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강-창 27장22절-29절(축복의 내용)170927-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27장 22절-29절입니다. 구약성경 37페이지입니다. 창 27:22-29 “야곱이 그 아비 이삭에게 가까이 가니 이삭이 만지며 가로되 음성은 야곱의 음성이나 손은 에서의 손이로다 하며 그 손이 형 에서의 손과 같이 털이 있으므로 능히 분별치 못하고 축복하였더라 이삭이 가로되 네가 참 내 아들 에서냐 그가 대답하되 그러하니이다 이삭이 가로되 내게로 가져오라 내 아들의 사냥한 고기를 먹고 내 마음껏 네게 축복하리라 야곱이 그에게로 가져가매 그가 먹고 또 포도주를 가져가매 그가 마시고 그 아비 이삭이 그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가까이 와서 내게 입맞추라 그가 가까이 가서 그에게 입맞추니 아비가 그 옷의 향취를 맡고 그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내 아들의 향취는 여호와의 복 주신 밭의 향취로다 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로 네게 주시기를 원하노라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미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네게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네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
방금 코미디 한편 봤습니다. 이 본문이 코미디에요. 속이는 야곱을 자꾸 탓할 것이 아니라 속임을 당하는 마음가짐을 가진 이삭도 같이 탓해야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축복이란 것은 누가 누구에게 줄 수 없는 입장, 위치에 있어요. 그 근거가 창세기 12장 3절에 보면 나오는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복을 줘서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내리고 너를 축복하는 자는 복을 얻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이것은 누구하고의 문제냐 하면, 아브라함과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여기에 사람이 끼어들지 않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속여서 빼앗은 적도 없어요. 일방적입니다.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아브라함에게 그냥 복을 준 거예요.
아브라함은 오히려 더 기이하게 여겨야 됩니다. “제가 왜 복을 받아야 됩니까? 왜 제가 복의 근원이 되어야 됩니까?” 반문해야 될 위치에 있어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아버지 이삭과 아들 야곱은, 물론 그게 야곱인줄 모르고 에서인줄 알았지만, 야곱은 인간이 인간에게 주고 인간이 인간에게 받는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것은 코미디지요. 복을 사람에게 받을 수 있다? 그런 복은 없습니다. 인간에게는 복을 줄수 있는 권한도 자격도 못되고 인간에게 받은 복 이것은 무효입니다. 복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이런 코미디 같은 상황을 만드신 것은 이 세상 안에서, 이 세상에 갇혀서 움직이는 모든 실정들 형편들이 이런 코미디의 반복에 지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목사가 축도하면 복이 옵니까? 손가락을 제켜 버려야 돼요. 손가락에서 뭐 나와요? 로켓맨 입니까? 뭐가 나오게. 세상의 현실이라는 것은 그 현실 안에서 현실을 파악할 수 없게 되어 있어요. 바깥에 있는 어떤 원인이 있어요. 모든 근원, 원천은 현실 속에서는 찾을 수 없고 현실 바깥에 원천이 있습니다.
그 원천 때문에, 그 원천을 표현하고 드러내기 위해서 이 지상이라는 것은 후차적으로 만들어진 겁니다. 로마서 9장 13절에 이런 말씀 있거든요. “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에서는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했다는 것이 언제 결정되느냐 하면,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 이미 결정된 사항입니다.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했다. 태초에 정보가 있었던 거예요.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하지요. 태초에 정보가 있었고 그 정보를 펼치는 바탕역할 하라고 천지가 창조된 거예요.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고 되어 있지만 저는 오늘 본문과 연관해서 달리 이야기하겠습니다. 태초에 장자가 있었어요. 지금 야곱은 장자 되기를 원하거든요.
태초에 장자가 있었다는 이 한마디만 딱 가슴에 꽂혀버리면 이 세상에서 죽어도 상관없어요. 적어도 신앙생활 하려면 목숨과 바꿀 수 있는 것이 들어올 때 신앙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내가 안살아도 그만이에요. 강도 만나서 짱돌로 맞아 죽어도 별 일 아닌 정도 돼야 그게 신앙이지요.
서울 강남 지하철에서 미친 남자가 여자를 죽였습니다. 그래서 난리 났지요. 세상이 험하다. 세상이 악하다. 그리고 가습기살균제 때문에 35명인가 죽었다고 했지요. 또 세월호 사건 때 고등학생들이 많이 죽었잖아요. 그런 것들이 자꾸 방송에 자주 나오고 노란 리본 달고 그런 것이 뭐냐 하면, 이 사회의 어떤 병리적인 현상, 정신병이 지금 확산되고 있는 거예요.
어떤 사회에 대한 막연한 분노와 원망, 원한을 갖고 있어요. 이 사회가 이렇게 악해서 못살겠다, 세상 뒤집어져야겠다는 이런 원망을 한다는 자체가 본인에게 목숨하고 바꿀 것이 없다는 이야기에요. 개뿔도 이 세상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거예요. 태초에 뭐가 있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그냥 악마가 준 공포와 두려움 속에서 매일매일을 어쩔 줄을 모르는 거예요.
보험 들고, 펀드 들고, 통장 여러 개 만들고, 연금 제대로 나올 것인가 맨 날 알아보고. 이런 것 저런 것 다 치우고 제주도 놀러 가면 안 됩니까? 놀러가다가 비행기 바다에 주저앉아도 괜찮고. 뭔가 태초의 정보를 미리 알고 있으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해서 어떤 일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연연해하지 않습니다.
지금 야곱이 불안해요. 이삭도 불안해요. 둘 다 둘이 사바사바해서 장자가 결정되는 줄로 알고 있어요. 어렵게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야곱이 털 붙여서 형인 양 하고 음성 속이는 이것이 자기가 자기에게 아부하는 것이거든요. 인간은 근본적으로 자기가 자기에게 아부하고 충성하고 헌신하고 자기 돌봄, 인간은 자기를 돌보게 되어 있어요. 안 가르쳐도 인간은 자동적으로 자기를 돌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야곱이 이렇게 해서 대체 얻겠다는 것이 뭐냐 하는 겁니다. 이게 오늘 본문의 첫 번째 부딪히는 난제에요. 야곱이 지금 아버지를 속이고 있는데 여기에 mbc 마이크를 들이대면서 “실례합니다. 대체 뭘 얻고자 하는 겁니까? 뭘 얻고자 하기에 아버지를 속이면서까지 합니까? 기어이 쟁취하고자 하는 것이 뭡니까?”
야곱은 모릅니다. 제가 야곱에게 알려주지요. 그것은 바로 자아입니다. 자아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주체의 대상, 주체의 이미지에요. 방금 제가 자아를 주체와 그 이미지로 둘로 나눴습니다. 나눈 이유가 있어요. 주체는 인간이 죽어도 몰라요. 왜냐하면 인간은 자꾸 자아를 상상하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자아를 상상해서 평생 자기 상상된 자아를 가지고 이상화시켜서 그것을 모델 삼아서 가는데 주체라 하는 것은 자기가 상상한 자아 때문에 주체가 계속 가려져 있었던 겁니다. 로마서 9장 다시 말씀드리면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했다 할 때 그 야곱은 태초에 하나님이 정해준 주체에요. 하나님이 야곱이 모르는 주체를 이미 확정했는데 그 주체가 지상의 야곱에게는 자아의 형식으로 표출되는 겁니다.
자아는 특징이 있어요. 항상 상상해요. 상상하고 상상한 자아를 앞에 던져놓고 던져진 자아의 목표를 자기가 쫓아가면서 그 간격을 메꾸는 식으로 악착같이 자기에게 헌신하고 자기에게 아부하고 자기를 격려하고 자기를 칭찬하고 자축하고, 그런 식으로 움직이게 되어 있습니다. “목사님은 자아와 주체를 왜 구분시킵니까?”라고 한다면, 자아는 어디에 속하는가 하면, 이것은 악마에 속하는 것이거든요.
인간자체가 저주에 속하는 거예요. 이것은 야곱이 잘못이 아니고 아담의 잘못인데, 아담의 자손들은 전부 다 이 땅에서 악마의 죄 아래에 있어요. 제가 그냥 허투루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로마서 7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율법이 없을 때는 나는 살았으나 율법이 들고 날 때는 나는 죽었노라, 되어 있어요.
제가 대전강의 가서 식사 마치고 어떤 집사님이 나에게 고백을 해요. 지난 수요일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실컷 울었다는 겁니다. “눈 부릅뜨고 심장도 뛰고 건전한데 몸 건전한 채로 죽어본 적 있습니까?”라고 물은 적이 있어요. 보통 죽었다 할 때는 길길이 뛰고 피 토하고 죽는 것인데 멀쩡한데, 아무 탈 없는데 주님 보시기에 너 죽었어, 라고 했을 때에 내 자아가 아는 죽음과 주님께 감추어놓은, 따로 딱 꼬불쳐 놓은 주체에서 말하는 그 죽음과 이렇게 큰 차이가 나는 거예요.
우리는, 주님이 생각하는 그 나의 주체, 누구누구는 사랑하고 누구는 미워했다고 이미 결정나버린, 결정내린 그 주체에 대해서 우리는 까맣게 모르고 있는 거지요. 아무것도 몰라요. 그저 남들과 똑같아요. 자아가 살아야 되겠다. 자아는 주체의 그냥 대상일 뿐인데, 주체의 이미지일 뿐인데, 그 이미지라는 것이 허상이거든요.
그 허상이 실제인줄 알고 이것 죽으면 주체도 같이 날라 가버리는 줄 알고. 쉽게 말해서 나는 이미 창세전에 구원받았는데 이놈의 자아 구원시켜 줘야 내가 구원되는 줄로 알고 ……지금도 포항에서 무슨 짓 하는지 모르겠다마는, 이놈이 자아를 어떤 행동을 해가지고, 어떤 조작을 하게 되면 이 자아가 구원되는 자아 되면 그게 구원의 성공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얼마나 사기꾼들이 집요하게 달려들겠습니까? “구원시켜 주겠습니다. 시키는 대로만 하면.” 아버지도 야곱을 구원 못합니다. 인간과 인간끼리는 어느 누구도 구원 못해요. 사도바울도 누구도 구원 못해요. 사도바울이 본인은 십자가 진적 없다고 했어요. 어느 목사도 남 구원 못합니다. 세상 실정 알고 싶습니까? 실정 알려 드릴게요. 이 세상은 전부 다 이미지의 물결이에요. 이미지의 파도입니다.
이미지에 울고 이미지에 속고. 돈에 속고 돈에 운다고 하잖아요. 모든 것은 자아가 벌벌 떨어서 그래요. 지금 태초의 하나님은 팔짱끼고 있는데 “나 이미 결정내렸어.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기로.” 이미 결정 내렸는데 인간들은 그 사실을 알 턱이 있습니까? 그래서 불신자들은 인간 대 인간으로 만나요. 그리고 나중에 늙으면 흙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신자는 인간 혼자 살다 인간과 하나님이 만나요. 그리고 하나님을 만나고 난 뒤에 하나님이 자기를 대신해서 영생에 들어가게 되어 있어요. 인간과 인간이 있다가 성도는 인간이 하나님과 만나고 하나님하고 같이 있다가 하나님께서 나의 자아를 자꾸 지워버리니까 하나님 안에 내가 들어가고 하나님만이 우리를 건지는 겁니다.
그래서 어느 유명한 책이 있잖아요. <그리스도만 남을 때까지> 이걸 로마서 9장에 의하면 우리는 긍휼의 그릇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릇 자체는 의미가 없어요. 안에 뭐가 담기는가가 중요하지요. 로마서 8장 같으면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8) 누구든지 성령을 담는 그릇이 아니면 나는 사람 취급을 안 한다는 말입니다.
인간의 자아는 자기가 노력하고 속이든 말든 간에 쟁취해야 되지만 주님이 생각하는 주체는 그릇에 불과하고요 그 그릇에, 태초에 장자가 있었으니라, 그 맏아들이 거기에 담기면 그것이 하나님께서 유일하게 인정하는 천국 백성입니다. 다른 백성은 염두에 두지 마세요. 다른 백성은 없습니다. 로마서 8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맏아들 되게 했다고 했어요.
로마서 8장 29절에 보면,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지금 야곱이 구원 못 받았다는 말이 아니지요. 야곱은 이미 구원 받았지요. 야곱이 지금 착각을 해서 바보같이 굴어서 문제인데 방식이 달랐어요.
로마서 8장 30절에 보면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이 방식 외에는 다른 구원의 방식은 없습니다. 완전히 일방적으로 예수님이 우리에게 작업 거는 거예요. 우리는 피동성이고요. 주님이 우리의 주체가 되어서 계속 오시는 겁니다.
이렇게 하면 저보고 따집니다. “목사님, 그러면 우리가 할 것이 뭐 있습니까?” 우리할 것은 야곱이 잘 보여주네요. 뭐냐 하면, 바보짓만 하면 되지요. “나는 믿음의 아버지인데 뭐 하면 됩니까?” 믿음의 자식한테 바보짓 하면 돼요. 이삭처럼. 둘 다 바보짓을 하고 있는 거예요. 축복 주면 축복 받는 줄로 알고. 같은 인간 대 인간이기 때문에 그 방식 외에 다른 방식은 생각지도 못하는 겁니다.
자, 그 다음에 첫 번에 내가 던진 난제로 들어가 봅시다. 대체 야곱이 뭘 얻고자 했느냐 하는 거예요. 야곱이 뭘 쟁취하고자 했는가? 양 늘어나는 것? 양 몇 마리 늘어나는 그것 때문에 그렇게 거짓말 하고 속였는가? 아닙니다. 소 떼가 늘어나는 것? 아니에요. 여기서 야곱이 상당히 중요한 소식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그것은 뭐냐? 복이라는 것은 소유가 아니라 어떤 인물이 되는 거예요. 어떤 존재가 되는 것인데 그게 뭐냐 하면, 복을 받을 자격자가 되는 것이 지금 야곱이 쟁취하고자 하는 거예요. 야곱은 뭘 지금 우리에게 이야기하느냐 하면, 복은 특정, 지정된 인물에게만 복이 온다는 그 사실을 야곱이 알고 있어요.
제가 강조하는 그 취지를 잘 모르시는 것 같은데 보통 우리가 세상에서 복이라 하는 것은 어떤 재물이나 소유물, 그것을 획득하는 것이잖아요. 소유를 그렇게 생각하는데 야곱은 소유가 아니고 존재에요. <소유냐 존재냐> 하는 것은 에리히 프롬이 책 제목이기도 하지만 소유가 아니고 존재가 되는 거예요. 다시 말씀드립니다.
복이라 하는 것은 소 떼가 늘어나고 장사가 잘 되는 것이 아니고 복은 지정된 인물에만 완전히 독점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 하늘나라 정보를 야곱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주는 겁니다. 더 쉽게 말씀드려서 이렇습니다. 형제가 달랑 둘 밖에 없잖아요. 그러면 우리같으면 친하게 지내면 돼요. 형 50먹고 나 50먹자. 그러면 사이좋고 아무 문제도 없어요.
야곱은 뭘 아느냐 하면, 복은 그렇게 해서 분배하거나 나눠줄 성질이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단도직입적으로 해서 복은 소유가 아니고 어떤 분이에요. 야곱은 이걸 이야기한다니까요. 예수 그리스도가 복이지 예수 그리스도가 주신 것이 복이 아니에요. 예수님의 영생이 복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 자체가 복이 돼요. 그 차이점을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지금 야곱이 존재가 복이라는 것, 어떤 분이 복이라는 것을 알았는데 문제는 그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와 자기 존재를 양보 없이 같이 섞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오류가 된 겁니다. 주님이 등장하게 되면 내 존재는 포기를 해줘야 되는데 그게 아니고 내 존재 안에 영생주시는, 복의 근원되시는 주님이 함께 있었으면 좋겠다, 이걸 야곱이 얻었던 겁니다.
야곱이 그걸 어디서 얻었느냐하면 하늘에게 계시를 받은 것이 아니고 창세기 12장에서 아브라함에게 이미 들었던 거예요. 너는 복의 근원이 된다고 할 때 복이라 하는 것은 야곱에게만 주는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에게도 준다고 했을 것 같으면 사이좋게 나누면 되는데 ‘너는’ 이렇게 딱 ‘너’라고 지적했다는 말이지요.
하늘의 복이 너에게, 라고 지적했고 아브라함은 그 복이 멜기세덱이라는 정해진 사람, 루트를 통해서만 주어진다는 사실을 알 때 이것은 소유 문제가 아니고 근원적으로 내가 어떤 인간이 되느냐의 문제에 대해서 나는 자아가 있는 이상은 형에게 양보할 생각이 추호도 없는 거예요. 아버지의 상속분을 형과 사이좋게 나누는 것이 문제가 아니에요. 나는 너와 달라야 돼, 라는 이것이 하나님께서 내려주신 복의 특성이라는 겁니다. 이것은 곧 무엇을 의미하느냐? 내가 천국 간다는 말은 다른 말로 남은 지옥 가야 된다는 그것을 강조하는 이야기에요. 이것은 인간적으로 서로 친하게 지내자는 것과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가졌다면 저쪽은 없는 거예요. 야곱의 잘못은 있음에서 축복이 온다는 그것이 잘못이에요. 복은 없는데서 오는데 아버지가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 거예요. 아버지는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나에게 속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아버지는 개판이라는 뜻이에요. 아버지는 나에게 복을 줄 자격이 없다는 뜻입니다.
상당히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왜? 속여서라도 나에게 넘겨줄 축복이라면 이것은 아버지에게서 온 것이 아니고 다른 곳에서 온 거지요. 하늘에서 온 거예요. 속아 넘어가는 바보등신 같은 아버지가 나에게 속기 전부터 갖고 있는 것이 아니에요. 이삭은 야곱을 통해서 아버지인 이삭이 변합니다. ‘아, 내가 뭔가 착각했구나.’
이삭과 야곱사기에 거짓말이 존재한다는 것, 거짓말이 게재되어서 복이 전달되었다는 이 말은 인간들이 사전에 미리 알았던 그 복은 전혀 상관없이 야곱에게 주어졌다면 이것은 복을 원했던 야곱의 위기입니다. 야곱의 존재의 위기입니다. 자기가 존재가 되겠다는 이 야곱 그 존재가 거짓말을 통해서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진짜가 오게 되면 이것은 폐기처분해야 될 가짜 야곱의 존재가 되는 겁니다.
이것이 아까 이야기한, 자아는 폐기되고 그 자아가 폐기된 사이에서 원래 창세전에 야곱은 사랑했고, 라는 그 야곱이 그 현장에 나타나는데 그 때는 야곱이 아니고 이름이 이스라엘로 됩니다. 하나님의 이름이에요. 예수 그리스도 이름이 이스라엘입니다. 자 이렇게 되면 야곱은 쓸데없는 짓을 했지 아닌가 하는데 오늘 설교의 핵심은 이제 남아 있습니다.
야곱이, 자아가 복이 있으니까 그 복의 근원이 되고 아브라함처럼 나도 내가 복의 기준이 되고 싶은 거예요. 인간의 극한의 욕구는 그거예요. 내가 세상의 기준이 되고 내가 B1폭격기가 되는 것, 내가 중심이 되는 거예요. 내가 싫어하면 싫어하는 것이고 내가 좋아하면 좋아야 되는, 모든 세상 조화가, 세상 모든 움직임이 내 말 빨에 그대로 되는 최고의 자리, 악마가 원했던 자리, 악마가 놓였던 그 자리를 우리는 악마의 종으로서 뒤따라가서 그 자리를 근원적으로 노립니다. 그것을 자아실현의 욕구라 합니다. 야곱이 그것을 그대로 보여주면서 그것을 쟁취하려고 한 거예요.
자기는 거짓말을 해서라도 그 자리를 쟁취했다고 생각했는데 야곱이 받은 그 복의 내용은 29절에 보면,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여기서 ‘형제의 주’가 아닙니다. 형이 너에게 굴복하는 것이 아니고 형제들의 주가 돼요. ‘형제들’ 야곱은 형제들이 없습니다. 따라서 이 절은 야곱에 해당되지 않아요.
야곱의 자아에게 해당되지 않고 야곱의 주체에 해당되는데 야곱의 주체는 언제 아는가? 야곱의 자식가운데 요셉이 죽었을 때, 요셉이 죽어서 야곱과 야곱 형제에게 넘겨준 것이 있어요. 제가 중요한 것을 말을 빨리 했는데 이렇게 됩니다. 요셉이 야곱이 받은 축복의 실현태, 축복을 실현, 구현하는 인물로서 야곱 본인이 아니고 야곱에서 나온 요셉이 오늘 받았던 축복의 실현자로 등장하는데 그 실현하는 자는 반드시 축복을 기대하는 자로 인하여 살해당해야 돼요. 죽어야 됩니다. 꼭 예수님처럼. 바보 등신 같은 인간들 때문에 죽어야 된다고요.
야곱에 있어서 요셉은 죽은 존재에요. 짐승의 피를 발랐던지 어쨌든 간에 그는 이미 죽은 존재에요. 그런데 죽었던 그 요셉이 살아서 형제들의 주가 돼요. 꿈처럼 그대로. 열 두 별이 전부 자기에게 절을 하고 열 두 짚단이 자기에게 절을 하는 요셉이 꾼 그 꿈은 야곱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야곱의 자식들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는 요셉에 의해서 성취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요셉은 이렇게 하지요. 내가 된 것이 아니고 아버지에게 주어진 언약 때문에 그렇다고 하지요. 그렇다면 야곱이 아니고 야곱의 언약이 장자가 되는 겁니다. 야곱은 야곱의 언약 앞에서 자기의 자아를 굴복하고 야곱의 언약 속에서 창세전에 주께서 마련한 주체를 야곱의 언약가운데서 발견해야 되는데 그 언약의 완성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따라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전부 다 미리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는 사람들이에요. 그것을 야곱은 나중에 알게 되지만 이렇게 거짓말을 해서라도 아버지를 속이고 하는 이것은 뭐냐? 반드시 이런 과정을 겪어야 돼요. 이 과정을 겪는다는 말을 쉽게 하기 위해서 열왕기상 18장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열왕기상 18장에 보면, 거기에 엘리야하고 제단을 쌓아놓고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과 850대 1로 붙는 장면이 나와요. 조건은 하나밖에 없어요. 성냥불 주지 않고 무조건 제물에 불이 붙으면 이기는 것으로 합니다.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은 단합해서 주여 삼창을 부르면서 주여, 주여, 하고 기도를 벌이지요. 왜? 본인들이 뜨거우니까 본인들 뜨거우면 제물이 같이 뜨거워져서 구원될 수 있다고 생각한 거예요.
주여, 주여, 했는데 종일해도 안 되니까 그 뜨거움으로도 모자라서 칼로 자기 몸을 상처내가면서 기도합니다. 그렇게 기도하면 뜨거워져요. 그 뜨거움은 저희들 뜨거움이지 제물은 끄떡도 없어요. 그렇게 바알선지자들 볼일 끝났고 그 다음에 엘리야는 아무것도 한 것도 없어요. 단 한 가지 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뭐냐 하면, 불이 일어나야 될 그 제물에다 물을 붓는 겁니다.
이것은 뭘 의미하느냐 하면, 신앙에 초쳐라 그 말입니다. 구원이나 은혜 받을 수 있는 어떤 여지나 소지, 그것을 완전히 박살내버려라, 그것이 신앙이 되는 거예요. 내가 은혜 받을 수 있는 자그마한 여지라도 찢어버리는 겁니다. 왜? 자아가 은근히 노리는 가짜 천국이기 때문에, 가짜 구원이기 때문에. 내 행함과 관련되어 있는 것, 그 모든 것을 찢어버리는 거예요.
구원받는데 필요하다고 약간의 짐작이라도 가는 모든 것은 초를 쳐버리는 거예요. 반대로 가요 반대로. 은혜 받기의 반대로 해버리는 것이 이게 신앙이에요. 이게 거짓말이에요. 하나님은 야곱을 유인했고 야곱은 장자에 매료되어서 거기에 말려들었고 그런데 그 결과가 전부 다 엉터리라는 말이지요. 그것은 주체의 구원이 아니고 자아의 구원이거든요.
이미 자아에서 시작한 자기 자신에게. 신앙생활이라 하는 것은 손톱만큼도 내가 은혜 받을 짓을 안 하는 거예요. 왜? 이렇게 하니 또 겁나요? 제가 처음에 이야기했지요. 죽어도 괜찮은 것이 없으면 그것은 애초부터 신앙 시작하지도 않았어요. 그까짓 거 그거 내가 하는 그게 뭐라고! 내가 하는 기도, 내가 하는 전도, 헌신, 충성, 순종, 이게 뭐라고 이게!
이게 다 방해물인데요. 이게 바알과 아세라인데요. 교회 모일 때마다 바알과 아세라집회를 벌이는 겁니다. 한국교회가. 그것도 인간 대 인간으로 서로 바라보면서 했기 때문에, 자아가 다 했기 때문에 그것이 옳은 줄로 알고 이 거짓말이, 온 천지에 이 거짓말 구원이 유포되었습니다. 은혜 받을 짓을 해야 은혜 받지, 하는 그러한 사탄의 이야기가 유포되었어요.
본인이 불안하다면 더욱더 불안할 수 있는 짓을 하세요. 왜냐하면 불안해서 구원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거든요. 불안하다는 말은 아직도 내 속에 목숨 그까짓 거 없어도 괜찮아, 하는 것이 없다는 반증이거든요. 그러니까 열심히 기도하고 열심히 신앙생활 해도 오히려 점점 더 위선자가 될 뿐이에요. 아무것도 있지도 않은데 제물에 불도 안 붙었는데 불붙었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자아가 자기에게 스스로 조작하고 있는 겁니다.
그 마귀짓을 이제는 그만둘 때 안 되었어요? 왜 엘리야를 못 본받습니까? 엘리야는 물 열 두 통 부었는데. 왜 우리 자신에게 성령의 불을……, 물 확 들이부어서 성령의 불 꺼버리세요. 성령을 언급하고 십자가를 언급해도 그저 무서워서 ‘이 자아가 살아야 될 텐데. 이 자아가 죽으면 좋은데 가야 할 텐데.’ 벌벌벌벌, 떨고 있어요. 군대귀신이 들어가서 벌벌벌, 떨어요. 무슨 오한이 들었는지.
‘내가 행동 바르게 했는지, 바르게 했으면 이번 주에 거래 건이 있는데 바이어와 잘 되겠는지.’ 모든 일을 하기 전에 벌써 떨기부터 시작해요. 벌써 치매가 왔는지 치매 오기 전에 중풍부터 먼저 와요. 젊은이든 늙은이든 전부 다 벌벌 떨어요. 그러니까 세월호 노란 리본 달고, 나라꼴이 엉망이니 어쩌니 하면서 세상에 대해서 정서적으로 반대를 하고.
지옥이 불구덩이 속으로, 사도바울처럼 저주받아 지옥에 간다 할지라도 까딱도 없는 자신감으로 자신에게 불이 있어야 할 자리에 물을 열 두통이나 퍼부어버리는 그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그게 야곱을 통해서, 야, 결국 우리는 그런 신앙 아니면 하나님을 속이고 나를 속이고 나에게 아부하고 헌신하고. 분명히 사도바울은 사람에게 좋게 하면 종이 아니라고 했는데 나는 나를 너무 좋게 해. 그러니 이것은 나부터도 내가 나의 목자가 아니고 종도 결국은 아닌 거예요. 전부 다 사기짓이고 사기집단이지요.
차라리 그럴 것 같으면 물을 부어버리자는 말이지요. 이래도 구원된다? 이래도 구원된다는 것이 어디 나오느냐 하면, 로마서 4장 5절에 나옵니다. 크게 읽어드릴게요. 안 그대로 소리가 크지만.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아니할찌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이게 바로 야곱의 할아버지에게 준 하나님의 약속이었던 겁니다. 일을 아니할찌라도, 경건치 아니할찌라도 의롭게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악마가 우리를 가지고 “너 포기하지 마.” 라고 자꾸 악마가 이 기쁜 소식을 가리기 위해서 지금도 겁을 주고 있는 겁니다. 벌벌 떨면서 오한 들게 만들었어요.
일 끝나고 난 뒤에 잘했나, 못했나, 반드시 정산하고 결산하게 만들고. 자기 인생에 대해서 후회하게 만들고, 지나온 과거에 대해서 ‘그렇게 안했으면 그렇게 안 되었을 것을.’ 맨날 자기 탓하고 타박하고. 제가 대전강의에서 그런 이야기 했거든요. 욥이 하나님께 따진다고요. “주님, 제가 어쨌다고 이렇게 고난을 줍니까?” 할 때 주님의 말씀은 “내가 너에게 어쨌는데?”
욥이 할 말이 없어서 다소곳해 졌어요. “내가 너에게 어쨌냐고! 별 만들어 줘. 황무지에 비 내려 줘. 내가 너에게 어쨌는데 나에게 달려드느냐”는 말이지요. 욥도 마찬가지로 자아를 쥐고 있었던 겁니다. 욥은 이미 주체가 구원받았는데 아담의 자손이 되다 보니 악마에게 속아서 주체는 모르고 악마의 자아에게 놀림당한 거예요.
정답은 이렇습니다. 자아와 주체가 서로 포개져 있고 중첩되어 있어요. 주께서는 이 자아로 하여금 믿지 말라고, 자아가 믿는 믿음 소망 사랑 믿지 말라고 걷어내는 작업을 하고, 악마는 못 걷어내도록 자아를 계속 붙들고 주님은 악마보다 더 센 힘으로 자아를 걷어내서 우리로 하여금 “거짓말쟁이 너 구원받아. 세리 너 구원받아. 창녀 너 구원받아. 도둑놈 너 구원받아. 더러운 너 인간 구원받아.” 이렇게 기쁜 소식을 전해줍니다.
삭개오가 얼마나 좋았던지. “너에게 오늘 구원이 이르렀다.” 할 때에 거기에 무슨 조건을 답니까? 내가 이렇게 했기에 구원받았다는 것이 삭개오 입장에서 전혀 없어요. 돈만 좋아했으니까. 그런데 구원이 왔을 때 “제가 네 배나 갚겠나이다.” 갚아서 구원받는 것 아니에요. 그냥 “목숨보다 더 중요한 것, 주여 이것 아낌없이 증거 하겠나이다.” 키 작아도 구원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성경 하나하나가 오늘날 우리 현실을 이야기하고 실정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참으로 악마에게 속았습니다. 우리 자신에게도 속았고 남들에게도 속았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통해서 들통 나게 해주신 것을 늘 매일같이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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