 거예요. 이게 지금 세상 교회에서 엉터리도 너무 엉터리거든요. 

이건 제가 목사를 탓할 수가 없어요. 고객들이 원하고 있어요. 제발 피 이야기 하지 말고 전능하신 능력 좀 이야기하라는 거예요. 내가 능력 받으면 줄 것 주겠다는 거예요. 십일조 정도는 내놓을 용의가 있다는 거예요. 우리 애가 공부 잘하고, 우리 집안만 잘 일어나면, 내 인생 만회하게 되면 그까짓 것 다이아몬드라도 바치겠다고 이래 나온다 이 말이죠. 

교회가 아니고 무당집이라니까요. 위에 달린 십자가를 볼 때 십자가가 아니고 바람에 휘날리는 대나무로 보시면 돼요. 안에서 찬송소리 나잖아요. 그 찬송소리를 뭐로 들어야 하느냐 하면 굿하면서 북소리 나잖아요. 장단도 안 맞는 딱딱한 것, 칭칭칭칭~~하는 것 있잖아요. 무당굿하고 있는 거예요. 그게. 그러니까 뜨겁다 하잖아요. 뜨거워지거든요. 지가 열 내니까 뜨겁죠. 성령 받았다고 합니다. 그런 교회를 탓하기 전에 우리는 우리 자신을 독자적인 실체로 보는 경향이 없는가 하는 것을 되돌아보세요. 

주님을 조명하는, 주님이 투영된 하나의 이미지, 스크린에 불과하거든요. 이쪽은 좁은 스크린이지만 어쨌든 스크린이에요. 좁든 넓든 간에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이미지가 중요하지 무슨 넓은 아파트에 사나 좁은 아파트에 사나 중요하지 않아요. 얼굴 잘 생기고 못 생기고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배우고 안 배우고 관계없어요. 몸이 아프고 안 아프고 관계없어요. 아파도 그게 주의 이미지입니다. 아픈 사람은 좀 서러운 이야기이지만. “간암 걸렸어요.” “주님의 이미지가 이번 차례는 간암순서구나.” “간암인데 위암으로 전이가 되었어요.” “아, 이번엔 위암으로 전이된 이미지네.” 

이 세상의 선과악은 둘 다 멀쩡한 가운데 결정합니다. 근데 베드로전서에서 유일하게 의는 뭐냐, 능력이 아닙니다. 제가 이렇게 아무리 해도 “목사님, 어떤 교회에서 실제로 기도해서 능력  받았습니다.”라고 하면 또 ‘실제로’에 다 넘어가요. 실제로. 실제로 그 사람이 부자 됐고, 실제로 애들 공부 잘하고, 실제로 애 건강하고, 열세 살 때 미국 가서 공부해 하버드에 들어가 있고 하는 거예요. 구라지만. 실제로 SKY캐슬인지 롯데 캐슬에 살고. 전에는 지하에 살다가 이제는 실제로 돈 많이 벌었다는 겁니다. 회개하니까 능력 받아서 그렇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축복해줬다는 겁니다. 

그런 이야기를 하는 자체가 은근히 자기도 그런 축복을 기대하고 관심을 두기 때문에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이 아니에요? 예수님 피 이야기는 안 하고 자꾸 누구 능력 받았다고 하면서 “그거 엉터리죠?”라고 하는데, 가만히 들어보면 그게 진짜 아무것도 아닌지 아니면 시기해서 자기 몸이 관리가 안 되어가지고, 사돈 논 사니까 배가 아파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지 분간이 안 돼요. 

다시 한 번 정리해드릴게요. 능력이 의가 아니고 피가 의에요. 피가 의가 되려면 그 피 안에서 우리가 무슨 입장이 될 수밖에 없습니까? 바로 죄인이라는 이미지로 살 수밖에 없습니다. 죄인이라는. 죄인이기 때문에 피가 그야말로 무한한 능력입니다. 오늘 여러 가지를 묻는데, 자 물어봅시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인데요. 예수님께서 하신 질문이에요.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자기한테 유익입니까? 유익이 아닙니까? 유익이 아니죠.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안 되죠. 그 온 천하를 얻는 것이 자기 목숨을 잃게 하는 요소라도, 그래도 온 천하에 절하겠습니까? 악마한테 절하겠습니까? 배운 가락이 돈에 절하는 것밖에 안 배웠으니까 절하죠. 가정교육을 그래 받았으니까. 교회에서 그렇게 교육받았잖아요. 

돈 많은 것이 축복이고, 축복이 능력 받은 거고, 능력 받으면 천당 가지 말라고 해도 천당 가는, 그러한 낭설이 유포되지 않았습니까? 낭설이. 교회 온 것 때문에 갑자기 잘 됐다. 이러한 낭설이 있다니까요. 자기 목숨을 유지하려고, 천하보다 귀한 목숨이기 때문에 목숨을 붙들고 유지하려고 교회에 다니는 거예요. 

그러나 진짜 교회에 오지 말고 주님 앞에 가게 되면, 니가 붙든 그 목숨 때문에 진짜 목숨이 숨이 막힐 지경입니다. 훼손되고 있어요. 그러면 살고자 하는 것이 자기를 죽고자 하는 것이 돼요. 근데 그 생명이 어디서 나오는가, 죄 속에서 나오거든요. 죄 속에서 주님이 참여한 거예요. 아까 안양강의에서 했지만 그걸 성육신이라고 합니다. 이 세상은 인간들만의 세상이 아니고 주님이 합세한, 주께서 이미 뛰어든 세상이에요. 

이걸 잊어버리고 깜빡하게 되고 놓쳐버리면 세상 제대로 분석 못하는 겁니다. 인간들의 세상으로 보지 말고 주님이 합세한 세상이다 이 말이죠. 세상의 중심부가 뛰어들었어요. 그럼 세상의 의미는 어디서 찾아야 됩니까? BTS? 방탄소년단에서 찾아야 돼요? 빌보드에서 찾아야 돼요? 제가 세상 중심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찾아야 된다고 하면 갑자기 조회수 1위로, 십자가가 1위로 올라갑니까? 안 올라가죠. 

예수님이 나타나도 조회수가 방탄소년단한테 밀리가 되어 있어요. 그런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그런 세상에.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뭐 알고나 살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알고는. 하나님의 의를 짓밟고 지옥 가는 것만 우대받는 세계에 우리가 지금 던져져있는 존재입니다. 사도도 그걸 의식하고 이야기를 하죠. 

자, 경찰이야기를 다시 해봅시다. 경찰은 왜 있다? 사유재산과 우리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 경찰이 있는 거예요. 그럼 경찰에 있어서 재산 지켜주고 목숨 지켜주면 그걸 악이라고 봅니까? 선이라고 봅니까? 그걸 선으로 보는 거예요. 왜 제가 경찰과 예수님의 차이점을 이야기하느냐 하면은, 오늘 본문 2장 20절에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이렇게 이야기할 때, 그냥 이 대목을 어떤 의식으로, 어떤 선입감으로 보느냐 하면은 경찰 앞에서 죄를 안 지으면 그건 의롭다, 라는 의식을 가지고 그대로 이걸 해석해요. 

나는 그동안 이만큼 살아온 것도 나쁜 짓을 안 해서 그렇다는 거예요. 사회적으로 나쁜 짓 안 하고 교도소에 갈 짓 안 하고 파출소에 갈 짓을 안 했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나는 선한자로 규정되어가지고 하나님께 복을 받는구나, 라고 이렇게 생각할 가능성이 농후한 겁니다. 그렇게 돼버리면 그 선은 어떻게 되느냐 하면은 계속해서 개선해야 되고 업그레이드해야 될 선이 되는 거예요. 더 착하면 복을 더 받게 되니까. 

그러나 그건 최종성입니까? 최종성이 아닙니까? 그건 최종성이 아니죠. 그건 최종성이 아니잖아요. 오히려 그 선과 악의 구조에 누가 억울하게 돌아가셨습니까? 예수님이 억울하게 돌아가셨죠. 그러니까 예수님의 의는 수순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인간들의 선과 악이 먼저 설정이 되어 있어야 되고, 그 선과 악의 가치가 완전히 왜곡되어 있고 반대로 되어 있다는 것을 까발리기 위해서 예수님은 의인이면서도 죄인의 모습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겁니다. 

우리는 그 십자가를 사랑합니다. 뭐 나만 사랑하나? 그 십자가를 사랑합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은, 이 세상이 전복되기를 원합니다, 라는 것과 같은 말이에요. 이 더러운 세상 발칵 뒤집어지기를 원합니다. 빨리 하늘에서 소돔과 고모라에 내렸던 유황불을 떨어뜨려주시기를 원합니다, 라는 그 말이에요. 모든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하는 것 차제가 이미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서는 의미가 없어요. 그 자체로 의미가 없어요. 그 자체로. 

근데 사람들은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먹고 마시고 하는 그걸로 의미를 종결시킵니다. 그게 마감이라고 보는 거예요. 그리고 그걸 더 키운다고 보는 겁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우리에게서 천국 가는 길이 있다고. 길은 없어요. 막혀있죠. 십자가로 완전히 스크린화된 거예요. 막혀있어요. 막혀있다는 말은 니 힘으로는, 니 식으로는 못 간다. 니가 변화되지, 달라지지 않고서는 올 수 없다는 거예요. 

천국은 넣어주는 것이 아니에요. 천국은 달라짐이 선행되어서, 달라지게 하는 그 능력에 의해서만, 그 능력이 임한 사람만 천국에 들어가는 겁니다. 그러면 천국으로 달라질 때 어디서부터 어디로 달라져야 하는가, 둘 다 그냥 달라져야 한다고 하면 안 되죠. 달라져야 될 원래의 자리는 무엇이며 그것이 달라질 때 어떻게 달라지는지, 둘 다를 알아야 되겠죠. 처음에 둘 다를 알기 위해서는 달라지기 전에 우리의 모습을 확실하게 규정해야 되죠. 

그 규정하는 것은 뭐냐 하면 예수님에 대해서 “나는 싫어!”라는 그것이 나의 본심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줘야 해요. 예수님이 하시는 말, 예수님이 하시는 모든 주장, 사상, 철학, 그리고 예수님의 세계관, 안목, 다 마땅치가 않아요. 전혀 내가 원하는 것도 아니고 내가 필요한 것도 아니고 나한테 구미가 당기는 것도 아니에요. 

선악과의 특징은 뭡니까? 이게 꼴 보기 싫은 나무에요? 당기는 나무에요? 미혹당할 만한 나무죠.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탐스럽기도 하니까. 미혹당할 만한 나무라 결국은 따먹었잖아요. 미혹 받아 따먹었잖아요. 그러면 예수님은 어떻습니까?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는 정반대죠. 모든 사람이 보고 외면해버렸어요. 꼴 보기 싫다고. 꼴 보기 싫은 사람이 우리의 구원자로 오셨다? 뭐 이런 주님의 아이디어가 다 있습니까? 뭐 이런 아이디어가 다 있어요? 

이 말은 뭐냐, 니 판단에 의해서 예수님을 믿을 재주가 우리한테는 아예 없다는 거예요. 우리가 예수를 제대로 몰라서가 아니라 아예 우리가 싫어하는 쪽을 통해서 예수님이 접근해온다는 거예요. 우리가 싫어하는 것, 우리가 배척하는, 우리의 본성상 이거는 받아들이고 저거는 배척하는데, 그 배척하는 노선 쪽에서 주님이 접근해온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가 선호하는 메시야를 가지고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고. 왜? 그거 역시 내 잘되는 것이죠. 내 잘되는 쪽으로. 

그러나 주님 쪽은 뭐 얼굴이 이쁘고 잘생긴 게 아니라 그 말하는 내용 모든 것이 나의 목숨을 내놓으라는 식으로, 목숨을 니가 관리하지 말고 니가 아예 포기하라는 식으로 다가오니까 우리가 예수님에 대해서 거부하지 않으면 안 될 수밖에 없어요. 예수님에 대해서는. 예수는 곧 누구다? 우리가 거부할만한 자. 그래서 예수 믿는다는 말은 구라죠. 김구라 최구라 이구라...,예수 믿는다는 것이 구라에요. 우리의 본성상 전혀 부합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히 됐죠. 달라지지 않죠. 주님이 죄인이라고 하면,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의 착실하게 살았습니다, 이만큼 가정 이룬 것도 내가 얼마나 고생했다고요, 라고 나온다고요. 예수님을 볼 때에 우리가 남을 보는 방식으로 우리가 예수님을 봅니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인간 대 인간의 만남은 뭐로 만난다? 자기의 목숨을 버리는 것이 아니고 내 목숨을 살찌우기 위해서 상대방을 어떻게 좀 이용해볼까 하는 심보로서 만나게 되죠. 

그 심보로 만나게 되니까 예수님도 이용가치가 있는가 하고 생각해볼 때, 물론 가짜예수는 전부 다 이용가치가 있죠. 그러나 진짜 예수님은 뭘 앞장세운다고 했습니까? 죄를 앞장세우고 그 다음에 피를 앞장세우잖아요. 죄 앞장세운다는 그것부터 이미 듣기 싫어요. 능력주시는 분을 원하지 죄를 앞장세우는 분은 싫어요. 그 다음에 그 구원의 방식도 내 쪽에서 약간이라도 뭔가 보탤 때 내 자존심이 사는데,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구원은 인간이 구원하는 것이 아니죠. 누가 구원합니까? 우리 인간은 구원을 못하고 오히려 있는 구원도 방해하죠. 내 구원을 내가 방해한다니까요. 

주께서 우리를 맨날 구원해도 내가 나서서 내 구원을 내가 방해해요. 그런 경우는 실제로 일상생활에 많이 있어요. 남편이 가정을 일으키기 위해서 노력해서 돈벌어다주니까 여자는 사채놀이 하다가 전부 다 돈을 날려버린 거예요. 남자는 가정을 일으키려고 하는데 여자는 전부 다 그 돈을 꼬임에 빠져서 도박하고 돈을 다 날렸다고 합시다. 집구석 좋겠다. 

주님은 피로서 구원하고자 하는데, 우리는 내 행함의 가치를 덩달아 고려해주세요, 라고 요구를 하고 있는 거예요. 내 기도와 내 헌금과 내 노력과 경건과 선함이라는 이것도 구원에 보탬이 된다고 좀 이야기를 해주세요, 라고 나서는 거예요. 그러면 복음을 아는 목사 입장에서는 뭐라고 합니까? 그게 바로 죄입니다, 그게 주님에 대한 모독이에요, 라고 하죠. 

그러면 삐친 데에다가 더 삐쳐가지고, 그래가지고 교회되는가 한번 보자! 라고 하죠. 교회하려고 했어요? 교회되고 안 되고 문제가 아니라 저게 옳기 때문에 그래요. 옳기 때문에. 저게 성육신의 취지에 맞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말은 옳기는 옳은데 제가 거기에 동의하고 싶지 않네요. 이러면 10분 쉬어야 하죠.

 이미아 (IP:122.♡.170.138)19-01-13 00:23 
서울의존강의20190111b 베드로전서2장 20-21절(최종성)-이 근호 목사 

자, 두 번째 시간을 합시다. 예수님이 성육신으로 이 땅에 개입하심으로 세상이 미쳐 돌아간다는 세상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걸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누구한테 시험을 받았느냐 하면은 마귀한테 시험받았죠. 그 세상의 정신이 예수님과 맞닥뜨렸던 그 마귀, 마귀의 정신으로 완전히 무장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그 사상에서 못 빠져나와요. 사실 모두가 마귀의 자식이라고 보시면 되죠. 사람은 떡, 돈이 최고고, 돈은 떡의 교환수단이니까. 떡으로 살고 돈으로 사는 거예요. 그리고 사람은 혼자 살면 외로우니까 인기 있을 때 한 사람보다도 여러 사람, 천명 만 명, 조회수가 일억이 되면, 재원이 노래가 조회수가 한 일억이 되면, 좋아요! 누르기가 한 일억이 되면 고정수입만 해도 엄청나죠. 그러면 능력을 받은 것이 아니고, 죄를 많이 받은 게 되죠. 

그 다음에 세상의 인간이 설정한 그 목표라는 것, 목적이라는 것은 세상에 있는 권력에 대해서 유혹되게 되어 있어요. 마치 악마가 선악과를 이용한 것처럼. 인간이 뭘 원하는지를 악마가, 이 세상 신이 다 장악하고 있고. “내 말을 들으면, 내 영혼을 나한테 다 팔아버리면 이것 줄게.”라고 빅딜을 하게 되어 있어요. 영혼을 팔면 성공하고 영혼을 안 팔면 너는 이 땅에서 개처럼 너는 빌빌거리다가 너는 소리 없이 죽는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예수님의 대처는 딱 하나밖에 없습니다. 내가 이 악마에게 이기는 것은 딱 하나밖에 없어요. 아버지로부터의 지시에 종속되는 거예요. 내가 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가 가라하는 대로 하라하는 대로 하기만 하면 돼요. 여러분들이 성도로서 난처한 지경에 있을 때에 바르게 살라고 하지 마세요. 그거는 악마의 시험이에요. 바르게 살라고 하지 말고 주께서 시키는 대로만 해야 해요. 

왜냐하면 세상에서의 그 의로움과 가치라고 하는 것은 인간에게 일임한 게 아니고 주님이 개입했기 때문에 그래요. 내 인생이 있는데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관리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알아서 혼자 낑낑거리는 것이 아니고 이미 내 인생에 주어진 모든 상황은 누구의 개입이라고 했습니까? 주님의 개입입니다. 주님의 개입으로 벌어지는 모든 상황 속에 있기 때문에 주님의 지시에 따라야죠. 주님의 지시에. 

그 주님의 지시가 뭐냐 하면 말씀대로 사는 게 아니에요. 우리는 말씀이 내용도 몰라요. 법의 내용도 모르면서 일방적으로 이거는 지켰다, 안 지켰다고 하지를 못해요. 뭐냐 하면 내가 내 관리와 내 능력을 포기하는 쪽으로, 내 목숨을 버리는 쪽으로 주의 지시가 이어지는 겁니다. 잃는 자만이 얻을 수 있어요. 그것도 주를 위해서. 주님을 위해서 자기 십자가를 진자만이 주의 계신 곳에 갈 수가 있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제자리 뛰는 것이 아니고 주님을 따라가야 해요. 나를 따라오라 했으니까. 

마태복음 16장에 나오는 말씀인데, 26절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온 천하에서 그 온 천하가 우리의 목숨을 살린다? 못 살린다? 온 천하가 못 살려요. 나를 살릴 수 없는 온 천하의 사람에게 지금 매료가 되어 있습니다. 모든 회사라든지 모든 가정이라든지 가정교육, 자식교육, 부부생활, 이 모든 것이 목숨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있는 목숨도 저주받는 쪽으로, 거기에다가 방향성이, 성격이 고정되어 있어요. 

한 마디로 이 세상은 미친 세상이에요. 이 세상이 미친 세상이기 때문에 안 미치려고 하지 말고 같이 미쳐야 돼요. 다른 곳에 미쳐야 돼요. 주님에 미치고 복음에 미치고 십자가에 미쳐야 돼요. 멀쩡하게 살 생각하지 마세요. 점잖게 살 생각하면 안 됩니다. 어차피 인간은 어느 쪽이나 한 곳에 미쳐야 되기 때문에. 지옥에 미치면 지옥 가고 천국에 미치면 천국 가는 겁니다. 

그런데 지옥에 미친 사람밖에는 없지 천국에 미친 사람은 없어요. 그게 왜 그러냐 하면 마귀가 인간의 정신과 양심을 뭐로 완전히 조립했느냐 하면 법적으로 가두어놨기 때문에 그래요. 법을 지키면 지킨 만큼 향상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면 묻습니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예수님은 죄인으로 죽었어요? 의인으로 죽었어요? 세상에서 취급받기를. 귀신들린 자로 봤죠. 미친 자로 봤죠. 율법의위반자로 봤죠. 요한복음 7장에서. 

그러면 우리가 이 세상에 속해 있지 않는 사람을 어디서 찾아야 하느냐 하면은 하나님의 의를 율법을 지키는 데서 찾지 말고 율법을 어기는 데서 의를 발견해야 돼요. 죄를 안 짓는 방법은 죄를 짓는 겁니다. 이번 아가서 수련회에서 제가 이야기를 할 것이지만, 간음을 안 하는 것이  간음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사랑하는 사람이 없으면 그게 간음법이 돼요. 

왜냐하면 나 자신만을 고집스럽게 붙들고 지키고 사랑하기 때문에. 그게 바로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존재 자체를 사랑했기 때문에 주님에 의해서 간음이라고 보거든요. 에스겔 23장에 보면 언니 오홀라와 동생 오홀리바가 나오죠. 자매가 전부 다 음란하다고 이야기한 것이 뭐냐,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자체를 위해서 살았기 때문에 그들을 간음이라고 본 겁니다. 남편을 잊어버린 거예요. 

다시 말해서 사랑할 대상이 없는 거예요. 자기한테 자기 목숨을 바친 겁니다. 그것보다 더 큰 간음은 없어요. 음행은 없어요. 방송에 나오는 죄인들, 사람 죽이고 도둑질한 사람들, 그 사람들의 죄는 뭐냐, 오직 자기 자신만을 사랑한다는 겁니다. 사랑할 대상이 없다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자기가 목숨을 바칠 대상이 없다는 거예요. 

요즘은 유행이 전부 다 혼자 사는 것이 되죠. 아내는 아내대로 혼자 살고 남편은 남편대로 따로 살고. 각자 혼자 살아요. 한 집에 두 개의 세계관이 같이 있는 겁니다. 한쪽은 개 키우고 한쪽은 아무것도 안 키우고 뭐 이런 식으로. 진리는 법에 있는 것이 아니고 법을 위반하는 그 현장에만 비로소 진리가 나타나요. 법이 위반되지 아니하면 진리가 안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법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위반자임이 이미 확정적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법이 있는 거예요. 율법을 더한 것은 새삼스럽게 잘해보자는 것이 아니에요. 잘 할 수 있다는 뜻도 아닙니다. 니는 니를 몰랐어, 라는 뜻이거든요. 율법에 의하면 니가 얼마나 평소에 죄 짓고 있느냐를 들통 내기 위해서 법을 준 거예요. 

요한복음 8장에 보면 거기에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자가 있죠. 그럴 때 바리새인들이 돌을 던지려고 하니까, 주님께서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했죠. 간음한 자가 간음한 자를 돌로 칠 수 있습니까? 율법을 시행하려면 율법에 의해서 완전한 자만이 시행할 수 있어요. 완전히 죄 없는 분만이 율법을 시행할 수 있어요. 율법대로 처리하고 실행에 옮길 수가 있습니다. 죄인은 율법을 거론할 자격도 안 돼요. 

그런데 우리가 너무나 율법을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법 없는 곳으로 도망치기 바쁘기 때문에. 현대인들은. 법이 없는 곳으로 도망치기 바쁜 이유가 뭐냐, 그래야 남은 거라도 자기가 의롭다고 우기고 싶어서 그래요. 왜 말씀을 안 듣고 말씀도 안 보고 복음도 안 듣는 이유가, 얼 추 자기 자신을 괜찮은 존재로 계속 지켜내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드라마 같은데 그런 것이 있잖아요. 하여튼 막장드라마를 120회 한다고 한다면, 1회부터 119회까지는 볼 것이 없어요. 마지막 회만 보면 돼요. 마지막에 가서 범인은 정신병자가 되고 끝나요. 1회부터 120회까지 계속 가는데, 다 들통 났거든요. 거짓말한 게. 그때 그 죄인이 귀를 막고 말합니다. “그만! 그만! 그만하란 말이야!”이러잖아요. 이게 오늘날 현대인들의 모습이에요. 

왜 그만하라고 합니까? 현재 누가 나한테 지적을 안 하면 나는 나름대로의 건전하고 괜찮고 살만한 가치가 있다고, 나름대로 우길 수 있는 근거를 내가 장만하고 있다고 여기는 거예요. 장만하고 있다고. 이 정도 열심히 살았으면 이 정도 맛있는 스테이크는 썰 자격이 있지 않느냐? 이런 식이에요. 왜 팔순잔치, 칠순잔치를 뷔페 집에서 합니까? 팔십년 살고 칠십년 살았으니까 뷔페정도는 먹을 자격이 있다고 당당하게 돈 내고 식구들 모아서 팔순잔치, 칠순잔치를 하는 겁니다. 집에서 하려고 하니까 골치 아프고. 집에서 하면 음식 되지도 않고 떡이 되고 번잡스럽고. 음식 잘했네, 못했네, 궁시렁하는 소리나 들리고. 

주님께서 말씀하는 선이라고 하는 것은 선의 최종성이 있기 때문에. 선의 최종성은 예수님의 행하심이 곧 법이 돼요. 법이 정답이에요. 법이 되고. 왜? 예수님은 왕이시니까요. 그러면 예수님이 율법 보는 해석과 인간들이 율법 보는 해석과 같을까요? 다를까요? 다르죠. 인간은 자기가 의롭게 되기 위해서 법을 보는 반면에 예수님은 이미 지키든 안 지키든 상관없이 죄인인 게 확정되었음을, 최종적으로 확정되었음을 알려주기 위해서 율법을 해석하기 때문에. 

인간은 어떤 기대를 가지고 보지만 주님은 기대할 게 없다고 아주 확정짓기 위해서 이미 결론이 난 문제를 가지고 해석을 한다 이 말이죠. 니가 법적으로 니가 의로울 게 하나도 없다. “열 개 중에서 아홉 개는 지켰잖아요?” “한 가지 어기면 다 어긴 것이다.” 이게 주님 쪽에서 나온 결론이라 이 말이죠. 최종성이니까. 

그러나 우리가 세상에서 살 때는 뭐냐, 그래도 열 문제에서 아홉 문제 맞혔으면 90점이라는 거예요. 90점 가지고 지옥가라 이 말이에요. 90점 가지고 지옥가면 돼요. 온전하지 아니하면, 100점이 아니면 천국에 못 가요. 다시 말해서 천국 못 갑니다. 뭐 궁시렁궁시렁 할 것이 없이 우리는 천국 못 가는 거예요. 그러면 지옥세상입니다. 

지옥세상의 특징은 뭐냐 하면 인간들이 전부 다 미쳤어요. 미쳤으니까, 우리가 여기 복음에 미쳐도 괜찮아요. 왜? 니는 복음 아닌 것에 미쳤으니까. 이래나 저래나 안 미친 사람이 없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안 미치려고 애를 써요. 그게 더 미쳤어요. 제가 보기에는. 정상적이고 싶어요. 수련회에 가려고 하는데 남편이 반대한다, 그 말은 뭐냐 하면 정상적인 가정이고 싶다 이 말이거든요. 미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날려버렸어요. 

왜 가정을 유지하려고 합니까? 남들 보기에 저 가정은 참 정상적인 가정이라는 미친 사람들의 평에 너무 신경을 많이 써버려서 그래요. 그들은 평할 자격도 없어요.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했잖아요. 가정은 주님이 조성한 것이지 다른 사람의 눈치 봐서 조성한 것이 아니에요. 주님이 조성한 거예요. 그렇다고 해서 수련회에 억지로 오려고 하지 마시고요. 뭐든지 억지로는 악마의 일이지 성령의 일이 아닙니다. 자연스럽게 넘어가면 돼요. 어디 뭐 수련회 와야 구원받습니까? 한 번도 안 온 사람도 있는데. 괜히 압력 주는 것 같아서 미안한데요. 

우리가 스스로 자기를 생각해봐야 해요. 내가 지금 잘못된 신념을 갖고 있지는 않는가? 돌아보세요. 예수 십자가를 생각하고, 모든 게 십자가 중심으로 생각나는 게, 이게 내가 과도한 잘못된 신념자라는 것이 아니냐 하는 겁니다. 신앙이 아니고 신념. 엉터리인데 그게 진리라고 굳게 믿는 이 정신병자, 사이코가 아니냐? 스스로 사이코가 아닌지를 점검해보라 이 말이죠. 좀 조용하게 살면 안 됩니까? 물 흘러가는 대로 자연스럽게. 

아, 예 좋아요! 그거 좋거든요. 근데 자연스럽게 살아서 미쳤습니까? 안 그러면 자연스럽게 살아서 자기가 정상인처럼 느껴집니까? 어느 쪽입니까? 자연스럽게 살아서 정상인처럼 느끼면 그거 지옥 가는 겁니다. 자연스럽게 살았는데 진짜 미쳐가더라, 그러면 그건 천국 가는 사람이에요. 어쨌든 목적이 뭐냐, 주님이 미쳤죠. 제자들 다 미쳤잖아요. 성령이 임한 사람은 다 미쳤거든요. 오죽했으면 세상한테 미움을 받을까요. 얼마나 미쳤으면. 

그런데 우리는 뭐냐 하면은, 그런 미친 사건에 주목하지 않고 그 사건이 주는 결과를 따먹으려고 해요. 자, 어렵게 갑니다.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났죠. 사건입니까? 사건 아닙니까? 사건이에요. 왜? 사건은 뭐냐 하면 내가 원인으로서 가담하지 않은 것은 사건이에요. 내가 원인으로서. 우리가 태어날 때 우리하고 의논해서 태어난 게 아니잖아요. 그러면 내가 개입하지 않은 것은 사건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냥 주어진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어느 점을 자꾸 주목해야 해요? 없었던 내가 새로 생겼다. 거기에 주목해야 하죠. 왜냐하면 거기에 누가 개입했습니까? 내가 개입 안 했는데 내가 여기에 있다는 말은 누가 개입했다는 말이죠? 나를 누가 만들었다는 말입니까? 주님이 만드셨잖아요. 근데 과학은 주님을 허용하지 않고 주님 대신 과학적 확률을 집어넣었어요. 1억분의 1의 확률로 정자와 난자가 만나서 니가 태어났다는 거예요. 

왜 그런 소리를 하는 거예요? 뭐를 제키고 뭘 빼기 위해서? 이 세상에 주님이 일으킨 사건이 없다는 것을 명확하게 그걸 가로막기 위한 악마의 술책이 과학입니다. 주님이 개입했다는 생각을 안 하고, 주님이 우리를 만들었다는 생각을 안 하고 확률이라는 거예요. 확률. 여러분, 확률은 뭐냐 하면 여러 가지 가능성을 의미하는 것이지 확실한 게 아니에요. 가능성이 높아지면 없는 데서 새로 생긴다는 겁니다. 

그 확률에 의한 과학이 뭐냐 양자역학이라는 거예요. 양자역학. 확률로 시작해서 확률로 끝나는 거예요. 확률을 더 정밀하게 가져가는 것이 미분이고 그 미분에 대한 내용을 모은 것을 적분이라고 합니다. 수학에서 뭘 배워요? 미분, 적분을 배우죠. 확률을 높이자는 겁니다. 그것 높여서 뭘 할 건데? 우리를 살리는데 도움이 된다는 거예요. 뭘 살리는데? 내 목숨을. 그 목숨이 목숨이에요? 그게  목숨입니까? 그 목숨은 어디 갈 목숨이냐 하면 지옥 갈 목숨이에요. 

우리는 아무리 복음 듣고 성경을 봐도 우리는 자꾸 어디에 영향을 받느냐 하면은 나를 지옥 보내는 그러한 일들에 대해서 너무 심한 영향을 받고 있어요. 마귀는 우리를 지옥 못 보내서 아주 환장을 했어요. 사실은 마귀도 미쳤어요. 마귀와 같이 미친 것을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정상인이라고 합니다. 정상인. 이 정상인의 특징이 뭐냐 하면 선과 악을 우리가 결정하자. 이게 정상인입니다. 옳고 그름을 우리가 결정하자는 겁니다. 뭘 참고로 해서? 성경을 참고로 해서. 율법을 참고로 해서. 

그러면 사건은 날아가 버려요. 사건 대신 확률만 남아있어요. 다시 말해서 확률은 뭐냐, 우리가 원하는 사건은 우리가 노력하게 되면 유사한 사건은 우리가 만들어낼 수가 있다는 거예요. 자, 거듭남이 중생이죠. 다시 묻습니다. 태어난 것이 사건입니까? 노력한 거예요? 사건이죠. 그러면 예수님에 의해서 다시 태어나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간다고 했으니까, 다시 태어남이니까 이거는 사건을 의미하죠. 그런데 사람은 그 사건을 내가 빡세게 기도해서 응답받고 노력하면 그 다시 태어남이 우리 힘으로 가능하다고 본 거예요. 

이게 어디서 배워먹은 정신병자냐 하면 마귀한테 배워서 그래요. 마귀한테. 열심히 성경보고 열심히 기도하게 되면 우리가 거듭날 수 있다는 거예요. 성령이 안 주고는, 성령이 오지 않고서는 못 배긴다는 겁니다. 우리 힘으로 거듭남을 우리가 생산해내고 창조해낼 수 있다는 거예요. 지가 완전히 창조자에요. 지가. 문제는 다들 그러고 싶은 거예요. 제가 뭘 하면 거듭납니까? 라는 질문 자체가 이미 우리의 가능성을 집어넣고 물음을 그런 식으로 묻는 거예요. 

교인들이 다 그런 마음을 갖고 와요. 노골적으로 저한테 와서 묻는 사람도 드물지만. 사실은 잠재적으로 그런 질문을 가지고 와요. 안 미치려고 하는 겁니다. 안 미치려고. 한 평생 살면서 미쳐보는 것도 괜찮은데. 미쳤다는 말은, 남들이 귀하게 여기지 않는 거기다가 자기 목숨을 거는 것을 말하는 거예요. 

목숨을 유지하는 것이 되는 것이 아니고 목숨을 어디에다가 던져 넣어야 해요. 목숨보다 더 귀한 것을 발견하고 거기다가 던져 넣는 겁니다. 내 목숨 줘도 아깝지 않는 곳이 있어야 돼요. 그게 없으면 우리는 세상 따라 가게 되어 있어요. 내 목숨 아깝죠. 하지만 내 목숨보다 더 귀한 것이 있다면 아낌없이 드리리다가 되는 겁니다.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나 그대에게 모든 것을 준다고 했잖아요. 신성일이가 안인숙보고 이야기를 했지요. 별들의 고향에서 이야기를 했죠. “오랜만에 누워보는군.” 이런 대사 나와 가지고.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그 노래를 누가 불렀죠? 이장희가 불렀죠. 그게 아가의 사랑입니다.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릴 수 있는 사람을 만난 것이, 이건 그 사람한테 미침인데, 미침에서 오는 그 행복은, 희열은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죽음을 이기죠. 천하보다 더 좋아요. 

어떤 것이 천하보다 더 좋은가 하면은 내 목숨을 유지하려고 하는 것보다 차라리 그에게 내 목숨을 몽땅 다 쏟아 붓는 것이 내 존재의 가벼움을 제공하죠.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들아 내게로 오라. 나는 아버지께 다 바쳤잖아.” 다 탈탈 털어가지고 주의 십자가 피에다가 모든 것을 거기다가 던져버리라 이 말이죠. 던져버려라! 인형 뽑기는 오백 원 주고 인형 못 뽑으면 이거는 헛방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던져 넣는 것 자체가 이미 어떤 바깥에 있는, 내가 예상 못한 내 목숨을 유지하려고 하는 그 바깥세계에서 니 목숨을 새로운 사건으로, 거듭난 사건으로 바꿔줄 그 세계 안으로 이미 우리가 들어와 버리게 되면, 쑥 들어와 버리면 그 안의 세계가 무슨 세계냐 하면 십자가 세계에요. 성령 안의 세계입니다. 그거는 하나의 사건이에요. 사건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거기다가 보탠 적이 없는 사건. 그 십자가 안의 세계에서 나는, 나의 의미, 나의 가치 일체 인정받지 못합니다. 

지난 수요일에 설교한 것을 잠시 해볼게요. 지난 수요일에 한 설교의 부분이 있다면 그겁니다. 구원의 표준형은 내가 만들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근데 사람들은 내가 구원됐느냐 하는 그 표준형을 내 쪽에서 만드니까, 지가 지 숟가락으로 지 눈을 찌르는 것하고 똑같은 거예요. 내가 만들어놓고 내 기준에 내가 쫓아가려고 헉헉거리고 있어요. 

주님의 구원의 표준형은요, 수요일 설교에서는 요셉의 울음으로 다 이룬 거예요.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다 이룬 겁니다. 그 피 안에 다 담겨있어요. 그 피를 내 선악의 행함으로 왜 자꾸 바꾸려고 시도하는 그것은 악마가 그렇게 자꾸 부추겨서 그래요. “니 선하게 될래? 미칠래?” 이걸 자꾸 따지는 거예요. “니 착한 사람 될래? 미칠래?” 이래 되는 거예요. 

그럼 선한 사람 돼서 지옥가세요. 선한 사람이 되면 이미지가 벽지 이미지가 아니라니까요. 또 더 선하기 위해서 동굴을 파야 돼요. 앞에 동굴 판다고 드릴나사 다 나갑니다. 교회충성, 교회충성 했는데 나중에는, 충성도 젊을 때 돈이 좀 될 때 알아주지, 나중에 퇴직해서 노인연금으로 살아가지고 돈 한 푼, 자기 점심 값도 안 되는 푼돈을 바치면요, 교회에서 그 노인네 별 가치가 없다고 내치게 되죠. 

그걸 토사구팽이라고 하죠. 젊을 때 사냥감으로 충실하게 부렸는데 이제는 더 나올 것이 없으면 내치죠. 왜? 교회라는 회사에 보탬이 안 되니까. 올라온 것 해주고 내쳐버려요. 안 내침 당하려거든 자식들 주려고 남겨둔 부동산 팔든지 땅 팔든지. 교회목사는 사람을 보는 게 아닙니다. 그 사람이 갖고 있는 동산과 부동산을 봐요. 보자~ 우리 외손녀 아민이 이야기인데. 보자~ 당신 비키세요. 얼마나 갖고 있는가? 자식한테 유산주려고 그린벨트 땅 사놨는지 한번 보자~ 이것만 본다니까요. 이것만. 그동안 많이 바친 그것은 소용이 없어요. 그건 다 까먹었어요. 

그래도 그 교회에 갖다가 목숨을 바치는 이유는 거기에 자기의 과거가 있기 때문에 그래요. 지금 와서 그 과거를 파기하기에는, 그 과거를 쓰레기라고 간주하기에는 그동안 퍼부은 내 울음이 너무 아까워요. 남자라는 이유로 덮어버린 그 세월이 너무 길어요. 가슴을 열고 이제는 울고 싶어요. 가슴을 열고 마음껏 울고 싶어요. 그동안 남자라는 이유 때문에 너무 참았어요. 그 세월이 너무 길어요. 이제 와서 그게 다 헛수고였다. 그게 바로 나로 하여금 지옥 보내는 일이었다고 이제 와서 고백하기에는, 누구한테 속았다는 그게 수치스러운 것이 아니고 내가 나한테 속았다는 그게 수치스러워서 내 자존심이 용납이 안 돼. 

연이은 패착(바둑에서, 그 자리에 돌을 놓는 바람에 결국 그 판에서 지게 된 나쁜 수)입니다. 장고(오랫동안 깊이 생각함)뒤에 패착 둔다고, 실컷 생각하고 했는데, 결국 그것이 뭐냐 하면은 남들 보기에 내가 얼마나 훌륭한 정상인이냐, 목표를 거기다가 둔 거예요. 미친놈이라는 생각이 들면 되는데, “저건 십자가 외에는 아무것도 몰라.” 이렇게 그런 소리 좀 들으면 되는데, “나도 할 만큼 했습니다.” 자꾸 자기를 정상인으로 하는 거예요. 

특히 누구한테 이런 경향이 많은가 하면은 좀 유식하고 배운 사람들. SKY캐슬 사람들. 평소에 남들 무식하다고 개무시하는 그 사람들. 그 사람들이 자기 고상함을 못 버려요. 아주 도도하기 짝이 없어요. 그놈의 콧대가 언제 꺾어질까? 말로는 쓰레기인데 쓰레기 아니에요. 자기를 하나의 고상한 실체로 본다니까요. 실체. 실체가 아니고 뭡니까? 그냥 얼룩무늬에요. 해병대 옷 입히고 싶어요. 그냥 무슨 소? 얼룩소. 송아지~ 송아지~ 얼룩송아지~ 엄마소도 얼룩소~ 엄마 닮았네. 오늘 제목은 엄마 닮았네. 

우리는 이미지에 불과해요. 이미지. 아무 두께도 없는 이미지에 불과하다니까요. 물론 공부 많이 한 거 맞아요. 근데 공부 많이 한 거 그냥 얼룩이에요. 얼룩. 이 벽지 벗겨버리면 뭐가 나오느냐 하면 종이 나와요. 종이. 인간 죽으면 흙 돼요. 나라는 자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돼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러면 그 세계는 누가 넣어주는가? 요한계시록 5장을 한번 봅시다. 5장을 보기 전에 다시 한 번 걱정이 돼서 묻는데, 사람이 정상이 된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은 내가 괜찮게 법대로 살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법대로 사는 것은 진리가 없어요. 법에 위반했을 때 진리가 있어요. 근데 그 법의 위반이라고 하는 것은 흔히 세상에서 말하는 경찰서에 왔다 갔다 하는 그런 나쁜 짓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의롭다는 것에 대해서 그다지 탐탁지 않게, 마땅치 않게 여기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내가 예수 없이 살아보겠다는 그 정신을 말하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나 예수 없어도 이 정도로 고상하고 잘난 존재라는 그것을 남 앞에 뽐내고 싶은 거예요. 예수님의 십자가, 나는 죄인이라는 것을 자랑하고 싶은 것이 아니고 예수 믿고 내가 훌륭하게 되었다는 것을 자랑하고 싶은 거예요. 그럼 그 사람은 미친 사람이 아니라 정상인이에요. 세상은 윤리도덕으로 경쟁하고 있기 때문에. 제가 보기에는 지금 법을 위반하고 십자가를 사랑하지 않고 있어요. 

근데 기꺼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자기는 죄인이 아니라고 우기는 거예요. 제가 보기에는 막 속 터지죠. 툭 치면 내놓는 게 “나 그래도 열심히 살았습니다.” 이게 나오더라 이 말이죠. 그게 무슨 성도에요? 손대면 톡하고 내가 터져 나와야 해요. 나의 고상함이 찢어지고 안에 죄가 들어있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가끔씩 뱃살 들어가라고 운동하면서 한 번씩 옷을 걷어보고 아랫배를 톡톡 손으로 쳐보세요. 북소리 나요. 통통통~ 안이 비어있다는 뜻이에요. 피부는 껍데기고 안에는 비어있는 거예요. 물로 차있든지. 

아가서에서 냉철하게 파고들어가는 것이 뭐냐 하면은 ‘인간은 겉모습이 전부다’라는 거예요. 겉모습이. 겉모습이 전부에요. 인간은 안에 아무것도 안 들어있다는 뜻이에요. 포장지로 포장은 되어 있는데 안에 아무것도 내용물이 없는 것. 그것 포장지를 가지고 서로 잘났다 못났다 경쟁하고 비교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우리가 말려들어서 심지어 자살까지 하죠. 집안에 먹을 것이 있어도 자살해요. 자존심 상했다고. 이 얼굴 들고 부끄러워서 못 다니겠다는 거예요. 아가서에서는 어디 보자. 코 있고 눈 있네. 그래서 뭐? 니 얼굴에 뭐가 있는데? 뭐 고상함이 넘치는 것 같은데 뭐예요? 그 얼굴이 아담의 얼굴이지 뭐 있어요? 

우리는 우리 보기에 볼 것 별거 없어요. 이쁘게 보이지만 나이 팔십, 구십 돼보세요. 안 이뻐요. 오죽했으면 사진을 안 찍겠습니까? 자기 사진보고 자기가 깜짝 놀라니까. 뭐 이런 귀신이 살아있네, 하고 깜짝 놀라요. 사진은 열여덟 살, 열아홉 살에 이래 찍고 저래 찍고 셀카 찍고 나란히 찍고 팔 올리고 찍고 얼짱 각도로 찍지만. 무슨 팔십 노인네들이 놀러가서 이래 찍고 저래 찍고 요래 찍고 이런 게 어디에 있어요. 없어요. 치워라! 치워라! 하죠. 친척들 결혼사진도 안 찍습니다. 단체사진도 안 찍습니다. 찍을 나이 지났다고. 사진 찍으라고 하는데 내가 못 찍겠다고 해가지고, 이거 실화입니다. 

요한계시록 한번 봅시다. 누가 읽어보세요. 5장 4절, “이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하기에 합당한 자가 보이지 않기로 내가 크게 울었더니” 됐습니다. 사도요한이 왜 울었느냐 하면은, 우는 이유가 뭡니까? 누가 꼬집었어요? 누가 돈을 떼먹었어요? 누가 밥을 안 줬어요? 왜 웁니까? 왜 울죠? 봉인된 책이, 이게 공개가 되어야 이게 현실화되거든요. 실현이 된다고요. 봉인된 책이 갇혀있어서 우는 거예요. 사도요한은 지금 미쳤어요. 어디에 미쳤습니까? 하나님의 성경책에 미친 거예요. 그걸 보고 사도요한을 존경한다고요? 존경하면 니도 한번 그렇게 살아보지. 이 성경책에 한번 미쳐보죠. 

성경책이 그냥 책이 아니에요. 이게 펼쳐지면 이게 세상이 되는 겁니다. 세상의 과거, 현재, 미래가 다 들어있어요. 그래서 요한계시록 1장에 보면 처음이고 나중이죠. 처음과 나중이 성경책 안에 다 들어있어요. 방금 제가 말한 이 멘트를 믿는 사람도 미친 사람이에요. 미친 사람이 너무 적어요. 성경 말씀이 현실이 아니라고 믿는 사람이 더 많고. 지금 예수님이 부활해서 활동한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이 너무 없어요. 근데 제대로 미친 사람이 없어요. 사도바울은 사랑에 미쳤다고 하는데 사람들은 안 미치려고 하고 있습니다. 사람 점잖네, 그 소리를 들으려고 해요. 점잖은 사람 하다가 지옥이나 가라. 거기가면 점잖은 사람들 많이 모여 있어요. 

자, 그러면 봉인되었어요. 웁니다. 크게 울었는데, 그 다음 5절에 봅시다. “장로(순교자)중에 하나가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대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이 책과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 아멘. 이 대목을 우리가 보면서, 이 책 저자가 우리 인간은 아닙니다. 그렇죠. 그러면 제가 문제를 제시한다면, 이 봉인된 책과 이 현실과의 관계는? 그게 문제입니다. 책 안에 있는 내용이 진리죠. 그렇죠. 그럼 진리가 책 안에 들어있으면 진리입니까? 진리 아닙니까? 진리 아니에요. 

그럼 뭐가 되어야 해요? 책 안에 갇혀있는 진리가 뭐를 필요로 해서, 이 빛이 더러운 악마의 세계를 필요로 해서, 악마의 세계가 펼쳐질 때 비로소 우리에게 진리가 다가오는 거예요. 예수님이 이야기했습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서 진리가 빛을 낳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디 소속이 되어야 마땅하죠? 악하고 음란한 세대의 일원으로, 거기의 일부라는 사실을 우리가 스스로 인정을 해줘야 돼요. 우리는 주님에게 미치기 전에 먼저 마귀에게 미쳤어요. 악마의 유혹에 미쳤습니다. 돈과 인기와 세상 권력에 미쳤어요. 이거는 예수님이 광야에서 맞닥트린 거니까. 

저는 강의하면서 속으로 생각해요. 도대체 이걸 좋아라고 듣는 사람이 있다는 게 이상하다고. 이런 이야기가. 자, 봉인된 책이 곧 현실화되려면 뭔가 그 중간에 개입이 되어야 해요. 유다지파의 사자, 사자라고 하는 것은 창세기(49:9)에 나오는 라이언Lion입니다. 사자는 메신저라는 뜻도 있지만. 유다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겼으니. 유다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겼다는데, 이게 지금 성경책에 나오거든요. 그렇죠. 다윗의 뿌리가 태권도 8단입니까? 어떻게 이기는 겁니까? 다윗의 뿌리가 칡넝쿨입니까? 칡넝쿨이 아니죠. 근데 어떻게 이기죠? 휙휙 감는 코브라에요? 그래서 이긴 거예요? 다윗의 뿌리가 어떻게 이기죠? 바로 죽음을 이긴 거예요. 

그러면 다윗의 뿌리, 예수님이죠. 예수님이 죽음을 이겼다는 것을 경험하기위해서 예수님은 어디에다가 몸을 던진 겁니까? 죄 죽음에다가 자기 몸을 던진 거예요. “할 수만 있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누구 뜻대로? 아까 했죠. 아버지의 지시가 중요해요.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그러니까 참된 거룩, 참된 경건은 뭐냐 하면 나를 포기하는 거예요. 아버지의 뜻대로 하게 하시면 내가 죄인인 것을, 내가 미처 몰랐던 죄까지 들추어내는 그것이 그게 곧 누구의 승리다? 다윗의 연속적인, 유다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의 승리가 되는 거예요. 

그럼 우리는 뭐냐, 날마다 주님의 승리의 현장으로 제공되면 이게 성도의 역할입니다. 내가 이기는 것이 아니고 날마다 누가 이긴다? 주님이 이기는 거예요. 주님이 이긴다는 그 모습이 뭡니까? “내가 이런 죄도 지었구나.” 내가 죄인이라는 것이 드러날 때 그게 다윗의 뿌리죠. 자, 그러면 한번 질문을 하겠어요. 유시민이 다윗의 뿌리를 이겼습니까? 못 이겼습니까? 유시민은 신을 안 믿기 때문에 못 이겼잖아요. 

못 이겼는데 거기에 대해서 본인은 사도요한처럼 웁니까? “주여, 어떻게든 주의 봉인이 풀리게 하옵소서.”라고 하면서 웁니까? 아니죠. 근데 본인을 정상으로 봐요? 죄인으로 봅니까? 절대로 죄인으로 안 보죠. 민주화투쟁을 위해서 투사로 보죠. 근데 그 사람의 그러한 기준에 대해서 우리는 그걸 최종성으로 볼 수 있습니까? 죄의 최종성으로. 못 보죠. 그 사람은 자기 자신한테 미친 거고. 그것이 바로 주님 앞에서 지옥 갈 죄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얼마나 감사한지, 지옥 갈 사람을 우리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어요. 문재인도 마찬가지고. 문재인은 천주교 신자니까 또 모르죠. 

다시 오늘 본문으로 돌아와 봅시다. 베드로전서 2장 21절 봅시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라고 되어 있죠. 아까 강의한 게 여기서 기억났네. 우리가 찾아가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의로움에 의해서 우리가 부르심을 입었다면 우리는 하나의 벽지와 스크린이 돼요. 스크린. 스크린골프 한번 해봐야 되겠네. 백날 공쳐봐야 그 골프공은, 실내골프장은 절대로 그 스크린을 넘어가지 않습니다. 툭 치면 떨어지죠. 저는 한 번도 안 가봤어요. 그것도 의인가? 거기 가봐서 죄를 지어야 하는데 아직까지 거기까지는 기회가 안 닿아서 골프 치는 그런 죄를 지을 수 있는 기회가 안 오네요. 

부르심을 입었다는 말은 우리가 단독적으로 살 수 있다? 없다? 불러주는 분과 연계되어 있으니까 주도권이 나한테 있는 것이 아니고 주도권이 누구한테 있어요? 주님한테 있죠. 이게 천사도 부러워 할 친한 관계, 친한 사이입니다. 여러분들이 뭐 내세울 게 없을 때 일가친척을 내세우잖아요. “나 무시하지마라. 우리 삼촌이 청와대 비서실장이 됐다.” 이렇게 할 때는 “고뤠?! 우와!” 그러면서 갑자기 잘하죠. 애들 빵 사준다고 이래 나온다고요. “삼촌이 청와대에서 뭐 댔대.” “고뤠?!” 그러면 갑자기 선생님도 애를 무시 못해요. 

그런데 “까불지 마! 나 주님하고 아는 사이다.”라고 하면 “이거 미쳤구나! 오죽 이 땅에서 가진 게 없으면, 변변치 못하면 그러한 신념이라도, 그런 신앙이라도 쥐고 있어야 위로가 좀 돼?” 이렇게 조롱당하죠. 그럴 때, “주여, 기쁩니다. 주의 이름으로 고난 받았습니다.” 이러지 말고 과연 내가 의도적인 신앙가인지, 신념이라도 쥐고 있으면서 남한테 기 안 죽으려고 하는 질투심인지. 

그렇게 돼버리면 나는 죄인이 돼요? 의인이 돼요? 나는 잘난 의인이 돼요. 의지의 신앙인이 돼요. 의지의 신앙인은 하늘나라에 필요치 않습니다. 그런 사람은. 죄인이 되어야 해요. 처음부터 그렇게 안 되겠죠. “주여, 예수 믿는데 제가 이렇게 설움을 받습니다. 주께서 지켜주옵소서.” “그게 니가 몰랐던 죄야. 니 자존심 채우려고. 예수 이름으로 니가 남한테 기 안 죽으려고 하잖아. 그게 바로 숨겨진 죄야.”라고 주께서는 알려주죠. 

그럴 때 왜 내 쪽에서 찾아가는 것이 아니고 왜 불러줘야 하는가? 왜 부르심을 입어야 되는가? 그것은 바로 21절에 나오죠.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고난이 우리에게 장착이 되게 되면 그 다음에 뭡니까?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그 안에서 반복해서, 십자가 안에서 계속해서 따라가게 되죠. 따라갈 때 착한 자로 따라가요? 우리가 죄인인 것이 더욱더 노출됩니까? 죄인인 것이 노출되면서 오직 의로 계속 우리 죄인을 용서한다는 그 용서가 그리스도의 선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게 여러분들이 베드로전서를 보면서, 1장을 다시 보게 되면, 1절 끝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흩어진 나그네라고 되어 있죠. 현재 전부 다 터키지역에 있는 거예요. 나그네라고 했죠. 어떤 나그네입니까? 흩어진다고 했죠. 십자가마을 수련회에 참석한 그런 나그네가 아니고 흩어진 나그네에요. 어느 자리에 있든지, 어느 구석에 있든지 상관없이 각자 주께서 그 현장에서, 주님의 십자가에 미친 것을 영광으로 여기고 사는 사람으로 살게 하시는 거예요. 그것 때문에 부르심을 입은 거예요. 

그 모델을 제시하라면 그게 바로 베드로입니다. 그리고 사도요한이고. 사도요한이 울었잖아요. 아버지 죽어서 울었습니까? 엄마 죽어서 울었습니까? 아니에요. 뭘 위해서 울었습니까? “주여, 내가 목숨을 건 이 하나님의 약속이 실현되기를!” 봉인이 풀려서 실현되어야 하는데, 지금 그 봉인이 풀렸다는 말입니까? 안 풀렸다는 말입니까? 풀렸다는 거예요. 단추가 일곱 개인데 탁탁 터지는 거예요. 터질 때마다 그리스도 심판 중심으로 세상이 재편되는데, 그 재편되는 모습이 세상은 요지경이 아니고 세상은 지옥이다, 라는 거예요. 

심판의 대상이라는 것이 단추가 열릴 때마다 우리에게 온 몸으로 느끼게 하는 거예요. 그리고 지옥인데, 평소에 성도는 그걸 보고, 그 지옥에 갈 것에 완전히 내가 혼이 빼앗겼구나, 내가 정신을 거기다가 다 쏟았구나, 그놈의 승진, 그놈의 출세, 그놈의 돈벌이에, 그동안 나의 건전함과 우리 가정의 행복함, 우리 가정은 사이좋음, 우리 가정은 남들 보기에 부러움을 삼, 여기에 완전히 미쳐가지고 나도 내 인생 그렇게 살아보겠다고 거기에다가 내 목숨을 도박하듯이 걸었던 이 철딱서니 없는 우리의 모습. 그걸 깨닫게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옛날 노래가 생각이 나네요. 제목이 철없는 아내. 남편이 그렇게 사랑해줘도 자꾸 떠나려고 하잖아요. 그러니까 철이 없죠. 

자 마무리하겠습니다. 사람들은 사건에 마음을 두지 않고 사건의 결과를 따먹으려고 합니다. 마치 선악과를 따먹듯이. 그러나 사건이 뭐냐, 내가 없어야 되는데 있다는 그 자체가 사건입니다. 내가 죄 지었다, 죄 안 지었다, 그것가지고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없는 내가 아직도 살아있다는 것이 더 큰 기적이 아닐까요? 내가 죄 안 짓는 것이 기적이 아니고, 죄 짓고 안 짓고의 당사자가 마땅히 없어져야 될 당사자인데, 지금 이 땅에 내가 존재한다는 것이 죄 짓고 안 짓고 보다 우선되어서 챙겨야 될 기적이 아니에요? 그거 주님의 은혜에 감사해야 될 문제입니다. 

그렇게 만들어놓고, 그 만든 곳에다가 주님의 의가 담기도록 우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우리가 목숨을 바치는 것도 어폐에요. 바치는 것이 아니고 아예 빼앗아갔죠. “이제 너를 위한 내 목숨은 없어. 내 십자가를 위한 목숨이야.” 그런 관계로 우리 몸 자체가 매개체가 되어서 결속되어 있어요. 그렇다면 주님이 이 땅에서 미친 사람 소리 들었던 것처럼 우리도 미친 사람 소리 듣는 것을 일대 영광으로 아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님이여, 기죽지 않게 살게 하옵소서. 변변치 않게 살아가고, 매일같이 힘들게 겨우겨우 살아가는 이것을 수치스럽게 여기지 말고, 오히려 주님의 십자가를 외면해버리고 세상을 따라가는 그 자체가 엄청난 주님에 대한 모독인 것을 알고, 회개하고 자기를 칠 수 있는, 그래서 구원해주신 주님께 더욱더 감사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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