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윤진

[스크랩] 박윤진님의 노고(답변이 듣고 프네요)

아빠와 함께 2017. 9. 2. 10:20
 

(답변이 듣고 프네요) 글에 달린 박윤진님의 댓글을 그대로 살려서 재구성한 글입니다. 세심한 사랑에 감사를 드립니다. 공부 많이 했습니다. 제목은 제가 임의로 붙였습니다

 

<성경의 토대는 십자가뿐입니다>

 

성경을 토대로 해서 종교라는 것이 형성된다면 그것이 유태교든, 천주교든, 개신교든 마땅히 사람을 구원하는 도가 바로 이것이라는 핵심, 즉 내가 믿는 신의 존재에 대한 개념정리가 무엇보다 성경을 근거로 해서 분명하게 잡혀 있어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본다. 그런데 유태교도, 신교도 이점이 분명치 않기에 양쪽 다 유령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면 누군가가 나서서 진짜 구세주의 존재에 대해서 그것도 성경을 통해서 제대로 알려줌이 마땅한 사명처럼 보이기 마련이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 발상에서 성경을 연구하고 그래서 종교적 틀인 교리의 완성을 보더라도 그것이 인간이성의 한계를 벗어날 수 있을까?


즉, 1. 기독교는 종교이다.

     2. 그러므로 기독교라는 종교는 기존 종교학이나 신학에서 이야기 하고 있는 논리적 틀을 완비하고 있어야 한다.

     3. 논리적 틀의 완비를 판단하는 기준은 이성이다.

     4. 성경은 이러한 이성의 객체로서, 종교가 요구하는 신론, 인간론, 마귀론, 죄론, 구원론, 종말론 등의 체계 구성에 타당한 자료를 제공해야 한다.


라는 전제를 가지고 “성경은 모든 인간을 불순종에 가두어 두었다”는 성경의 금지를 뚫고 나갈수 있을까? (롬 11:32,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사정이 이러하다면 사람이면 당연 가지게 되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탐구력을 가상히 여길것이 아니고, 계속해서 하나님의 존재의 상(그게 예수이건 뭐건간에)이나 정리하려 드는 신성에 대한 탐구가 왜 진짜 메시아를 죽일수 수밖에 없는지가 도리어 궁금해져야 하지 않을까? 불순종할 수 밖에 없는 이성을 도구삼아 아무리 성경을 해부하고 논리적으로 분석해 봐도 왜 불순종이라는 죄만 나올 뿐인지를 파고 또 파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성경을 공부하는 자는 "내가 바로 예수 잡아죽인 장본인 맞구나!" 만을 토해내면서 즉, 왜 십자가 사건이 발생할 수 밖에 없는가를 실감하면서 죄를 알고 죄의 종으로 존재할 수 밖에 없는 죄인의 괴수인 나를 알게 되는 과정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히브리서 4장 12절 :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불순종할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이성으로 종교학이라는 또다른 이성이 정립해 놓은 논리의 틀을 완비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 아니라, 말씀이 운동력 있어 나의 온 몸을 갈갈이 찢으시면서까지 말씀하고 싶으신 것이 무엇인지 경청해야 할 것이다. 성령께서 소리치고 계신 증언은 십자가 지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대제사장이 우리를 매일같이 자신의 죽음에 포함시키시면서 산 제사를 드리고 계시다는 것이다.(히 4:14-16)


왜 글쓴이는 온 성경이 다 예수를 증거하고 있다는 예수님의 해석따위는 거들떠 보지도 않고 구약의 모세율법이 구약인들의, 유태교인들의 구원의 방법이었다고 확정짓는 것일까?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한 책이다. 그러므로 모든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해석의 기준이 엄연히 살아있는 계시이다. 즉 성경은 예수님만 해석할수 있는 책이다.


<요한복음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글쓴이는 “인간을 구원할 수 없는 종교는 종교가 아니며, 진리가 아니어서 우리에게 무용한 쓰레기와 같다”고 보기 때문이다. 즉 그에 따르면 사람을 구원시킬수 없는 신은 신이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글쓴이는 모세율법을 읽던지, 사복음서를 읽던지, 서신서를 읽던지 오로지 ‘어떻게 내가 구원받을 수 있나?’에 대한 답을 구하기에 급하다.


정신상태가 그러하니 글쓴이는 어떤 철학자의 말을 인용하면서 “기독교의 사멸이 구원의 교리를 학문적으로 입증가능하냐”라는 것에 따라 좌우된다고 한다. 학문적으로 넉넉하게 입증될수 있는 구원의 체계를 잡지 못한 나머지 기독교는 신비주의가 되고 무속종교가 되어 버렸다는 지적이다. 그런데 철학자라는 죄인이 죄인들이 집대성한 체계인 신학을 공부해서 구원될 수 있을까? 아니면 구원될 길인지 아닌지는 판명해 낼수 있을까? 글쓴이의 그같은 주장이 예수님의 다음과 같은 말씀에 어울릴수 있는 것일까?

 

<요한복음 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학문적 논리의 견지에서는 사실입니다’라는 말이 십자가위에서 우리의 죄 때문에 피 흘리고 계신 예수님 앞에서도 과연 통할까? 학문적 논리라는 것이 사도 바울이 말한 ‘세상의 헛된 철학과 속임수’와 같은 말이라면, 우리는 우리 눈 앞에 밝히 보이는 십자가만 증거해야 하는 것이지 배설물에 집중해서는 안 될것이다.


글쓴이가 제시하는 기독교신학의 세가지 구멍(헛점)이라는 것에 대해서 그리고 그에 대한 답변들에 대해서 과연 예수님이나 성령받은 사도바울이 동의해 줄수 있는 것들인가? 즉 왜 복음서에는 예수님의 행적이나 말들이 서로 불일치 하는지에 대한 궁금증(소위 공관복음문제)을 학문적으로 규명해 내는 일, 유태교의 제사장제도를 예수님이 이어받았다는 논증구조를 성경에서 학문적으로 규명해 내면 바로 그것이 정확한 구원의 교리를 형성해서 제대로 된 구원의 길을 제시할수 있다는 열심과 사명감을 주님께서 환영하실까?


글쓴이는 십자가가 모든 율법, 모든 성경의 완성이라는 새언약에 대한 이해와 그 새언약아래서 모든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니 구약과 신약의 중간에 서서 양쪽을 잡아 당겨 이어보려는 시도를 무리하게 하고 있다. 즉 성경전체가 예수님의 십자가완성을 바탕에 깔고 있음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새언약 아래서 즉 예수님의 제사장직분의 완성아래서 구약제사장제도란 무슨 뜻이 될까? 하나님께서 레위지파에게 제사장을 맡기신 이유는 레위지파가 제사장이라는 직분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존재인 것을 드러냄으로써 그 어떤 인간도 하나님의 제사장, 즉 멜기세덱의 반차에 끼어들어 올 수 없음을 확인하기 위함이다. 즉, 멜기세덱의 반차를 이을 유일한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가 레위지파가 아닌 유다지파에서 나온 이유는 이런 맥락에서이다. 하나님의 언약은 인간의 예상과 기득권을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피하시는 방식으로 작용하시는데(편집자 주 - 여기에 별표 다섯개)  제사장의 역할 또한 예외가 될 수 없다. 구약의 제사장은 제물과 분리되어 제물을 하나님께 바치는 역할을 하는 것 같이 보여지지만, 실상 제사장은 그 제물과 동일하게 취급받게 되어 있다. 즉, 구약의 제사장과 제물을 중심으로 한 제사법은 온전한 십자가 제사를 드릴 수 있는 유일한 제물이자 제사장인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다(이것이 참으로 중요한 소리/히브리서). 실체가 오면 그림자의 역할은 끝이 난다. 예수님이 다 이루신 말씀을 직접 행사한다. 심판주가 직접 심판주가 되사.


왜 사람들은 이점을 인정치 않은채 계속해서 신학이라는 보암직하고 먹음직하며 지혜롭게 할만한 탐스런 작업을 멈추지 못할까? ‘인간에게 살해당하는 신’이라는 십자가의 내막이 인간의 머리속에서는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맘대로만, 예수님의 성령세례로만 주어지는 십자가의 지혜, (곧 십자가를 증거하는 살아 있는 말씀)에 의해서 내가 통째로 삼키워지기 전에는.


마태복음 16장 24절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이 글에서 자기를 부인하는 모습은 전혀 찾아 볼 수 없다다. 펄펄 살아서 십자가 지신 예수까지 이성의 장난감(신학의 대상)으로 삼으려는 끊임없는 자기긍정만 나타난다.


성령받은 사도바울은 자기 자신을 죄인의 괴수로 인정했습니다. 글쓴이는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지? 최소한 죄인의 괴수는 아닐 것 같다.


출처 : 화평교회
글쓴이 : 오용익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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