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강-창 28장 10-14절(야곱의 사다리)171025-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28장 10-14절입니다. 구약성경 41페이지입니다. 창 28:10-14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나 하란으로 향하여 가더니 한 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 거기서 유숙하려고 그곳의 한 돌을 취하여 베개하고 거기 누워 자더니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위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하고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서 동서남북에 편만할찌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야곱이 지금 브엘세바, 이스라엘 땅을 떠나서, 하란, 지금의 터키 남쪽으로 가고자 했던 것은 아내를 얻기 위한 본인의 계획이었습니다. 야곱 나름대로의 자기스케줄에 맞춰서 진행했는데 갑자기 꿈에 사닥다리가 나타났습니다. 아내구하는 일이 자기가 처리할 수 있는 일상의 일로 간주했는데 하나님께서 사닥다리를 통해서 천사들을 가지고 야곱의 진행방향을 차단시키면서 개입하고 나섰습니다.
야곱이 놓치지 말아야 될 요소가 있어요. 창세기 24장 60절에 보면 “리브가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우리 누이여 너는 천만인의 어미가 될찌어다 네 씨로 그 원수의 성문을 얻게 할찌어다.” 야곱의 어머니 리브가가 시집갈 때에 하나님께서 오빠를 통해서 계시를 주기를, 그냥 단순히 일반인의 아내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천만인의 어미가 되고 네 씨, 리브가의 그 씨로 말미암아 그 원수의 성문을 얻게 할찌어다. 원수라는 것은 전쟁상태에 돌입되어야 오는 개념입니다. 성문을 얻는다는 것은 갇혀 있는 자를 빼낼 때만 성문이 열린 거지요. 해방이라고 합니다. 그것을 요즘 말로 하면 구원이라고 하고, 갇혀 있는 자를 옥에서 건져낸다, 누가복음 4장에도 그런 내용이 있거든요.
기쁜 소식을 전하는데 옥에 갇힌 자를 나오게 한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가둬져 있는 형편에 대해서 인간들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남자들이 군에 가면 그것을 느끼지만 일반사람들은 자기가 가둬졌다는 생각을 못하지요. 왜냐하면 야곱은 지금 자기 아내를 구하려고 외가에 가는 중이라 이 말이지요.
누가 자신을 체포했습니까? 자기 맘에 맞는 여자를 구해서 결혼하면 된다는 일상인데 그 일상에서 얻은 아내가 과연 야곱에게 격이 맞는 아내이겠느냐 하는 겁니다. 야곱은 그냥 보통 사람이라고 자부하지만 야곱의 출생부터 야곱의 인생 전체가 하나님의 복의 근원을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의 작품으로서의 야곱을 다루고 있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야곱과 일상의 사람들과의 차이점을 찾아라, 그런 문제지요. 야곱이라는 사람, 그리고 에서의 차이점은 어디에 있는가? 일반인에게 찾아볼 수 없는 요소가 야곱에서 나올 때 야곱은 언약의 사람이고 하나님에게 붙잡힌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질문은 우리에게 그대로 해당돼요.
여러분이 성도이십니까? 그러면 다른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일반사람하고 뭐가 다른 게 나와야 되잖아요. 다른 것이. 로마서 8장에 보면, 환란과 곤고나 핍박이 온다 할지라도 성도에게서는 다른 것이 나온다고 했는데 그 다른 것이 뭐냐 하면, 끊어지지 않는 것이 나와요.
끊어지지 않는 것이 뭐냐?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온다 이 말이지요. 다른 사람은 뭘 제시하느냐 하면, dna를 제시해요. 미토콘드리아, 이런 것을 제시하거든요. 인간을 이루는 세포의 구성 물질, 이것은 누구에게나 다 있는 겁니다. 톱으로 두뇌 쪼개면 거기에 세포 나와요.
정기검진 누구나 받습니다. 검진 받으면 그 안에 성령 보입니까? 안보이지요. 성경을 본다는 것은 소속이 어디냐 하는 것을 분명히 반복해서 확인시켜 줍니다. 설교 다시 해 봅시다. 야곱은 그냥 룰루랄라 그저 자기 아내 찾으러 가요. 선보러 간다 그 말입니다. 야곱과 일반인의 아무 차이점이 없어요.
그런데 하늘나라 헌병이 찾아와서 스톱을 시킵니다. “네가 생각하는 네 아내 아니야. 천만인의 어미가 될 아내다.” 천만인의 어미가 된다고 할 때 벌써 아브라함의 아내가 탁 떠오르지요. 일관된 하나님의 그 프로젝트에 해당되는 여자, 해당되는 아내를 원하는 겁니다.
그러면 야곱이 얻을 그 아내가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형틀이 잡히게 되면……, 제가 주일 낮에 사랑의 끓는 물에 수제비가 던져지면 틀이 잡힌다고 했지요. 그래서 형틀이 잡히게 되면 그 아내로 인하여 야곱의 형태가 동반해서 잡히게 되는 겁니다. 그래야 여자의 후손 덕을 보는 거예요.
여자의 후손 덕에 택한 백성들이 구원의 근거를 장만할 수가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에서 야곱이 브엘세바로 가는데 해가 지고 밤이 됩니다. 본문 11절에 “한 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 거기서 유숙하려고 그곳의 한 돌을 취하여 베개하고 거기 누워 자더니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위에 섰는데.”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섰다는 겁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꿈이 실제라는 겁니다. 눈에 보이는 세계가 실제가 아니고. 흔히 말하는 개꿈 말고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꿈에 나타난 그 숨겨진 현실이 사람의 눈에, 사람의 시각에 보이는 현실과 어떻게 되는가? 천만인의 어미가 되고 원수의 성문을 연다고 하니까 전쟁상태에 돌입한다는 그 말입니다.
야곱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황당한 거예요. 그냥 소박하게 자기 색시감을 구하러 가는 이 길이 색시감 구하러 가는 길이 아니고 하늘이 땅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는 전쟁터를 마련하는데 있어서 야곱의 몸이 필요했던 겁니다. 야곱의 몸도, 마음도 필요하고 야곱의 일상들이 다 필요한 겁니다.
이 본문 보면서, 사닥다리가 내려오는 이 하나님의 일이 요즘 교회에서 흔히 말하는, 야곱 개인을 구원하고자 하는 것이라면 사닥다리를 타고 내려오는 하나님의 천사가 달랑 하나만 내려오면 돼요. 하나만 내려와서 “야곱아, 내가 너 구원시켜 줄게.” 이러면 되는데 여기에 하나님의 사자가 오르락내리락 하는데 그 숫자가 창세기 32장 1절에 보면 나옵니다.
“야곱이 그 길을 진행하더니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를 만난지라 야곱이 그들을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하나님의 군대라 하고 그 땅 이름을 마하나임이라 하였더라.” 마하나임, 하나님의 천사의 떼가 내려와서 난리도 아니에요. 오늘 본문 28장 13절에 하는 말이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야곱의 앞길을 사닥다리로 내려왔던 그 천사들이 막는 겁니다. 야곱과 먼저 마주치게 만들어요. 물론 그 중에 한 사자가 얍복강에서 야곱을 만나게 되고요.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이렇게 되어 있는데 지금까지 한 것을 다시 한 번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사다리가 내려왔다는 것이 야곱으로 하여금, 네가 사다리타고 천국까지 올라가서 구원받아라, 가 아니라 그 사다리의 용도가 야곱으로 하여금 하나님 만나러 올라오라는 용도가 아니고 야곱이 있는 그 지점에 하나님께서 일관되게 자기가 하실 일을 하시기 위해서 야곱이라는 곳에 집중해서 내려오는 거예요.
야곱은 그냥 장소제공, 자리만 제공했을 뿐입니다. 우리가 야곱입장이라면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정말 황당하기 짝이 없어요. 그런데 내려오는 천사가 이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천사는 한마디로 당당한 거예요. 여러분, 도도한 것하고 당당한 것 하고 좀 구분하세요.
도도하다는 것은 자기인생이 스스로 맘에 안 들어서 자신의 허물과 실패성을 남에게 안 들키기 위해서 밑에서부터 억지로 끌어올리는 그것이 도도함이에요. 그런데 도도함 말고 당당함이라 하는 것은 내 인생을 외부에서 간섭해서 외부가, 외부에서 오시는 그분이 내 허락도 없이 일방적으로 자기자리로, 자기가 일하는 처소로 ‘여기 유숙 하겠다’ 하는 식으로, 마치 천사 세 명이 이런 식으로 마구 밀고 들어와서 아브라함에게 숙식을 제공하라고 요청하는 것처럼 그 당당함, 하나님의 당당함이 맘껏 거침없이 나올 때 그것은 당당함이에요.
성도는 당당하게 살아야지 도도하게 살면 안 됩니다. 그 당당함 때문에 이것은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지만 이삭도 정신을 못 차립니다. 찾아오시는 하나님이 당당해도 너무 당당하기 때문에. 남들 보기에는 상당히 건방져 보이지요. 건방져 보이는데 나에게 오신 이 하나님을 내가 어떻게 처리해야 되고 어떻게 모셔야 될지, 어떤 매뉴얼도 없어요.
오늘 본문에서 성도가 발견해야 될 중요한 점이 무엇이냐, 라고 저에게 물으면 이겁니다. 현재 야곱의 입장에서는 아내 문제도 중요하지 않아요. 요즘 식으로 하면 오직 관심사가 예수 그리스도에 있습니다. 야곱 입장에서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입니다. 야곱이 성도라면 오직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에게만 관심이 집중해 있습니다.
“누구십니까, 주여!” 이렇게 되는 거예요. 울진의 원자로 5기, 6기를 재가동하냐 마냐 그 문제로 떠들썩할 때 그 자리에 야곱이 있다면 “주여, 누구십니까?” 원자력발전소 그런데 관심이 없어요. 오직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만 관심사가 되어야지 그 외는 일체 관심사가 되지 않습니다.
야곱이 자기를 찾아온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에 관심을 둔다면, 그리고 그 야곱의 모습을 다른 사람이 본다면 ‘저 야곱이라는 사람은 아내를 찾아가면서 딴 데 관심 안두고 왜 위만 쳐다보지? 우리하고 좀 다르네. 왜 생각이 거기에 꽂혀 있지?’ 이렇게 보여야 돼요.
이것은 사울이라는 사람이 다메섹으로 가다가 예수님이 찾아왔을 때 그 사울과 함께 동행 했던 사람들의 관심사는 우레가 쳤다고들 했는데 그 당사자 사울은 지금 주님에, 예수 그리스도에 꽂혀 있어요.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냐에 꽂혀 있어요. 예수님이 누구냐.
자기 일상의 걱정근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입을까, 지금 그런데 신경 쓸 수가 없어요. 내가 왕년에 잘나갔는데, 또는 내가 왕년에 교도소 들락날락 했는데, 그런 것도 신경 쓸거리 아닙니다. “누구십니까, 저에게 왜 이러시는 거예요? 밤에 사닥다리 걸쳐서 줄줄이 왜 내려오시는 겁니까? 한 떼거지로 천사가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왜 그러는 거예요?”
이런 야곱의 이야기가 굉장히 이질적이에요. 흔히 말합니다. 이것은 야곱의 체험이라고요. 야곱의 체험 아닙니다. 이것이 하나의 야곱의 체험이 되어버리면 야곱은 지금껏 있던 체험들이 누적된 곳에 그냥 하나 더 추가된 체험에 불과한 겁니다. 이것은 우리가 기억할 체험이 아니고 지금껏 기억한 체험도 다 날려버리고 그것이 무의미한 것으로 일거에 선언해버리는 그러한 체험입니다.
내가 나를 만들던, 나는 이런 사람이라고 우기고 싶은 그 모든 것을 와해시키는 체험이에요. 신약으로 하면 일종의 십자가체험이에요. 십자가 앞에 설 때 내가 과거에, 5년 전에, 10년 전에 내가 뭘 했고 어떻게 살아왔는가, 그것은 일거에 다 와해되어 버립니다.
내 기억에 남아 있는 자투리 같은 나만을 위한 체험인데 지금 나에게 찾아온 체험은 나만을 위한 것을 용납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가 너를 거주지로 삼겠다, 너를 성전으로 삼겠다, 네 몸뚱이를 가지고 이제부터 나를 이 세상에 드러내리라, 주께서 허락도 없이 무대포로 사용하겠다고 난입, 쳐들어온 경우이기에 야곱의 입장에서는 다른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습니다.
야곱이 사다리를 봤다는 것은 ‘야곱은 좋겠다. 체험 하나 더 추가해서’ 그것이 아니고 야곱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없는 것을 야곱의 인생을 통해서 폭발하듯이 내놓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것은 야곱의 체험이고 나는 내 인생체험이 따로 있습니다, 라고 하는데 이러면 안돼요.
왜냐하면 야곱의 체험이 복의 근원이 되기 때문에 그래요. 복의 우물터. 그러니까 영생의 우물터라 보면 돼요. 영생 얻고자 한다면 우리는 구차 없이 어디로 가야 되는가. 야곱한테 가야 돼요. 야곱을 통해서 주신 하나님의 뜻은 뭐냐 하면, 중보자 없는 하나님의 일은 없다는 겁니다.
이것은 지난 대구강의 초반에 했습니다. 하나님을 상대해서 뭘 얻겠다고요? 뭘 얻는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일을 하실 때는 중보자를 통해서 일을 하기 때문에 반드시 중보자를 앞장세우는 거예요. 하나님은 누구십니까, 라고 묻지 마세요. 그거 물어도 소용없어요.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가 누구십니까, 라고 물어야 되고 그 보내신 자의 이 땅에서의 마지막 몰골, 인간에게 어떤 처참한 대우를 받았습니까, 하는 거기에 주목해야 돼요. 그게 신자입니다. 야곱 하나 구원하려고 들면 그냥 야곱 구원시키면 되지 무엇 때문에 사닥다리는 왜 내려서 보여줍니까?
주께서 본격적으로 사다리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일 하겠다는 거예요. 그러면 야곱은 구원받고자 하다가 졸지에 구원받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일을 하는, 그 당시 아브라함의 하나님, 언약의 하나님이죠, 예수님의 일을 하는 장소 제공자가 된다니까요.
원래 전쟁이 일어나면 집에 있는 트럭이라든지 가구라든지 이런 것은 전부 다 공출되어야 돼요. 나라가 전쟁할 때 돈도 안 받고 “이 차 쓰세요. 이 헛간 쓰시고 부엌도 쓰세요.” 하면서 전쟁하는 군인들 밥도 해 줘야 돼요. 그냥 다 내놔야 돼요. 야곱이 그런 처지에 있습니다.
주님의 일관된 하나님의 전쟁, 원수의 성문을 여는 그 전쟁에 있어서 야곱이 공출당한 겁니다. 여기서 생각나는 노래가 있어요. “따르릉, 따르릉, 비켜나세요. 자전거가 나갑니다. 따르르르릉.” 우리는 나름대로의 자기인생이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따르릉 자전거타고 옵니다. 비켜나라, 비켜라.
세례요한이 뭐라고 했습니까? 세례요한이 외치면서 “자, 이분입니다.” 하고 자기는 비켜났다 이 말이지요. 세례요한이 태어날 때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서 태어났어요. 성령의 지시에 의해서 태어났거든요. 그 세례요한이 “너 뭐야?” 하니까 내가 뭐냐를 묻지 말고 내가 소개하는 분을 보라는 겁니다.
성도는 영생을 소유하는 자가 아니에요. 구원을 소유하는 자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꽉 붙잡는 자가 아니에요. 지금 그렇게 알고 있었습니까? 그러면 이제는 따르릉, 비켜나세요. 비켜나세요. 제가 군에 있을 때인데 다른 부대에 천주교 수사하다가 온 사람이 있었어요. 나이는 나보다 한 몇 살이 위였는데.
저는 군대에서 예수님을 알아서 국방부가 원하는 스케줄은 생각 안하고 완전히 예수님만 생각했는데 그 때 천주교 수사하다가 왔으니 옳다구나, 나보다 선배다 싶었어요. 성경을 얼마나 많이 읽었겠어요. 성경이 알고 싶어서 물었어요. “신앙생활 어떻게 합니까?” 그러니까 그 수사가 하는 말이 “신앙생활은 하나님과 만나서 하나님과 교제해야 되고 하나님과 동행해야 됩니다.” 이렇게 이야기해요.
훈련은 끝났어요. 훈련 할 때는 야외에서 텐트치고 훈련해요. 훈련이 끝나고 난 뒤에는 밤에 보초를 서면서 뭐만 기다리는가 하면, “하나님이여, 나타나 주옵소서. 하나님이여, 저에게 오시옵소서.” 이렇게 간절히 기도했는데 결국은 하나님에 대한 상상력만 누적이 될 뿐이에요. 하나님상이 조작되는 거예요.
그 천주교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이야기한적 없고 그냥 하나님과 접신하듯이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야 된다는 겁니다. 동행해야 되고, 동반해서 길을 같이 해야 되고 하나님과 교제해야 된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 보세요. 야곱이 하나님 만나기를 요청했습니까? 지는 잠자기 바빴어요.
야곱은 일체 요청한 것이 없습니다. 바로 성도의 고백은 이것입니다. “주여, 제가 요청한 것이 없습니다. 나는 내 아내감 구하러 갈 뿐입니다.” 내 계획은 이것뿐이지요. 하나님 상상한 적 없어요. 오늘날 한국교회는 전부 다 상상이고 조작입니다. 금요철야마다 조작합니다. 신앙의 티내려고.
그거 조작해서 뭐하는데? 자기를 복의 근원으로 삼고자 하는 겁니다. 중보기도의 중심으로 삼으려고 합니다. 자기가 기도하면 딸이고 남편이고 동생이고 다 구원되는 중보기도의 중심처로 삼고자 하는 겁니다. 자기가 중보자 아니거든요. 중보자 아닌데 중보자이고 싶어 하는 거예요.
그게 종교인데요.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유명한 이야기가 나와요. 사마리아여인이 나옵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일상의 일을 합니다. 물 긷는 일상의 일을 할 때에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제는 그런 물 말고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하고 운을 뗐거든요.
그러고 난 뒤에, 그 다음부터는 본격적으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야곱에게 사다리 설치하고 일방적으로 천사가 내려와서 하나님의 자기계획을 밀어붙이는 똑같은 방식으로 그 여자에게 묻습니다. “네 남편을 데려오라.” 뻔히 아시면서 남편 데려오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남편이 없습니다.” 하니까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그러면 도대체 몇 명입니까? 여섯째 남편과 살고 있는데 이 이야기를 왜 하시느냐 그 말이지요. 주님께서 사마리아여인에게 그 말을 왜 하느냐 하면, 그것은 보통 인간들이 남자 여섯명을 사귀면서도 그 밑에는 뭐가 깔려 있느냐 하면, 중보자 없이 하나님이 나의 하는 행위에 대해서, 나는 하나님 보시기에 어떤 식으로 이 모든 일에 용서가 되고 커버가 되느냐 하는 자기 나름대로의 종교성이 밑에 바닥재처럼 깔려 있는 거예요.
그게 뒤에 나옵니다. “여자가 가로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어느 쪽이 맞습니까, 하는 투로 이야기했어요. 이게 참 소중한 순서인데요. 분명히 이야기했습니다. 네 몸에서 생수의 물이 나온다고. 네 몸입니다.
무슨 의식을, 의례를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의식을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종교는 의식이거든요. 폼 내는 거거든요. 형식을 갖추잖아요. 그게 아니고 성도는 형식이 필요 없다는 거예요. 왜? 네 몸을 하나님이 사용해서 그 몸에서 생수가 나오는데 형식을 어떻게 취합니까? 형식을 취할 수도 없잖아요.
그것을 먼저 거론하면서 네 몸에서 생수가 나온다는 그 방식을 일방적으로 주님께서 실시를 하는데 예수님께서 먼저 그 여자의 일상생활을 들춥니다. 여자는 지금 여섯 번째 남자를 사귀고 있다는 흔한 일상을 이야기하는데 거기서 그 바닥재, 나는 평소에 이런 종교를 깔고 남자 여섯 명 째 사귑니다, 하는 것이 들통 난 거예요.
그럴 때 주님께서는 성령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온다고 했어요. 성령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온다고 할 때 그 여자가 아이큐가 아주 뛰어났는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린다 하는 것이 왜 메시야를 만났다고 하면서 물동이 버려두고 미친 여자처럼 동네로 뛰어갔는지 납득이 안 되는 거예요.
이 대목을 아무리 들여다봐도 절차가 어떻게 되었기에? 뭐가 빠진 구석이 있는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린다고 하니까 ‘아,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는구나.’ 이렇게 끝나는 것이 아니고 “나는 메시아를 만났다.” 했을 때 우리가 놓친 것이 뭐냐 하는 거예요.
그 여자가 그리심산에서 예배드리는지 예루살렘에서 예배하는지 그 의식과 의례를 제시했을 때 그 둘 중 하나일 것이라는 것이 여자의 선입관이었는데 그 둘 다 배제 당했어요. 둘 다 배제했다는 말이 뭐냐 하면, 인간 쪽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안 받는다는 겁니다.
왜 안 받느냐 하면, 메시아가 하는 일이 뭐냐? 인간이 해도 소용없는 일을 주님께서 인간의 근원에 찾아가서 그 근원전체, 여자가 남자를 여섯 명 사귀든 뭘 하든 관계없어요, 그 바닥부터 생수가 나오는 그 모든 장치까지 백프로 예수님 본인이 실시하는 장치를 마련하는 것으로 이해한 겁니다.
중보자가 왜 중요하냐 하면, 우리를 대신한다고 했잖아요. 대신했으면 예수님만 보지 말고 우리 모습이 예수님께 딸려가서 이제는 예수님 안의 진정한 우리 모습이 함께 있다고 봐야 돼요. 그러면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아버지 앞에, 정말 아무도 모르는, 숨어 있는 그 꿈의 세계, 진짜 세계지요, 그 꿈의 세계 속에 아버지 앞에 섰을 때의 그 현실, 역사적으로 아버지 앞에 당하는 그 모습을 보라는 말이지요.
그게 처벌이잖아요. 저주잖아요. 그러면 우리의 본질은 뭐냐? 진정한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처벌대상이라는 것은 예수님이 아니고서야 우리가 어디서 발견할 수 있습니까? 월급이 적다고요? 애가 아프다고? 겨울철에 옷이 없다고요? 처벌대상인데 발가벗고 다니면 어떻고 굶으면 어떻습니까? 처벌자인데.
왜 세리가 구원받고 왜 창기가 구원받는데요? 정말 마지막 때 믿음 있는 자가……. 믿음이 없어요. 그렇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 진 모습을 보였다고 이야기해도 관심도 없어요. “예수님 같으면 나에게 복 줘야지. ★은 이루어진다. 내 꿈은 왜 안 이루어지는데? 기도를 그렇게도 했는데 왜 안 이루어지는데?”
맨 날 자기생각하고 있다는 말이지요. 중보자가 왜 왔습니까? 따르릉, 따르릉, 이에요. 비켜나라, 비켜나라. 비켜라, 그 말이에요. 그 원리가 창세기 15장에 나옵니다. 그래서 이 창세기를 해도 해도요, 끝도 없이 내용이 나와요. 15장 10절에 “아브람이 그 모든 것을 취하여 그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개진 중간에 하나님이 친히 불이 되어서 중간을 통과합니다. 양쪽 제물을 마주보게 하고. 제물을 쪼갠다는 것은 중보자의 속성, 본질을 이야기합니다. 그 제물, 중보자와 아버지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떤 관계가 있느냐. 하나님이 그 가운데를 통과하지요. 불로서. 마치 출애굽기 3장에 떨기나무의 불로 나타나서 아브라함에게 이야기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거든요. 하나님이 중보자를 보낸 것이 뭐냐? 이게 구원하려고 보낸 것이 아니고 심판하러 보냈습니다. 그러면 구원자는 없지 않느냐. 구원자는 없어요. 그러면 구원자는 어디에 있습니까? 야곱이잖아요. 야곱을 구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하나님을 구원하지요.
전에 언젠가 배낭에 십자가를 집어넣는다고 했지요. 야곱을 배낭이라 한다면 그 배낭에다가 야곱의 하나님을 집어넣고 야곱의 하나님을 아버지가 건져내게 되면 야곱이가 같이 딸려서 구원되는 방식을 채택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이삭을 낳고 이삭을 찾아오는 거예요. 이삭을 찾아와서 이삭의 하나님이 구원받으면서 이삭도 같이 구원받는 거예요.
이삭을 통해서 보여주는 하나님은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을 보여줬다면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없는데서 있게 하는 분이에요. 인간들이 사는 이 세상에서의 하나님은 어떤 모습으로 오느냐 하면, 인간에서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인간으로 오셨고 없는데 생겼어요. 세상에, 성령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 육으로서 나지 않은, 육의 족보, 안동 권씨, 경주 이씨, 어떤 육의 족보, 심지어 아브라함의 족보에도, 다윗 족보에도, 어떤 족보에도 없는 그런 분으로 오셔서 여자 쪽에서, 여자의 몸을 통해서, 여자의 자손을 통해서 왔거든요. 유일하게 사람과 접촉되는 것이 남자가 아니고 여자에요.
마리아를 통해서 해놓고 그 이름은 뭐냐 하면, 아브라함의 자손이고 다윗의 자손으로 오셨어요. 아브람의 자손이 아니고 아브라함의 자손인 거예요. 없는 이삭. 그리고 이스라엘의 하나님. 이제 야곱의 하나님이라 하지 않고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에요.
그러니 이 땅에서 아무도 구원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합니다. 아무도 구원될 수 없어요. 그러면 누가 구원을 이야기하느냐? 그것은 뱀의 자손, 마귀가 그렇게 사람들에게 그런 발악을 집어넣은 거예요. 그 중에 하나가 사마리아 여인이잖아요. 어떤 종교를 채택해서 아무리 열심히 형식을 갖춰서 예배드린다고 구원받겠습니까?
사마리아여인에게 예수님이 찾아오기 전에는, 내가 어떤 행위를 하면 하나님이 나를 받아들이겠느냐? 그러니까 뭐가 빠져 있느냐 하면, 중보자가 빠져 있어요. 중보자가 빠져 있어요. 야곱도 하나님 알아요. 알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로 내 아내감을 줄 거라고 생각했지 야곱의 어떤 머리로도 사다리 타고 내려오는 하나님의 천사는 없어요.
월요일 대구강의에서 했는데 하나님을 믿는 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겁니다. 성경에 분명히 나를 본 자가 아버지를 봐요.(요 14:9) 절대로 인간들이 아는 하나님을 하나님이라고 인정해준 적 없습니다.
자기의 상상에 상상을 취한 거예요. 상상의 하나님, 치킨 집 할아버지 하나님, 금복주 할아버지 하나님, 산타클로스 하나님을 상상하고 자기가 만든 하나님과 자기가 동행을 왜 못해요? 어디가도 함께 있을 것이라고 하면 끝나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야곱의 하나님은 그게 아닙니다.
그리 되면 하나님과 하나가 되고 하나님을 내가 소유하는 것이 돼요. 소유가 아닙니다. 따르릉, 따르릉, 비켜나세요, 라는 거예요. 쪼개겠다는 겁니다. 네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일을 하겠다는데 있어서 너는 토를 달지 말라는 거예요. 이런 경우가 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저에게 고난줍니까?” “그 입 다물라.” 일은 내가 하고 네 몸은 장소제공만 할 뿐이에요. 자리만 제공할 뿐이에요. 욥도 알거든요. 주신자도 하나님이요 가져가신 자도 하나님이라고. 알아서 하시겠지. 장소제공만 하는데 아프기는 너무 아팠던 모양이라. 아프니까 아야, 한 거예요.
장소제공인데 좋게 안 아프게 하면 되는데 너무 아파요. 사도바울도 주께서 은혜 주시는 것은 좋은데 육체의 가시는 왜 줍니까? 빼달라고 세 번 기도해도 안 빼줍니다. 고질병이 생겼어요. 어금니에 종양 나왔는지 모르겠어요. 네게 준 은혜가 족하다는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사도바울아, 그 입 다물라.” 너는 입을 벌릴 입장이 아니라는 겁니다.
네가 어떻게 되든지 간에 내가 판정할 문제지 네가 판정할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왜냐? 복의 근원은 야곱이 아니에요. 야곱의 하나님이 복의 근원인데 그 야곱의 하나님이 야곱을 통해서 튀어나오게 되어 있다고요. 야곱이 이스라엘 되거든요. 베드로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요한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야고보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 속에서 누가 튀어나오느냐? 예수 그리스도가 고백되잖아요. 사도바울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마귀도 사도바울 알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중요한 거예요. 오늘날 주님이 우리 허락도 없이 쳐들어왔습니다. 마치 사마리아여인같이 우리 일상생활 하는데. 그냥 쳐들어온 거예요. 그리고 우리더러 비키라는 거예요.
공출당하는 겁니다. 안방 내놓고 부엌도 다 내놓으라는 겁니다. 있는 옷가지도 다 내놓아야 할 판이에요. 있는 것 다 빼앗기는 거예요. 그렇게 하겠다는 하나님의 그 근본 취지가 어디에 있느냐? 하나님의 심판밖에 없다면 그 심판이 뭐냐? 분류작업입니다. 어떻게 분류하느냐? 에서 쪽과 야곱 쪽을 분류하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야곱이 에서 편에 서야 되고 에서가 된 야곱 맞은편에 야곱의 하나님이 야곱자리에 있어야 돼요. 장자가 누구냐? 에서도 장자가 아니고 본인도 장자가 아니고 장자는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가 장자가 되는 겁니다. 그걸 알고 나중에 33장에 보게 되면, 야곱이 에서를 보고 일곱 번 절을 해요.
3절에 “자기는 그들 앞에서 나아가되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히며 그 형 에서에게 가까이 하니.” 형이라 하지 않고 나의 주님이라고 해요. “야곱이 가로되 하나님이 주의 종에게 은혜로 주신 자식이니이다.” 야곱을 통해서 야곱의 하나님이 등장했다는 그 점이 야곱이 창세전부터 사랑받기로, 구원받기로 작정된 자입니다.
창세전부터 사랑받았다고 해서, ‘주께서 사랑 주셨으니 나는 그 사랑 소유한다.’ 사랑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고 반대가 돼야 돼요. 사랑이신 주님께서 나를 사용함으로 말미암아 내가 주님 앞에 사랑을 드러내는 도구로 쓰임을 당할 때 창세전부터 하나님이 예정하사 하나님의 뜻으로 이 땅에 없는 야곱을 만들었고 죽었던 야곱을 살려내는 작업을 하는 겁니다.
말씀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모든 인간은 구원받을 자격 없습니다. 복의 근원만 오직 구원됩니다. 복의 근원은 하늘에 계신 분인데 이 땅에 와서 예수님을 위하여 택한 사람 앞에 자기를 퐁당 담갔다가 올라가면서 그 예수 믿는 사람과 더불어 같이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면서 천국백성 만드는 작업을 하고, 주님께서 찾아오지 않는 사람은 그냥 저주받는 쪽으로, 원래 심판받아야 하기에 원래 지옥 가는 쪽으로 그냥 남겨주는 분류작업으로 하나님은 심판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게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오시는 겁니다.
성령이 임하는 사람만이 오직 예수님이 임하는 하나님의 성전이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 믿으면 우리 구원될 줄 알았습니다. 내가 믿는다는 시동을 걸어서 그 결과로 구원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쳐들어올 때 ‘주여, 왜 하찮은 저를 예수님 보여주는데, 예수님 증거 하는데 왜 사용하십니까?’ 그 고백이 비로소 야곱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이 하나님이었던 그 방식 그대로의 구원인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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