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강-창 32장 29-32절(당신의 이름은?)180321-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32장 29-32절입니다. 구약성경 50페이지입니다.
창 32:29-32
“야곱이 청하여 가로되 당신의 이름을 고하소서 그 사람이 가로되 어찌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 그러므로 야곱이 그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 환도뼈로 인하여 절었더라 그 사람이 야곱의 환도뼈 큰 힘줄을 친고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금까지 환도뼈 큰 힘줄을 먹지 아니하더라.”
야곱에게 찾아온 하나님이 전에 또 누굴 찾아왔지요. 야곱의 할아버지 아브라함을 찾아왔고 야곱의 아버지 되는 이삭에게도 찾아왔습니다. 그러면 같은 하나님이십니다. 같은 하나님이 찾아왔다는 것은 동일한 원리와 원칙을 하나님께서는 자기 사람을 택하여서 계속 심화시켜 나갑니다. 심화라는 말은 내용을 더 깊이 있게, 추가적으로 더 많이,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더 충실하게, 충만하게 알려주게 되는 겁니다.
처음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만날 때……, 아브라함이 보통 사람들을 많이 만나잖아요. 사람들을 많이 만났는데 사람 없이 아브라함을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창세기 18장 2절에 보게 되면,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섰는지라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 가로되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컨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옵시고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사 당신들의 발을 씻으시고 나무 아래서 쉬소서." 이렇게 해서 극진히 대접했습니다.
아브라함의 경우에는 하늘에서 오신 천사와 인간인 아브라함 사이에 좋은 관계가 유지되고 있습니다. 대접했으니까. 그들은 지상의 사람이 아니니까 나그네로 왔고 아브라함은 순수하게 그들을 적절하게 대접을 했어요. 그런데 야곱의 경우에는 하나님의 사자를 땅에서 만났지만 서로 싸웠던 겁니다.
할아버지는 대접을 했는데 야곱은 싸웠다. 그러면 하나님의 원리와 원칙이 변했는가? 변한 것이 아니고 심화되었지요. 더 깊이 있게 되었습니다. 하늘에서 오신 사람인줄 알고 영접했든지 모르고 영접했든지 간에 아브라함은 좋은 관계를 유지했지만 야곱은 동일하게 하늘에서 오신 그분을 죽기 아니면 살기로 붙들고 씨름했고 다퉜지요.
그분이 이기면 나는 죽고 그분이 지면 나는 산다는 식으로 결사적으로 살기 위해서 야곱은 붙들고 싸웠습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에 대한 대접이 더 심화되니까 어쩌면 보다 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면면을 제대로 맞닥뜨리게 되면 좋은 관계가 아니라 다투는 관계로서 드러나는 것이 보다 진전된 하나님의 뜻을 많이 아는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이삭 같은 경우에는, 물론 하나님이 아브라함보고 이삭을 모리아산에 바치라 했을 때에 이삭은 죽을 뻔 했지요. 종 데리고 가서 종은 산 밑에 둔 채로 이삭에게 제단 불 피우는 땔감을 등에 짊어지게 하고서 올라갈 때 이삭이 아브라함에게 "아버지, 땔감은 있는데 제물은 어디 있습니까?"라고 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한다고 답했습니다. 어쨌든 간에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잡았고 숲속에 하나님이 준비한 어린양으로 인하여 죽을 이삭은 구사일생 살아났습니다. 일종의 부활처럼 느껴지지요. 이삭은 죽고 난 뒤에 다시 살아났다. 로마서 4장에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그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게 되면 거기도 유사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야곱이 하나님의 얼굴을 봤지만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하나님의 사자, 하나님의 얼굴이 자기 인생에 개입되기 이전까지는 자기 인생이라 하는 것은 전처럼 여전히 끊어짐 없이 매끄럽게 줄곧 하루하루 그 목숨이 그 목숨으로 아무 질적 변화 없이 그대로 간다고 생각한 겁니다.
아버지 이삭에게 일어난 경험이 자기에게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님의 사자가 오는 순간 아버지가 죽었다가 살아날 뻔 했다는 그 경험이 야곱 자기 대에 와서는 내용이 더 풍부해 진 거예요. 하나님은 죽은 자도 살려주신다, 그 정도가 아니라 마땅히 죽어야 되는데 살려줬다면 이것은 인간이 살만한 가치가 있어서 살려준다는 그런 의미는 없어져야 된다는 거지요.
하나님께서 사랑의 하나님이니까 우리를 살려주려고 한 번 혼내줬다가 "이제는 네 죄를 알겠지. 그러니까 내가 사랑으로 살려줄게." 이렇게 살려준다는 것을 기본으로 해서 한 번 혼쭐내고 식겁하게 만들었다가 살려주는 것이 아니고 야곱에 와서는 이 살아난 사람의 이름이 달라요. 야곱이 살아난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이 살아났다는 것은 중간에 야곱이 사라진 것을 의미합니다.
야곱이 소멸된 거예요. 부활이라는 것은 야곱의 부활이 아니에요. 부활의 없어짐이 부활입니다. 내가 소멸됨이 부활이에요. 그동안 야곱이라는 이름이 가진 특징이 뭐냐 하면, 지고는 못사는 겁니다.
지금 갖고 있는 자기 목숨을 하나님께서 후원해주시고 하나님께서 보장해줘서 끝까지, 천국 갈 때까지, 하나님 만날 때까지 계속해서 함께 영원한 복락을 누릴 때까지 이 목숨 그대로 가자는 주의지요. 이 목숨 그대로. 다치지 아니하고. 주님이 지켜줄 거니까 다칠 리가 없다는 거예요. 도중에 끊어짐이 없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이삭을 약간 겁줬지만 다시 살려주는 것처럼 동일한 혜택이 오늘날 우리 신자에게, 성도에게, 예수 믿는 사람에게 있을 것이라고 은근히 기대하게 한 그것도 야곱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생각은 어디까지나 야곱이고 야곱에게 있어서는 야곱 본인밖에 없어요. 야곱 이후에 이스라엘이라는 다른 인간이 있다는 것을 야곱은 사전에 생각지도 못한 겁니다.
처음도 야곱이고 끝도 야곱이다. 이렇게 생각한 것이 야곱의 생각인 겁니다. 야곱이 죽고 야곱이 살아난다고 생각한 거지요. 그러나 이삭에게 찾아오신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찾아오신 것은 그런 생각이 하나님의 절정에 이른 하나님의 원수의 생각이라는 겁니다.
이야기를 다시 해 보겠습니다. 아브라함과 천사 사이는 그 관계가 좋았던 관계지요. 이 좋았던 관계가 되어버리면 무엇의 투입이 의미가 없느냐 하면, 좋은 관계에서는 죄로 인하여 제물이 투입될 의미가 없어요. 좋은 관계는 좋은 관계를 그냥 유지하면 되지 죄로 말미암아 제물이 투입된다는 것은 하나님 쪽의 처방에 의해서 끊어진 관계가 좋은 관계로 회복된다는 의미에서 제물이 투입된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하나님이 왔을 때 아브라함은 좋은 대접을 했으니까 하나님과 아브라함사이는 굉장히 건전하지요. 그러나 세 명의 천사 가운데 두 명이 심판하러 소돔과 고모라로 가버립니다. 그 때 갑자기 아브라함은 다급해 졌어요. 좋은 관계가 마냥 좋은 관계가 아닌 것을 알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조카가 소돔과 고모라에 있는 것을 알고 다급하게 기도합니다. "하나님이여, 하나님이 심판해버리면 그 중에 있는 의인이 심판받는 모순이 생기니까 악인만 골라서 심판하는 하나님께서 의인도 덩달아 악인 심판하듯이 같은 취지로 심판할 분은 아니잖아요." 자기가 알고 있는 하나님의 행하심에 대해서 정리가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깔끔하게 정돈이 안돼요. 하나님의 뜻은 일관성이 있어야 되는데, 의인은 살리고 악인만 죽이는 하나님인데 의인과 함께 악인을 죽인다는 것은 자기가 그동안 알고 있던 그 하나님이 아니니까 분명하게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자기에게 어떤 응답을 해달라는 겁니다. 자기 조카 롯이 소돔과 고모라에 있을 때에 조카 롯을 소돔과 고모라에서 빼내준다는 것은 생각도 못했어요.
조카 때문에 소돔과 고모라 심판을 지연시킨다든지, 일부는 심판하되 조카가 있는 곳은 불심판을 안 내린다든지 해야 될 텐데 심판은 조카의 가정 안까지 침투했습니다. 롯의 처가 소금기둥 되지요. 그렇다면 아브라함 본인의 위상이 뭐냐 하는 것은 심판을 통해서 다시 점검하게 됩니다.
롯이 의인이어서 구원해주는 것이 아니고 창세기 19장 29절에 보면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건졌다는 말이지요.
그 말은 뭐냐 하면, 아브라함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일관성 있는 일, 그 내용을 하나님이 수정해서 더 깊이 있게 알려주기 위해서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사건을 일부러 일으킨 거예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의인이라 하는 것은 결코 아브라함이 의로워서 의인이 아니라 아브람에게 찾아오신 천사의 일관성 있는 천사 본인의 자기 할 일의 결과물로 아브라함에게 의라는 것이 생산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원칙은 이삭에게 그대로 주어져서 이삭 자신이 밀어주는 큰 아들에게 복이 전달되지 못하고 자기가 좋아하지 않는 그 동생에게, 둘째아들에게 복이 주어짐으로 말미암아 이삭의 생각을 수정해 버리지요. 수정하게 하신 그것마저도 이삭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찾아오지만 그 인간을 통해서 뭐를 충분하게 뽑아내느냐 하면, 인간들이 기본적으로 갖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택한 백성들을 대표로 해서 뽑아낼 대로 다 뽑아내는 거예요.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이야기합니다. 인간은 죄인이라고. 그렇다면, 인간이 죄인이라는 말을 했으면 인간이 그 죄가 되는, 보편적으로 뭘 해도 죄가 되는 증거를 찾을 생각을 해야지요. 죄 아니라는 증거를 찾지 말고 무엇마저도 죄입니까, 라는 것을 찾도록 해야 돼요. 그러면 인간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도 죄에 해당되는 것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야 돼요. 윤리 도덕적인 것이 죄가 아니고 하나님을 믿고 찾고, 예수 믿는 것, 성령 믿는 것이 전부 다 죄라는 것을 인정할 줄 몰라요. 그리고 예수 믿는 그 행위는 마치 의로운 행위인 것처럼. 인간의 생각이 일관성이 없어요. 뭔가 잘못되어 있습니다.
그 잘못된 이유는 오늘 본문의 야곱을 통해서 보여줍니다. 야곱은 자기가 복의 근원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자기를 후원해 왔고, 지금껏 하나님께서 복 주시고, 많은 아들과 재산을 허락한 것은 하나님께서 팍팍 밀어줬기에, 하나님께서 인정해줬기에 그렇습니다. 그 하나님을 만나면 얼마든지 하나님께 찬미하고 아브라함이 천사를 대한 것처럼 충분한 대접을 할 용의가 되어 있는 사람이 야곱이에요. 그런데 하나님의 언약을 더 심화시키고 내용을 풍부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야곱을 찾아옵니다.
찾아올 때 밤에 찾아오고 야곱은 상대가 누군지를 모르는 상태에서 하나님이 주신 복의 근원의 자격으로, 또 하나님이 주신 이 복을 지켜내기 위해서, 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복의 선물이기 때문에 이걸 지키는 것이 자기의 사명인 줄 알아서 죽기 살기로 자기에게 찾아온 낯선 사람을 이기려고 붙들고 싸웠습니다. 야곱의 모습입니다. 그게 야곱이에요. 지고는 못사는 것. 이 야곱을 이긴다는 것은 저쪽이 이기면 내가 죽고 내가 이기면 저쪽은 물러간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 야곱의 생각은 뭐냐? 어떤 경우에도 나는 소멸되거나 사라지면 안 된다는 것이 철석같은, 하나님이 보장해주신 혜택이라고 야곱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그 낯선 사람은 날이 샐 쯤 되어서 야곱의 환도뼈를 쳐버렸습니다. 야곱은 직감적으로 내가 상대한 사람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사람이 아니라면 영적 존재지요. 밤중에 찾아온 영적존재. 낮이 되면 떠나야 되니까 영적존재지요.
영적존재라면 지금 다른 사람이 봤을 때 야곱 앞에 아무도 없는 게 돼요. 야곱은 지금 혼잣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 점이 중요해요. 야곱은 지금 천사와 상대하는데 그동안 자기는 누구하고만 상대했는가? 사람하고 상대했지요. 사람하고 상대하려면 그 사람이 있어야 되고 더 중요한 것은 여기 있는 내가 소멸되면 안 되고 살아 있어야 되고 사라지면 안돼요.
모든 야곱의 행동은 기본이 뭐냐? 나는 소멸되면 안 되고, 나는 사라지면 안 되고, 나는 버티고, 여기 존재해야 되고, 여기 있어야 된다는 것이 기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야곱이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 하나님의 천사를 만나는 순간 내가 여기 있음이 결국 뭘 유발했느냐? 하나님과 대판 싸워야 될 이유를 제공한 거예요.
왜냐하면, 그 쪽이 살아있으면 내가 죽고 내가 살아 있으면 내가 믿는 하나님이 내 손에서 죽임을 당해야 되거든요. 그런데 그 하나님의 조치가 이상스럽습니다. 야곱으로 하여금 이기는 자가 되게 만들고 하나님은 스스로 힘에 부쳐서 야곱에게 지는 모습, 헉헉거리면서 패배자의 모습으로, 져버리는 모습으로, 승리는 야곱이 가져가고 하늘에서 온 천사가 지게 되는 양상을 천사 쪽에서 보여줬습니다.
그 보여주는 양상은 천사가 야곱의 환도뼈를 침으로서, 힘의 원천을 침으로서 그걸로 종결되었어요. 둘의 씨름은 마무리 되었습니다. 마무리 되면서 야곱은 자기가 지금까지 싸우면서 지기 싫어한, 이겨야만 하는 인간들을 상대했을 때와 다른 상대자인 것을 본인이 알았지요.
인간들과 상대할 때는 야곱의 원칙이 맞습니다. 상대방이 이기면 나는 지고 내가 이기면 상대방은 지는 걸로 하나님의 복은 마무리 되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만약 상대가 인간이 아니고 하나님이라면 나에게 축복해주신 그 하나님이라면 나는 절정의 하나님의 적, 하나님의 절정의 원수의 모습을 하나님 앞에서 마음껏 다 보여준 셈이 된 거지요.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 했느냐 하는 질문거리가 남아 있어요. 하나님에 의해서 야곱의 환도뼈가 꺾임으로서 야곱은 더 이상 그동안 자기가 해왔던 인간으로서의 자기 솜씨 발휘는 이미 끝장났습니다. 힘의 원천이 작살나서 무너졌기 때문에. 무너진 이상 이제는 야곱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그 시작, 원인제공을 야곱으로서는 할 수 없는 상태에요.
그러면 어디서 해야 되는가? 저쪽, 하나님 쪽에서 자기에게 일방적으로 퍼부어줘야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야곱은 사람 앞에서는 자기가 있어야 될 존재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내가 있으나마나 한 존재가 되는 겁니다.
그동안 복의 근원이 되기 위해서 자기는 정신 차리고 매사에 최선과 최선, 열심과 열심,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힘과 지혜를 다 짜내서 이때까지 자기는 복의 근원의 자격자로서 합당한 인간이 되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것이 다 쓸모없는 짓거리를 한 것으로 이미 들통이 나버린 거예요.
야곱은 묻습니다. 본문 창세기 32장 28절에 “그 사람이 가로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 그리고 29절에 “야곱이 청하여 가로되 당신의 이름을 고하소서 그 사람이 가로되 어찌 내 이름을 묻느냐.”
자, 어찌 내 이름을 묻느냐 한 것은, 야곱이 “당신은 누구십니까?”라고 물을 때는 당신은 누구십니까, 라고 물을 수 있는 자격자, 권한 여전히 자기에게 있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런데 누구십니까, 라고 묻는 정도가 아니고 ‘당신의 이름이 무엇입니까’라고 했습니다.
그냥 ‘누구십니까’ 했을 때는 당신을 배척하든 받아들이든 내가 결정합니다, 하는 겁니다. ‘누구십니까’라는 이것은 평소에 야곱이 사람 대 사람으로 사람을 다룰 때처럼 당신의 정체를 밝히시오, 라고 하는 거예요. 보통 우리가 교회에서 “집사님, 안녕하셨어요? 잘 계셨지요?” 묻잖아요. 이럴 때는 둘 다 소멸되지 않고 둘 다 존재가 버티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해서 누구냐고 묻는 거예요.
그런데 야곱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야곱의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뀌게 되면서 그는 이름이 바뀌기 전의 야곱, 야곱의 자격으로 묻습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라고 했을 때에 만약에 하나님께서 하나님 이름을 이야기해 줘버리면 야곱의 이름을 아직도 존속시키는 뜻을 갖고 있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하는 말이 “네가 나에게 어찌 이름을 묻느냐?”라고 하는 것은 ‘내가 너에게 준 이름은 이제는 너의 이름이 아니고 나의 이름이 너의 이름’이라는 거예요. 이스라엘 이름이 바로 하나님 자신의 이름이라는 거예요. 그게 되려면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에서 하나님과 이삭의 만남처럼 하나님과 만나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소멸되어야 되고, 사라져야 되고, 언약 속에서 죽어야 되는 거예요.
이게 원리원칙이었던 겁니다. 하나님의 언약의 사람은 심판을 면제하는 것이 아니라 심판 속에 있어야 돼요. 심판 속에 있을 때만 그 야곱은 사라지고 사라진 그 이름 속에 하나님 자신이 들어오면서 비로소 하늘이 인간과 결합할 수 있는 요건을 하나님 자신이 스스로 땅에다가 생산해 내는 거예요.
이름은 하늘에서 제공하고 몸은 인간이 제공하고. 그럴 때만 창세기 3장 15절, 여자의 후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싸움이 성사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싸움은 하늘에서 벌리는 싸움이 아니고 지상에 내려온 하나님과 이미 지상의 인간을 장악한 땅 안에서의 싸움, 땅이라는 무대 위에서의 싸움입니다.
싸울 때 하나님의 승리의 방법에 있어서 분명히 창세기 3장 15절에서 여자의 후손이 뱀의 후손을 그냥 후려치지 않습니다. 반드시 뱀의 후손이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해야 돼요. 이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 인간에게 지는 방식을 채택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져버리면 하나님에게 이겨버린 인간이 승리를 안게 되고 승리를 안게 된 그 야곱은 승리만 챙기고 죽어야 돼요.
승리한 인간인 야곱은 죽고 승리한 인간이 이스라엘로 바뀌면서 야곱으로 하여금 승리케 해놓고 그 승리는 야곱의 몸을 가진 이스라엘의 승리로 전환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작전이었습니다. 영이 육을 만날 때에 영의 승리가 아니라 육이 된 영의 승리로 전환시키는 거예요.
왜 그렇게 해야 되느냐 하면, 육이 영과 결합되어서 대신 구원될 수 있는 통로가 그 방법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늘을 째고 들어오는 그 방법이 인간이 하늘로 통하는 유일한 구멍이 되는 거예요. 하나님이 먼저 인간을 찢어버려야 됩니다.
찢어버리고 하나님의 승리가 아니라 이 지상에 인간으로서 오신 분의 승리가 되려면 야곱이라는 인간에게 져야 되고 그 졌던 인간이 죽고 그 진 인간 속에서 인간이 된 하나님의 승리로 전환될 때 더 이상 악마는 인간을 붙잡아 둘 수가 없습니다. 언약 속에 있는 인간에만 해당됩니다.
그러니까 언약에서는 하늘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땅에서 이루어진다는 원칙이에요. 그것이 마태복음 6장의 주기도문에 나옵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 6:10)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거예요. 하늘의 징조가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고 땅에 있어요.
사람에게 와서 매 맞고 핍박받고 져버리는 그것이 승리입니다. 하나님의 승리에요. 왜? 모든 인간은 야곱이기 때문에. 모든 인간은 야곱이기 때문에 자기가 계속 존속해야 되고, 소멸되지 않아야 되고, 계속 살아 있어서 살아 있는 나의 구원을 획득하려고 시도하게 되는 겁니다. 그 배후에 뱀의 후손, 악마가 있었던 거예요.
하나님의 전쟁은 지는 형식으로 인간 속에 침투하지 아니하면 어떤 인간도, 한 명도 악마의 지배에서 구원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냐?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에요. 하나님은 하나님의 하나님으로 온 것이 아니라 이 지상에서 하나님께서 자기백성을 건져내는 하늘의 징조, 흔적을 죄인들 속에 남겼습니다.
남겼는데 인간들이 이미 구축하고 있는, 승리해야 살아남는다는 것, 지금 내 목숨이 존속되려면 계속 이기고, 이기고, 빼앗고, 빼앗고, 이기고, 이기고 해야 된다는 것, 그 이겨야 된다는 것, 져서는 안 된다는 그것이 뭐냐 하면 철저하게 야곱적속성이에요.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누굴 만난다 할 때 자기가 소멸되려고 만나지를 않아요. 모든 인간 대 인간의 만남은 그 사람이 부서지고 무너지는 한이 있더라도 내가 그 사람에게 찾아갈 때는 나는 그로 인하여, 그가 무너짐으로서 내가 이득보고, 내가 더 공고히 되고, 더 강화되고, 내가 확장되고, 내가 번창하고, 내가 잘되고, 지금 살아있는 것보다 더 확실하게 살아있기 위해서 누군가 필요한 사람들을 만나는 거예요.
그런데 마태복음 25장 40절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임금은 오른쪽 왼쪽으로 심판하시는 임금입니다. 오른쪽에는 양, 왼쪽에는 염소, 영원히 운명이 갈라지는 거지요. 한쪽은 지옥, 한쪽은 천국입니다. 임금이 하는 말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 지극히 작은 자에게 질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지극히 작은 자한테는 모든 자가 이긴 자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지극히 작은 자속에 누가 있느냐 하면, 바로 우리의 구세주가 거기에 계십니다.
그동안 사람들은 하나님을 하늘에서 찾으면서 야곱과 똑같은 발상으로 살아왔습니다. 하나님이 도와주니 설마 내 인생이 망가질 리가 있겠는가. 하나님이 도와주니 설마 내 인생이 바닥을 칠 일이 있겠는가. 일곱 번 넘어져도 여덟 번째 일어나는 것은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나를 지켜주니 하나님께서 반드시 내 생명을 인도하실것이라.
누구나, 악마에 사로잡힌 모든 인간들은, 모든 죄인들은 다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절정에 이른 악마의 성격이고 악마의 성질인 것을 누가 알겠습니까? 야곱도 몰랐어요. 야곱이 하나님의 천사와 싸울 때, 그 때가 뭐냐 하면 비로소 자기가 혼자 남아 있을 때에요. 그동안 사람과 계속 상대를 했다는 말이지요.
사람들 다 물리치고 하나님과 밤에 직접 상대했을 때 비로소 야곱은 뭘 생각했느냐? 시원적인 한 포인트, 점, 점을 생각한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복의 근원으로 삼을 때 내가 잘 되라고, 내가 복 받도록 하기 위함이 아니고 하나님이 유일하게 육을 뚫고 들어오는……, 시원적이라는 말은 뭐냐? 근원적인 것, 원초적인 최초의 지점을 말합니다.
그 점은 모든 것을 빨아 당기는 한 지점이에요. 거기에서는 모든 인간은 소멸되어야 마땅한 지점입니다. 그 한 지점에 구멍을 뚫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야곱이라는 인간, 자기밖에 모르는……, 인류의 대표자 비슷하지요. 지기는 싫어하는 그 인간에게 하나님이 찾아와서 야곱에게 “그래. 네가 이겼다. 나는 너에게 졌고 너는 이긴 거야.”라는 조건을 만들어놓고 야곱을 쳐버립니다. 야곱의 근원을 쳐버려요.
그러면 야곱은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에 이미 그 순간 야곱은 죽은 자가 되어버립니다. 브니엘처럼, 아버지 이삭처럼. 이미 죽은 자에요. 죽은 자인데 수풀의 어린양 때문에 산 것처럼. 제가 지금 부활의 의미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삭보다 더 심화시켜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짐으로 말미암아 야곱이 승리를 가져가게 만들어요. 승리한 채로 야곱을 죽여 버립니다. 그러면 승리는 남고 언약의 사람 야곱은 죽어버리지요. 그 야곱이 죽은 자리에 승리와 결합될 그 몸은 죽은 야곱이 제공하는데 죽은 야곱이 전에 있던 야곱과 완전히 절연, 끊어져 버립니다.
끊어진다는 말은 이제는 새로운 이름의 몸이 되지요. 그 새로운 이름이 뭐냐 하면, 하나님 자신의 이름이에요. 하나님의 이름은 지상의 이름입니다. 이름이라 하는 것은 전쟁할 때나 필요해요. 뱀과 악마와 전쟁할 때만 이름이 필요한 거예요. 다시 말해서 야곱아, 네 이름으로 악마를 못 이긴다는 거예요.
‘나는 살아 있어야 돼. 나는 소멸되면 안 돼. 나는 계속 버텨야 돼.’ 그런 식으로서는 어떤 인간도 악마를 이기고 천국에 올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자신의 자기 백성을 승리자가 되기 위해서 인간의 몸과 그리고 그 승리를 결합해서 그 때부터 이스라엘은 구원받은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승리를 기능으로 보여주는, 증거 하는 기능인으로 작용하는 겁니다.
이제는 내 구원이 성립되지 않고 예수님은 구원자라는 것을 보여주는 기능, 야곱은 그 기능을 부여받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야곱의 구원은 없어요. 주님이 살아 있는 야곱의 몸일 뿐입니다. 이게 그대로 신약의 십자가 이후에 성령이 오게 되면 성도의 몸이 그러한 몸이에요.
성도의 몸은 이미 자기의 몸은 소멸되고 사라지고 날마다 죽어야 될 그 몸입니다. 그런데 그 몸에서 이미 죄를 이기고 저주를 이긴 부활의 능력이 성령을 통해서 날마다 승리를 만끽하도록 주께서 그 기능을 보여주게 되는 겁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에 보면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 환도뼈로 인하여 절었더라 그 사람이 야곱의 환도뼈 큰 힘줄을 친고로.” 그 다음에 나온 단어 네 자가 나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라고 해서 ‘이스라엘’이 등장하지요. 이스라엘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을 이겼다는 것, 하나님을 이기고 사람을 이겼다는 그 방식이 이제는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이방민족 중간에 드디어 등장하게 됩니다.
하나의 국가 형태로 등장하게 돼요. 야곱이 맞은 그 환도뼈에서 이스라엘의 왕들이 쏟아져 나온다고 되어 있어요. 하나님의 언약의 원리원칙이 계속 적용되는 현장에서만 마귀는 그 사람에게 손을 쓸 수가 없습니다.
이 말씀 드리고 마치겠습니다.
사람은 누군가를 만날 때 그 사람을 통해서 자기를 강화시키고 기존의 자기목숨을 유지하려고 애를 쓸 겁니다. 저 사람을 통해서 내가 나 됨을 얻으려고 찾아갈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의 성령이 임한 소자를 만나게 되면 바로 그것이 시원적인 점, 내가 비로소 찾아낸, 내가 어디에서 사라지고 어디서 없어진 존재인가를 유일하게 찾을 수 있는 지점, 내가 바로 하나님의 원수였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겁니다.
나는 가해자고 그 사람은 피해자라는 사실, 가해자는 항상 승리하잖아요. 그런데 나를 가해자라는 죄인으로 들춰내기 위해서 지극히 작은 자에게 성령을 줘버린 겁니다. 성령을 준 사람인지도 모르고 나는 그 사람을 만날 때 이용하려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그 사람 속에서 정말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아, 주님이 그 사람을 통해서 나에게 나타나지 아니하면, 그리고 내 죄를 깨닫지 못한다면, 내가 주님을 죽인 피해자라는 것을 알게 하지 못한다면 나는 영원히 지옥갈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그 소자와의 만남을 통해서 비로소 알게 된 겁니다.
그러니까 십자가의 반복이라는 것은 오늘날 성령 받은 여러분, 이렇게 해야 제가 기분이 좋아요, 성령 받은 여러분을 우습게 여기고 내 이익을 위해서 상대방을 생각하는 야곱 같은 사고방식으로 다가서게 만들고 일거에 와장창 내가 그 앞에서 천하의 죄인으로서 무릎 꿇고 용서를 구하고 “잘못했습니다.” 하고 싹싹 빌면서 내가 여기에 소멸되지 않고, 내가 여기에 버틴다는 이 자체가 바로 십자가의 소자를 우습게 본 원인제공자였습니다, 라고 해서 더 이상 큰소리치지 못하게 만들어요.
야곱이 그렇기 때문에 그 다음 33장을 보면 이해가 됩니다. 야곱은 두말 하지 않고 형 에서에게 주여, 하고 일곱 번 절을 해버려요. 왜? 자기 자신은 소멸될 수밖에 없는 천하의 죄인, 바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유일하게 자기백성을 구원하는 시원적인 하나의 점, 접촉점, 유일하게 구멍 뚫린 점, 벧엘, 하늘의 문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그 앞에서 죄인을 부르러왔던 하나님의 원리원칙을 야곱은 미리 알았기 때문에, “하나님이여, 저의 모든 존재를 묵살하시고 저의 모든 행위를 주여, 개무시해 주시고 상대방이 나를 짓밟는다 할지라도 나는 그 점에 대해서 주 앞에 찬미하고 감사하게 하옵소서. 왜? 저는 그런 수모를 당해도 마땅한 종이기에 그렇습니다.”
이것이 장차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품성이고 오늘날 이 품성을 성령을 통해서 소자된 저와 여러분들이 받은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뚫고 온 그 기적이 우리의 정체를 밝히는 유일한 시온적인 포인트였습니다. 그 지점이 되기 위해서 주께서 십자가를 가지고 찾아오신 것을 감사합니다. 십자가 안다고 우기면서도 같은 성령 받은 사람을 얼마나 이용했고 건방지게 다가섰습니까. 주여, 여지없이 우리들의 목숨이나 모든 가치와 의미를 묵살하고 그것이 무너지는 즐거움을 허락해주옵소서. 예수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