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에게 율법을 적용할 수 있는가?>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에게 율법을 주셨다. 유대인들에게는 직접 주셨고 이방인들에게는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는 방식으로 주셨다(롬 2:14).
왜 율법을 주셨을까? 율법은 인간이 죄를 깨닫게 할 목적으로 주어진 것이다(롬 3:19).
즉, 율법은 거룩하며 의롭고 선한 것으로 생명에 이르게 한다(롬7:10, 12).
그러나 당혹스러운 것은 인간이 이렇게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율법을 지키는 행위로는 의롭다는 평가를 예초부터 받을 수 없다는 점이며(롬 3:19),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이 율법을 지켜내고 싶어 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죄는 인간으로 하여금 신의 자질과 능력을 구비할 수 있다고 속이는데(창 3:5, 롬 7:11), 신이 주신 율법을 온전히 행하는 것만큼 그러한 욕망을 채우는 확실한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죄가 인간의 주인임을 확실히 통보하는 차원에서 율법을 주었건만, 오히려 인간은 죄에게 속아 자신이 율법을 지켜냄으로써 의롭다는 평가를 하나님께 강요하겠다고 나서는 것이다. 죄의 권능이 바로 율법이 된 셈이다(고전 15:56).
그렇다면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한단 말인가? 율법이라는 선한 것이 인간에게 사망이 될 수 있는가? 사도바울은 이 질문에 “그럴 수 없다!”고 단언한다.(롬 7:13) 내가 죽은 자로 발견되는 것은 죄로 심히 죄 되게 하기 위함이다. 즉, 율법은 죄 아래 있는 인간을 상대로 하는 것이 아니다. 율법은 죄라는 인간의 주인을 공격하고 있다. 인간은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려온 죄의 종에 불과하다(롬 7:14).
율법은 신령한 것이다(롬 7:14). 그러므로 영적인 주체에 의해서 지켜질 수밖에 없다. 육신에 속한 인간으로서의 솔직한 고백은 “나는 지금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조차 알지 못한다(롬 7:15).”라는 것이다. 인간이 스스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 행위의 진정한 주체는 인간 속에 있는 죄이다.(롬 7:17, 20)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보여도 하나님을 알 수 없고(롬 1:19-20), 설령 하나님을 알게 된다하여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거나 하나님께 감사를 돌릴 수 없는 것이다.(롬 1:21)
하나님께서는 죄에 속고 있는 인간을 내어 버려두신다. 죄에 속고 있는 상태가 바로 마음의 정욕(롬 1:24), 부끄러운 욕심(롬 1:26), 상실한 마음(롬 1:28)이다. 내어버려두심을 보다 적극적으로 표현하면 “불순종에 가두어 두심”(롬 11:32)이 된다. 죄에 팔려 있는 상태를 견고히 하신다. 어느 인간도 하나님의 가두어 두심을 돌파할 수 없다.
과연 누가 눈치나 챌 수 있는가! 이렇게 확고하게 죄인으로 가두어 두심이 긍휼을 베풀려 하시는 하나님의 지혜라는 것을!(롬 11: 32-33)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상대하지 않는다. ‘아담’은 사망의 왕 노릇에 굴복할 수밖에 없도록(롬 5:14) 하나님으로부터 내어버려진 자의 이름이다. 하나님의 지혜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신다.(롬 5:21) 그 예수 그리스도가 영생이다. 사망의 왕 노릇에 철저히 갇혀있는 아담은 바로 영생이라는 은혜의 왕 노릇을 보여 주기 위해 오실 자 즉, 예수 그리스도의 표상인 것이다.(롬 5:14)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고후 4:4, 골 1:15)이다. 하나님의 형상이란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 목적으로 자신을 나타내시는 방식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육신의 모습으로 자신을 나타내셨다. 다른 인간과 전혀 다른 육신인가? 물리적인 측면에서는 아주 동일하다. 그러나 피가 전혀 다르다. 혈통이 다르다. 다윗의 혈통이다(롬 1:3). 아브라함 그리고 다윗과 맺으신 언약의 말씀이 육신이 되신 것이다(요 1:14). 이제 세계는 아브라함과 다윗 언약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이다(마 1:1).
그런데 문제는 육신이라는 영역은 이미 죄가 왕 노릇하고 있는 곳이라는 점이다. 이 곳에 예수 그리스도라는 육신이 등장함으로써 왕이 둘이 되어버렸다. 과연 누가 진짜 왕이냐를 놓고 전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이 전쟁의 결과는 이미 하나님께서 통보하신 바 있다(창 3:15). 세상의 왕이 쫓겨나게 될 것이고(요 12:31), 예수께서 세상을 이기셨다(요 16:33).
죄가 행위의 주체인 육신의 영역에서 성령에게 종속된 예수 그리스도가 승리하는 방식이 바로 뒷꿈치를 물리는 것이다, 얻어맞는 것이다, 섬기는 것이다, 사랑하는 것이다,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함께 있음이 죄의 세상에서 어떠한 모습으로 등장하게 되는가를 보여주기 위해 오셨다. 이러한 목적을 분명하는 것이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이다.
하나님과 함께 있음, 즉 생수의 강에 푹 빠져있기 때문에 육신의 생명은 언제든지 버릴 수도 있고 다시 찾을 수도 있다(요 10:18). 육신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이 두려움의 대상이다(눅 12:4-5). 죽기를 두려워하여 일생을 죄의 종으로 살고 있는 인간에게(히 2:15) 자신의 육신을 참 양식과 참 음료로 먹일 수 있다(요 6:55).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할 수 없다. 참 안식의 상태에 놓여 있는 진정한 자유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육신인 채로 성령에 삼킨바 되어 참 자유를 누렸다. 영의 자유이다. 영의 자유는 죄가 쏘아대는 죽음까지 생명으로 품는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지심으로 말미암아 율법은 그 본의가 확실해졌다. 율법의 완성이요, 마침이다(롬 10:4).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아들 죽이기에 휩쓸리게 된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음이 증명된다.
인간이 죄의 노예, 즉 하나님의 원수라는 사실이 자명해 지는 것이다. 율법의 완성자에 의해 하나님의 원수에게 이미 와 있는 사망의 현실을 변명치 못한다. 인간이 원래 죄의 종으로 하나님에게는 죽은 자, 흙에 불과한 존재였으며, 육신의 생명은 생명도 아니었고, 땅과 하늘 등 모든 피조물의 존재 목적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하나님의 비밀을 드러내기 위한 배경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간다(롬 11:36).
부활과 재림은 율법의 완성자로서 행하신 십자가 사건을 확인하는 차원에서 이해된다.
“죄의 종으로 살 수 밖에 없는 내가 못 박아 성문밖에 버린 예수가 바로 참 생명이신 하나님이었다!”(롬 14:11)
“저기 구름타고 오시고 계신 그 분을 내가 찔렀다(계 1:7)!”
라는 고백이 터져나오게 하는 부활과 재림이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율법이 무용지물인가?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A)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라는(롬 8:1)말씀은 A가 율법의 완성자 되었다는 말인가? 성화되었다는 말인가? 아니면 마음대로 살아도 아무 문제없다는 뜻인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육신이 죽었다는 말이다. 율법은 사람의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것이다(롬 7:1) 율법은 죽은 자에게 해당사항이 없다. 인간은 예수 밖에 있을 때도 죽은 자이고, 예수 안에 있을 때도 죽은 자이다. 다만, 예수 밖에 있을 때에는 죽은 자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죄가 속이는 대로 율법을 착각한 것이고, 예수 안에 있을 때에는 죽은 채로 율법의 완성자의 은혜를 덧입고 있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A에게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자로 여기라고 한다.(롬 6:11)
그러나 문제는 A가 현실적으로 느끼고 있는 육신이 살아있다는 현상들이다. 배고프고, 말하고, 자존심이 상하거나 기분이 좋아지거나 등등 말이다. 즉 여전히 하나님에 대해서는 죽고 죄에 대해서는 살아있는 것이다.
이 때 그러한 현상이 살아있다는 증거가 될 수 없다고 증언하는 육신이 필요하다. 이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사단은 예수님이 성령에 의존하는지 아니면 자신의 육신에 의지하는지를 시험했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시기 위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의 죄를 없애시려고 그 육신에다 죄의 선고를 내리셨다. 십자가 대속으로 말미암아 육신을 좇지 않고 성령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신다(롬 8:3-4). 성도가 예수 안에서 죽은 채로 율법의 완성자의 은혜를 덧입고 있다는 것이 바로 이런 의미이다.
성도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의 적용대상이 되었다는 것은 동시에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었다는 의미이다(롬 8:2).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었다는 말은 율법의 완성자의 은혜를 덧입고 있다는 것이다. 즉, 율법의 요구를 이루신 십자가 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덧입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태를 정죄함이 없다고 한다(롬 8:1).
예수 안에서만 정죄함이 없다는 말은 예수 밖에는 정죄함 뿐이라는 의미로서, 십자가의 공로가 아니라면 나는 도저히 구원받을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까지 한꺼번에 쏟아져 내리게 된다. 그러니까 A가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었다는 의미는 죄와 사망의 법의 적용을 받지 않게 되었다는 말이 아니라, 그 적용 위에 생명의 성령의 법까지 적용받고 있다는 의미이다. 이렇듯 생명의 성령의 법은 죄와 사망의 법이 적용되었다는 것을 전제로 해서만 비로소 의미가 있는 것이다.
보다 뜻을 분명히 하는 차원에서 다시 반복하면, 내가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정죄함이 없다는 의미는 나는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가 아니라면 죄인중의 괴수임이 분명하다는 것까지 포함되어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율법은 예수 안에 있는 A에게 여전히 유효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었다는 의미를 율법이 더 이상 적용되지 않는 듯이 해석하려는 욕구는 십자가를 빨리 던져버리고 싶어서이다. 이제 신의 성품에 참예(벧후 1:4)하게 되었다는 것을 자신이 직접 신이 되었다고 챙기고 싶은 것이다.
죄와 상관없는 십자가란 없다. 죄가 없는데 무엇을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를 져야 하는가?
여전히 우리는 십자가 속에서 죽어야 할 대상이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신의 성품에 참예하게 되었는가? 그 몸을 열어 제치신 사랑에 감사하라! 우리는 모두 죄인 중의 죄인뿐이다.
(십자가마을 칼럼란에서)
(아주 의미심장한 문장)
예수 안에서만 정죄함이 없다는 말은 예수 밖에는 정죄함 뿐이라는 의미로서, 십자가의 공로가 아니라면 나는 도저히 구원받을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까지 한꺼번에 쏟아져 내리게 된다. 그러니까 A가
보다 뜻을 분명히 하는 차원에서 다시 반복하면, 내가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정죄함이 없다는 의미는 나는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가 아니라면 죄인중의 괴수임이 분명하다는 것까지 포함되어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율법은 예수 안에 있는 A에게 여전히 유효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었다는 의미를 율법이 더 이상 적용되지 않는 듯이 해석하려는 욕구는 십자가를 빨리 던져버리고 싶어서이다. 이제 신의 성품에 참예(벧후 1:4)하게 되었다는 것을 자신이 직접 신이 되었다고 챙기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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