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존강의20190111a 베드로전서2장 20-21절(최종성)-이 근호 목사
베드로전서 2장 20-21절
20절,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21절,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베드로전서 2장 20절을 제가 읽습니다.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이래 되어 있죠. 여기 성경에 죄라는 것이 등장합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날 때 앞장세우는 것이 있어요. 앞장세울 때 나오는 그 개념은, 니 돈 많냐? 니가 얼마나 건강하냐? 니가 몇 평짜리 아파트 사느냐? 자식은 공부 잘해? 이렇게 다가오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다가올 때는 최종성을 가지고 다가옵니다. 최종성. 최종성은 쉽게 말하면 마지막이죠. 무엇의 최종성이냐 하면 모든 가치, 모든 의미, 모든 진리, 모든 판단의 최종성이에요. 하나님께서는 나는 이런 식으로 심판하고, 나는 이런 식으로 저주하고, 이런 식으로 복주고, 나는 이런 식으로 의미와 가치와 진리와 판단을 드러낸다는 것을, 사람에게 의논하지 않고 최종적으로 확정지었습니다. 죄가 뭐냐에 관해서 나는 너희들의 의견을 들을 의사가 없다는 겁니다. 죄가 뭐냐에 관해서.
“내가 살면서 죄 안 짓고 싶었는데 자식 키우면서 살다보니까 어쩔 수 없이 죄 지었습니다.”라든지, “내가 이만큼 살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약간의 죄가 있겠지만 내가 내 가정을 먹여 살렸으니까 나는 바르게 살고 있었습니다.”라는 것을 가지고, 자기 판단을 가지고, “약간의 죄는 지었지만 나머지기 대부분의 영역은 성실했고 의롭고 착했습니다.”라는 그것을, 주님은 그게 최종성이 아니라는 거예요.
최종성은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은 21절에 나오죠.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누가 죄냐 아니냐, 누가 진리냐 아니냐, 누가 의미 있느냐 라는 것에 최종성의 판단은 누구 몫이냐 하면은 사람들의 의견을 규합해서 내릴 것이 아니고 일방적으로 예수님을 통해서 결정지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만날 때는 그냥 만나는 것이 아니고 죄라는 개념을 가지고 만난다고 했습니다. 죄라는 개념을 가지고. 죄를 앞장세워서 만나는 거예요.
그렇게 볼 때에 그 기준이 뭐냐 하면 예수님 본인이 기준이에요. 그게 마태, 마가에서 나로 인하여 언약을 세운다는 것이 그 말이에요. 인간 대 인간의 만남에서는 죄를 가지고 안 만나죠. 돈을 가지고 만나잖아요. 내가 봉사할 건데 얼마 줄 거예요? 일당 얼마 줄 거예요? 내 노력, 내 노동력과 저 사람의 노동력이 만난다 이 말이죠. 내 노동력의 구입을 원하십니까? 아닙니까? 그런 것을 묻는 거예요.
그리고 인간 대 인간의 만남에는 자기의 실적을 가지고 만나죠. 나는 이 정도의 실적을 가지고 있는데 너는 어느 정도의 실적을 얻었느냐? 세상 살면서. 그런 것을 가지고 만나는데, 거기서는 업적 같은 것, 실적 같은 것의 만남이기 때문에 거기에는 자연적으로 뭐가 빠져 있느냐 하면 죄라는 것이 빠져있죠. 죄를 좀 짓더라도 성공하는 게 이게 남는 장사라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는. 사람 대 사람의 만남에서는.
부부가 한 20년 30년 살면서 밥상머리 앞에서 대화할 때, “우리는 평생에 죄 짓지 않았습니다.”라고 남편이 이야기할 때, 아내가 “그래서? 죄 안 지어서 얼마 벌어왔는데?” 이러거든요. “그래, 당신 죄 안 지어서 한 달 수입이 얼마 벌어왔는데?”라고 묻는 거예요. 이게 이 세상의 가치라 이 말이죠. 그리고 죄의 기준은, 내가 앞으로 잘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라고 하는 것은 죄의 계열에 들어가지를 못해요. 죄의 항목에 섞어놓지를 못해요. 앞으로 잘하겠다는 것이 없어요.
왜냐하면 죄는 최종성이기 때문에. 그리스도 빼놓고는 다 죄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게 되면 “저는요?” 이래 나오겠죠. ‘그리스도 빼놓고’에 우리는 포함이 되니까 우리는 자연적으로 죄인이 되었죠. 그게 죄의 최종성이니까. 그렇게 죄의 최종성을, 예수님 빼놓고 다 죄인으로 규정할 수 있는 이유는 예수님만 의롭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만 의롭기 때문에.
우리의 죄를 드러내는 것이 주의 목적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의를 드러내기 위해서, 이 죄악 된 세상에서 드러내기 위해서 하나님이 일하신다 이 말이죠. 따라서 우리가 개인적으로 죄인이냐, 죄인 아니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우리는 뭐를 발견해야 되고 찾아야 되고 따라가야 됩니까? 예수님만이 의롭다는 것을 따라가면 돼요.
그 의가 어떻게 생산되는가는 베드로전서 1장에 나옵니다. 2절에 피 뿌림으로, 그런 식으로 거룩하심을 얻은 거예요. 피 뿌렸다 하는 것은 내 피를 섞은 것이 아니잖아요. 일방적으로 예수님 쪽에서 날아온 피다 이 말입니다. 예수님 쪽에서 피가 날아올 때 그 피가 날아온다고 생각하지 말고 의가 날아온다고 봐요. 어디에 뿌려지는가? 이 죄 속에서 뿌려지는 거예요. 카더가든의 명동콜링 들어보셨어요? 하얀 눈 위에 하늘에서 별빛이 떨어지죠. “새벽별빛 고운 흰 눈 위에 떨어져~~”
죄 속에 주님의 피가 뿌려진다는 것은 죄 속에 하나님의 의가 뿌려지는 거예요. 그게 죄의 최종성, 의의 최종성, 주님의 가치의 최종성, 주님의 구원의 최종성입니다. 최종성이라는 말을 바로 풀이하면 이게 마지막이라는 것입니다. 마지막. 근데 인간들은 마지막을 인정 안 해요. 마지막을 인정 안 할 경우에 있어서의 세상을 보는 형식에 있어서 차이가 납니다.
마지막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형식이 적절한 예가 되느냐 하면은 바로 스크린입니다. 스크린. 영화관에 가면 스크린에서 요란스럽죠. 총 쏘고 여러 가지하고 또 보헤미안랩소디라는 영화에 보면 그 막에서 퀸이 공연한 게 막 나와요. 라디오까까~~하거든요. 과자 좋아하는 애들은 그게 라디오까까에요. 라디오가가~ 라디오구구~ 라디오 블라블라~ 막 노래 나온다고요. 그러면 따라하고 굉장해요.
근데 그거는 어디입니까? 스크린 위에 나타나요. 스크린은 막이거든요. 막 뒤에는 뭐가 있습니까? 막을 들춰보면 거기에서 퀸이 나옵니까? 퀸의 퀸이고 뭐고 아무것도 안 나오죠. 아무것도 없죠. 하나님이 이 세상을 최종성이라고 한 것은 하나님이 이 세상을 뭐로 삼겠다는 겁니까? 이 세상을 스크린으로 간주하겠다는 거예요. 스크린에 뒤에서 영사기로 비춰버리면 얼룩덜룩한 이미지만 남죠. 이 세상은 주님을 비추는, 그리스도의 통일성을, 최종성을 비추는 하나의 이미지의 흔적들이죠. 이 세상이. 이 세상이 그렇다 이 말이죠.
그런데 ‘레이더스’라는 영화에 보면, 인디아나 존스 나오는 탐험하는 영화잖아요. 아주 오래된 영화인데. 그 영화에 보면 고대 유물을 찾아가는데 막혀있어요. 동굴의 입구가 막혀있어요. 근데 어떤 주문을 외운다든지, 여기에 남겨진 정보나 비밀암호 같은 것을 돌문에 문지르고 하게 되면 갑자기 이 돌이 굴러 떨어지면서 없던 길이 새로 나오죠. 없던 길이. 그러니까 이거는 마지막이 아닐 때는 여기서 뭐를, 자꾸 무슨 이미지를 새로 그리느냐 하면은 길을 이미지로 그리는 거예요. 이게 오늘날 교회에서 가르치는 겁니다.
길이 있다는 말은 우리가 이 지점에 있으면 저 지점까지, 미래의 목표지점까지 여분이 남아있다고 보는 거죠. “앞으로 잘할게요. 앞으로..”라는 거예요. 남아있다는 말은 스크린을 거부하는 거죠. 스크린을 거부한다는 말은 자기는 스크린에 있는 얼룩덜룩한, 해병대 군복에 있는 얼룩덜룩한 무늬에 지나지 않는, 자기의 실체성이 있다? 없다? 전혀 실체성이 없거든요. 개인의 실체성이 없는 거예요.
그냥 얼룩덜룩한 무늬, 여성들 원피스나 치마에 보면 무늬가 있잖아요. 여기 벽지에도 무늬가 있네요. 이거 꽃그림이잖아요. 향기 납니까? 향기 안 나죠. 이걸 긁어내면 꽃잎이 떨어지는 것이 아니고 벽지가 떨어지는 거예요. 재료는 종이고 이미지만 꽃이잖아요. 이게 원래 꽃이 아니라 이 말이죠. 우리 인간은 재료만 흙이고 이미지만 인간인 것처럼 보인다 이 말이죠. as if ~인 것처럼. 영어에서 말하는, 아닌데 ~인 것처럼. 왜? 이 자체가 스크린, 막이니까. 막이 얇다면 두께가 있을 수가 있어요? 없어요? 두께가 있을 수가 없죠. 막인데.
그런데 인간은 최종성을 인정하지 않으면 뭔가 그 뒤에 무한한 길이, 천국으로 가는 길이 뚫려있다고 보는 거예요. 그래서 나는 어디쯤 가고 있을까? 가수 전영이 부른 노래가 있어요. 어디쯤 가고 있을까~ 맨날 교회에 와서 나는 어디쯤 가고 있을까? 에요. 어디쯤 가고 있을까? 어디쯤 가고 있을까가 돼버리면 본인은 이미지가 아니고 하나의 단독자, 개체를 갖고 있어요. 내가 열심히 하게 되면 앞으로 천국 가는 쪽으로 가까이 갈 것이고, 내가 농땡이 부리면 지옥 가는 쪽으로 갈 것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럼 뭐가 날아가 버려요? 완전히 주님의 최종성은 무시되는 거예요. 그야말로 자기가 도 닦는 겁니다. 교회가 수련장소가 돼요. 자, 교회와 태권도 학원과의 공통점은? 송판 하나 깨면 노란 띠 준다는 거예요. 송판 하나 깨면 노란 띠 준다는 것하고 십일조 하면 장립집사 시켜준다는 것하고 이게 같은 급입니다. 우리 의존교회는 노란 띠 될 사람이 한 사람도 없어요. 뭐 십일조를 안 하니까 노란 띠가 될 수가 없죠. 하는지 안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안 한다 치고. 안 한다고 해야 편하니까. 애야! 니 장립집사 될래? 권사님 될래? 그럼 십일조 해야 된다. 검은 띠 하려면 보통 노력해야 되는 게 아니다.
태권도 도장하고의 공통점을 아시겠죠? 인간에게 발전의 여지를 주는 거예요. 희망의 여지를 주는 겁니다. 그리고 그만큼 띠가 노란 띠에서 검은 띠가 되면 가정이 복을 받는다? 안 받는다? 복을 받는 거예요. 자기 가정이 이미지가 아니고 자기 가정이 독자적인 실체라고 보는 겁니다. 내 가정 잘 되면 더는 소원이 없다 이래 되는 거예요. 내 가정 잘 되면. 그 가정이 잘 되고 합심이 될 거예요.
그 단합이 어디까지 가능한가 하면 지옥가도 같이 가는 거예요. 지옥 가서 한 가정 모였으니까 사이좋다. 거기 동서부터 올케까지 다 모였네. 여기 시장에 가보세요. 시장에 가보면 내가 보기에 전부 다 지옥 가는 사람 같아. 내가 잘못 봤는지는 모르지만. 물건 사고팔고 하면서 지옥가고 있는 거예요. 좀 깎아주소~ 이러면서 지옥가고 있는 거예요. 깎은 사람이나 깎아주는 상인이나 같이 지옥가고 있는 거예요.
이미지를 위해서 산다는 것은 이미지가 투영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아가는 거예요. 근데 이미지가 아닌 사람은 실체가, 그리스도가 실체가 아니고 누가 실체냐 하면 자기 자신이 최종 실체기 때문에 장사를 하던 무엇을 마시든 무엇을 먹든 무엇을 하든지 간에 나의 영광을 위해서, 내가 실체니까 내 영광을 위해서 매진할 뿐이에요. 교회가든 기도를 하던 뭘 하든 간에 전부 다 나 잘되기 위해서 살아가는 겁니다.
자, 여러분한테 물어봅시다. 구원은, 사람이 구원해요? 하나님이 구원합니까? 진짜 골목식당 백종원이 묻는 식으로 물어봅시다. 장사 할 거예요? 말 거예요? 라는 그 물음이거든요. 피자 만들지도 못하면서 피자집 하는 사람인데, 이래서 니 장사 할 거야? 말거야? 라고 묻는 것처럼. 정말 구원할 거예요? 말 거예요? 아니 천국 갈 거예요? 말 거예요? 제가 묻는 겁니다. 그러면 천국가고 싶어요. 그럼 그 다음 질문이에요. 그럼 누가 구원해요? 인간이 구원합니까? 주님이 구원합니까?
주님이 구원합니다, 라고 하지 말고 이렇게 하세요. 인간은 구원을 못합니다. 이렇게 답변하세요. 인간은 구원 못하죠. 근데 구원도 못해주는 인간에 대해서 왜 그렇게 의식하고, 왜 그리 예민하게 처신하고, 아양 떨고, 구원해주지도 못한 인간에게 왜 그리 눈치를 보며 삽니까? 사도들이 그렇게 살았어요? 여기 있던 애 둘이 어디에 갔어요? 저쪽으로 들어갔네요. 자식이 날 구원해요? 근데 엄마는 누굴 눈치를 봅니까? 애 눈치 보죠. 왜 그럴까요? 애가 무서워서가 아니라 내 가정에 하나의 최종성을 두기 때문에. 나 있는 곳을 최종성을 두기 때문에.
그러면 구원은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하신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하지 못하죠. 인간이 하지 못함 속에 뭐도 포함이 되어 있느냐 하면은 내가 나를 구원하지 못한다, 라는 것도 포함이 돼요. 내가 나를 구원하지 못한다. 내가 나를 천국에 보낼 수가 없다. 그렇다면 그걸로 마감되면 안 되겠죠. 그 이유가 무엇인가도 알아야 되죠. 두 가지를 알아야 돼요. 내가 나를 구원하지 못한다. 이 나 속에다가 인간을 집어넣어 봅시다. 나에다가 인간, 인간 공동체, 다 집어넣어 봅시다. 인간세계는 나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두 번째 알아야 될 것은, 왜? 왜 구원하지 못하느냐? 이것을 알아야 돼요. 왜? 그냥 구원하지 못한다. 주님이 구원한다. 이렇게 돼버리면 내가 주님을 믿는 그것이 구원한다가 돼버려요. 이거는 교회에서 저지른 사기 아닙니까? 당신이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거예요. 아니에요. 끝까지 주님이 구원해야 돼요. 내가 예수 믿는 내 믿음으로 구원되면 안 된다 이 말입니다.
내가 예수 믿으면 출발점이 내가 이미지가 아니고 뭐가 됩니까? 내가 실체가 된다고요. 우리는 아까 재료가 뭐라고 했어요? 흙이다. 흙이 자기가 알아서 인간되는 것이 아닙니다. 흙이 인간될 때 누가 개입했어요? 창세기에서 누가 개입했습니까? 성령이 개입했잖아요. 하나님의 성신이 있으매 인간이 흙에서 인간됐잖아요.
그 말은 뭐냐 하면은 인간이 스스로, “아이, 나 흙이 지겹다. 인간 좀 되자.” 알아서 대충 진흙가지고 터덕터덕 발라서 눈 코 입 만들어가지고 이래가지고 인간됐습니까? 아니죠. 우리가 성경을 평소에 너무나 모르고, 성경을 모르는 이유가 성경을 거부하기 때문에 그래요. 성경에 다가서지 않고 성경을 내던져버려서 그래요. 왜 성경을 안 보고 던지느냐 하면은 돈이 안 되거든요. 돈이 안 되는 이유 때문에 왜 던지느냐, 나는 돈이 나를 살릴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그래요. 누가 그렇게 가르치던데? 세상 모든 사람들이.
어떻게 알았는데? 사회 나가보니까 그것만이 대화내용이 돼요. 어느 정도하면 돈을 벌고 어느 정도하면 돈을 절약하고 어디 가면 출세하느냐? 그것만이 대화내용이 되었어요. 자 그렇다면 인간과 인간 사이의 대화내용은 이미 결정되었어요. 한 자로 뭐였어요? 인간과 인간 사이에. 돈이죠. 부부사이도 마찬가지입니다. 돈 벌어오니까 아내가 좋아서 보너스 탔다고 “당신 이뻐요. 귀여워요.” “여보, 사기 당했어.” “죽어라.” 모든 대화내용이 상대를 이용가치로 보는 거예요. “나 살기 위해서 당신은 나 필요한 조건을 갖추어 다오.” 이 말입니다.
그러면 남편이 짜증이 나죠. 그것도 한 두 번이 아니니까. 그렇다면 나보고만 돈 벌라고 하지 말고 당신도 돈 벌면 안 되느냐? 그럼 아내가 하는 말이 내가 돈 벌거면 미쳤다고 당신하고 사나? 돈이 필요하기 때문에 당신이 남편이지, 내가 돈 벌어서 뭐가 이쁘다고 당신한테 퍼 주냐 이 말이죠. 내가 힘들게 내가 벌었는데. 자식 내가 키운다. 그래놓고 하는 말이 돈 버는데 열심히 했기 때문에 이걸 죄라고 자꾸 몰아붙이지 마세요, 라고 나와요. 돈 번다고.
그래서 돈 벌어서 뭐 할 건데? 뭘 건졌다? 목숨을 건졌다는 거예요. 돈 벌어서 목숨을 건졌다는 거예요. 여러분, 목숨을 건지는 방법은요, 목숨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목숨을 버릴 때 목숨을 건져요. 지금 현대인들의 문제는 뭐냐 하면 제가 주일 낮 설교도 했지만, 지금 현대인들은 목숨을 버릴 장소를 못 찾고 있어요. 목숨마저 바꿀만한 가치 있는 것을 찾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안중근이가 괜찮죠. 유관순이는 괜찮아요. 왜냐하면 유관순이나 안중근이는 어디에다가 목숨을 바쳤습니까? 대한독립만세 일제해방에 목숨 바쳤죠. 물론 그 사람들이 무식해서 그래요. 대한독립이라는 실체는 없어요. 있지도 않은 허황된 데에다 목숨 걸은 거예요. 대한민국은 어디에서 생겨나느냐 하면은 대한민국을 거론하는 그 사람의 소유가 될 때 비로소 대한민국이 생기는 겁니다. 아, 이거 어렵다.
정치하는 사람들이 있을 때 대한민국이 있어요. 정치하는 사람이 정치해서, 밥벌이해서 밥 먹고 살겠다고 할 때 대한민국이 성립하는 겁니다. 제 말이 어렵습니까? 그럼 쉽게 해드릴게요. 우리나라에 피자가 맛있다고 소문이 난 이유가 뭐냐, 피자집을 한 사람이 있기 때문에 그래요. 만약에 우리나라에 피자집을 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면 피자 맛있다는 사람도 한 사람도 없어요. 제가 오늘 오다보니까 길에 하늘색 오토바이가 여러 대가 있어요. 보니까 하늘색 페인트칠해서 피자집이 새로 생긴 모양이라. 전에 없던 피자집이에요.
왜 자꾸 피자가 맛있다고 합니까? 피자가 있으니까 그래요. 피자집이 먼저 있어야 돼요. 국민은행 근처에 조그만 피자집이 있었는데 그거는 망했어요. 내가 망할 줄 알았어요. 몸빼바지, 몸빼바지가 편하다고 하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은 몸빼바지를 만든 제조업자가 있어서 그걸 누가 입어 착용해봐서 그래요. 대구 서문시장에 가보니까 몸빼바지 석장에 만원해요. 세상에 그렇게 헐은 바지를 처음 봤어요. 세장에 만원. 몸빼바지 한 장 입는데 1년 걸리니까 한 3년은 편하게 입겠어요.
다시 돌아가서 정치는, 왜 대한민국이 있다? 대한민국 만듭시다! 라고 하는 정치꾼들이 나타날 때 대한민국이 있는 거예요. 그 정치꾼을 만들자고 나선 사람이 바로 내가 하고 싶은 일에 목숨 걸자고 나선 유관순과 안중근 때문에 그래요. 그리고 그 사람 죽여서 덕을 보는 33인들. 상하이 임시정부. 김구부터 해가지고 이승만이 아니죠. 리승만부터 해가지고. 그들의 생산된 게임에 다른 사람들이 현혹돼서 그것이 있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있다고. 우리나라에 국회가 있는 이유는 국회의원을 하고 싶은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북한이 존재하는 것은 김정은 때문에 그런 거예요. 김일성 일가 때문에 있는 겁니다. 김일성 일가 때문에.
이 말은 뭐냐 하면 세상이라는 것은 세상이 있고 인간이 있는 것이 아니고, 인간들이 뭘 만든다? 세상을 만들고 거기에 사람들을 복속시키고 복종케 한다 이 말입니다. 회사에서 꼴 보기 싫으면 사표내면 그만이죠. 사표내면 그만입니다. 한국이 살기 싫으면 캐나다로 이민가면 그만이에요. 요새 이민 한 백만 명 모집한다고 하니까. 한 1억 내지 들고 나가면 받아줄지 모르겠어요. 돈 없는 것은 캐나다에서 받아주지도 않아요. 이민자 원한다는 말은 그냥 투자자 원한다는 뜻으로 보면 돼요. “캐나다라는 회사에 주식사세요. 그러면 일단은 영주권 줄 용의가 있습니다.” 그런 뜻이에요.
그래서 캐나다라는 회사에 더욱더 충성해서 발전시킨 공로가 있다면 영주권에서 시민권으로 전환시킬 용의가 있습니다. 그래서 캐나다에 갔는데, 캐나다 어떤 외딴 곳에 불이 났는데 캐나다 할머니가 못 빠져나왔다. 그럼 한국 사람이 들어가서 자기가 화상을 당하면서까지 그 할머니를 건진다면 그 한국 사람은 캐나다에 간지 얼마 안 돼서 불법이민자라도 그 사람이 시민권을 얻을 가능성이 많아요. 그런 일이 우리나라에 있었잖아요. 우리나라에서 스리랑카 청년이 불속에서 할머니 구해가지고 졸지에 영주권을 얻었죠. 그 회사에 공로가 있을 때 빨리 승진이 되는 겁니다.
세상은 인간이 만든 거예요. 그럼 우리 있을 때는 왜 있었습니까? 그거는 여러분들이 만든 것이 아니고 여러분 아버지가 이미 소속이 대한민국 소속이기 때문에 그래요. 만약에 여러분 아버지가 캐나다나 미국 이민 갔다고 하면 우리는 한국하고 관계가 없습니다. 미국영주권, 캐나다 영주권 얻었을 거예요. 그래서 부모 잘못 만나서 내 인생 조졌다고 이야기를 하잖아요. 부모 잘못 만나가지고.
문제는 이러한 인간의 나라만 있느냐 하는 거예요. 인간의 나라를 유지하려면 여기에 동원되는 게 뭐냐 하면 경찰이에요. 자, 문제 내겠습니다. 경찰과 예수님의 차이점은? 오늘 문제 너무 많이 낸다. 경찰과 예수님의 차이점은 경찰은 안 죽고 예수님은 죽었다. 경찰은 피를 안 내고 예수님은 피를 내었다는 거예요. 경찰은 피를 안 내고 의롭게 되는 방법을 이야기해줘요.
사기 치는 사람은 경찰이 와서 잡아줘야 해요. 왜냐하면 경찰의 임무는 개인의 사유재산과 생명을 보호하는데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면 경찰 위에 뭐가 있습니까? 경찰을 하도록 지시하는 법이 있겠죠. 그 법은 어디서 만듭니까? 국회에서 만들고 그 행정은, 경찰법의 행정은 우리나라에서 옛날 같으면 내무부에서 하죠. 지금은 행정안전부소속이죠. 그 법은 뭐냐 하면 하나의 국가, 사회자체에서 각자가 한 노동력의 가치를 인정해주자. 왜? 노동력에서 나온 게 뭐냐 하면 사유재산입니다.
그 사유재산 중의 하나가 뭐냐 하면 사립유치원이에요. 사립유치원은 뭐냐 사유재산이에요. 자기 재산 한 오억 들어가고, 은행 대출 한 이십억 내서, 이십오 억을 해가지고 유치원 했습니다. 땅 사고 집지으려고 하면 그만큼 들거든요. 유치원 했는데 지 월급만 받으면 안 되겠죠. 은행이자가 들어가야 하니까. 이것도 투자니까. 나라보증해서 몇 천 만원 벌어야죠. 안 그러면 안 되니까.
벌려면 교사들 월급 줘야 돼요? 안 줘야 돼요? 여기 유치원 관련된 사람이 있어요? 교사들 월급 백만 원 주는가, 더 주는가 모르겠다. 이것도 4년제 2년제 따져가지고 좀 더 주는가 모르겠어요. 하여튼 이거는 엄청나게 적게 주고 유치원 원장은 몇 천 몇 백, 지 사업이니까 막 가져가는 거예요. 왜? 지가 투자한 게 있으니까. 사유재산이니까. 그걸 누가 보호해요? 국가가 보호해야 되고 그거 침해받으면 경찰이 동원돼야 해요.
그러니까 경찰법은 뭐냐, 산 사람을 살리자는 거죠. 산 사람을 괴롭히는, 생명을 공격하는 사람, 예를 들어서 시장터에 불을 지른다든지, 사람 팬다든지, 이런 사람은 가차 없이 어떻게 해요? 경찰이 동원되는 거예요. 내가 힘센 사람에게 벌을 못 주잖아요. 경찰한테 신고하면 되죠. 연약한 어떤 여자가 얻어맞았다. 그래서 경찰에 신고하게 되면 경찰이 와서 그 사람을 잡아가지고 벌을 주잖아요. 치료비 다 물어내고, 정신적 치료비 다 물어내고 그렇게 해야 되겠죠.
그 역할을 누가 합니까? 경찰이 한다고요. 경찰이 그렇게 하는 이유가 뭡니까? 우리나라보호하세가 아닙니까? 우리나라보호하세. 그렇게 우리나라가 보호되는 것을 우리나라에서는 뭐라고 합니까? 그것을 선이라고 합니까? 악이라고 합니까? 우리나라가 보호되는 것을? 이게 선이죠. 그러면 예수님 당시에 유대사회에서 어느 나라가 보호가 되는 것이 선이 돼요? 유대사회 질서가 유지가 되는 것이 선이죠.
그 유대사회의 질서를 어지럽힌 사람이 누굽니까? 예수님이죠. 세례요한이고. 세례요한이 어떻게 죽었어요? 목 날아가서 죽었죠. 그때 세례요한의 목을 친 사람이 누구죠? 왕이죠. 왕은 그 나라의 정신적인 중추가 돼요. 모든 법의 정신, 모든 의로움과 정의로움과 진리의 중심부에 왕이 있어요. 따라서 왕이 결정하는 것은 곧 진리가 되고 정의가 되는 거예요.
어떤 차이가 있느냐 하면은 나봇이 있는데, 나봇의 포도원이 있죠. 아합이 나봇의 포도원을 사려고 할 때, 나봇이 포도원을 자기가 경작해서 자기의 사유재산으로 봤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대대로 주신 상속이라고 봤어요? 상속이죠. 상속이라는 말은 주신분과의 교제와 연결이, 지금 땅에서 하나님과 계속 연결된다고 보는 겁니다. 이런 게 제가 설교하면서 굉장히 어려워요.
왜냐하면 우리가 워낙 내 재산, 내 돈, 내 것, 여기에 있다고 보니까 누구하고 연결이 없어요. 나한테 이득이 있을 때만 일시적으로 내 사람이라고 간주하지만 내 재산이나 내 생명이나 내 목숨에 위협을 가하면 이건 남이 되는 거예요. 그러나 이스라엘에 있어서 나봇의 포도원이나 재산은 자기가 개간해서 열심을 내서 이룬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이어주는 매개라고 합니다. 매개. 두 바벨을 이어주는 역기봉처럼. 철봉처럼 매개라니까요. 매개가 없어지면 관계가 끊어지는 거예요.
아모스, 하박국 이런 선지자들이 계속 이스라엘을 공격할 때에 하나님이 주신 상속을, 부자들이 그걸 자기 사유재산으로 착복했기 때문에 고발하는 겁니다. 왜 가난한 사람을 억압하느냐가 아니라, 가난하더라도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연결고리는 있어야 되는데, 연결고리 그걸 끊어버린 거예요. 방해한 겁니다. 오늘날 신약시대에 하나님과 우리와의 연결은 뭡니까? 한자로? 피죠. 피. 예수님의 능력이 아니에요. 피에요.
일반교회에서는 주님의 전능하신 능력이에요. 능력이 아니고 피라니까요. 능력이 의가 아니에요. 부자 되게 만들고 건강하게 만드는 능력이 의가 아니고 뭐가 의입니까? 의는 피 안에 있어요. 왜 피냐? 능력 같으면요? 이게 부자일 것 같으면요? 둘 다, 인간과 하나님 둘 다 멀쩡해요. 그러나 피의 관계라고 하는 것은 한쪽은 의가 되고, 희생자가 되고 한쪽은 뭡니까? 죄인이 되는 거예요. 이게 지금 세상 교회에서 엉터리도 너무 엉터리거든요.
이건 제가 목사를 탓할 수가 없어요. 고객들이 원하고 있어요. 제발 피 이야기 하지 말고 전능하신 능력 좀 이야기하라는 거예요. 내가 능력 받으면 줄 것 주겠다는 거예요. 십일조 정도는 내놓을 용의가 있다는 거예요. 우리 애가 공부 잘하고, 우리 집안만 잘 일어나면, 내 인생 만회하게 되면 그까짓 것 다이아몬드라도 바치겠다고 이래 나온다 이 말이죠.
교회가 아니고 무당집이라니까요. 위에 달린 십자가를 볼 때 십자가가 아니고 바람에 휘날리는 대나무로 보시면 돼요. 안에서 찬송소리 나잖아요. 그 찬송소리를 뭐로 들어야 하느냐 하면 굿하면서 북소리 나잖아요. 장단도 안 맞는 딱딱한 것, 칭칭칭칭~~하는 것 있잖아요. 무당굿하고 있는 거예요. 그게. 그러니까 뜨겁다 하잖아요. 뜨거워지거든요. 지가 열 내니까 뜨겁죠. 성령 받았다고 합니다. 그런 교회를 탓하기 전에 우리는 우리 자신을 독자적인 실체로 보는 경향이 없는가 하는 것을 되돌아보세요.
주님을 조명하는, 주님이 투영된 하나의 이미지, 스크린에 불과하거든요. 이쪽은 좁은 스크린이지만 어쨌든 스크린이에요. 좁든 넓든 간에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이미지가 중요하지 무슨 넓은 아파트에 사나 좁은 아파트에 사나 중요하지 않아요. 얼굴 잘 생기고 못 생기고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배우고 안 배우고 관계없어요. 몸이 아프고 안 아프고 관계없어요. 아파도 그게 주의 이미지입니다. 아픈 사람은 좀 서러운 이야기이지만. “간암 걸렸어요.” “주님의 이미지가 이번 차례는 간암순서구나.” “간암인데 위암으로 전이가 되었어요.” “아, 이번엔 위암으로 전이된 이미지네.”
이 세상의 선과악은 둘 다 멀쩡한 가운데 결정합니다. 근데 베드로전서에서 유일하게 의는 뭐냐, 능력이 아닙니다. 제가 이렇게 아무리 해도 “목사님, 어떤 교회에서 실제로 기도해서 능력 받았습니다.”라고 하면 또 ‘실제로’에 다 넘어가요. 실제로. 실제로 그 사람이 부자 됐고, 실제로 애들 공부 잘하고, 실제로 애 건강하고, 열세 살 때 미국 가서 공부해 하버드에 들어가 있고 하는 거예요. 구라지만. 실제로 SKY캐슬인지 롯데 캐슬에 살고. 전에는 지하에 살다가 이제는 실제로 돈 많이 벌었다는 겁니다. 회개하니까 능력 받아서 그렇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축복해줬다는 겁니다.
그런 이야기를 하는 자체가 은근히 자기도 그런 축복을 기대하고 관심을 두기 때문에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이 아니에요? 예수님 피 이야기는 안 하고 자꾸 누구 능력 받았다고 하면서 “그거 엉터리죠?”라고 하는데, 가만히 들어보면 그게 진짜 아무것도 아닌지 아니면 시기해서 자기 몸이 관리가 안 되어가지고, 사돈 논 사니까 배가 아파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지 분간이 안 돼요.
다시 한 번 정리해드릴게요. 능력이 의가 아니고 피가 의에요. 피가 의가 되려면 그 피 안에서 우리가 무슨 입장이 될 수밖에 없습니까? 바로 죄인이라는 이미지로 살 수밖에 없습니다. 죄인이라는. 죄인이기 때문에 피가 그야말로 무한한 능력입니다. 오늘 여러 가지를 묻는데, 자 물어봅시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인데요. 예수님께서 하신 질문이에요.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자기한테 유익입니까? 유익이 아닙니까? 유익이 아니죠.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안 되죠. 그 온 천하를 얻는 것이 자기 목숨을 잃게 하는 요소라도, 그래도 온 천하에 절하겠습니까? 악마한테 절하겠습니까? 배운 가락이 돈에 절하는 것밖에 안 배웠으니까 절하죠. 가정교육을 그래 받았으니까. 교회에서 그렇게 교육받았잖아요.
돈 많은 것이 축복이고, 축복이 능력 받은 거고, 능력 받으면 천당 가지 말라고 해도 천당 가는, 그러한 낭설이 유포되지 않았습니까? 낭설이. 교회 온 것 때문에 갑자기 잘 됐다. 이러한 낭설이 있다니까요. 자기 목숨을 유지하려고, 천하보다 귀한 목숨이기 때문에 목숨을 붙들고 유지하려고 교회에 다니는 거예요.
그러나 진짜 교회에 오지 말고 주님 앞에 가게 되면, 니가 붙든 그 목숨 때문에 진짜 목숨이 숨이 막힐 지경입니다. 훼손되고 있어요. 그러면 살고자 하는 것이 자기를 죽고자 하는 것이 돼요. 근데 그 생명이 어디서 나오는가, 죄 속에서 나오거든요. 죄 속에서 주님이 참여한 거예요. 아까 안양강의에서 했지만 그걸 성육신이라고 합니다. 이 세상은 인간들만의 세상이 아니고 주님이 합세한, 주께서 이미 뛰어든 세상이에요.
이걸 잊어버리고 깜빡하게 되고 놓쳐버리면 세상 제대로 분석 못하는 겁니다. 인간들의 세상으로 보지 말고 주님이 합세한 세상이다 이 말이죠. 세상의 중심부가 뛰어들었어요. 그럼 세상의 의미는 어디서 찾아야 됩니까? BTS? 방탄소년단에서 찾아야 돼요? 빌보드에서 찾아야 돼요? 제가 세상 중심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찾아야 된다고 하면 갑자기 조회수 1위로, 십자가가 1위로 올라갑니까? 안 올라가죠.
예수님이 나타나도 조회수가 방탄소년단한테 밀리가 되어 있어요. 그런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그런 세상에.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뭐 알고나 살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알고는. 하나님의 의를 짓밟고 지옥 가는 것만 우대받는 세계에 우리가 지금 던져져있는 존재입니다. 사도도 그걸 의식하고 이야기를 하죠.
자, 경찰이야기를 다시 해봅시다. 경찰은 왜 있다? 사유재산과 우리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 경찰이 있는 거예요. 그럼 경찰에 있어서 재산 지켜주고 목숨 지켜주면 그걸 악이라고 봅니까? 선이라고 봅니까? 그걸 선으로 보는 거예요. 왜 제가 경찰과 예수님의 차이점을 이야기하느냐 하면은, 오늘 본문 2장 20절에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이렇게 이야기할 때, 그냥 이 대목을 어떤 의식으로, 어떤 선입감으로 보느냐 하면은 경찰 앞에서 죄를 안 지으면 그건 의롭다, 라는 의식을 가지고 그대로 이걸 해석해요.
나는 그동안 이만큼 살아온 것도 나쁜 짓을 안 해서 그렇다는 거예요. 사회적으로 나쁜 짓 안 하고 교도소에 갈 짓 안 하고 파출소에 갈 짓을 안 했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나는 선한자로 규정되어가지고 하나님께 복을 받는구나, 라고 이렇게 생각할 가능성이 농후한 겁니다. 그렇게 돼버리면 그 선은 어떻게 되느냐 하면은 계속해서 개선해야 되고 업그레이드해야 될 선이 되는 거예요. 더 착하면 복을 더 받게 되니까.
그러나 그건 최종성입니까? 최종성이 아닙니까? 그건 최종성이 아니죠. 그건 최종성이 아니잖아요. 오히려 그 선과 악의 구조에 누가 억울하게 돌아가셨습니까? 예수님이 억울하게 돌아가셨죠. 그러니까 예수님의 의는 수순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인간들의 선과 악이 먼저 설정이 되어 있어야 되고, 그 선과 악의 가치가 완전히 왜곡되어 있고 반대로 되어 있다는 것을 까발리기 위해서 예수님은 의인이면서도 죄인의 모습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겁니다.
우리는 그 십자가를 사랑합니다. 뭐 나만 사랑하나? 그 십자가를 사랑합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은, 이 세상이 전복되기를 원합니다, 라는 것과 같은 말이에요. 이 더러운 세상 발칵 뒤집어지기를 원합니다. 빨리 하늘에서 소돔과 고모라에 내렸던 유황불을 떨어뜨려주시기를 원합니다, 라는 그 말이에요. 모든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하는 것 차제가 이미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서는 의미가 없어요. 그 자체로 의미가 없어요. 그 자체로.
근데 사람들은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먹고 마시고 하는 그걸로 의미를 종결시킵니다. 그게 마감이라고 보는 거예요. 그리고 그걸 더 키운다고 보는 겁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우리에게서 천국 가는 길이 있다고. 길은 없어요. 막혀있죠. 십자가로 완전히 스크린화된 거예요. 막혀있어요. 막혀있다는 말은 니 힘으로는, 니 식으로는 못 간다. 니가 변화되지, 달라지지 않고서는 올 수 없다는 거예요.
천국은 넣어주는 것이 아니에요. 천국은 달라짐이 선행되어서, 달라지게 하는 그 능력에 의해서만, 그 능력이 임한 사람만 천국에 들어가는 겁니다. 그러면 천국으로 달라질 때 어디서부터 어디로 달라져야 하는가, 둘 다 그냥 달라져야 한다고 하면 안 되죠. 달라져야 될 원래의 자리는 무엇이며 그것이 달라질 때 어떻게 달라지는지, 둘 다를 알아야 되겠죠. 처음에 둘 다를 알기 위해서는 달라지기 전에 우리의 모습을 확실하게 규정해야 되죠.
그 규정하는 것은 뭐냐 하면 예수님에 대해서 “나는 싫어!”라는 그것이 나의 본심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줘야 해요. 예수님이 하시는 말, 예수님이 하시는 모든 주장, 사상, 철학, 그리고 예수님의 세계관, 안목, 다 마땅치가 않아요. 전혀 내가 원하는 것도 아니고 내가 필요한 것도 아니고 나한테 구미가 당기는 것도 아니에요.
선악과의 특징은 뭡니까? 이게 꼴 보기 싫은 나무에요? 당기는 나무에요? 미혹당할 만한 나무죠.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탐스럽기도 하니까. 미혹당할 만한 나무라 결국은 따먹었잖아요. 미혹 받아 따먹었잖아요. 그러면 예수님은 어떻습니까?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는 정반대죠. 모든 사람이 보고 외면해버렸어요. 꼴 보기 싫다고. 꼴 보기 싫은 사람이 우리의 구원자로 오셨다? 뭐 이런 주님의 아이디어가 다 있습니까? 뭐 이런 아이디어가 다 있어요?
이 말은 뭐냐, 니 판단에 의해서 예수님을 믿을 재주가 우리한테는 아예 없다는 거예요. 우리가 예수를 제대로 몰라서가 아니라 아예 우리가 싫어하는 쪽을 통해서 예수님이 접근해온다는 거예요. 우리가 싫어하는 것, 우리가 배척하는, 우리의 본성상 이거는 받아들이고 저거는 배척하는데, 그 배척하는 노선 쪽에서 주님이 접근해온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가 선호하는 메시야를 가지고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고. 왜? 그거 역시 내 잘되는 것이죠. 내 잘되는 쪽으로.
그러나 주님 쪽은 뭐 얼굴이 이쁘고 잘생긴 게 아니라 그 말하는 내용 모든 것이 나의 목숨을 내놓으라는 식으로, 목숨을 니가 관리하지 말고 니가 아예 포기하라는 식으로 다가오니까 우리가 예수님에 대해서 거부하지 않으면 안 될 수밖에 없어요. 예수님에 대해서는. 예수는 곧 누구다? 우리가 거부할만한 자. 그래서 예수 믿는다는 말은 구라죠. 김구라 최구라 이구라...,예수 믿는다는 것이 구라에요. 우리의 본성상 전혀 부합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히 됐죠. 달라지지 않죠. 주님이 죄인이라고 하면,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의 착실하게 살았습니다, 이만큼 가정 이룬 것도 내가 얼마나 고생했다고요, 라고 나온다고요. 예수님을 볼 때에 우리가 남을 보는 방식으로 우리가 예수님을 봅니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인간 대 인간의 만남은 뭐로 만난다? 자기의 목숨을 버리는 것이 아니고 내 목숨을 살찌우기 위해서 상대방을 어떻게 좀 이용해볼까 하는 심보로서 만나게 되죠.
그 심보로 만나게 되니까 예수님도 이용가치가 있는가 하고 생각해볼 때, 물론 가짜예수는 전부 다 이용가치가 있죠. 그러나 진짜 예수님은 뭘 앞장세운다고 했습니까? 죄를 앞장세우고 그 다음에 피를 앞장세우잖아요. 죄 앞장세운다는 그것부터 이미 듣기 싫어요. 능력주시는 분을 원하지 죄를 앞장세우는 분은 싫어요. 그 다음에 그 구원의 방식도 내 쪽에서 약간이라도 뭔가 보탤 때 내 자존심이 사는데,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구원은 인간이 구원하는 것이 아니죠. 누가 구원합니까? 우리 인간은 구원을 못하고 오히려 있는 구원도 방해하죠. 내 구원을 내가 방해한다니까요.
주께서 우리를 맨날 구원해도 내가 나서서 내 구원을 내가 방해해요. 그런 경우는 실제로 일상생활에 많이 있어요. 남편이 가정을 일으키기 위해서 노력해서 돈벌어다주니까 여자는 사채놀이 하다가 전부 다 돈을 날려버린 거예요. 남자는 가정을 일으키려고 하는데 여자는 전부 다 그 돈을 꼬임에 빠져서 도박하고 돈을 다 날렸다고 합시다. 집구석 좋겠다.
주님은 피로서 구원하고자 하는데, 우리는 내 행함의 가치를 덩달아 고려해주세요, 라고 요구를 하고 있는 거예요. 내 기도와 내 헌금과 내 노력과 경건과 선함이라는 이것도 구원에 보탬이 된다고 좀 이야기를 해주세요, 라고 나서는 거예요. 그러면 복음을 아는 목사 입장에서는 뭐라고 합니까? 그게 바로 죄입니다, 그게 주님에 대한 모독이에요, 라고 하죠.
그러면 삐친 데에다가 더 삐쳐가지고, 그래가지고 교회되는가 한번 보자! 라고 하죠. 교회하려고 했어요? 교회되고 안 되고 문제가 아니라 저게 옳기 때문에 그래요. 옳기 때문에. 저게 성육신의 취지에 맞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말은 옳기는 옳은데 제가 거기에 동의하고 싶지 않네요. 이러면 10분 쉬어야 하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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