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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보기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11하나교회/하나교회110106a.avi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11하나교회/하나교회110106b.avi *강의 녹취(이한례 집사님) 하나교회110106요한계시록-8강a-(이 근호 목사) 제 8강a 시간이 되었으므로 요한계시록 7장을 시작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 7장에 보면, 천사가 나오고 그 다음에 다른 천사가 네 분의 천사가 등장하고 네 분 말고 또 다른 천사가 하나님의 인(도장)을 가지고 이 세상에 올라와서 도장 찍을 사람들을 도장 찍는데, 인 맞은 자의 숫자가 144.000 이였더라. 라는 그 대목이 나오죠. 우리가 이런 요한계시록 7장 같은 경우에 전체적인 하나님의 하는 활동에 있어서 근본적으로 우리가 아셔야 될 것은, 요한계시록의 모든 작업에 대해서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먼저 명심을 해야 됩니다. 사람이라 하는 것은 여기에 하나님의 일에 관여하지 않습니다. 있어도 있으나마나한 존재죠. 구원 받기 위해서 뭘 하느냐 하는 것은 요한계시록에 없습니다. 이건 요한복음에도 없고, 더 나아가서 성경 전체가 사람을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 사람을 넣어주지를 않습니다. 사람이 자기가 관여해서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고 설쳐대는 것은 오늘날 한국교회가 그렇잖아요. 오늘날 한국교회는 사람이 내가 설쳐야 내가 내 구원 내가 챙길 수 있다고 하지만, 성경 자체에서는 사람을 일체 넣어주지를 않습니다. 사람을 넣어주지를 않기 때문에 우리는 뭘 알아야 되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왜 우리가 구원 받는데 조차도 하나님께서는 구원받는 우리 자체를 여기다 집어넣지 않느냐 그 이유를 알아야 돼요. 여러분 4영리라는 것 들어봤죠? 4영리 교육을 저도 받았습니다. 젊을 때 받고 조그마한 책자 화장품 팜플렛 비슷한 그렇게 생긴 책자가 있어요. 그것으로 전도하고 캔퍼스 돌아다니면서 벤취로 찾아다니면서 하는데, 보통 남학생 같으면 이쁜 여학생만 골라서 하죠.ㅎ 못생긴 여학생은 찾아가지도 않고. 전도하는 핑계대고 한번 작업을 해 보려고.ㅎ 저는 그런 적 없었습니다만.ㅎㅎ 그럴 때 4영리가 문제점이 무엇이냐에 대해서 부천개혁교회 싸이트에 누가 질문을 했어요. 거기에 어떤 분이 4영리가 뭔지를 몰라서 친절하게 4영리에 대해서 올려 놨습니다. 제가 4영리를 할 때는 이것이 옳고 그름을 떠나서 이것은 무조건 성도라면, 믿는 사람이라면 이걸 해야 된다고 생각한 거예요. 왜 해야 되는지, 성경에서 이걸 하라고 지시가 내렸는지, 검토할 생각도 없이 무조건 이걸 하는 것이 본분인 줄 알았어요. 성도의 본분!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말씀에 부합되는 그러한 행위 중에 하나인줄 알았습니다. 성경의 요한계시록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수능 앞으로 일주일 전이예요. 총정리!! 총정리 하는 이 시점에 와서 인간은 애초부터 하나의 노리개였죠. 노리개였는데, 사실은 구원 작업에 있어서 완벽하게 빠져 있어야 돼요. 모든 인간은 빠져 있어야 됩니다. 노리개라 하는 것은 어떤 의미냐 하면, 유치원 애들이 갖고 노는 교육용 장난감을 은물이라 하죠. 은물이라는 용어를 저는 논문 쓸 때 처음 알았어요. 은물을 갖고 노는데 거기에 자연 나무 색깔을 주게 되면 자기가 물감을 분홍색 칠하면 분홍색이 되고 빨강색 칠하면 빨강이 되잖아요. 고 목재 색깔 그대로 갖고 있는 고 물체 하나, 하나가 인간이라고 보면 됩니다. 주님께서 어떤 색깔을 칠했느냐에 따라서 그 색깔을 그냥 뒤집어 칠한 거예요. 그게 인 맞음, 도장 찍힘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도장 찍을 때, 우리가 의도했던 내 구원받기 위해서 도장 찍어줘야 됩니다. 하고는 전혀 상관없이 일을 하셔요. 그러면 상관은 무엇과 상관있느냐? 하나님은 자신의 ‘언약’을 드러내기 위해서 하나님의 도장이 동원되는 겁니다. 더 알기 쉽게 이야기해서 (동영상 켜 놓았죠)조각 대리석이 있다면, 대리석 조각을 할 때, 이걸 잘라내서 유명한 조각품이 나오잖아요. 잘라내는 것, 도려내는 것, 우리 인간들이 이래 있으면 하나님께서는 조각품을 이렇게 해놓고 하나님의 언약이란 조각칼을 가지고 이걸 뜯어내게 되면, 남는 게 뭐냐 하면, 인간이 남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언약’이 남게 돼 있어요. 이 하나님의 언약을 뜯어내는데 동원되는 숫자가 뭐냐 하면 바로 그 유명한 144.000이라는 숫자가 등장하는 겁니다. 7, 10, 1000, 전부 다 숫자가 구약에서 이미 알려 준 하나님의 언약을 보여주기 위해서 사용되는 용어예요. 천년 왕 노릇한다는 1000, 7나팔, 7인, 7대접의 7, 666 이 모든 숫자가 하나님의 언약을 드러내기 위한 거예요. 그러면 자연 조각 대리석을 뜯어내고 쪼아내고 남아 있는 것은 뭐냐 하면, 바로 12라는 숫자를 중심으로 해서 주변에 그것을 12라는 숫자에 대한 언약적인 활용도, 언약적인 여러 가지 시기에 따라서 달라지는 언약의 다양한 모습을 드러내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 12라는 숫자는 어디서 나오는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을 할 때, 결국 마지막에 나오는 자식이 총 몇 명이죠? 12자식이죠. 지파는 13지파입니다만 12자식이죠. 12자식이라는 사람이 나올 때, 그 12자식은 사람이 아니에요. 이름이 하나님의 언약의 생산물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공장에서 만들어 낸, 없었던 사람이 등장한 것이고 죽었던 사람이 생겨난 거예요. 이것은 12지파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 때문에 발생되는 그러한 새로운 조직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이란 사람은 하나님의 작품 12지파를 만들어 내는 유일한 또 하나의 은물, 장난감이 돼야죠. 그래서 나온 게 뭐냐 하면, 사람이 나오는 게 아니고 뭐가 나오느냐 하면, ‘이스라엘’이 나와요.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사람들이 모여서 이스라엘이 되지 않겠느냐, 이렇게 생각하시는데, 사람이 모여서 이스라엘이 됐다가 하나님한테는 그게 별 의미가 없는 해석이 되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거예요. 아들은 누굽니까? 예수님이죠. 이스라엘은 사람들이 모여서 복수, 여럿이 돼야 하는데, 여럿이 아니고 이스라엘은 하나가 되는 거예요. 한 이스라엘, 오직 유일한 이스라엘이 되는 겁니다. 왜 그러냐 하면 이스라엘 자체가 예수그리스도의 아들 됨을 보여주기 위한 그리스도의 몸이 되기 때문에, 그 여러 명이 있더라도 그것은 나중에 신약에 와서 그리스도 몸, 하나밖에 없는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조각 이야기를 다시 하게 되면, 이러한 자연적 대리석에 수많은 사람이 여기에 수천 명, 수만 명, 144.000이상 많이 있더라도 결국은 잘라내고, 잘라내고, 잘라내고 남는 것이 이것이 하나로 남을 때에, 이 안에 참여되는 사람이 144.000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50만, 60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결국은 뭐다? ‘하나’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보여준 겁니다. 그러면 인간들은 뭐라 하느냐, ‘어떻게 각각 사람이 두 사람이면 둘이 되고, 세 사람이면 셋이 되는데, 어떻게 그게 하나가 됩니까?‘ 라고 물으면, 그때부터 이야기가 시작 되죠. 그게 어려운 거예요. ’1000명이, 144.000이 어떻게 하나가 됩니까?‘ 라고 물어야 돼요. 144.000은 144.000이 아니고 오직 한 분, 하나예요. 한 몸을 이루는 겁니다. 따로 따로 각기 노는 게 없어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 중에 하나가 설 되면 먹는 땅콩간정입니다. 이런 비밀을 함부로 누설하면 안 되는데,ㅎ 땅콩강정에 땅콩들이 막~ 있어요. 이걸 잘라버리면 뭡니까? 땅콩들을 붙이는 것이 뭐예요? 엿이잖아요. 144.000을 하나, 하나 묶는 본드 같은 역할을 하는 게 뭐냐 하면, ‘언약’이라는 겁니다. 너희들은 안 되는 걸 언약은 해냈잖아요. 해낼 때 땅콩 스스로가 ‘나는 땅콩이야. 구원받은 땅콩이야.’ 하는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언약 때문에 우리는 구원받았어.‘ 라고 땅콩보다도 엿!!, ’하나님의 언약‘이 인간이 감히 할 수 없는 일을 해냈다.’라고 찬양하는 대목이 요한계시록 뒤, 중간부터 뒷부분에 나옵니다. 144.000 아무리 숫자가 많더라도 이 사람, 저 사람들이 하나같이 땅콩강정 같아요. 땅콩강정이 마치 네모나잖아요. 동서남북 이예요. 동서남북이니까 여기 첫 번째 천사들이 동서남북 네 모퉁이를 이동하지 못하게 붙잡아 온다고요. 붙잡은 요것이 하나같이 이구동성으로 어린양 되신 예수님을 찬양하죠. 10절에 보면 나오죠.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해서 하나님의 어린양의 공로에 대해서 찬미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걸 보통 해석을 하게 되면, 이렇게 어린양을 찬미하니까, ‘찬미합시다.’ 로 나와요. 보통 교회에서는. ‘여러분! 구원 받은 144.000 되려면, 우리가 하나님과 어린양께 찬미해야 됩니다. 찬미 했잖아요. 찬미해야 구원 받습니다.’ 이렇게 나오죠. 하지만 그건 틀린 해석입니다. 여기는 ’인간‘은 빠집니다. 제발 좀 ’찬미하자, 합시다. 이런 것은 빠져 줘. 유명한 말로 ‘나대지 마라.’ 는 겁니다. ‘좀 빠져줘.‘ 괜히 니가 설치면 언약이 죽어요. 그리고 언약이 중심 움직이는 엔진은 보좌에서 나오지, 너희에게 나오는 게 아니에요. 이번 1월 말에 중국에 가서 강의하도록 지금 예정돼 있습니다. 확실한 것은 인간에게 없습니다. 거기서 주제를 정해 왔어요. 주제가 뭐냐 하면, 성막과 성전에 대해서 이야기 해 달라. 성막과 성전에 대해서 이야기 할 것을 지금부터 계속 그 이야기 들을 때부터 생각하고 있거든요. 그 강의를 준비하면서 마침 ‘미가‘ 수요일에 제가 한 미가 1장 3절에 보면, “주께서 성전에서 그리하실 것이니라 여호와께서 그 처소에서 나오시고 강림하사 땅의 높은 곳을 밟으실 것이라” 주께서 성전에서 나오는데, 그게 뭐냐 하면, 지상의 모든 것을, 소위 인간이 관여된 모든 것을 짓밟는 총 사령부가 하나님이 성전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성전은 뭐가 되느냐 하면, ’전쟁의 사령부‘가 되는 겁니다. 총 본부가 되는 겁니다. 전쟁을 하기 위한 성전. 매트릭스3라는 영화가 있어요. 1,2,3중에 3부분 마지막 부문에 보면, 매트릭스에 보면 이름이 시온이라 해서 다윗 성전 같아요. 이름을 시온이라 해서 인간들이 동물 세계에 갇혀 있습니다. 기계들이 날뛰고 설치니까, 나중에 기계들이 마지막 인간, 최후의 인간이 있다는 걸 알고, 지붕을 뚫고 여기서 기계 로봇무기를 막 쏘아대죠. 여기서 인간들이 자기 최선의 무기를 가지고 오는 족족 기계를 쏘아대는데, 역부족이죠. 그래서 쫒겨 가는 매트릭스 3 봤어요? 기억나죠? 마지막 세 번 째, 그 쏘아대는 그 곳이 성전 이예요. 이 세상을 짓밟기 위해서!! 왜 그러느냐 하면, 여기 이 사람들 아무리 모여 봐야 이게 하나가 안돼요. 하나도 안 되고 예수그리스도를 보여줄 수가 없습니다. 여기 수많은 교회들이 있고 아무리 기독교가 있어도 여기는 각각 자기 따로 지 따로 놀아요. 하나라는 게 있을 수 없습니다. 이처럼 땅콩을 묶어주는 엿이 없어요. 본드가 없다 말이죠. 그럼 본드를 우리가 만들어 내면 될 텐데, 문제는 하나님의 언약을 우리가 성취할 수도 없고, 실행할 수도 없고 실천에 옮길 수가 없습니다. 기껏 지 나름대로의 신앙생활에 성실히 임하겠죠. 죄송합니다만, 성실히 임한 것은 그것은 자기 딴에 성실하지, 그 성실히 임한 것이 다른 사람들의 결합에는 실패하게 돼 있습니다. 모든 것이 성실하게 되면, 성실하지 않는 다른 사람과 대비가 되고 비교가 돼서 안돼요. 다 따로 놀게 돼 있어요. 그래서 실패합니다. 하나님의 언약에 대해서 인간은 실패합니다. 그래서 자기 힘으로 144.000 되는 것, 실패합니다. 안돼요. 그래서 그걸 아시고 처음부터 하나님은 ‘인간들아 제발 구원 문제에 대해서는 니가 빠져줘. 니는 니 하는 대로 그냥 놀고 있어. 그냥 가는 행세대로 살고 있어.’ 그냥 밀어내죠. 그래서 마태복음의 ‘씨 뿌리는 비유’의 핵심은 바로 사람들은 밀어낸다는 겁니다. 언젠가 그런 이야기 했는데, 씨 뿌리는 비유, 농부가 씨를 뿌렸더니 어떤 것은 마귀가 와서 쪼아 먹고, 어떤 것은 처음에는 기뻐했다가 큰 바위가 있어서 기운이 막히고 시들었고, 세 번 째 밭은 뿌렸더니만, 가시덩굴이 걸려서 열매를 맺지 못했고 네 번째 밭은 30배, 60배, 100배 열매를 맺었다고 했잖아요. 그 내용의 핵심은 뭐냐 하면, 열매라 하는 것은 ‘씨’에 달려있지 밭에 달려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씨가 밭을 무시하는 거예요. 밭은 전혀 열매 맺는데 보탬이 되지 못하는 거예요. ‘열매가 맺었다면 그것은 밭의 문제가 아니고, 씨가 갖고 있는 생명의 자생적인 능력입니다.’라고 인정하는 그 밭이 바로 옥토 밭이라는 겁니다. 그냥 씨가 그대로 씨답게 우리 마음속에 맘껏 씨가 씨의 본래 가치가 맘껏 펼쳐서 모든 걸 비워요. 그게 바로 씨 자체 생명력이죠. 그런데 어두운 기운이 그걸 막아버리면, 열매는 없습니다. 그건 안 맞는 밭 이예요. 뭔가 인간적인 의도가 담겨 있어요. 지가 자기가 어떻게 구원 받겠다고 시도하는 게 있어요. 그러니 구원 문제에 대해서 주님께서는 ‘제발 니 나가 놀아라.’ ‘나가 놀아라.’ 라는 말 젊은 사람들은 모를 거예요. 옛날 개그 맨, 김 병서가 ‘나가 놀아라.’ 너가 거기에 대해서 손을 떼라. 구원 문제에 대해서는 우리가 손을 떼야 됩니다. 손을 뗄 때 비로소 우리가 구원은 스스로 하나님의 자기 숙제고 자기 작업인 것을 그대로 눈에 들어오죠. 그래서 144.000이라는 것은 다시 한 번 정리하면, 사람의 숫자가 아니고, 누구의 숫자냐 하면, 바로 언약 자체가 숫자로 표기하면 이렇게 돼요. 그러면 사람은 뭐냐, ‘분명히 인 맞은 사람은 사람 맞잖아?’ 개, 돼지가 아니잖아. 사람 맞잖아.‘ 하잖아요. 그것은 사람을 이용한 거죠. 마치 애들이 은물, 장난감을 이용해 색칠하듯이. 그냥 자연 목재 나무 쪼가리에다가 분홍색을 칠했을 때, 선생님이 보고’ 우리 영철이 어린이는 참 잘했어요. 왜 이렇게 목재가 반들반들하니? 이렇게 안하죠. 영철이 어린이는 참 잘했어요. 색깔이 이렇게 이쁘게 칠하니? 이렇게 말하죠. 그 입히는 과정은 언약 완성이고, 그 언약 입히는 코팅하는 것은 누구 몫이다? 우리 몫이 아니잖아요. 누가 하신 거예요? 언약 되신 어린양 되신 주님이 하셨기 때문에 그런 색깔을 입힌 오색 색깔을 입힌 사람들이 ‘모든 아름다운 색깔을 입은 것은 어린양과 하나님 덕분입니다.‘라고 찬양하는 대목이 요한계시록 7장10절에서 나오는 거예요. 만약에 인간이 스스로 144.000명에 가입하려고 애를 쓴다면, 대표적인 사람이 여호와증인, 신천지도 마찬가지지만, 왜 그렇게 하려고 한다면, 사실은 여호와증인이 욕을 먹고 있지만 그 전부터 있었어요. 꼭 서기 뒤에 9자가 들어갈 때, 990, 1299, 1399, 1999, 999, 꼭 9자가 2개 나올 때, 요때 꼭 이런 말이 있었어요. 사람의 심리가 9장에 약한 모양이라. 조사하면 나와요. 교회사 보게 되면. 9자 있을 때 종말론이 따라 옵니다. 사람에게 먹히는 모양 이예요. 사람이 숫자에 놀아나는 하나의 연약한 심정이죠. 144.000은 하나님께서 언약을 숫자가 있고 언약이 들어오는 것이 아니고, 언약이 일구어 낸 자기 성과가 이렇다는 걸 보여주기 위한 하나의 장치들이 여기에 있는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겁니다. 만약에 우리들이 자기 힘으로 이걸 한다고 한다면, 오늘 본문 같은 경우에 어긋나죠. 하나님의 인을 갖고 온 사람이 누굽니까? 여기 누가 돼 있어요? 2절에 보면 다른 천사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인을 가지고 오죠? 해 돋는데서 오죠? 그러면 우리가 스스로 144.000에 가입하려고 멘버쉽 등록하려고 하면, ID치고 비밀번호 쳐야 됩니까? 어떻게 해야 돼요? 아무리 애를 쓰고 용을 써도 누가 안 오면, 헛짓입니까? 천사가 와서 그것도 빈손으로 오면 안 되겠죠? 하나님의 인, 도장을 들고 이마에다 찍어줘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천사는 누구 말 듣습니까? 언약을 이룰 수 없는 우리 말 안 들어요. 천사가 우리하고 의논하지 않습니다. 통보하지 의논하지 않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에 통보하지 의논하지 않아요. 혼자 수 144.000에 들어가려 하는데, 다른 사람은 천사가 와서 도장 다 찍었는데, 스스로 144.000에 들어가려면, 그것은 소용없는 짓입니다. 그리고 옆 사람에게 만약에 천사가 도장을 찍어놓으면, 그 사람들이 특징이 뭐냐 하면,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 소리하고 있는데, 이 사람은 하나님의 인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용을 쓰고 있는 거예요. ‘주여 얼마나 좀 더 가야 144.000에 들어가겠습니까? 몇 미터 남았습니까? ’ 혼자, 용을 쓰고 있어요. 아이, 소설을 써요. 천사가 와 줘야 되는데, 부를 능력도 없고, 어디 천사가 택배 회삽니까? 전화 한 통화면 천사가 옵니까? 천사가 오지도 않을뿐더러 언제 올 지도 기약도 없어, 그리고 스스로 답답하니까 144.000 이라고 우겨봤자 진짜 하나님의 인 맞은 사람과 공통점이 형성이 안돼요. 왜? 지가 용 써서 애써서 기도해서 충성봉사해서 144.000 따냈기 때문에 이게 땅콩강정이 안 된다니까요. 그냥 나 홀로 땅콩이죠.ㅎㅎ나 홀로 땅콩이 지 혼자 엿 발라가지고 자기 홀로 땅콩강정이죠. ㅎ 아마 이 사람을 숫자로 표현하자면 144.001이 돼요. 죄송합니다만 이미 144.000 커트라인 됐거든요. 떨어져 나갔어요. 소용없습니다. 144.000에서 끝나버렸어요. 이게 사람의 숫자가 아니고 하나님의 언약의 숫자기 때문에, 사람의 현재 우리의 개체 수와는 무관합니다. 개체 수!! 그래서 성경에 다른데 보면, 수많은 사람들, 아마 144.000보다 더 많을 거예요. 수많은 사람 이예요. 인간의 숫자는요 5가 되든 7이 되든, 이건 참, 십자가마을 수련회 때 하려고 아껴둔 건데,ㅎ 아껴 둘게 따로 있지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모르는데, 아껴 둘 필요 없죠. 아마 제일 어려운 대목일거예요. 숫자라 하는 것은 항상 1부터 시작되는데, 1이 왜 1인가? 그것은 숫자 헤아리는 내가 두 사람이 아니고 나는 한 사람이라는 인식. 그러나 인간은 한 사람이 아닙니다. 인간은 한 사람이라고, 자기가 ‘너 몇 명이야? ’나 한명이야‘라고 말 할 수 있는 권리가 없어요. 왜냐하면 우리가 ’창조자‘가 아니기 때문에. 내가 나를 만들었으면, ’나 하나 있고, 우리 아내 있고, 딸 둘이 있으니까, 합해서 넷이요.‘라고 인간 세계에서는 사람 숫자가 되지만, 하늘나라 숫자는 그 1, 2, 3, 4 가 그게 출발이 있는 중심으로 출발했기 때문에 그 1, 2, 3, 4 숫자에 하나님의 언약이 개입되지 않고 있습니다. 숫자는 하나님의 영광이 안돼요. 다윗이 이스라엘 자기 이스라엘 숫자 세다가 혼났잖아요. 그러면 다윗이 숫자를 안 세었습니까? 아니 민수기에 보면, 분명히 하나님께서 숫자를 헤아리게 돼 있죠? 민수기란 말이 뭔 뜻 이예요? 민: 백성들, 수: 숫자, 기: 기록, 사람들이 숫자를 기록해서 해야 되는 게 있잖아요. 그럼 그때 사람 숫자 세면 그건 나쁜 짓 아니고, 다윗이 자기나라 백성 세면 그건 나쁜 짓이 되고, 뭐 하나님의 기준이 왔다 갔다 일관성이 없습니까? 왜 그런 거예요? 하나님의 숫자의 헤아림은 하나님의 자기의 ‘언약에서 나오는 사태’ 가운데 있어야 돼요. 아, 이것도 그림으로 해야 돼요. 동영상 아니면 설명도 안돼요. 사람이 이래 있으면 목에 진주 목걸이가 있어요. 진주 목걸이처럼 돼 있는데, 이것이 144.000인데 여기 진주 한 알을 떼 가지고 1이라 하면 안 되는 거예요. 전체를 헤아려서 1이라 해줘야 이게 줄이 언약이 되는 거예요. 목걸이 줄이 언약!! 목걸이 줄에 꿰였을 때만 고 위치, 선이라는 줄에 꿰였을 때만 이것이 하나, 하나가 보석으로 의미가 있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숫자는 꿰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요. 인간은 태어나기를 자기가 자기 하나를 보고, 나는 하나니까 하나, 두 사람이 오면, 나는 하난데 저기 상대방이 맞은편에 두 사람이 오니까 2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어린 에디슨이 이해를 못한 게 거짓인지 사실인지는 모르지만, 옛날 위인전 다 거짓말이라고 보면 돼요. 피사의 사탑이 뭐 어떻게...갈릴레이...그건 것 다 구라예요. 하여튼 구란데 교육을 위해 할 수밖에 없죠. 에디슨: 어떻게 2라는 숫자가 어떻게 2가 됩니까? 선생님: 여기 사과가 하나 있지? 에디슨: 예 선생님: 또 하나 있지? 에디슨: 예 선생님: 합하면 몇 개지? 그래서 두 개잖아 에디슨: 그게 왜 2가 되냐? 3이 하지 않고 4라고 하지 않고 왜????? 2라고 했는지 대라고요? 환장하죠. 우리 같으면 패야 될 일이예요. 그냥 어릴 때는 의미가 있는 거예요. 뭐냐 하면 하나, 하나가 의미가 있는데, 선생님 같이 가르치면 의미가 아니고 하나의 그냥 지시, 하나의 사인, 기호, 2,4,8이 기호 지시라면, 2대신에 4를 집어넣고 8을 집어넣어도 무방하지 않겠느냐는 것이 어린 에디슨의 생각이라 말이죠. 똑똑하죠, 그 사람. 정말 똑똑한 거잖아요. 어느 때 호주 영화를 보니까 이런 대목이 있어요. 아버지가 위 뜰에서 운동을 하니까 아들이 찌질이 같이 바지를 흘러내리게 입고 왔어요. 아버지: 너 바지 좀 올려, 니 나이 몇 살이야? 단정하게 해야지 니 요새 뭐하고 다니지?’ 아들: 아버지 왜 나한테 그런 잔소리 합니까? 아버지: 내가 니 아비거든 그 말을 아들이 못 알아들어요. 현대 서양의 아버지와 아들이 대립은 뭐냐 하면, 처음 낳아줄 때 DNA 처음 만들어질 때, 그때 낳아준 아버지지만 낳고 난 뒤에 지금까지 살아온 것은 다 누구 덕이다? 내가 알아서 살아왔는데 아버지 꼰대 니가 뭔대 내가 바지를 헐렁한 걸 입던 니가 왜 간섭 하느냐고 물었는데, 아버지가 하는 말이 ‘내가 니 아비거든,’ 했거든요. 그러니 자기가 아는 아비하고 아버지가 아는 아비하고 아버지 개념이 같아요? 달라요? 다른 거예요. 그걸 보고 내가 무릎을 치면서 ‘저거다.’ 오늘날 교인들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었다고 믿으니까 ‘고맙습니다. 내 죄 용서해 줘서 고맙습니다.’ 해놓고 그 다음부터는 십자가가 끝 이예요. 왜? 십자가가 끝이고 그 다음부터 ‘십자가, 예수가 누구? 그런데 왜 나한테 간섭합니까? 내가 믿어줬잖아요? 십자가 믿어줬잖아요? 그런데 지금 와서 왜 나한테 간섭합니까? 내가 예수를, 아버지를 내가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데, 지금 내가 이만큼 살아온 것은 내 덕이지 아버지 덕이 아니잖아요?‘라는 것이 그 호주의 철딱서니 없는 아들이라면, 오늘날 교인들이 ’주여, 주여‘ 하지만 새로 마음속에 딱 깨놓고 마음속에 이야기 해 보세요. 예? 전라도 감태 작업 하면서 두 번씩 울어가면서 대학 보내려고 힘든 작업 할 때, ‘아주머니 이 모든 것이 대학 들어가는 것보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면 귀때기 맞습니다. 그 추운 날 맞바람 받아가면서 그 바다풀 뜯는 작업을 누가 했습니까? 자기 팔짱끼고 있는데, 주님께서 헬기로 공중에서 내려줬습니까? 지가 쳤는데, 그런데 그것이 하나의 은물이고 배치물이고 그게 장난감이라 이 말이죠. 뭐냐 하면요 니가 보기에 나는 편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 인간의 주장이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너는 죄인 값을 해야 된다’는 거예요. 저주 값을 해야 되기 때문에 평생 동안 실컷 고생하다가 쉬는 것은 천당 가서 쉬라는 거예요. 하늘나라 가서 쉬라는 그것이 하나님의 언약의 특징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강력하게 반발해요. 반발하는 것을 조사해 보니까, 주님이 세어야 되는 숫자를 누가 센다? 자기가 숫자를 세는 거예요. 다윗처럼. ‘야, 이 나라 내 백성 몇 명 되노?’ 자기가 세는 거예요. 이게 뭐냐? 숫자를 센다는 것은 그 중심이 결국 뭐가 있다? 오늘 제일 중요한 문제예요. 뭐가 있다? ‘중심 성’을 아직도 자기가 쥐고 있다는 겁니다. 아~~~~~!! 이게 중심 성 싸움 이예요. 계속해서 인간이 갖고 있는 그 이름을 시온 성이라 하는데 영화에 보니까, 시온 성이 있고 메시야가 있어요. 메시야가 주인공 이름이 있는데...유명한 영화배우가 그 사람이 메시야예요. 지붕이 뚫리면서 기계나라에서 막 여기로 쏟아질 때, 강력한 무기로 역부족이라 했죠. 이 성전에서 쏟아지는 것이 뭐냐 하면, ‘언약의 소낙비’ ‘언약의 폭설’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이 세상은 인간들이 만든 소박한 아름다운 정경이 있는 너무나 참한 세상이라. ‘우리의 정원은 우리가 꾸민다.’ 하는 세상을 천사들이 4명이 ‘너들이 정원을 가꿔? 뭘 심고 뭘 심고, 뭘 심는가 보자.’ 하고 보자기 네 모퉁이를 쥡니다. 쥐고 흔들어 버리죠. 흔들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천사 4마리라 하든가 알아서 하세요. 천사가 네 모퉁이를 쥐고 있습니다. 세상을 쥐고 있으면서 흔들어 버리면 뭐가 생기죠? 물결이 생기죠. 흔들어 버리면 여기서 뭐가 되느냐 하면, 인 맞을 사람과 인 맞지 않은 사람과 구분이 되겠죠. 일종의 타작입니다. 이렇게 붙든다는 말은 이렇게 세상을 천사에 의해서 네 모퉁이를 붙든 요러한 그림, 요런 세상 그림과 그렇지 않고 이 세상에 천사도 없고 하나님도 없고 언약도 없고, 오직 우리가 어떻게 거기다가 장식하느냐에 따라서 인류의 문명은 우리 손에 달렸다. 하는 그런 세상관이 있을 거 아닙니까? 이 세상 관, 비 언약의 세상 관, 이 세상 관에 대해서 주님께서는 여기서 하나님의 언약 받은 사람을 추려내는 동시에 이 언약 받은 사람을 하나의 모델, 역할 모델로 통해서 이쪽을 징벌할 수 있는 언약적인 근거를 마련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러면 또 예수 믿는 사람은 또 뭐가 돼요? 하나님의 언약 작업에 또 동원되는 인부, 하나의 도구가 되겠죠. 우리는 우리 구원 받으면 입 싹 닦고 ‘ 구원 받았으니 이제 슬슬 내가 하고 싶은 거 해 볼까.’ 하고 싶은데, 하나님이 언약은 그걸 가만두지 않죠. 어디로 한 분위기 확 휩쓸려 가는데 그것이 따로따로 휩쓸려 각자 따로 하는 일처럼 보이죠? 어떤 사람은 약사, 어떤 사람은 판사, 가는데 결국은 모이는 곳이 뭐냐 하면, 모든 것이 하나님 어린양 덕분입니다. 하나의 거대한 흐름에 땅콩강정이 돼 가지고,(아까 땅콩강정 봤죠?) 그게 뭐냐 하면, 144.000이 언약을 본드로 해서 하나로 만들어지는 겁니다. 이 전체 이야기를 하나로 하면 뭐냐 하면, ‘인간은 빠져라. 내가 알아서 다 해낸다. 인간은 제발 너 구원 문제에 대해서 손을 떼라.’ ‘그러면 우리가 내 구원에 대해서 신경을 안 쓰게 되면 구원받습니까?’라는 물음 자체가 못됐다 말이죠. 그 물음 자체가 뭐냐 하면, ‘내가 태어나는 것은 신이지만 태어나고 난 뒤에는 독자적으로 난 하겠습니다.’ 하고 아까 뭘 챙깁니까? 중심 성을 챙기죠. 지금부터는 우리가 공부할 게 뭐냐 하면, 이 중심 성이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언약에서 그렇게 하시는 것에 대해서 우리가 자기를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언약을 언제 올지 어떻게 아느냐, 못 믿겠다. 차라리 답답한 이상 우리가 알아서 내 구원 내가 챙기고 싶다. 성경대로 그걸 준수하고 법대로 지켜서 그래서 내가 구원 받으면 그렇게 어떤 느낌과 보람을 갖고 싶다.‘라고 하는 자기중심성을 챙기는 고 원인, 그렇게 하는 이유가 뭐냐 하는 거예요. 여기서 먼저 우리가 이걸 그냥 빠져버리면 철학적으로 어렵기 때문에 우선 결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쉽게 하기 위해서 지구를 한번 그려보겠습니다. 지구의 중심에는 고온이 돼서 액체 금속이 있어요. 액체 금속이 있고 위에서 20키로~2900키로 쯤에서 고온의 금속으로 돼 있는데, 이걸 맨틀이라고 합니다. 지구 궤도에 디지털로 전파를 보내 조사해 보면 이래 돼 있답니다. 여기 있는 액체 금속과 여기 움직임 때문에 지구의 중심축으로 해서 자기장이 형성되는 거예요. 그러니 여기에 보면, 여기가 아주 뜨거워요. 5000도 정도로 뜨거운데, 이 뜨거운 것이 올라오면서 이게 식어지면서 어떤 현상이 나타나느냐 하면, 이 윗부분에서 뭐가 일어나느냐 하면, 올라오면서 식어지고 뜨거워지고 식어지면서 컨베이어 벨트 같은 요런 흐름이 맨틀 윗부분 상부에서 흐름이 되는 겁니다. 여러분, 지금 지구과학 시간 이예요. 여러분, 지금 과학을 하고 있습니다. 흐르면서 (여기부터 중요한 거예요) 뭘 쥐고 있느냐 하면, 여기 위에 판때기(p1ate)를 쥐고 18개~20개 이하의 Plate가 움직이면서 이 plate가 밀도가 높은 것이 올라가고 내려오면서 부딪히면서 대륙이 이동하는 거예요. 이걸 ‘대륙이동설’이라 해요. 그러니까 우리가 딛고 있는 땅이라 하는 것은, 뜨거운 고온의 맨틀이 빙빙 돌아가면서 움직이면 같이 움직이면서 판과 판끼리 받혀서 인도네시아나 태평양의 plate가 부딪히면서 지진이 일어나는 거예요. 이걸 생각하면 우리가 땅 사놓는 것도 허무하죠.ㅎ 땅 값은 맨틀에 달린 거예요.ㅎ 어디서 지진이 날지 몰라요. 제가 왜 이렇게 하느냐 하면, 우리가 딛고 있는 땅이라는 것은, 사실은 아무 힘이 없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은 거예요. 아무 힘이 없는 거예요. 우리 인생이라는 게 위에서 떠받히는 대로 흘러갈 뿐 이예요. 그렇다면 우리가 옛날에 고래 나왔던 울산에 있는 언양이 지금은 육지로 들어갔지만 옛날에는 바다였습니다. 그래서 울진에 보면 고기잡이 했던 유적지가 있어요. 알래스카도 옛날에는 육지였습니다. 그런데 이동하거든요. 그런데 그 사실을 알려면 어디로 내려가야 합니까? 땅 조사해서 안 되고 땅 밑으로 내려가야 되죠? 지금 그 이야기 하려는 거예요. 성경이라는 모든 판때기(plate)는 그 밑에 뭐가 있다? 보이지 않는 어두운 세력, 밑에 어두운 영적 세력이 맨틀처럼 서로 대치되고 부딪히는 거예요. 요한계시록은 밑에 있는 숨어있는 그 모양새를 언약을 통해서 구약에 사용했던 언약적인 쪼가리들, 언약적인 plate, 언약적인 쪼가리들을 붙여가지고 영적인 것을 표현하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모든 문장들은 어디서 온 거예요? 다니엘, 에스겔, 예레미야, 이사야, 사실은 구약의 떠돌아다니는 문맥들과 문장들과 단어들이었어요. 그런 단어들이 여기에 마지막 총정리 단계에서 서로 부딪히고 마주치는데, 그 이유는 뭐냐? 바로 숨어있는 영적 세력의 전쟁에 인간들은 그냥 활용될 수 있는 역할만 했을 뿐 이라는 것을 그걸 이야기 하는 겁니다. 그게 요한계시록 해석 방법의 전부예요. 해석 방법을 이렇게 해야 돼요. 맨틀( plate) 대륙 이동 설 대륙들의 모습은 144.000 어떻게 우리가 쓰는 말로 돼 있지만, 우리가 보통 사람들의 인간세계의 통하는 말로 돼 있지만 그 밑에 있는 건 다른 말 이예요. 이미 바벨론 나라라는 것은 페르시아 에게 망했어요. 망했지만 요한계시록 18장에 보면 무슨 나라가 나와 있습니까? 바벨론이 나와요. 바벨론은 망했잖아요. 망했다고요. 요한계시록 주석에 보면 바벨론을 뭐라 하느냐 하면, 로마라고 돼 있어요. 이거는 밑의 맨틀을 생각 안하고, 그냥 껍데기만, 맨틀 없이 그냥 껍데기 채로 ‘대충 그냥 넘어가자’ 하는 식으로 해석하니까 이렇게 되는 겁니다. 밑에 맨틀 생각 안하고 마치 땅이 단단한 것처럼 그 단어 자체가 움직이는 단어인데 이걸 고정시켜 못 박아놓고 해석하니까 이걸 로마로 해야 될 지 해보니까 안 맞고, 이걸 해도 안 맞고, 안 맞을 수밖에 없죠. 진리는 숨어있는데, 역사에 드러난 거 가지고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니까, 무지 몽매한 사람은 거기에 다 넘어가서 2012년에는 누가 옵니까? 예수님 재림은 언제 옵니까? 날짜 계산하고 난리를 죽입니다. 말장난, 단어 장난, 어느 주석이든 요한계시록 해석을 보세요. 밑에 내막을 이야기 하는 책 없어요. 전부 다 껍데기가지고 써요. 그 쪼가리 가지고, 신문지 쪼가리 가지고. 이건 스포츠 신문도 마찬가지고 일반 신문도 마찬가지예요. ‘원빈 죽었다.’ 검색하면 원빈 고소 공포증으로 죽을 것이다. 뭐 비밀의 정원에서 죽을 것이다. 시크릿 가든.. 안 맞는 두 개의 ‘아버지 가방에 들어가신다.‘ 하는 말과 똑 같아요. 안 맞는 두 개의 쪼가리들을 이렇게 붙여 놨을 때, 언제까지 너희들이 이렇게 문자나 문맥을 가지고 진리를 발취하려고 인간적인 방법을 사용하느냐고 질책하는 책이 요한계시록 이예요. 현재 요한계시록을 문자와 문맥을 분석해서 나올 진리란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석이 안 되는 이유가 그 해석하는 해석자 안에 뭐가 들어있습니까? ‘자기중심 성’ 자기 중심이 그대로 남아 있는 거예요. 그게 왜 그러냐 하면, 지구 맨틀이 있죠. 이게 대륙이 있는데, 여기 사람이 있다 말이죠. 내가 이쪽을 바라보는 일반 사람들,(기계 전문가도 아니고 암석 전문가도 아니고) 그냥 바라보게 되면, 그냥 부동산은 뭐냐, 이거 팔고 이거 사면 얼마 남겠느냐, 부동산 가치를 볼 것이고, 나중에 내가 밭을 일굴까도 자기 노후 대책이지만, 만약에 진짜 암석 전문가라면, 땅을 보는 것이 아니고 맨틀을 보겠죠. 그렇게 분석하는 본인 자신도 맨틀의 힘에 어쩔 수 있다, 없다? 어찌 하지 못한다. 이것이 바로 해석자 이어야 한다 말이죠. 해석을 해냈다고 해서 그것이 나로 하여금 구원이 된다? 안 된다? 안 되는 거예요. 성경의 해석을 똑바로 해서 구원되는 게 아니고 성경의 해석과 상관없이 ‘구원은 우리 주님 멋대로 입니다.‘ 라고 믿어져야 이것은 성령이 와서 믿어지는 것이죠. 성경 해석을 어떻게 완벽하게 해내면 그 지식을 내가 소유하게 되면, 내가 구원 받는다. 이 말은 여전히 이 사람은 자기 중심 성에다가 온갖 좋은 것을 집어넣는 거예요. 자기중심성은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영적 세계로부터 공격받아야 돼요. 완전히 폭파 돼야 돼요. 이것이 바로 하나님 성전이다. 성전에서 뭐가 나온다? 성전에서는 하나님의 전쟁의 총사령부가 되어서 지상에 있는 모든 것을 다 박살내 버리죠. 모든 걸 다 박살내요. 그런데 그 기준이 내 중심으로 갖고 있으면 박살내지만, 내 중심이 없고 오직 예수님 중심에 의해서 미리 자기가 도장 찍어 놓은 사람만 조각칼로 다 잘라내면 남는 게 뭐예요? 언약적인 자기 몸둥아리만 남겠죠. 그게 144.000입니다. 144.000명이 아니고 그냥 한 분되신 예수님의 144.000의 분신들이죠. 예수님을 보여주기 위한 하나의 모습. 다양한 144.000가지의 색깔이라고 그렇게 볼 수도 있죠. 나중에 요한계시록 21장에 색깔로 표현돼 있죠. 뭐든지 철학이나 물리학에서도 색깔로 표현하는 것은 이미 객체를 잃어버렸을 때 색깔로 표시해요. 뭐 참, 참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콕크의 종류에, 여러분, 콕크라는 말 들어 본 적 있어요? 원자핵을 구성하고 있는 구성 성분들 간의 원자핵, 중성자, 양자를 구성하는 것의 제일 밑 단계가 콕크인데, 그것은 어떻게 표현하면 바틈, 바닥, colorful하게 물리학자들이 붙였어요. 기존이 객체와 차이 나게 해서. 이것은 뭐냐 하면, 결국 이것은 객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기능, 너는 어떤 언약 적 기능, 만약에 약사라면, 약사로서 언약 적 기능, 교사 하면서 언약 적 기능, 가정주부라면, 주부로서 언약 적 기능, 언약 적 기능을 통해서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라고 공통적으로 한 몸에게 땅콩강정처럼 모이는 현상, 그것은 자기가 능히 극복할 수 없는 자기도 어찌 할 수 없는 자기조차도 능가하는 힘이 이미 자기 안에서 작용하고 있음을 고백하는 모습입니다. 10분 쉬고 다음에...
하나교회110106요한계시록-8강b-(이 근호 목사) 제 8강b 자, 지난시간에 바로 인간의 문자, 문맥에 놀아나서는 안 된다. 그런 식으로 말장난하고 언어 장난해서 상징이라는, 아휴, 난 상징이라는 말만 들으면, 차라리 모른다고 이야기해라, 왜 상징이라고 말을 하느냐, 상징이라는 말 무슨 말인지 아십니까? 말 못하죠. 상징이라는 말은 말이 안 될 때, 뭔가 그냥 하자니 무식해 보이기 때문에 유식해 보이려고 하는데, 상징이라는 말 하나마나이니까 그 말을 쓸 필요 없어요. 상징이라는 말은 해석을 어물쩡 그냥 넘기려고 하지만, 요한계시록은 상징도 아니고요. 요한계시록은 숨어있는 어두운 세력과 영적 세력과의 다툼이 외부에 드러날 때, 안에 있는 숨어있는 영적 세력(용, 옛뱀)과의 다툼에서 그리스도와 천사들과의 싸움에서 나왔을 때 그때에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니고, 논리로 나오는 것이 아니고, 쪼가리들이 전부 다 찢어져서 찢어진 채로 나오는 거예요. 흔히 만화에 보면 이런 게 있죠? 만화에 보면 물속에 고래가 있는데 고래가 내 등어리에 누가 탔나 하는 식으로 숨을 쉬니까 물위로 올라온 끝에 애가 올라가 있고 ‘어마야, 어마야’ 하면서 있겠죠. 고래는 그것도 모르고 눈만 껌뻑거리며 숨 쉬니까 물줄기가 올라오는데, 이게 바로 요한계시록의 문자예요. 문자!! 이걸 밑의 어두운 세력과 연결을 시켜보면 거대한 고래가 나오잖아요. 바다에서 올라온 이걸 언약 적으로 표현하니까 이게 144.000이고 1000이고 7이 되고 666되는 거예요. 문자 숫자로 되는 겁니다. 이건 전부 다 기존에 있던 구약 성경에 있던 선지 서에 있던 신문지처럼 쪼가리들처럼 연결 된 거예요. 이 자체에서는 말이 되지를 않아요. 밑에 내려와 보면 연결 돼 있는데, 위에는 연결이 안 된다 말이죠. 위에는 연결이 안 된 것을 억지로 상징으로 넘어가는데, 그렇게 밑으로 내려와 보면 영적 세계가 있어요. 그러한 영적 세계를 쉽게 요새 말로 말하면, ‘권력’이라 하는데, 오늘 본문에 의하면 7장 2절에 권세라 돼 있죠? ‘땅과 바다를 해롭게 할 권세를 얻은 네 천사...‘ 돼 있죠? 권력, 다른 말로 하면 권세다 말이죠. 그러면 이 권력과 권세는 아까 이야기한 위에는 하나의 떠 있는 것은 프랭크린의 판 위에 있는 인간들이고, 사실은 진짜 그 판을 움직이는 것은 위에서 우리가 아무리 몸부림쳐도 소용없어요. 144.000 되려고 아무리 애쓰고 숫자 계산해 봐도 666 숫자 계산해봐야 소용없어요. 뉴스 보니까 콜롬비아에서 666이라는 악마 종교를 만들어 놨다고 합니다. 잘 만들었다 했어요. 활동 좀 하도록 놔둬야 돼요. 어차피 오락인데 666, 777 다 오락인데 666한다고 주님 재림 안하는 것도 아니고 하는 것도 아니고, 666한다고 이게 마귀가 아니잖아요. 777 주재하는 것이 마귀잖아요. 마귀는 마귀다워야 할 텐데, 666반대한다고 이단 아닌 줄 알고 우기고 있다 말이죠. 하여튼 이단 핍박하는 것 보면, 자기는 이단 아닌 줄 알아요. 웃긴다고요. 우리 권 범식씨 누군지 만나본 적은 없지만 그 분이 쓴 글을 보고 제가 감동 받았어요. 교회라 하는 것은 누구한테 허락 받는 게 아니라는 거죠. 허락을 누구한테 받는데요? 문화공보부에 받을까요?ㅎ 허가 받으면 이단 안 되는가요? 이러한 모든 종교단체나 국가단체나 이 모든 권력이 이 권세가 어디서 나왔는가를 조사해봐야 해요. 어디서 서로 개입이 되는 권세가 있느냐? 이 권세에 들어가는 방법은 뭐냐? 그 방법을 기존의 해석은 이렇게 해요. 기존의 해석을 해보겠습니다. 기존의 요한계시록의 해석은, ‘고난 받는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핵심이 되어서 고난 받는 성도들을 누가 이렇게 힘들게 하느냐? 그들이 악의 무리다.’라고 해석을 합니다. 지금 이러한 해석이 전 요한계시록 주석이 전부 다 이렇게 해석을 합니다. 이러한 해석이 자기들은 정답이라고 보는 거예요. 틀렸어요. 왜냐하면 고난 받는 성도에서 문제는 성도라는 것이 규명이 안 된다는 거예요. 7교회요? 7교회도 나중에 보면 성도가 아니에요. 고난 받는 성도가 누굽니까? 누구예요? 어거스틴? 칼빈? 루터? 누구를 이야기 합니까? 이들이 이단인지 아닌지 누가 판정합니까? 이 근호? 이는 말할 것도 없고, 누가 고난 받는 성도의 자리에 누가 들어가느냐 말이죠. 오직 요한계시록에는 한 사람 밖에 없어요. 사도요한 밖에 없어요. 처음부터 끝까지 사도요한은 끝까지 갑니다. 밧모 섬에서. 하지만 사도요한은 이미 죽었잖아요? 이미 죽었고 사도요한을 대체할 사람이 없다니까요. 누가 성도예요? 5년 성도? 6년짜리 성도? 7년 다니다가 교회 안 나오는 그런 사람? 15년 다니다가 16년에 안 다닐지 누가 알아요? 아무도 몰라요. 나도 모르고 여러분 자신도 여러분 몰라요. 그런데 아까 이야기한 중심 성, ‘나만은 반드시 필히 구원 받는 사람 맞아,’라고 그걸 보고 성경 해석을 하니까, 결국은 이것은 판때기, Plate에서 Plate 로 끝나 버리는 밑으로 내려갈 수 있는 어떤 기회를 스스로 차단시켜 버리는 것이 돼요. 자기가 성경 해석에 중심인물로 등장해가지고 요한계시록을 해석을 하니까, 자기 힘들면 다 나쁜 놈이고, 자기 잘 해주면 다 천사고, 그렇게 일방적으로 해석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거기서 나오는 게 뭐냐 하면, ‘개별자’ 개별자는 숫자를 누구부터 센다? 나를 무조건 포함시켜요. 이것은 비 언약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폭파 대상 이예요. 이것은 제가 처음부터 이야기한 언약을 위한 언약의 땅콩강정이 아니고 자기가 스스로 강정이라고 우기는 사람밖에 안 됩니다. 그러면 권세에 어떻게 들어갔느냐, 그게 요한계시록에서는 요 표현 하나로 족해요. 뭐냐 하면, ‘어린양, 이예요. 어린양인데 이것은 언제 적 용어냐 하면, 어린양은 출애굽기에 나오는 제사, 모세 율법에 나오는 용어 아닙니까? 어린양! 그렇죠? 그 이전에 보면 출애굽기 12장에 보면, 유월 첫 번째 뭐가 나오죠? 애굽 탈출할 때 어린양을 잡죠? 그때 나온 용어잖아요? 이게 그때 나온 신문쪼가리. 그때 나온 신문쪼가리가 십자가 사건 때, 요한복음 1장에 보면 세례요한이 예수님보고 하는 말이 앞에 뭐가 붙죠?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 돼 있죠? 그리고 세례요한의 신문쪼가리하고 뭐가 결부되느냐 하면, 요한계시록에 보면, ‘일찍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 이예요. 앞뒤 있는 형용사를 다 생략하면 남는 게 뭡니까? ‘어린양’만 남죠? 결국 어린양이 하나의 중심인데 어린양을 학대하고 미워하고 공격하는 것이 비로소 어두운 권세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문제는 뭐냐, 아무도 어린양에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을, 그런 재주와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겁니다. 우리 가운데. 예수님이 왔을 때, 예수님을 전신 마사지를 해줘도, 예수님 옷을 만지고 몸을 만지고 아무리 해도 예수 믿는 게 아니고, 몸을 만진 거죠. 사람의 감각이라 하는 것은 항상 감각을 하는 자기 쪽에서 나와서 자기에게 돌아와요. 그걸 현상학에서 지향성이라 해요. 의도한 것, 그것은 의도하기 때문에 여기 제가 시험하겠습니다. 자, 여기 초코파이하고 물이 있습니다. 목마른 사람은 어디를 보겠습니까? 목마른 사람은 물을 보기 때문에 물이 중심이 되고 초코파이는 배경으로 빠지는 거예요. 근데 군에 갔다 방금 제대한 사람이 초코파이 하나 먹으려고 얻어터진 사람은 어떤 것이 추억에 남습니까? 그런 사람한테는 초코파이가 중심이 되고 물이 빠지죠. 이걸 ‘게슈탈트 심리학’이라고 해요. 게슈탈트 심리학이라는 것은 사람이 볼 때 자기가 보고 싶은 것에 중점을 두고 나머지 자기에게 덜 중요한 것은 뒤로 배경으로 빠지는 겁니다. 그런데 어떤 계기가 되면 이게 뒤바뀌어 버려요. 그럼 이 말은 뭐냐, 인간은 결코 단 한번이라도 전체를 전체로 보는 시각이 있다 없다? 인간은 없는 거예요. 지 맘이 당기는 대로 보는 거예요. 오랫동안 사귀어 놓고도 ‘아유, 내가 그런 장점이 있는지 몰랐다. 아유, 새롭다.’ 이리 되는 겁니다. 설교를 듣더라도 그때 설교 듣는 마음가짐이 자기의 어떤, 평소에 어떤 생각에 잠겨 있으면, 그 좋은 구절 다 놓치고 엉뚱한 구절에 꽂힐 수가 있어요. 나중에 설교를 다시 보거나 들으면 놓친 것이 더 좋을 수가 있습니다. 놓친 것이 더 좋은데 엉뚱한 것 붙들고 은혜 받았구나 하는데, 놓친 것이 더 좋다는 것도 며칠 가겠어요? 그것도 세 번째 보면 놓친 것이 역시 좋을 수가 있고 하여튼 다 지 맘대로입니다.ㅎ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말하십니다. ‘ 니 맘대로 살아라.’고 합니다. 원래대로 지 맘대로 사는 게 인간이기 때문에, 지 맘대로 사는 인간이 성경 말씀 앞에 있다고 바짝 긴장해서 ‘말씀대로 살겠습니다.’ 주님이 웃습니다. 주께서 비웃으리로다. 니가 성경 만 독 천 독을해도 원래부터 지 본성이 달라지는 법이 없는 거예요. 원래 마음대로 사는 행세가 마음을 정갈하게 한다고 그 본색이 어디로 가겠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접근하느냐? 우리의 상식을 봅시다. 우리가 교회 다니는 상식은 뭐냐 하면, 우리 쪽에서는 십자가의 복음을 증거 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왜? 육으로 난 것은 육이기 때문에, 항상 육으로 난 것은 자기가 중심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접근할 수 없다. 그러면 이 시간 우리가 배운 게 뭐냐 하면, 저쪽에서 와야 된다. 그게 뭐냐, 십자가를 알려면, 성령이 와야 되고, 성령을 받게 되면 그때부터 육에 속한 사람과 영에 속한 사람이 갈라져서, 영에 속한 사람은 십자가 복음, 십자가 예수님의 피가 유일하게 우리의 구원의 능력이 되고, 우리의 모든 육적인 종교적인 행위는 결코 우리로 하여금 의인이 될 수 없고, 죄 용서가 될 수 있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그거잖아요. 그게 우리의 상식인데, 그것도 복음을 아는 사람의 상식이고, 그렇다면 성령이 왔을 때, 일어나는 현상은 뭐냐, 지식입니까? 아니면 흔히 세상교회에서 이야기하는 믿음에는 3가지 요소가 있다는 거예요. 지, 정, 의가 있다는 말은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이것은 성경에 있는 것이 아니고,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입니다. 인간의 영원 론에서 지, 정, 의, 인간의 지식과 감정과 의지가 뭉쳐져서 이것이 인간의 영혼을 구축한다. 이것은 옛날 기독교 이전에 인간의 이성에서 나왔던 이야기예요. 이걸 어거스틴이 전달해 보겠다고 접촉점을 만들어 보겠다고 성경에다 이걸(지, 정, 의) 집어넣는 거예요. 이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어거스틴이 사용한 거예요. 이걸 어거스틴도 사용하고 칼빈도 사용한 거예요. 이거는 안 되는 거예요. 왜, 지 정, 의 하필이면 세 갭니까? 왜 3입니까? 왜 4개는 안되는데? 3은 또 9에 약하죠. 지나 개나 다 3이라 해요. 삼위일체, 성부 성자 성령, 수증기 됐다, 물 됐다. 얼음 됐다. 이거 설명하고.... 그게 말이 되는 소립니까? 하여튼 부흥회 했다하면 숫자로 부흥회 다 끝내버려요. 목요일에 돈만 받아 챙기려 하고, 목요일 저녁이 하이라이트예요. 목요일에 잘 말을 해줘야 돈이 나오느냐, 자기 수고비 나오느냐 결정되는 거예요. 부흥회 할 때보다 마지막 목요일이 중요해요. 오늘이 목요일이네요.ㅎ 전부 다 거짓말 이예요. 지, 정, 의도 다 거짓말이고 인간이 생각이라 말이죠. 그럼 뭡니까? 성령이 오면, 우리를 죽여 버립니다. 지, 정, 의라고 알 것도 없이 여기 종이에다가 뭘 쓰느냐 하면 ‘하나님, 저는 지식으로는 열심히 복음을 받아들이고, 정으로서는 뜨거움과 사랑을 표현하고 의지로서는 전도하고 봉사하고 희생해서 진짜 온전한 믿음생활을 하겠습니다.’ 라고 하면, 성령께서는 찢어버립니다. 이게 성령의 역사예요. 이 따위 짓 하는 사람이 예수님 십자가에 죽였습니다. 이런 짓 한 사람이. 결국은 지, 정, 의를 했다는 것은 여전히 누가 누굴 소유하고 있다? 내가 나를 아주 멋있게 꾸며서 소유하고 있다. 그러면 한 번 봅시다. 지금부터는 너무나 어렵기 때문에, 책임 못 지겠습니다. 그냥 이야기 할 테니까 알아서 들으시기 바랍니다. 내(나1)가 나(나2)를 소유하게 되면, 여기 (나1)은 누구고 여기 (나2)는 누굽니까? 내 오른 손이 왼 손을 쥐면 쥐었다는 것을 왼 손이 느낍니까? 오른 손이 느낍니까? 이게 데카르트가 이것 때문에 고민한 거예요. 왜 내가 아는 나와, 내가 따로 있느냐 말이죠. 만약에 내 안에 내가 없으면, 내가 보이지 않고 누가 보여요? 남들만 보여요. 나는 원래 생겼으니까. 남들만 보여야 되는데, 내가 나를 생각한다는 자체가, 예를 들면, ‘나는 거짓말을 했다‘ 할 때, 내가 거짓말 한 것은 남은 못 알아채도 누가 알아채요? 내가 알아차리잖아요. 거짓말 알아채려면, 거짓말 안 한 상태의 내가 있어야 거짓말 한 상태의 나를 알게 아닙니까?ㅎ 그러니 왜 내가 2개가 되느냐 말이죠. 둘 중에 어느 것이 헛방이고 어느 것이 조작된 것이고, 어느 것이 이미지에 불과하고 어는 것이 진짜 난가? 조사를 해 봅시다. 둘 다 가짜예요. 그러면 가짜란 말은, 가짜가 없어야 된다는 말이냐? 아니죠. 가짜기 때문에 늘 따라다니고 있는 겁니다. 결국은 뭐냐 하면 우리가 가짜란 말은, 애초부터 가짜였고 진짜라 하는 것은 가짜에서 절대로 진짜가 나온다? 안 나온다? 절대로 안 나오는 거예요. 그러면 문제 해결 여기서 끝나는 게 아니에요. 누가 나를 내가 가짜라고 나에게 알려준 ‘너는 가짜야’ 라고 하는 그 나는 도대체 누구냐 말이죠.ㅎ 정신병자가 자기를 정신병자라고 봤습니까? 안 봤죠. 지는 정상인데, 남들이 그러잖아요. 내가 보기에 ‘나는 거짓말 했어’ 라고 거짓말이라 지적하는 그 말은 거짓말이 아니잖아요. 그렇잖아요. 맞죠, 학생! 지가 거짓말 한 것을 지적한 것은 거짓말이고, 거짓말이라고 지적할 정도로 거짓말이 아닌 나는 뭐냐 말예요. 그럼 내 안에 지킬과 하이드 두 마리 다 있습니까? 천사, 악마 다 있는 거예요? 이게 바로 뭐냐 하면, 모든 ‘자기중심성’이라 하는 것은 이걸 가지고 한 마디로 ‘혼돈’입니다. 이걸 ‘안개’라 해요. 인간은 늘 가짜죠. 아! 생각난다. 몇 년도죠. 동원교회에서 욥기 강의할 때, 저도 다 잊어버렸는데 파일 올려 주시니까(박 온정 집사님) 알죠. ‘나는 늘 가짜다.‘ 라는 제목이죠? 욥 경우에는 그게 돼요. 왜냐하면 누가 왔어요? 하나님이 찾아 왔어요. 하나님이 계시가 찾아오니까 극렬하게 반대하죠. ’너는 가짜다‘ 할 때, 욥이 하는 말이 ’가짜이면 애초에 태어나지 말았어야 되는데, 왜 가짜로 태어나게 합니까?‘ 라는 다툼이었어요. ’너는 가짜야.‘ ’가짜라면 왜 힘들게 말아야지 애초부터 태어나지 말아야지, 왜 태어나게 하십니까? 그 태어난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떳떳하게 태어나면 모르지만, 아무 이유 없이 고난 받고 사라질 존재라면 왜 태어났습니까?‘라는 다툼을 하다가 결국에는 하나님: 니가 벌판에 비오는 이유를 아느냐? 욥: 모르겠습니다. 하나님: 노루가 니와 상관없는 산에 있는 짐승이 새끼 낳은 것을 봤느냐? 욥: 안 봤습니다. 하나님: 니는 너 스스로 왜 태어나는가를 몰라야 되는 존재이니라.
하실 때 입을 탁 막아버리고 ‘주여 제가 잘못했습니다.’ 내가 질문을 한 게 잘못이었습니다. 질문을 하는 자체가 내 안에 ‘내 중심 성’이 여전히 가동되고 작동되고 엔진이 가동되고 있는 거예요. 사람의 모든 괴로움은 질문 하는데 있어요. 질문!!! 주여 누구십니까? 전부 다 사람은 입만 떼면 자기 관심사가 뚝 튀어 나오거든요.ㅎ 그러면 주께서 받아서 찢어버려요. ‘어떻게 하면 구원 받습니까?’ 편지 오면 편지 찢어버립니다. 주께서는 매일 다 우리가 보내는 모든 것을 다 쓰레기통에 다 넣어 버려요. 우리가 기도 해봐야 주님께서는 ‘아휴~~!!’ 탄식하십니다. ‘이것도 기도라고, 이것도 기도꼬라지라고 뒤에 예수님만 갖다 주문 갖다 붙이면 되는 줄 알지, 누가 가르쳤나 이거. 이것도 기도라고. 탄식하신 분이 누구십니까? 로마서 8장에 보면 누가 탄식해요? 성령께서 탄식하시면서 ’이것도 기도라고.‘ 인간은 빌 바도 몰라요. 뭘 기도해야 될 지 빌 바도 몰라요. 그래서 성령께서 대신 기도해 주시잖아요. 그래서 우리는 그 기도 덕분에 아신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자를 영광스럽게 하는 모든 작업에 우리는 전혀 관여 되거나 개입하지 못하고 누가 다 해주십니까? 우리를 기도해 주시는 성령님의 기도 응답에 나중에 천국 가보니까, 모든 것이 성부 성자 성령께서 다 하신 자기 작업이었습니다. 그 전체를 ’언약적인 관계’ 라고 합니다. 자, 이야기 계속 해 봅시다. 어떻게 한다고요?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권력을 집어넣을 때는 어디다 집어넣습니까? 우리로 하여금 ‘죽음’ 속으로 집어넣어요. 죽음 속에 집어넣으면 어떤 일이 좋은가 하면, ‘죽은 자는 두 번 다시 죽지 않는다.’ 요한계시록 20장. 그러나 살은 자는 영원히 죽어야 돼요. 그래서 남한테 죽임을 당하면 새 언약인데, 자기가 남을 죽이면 문제가 돼요. 왜? 자기가 남을 죽여 버리면, 누가 죽은 자고 누가 산 자예요? 죽인 자는 살아있고 죽임을 당한 자는 죽어버렸기 때문에 죽은 사람은 어느 세계에 들어갑니까? Plate에서 어느 세계에 들어가요? 맨틀로 들어가서 비너스 세상의 모든 것은 다 헛방이고, 진짜 싸움은 이 영적 싸움의 시작이라는 것을 아는데, 부자 같은 경우에는 알아도 소용없지만, 아는 순간 어디 가 있습니까? 지옥에 가 있죠. 하여튼 영적 세계를 아는데, 아직도 아무것도 모르고 깝작대는 것은, 아직까지 본인은 자기 몸이 살아있는 몸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아~~무 것도 모르죠. 내막에 대해서. 이 세상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다는 말은 아무 것도 모른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 아니고, 안다고 하는 것이 주인공이 누구예요? 본인을 주인공 삼아서 기껏 안다는 거예요. 그래서 아까 게슈탈트 심리학 했죠? 자기가 그때, 그때마다 관심사가 달라요. 물 좋아하면 초코파이가 안 보이고 초코파이 좋아하면 물이 안 보이고.... 그래 되는 겁니다. 저도 옛날에 교사 해봐서 좀 아는데요. 담임을 해보면 교사할 때 담임할 때 싫어요. 강의 하는 게 힘든 게 아닙니다. 부모도 포기한 애를 내가 왜 맡아야 되는데? 그것도 어린 애도 아니고 17살 18살 가까이 된 그 애들, ‘아비가 뭔데요?’ 아비 뜻도 모르는 그 반항아들을 왜 교사가 월급 받는다는 이름하에 그걸 왜 맡아야 되는데? 그냥 강의하고 손 탁탁 털고 가는 게 아니고 관리를 해야 되니, 인간인지라 집에 문제가 있으면, 화가 났다 싶으면 그날 애들은 죽는 날 이예요. 괜히 안 가던 화장실 뒤에 가서 담배 피우는 애들 불러서 패고, 팰 때는 매를 아끼면 자식 사랑이 아니라 하고, 집안에 좋은 일 있으면, 화장실 뒤에 안 가고 산소에 가고. 이게 뭐냐 하면 사람은 기분 따라 살아요. 누구 기분? 누구 컨디션? 내 몸 컨디션 이예요. 몸 아파 보세요. 몸 아프면 성령이고 온유고 화평이고 자비고간에 세상 다 귀찮아요. 그런데 갑자기 목돈 생겨 보세요. 자랑하고 싶어가지고 교회 제일 먼저 앞자리 나오고 기도하고 점심 한턱내고 이리 하죠. 그런데 집안에 안 좋은 일 있으면 삐져서 교회도 안 나오죠. 아휴!! 삐지는 거~~! 삐지는 것도 한 두 번이지 이력이 나서 교인들이 삐지는 데도 이제 단련이.... 죽음의 힘(맨틀) 안에서 비로소 모든 것은 다 까발려집니다. 그래서 죽은 자만이 길을 볼 수 있게 하신 자가 누구냐 하면 바로 엘리야, 모세, 예레미야, 에스겔, 그리고 사도바울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사도바울이 갈라디아 2장에서 말한 것처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나는 이미 주 안에서 죽은 자가 돼요. 그래서 갈라디아 6장14절에 보면, 우리는 십자가 안에서 이미 세상 보기에 죽은 자요. 세상에 대하여 주 안에서는 산자라‘ 해서 착한 사람, 나쁜 사람 가려지는 게 아니고, 이미 죽은 자와 산자라고 우기는 사람들의 구분이 사도바울이 해석한 신학의 마지막 결론 이예요. 죽음 안에 들어가 보면, 비로소 죽음 안에, 물에 잠수하는 거예요. 물에 잠수할 때 물에 자라는 식물이 꽃은 화려하게 피었지만, 뿌리는 안 보이잖아요. 물속에 잠수할 때는 밖에서 보면 안 보입니다. 같이 죽어야 돼요. 죽으면 죽음 안에서 객체가 다 드러나는 겁니다. 죽음 안에서!!!!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죽는가? 성령께서 십자가의 능력으로 날마다 죽이죠. 그래서 고린도후서 4장에 보면 뭐랍니까? 한번 봅시다. 여러분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누가 읽어 보세요. 4장 10절에서 11절,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이미 자기 육체를 무슨 육체로 봅니까? 그냥 육체라 하지 않고, 무슨 육체? 죽을 육체죠. 죽을 육체 속에, 이미 자기는 죽을 육체를 갖고 있기 때문에 거기서 뭐가 팍팍 나와요? 죽음만 나와요. 그런데 예수그리스도께서 죽을 육체에서 죽음이 나오는 능력이 주님이 살아있다는 증거가 된다 말이죠. ‘나는 죽어도 마땅합니다.’ 라는 고백이 인간의 힘으로 된다. 안 된다? 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가 안에 들어온 사람만, ‘내가 들어앉았으니까 니는 나가!!’ 하고 발길로 차는 겁니다.ㅎㅎ 내 생명이 들어올 자리에 주님이 발로 차 버리면 내가 튀어 나오면서 하는 소리가 뭡니까? ‘나는 죽을 육체 맞습니다.’ 라고 고백하는 겁니다. 그렇지 않고 여전히 산 자라고, 산 자이기를 고집한다면, 히브리서 2장에 보면, 죽기를 무서워하게 되죠. 살기를 고집하기 때문에 죽는 것을 무서워하죠. 죽는 것을 무서워한다는 말은 이 뿌리가 어떤, 어떤 바탕위에서 뿌리가 자란다는 것을 모르고, 다만 뿌리 위에 있는 열매만 보면서 ‘살아야 돼. 살아야 돼. 살아야 돼.’라는 거예요. 어떻게 해서 내가 왜 살아야 되는 지를 이유를 물을 생각을 않는 거예요. 왜? 뭐를 모릅니까? 내 뿌리가 어떻게 썩었는지를 모르니까 ‘무조건 살아야 돼. 살아남는 게 성공이야.’ 우리 십자가마을에 어떤 분이 무엇이 성공이냐고 물어요. 고 관규라고 물어요.ㅎ '살아야 돼.‘라는 하는 주장이 실패고, ’죽어도 좋아.‘ 가 돼야 해요. ’죽어도 좋아‘라고 해야 하는데, ;할 수 있나, 죽어야지,’ 이건 아니에요. 아!! 죽는 날이 구원의 날이거든요. ‘죽는 것이 기쁘다.‘ 돼야지, ’할 수 없지 뭐.‘ 이래 돼 버리면 이건 늙어 죽는 거와 똑같아요. 그러니까 이건 뭐냐, 왜, 나는 살고자 하느냐? 육신 자체가 이미 썩을 육체기 때문에 마귀가 그렇게 장난친다고 우리를 힘들게 하는 거예요. 우리는 성령이 오게 되면, 우리가 살아야 한다는 육신의 관심점이 뭐로 바뀌겠습니까? ’너는 이미 죽은 존재야. 너는 이미 죽었고, 살아서 믿는 자도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이미 믿고 죽은 자는 영원히 살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 주님의 관심사는 살고 죽는데 있는 게 아니고, 살리는 것도 죽이는 것도 누가 작용하신다? 언약의 주인공 되신 예수님이 작용하는 것을, 그런 관계인 것을 ’니가 인정하라‘ 이 말입니다. 오빠가 죽었다. 죽었다는 것을 가지고 왜 자꾸 거기다가 신경을 쓰느냐 말이죠. 오빠 죽었다는 데 신경을 쓴다는 말을 예수님은 오빠에다 관심을 보지 않고 오빠를 대체한 자기 자신의 신세를 오빠 죽음과 견주어서 보는 자기가 자기 단도리 하는 자기 걱정을 하는 그 두 자매를 보고 이야기 하는 거예요. 그런데 오빠는 참 좋은 오빠죠. 휴가 중인 오빠를, 말년 휴가 맡아서 쉬고 있는데, 다시 군대 오라고 나흘 만에 그것도 준비도 없이 칭칭 감긴 채로, 머리를 긁으며, ‘이거 좋던데.’하며 기어 나오잖아요.ㅎ 누구 때문에? 철없는 두 자매 때문에. 여 동생 둘 데리고 오라 해서 보여 줬죠. 그래서 살다가 오빠는 또 죽었어요. 그래서 군대생활 두 번 한 사람 이예요.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 지금 돌아가신 할아버지나 부모님 보고 싶습니까? 그러면 주께서 다시 불러내면 누가 화내겠어요? 부모님이 화내십니다. 아마 뺨 때릴 거예요. ‘왜 불러 다 니 때문이야. 니가 불러냈잖아.‘ 자기가 살아있는 걸 중심으로 보니까 살아있는 내가 믿을 수 있는 증거를 확보해 달라는 식이예요. 그러나 우리는 맨틀위에 있는 Plate이기 때문에, 우리가 움직인다는 사실을 알아야 돼요. 우리가 어디로 움직입니까? 죽을 육체를 갖고 있기 때문에 어디로 가고 있어요? 우리는 컨베이어 벨트에 실려서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결국은 한 번 태어난 것은,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결국은 정한 코스대로, 정한 코스를 두자로 하면 뭐 게요? 정한코스=언약 다른 말로 하면, 우리가 의도하지 않은 창세전의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약속대로 움직여요. 약속대로 분류작업 되는 겁니다. 양과 염소로, 어린양의 인 맞은 사람과 마귀의 인 맞은 사람, 그러니까 우리가 ’나는 저 도장이 좋아요.‘ 할 권한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다는 게 요한계시록의 핵심 이예요. 너는 맨틀이 움직이는 대로 그냥 떠다닐 뿐이지, 위에 있는 판때기(plate)가 맨틀 보고 ‘어이, 스톱해, 정지해, 너무 속도 빨라,’라고 지시할 수 있는 권한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도는 결국 하나밖에 없어요. ‘주여, 우리가 무엇을 위해서 기도해야 됩니까?’라 묻는 기도 외에는 다른 기도는 필요 없습니다. 그 말은 뭐냐 하면,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왜? 뭐든지 누구 중심이기 때문에? 내 중심이기 때문에. 그 뒤에 나오는 응답은 하나밖에 없어요. ’모든 것이 주의 뜻대로 되게 하옵소서.‘ 가 아닙니다. ’뜻대로 하옵소서.’ 하는 것은 찬송가 407장인가 그거고, ‘뜻대로 될 겁니다. 뜻대로 되질 겁니다.‘ 하지만 그 과정, 과정을 통해서 놓치지 말고 찬양과 감사와 영광을 주께 돌리게 하옵소서. 나중에 가서 할 영광을 미리 앞당겨서 하게 하옵소서. 그것이 바로 우리로 하여금 자아를 죽음에 집어넣을 때 나올 수 있는 현상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 시점에서 결론을 내린다면, 하나님의 모든 성경 말씀은 성령에 의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데, 이 성경 말씀 하나, 하나가 우리로 하여금 ‘너 좀 죽어줘, 너, 니 구원에 개입하지 마! 뭐 기도, 금식, 봉사, 헌금, 전도 했다고 그게 너한테 효과 본다고 절대로 그런 생각하지 마, 니가 그거 해봐야 너는 니 중심으로, 니 몫으로 니만 챙길 수 없는 존재야.’ 행운, 축복, 이거 다 누가 만들은 거예요? 자기 중심 성이 있으면, 축복, 누가 조작한 축복 이예요? 내가 평소에 원했던 ‘결핍’을 채우기 위한 그러한 축복이 되는 겁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인 맞은, 12X12X1.000 이라는 것은, 1,2,3.4.5.6.7.8.910,11,12, 이 12개가 1에서 새끼 쳐서 1,2,3.4.5.6.7.8.910,11,12,이나오고,2에서 1,2,3.4.5.6.7.8.910,11,12가 나오고, 3에서 1,2,3.4.5.6.7.8.910,11,12.....이것이 곱하기니까, 1000번을 하는 거예요. 그러면 이 숫자가 144.000이 아니겠죠? ㅎ 엄청나잖아요. 그런데 여기 1000이나 12 이 모든 것이 뭐냐 하면, 우리를 죽여 놓고 하는 일이거든요. 우리를 죽여 놓고 누가 하십니까? 주님께서 혼자 계획 다 잡아놓고 그 일을 우리한테 시키는 것이 아니고, 누구한테 시킵니까? 천사한테 시키죠. 천사가 하나님의 인을 맞는데 하나님이 인을 맞는 사람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솟아오르게 하기 위해서 전 세계 네 모퉁이를 딱 잡고 있죠. 바람이 불지 못하게 딱 잡고 있어요. 딱 잡고 있으면 결국 잡힌 채 위로 솟아오르는 것처럼 ‘우리는 못했지만 주님께서는 해내시네요.‘라는 감탄사!!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다. ’오! 내가 솟아올라, 내가 인 맞았어. 어찌 이런 현상이, 이건 기적이야.‘ 스스로 소스라치게 놀라는 거예요. ’내가 어떻게 구원받아. 내가 뭘 했다고, 내가 예수를 믿었기 때문에 구원 받은 건 아니야, 왜, 내가 예수 믿었다는 것은 결국은 누구의 공로 내 공로로 옵니까? 내 중심 성이 유지되기 때문에, 그 믿음은 가짜거든요. ‘그래서 내가 믿어서 된 건 아니야. 주께서 어떻게 하신 거야. 주께서 어떻게 하신 것은 모르지만 어떻게 하셨어. 그래서 이리 된 거야.’ 누가 하셨느냐? 죽임을 당한 어린양 되시는 분이 다 하셨어.‘라고 고백할 때, 여기에 새로운 언약 적 용어가 투입되는 거예요. 그걸 뭐라 하느냐 하면 ’믿음‘이라 하고 그걸 ’소망‘이라 하고, 그걸 ’사랑‘이라 하고, 여기에 추가로 주먹이 들어가면 안 되죠. 믿음 소망 사랑 주먹은 소망교회가 하는 말이고,ㅎ 믿음 소망 사랑은 우리가 해내는 것이 아니고, 결과에 대한 언약적인 상표, 브랜드를 붙여야 돼요. 샤넬, 등 명품처럼 명품에 붙이듯이 명품 값 믿음 소망 사랑, 이걸 전부 다 선물로 주어지는 거예요. 선물로 주어지는 것을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뭐라 하느냐 하면, 두 자로 ’은사‘라고 해요. 믿음 소망 사랑이 은사인데 그 중에서 사랑은 사랑한 주체를 보여주기 때문에, 우리가 사랑한 것이 아니고, 주께서 먼저 사랑했기 때문에, 사랑의 주체가 예수님이기 때문에 믿음 소망 사랑,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믿음 소망이 어디서 발생된 것이다? 예수님(사랑)에게서 나온 믿음과 소망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공생애 하시면서 본인이 가졌던 믿음 소망 사랑을 사랑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선물로 분배해서 나눠주는 그것이 우리에게 믿음 소망 은사로 주어졌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런 은사를 받은 사람은 자기 유익을 구치하지 아니하고 무례히 행치 아니하고 온유하고 자기 이름을 자랑하지 아니하고, 오직 진리와 함께 참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견딥시다.‘가 아닙니다. 견딥시다. 가 돼 버리면 다시 중심 성이 누가 들어갑니까? 이미 결과를 두고 이야기 하는데, 여기에 ’합시다‘ 로 나온다는 것은 결과가 미완료가 된 상태이기 때문에 말이 안돼요. ’합시다.‘가 아니라 ’그렇게 되고야 맙니다.’라고 우리는 고백할 뿐입니다. 시편37편10절을 봅시다. 수요일에 본 건데요. 여기에 “잠시 후에 악인이 없어지리니 네가 그곳을 자세히 살필지라도 없으리로다” 이 구절 여러분 기억나시는 분 계실 거예요. 이 악인이 왜 없어집니까? 우리가 처리한 거예요? 누가 처리하시는 분이 따로 있습니까? 주님이 악인을 처리했죠? 그렇잖아요? 그러면 왜 우리가 악인에 대해서 걱정을 그렇게 합니까? 왜 악인 때문에 답답해합니까? 내 손으로 처리해야 뭐가 속 시원하십니까? 그걸 축복으로 여기십니까? 이 본문의 해석은 바로 우리 자신도 악인에 해당되는 것을 인정할 때만 이 본문이 해석돼요. 더 쉽게 이야기해서 내가 내 악을 내 손으로 처리가 된다, 안 된다? 안 됩니다. 오늘의 복음입니다.ㅎ 내 악을 내 손으로 처리가 안 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절로 갈까요? 은사, 선물을 받은 사람은 내가 내 손으로 악을 처리를 안 해도 상관없죠. 왜? 돋보이게 하기 때문에, 저런 악인도 어린양의 피로써 오똑 하나님께 구원 받았단다.‘라고 하나님의 자기 작품에 대한 하나님의 찬사들이죠. 우리 귀에 쟁쟁... ’얼마나 이쁘냐? 보석 같으냐?‘ 우리는 부끄러워가지고 얼른 면류관을 벗어서 얼른 던져버리죠. 우리는 부끄러워하는데, ’얼마나 이쁘냐‘하는 거예요. 꼭 아버지가 자기 친구 왔을 때, 자식 자랑하는 것처럼, 있는데고 자식 자랑하는. ’쟤가 저래 봐도 얼마나 공부를 잘 하는지, 요번에 100점이야, 100점. 그러면 자식은 부끄러워 얼굴을 가리죠. ‘어이구, 공부 잘하네, ’수능 100점!ㅎ 얼마나 기특한지, 500점 만점에,ㅎ옛날에는 20점이었는데, 100점, 제가 고등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시험을 치르게 했는데, 믿기지 않는 점수가 나왔어요. 우리 학교에 400점 만점에 40점, 확률을 믿었는데 확률도 안 돼, 이건 간증입니다. 놀랐어요. 이런 기적도 있구나, 어떻게 답을 피해 가는지,ㅎ 그게 살아있을 때는 주체가 되는데 이미 죽은 자에게는 그것도 하나의 역할, 기능이 되는 거예요. 수학이 안 되는데 어찌 수학이 되겠어요? 하나의 기능, 그러한 기능을 한탄스러워하지 말고, 낙담하지 말고, 이런 기능도 주께서 주신 기능인 것을 인정한다면 돋보이게 되는 겁니다. 사방의 이 세상에서 우뚝 솟게 돼요. 공부 안 해도 되니까 좋죠? ‘엄마, 나 백수가 은사 같애.’ㅎ 이러면... 모든 인간의 은사가 백수입니다. 사람은 돈만 있으면 놀로 싶어 해요. 지 혼자 하는 게 아니고 그런데 재수 없어서 일하고 있지, 돈 있으면 누가 골프 안치고 싶고 누가 일하고 싶겠어요? 놀 돈이 없어서 그렇죠. 자 그러면 여기서 한 번 봅시다. 12X12X 1000,에서 요 X에 들어가는 요게 ‘죽음’이라는 거예요. 아브람에서 아브라함 될 때에 뭐가 개입 됐어요? 죽음이 개입됐죠? 야곱이 이스라엘 될 때에 뭐가 개입 됐습니까? 죽음이 개입되었어요. 브니엘이 뭡니까? 내가 죽어야 될 인간이 하나님 복 받아서 내가 이스라엘로, ‘후휴, 큰 날 뻔했다. 살았다.’ 이 지역 이름이 브니엘 이에요. 부산에 있는 고등학교 이름이 아니고, 브니엘은 나는 하나님을 봤는데 죽어야 될 듯이 살았다는 거예요. 그럼 이 죽음은 스스로 죽음이 아니고 누구와 맞닥뜨림에서 오는 죽음입니까? 하나님의 맞닥뜨림에서 죽음을 경험하게 되죠. 결국은 인간이 아무리 애써도 진짜 죽음을 맛볼 수 있다? 없다? 맛 못 봐요. 진짜 죽음은 오직 하나님이 가져다주는 죽음만이 우리가 진짜 죽음이고, 그 안에 들어갈 때 우리는 영적 세계가 눈에 보입니다. 그 죽음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죽음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밖에 없어요. 다른 죽음은 개죽음입니다. 베드로가 ‘제가 죽어서 따라가겠습니다.’ 했는데 ‘니는 죽어도 나한테 못 따라와’ 죽어도 못 가는 곳에 우리는 가잖아요? 그러면 그 가운데서 뭘 경험해야 합니까? 베드로가 죽어도 못 가는 곳에 우리가 예수 믿음으로 간다는 말은, 그 과정에서 우리는 우리 죽음을 경험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죽음, 그걸 예수님의 ‘피’라고 하는데, 그 피가 무슨 피냐 하면, 하나님, 성부와 성자가 창세전에 약속한 ‘언약의 피’가 오게 되면, 우리는 언약의 피 안에서 우리는 아무도 예수를 경험할 수 없는 진짜 진정한 저주, 진정한 죽음을 이미 맛본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안에서 우리는 처음 날 때부터 의인은 없고 죄인으로 태어났음을 비로소 만끽하죠. 뭘 해도 ‘우리는 죄인이다‘라는 데서 오는 그 진리를 알게 된 그 희열과 기쁨이 생기게 되죠. 아! 내가 남하고 비교할 게 안 되는구나, 왜? 둘 다 죽은 자기 때문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빛이 있을 때는 사람이 각각 옷 색깔과 개성이 다르잖아요. 그런데 정전되어 깜깜해지면, 깜깜했을 때 상대방의 옷을 만진다든지 머리카락을 만졌을 때, 느끼는 감각은 내가 빛이 있을 때 봤던 감각과는 다른 새로운 낯선 느낌이 와요. 사람이 서로 ‘당신 살아있죠?’ ‘예’ 살아있네, ‘나도 눈으로 보니 살아있네.’ ‘우리 에브리바디 살아있습니다.’ 이런 때는 서로 살아있어서 서로 배려해 주고 존경해주지만 모두 다 지옥 가서 깜깜하다고 할 때는, 내가 예상 못한 다른 느낌, 새로운 느낌이 오는 거예요. ‘아, 니나 나나 개나 소나, 별 차이 없구나. 새로운 느낌이 와요. 이명박 정동영이가 부러운 것이 아니고, 떨어진 정동영이가 부끄러운 게 아니고, 떨어진 나나, 성공한 나나,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나 높은 자리 앉은 사람이나 떨어진 사람이나 어떤 사람도 별개 없다. 라는 거. 새로운 낯선 힘이 오는데 그게 뭐냐 ’죽음의 힘‘이라는 겁니다. 죽음의 힘으로 상대방을 보시기 바랍니다. 아내나 남편이나 아들이나 자식이나 죽음의 힘으로 보시게 되면, ’아이구, 인간아, 불쌍하다.‘ 이래 되죠. 막달라 마리아가 주의 발을 씻고 있는데, 바리새인들이 ‘아, 니 안다. 니 창녀잖아.’ 하면, 막달라 마리아는 ‘인간아, 인간아, 니가 보기에 니는 살아있다고 보지만, 내가 주님입장에서 보니 니는 낯선 모습으로 보여.’ ‘니나 내나 똑 같은데, 니는 대접 받고 나는 이 사실을 안다는 것이고 니는 모른다는 차이’ 왜? 성령이 안 왔으니까, 주님의 사랑이 없으니까. 모르는 거예요. 사람이 낯선 죽음 안에서 낯선 게 오면 그 다음에 나오는 현상이 뭐냐 하면, 기죽지 않는다. 사람이 타인에게 기죽는 것은, 남한테 기죽는 것이 아니고 내가 나한테 기죽는 거예요. 내가 그 사람을 보는 순간 갑자기 내가 되고 싶은 부러운 하나의 이미지로서 하나의 모델로서 그 사람이 등장한 겁니다. 그 사람이 부럽다는 말은 사실은 질투심 이예요. ‘나는 그렇게 되고 싶은데, 니가 그걸 먼저 갖고 있구나.’ 그 사람에게 고개 숙이는 것이 아니고, 내가 간절히 되고 싶은 것, 그것이 그 사람에게 있다는 것 때문에 그 사람에게 고개 숙이고 존경하는 겁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습니까? 내가 되고 싶은 거. 마태복음 7장 봅시다. 거룩한 것을 뭐한테 주지마라? 개나 돼지에게 주지 말라 했죠? 그들은 그걸 어떻게 합니까? 거룩한 보석이나 진주를 어떻게 해요? 밟고 짓밟죠? 왜 짓밟습니까? 그 귀한 보석을. 그건 내가 평소에 되고 싶지 않은 것을 거룩한 이름으로 제공했기 때문에 ‘웃기네.’하고 있다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배척받고 미움 받은 겁니다. 복음 전하는 사람이 결국 오늘날 교회에서 그런 욕을 얻어먹는 거예요. 그들이 요구하는 걸 안 주고, 세상 것을 안 주고, 그들이 요구하지 않은 십자가 복음을 외치다 보니까 짓밟아 버리는 겁니다. 사실은 세상 사람들이 복음 전하는 사람을 그렇게 한다고 이야기 했죠? 하지만 따져 보세요. 우리가 매일 누구한테? 내가 나한테 핍박합니다. ‘예수가 니한테 밥 먹여주나? 예수가 밥 먹여 주나 하는 소리를 남이 하는 게 아니에요. 내가 나한테 하는 거예요. ’복음 안다고 교회 부흥 되느냐? 이게 부흥이냐? 소망교회가 부흥이지, 싸워도 좋겠다. 부흥되어서 싸워도 좋으니 수천 명되어 부흥이나 됐으면 좋겠다. 대통령 하나 나왔으면 좋겠다. 이게 뭐냐 하면 ‘예수 당신은 저리가라.’ 하는 그런 소리와 똑같은 거예요. ‘지겹다. 십자가 지겹다. 지겨워.’ 이거 남이 하는 소리가 아닙니다. 바로 내가 나한테 매일같이 그 소리 하는 거예요. ‘십자가 주지 말고 돈이나 좀 주지, 일지매보다 더 못해 새벽에 돈이나 떨거 주지 이게 뭐고, 홍길동이보다 더 못해.....홍길동이가 더 낫다 그래.’ㅎ 새벽기도 하고 나면 뭐가 나오던가요? 새벽 기도 하고 나서 눈 뜨면 앞에 현찰 봉투에 넣어주는지 보세요. 나중에는 봉투 들여다보고 ‘에개, 저번 보다 못하네,ㅎ 그게 뭐냐 하면, 모든 인간이 죄 있는 육신을 갖고 태어났기 때문에 자기중심성을 자의 적으로 포기가 안 됩니다. 포기가 안 되기 때문에 이 성경 말씀은 한 번 읽고 치울 말씀이 아니고 늘 매일같이 이 말씀을 총 동원해서 우리에게 ‘너의 시들시들한 죽어가는 이 육신이 도대체 뿌리가 어디에 박혀서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가? 그 뿌리를 보자 말이죠. 보니까 우리의 뿌리는 바로 우리가 스스로 뽑아낼 수 없는 강력한 악한 권세에 묶여서 악마의 얼굴 마담노릇을 한 거예요. 우리의 포주는 따로 있어요. 시키는 대로 해야 해요. 죽기를 무서워해서. 이래도 감사한 것은 이것을 지적을 하는 능력이 외부에서 왔다는 것이 반가운 거예요. 그렇게 지적하는 능력을 가지고 ’주님이 너와 동행하고 있다‘고 보는 거예요. 그래서 동행하게 되면 우리는 날마다 주님 앞에서 죄인으로 발각되고, 발각되는 그것이 왜냐하면 이것이 이미 영생을 받았기 때문에 이미 용서를 받았기 때문에, 예수그리스도의 공로만 높이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남들 보기에는 죄도 아닌 걸 가지고 죄라고 우기면서, 다 늙어가는 머리가 다 희어지는 이유들이죠. 몸이 후패해가는 이유들이란 말이죠. 사람이 아무리 착하고 싶어도 몸이 불편하면 다 귀찮듯이 그런 이유라 말이죠. 그런 이유 그런 허접스러운 껍데기 같은 몸을 악이란 몸을 짊어지고서 기어이 예수님이 ’이런 인간도 구원되게 했다.‘는 그것을 자랑하고 싶어 하는 것이 예수님이 참뜻입니다. ’너 같은 인간도 구원 되잖아. 봐라. 얼마나 내 능력이 대단하냐.‘ 이것이 하나님의 인이 박히는 거예요. 인이 박힌다는 것을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인이 박혔다는 말은 인은 도장이거든요. 도장이라 하는 것은 숫자 개념이거든요. 숫자 개념은 민수기에 나오지만 하나님께서 민수기에 숫자를 셀 때는 원하는 조각을 깎아내고 나머지, 그런데 우리는 깎아 낼 때, 우리는 깎아내는 것을 아까워서 어쩔 줄을 몰라요. 저거 우리 어머니, 어머니가 지옥가면 따라갈래, 왜 난 효자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깎아내는 이 공로를 감사해야 할 텐데, 내가 애지중지 하는 것을 왜 깎습니까? 라고 하는. 그 전에 주께서 오시기 전에, 나는 저런 것들로 뭉쳐서 내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가를 과시하면서 살아왔습니다.‘가 그 본성이 완전히 다 들통 나는 그런 순간, 순간을 보내게 됩니다. ’나 저거 없으면 자살하려고 했는데 저거마저 가져가시면서 깎아내는. 그런데 그 깎아 내면서 나오는 게 뭐냐 하면 인이죠. 인은 뭡니까? 도장이죠. 도장에는 누가 이름을 새깁니까? 마지막 하이라이트, 도장에는 반드시 누구이름!! 예수님 이름 예수 이름은 뭡니까? 기능 아닙니까? 바로 예수 이름으로 너가 내 작품이 되었다고 외치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너 이름으로 된 것은 깎아 내는 겁니다. 내가 내 약점을 가지고 우린 과시하지 않죠. 우리는 우리가 남한테 자랑한 만한 것들을 모아서 그걸 모아서 누구 명예? 내 이름의 명예, 누구의 영광? 내 이름의 영광을 위해서 했던 것을 다 깎아 내버리면 그 깎아내는 그 작업이 주님께서 다루셔서 이 작품, 이 못난 작품, 이 죄인 덩어리 자체가, 이 못난 자체가 ‘주님의 작품입니다. ‘라고 감히 오직 예수님만 자랑하게 되는 겁니다. 우리 가운데 누가 문벌 좋은 자가 누가 있으며, 강한 자가 누가 있느냐. 우리는 오직 교회라고 모였으면 누구만 자랑하자? 예수그리스도 십자가 피만 자랑하자. 이게 언약의 작품, 언약의 사람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되는 절차 속에서 하나님이 등장했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그걸 자기의 진짜 죽음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오늘날 십자가가 우리에게 올 때 십자가 죽으신 주님의 죽음이 실은 우리들이 죽어야 되는 진짜 죽음인 것을 우리는 수용했습니다. 우리가 사는 것은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는 의미를 우리는 요한계시록을 통해서 다시 깊이 있게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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