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교회110210요한계시록(상징어 해석)-9강b-(이 근호 목사) 제 9강b
두 번째 시간 시작합시다. 두 번째 시간은 그 사건들이 어떻게 상징으로 뭉쳐지느냐 그 과정을 설명할게요. 사건들의 뭉치가 여러 가지 예수님이 일으킨 사건들이 있잖아요. 예수님이 물위를 걸으시고 또는 베드로는 재밌죠. 베드로가 물위를 걸은 것이 자기 능력이 아닙니다.
베드로가 물위를 걸은 것은 자기는 땅위인줄 알았어요. 물인지 땅인지 구분도 못하고 누구만 쳐다봤습니까? 예수님만 쳐다보니까, 예수님만 쳐다본다는 자체가 중요하지 내가 지금 땅에 있느냐, 물에 있느냐는 의미 없거든요. 그런데 순간 바람이 부니까 폭풍이 부니까 폭풍에 대해서 내가 어떻게 대처하지? 폭풍에 대해서? 내가 어떻게 대처하지? 하고 눈 꼬리를 자기에게 보는 순간,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지? 바닥을 보는 순간 풍덩 빠진 거예요.
이것은 예수님이 일으킨 기적은 내가 나를 쳐다보고 있는 이상은 절대로 일치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내가 끄집어내는 어떤 고상하고 대단한 기적도 내가 나를 쳐다보는 이상은 그런 기적은 주님께서 일으키지 않는 기적입니다. 주님의 기적은 얼마나 대단하고 요란스러우냐가 아니라 어떻든 내가 나를 안쳐다보는 순간이 있느냐, 그게 기적 이예요. 모든 인간은 자기만 쳐다보도록 살게 돼 있는데, ‘내가 미쳤지, 내가 왜 내 몸을 안 쳐다봐, 내가 주님을 바보같이 쳐다봤을까,’라는 그 짧은 순간이 기적의 순간 이예요. 고거 한 2초갑니다. 고거 후딱 지나가버려요. 고 순간 자기 몸을 통해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사건, 그 사건은 역사적, 문법적 사건으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그건 우발적인 사건이 되기 때문에 그런 것을 상징, 요한계시록을 상징으로 묘사하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요한계시록 언어를 읽으면 이걸 전부 뭐로 번역한다 했습니까? 역사적 문법적으로 다 번역하는데, 왜 번역합니까? 우리가 이것을 고대로 실천에 옮기려고 그런 시도를 하는 거예요. 요한계시록뿐만 아니고 모든 성경책이 다 그래요. 사실은 다 상징 이예요. 성경은 역사적, 문법적으로 해석하면 안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역사적 문법적으로 해석한다는 것은 뭐를 쳐다본다? 여전히 나 자신이 이것 지켜서, 그 다음에 어떤 반대급부가 나한테 축복이란 이름으로 들어오느냐를 내다보고 하기 때문에 이것은 자기 일이 아니고 주의 일이죠.
성경에서 말하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7장 12절 봅시다. “경배하여 가로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능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찌로다 아멘” 할 때 여기에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능력과 힘” 이라는 용어 하나, 하나가 자기를 쳐다보지 않을 경우에만 나오는 용어들입니다. 이것을 그대로 실천에 옮기려고 한 순간 이 용어는 실천되지 않습니다. 자기를 잊어버렸을 때, 나는 어느 정도 레벨이며 내가 어느 정도 수준의 인간인가를 그걸 몰라요. 그저 눈앞에 뭐만 보이느냐 하면, 어린양만 보일 때.
나는 죽어 마땅하고 대신 모든 것을 처리하신 그 어린양이 너무 고마울 때, 너무 즐거울 때, 그러한 자태가 남들에게 그대로 비취는 것이 바로 능력이고 감사고 경배가 되는 거예요. 이것이 어떻게 인간의 육의 힘으로 이게 가당치 않죠. 그러면 그렇게 사건을 일으키면 그 사람은 누구 소속이 되겠습니까? 그 사람은 그 순간만이 아니고 늘 그렇겠지만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자기를 위해 죽으셨다 사신 예수님을 위해 사는 사람이겠죠. 소속이 나는 더 이상 내 소속이라는 것이 날아가 버립니다. 그래서 누구하고 비교해도 ‘나는 이렇다’고 안 나오고 ‘우리 주님은 이렇다’고 이야기 하겠죠. 주님은 그렇다는 것이 결국은 대신 죽으심의 사건을 가지고 우리를 구원했다 이렇게 되죠. 대신 죽으심!! 그냥 구원했다 하면 증거가 십자가로 안 모아지잖아요.
제가 전에도 이야기 했지만 성경 구절 전체가 뭐로 이어져 해석해야 된다고 했습니까? 십자가로 이어져야 돼요. 이거 하는 작업을 아무도 안 하고 있어요. 못하고 있어요. 십자가 마을에서 목사님들이 다른 데 신경 쓰지 말고 여기에 신경 써야 해요. 아가 서를 통해서 사무엘상하를 통해서 역대기를 통해서 디모데 전 후서를 통해서 어떻게 하면 성경 하나, 하나가 어떻게 십자가와 연결되어서 오직, 왜, 구원의 능력이 십자가에만 있는지, 그리고 이것이 인간의 지혜로서는 알 수 없는 것인지, 왜, 인간에게는 어리석게 보이는 숨어있는 비밀이어야 하는지, 그리고 이것이 육으로는 알 수 없고 영이 와야만 알 수 있는지 모든 성경 구절이 다 그렇게 돼야 되겠죠.
잠시 요 하는 방법을 제가 힌트를 말씀드리면, 인간들이 이렇게 있잖아요. 인간들에게 먼저 하나님 쪽에서 뭔가 주어져요. 그 주어진 것이 언약입니다. 언약이 주어지게 되면, 언약은 어제 수요일에 이야기 한 것처럼, ‘강한 손과 편 팔’로 오죠. 언약이 내장 돼 있어요. 언약이 강한 손과 편 팔이 오게 되면, 이것은 인간이 언약을 붙든 것이 아니고, 무엇이 붙든다? 포크레인 같은 언약이 인간을 붙들 때, 그걸 강한 손과 편 팔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은 그걸 붙들면서 속에 숨어있는 죄가 드디어 슬그머니 나오게 됩니다. 저 강한 손과 편 팔을 아예 내 것으로 챙겨서 내 것으로 만들어 버리면, 필요할 때마다 강한 손과 편 팔을 내가 소유한 것을 발휘하면 나는 얼마나 대단한 신앙 인 행세를 할 수 있겠나 하는 노림수가 있죠.
주신 것을 덮친 것을 내 것으로 전환 시킬 때, 그때는 뭐가 깨집니까? 언약이 깨어버리죠. 그러면 언약에 따라서 저주(멸망) 당하죠. 주님의 것이 주님의 우발적인 사건으로 나와야 할 텐데, 이 사건을 내 손에서 뭐로 전환 했습니까? 역사와 법으로 내가 언제든지 요 고비만 넘기면 그 능력은 그대로 계속해서 언제든지 되살아나는 그런 아이디어를 가지고 이 언약을 내 안의 언약으로 붙잡으려고 시작할 때, 이미 그것은 언약에 의해서 저주 받아야 대상이 되는 겁니다. 이걸 종교라 하죠. 종교 생활이라 하죠.
언약이 주어지면 우리 속에는 언약이 우리를 겨냥한 것처럼 이렇게 오해합니다. 지키면 축복이고 안 지키면 저주인줄 알죠. 그런데 언약은 누굴 겨냥했습니까? 우리를 겨냥한 것이 아니고, 우리를 투과해서 우리 속에 악마와 겨냥해서 준 율법이었습니다.
요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창세기 3장 15절, 여자의 후손과 싸우는 대상이 누굽니까? 뱀의 후손이죠. 뱀의 후손이라는 상징을 구성하기 위해서 우리 몸은 뱀의 후손이라는 것은 묵시적인(상징적인) 것이잖아요. 뱀의 후손이 2010년도에는 뱀의 후손이고, 2011년도에만 뱀이 후손이 아니고, 시대를 초월해서 뱀의 후손이잖아요. 우리가 아담 안에 있는 것처럼. 사람이 아무리 자식을 많이 나도 다 같이 아담 안에 있는 것처럼. 묵시적으로 하나의 동일 선상에 포함돼 있다 말이죠.
그렇다면 묵시라는 것을 사람들은 육을 통해서 뭐로 전환 시킵니까? 역사로 쫙 깔아버리는 거죠. 그러면 누굴 낳고, 누굴 낳고 누굴 낳고 이렇게 된 거예요? 조상숭배하고 아브라함은 우리 아비이고 우리는 아브라함 혈통이니까 우리는 죄의 종이 된 적이 없다고 요한복음 8장에 나오죠. 그런데 예수님은 뭐라 합니까? 아브라함이 너희 조상이 아니고 너희 아비는 누구다? 마귀다. 왜 그런 이야기를 하시는 거예요? 뭐를 겨냥한 거예요? ‘너희 아비는 마귀다.’ 라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너희는 마귀가 낳은 마귀의 새끼들이다.
그걸 가지고 저는 ‘물의 색깔’에서 인간들은 마귀의 피부요. 마귀의 살결이요. 마귀의 혓바닥이요. 마귀 혓바닥이 야고보서에 나오죠? 색깔의 실체가 물이다 말이죠. 악마가 울렁거릴 때마다 성질나오죠. 악마를 보고 겨냥하면 악마는 선악과를 따먹으라고 독촉했던 그 상대잖아요. 그러면 우리보고 어떻게 대처하라 합니까? 선악적으로 대처하라 하죠. 선악적으로 대처하는 게 뭐예요? ‘나는 악은 줄이고 선은 행했습니다.’라는 그것으로 대처하겠죠. 이게 바로 언약이 주어지면, 이렇게 나오는데 이걸 신명기 9장에는 목이 곧은 백성이다. 내가 너희에게 약속의 땅에 간 것은 너희들이 목이 곧은 백성이고, 너희들이 의롭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아브라함의 맹세로 인하여 들어가게 하신다. 이제는 아브라함의 맹세로 들어오고 언약이 오면 그들은 결국 멸망할 때까지 가나안 땅에서 그들은 맘껏 오해 속에서.
오해가 뭡니까? 언약은 우리가 지킨다 생각한 거예요. 하지만 언약은 스스로 지키는데 그것은 이사야에서 ‘하나님의 열심‘ 이라 했고 그 하나님이 열심에 주인노릇 할 건데 그가 바로 처녀의 몸에서 태어나신 임마누엘 되시는 분이예요. 그분의 원래 열심에 원수를 뽑아내는 숨어있는 주인공이었어요. 이렇게 하면 이사야의 모든 말씀을 가지고 이사야의 모든 말씀은 우리 속의 있는 죄(교만, 우상숭배)를 들추어내는 힘, 쓰레기 속에 보물이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 안에 보물이 있어서 온 게 아니고, 우리 자체가 안개고 쓰레기고 짐승보다 못하다는 것을 맘껏 들추어내는 그 능력이 축복 이예요. 그게 축복이요. 자비요. 사랑입니다.
사람이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그 순간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합니다. 고 몇 초 안 가지만, 그 순간 행복해요. 어떤 사람은 3초가는 사람도 있지만, 아이고, 너무 짧다 싶은데.ㅎ 내가 아무것도 아닌 순간, 우리는 순간 행복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다 날아가 버리죠. ‘난 니한테 지기 싫어.’ 이렇게 자기한테 눈 돌려버리면 무거운 쇠 덩어리가 자기한테 도달되죠.
모든 언약은 이처럼 인간을 인간 속에서 주어진 언약 안에서 해명하면서 결국 여기서 뭐가 드러납니까? 죄라는 죄는 죄다 다 드러나서 결국 이 죄가 벌(honey)이 있으면 벌이 흩어져 있는 게 아니고 벌이 날 때 한꺼번에 날죠. 말벌 같은 경우에. 한꺼번에 뭉쳐져서 어디를 쏘게 돼 있어요? 바로 예수님을 쏘는 거예요. 그러니까 선악과를 먹은 세력이 생명나무 자체를 공격하는 형식이 됩니다. 공격할 때 그때에 성령께서는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너희를 책망하시리라.
그 기준은 뭡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을 가지고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비로소 규정할 수 있는 겁니다. 인간은 죄다. 왜? 죄인이기 때문에. 그래서 인간은 죄를 지을 수가 없어요. 여러분! 인간이 죄를 지을 수 없다는 말을 이해해야 돼요. 인간은 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 이미 죄라고 규정지었기 때문에 뭘 해도, 설교해도 강의해도 기도해도 죄이기 때문에 새삼스럽게 죄를 지을 필요가 없어요. 그 규정을 어느 규정에서 합니까? 언약 적 규정에서 하는 거예요. 그것은 우리가 잘못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 속에 있는 그것이 창세기3장15절,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대결 구조아래 우리가 멋도 모르고 거기에 끌려들어가는 입장에서 졸지에 우리는 죽게 돼 있죠.
앗수르 군대가 185.000명 죽었죠? 그 대목 기억나십니까? 그 185.000명 인적 사랑 카드 한번 보세요. 다 자기 집에서는 효자고 자기 직장에서는 훌륭한 사람이고, 그 185.000명 아이 하나, 하나 병력 하나 하나 군사 하나, 하나 개인적인 가정환경 다 조사해보면, 다 나름대로의 존재가치가 있을 법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천사에 의해서 한꺼번에 앗수르 군대 다 죽었습니다. 그 사람들 왜 죽었습니까? 언약 때문에 죽었죠. 누구한테 대들다가? 하나님이 함께 있는 이스라엘에게 대들다가 왜 언약의 주인공에게 대드느냐는 이유 때문에, 각자 살아온 환경 다르고 과거 다르고 부모 얼굴 다 다르고 형제 다 다르고 사는 집 다 다르고 형편이 다 다른데 한날한시에 천사한테 다 죽었습니다.
그게 꼭 미래 모든 인류의 마지막 모습을 보는 것 같아요. 어떤 사람은 미국 살고 어떤 사람은 이태리 살고 어떤 사람은 아프리카 소말리아에서 해적질해도 죽기는 미국에 있는 대통령이나 해적질하는 해적이나 전부 다 언약 때문에 지옥 가야 되는 거예요. 검사나 의사나 판사 됐다고 동네에다 누구 집 합격 했다고 떠들썩했지만, 언약 앞에서는 그거는 처음부터 죄인이었고 그 죄인이 열심히 노력해서 판사 되기 위해 죄인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죽을 때 판사로서 지옥가게 되는 거예요. 지옥 가서 판사 노릇 하는 게 있는지 모르지만... 개인적인 차이를 없애버립니다. 일체 인정하지 않는 겁니다.
그게 왜 그러느냐? 그것을 지금부터 설명을 해드리겠습니다. 왜 사건이 상징적 언어에서 어떻게 되느냐 하면, 옛 ‘의미론 적 단위’로 단절돼야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렵죠? 하도 어렵게 해놓고 쉽게 한다 해서 들어보니 아무것도 아니라 하는데.ㅎ ‘의미론 적 단위’는 사람이 손을 못 대요. 단위는 센티미터, 키로 미터거든요. 요 단위는 분해하면 단위가 없어져요. 몇 평 몇 평 있잖아요? 33평, 34평, 그 평이 3.3제곱미터잖아요. 그런데 미터법 나오기 전에 평으로 할 때는 평을 또 나눕니까? ㅍ + ㅕ+ ㅇ 이렇게 나눕니까? 아니죠? 최소한의 분할되지 않은 단위죠?
주님께서는 사건을 사건으로 뭐를 하느냐 하면, 상징적 언어를 만드는데, 그 언어는 의미론 적 단위가 되는 거예요. 그 단위라 할 때 인간의 언어를 사용하죠. 언어를 사용할 때 단절, 분절이란 말이 어렵기 때문에 단절이란 말을 쓰는데, 이쪽과 이쪽을 단절 시키는데, 끊어서 단절. 여러분! 이번 설이 저한테는 인상적이었습니다만, 이번 설에 강정 드셨죠? 강정 만들 때 큰판에다 쌀 튀기고 엿을 넣고 깔아서 그 다음에 무슨 작업 합니까? 격자 구조로 잘라내죠. 그 잘라내는 작업에 인간이 관여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그 잘라낸 하나, 하나가 단위가 되는 거예요. 그게 힘이란 단위, 영광, 지혜, 감사, 존귀, 능력, 주여, 어린양, 피, 십자가 피. 전부다 성경을 잘라낸 강정의 단위, 단위가 되는 거예요. 고 하나, 하나에 뭐가 들어있어요? 사건의 뭉치가 들어 있는 겁니다. 그 단위에 기준해서 풀어내면 그게 뭐냐, 사건의 만개, 펼쳐짐이 되는 겁니다.
그럼 그렇게 우리 손으로 단절이 안 되고, 예를 들어서 요한복음 16장의 말처럼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누가 우리를 책망하신다? 성령이 와서 우리를 책망하죠. 책망할 때, 죄, 의, 심판에 대해서 우리 나름대로의 역사화 된, 우리 인간들이 납득이 되는 죄, 의, 심판이 있겠어요? 없겠어요? 있죠. 우리 나름대로의 죄, 의, 심판이 있는 거예요. 이것은 어디서 만들었습니까?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폴 니트와 동화사 주지가 이야기 한 것처럼 인간들이 이미 갖고 있는 그 기준, 그 기준은 내부에 있는 악마의 노림수, 악마는 뭐를 싫어한다? 바로 생명나무를 공격하는 것이죠. 생명나무의 대신 죽으심을 싫어하는, 그 대신 생명나무의 대신 죽으심 말고, 우리가 최선의 노력을 다해서 경건해지고자 하는 우리 행위에 기대를 거는 그러한 기준을 가지고 의와 죄와 심판을 이걸 잘라낸 거예요.
그 잘라낸 작업에 최고 수준에 있는 사람을 예수님도 인정했어요. ‘바리새인보다 더 의가 낫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못 간다.’ 그 바리새인들이 잘라낸 강정속에 뭐도 포함돼 있다? 그 속에 자기 나름대로의 하나님의 의롭다는 의가 들어있겠죠. 그 의에서 누구 의를 친다? 그 의에서 인간들이 만든 아래 질서의 기준의 의를 하늘나라의 어린양의 기준이 책망하는 것이 성령이 책망하는 겁니다. 그러면 그 사이에서 우리는 그동안 헛짓하고 왔다는 겁니다. 인간들이 익히 아는 기준을 마치 성경의 참된 해석인 줄 알고 오해했던 겁니다.
그 의와 죄와 심판은 누구를 지향하게 돼 있습니까? 예수님의 대신 죽으심!! 예수님의 공로!! 대신 다 이루심과 관련된 그런 언어들인데, 우리는 그 성경적 언어를 뭐로 해석합니까? 예수 믿어주는 것도 내가 믿고 예수 위해 사는 것도 내가 살고 그 초점이 어디로 옵니까? 나에게로 오죠. 그럼 아까 베드로가 물위를 걸을 때, 왜 걸었습니까? 자기에게 초점을 둬서 ‘내가 물위를 걸어볼까’ 해서 걸었어요? 뭘 봤기 때문에 물인지 불인지 땅인지 구분도 못했어요. 예수님을 쳐다보니까 분간도 안됐잖아요. 그런데 자기를 쳐다보는 순간. ‘내가 미친 짓이지, 뭐하는 짓이야?’ 하고 빠졌죠. 어느 게 정상입니까? 사람이 물위를 걷는 게 비정상 이예요.
그래서 하늘의 소식은 사람들에게 어리석은 것이고 비정상적인 기준이라고 미쳤다고 그렇게 욕을 얻어먹게 돼 있어요. 우리가 행할 수 있는 법적인 명령을 내놔라 하는 거예요. 명령에 대해서 지난주일(2011.2.06)날 아침에 내무반 검렬 이야기로 이야기 다 했어요. 이미 군인 된 자가 내무반 사열할 때 막대기 딱 들고, 군에 구타 없다고요? 억지로 끌려온 사람 안 때리면 말 안 듣거든요. 그리고 ‘야, 야, 야 군화 이게 뭐야, 이게, 이래 가지고 총알 나가겠어? 이거 봐, 총대 손질 한 것 좀 봐. 베개는 왜 저기 가 있어?’ 나무란다는 게 뭡니까? 너는 사회인이 아니고 뭐다? 군인으로 다 이뤄졌다. 깰 때마다, 나는 군인이지, 깰 때마다 ‘나는 구원받았지.’와 똑같은 이야기예요.
성경의 모든 사도바울의 권면과 명령들은 속속들이 우리를 벌거벗겨서 우리의 뼈와 숨어있는 모든 것들을 죄를 죄 되게 드러냄으로 말미암아 그냥 쓰레기를 쓰레기답게 들춰내는 게 뭐라고요? 그게 보물이듯이, 죄를 죄 되게 드러내는 그 능력이 이미 우리가 하나님의 의라는 것을 증명하는 능력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나는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내가 사람의 신분으로서는 흠이 없지만 나는 주님 앞에서 죄인 중에 괴수라’ 이야기 하죠. 이게 어떻게 성령 받지 않고서 이런 말이 나오겠습니까?
좀 더 의미를 봅시다. 의미론 적 단위가 되게 되면, 진짜 이제부터 어려운데, (나도 골치 아프다 어려운 걸 하려하니), 왜 자꾸 어려운 걸 하려고 합니까? 따지신다면, 다시 할게요. 언약이 주어지게 되면, 이스라엘 백성은 구원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구원을 챙기는 걸로 바꿔요. 하나님의 강한 손과 편 팔, 그것마저 내 속에 들어오면 난 누구보다 더 센 사람이 돼요.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보다 더 센 존재가 돼 버리죠. 그게 바로 마귀의 노림수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의미론 적으로 담겨있는 사건의 뭉치가 의미론 적인 단위가 된다 말이죠.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여기 문이 있잖아요. 똑같은 문에 글자를 씁니다. 여기 문에 ‘신사’ 라고 쓰고 ‘숙녀’ 라고 쓰면, 이 신사라는 문은 신사라는 화장실이 되고, 이것은 숙녀 화장실이 되겠죠. 이걸 ‘기표 밑에 기의(의미)가 미끄러진다.'는 말을 해요. S에 새끼를 쳐서 작은 s들이 줄줄이 따라붙는, 이건 무슨 의미일까요? 하나님께서 의미론 적 단위를 주게 되면, 의와 찬송과 존귀를 주게 되면, 이 찬송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뭐냐 하면, S : S 예요. 다시 말해서 한 가지의 표시는 오직 한 가지의 사물에게만 해당이 된다고 보는 거예요. 이 꽃이 장미라면 백합은 장미가 될 수 없다는 것이 우리의 역사적 사고방식의 해석입니다. 이렇게 주님의 찬송과 영광, 여기서 찬송이란 말이 나오면 우리는 뭐를 보느냐 하면 노래를 찬송이라 하잖아요. 노래 부르면 찬송이라 하잖아요. 그런데 밑에 의미가 돼 버리면 우리가 길을 걷는 것도 찬송이 돼 버리고, 남에게 구제하는 것도 찬송이 되는 거예요. 하나님께 영광이 되니까. ’여호와는 나의 찬송이시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라 돼 있잖아요. 그러면 여호와 떼버리고 밑에 남아있는 작은 s들, 이 작은 s를 ’기의‘라고 해요. 큰 글자(S)를 기표라 하는데, 작은 새끼(s)들끼리 모아 놓으세요. 돌맹이 넓적한 거하고 구원하고 무슨 관계있습니까? 하지만 그것이 주님과 연관돼 버리니까 ’여호와는 나의 찬송이시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가 된다 말이죠.
교회에 의사가 오나 판사가 오나 지가 잘났다고 할 것 없이 이게 하나의 돌출 부분이니까 이게 하나, 하나가 살 가치도 없는 존재인데 누구 때문에? 의사건 판사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대신 죽으심의 의미’로 말미암아 우리는 한 몸이 되는 거예요. 몸의 지체가 되는 겁니다. 찬송과 영광만 예를 들었죠? 그러면 여기에 지혜와 감사가 들어간다 말이죠. 그러면 찬송이라는 단어, 의미론 적인 단위가 여러 가지의 의미를 뽑는다면, 감사도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면 이 의미는 작은 s들, 새끼s들, 의미가 같이 겹칠 수도 있겠죠. 어떤 때는 감사가 되고 어떤 때는 찬송도 되고, 어떤 때는 창조도 되고 어떤 때는 구원이 되죠. 왜 이렇게 의미가 다양하게 되는가? 그 의미가 여러 가지의 인간들의 기표(표시하는 ㄱ, ㄴ등) 상관없이 통할 수 있는 것은 그 통하게 하는 피가 흐르기 때문에, 새 언약의 완성이 ‘피’입니다.
언약이 흐르기 때문에, 다른 말로 하면 새 언약이 흐르기 때문에, 한 자로 말하면, ‘피‘가 흐르기 때문에. ’찬송만 해도 구원 못 받고, 감사해야 구원 받습니다.’라는 말이 잘못 된 거예요. 왜냐하면 찬송하고 감사하고 그 다음에 예배해도 구원 못 받아요. 그건 뭐를 보기 때문에 그렇습니까? 그게 통하는 새 언약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껍데기만 보기 때문에 감사해야 되고 바빠요. 성부도 섬겨야 되고 성자도 섬겨야 되고 성령도 섬겨야 되고 왔다 갔다 바빠요. 결국은 한 자로 모든 것이 통하는 것은 ‘다 이루었다’라고 하는 것은 뭡니까? 한 자로 예수님의 ‘피’입니다. 그 해석을 해내야 돼요. 그거 누가 합니까? 십자가마을 목사님들이 하셔야 되죠. 한 윤범 목사님이 하셔야 돼요. 그 해석!!
라캉의 공식:
이런 공식이 있어요. 또 있는데 더 복잡해요. 무슨 뜻이냐 하면, 인간이 언어를 다룰 때, 요 한계를 못 벗어난다는 겁니다. 어떤 신학자든 어떤 철학자든 신문을 같이 봐도 요 한계에서 벗어나서 읽을 수 있는 인간은 없다는 거예요. 성경을 해석할 때 성경 문자를 아무리 원어로 해석해도 소용없어요. 왜 소용없느냐 하면, 옛날 고대 언어는 언어의 범위가 넓지 않아서 한 가지 용어가 여러 가지로 써먹었어요. 요새 언어는 세분화 되잖아요. 물건 하나, 하나에 언어가 붙잖아요. 옛날 고대 문화적 입장에서 그 언어를 오늘날 언어로 사용한다는 자체가 거짓말 이예요. 다만 성경에서 이 뜻은 이 뜻이라고,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함께 있습니다.’라고 하면, 임마누엘이라는 그 한 가지 일만 성경의 의미가 아니고 그것을 하나님의 함께 있음이라고 표시하신 그것조차도 성령께서 주신 하나님의 상징적 언어로 받아들이는 고정도로 그쳐야 돼요. 성경보다 더 나가면 안돼요. 성경 모든 언어에서 더 나가면 객기입니다. 신학자들 신학생 기죽이려고 언어 막 쓰죠. 전부다 거짓말입니다.
언어의 오브 라이트, 구약의 최고라 하죠. 그 사람이 다 이야기 한 거예요. ‘언어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언어는 내가 최고다. 언어는 깨보면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말장난 이예요. 그걸 분석해서 뭐가 안 나오는 거예요. 그럼 뭐가 나오느냐? 고백이 나오죠. 어떤 고백? 그 고백에 대해서 13절에 나옵니다. 아, 이 고백도 어려워요. 이 고백이 누구는 OO다 . ’아무개 누구누구는 O다.’라는 식의 고백이 안 나오게 돼 있습니다.
세례요한이 바리새인보고 뭐라 했습니까? ‘너는 메시야냐? 했을 때 뭐라 했습니까? ’나는 메시야가 아니다.‘ ’너는 그럼 선지자냐? ‘선지자 아니다.’ ‘제사장이냐?’ ‘제사장 아니다.’ 세례요한이 왜 그렇게 한 거예요? 나는 선지라라 말해도 되는데... 질서가 다르기 때문에, 의미론 적 단위를 푸는 기준이 예수님 쪽에서 푸는 것을 인간 쪽에서 풀어버리면, 인간 쪽에서 오해해요. 왜냐하면 풀어진 그것이 어디에 들어갑니까? 자기 기준 속에 들어가 버려요. 자기 기준 속에 들어가 버리면, ‘난 오늘 세례요한한테 선지자, 제사장 아니라는 소리를 들었어. 세례요한은 선지자 아니야. 완전 사기꾼이야.’ 지 맘대로 생각해요. 지 맘대로!! 그런데 그 사람이 뭐라 하겠습니까? ‘뭐? 세례요한이 선지자 아니라고?’ ‘나 들었어.’ 녹음하면서 다시 전하는 거예요. ‘세례요한입니까? 지금 녹음 됩니다. 말만 하면 거짓말하니까 못 살겠어. 당신 선지자야? 선지자 아니야? ’ ‘나 선지자 아니야.’ 끝, ‘거봐, 녹음 됐잖아.‘ ’세례요한 선지자 아니다.’라고 해석을 하는 거예요.
세례요한이 무슨 기준을 노출 시키는 겁니까? 예수님을 죽일 수밖에 없는 기준을 유지하고 있음을 노출시키는 방식이죠. 그 방식이. 그럼 세례요한이 ‘난 선지자 아니다. 제사장 아니다. 난 메시야도 아니다.’ 그걸 누가 시켜서 그렇게 한 거예요? 본인이 한 거예요? 누가 시킨 거예요? 예수님이 시킨 거죠. 하나님이 시킨 거죠. 하나님의 의로 시킨 거예요.
너희들이 말하는 체제하고 질서하고 이야기하는 주님의 이야기하는 체제자체가 너희들은 너희 몸 사랑, 내 사랑, 어화둥둥 내 사랑, 결국 내 사랑 돌아오는 그런 식의 해석 체제하고, 베드로처럼 자기 자신을 몰라요. 물인지 땅인지 몰라요. 자기를 잊어버리고 예수님만 진짜 몸으로 보이는 그 기준하고 같을 수가 없죠. 그래서 여기 13절에 보면, “장로 하나가 응답하여 이르되 이 흰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뇨” 할 때 14절에 뭐라 합니까?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압니다.‘
어떤 사람이 저한테 그런 질문 했어요. 막달라 마리아가 울면서 예수님 발에 향유로 닦을 때, 그 우는 것 자체가 바리새인 너희들은 예수그리스도를 몰라. 왜? 사랑받은 적이 없기 때문에... 어떤 분이 하는 말이 ‘그 누구 때문이냐, 예수님 때문이라고 똑바로 왜 말 못하느냐, 저는 답변 했죠. ’ 그 눈물 자체가 그 모든 것들 다 충분하게 설명해 줬다. 왜? 그들은 울지 않으니까. 그리고 울면서 기뻐하지도 않으니까. 기뻐하지도 않을 인간이 울지도 못하는 인간이 예수란 말을 들은들 이게 예수겠습니까? 자기 이해대로 지 맘대로 해석한 예수겠죠. 엉터리 예수죠.
“주여 당신이 누구십니까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가로되.” 지금 장로가 몰라서 묻는 게 아니죠? 이미 알죠? 장로가 뻔히 알죠. 알면서 뭘 묻느냐 하면, 답변을 누가 합니까? 이미 구원 받은 장로가 마침 구원 받아서 오고 있는 사도요한과 다른 사람에게 질문을 던진 거예요. 결국은 질문의 답을 얻어내겠다는 게 아닙니다. 가르치겠다는 것도 아니고, 결국은 뭡니까? 양쪽 다 작은 새끼s들이 결국 뭘 바라보게 하기 위함입니까? 우리로 하여금 구원되게 하신 그분의 하신 일을 다 같이 쳐다보는 거예요. 쳐다보게 한 밑에 너도 아니고 나도 아니고 ‘우리는 다른 분에 의해서 구원 받았습니다’라는 걸 보이기 위한 주고받음의 대화죠. 그게 뭐냐 하면, 바로 주인공이 14절에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어린양이 피를 흘리는 것은 언제 피를 흘리죠? 어린양이 토실토실 하면 더 이쁠텐데 왜 피를 흘리죠? 어린양은 뭘 위한 어린양입니까? 대신 죽어야 될 어린양이죠? 대신 죽어야 될 어린양의 피가 묻혔다는 말은 사실은 죽을 분은 어린양이 아니고 누가 죽을 사람입니까? ‘바로 내가 죽을 사람입니다.‘ 라는 고백을 마구 쏟아내면서 쫄랑쫄랑 누구 뒤따라가요? 우리 대신 죽으신 어린양을 뒤따라 갈 때, 그들이 ’나는 죽어 마땅하고 사실 죽을 자는 납니다.‘라는 말을 장로나 이쪽이나 서로가 고백할 때, 누구의 영광과 누구의 감사만 높아져요? 어린양만 높아지는 그 체제 시스템, 그것이 이 지상에서 나타나는 예수님의 인을 받은 사람들의 보편성이고, 공통성입니다. 그 외에는 없어요. 그 외에 다른 일체가 없습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 하면, 그래도 전도는 해야지, 당신은 피만 이야기 하고 부활은 왜 이야기 안 해? 재림은 이야기 안 해? 봉사는 이야기 안 해? 당신이 그렇게 가르치니 구원 받았다 해놓고 교회 한 푼도 안내고, 헌금도 안하고, 교회 꼴이 좋지,
제가 주일 날 아침에 이런 이야기 했죠. 교인들이 헌금 안하는 것은 예수님이 그만큼 싫고 안 좋아서 헌금 못 내겠다는데, 뭘 어떻게 하겠어요. 목사가 교인들 관리할까요? 그래서 앞에 권사님한테 이야기 했어요. 권사님, 헌금관리 제가 해 드릴까요? 원천징수로 해드릴까요? 지갑 저한테 맡기시죠. 제가 초반부터 십일조 다 떼버릴 테니까... 그렇게 할까요? 주고받는 대화 속에 뭐가 섞여 있어야 됩니까? 피가 있어야 되죠. 피가 저쪽에 흘러가면 돈 내는 행위가 될 것이고, 피가 이쪽에 흘러가면 예배하는 행위가 될 것이고, 피가 이쪽으로 흘러가면 고아원 방문하는 구제하는 행위가 될 거예요. 하지만 구제를 자랑하지 않고 헌금을 자랑하지 않는 이유가 뭡니까? 그 구제와 헌금 안에 뭐가 흐르기 때문에? ‘바로 나는 헌금할 자격도 없고 구제할 자격도 없고 예배할 자격도 없는데, 예수님의 대신 죽으심이 내 안에 흐르기 때문에 나는 구제라는 돌출 행동을 하고 있고 헌금이라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고 베드로 같은 경우는 말도 안 되는 물위를 걷는 이 짓을 하고 있단 말이죠.
그럼 헌금을 하면서 누구를 안 쳐다봐요? 날 안 쳐다봐요. ‘저게 얼마냐? 안 본다니까요.ㅎ 주님의 어린양을 바라보면서 예배하고 헌금하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것이 전부다 상징적 언어기 때문에 이것이 돌발된 사건의 묵시잖아요. 사건의 뭉치죠. 그런데 헌금할 때 나를 안 본다가 역사적, 문법적으로 뭉쳐 버리면 그때부터는 무슨 희한한 일이 벌어집니까? 이걸 실천에 옮기려고 하는 해괴한 짓이 시작되는 거예요. 아!! 이거는 진짜 어렵죠?
예수님의 피를 생각하는 예배를 드리라는 명령이 떨어지는 순간, 그 순간을 우발적인 사건으로 차후 적으로 확인하면 되는데, 아! 내가 지금 그런 지경, 환경에 있구나.’ 확인하면 될 걸,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이걸 새삼스럽게 실천에 옮기려고 시도한다 말이죠. 어떻게? 주여 딴 것은 생각하지 말고 피만 생각하게 하소서, 피, 피, 피, 피, 피, 피, 피, 피,..... 그럼 어떻게 돼요? 피, 피, 피, 피, 피, 피, 피, 피, 피, 피, 피를 몇 번 했더라. 2번 더 해야 돼, 피, 피, 피, 피, 피, 피, 피, 피, 29번, 이제 됐어. 주여! 피로 예배드립니다. 이 짓을 하고 있죠.
작은 s가 큰 의미가 큰 기표 아래서 F란 함수거든요. 이 기표의 함수라는 것은 밑에 뭐를 누르느냐, 억압인데 뭐냐 하면, 이미지가 인간의 모든 의미를 눌러버린다는 겁니다. 눌려서 계속 다른 것으로 치환 되고, 치환 되고 넘어가고 넘어가는 거예요. 치환의 두 종류가 있는데, 환유라 하는 은유로 된다는 겁니다. 이 말은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인간은 말실수나 또는 자기가 강조하는 것에 따라서 방향성, 자기의 관심사, ‘내가 지금 똑같은 예수를 믿습니다. ’이 말과 ‘예수를 믿습니다.’ 똑같은 말을 해도 남은 몰라도 본인은 ‘예수를 믿습니다.‘ 할 때 ’예수님 좋아요.‘ 하는 경우가 있고, ’ 예수를 믿는데 누가 나를 무시해?‘ 라고 똑같은 말을 해도 상대방을 의식해서 ’나도 믿음 있단 말이야‘ 라는 식으로 똑같은 글, 똑같은 발언을 해도 그건 이 공식에 의하면 뭔가 억압을 하고 있는 거예요. 관심사와 방향성은 똑같은 말을 해도 똑같은 글을 봐도 다 달라요. 관심사와 그들의 추구하는 바가.
그러니 사람 속을 성령이 아시죠. 그 성령의 열매가 뭐냐 하면, 바로 나의 정과 욕심을 주께서 가만두지 않고 날마다 정과 욕심을 죽입니다.‘라는 고백으로 나타난 것이 갈라디아서 5장이죠. 내 정과 욕심을 날마다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면 나오는 게 뭐냐 하면, 온유, 화평과 자비와 양선과 형제우애죠. 그런데 십자가가 없이 십자가 피가 관통되지 않고 나오는 게 뭐냐 하면, 시기와 질투와 미움,(내가 니 밉다니까 왜 말이 많아, 이건 내 마음이야 그 질문 자체를 하지 마, 내가 그냥 미워) 다툼과, 다툼의 종류 중에서 안 다투는 게 있어요. 안 다투는 게 다툼 이예요. 왜? 뭐가 다르기 때문에? 관심사. 방향성, 십자가에 자기의 정과 욕심을 못 박지 않으면, 안 다툼으로 자기가 다툼과 차별되는 괜찮은 사람인양 돼 버려요.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처럼 되죠. 이게 바로 사건의 뭉치를 마치 우리가 실천에 옮길 수 있는 문법적, 역사적 해석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는 우리 육적인 기준이 이런 큰 오해와 오류를 야기 시킨 겁니다.
천국에 갔던 사람들, ‘어린양 이리와 봐. 피 묻었나 이리 와봐. 너 성경 몇 장 읽었어? 어떤 사람 ’저는 두 번 읽었어요.‘ ’너는?‘ ’ 전 100번 읽었습니다.‘ ’그런데 읽게 하실 때 그 관통할 때 뭐가 흘렀지?‘ ’핍니다.‘ ’넌?‘ ’핍니다.‘ ’똑같네.‘ 예수님 피 때문에 2번 읽었고 예수님 피 때문에 100번 읽었고 숫자는 관계없어요.’ 결국은 어린양의 피 때문에 그들은 움직인 거예요. 그래서 성도는 ‘물의 색깔’처럼 예수그리스도의 피부요. 예수님이 활동이요. 예수님의 얼굴이요. 예수님의 모양새가 되는 겁니다. 특별히 어떤 행동을 한 것이 모양새가 아니라 어떤 행동을 하던 그 자체가 ‘이미 다 이루었다’의 차원에서 능력에서 나온 거예요. 그걸 가지고 예수님이 함께 있다는 ‘사건의 뭉치가 성도’가 되는 겁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가 그 안에 흐르게 되죠.
그래서 여기 성경에 보면 어디서 오든지 간에 수많은 사람이(9절) 각 나라와 각 족속에서 각 백성에서 각 방언에서 아무라도 오더라도 그들이 내뱉는 것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지저스(Jesus) 어떤 사람은 예수, 기표는 다르죠? 용어는 달라도 그게 지저스(Jesus)가 되고 예수가 되도 용어가 관계없이 주님은 아시죠. ‘주님의 피가 나를 구원했습니다. 강간 하듯이. 나는 저항할 수 없었습니다. 주께서 구원하겠다는데 나는 저항 할 수 없었으며 구원이 닥치니까 그냥 파도처럼 덮쳐진 겁니다. 절대로 제가 구원 시도하지 않았습니다. 구원 챙기지 않았습니다. 이걸 가지고 로마서 4장에서는 ’일한 것도 없이 죄 사함을 받은 사람의 행복과 축복에 대해서 두 자로 그걸 ‘ 믿음’이라고 하죠.
믿음이란 믿음의 행위란 없습니다. ‘아무 일한 것도 없습니다.’ 자체가 뭐가 돼요? 그걸 두 자로 믿음이라 하고 그 믿음의 위선에서는 은혜라 하고 그 위선에서는 약속이라 하죠. 그래서 아브라함과 이삭은 ‘약속의 자녀’가 되는 겁니다. 약속의 자녀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그것이 아브라함의 복이라고 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저희들 예수 안 믿더라도 사회 나가서 얼마든지 사람대우 받고 오히려 예수 안 믿음으로 말미암아 술 잘 먹고 인간성 좋고 성실하다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가치 있는 인간인데 졸지에 주님의 어린양의 피 앞에서 살 가치도 없는 저주 받아 마땅한 죄인으로 노출되고 말았습니다. 저희 속에 있는 악마를 주께서 손수 이기셔서 기어이 우리의 구원 받았음을 알게 하시는 주님의 은혜를 찬양하고, 대신 죽으심만 자랑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