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풀과 과목(창1;11-13) 150923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5. 9. 27. 06:32

2015-09-23 20:32:41 조회 : 61         
   풀과 과목 150923 이름 : 이근호 (IP:119.18.86.67)   

풀과 과목(창세기 1: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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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5-09-23 21:10 

풀과 과목

2015년 9월 23일                      본문 말씀: 창세기 1: 11-13
                         
(1:11) 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과목을 내라 하시매 그대로 되어

(1:12) 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1:13)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셋째 날이니라

온 산하에 꽃과 풀과 나무가 자라나는 것에 대해서 당연한 현상이라고 생각되어질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 말씀은 우리의 생각이 교정되기를 원하십니다. 처음에도 땅 위에 아무 것도 없다고 여기기를 원하십니다. 당연히 아무 것도 없어야하고 뭐가 그 위에 등장한다면 도리어 신기하게 여기는 그런 안목이 필요합니다.

공허한 땅이 먼저 나오고 그 위에 각종 식물들이 등장되는 절차를 보여주시는 것은 그 절차과 결과를 통해서 하나님의 창조 원리가 함께 대지 위에 가득 깔리게 됨을 알아라 는 겁니다. 하나님의 창조 원리를 모르면 이는 하나님에게 대적하는 바가 됩니다. 악이란 바로 이 창조원리에 대적하고 도전하는 식으로 활동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땅 위에 풍성하게 식물을 통해서 소개되는 창조의 원리가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은 두 가지 담겨있는 내용을 나타냅니다. 하나는 비-동질성입니다. 즉 식물과 식물 사이에는 각기 차이나는 겁니다. 또 다른 하나는 동질성입니다. 이는 ‘씨 가진 과목’를 통해서 나타납니다.

감나무는 감씨를 갖고 있기에 나중에 어미하고 동일한 감나무 새끼를 퍼뜨리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감이 밤이 되지를 않을 것입니다. 마치 사람이 임신했는데 낳고 보니, 장미나 버섯이 나왔다면 얼마나 황당한 일이되겠습니까. 이것은 인간이라는 동질성이 깨어진 결과일 것입니다.

사람과 돼지 사이에는 동일하지 않지만 사람은 사람끼리, 돼지는 돼지끼리 동질성을 갖추고 있듯이 온 땅 위에는 풀이나 채소나 과목나 이런 식물을 통해서 이 두 가지 내용을 담은 창조원리가 퍼져있습니다. 이 창조원리가 최종성을 갖게 되는 것이 요한복음 12:24에 나와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여기서 말씀하시는 ‘밀 한 알’은 예수님을 두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죽게 되면 거기서 예수님과 동질성을 지닌 많은 새로운 피조물들이 창조되는데 이들만이 ‘예수의 나라’의 백성들입니다.

그 외는 아니됩니다. 그 외는 예수님에 대해서 비-동질성‘이라는 판단을 받게 되는 대상들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 창조 원리에 동질성을 두면 될 일을 비-동질성으로 집어넣으시는 겁니까? 그것은 창조 원리에 예수님의 기능에서 통합되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면, 세상은 창조 때부터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을 증거하는 용도로 창조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시면서,

이 모든 창조물들이 예수님의 주되심에 통일되는 연관되게 하셨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주되심’이란 곧 예수님의 죽으심을 두고 말합니다.

즉 모든 피조물들 안에 함유되어 있는 동질성과 비동질성은

그것을 감싸고 있는 창조주의 죽음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말입니다.

그 초반의 증거가 바로 에덴동산에 심어진 나무 하나가 말해줍니다. 그 나무는 ‘정녕 죽으리라’는 속성을 발산할 만반의 준비가 된 나무입니다. 즉 극도의 기쁨이 넘쳐나야 하는 동산 중앙에 죽음과 연관된 나무가 심어져 있는 겁니다. 그 나무 과실을 따먹게 되면 죽음은 당연하고 낙원자체가 파괴됩니다.

이는 곧 천지창조의 붕괴와 관려 있습니다. 달리 말씀드려서, 천지창조에 만들어진 모든 피조물들은 죽음과 연관되는 그 실체를 드러내는 식으로 그 마지막을 향하여 달려가기를 시작했다고 보시면 됩니다. 동질성과 비동질성의 창조원리를 외부로 마구 발산하면서 말입니다. 단순히 동식물의 번식에 국한되는 원리처럼 여겨진 동질성과 비동질성은 선악과 따먹는 죄의 개입으로 인하여 새로운 창조 원리에 종속됩니다.

즉 창세기 3:15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즉 인간들끼리는 생리적으로 동질성이라고 보이지만 그 내부에 새로운 차원의 비동질성이 싹터기 시작하게 됩니다.

같은 인간이면서 운명이 갈리는 겁니다. 마태복음 24:40-41에 보면,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매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누가 봐도 동일한 작업환경 속에서 동일한 노동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지만 한 사람은 지옥, 다른 한 사람은 천국입니다.

야곱과 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인간은 죽음 안에 갇혀 살게 됩니다. 죽음이란 곧 ‘창조성의 무효’되는 흔적을 말해줍니다. 이러한 현상을 포괄적으로 말합니다. ‘처음 땅’과 ‘나중 땅’이 질적으로 달라져 격상되었기 때문입니다. ‘처음 땅’은 아직 그리스도(=창조주)가 오시지 않는 땅입니다. 피조물만의 세계입니다.

하지만 ‘나중 땅’은 창조주가 오셨던 땅입니다. 이때부터 비동질성과 동질성은 인간이 판단할 문제가 아니라 오직 예수님만이 판단할 문제입니다. 요한복음 11:32에 보면, 나사로의 누이 동생 마리아가 예수님에 대해서 오해한 대목이 나옵니다. “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와서 보이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가로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마리아는 자신이 있는 땅, 자리가 자기 땅인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주께서 다른 곳에 계신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하지만 과연 마리아가 있던 그 땅에 마리아 땅입니까 아니면 주님이 계신 땅입니까? 처음부터 주님을 증거할 것들이 발생되어야 될 땅입니다. 이제 주님의 승천으로 인해 ‘주님의 땅’은 하늘로 함께 이동했습니다. 그리고 지상에 남겨진 땅은 저주받은 땅입니다.

‘보시기에 심히 좋은 땅’은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그곳입니다. 성도는 그리스도와 동질성 속에 품여져 있기에 이 세상이 얼마나 질적으로 지옥스럽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성도의 남은 삶이란 세상과의 비동질성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삶입니다. 세상에 있는 것에 미련이나 유감을 갖지 않고 도리어 하나님께서 용서를 대신 구해줍니다.

“주여, 저들이 주님이 베푸시는 용서를 알게 하옵소서”라고 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지금 눈에 보이는 땅보다 나중에 들어갈 땅이 우리들의 영원한 정착지 임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5-09-24 14:51 

4강-창 1장 11-13(풀과 과목)150923-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1장 11-13절입니다. 구약성경 1페이지입니다.


창 1:11-13


“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가진 열매 맺는 과목을 내라 하시매 그대로 되어 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세째 날이니라.”


사람의 입장에서 이 땅에 채소가 있고 풀이 있고, 그리고 나무가 있고 과목, 과실수가 있다는 것이 그냥 자연스러운 것이고 의례히 그래야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데요. 성경은 그걸 전부 다 밀어버립니다. 중 머리처럼 박박 깎아서 밀어버리죠. 다 밀어버리고 땅이 황무하고 아무것도 없다고 하더라도 너희는 거기에 대해서 이의를 걸 수 없다는 겁니다. 아무것도 없는 민둥산이 되고 황무지가 된다 할지라도, 그런 입장에서도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답습니다.”라고 해야 돼요.


왜냐하면, 새롭게 거기서 뭔가 채소가 나오고 과목이 나올 때 의례히 그렇다는 생각이 아니라, 그것 하나하나가 하나님의 솜씨고 하나님이 주신 기적이고 은혜라는 것을 다시금 알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걸 발견할 수가 있어요. 하나님이 어디 계시느냐고 할 것 없어요. 하나님이 만드신 온 산하, 바다와 강과 들판에 다 깔려 있습니다. 우리가 맨발로 잔디밭 위를 뛴다는 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을 지근지근 밝고 간다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땅에 뭐가 생겼다는 이것은 나중에, 6일째에 만들어진 우리 인간에게 하나님의 의미로 다가오는 겁니다. 그 의미가 뭐냐? 없는데서 뭔가 주어지고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하는 것은 그 속에 하나님의 창조원리가 담겨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땅을 보면서 잔디를 밟더라도 하나님의 창조원리를 뽑아내고 그것을 향하여 찬양하는 그것이 그 땅과 똑같은 입장에서, 없는데서 만들어진 우리의 임무요 사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에 “들풀을 보라.” 하는 것은

들풀과 너를 비교해 보라는 것입니다.

어느 것이 참한가, 어느 것이 옷을 잘 입었는가를 보는 겁니다.

솔로몬의 입은 옷, 하나님 보기에는 들풀에 점수를 더 준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 들풀 속에 하나님의 창조원리가

솔로몬의 입은 옷보다 더 짙게 깔려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이 죄짓고 난 뒤에 손 때 묻은 것은 전부 다 추하고 더러운 거잖아요.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집니다.

 

인간은 자기가 만든 것을 통해서

자기 영광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도둑질 하지요.

강탈하는 겁니다.


십계명에 도둑질하지 말라고 했지만 사실은 우리가 태어나면서부터 도둑질을 하고 있는 거예요. 태어나서 남에게 착한 일을 하면 되지 않겠는가, 하고 변명을 하는데 인간이 있다는 그 자체가, 인간이 거기 존재한다는 그 자체가 남에게 피해를 주고 남에게 해악을 입히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주신 것은 다시 이 자연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창조원리가 있다는 것, 그것을 찾아내서 마지막에 만들어진 너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마땅하다는 거지요.


그러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채소, 그리고 이 씨가진 열매, 과목을 통해서 어떻게 하나님의 창조원리를 발굴해낼 수 있는가, 발췌, 뽑아낼 수 있는가? 힌트가 나옵니다. 씨가진 열매 맺는 과목, 여기에 하나님의 창조원리가 있습니다. 나무가 씨를 가졌다는 말은 그 나무가 가진 씨가 자라게 되면 그 씨가진 나무와 새끼나무가 동질의 나무가 됩니다. 그 나무끼리는 동질하지요. 어떤 새댁이 임신해서 애를 낳았는데 낳고 보니 사람이 아니고 버섯, 혹은 장미가 나왔다고 합시다. 물론 장미가 나오면 예쁘기는 하겠지요. 하지만 이상한 거지요.


병원에서 출산하면 “아들입니다.” 하든지 “복숭아입니다.” 이렇게 나와야 할 것인데 “백합입니다.” 진짜 백합꽃이 나왔다면 이것은 식물인간? 인간이 아니지요. 인간에서는 인간이 나와야 하고 그것이 동일성입니다. 또 한 가지 예를 들면 같은 한국인 끼리 결혼해서 애를 낳았는데 흑인이 나왔다? 이것은 유전자검사 할 만하지요? 이상한 거잖아요. 마리아도 아니고. 황인종 사이에서 왜 흑인이 나왔지요? 물론 인종차별적인 예를 들어서 죄송합니다만.


오늘 본문 11절에 보면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각기 종류대로’라는 것은 비 동질성이에요. 다양성, 다른 종류들끼리는 서로 달라요. 서로는 다른데 같은 종류끼리는, ‘씨 맺는 채소, 씨 맺는 과목’으로 말미암아 그 씨 맺는 과목 안에서는, 그 과목끼리는 동질성을 유지합니다. 아버지가 감나무면 그 새끼도 감나무로 되어 있어요. 식물의 세계에서. 땅에다 하나님의 원리를 펼치는데 어떻게 펼치는가, 라고 묻는다면 저는 이렇게 답합니다. 비동일성과 동일성, 또는 비 동질성과 동질성, 이 두 가지를 가지고 하나님의 창조원리를 담아버린 겁니다.


비동일성과 동일성, 이 두 가지를 겸해서 세상피조물에 하나님의 창조원리를 담았는데 그것의 최종적인 도착지점이 어디 있는가? 도착지점 미리 말씀드립니다. 요한복음 12장 24절에 보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예수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그 동일성이 되지 아니하면 예수의 나라, 천국에 못갑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예수님 보내서 천국 다 가게 하지 왜 그렇게 하는가?


하나님의 창조원리는 방금 이야기한 예수님의 생명을 받은 자만이 성도가 되고 예수님의 나라인 천국에 합류가 되어 있거든요. 그 아버지의 그 자식이라는 그 말이지요.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에 힘입으면 누구든지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다 하나님의 동일한 자녀가 되는 거예요. 예수님의 자녀가 된다는 그 말이지요. 그 안에는 동질성이 흐릅니다. 그 동질성이 구약부터 흘러내려 옵니다. 그 동질성이 구약부터 흘러내려 오는데 그걸 언약이라고 합니다. 쉽게 해서 방주 안에 들어가면 다 홍수심판에서 면한다, 방주 안에서는 동일한 성질의 적용을 받는다는 그런 뜻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인간을 죽지 않도록 하지, 전부 다 예수님의 자녀로 만들지 왜 예수님은 뒤늦게 오셨는가? 그것은 바로 비 동질성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것을 다양성이라 하는데 다르다는 말입니다. 다른 요소도 창조원리 속에 포함이 되어 있어요. 다른 요소라는 것이 성경 뒤쪽에서 어떻게 나옵니까? 그것은 창세기 3장 15절에 나와요.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완전히 달라요. 한 알의 밀알이 떨어져 죽어서 열매를 맺는다는 이것은 천국 갈 사람들끼리의 동질성이지요.


고린도전서 12장에 보면 한 성령을 받아버리면 모두 다 그리스도 몸의 한 지체가 되어서 눈이 발더러 쓸데없다는 소리를 못한다고 하지요. 모두 다 주님의 사랑 안에서 한 몸이 되지요. 그것은 동일성입니다. 한 몸을 이루기 때문에 동일성인데 그 동일성의 ‘예수 안’ 말고 그 바깥은 뭐냐? 그것은 비동일성이 되어야 돼요. 야곱의 쌍둥이 형인 에서 입장에서는 죽이 되든지 밥이 되든지 무조건 미움 받는 자가 되어야 돼요. 왜? 주님의 동질성 때문에. 왜 동질성인가? 그것이 창조원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창조원리에는 분명히 마귀에 대한 징책, 징벌, 이런 것이 다 함유되어 있었어요. 설교 다시 해 봅시다. 땅은 비어있었습니다. 비어있던 곳에 뭘 깔아놓았어요. 창조의 원리가 깔려 있습니다. 어떻게 깔려 있는가? 동일성과 비동일성, 이것으로 쫙 깔아버립니다. 그게 식물 속에도 있다는 말이지요. 그게 나타나 있는 거예요. 식물은 굉장히 다양해요. 하지만 그 식물끼리는, 씨를 함유하고 있는 나무는 같은 아버지의 모습을 그대로 닮은 자식, 감나무에서는 감나무, 팥 심은 데서는 팥 나고 콩 심은 데서는 콩 나고, 그런 겁니다.


왜 그래야 되는가? 요한복음 12장을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예수님이 한 알의 밀알이 되어서 썩으면 예수님을 닮은, 예수님의 형상을 닮은 자들이 나온다는 말이지요. 대전강의에서는 대구 알로 설명했어요. 물고기 대구 배 갈라보면 뱃속에서 알들이 나오듯이 주님 배 갈라보면 알들이 줄줄 쏟아져요. 배태했던 알들이 쏟아지는데 그 쏟아지는 방식에 개입하시는 분이 성령이라고 했습니다. 아버지 품속이 독생자를 내놓을 때 성령이 개입했기에 동일한 성령의 작업이 이제는 예수님의 영으로서 주님 안에 품어놓은 창세전에 예정된 자들을 우르르 쏟아놓는 거예요.


옛날에 초등학교 여자애들이 시커먼 치마 입고 놀이하잖아요. 공기놀이에서 많이 딴 애들은 치마에 담아놓았다가 내려놓을 때는 우르르 쏟아지지요. 어릴 때 많이 봤어요. ‘야, 많이 땄구나. 치마가 참 편리하구나.’ 남자들은 주머니에 넣어도 다 새는데 여자들은 치마에 담았다가 우르르 쏟아놓습니다. 주께서 자기 백성을 우르르 쏟아놓는 거예요. 물고기가 알을 바다에 내려놓듯이 비동일성과 동일성, 두개가 다 함유되어 있을 때 그것이 하나님의 창조원리입니다.


그러면 왜 그렇게 하나님께서 창조원리를 동일성이면 동일성, 비동일성이면 비동일성, 그렇게 하지 비동일성과 동일성을 함께 있도록 하는가? 그것은 이 창조가 예수님이 십자가 죽음을 내다보면서 창조되었기 때문에 그 동일성과 비동일성을 무엇으로 보쌈 하듯이 감싸는가 하면 죽음이 감싸줘요. 죽음이 포근히 동일성과 비동일성이 깔려있는 창조를 감싸고 있습니다. 그 흔적이 나타난 곳이 바로 창세기 3장의 선악과나무에요.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죽으리라’가 낙원의 동산에 이미 새겨져 있어요. 낙원의 동산을 유지하는 근본적인, 필연적인 원리로 ‘죽으리라.’ 되어 있어요. ‘죽으리라.’로 싸여 있는 겁니다. 최종적으로 비동일성과 동일성이 마감이 되는 순간은 그 싸여 있던 죽음의 실체, 죽음의 내용이, 모든 정답이 나타날 때입니다.


그런데 그 죽음이 주님이 자살한 것이 아니에요. 주님의 죽음은 반드시 인간들이 모르는 영적인 존재, 마귀의 작용이 있어야 돼요. 마귀하고 싸워서 주님은 당하고 그 당했던 주님이 자기의 발꿈치를 물었던 뱀의 머리를 치는 그것이 완료가 될 때 비로소 주님의 주되심을 위해서 애초부터 창세기 1장이 쓰였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이 사실을 몰라요. 십자가의 죽음과 관련된 창세기를 모르고 창세기 1장만 나오면 기껏 나오는 이야기가 뭐냐? 기껏 진화론 이야기, 다윈의 진화론이 어떠니, 하나님께서 종류대로 창조했기에 진화론이 틀렸고 창조론이 맞다느니, 그런 이야기를 하는데 지금 성경 복음 이야기에 시시한 과학이 왜 끼어듭니까? 과학은 낄 여지도 없어요.


종류대로 된 것을 DNA로 조사해 본다는데 돌연변이 일으키면 바뀌는데 그 때는 어떻게 하려고요? 그래서 큰 진화는 없지만 작은 진화는 있다는 식의 대안도 창조과학 하는 사람들이 지어내는데 비겁한 변명이십니다. 비동일성을 조금 더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마태복음 24장 40절에 보면, “그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야, 같은 장소잖아요. 습도도 같은 습도고 체온도 36.5도로 다르지 않아요. 체온을 재도 아무 이상이 없어요. 똑같아요. 분명히 동질성이에요. 지금 하는 작업도 똑같아요. 밭가는 작업이 동일해요. 누가 봐도 그 인간이나 그 인간이나 동일한 인간이에요. 누가 봐도 동질성입니다.


그런데 그 동질성 속에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개입되니까, 한 알의 밀알이 썩어서 죽지 아니하면 영생을 얻지 못한다는 그 주님이 일으킨 사건이 개입하니까 한쪽은 영원한 저주요 한쪽은 영원한 영생입니다. 이게 어렵지요? 분명히 우리는 동질성, 비 동질성을 안다고 하는 거예요. 장미하고 장미는 동질성, 하지만 장미와 백합은 비 동질성, 우리는 알거든요. 낙타끼리는 동질성이지만 낙타하고 돼지는 비동질성, 종류대로, 같은 종류끼리는 동질성이지만 종류 간에는 차이가 나니까 우리는 그것이 이 지상의 창조의 원리의 전부라고 알고 있었는데, 그렇게 되면 같은 인간끼리는 다 구원받는다고 여겼는데, 그 창조의 원리가 동질성이라고 확정된 그 내부에서 새롭게 예상 못한 비 동질성이 나올 줄이야.


왜 그런가? 땅이 달라져서 그래요. 땅이 달라졌어요. 처음 땅과 나중 땅이 달라요. 처음 땅은 처음 피조 된 세계가 그대로 유지되는 땅이었어요. 심지어 노아홍수 전과 후라도 그렇습니다. 노아홍수 전에 노아나 방주에서 기어 나온 노아나 맨 그 영감이 그 영감이에요. 하지만 하늘나라에서는 노아영감은 더 이상 영감이 아니고 예수님의 형상을 본받아서 시간이 흐르지 않아요. 마치 처음 아담을 만든 것처럼. 처음 아담을 만들 때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처음 아담 속에는 시간이 흐르지 않습니다. 아담은 처음부터 미남이었습니다. 안 봐도 알아요. 아담은 처음부터 미남이었고 이브는 처음부터 미녀였어요. 왜? 그 남편에서 나왔으니까.


그런데 선악과 따먹은 그 날부터 현격하게 그 미모가, 아름다움이……, 그 아름다움이 어느 정도 아름다웠는가 하면, 에덴동산의 격에 맞는, 에덴동산의 화려함에 격에 맞는 그 미모, 그 아름다움이 에덴에서 추방되고 난 뒤에 저주스런 땅의 격에 맞는 식으로 현격하게 노쇠현상이 일어납니다. 얼마나 아담이 일찍 죽었는가? 930까지밖에 못 살았어요. 천년을 넘기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천년은 올림픽 높이뛰기 세계신기록 바(bar)입니다. 천년 넘어가면 그것은 시간이 흐르지 않는 영적세계에요.


그래서 ‘천년 동안 왕 노릇 한다.’는 말씀에서 ‘천년’이란 전부 다 이쪽 세계, 역사적 세계가 아니고 시간이 흐르지 않는 저쪽 세계라는 말이지요. 그래서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다.’에서 그 천년은 그런 개념이에요. 아무리 오래 살아도, 므두셀라가 아무리 오래 살았다고 해도 천년을 넘기지를 못했습니다. 969세, 세계신기록은 세웠지만 천년이라는 높이뛰기의 바를 넘지를 못했어요. 이 말은 뭐냐?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고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죽었다는 말이지요. 태어나면서부터 째깍째깍, 온 몸에 IS같이 시한폭탄을 매달았어요. 인간 폭탄이에요. 내가 시간을 주관하는 것이 아니고 내 몸에 칭칭 감긴 시한폭탄이 내 인생을 주관합니다. ‘보톡스도 소용없다, 째깍째깍! 피부 관리해도 소용없다, 째깍째깍!’


늙어죽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늙어죽는 것은 누구나 똑같이 늙어 죽어요. 중요한 것은 늙어죽어 가면서도 늙어 죽어가는 그 과정을 허비하지 않으시고 그 안에 창조의 원리, 동일성과 비동일성을 담아 버렸습니다. 밭가는 이 두 사람은 가만있어도 둘 다 죽어요. 하지만 그 죽음이 다가 아니라는 거예요. 한 사람은 죽더라도 데려감을 당하는 식으로 천국 가서 영원히 사는 죽음을 보이고 한 죽음은 죽기는 죽었는데 지옥 가서 영원히 사는 죽음, 결국 마지막은 산다는 것은 동일한데 장소가 달라요. 한쪽은 천국 가서 살고 한쪽은 지옥 가서 살고, 주님의 비 동질성의 원리에 적용받는 처지에 우리 피조물이 놓여 있습니다.


인간들이 이 점을 육이 되어놓으니 알 수가 없잖아요. 마태복음 24장의 그 본문을 좀 더 읽어보겠습니다. “그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매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언제 말입니까? 인자가 도적같이 올 때. 천지창조를 감싸고 있는 것이 죽음이라고 했잖아요. 그 죽음이 십자가 죽음이에요. 십자가 죽으신 그 분이 이 땅에 올 때 주와 동질의 것은 따로 뽑혀서 천국가고 주와 동질하지 않는 것, 마귀에 속한 것은 따로 가요.


그것에 대해서 이미 주께서 창세기 3장 15절에서 언질을 줬습니다.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두 노선으로 이미 암시를 했고 예언을 한 바가 있어요. 그 예언대로 그대로 밀어붙입니다. 요한복음 11장 32절에 보면 예수님을 잘 대접했던 마리아가 이런 놀라운 이야기를 합니다. 오빠 나사로가 이미 죽은 뒤에야 예수님이 오시니까 마리아가 하는 말이,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와서 보이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가로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왜 뒤늦게 이제야 오셨습니까?”라고 한 거예요.


마리아가 그런 이야기를 할 때 마리아가 상정하는, 마리아가 염두에 두는 그 땅 개념에는 뭐가 빠졌는가? 자기 동질성밖에 없었고 예수님은 여전히 자기에게 비 동질성으로 남아버렸어요. 무슨 말이냐 하면, 그 땅이 자기 세계, 자기 영역, 자기의 나와바리라는 거예요. 자기 삶의 구역이라는 겁니다. ‘주께서 함께 있었다면 오빠가 안 죽었을 것인데 다른데 외출하고 계셨으니 오빠가 죽었다.’는 거예요. 이 마리아의 고백이 오늘날 우리의 허점을 얼마나 제대로 쏴대고 있습니까? 우리의 평소 살아가는 태도가 이거잖아요. ‘주께서 함께 계셨다면…….’


정말 이 자리에 주님이 안계십니까? 주님이 계셨기에 여러분 오늘 아침에 머리감았습니다. 주님이 계셨기에 여러분의 심장이 뛰고 있는 겁니다. 주님이 계셨기에 어떤 경우는 가끔 설교시간에 졸기도 하지요. 주님이 계셨기에, “졸아라. 졸아야 된다.” 그런 식으로. 마리아는 ‘주님이 계셨다면 오빠가 안 죽었다.’는 거예요. 그러면 나만 있는 영역에서 자신이 생각했던 목표, 주님에 대한 인상은 무엇이었느냐는 거지요. 지금 마리아는 자기 동질성이 옳다는 주장이거든요. 마리아 주장에 의하면 ‘주님이 계셨다면 오빠는 안 죽는다.’는 이것은 마리아의 자기 동질성에서 나온 오류에요. 잘못된 ‘세상보기’고 잘못된 해석입니다. 이 해석은 마리아뿐만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라는 그 말입니다.


하나의 예를 듭시다. 어떤 사람을 만나기로 약속을 해서 그 집을 찾아갔습니다. 그 집 비서가 하는 말이 “지금 이 댁 어른이 외출중인데 오고 계신 중이랍니다. 곧 도착하신답니다. 거실에서 기다리시면 됩니다.”라고 해요. 그래서 그 집 거실에 가지요. 그 집 주인이 없는 상태에서 그 사람이 쓰던 집기류들을 죽 보게 되지요. 그 사람이 평소에 쓰는 물건들을 보면서 자기 나름대로의 느낌이 있을 거잖아요. 보고 있는데 갑자기 주인이 거실로 들어서면서 “미안합니다. 약간 모임이 길어졌습니다.” 하고 들어왔을 때 그 거실의 모든 것은 누가 장악하게 됩니까? 뒤늦게 오셨지만 그 분이 원래 이 모든 것의 주인이라는 것을 더 새롭게 느끼지요, 새롭게.


제 말의 취지를 잘 모르시는 것 같은데요. 이 사람이 거실에서 기다리면서 그 댁 주인이 쓰는 물건들을 보면서 이 생각 저 생각을 하잖아요. ‘저 만년필을 외국에서 들어온 물건 같은데 나도 저런 것 하나쯤 갖고 싶다.’ 이러고 있는데 헐레벌떡 비서가 뛰어와서는 하는 말이 “주인님이 이곳으로 오시는 중에 교통사고 나서 돌아가셨습니다.” 하면 ‘그러면 저건 누구 것이 되지?’ 이렇게 갑자기 욕심이 나잖아요. 주님이 뒤늦게 왔다고 해서 처음부터 주님이 주님 아닌 것은 아니에요.


마리아가 오해한 거예요. “주님이 여기 계셨더면…….” 하는 것은 뭔가 마리아가 착각하고 있는 거예요. 뭐냐 하면, “이것은 내 영역입니다. 이것은 내 것입니다. 우리 오빠는 내 오빠입니다.” 네 오빠가 아니거든요? 자기 오빠가 아니에요. 한 알의 밀알이 죽어야 될 주님의 자기 동질성입니다. 자기 동질성이 아니에요. 같은 오빠, 같은 아버지의 DNA를 받았다고 해서 동질성인지 알아요? 그것은 예수님 오시기 전이지요. 예수님 오시기 전에는 같은 DNA를 받았기 때문에 같은 누이고 동생이고 그래요. 하지만 예수님 오시고 난 뒤에 동질성과 비 동질성은 예수님의 십자가로 결정하는 거예요.


같은 교회에 등록한다고 해서 같은 천당 가는 것 아닙니다. 십자가가 기준이에요. 제 말이 아니에요. “어리석은 십자가를 믿지 않으면 아무도 구원받지 못한다. 이게 복음이다.” 사도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갈라디아서에서 이야기 한 겁니다.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는데 누가 너를 꾀더냐.” 이걸 요즘 말로 번역하면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는데 누가 교회에서 교회 이야기를 하느냐?” 그 이야기입니다. “우리 교회는 커야 되고, 어떻게 전도해야 되고…….” 교회면 십자가 이야기를 해야지 교회 이야기가 왜 나오느냐는 말이지요. 그게 동질성, 같은 성질이 아니기 때문에, 같은 밀알, 그 죽었던 같은 밀알이 안에 없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사람이 비참함을 언제 느낍니까? 내가 추진한 일이 실패로 끝날 때 비참함을 느끼죠. 왜? 현재 내가 가진 소유가 나의 동질성이고 거기에 뭔가 내가 더 가지게 되면 그것이 나의 동질성인데, 그래서 갖고 싶은데 사업을 벌였는데 그 사업이 잘 안되었다. ‘그러면 나는 죽어버릴까? 한강에 뛰어내릴까?’ 그렇게 해요. 주님은 네가 원하는 것을 주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동질로 하고 싶은 것만 주시는 겁니다.


전에 크리스마스 설교할 때 그런 이야기 했거든요. 누가복음 2장의 광야에서 목자가 양치는 대목을 하면서 목자는 분명히 천사의 음성을 들었잖아요. 그러고 난 뒤에 목자가 양치기 협회 회장님 되었습니까? 그런 것 봐도 목자고 맨 비정규직이에요. 그 목자가 밤중에 야근하고 있었거든요.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14) 이 소리 백날 들어봐도 하나님께는 영광이 되었지만 이 목자의 살림살이가 나아졌습니까? 살림살이 하나도 안 나아졌어요. 뭘 원해요? 지금 예수 믿고 대체 뭘 원합니까?


죽어도 부활되는 동질성을 얻어야지요. 안 죽는 동일성, 안 아픈 것 말고 죽어도 괜찮은 동질성, 한 알의 밀알과의 동질성.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두 사람이 같은 성전에 있었어요. 같은 장소에서 같은 예수님 앞에서 바리새인은 지옥가고 거기 엎드린 세리는 천국 갔습니다. 같은 장소에요. 같은 동질성처럼 느껴지는 장소에요. 성전에서 두 사람이 기도한 장소. 이게 무슨 말입니까? 똑같은 장소에서 기도했는데 한 사람은 구원받고 한 사람은 탈락했다. 이게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 장소가 네가 보기에는 네가 있는 장소로 보이나? 아니다. 예수님이 일하시는 장소, 예수님이 기도하시는 장소, 예수님이 순회 재판하는 장소”라는 겁니다. 오늘 오신 분에게만 요한계시록의 주제를 미리 알려드립니다. 올 겨울에 대전에서 할 강의인데 특별히, 특별히 알려드리겠습니다. 요한계시록의 주제는 ‘세상법정화’입니다. 세상을 법정으로 만들었어요. 피고, 원고, 재판관, 검찰관, 그것뿐이에요.


이 세상, 이 법정영역은 주님의 영역이지 우리 영역이 아닙니다. 동질성과 비 동질성을 분류하는 법정이 요한계시록입니다. 이것 아시면 요한계시록이 하나도 안 어렵지~롱! 전혀 어렵지 않아요.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이 땅이 씨 맺는 과목에서 마지막 요한계시록까지 이어졌는가? 그것은 땅이 바뀌었습니다. 처음 땅과 나중 땅이 달라졌어요. 처음 땅은 6일 동안 만들어서 피조물이 지배하는 땅이라면 마지막 땅은 그 피조물을 만드신 주님이 찾아오신 땅이에요. 그 땅이 되게 되면 그 땅은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그러면 이 땅은 폐허가 되는 거예요. 황무지가 되는 겁니다. 지금도 뭔가가 있어요. 숲에 각종 나무가 있고, 햇빛이 비추고, 피톤치드라는 물질도 나오고, 참 아름다워요. 정말 우리 인간들 보기에 심히 좋은 세계에요. 하지만 이것이 불바다 됩니다. 골로새서 3장에 보면,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이미 땅은 이사를 갔습니다. 주님하고 짐 꾸려서 다 하늘로 올라갔어요. 우리의 생명이, 우리의 주민등록이 하늘로 올라갔어요. 그 새로운 땅은 주님이 이 땅에 옴으로 말미암아 땅의 이동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언약의 땅, 약속의 땅은 오신 주님 붙들고 같이 날아가 버리고 남아 있는 땅은 헤어질 땅, 우리는 여기서 방랑자입니다. 객이고 나그네입니다. “♬방랑자여~! 기타를 울려라~!” 이곳에 미련두지 않을 때 성도가 스데반 집사처럼 떠나면서 해야 될 마지막 말은 이것밖에 없습니다. “주여,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다른 말로 하면 “저들도 주님의 용서하심의 의미를 지옥 가서라도 알게 하옵소서.” 그러면 그들이 지옥 온 것이 합당한 하나님의 조치인 것을 지옥 가서 영원히 고통 받으면서 알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용서보다 더 귀한 것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죽음에 휩싸인 우리, 주께서 우리를 늙어죽도록 하시는 그것도 축복인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늙어 죽는 것. 왜? 다른 몸이 준비되었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 몸보다 더 소중하게 우리를 덮치기 때문에 그 약속 안에 주께서 따로 다 마련해주신 그 창조원리, 마지막 때 준비된 것을 오늘 본문에서는 긴 그림자, 석양의 긴 그림자, 창세기 1장부터 시작된 그 긴 그림자가 드디어 마지막 때 예수님 십자가로서 그 실체를 우리가 만나게 된 겁니다.


땅은 뭐냐? 이제는 내가 사는 땅은 땅이 아니라 주님이 사는 땅만이 땅입니다. 거기서 채소, 그 정도가 아니고 정말 생명나무과실을 먹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에게 이런 소식을 알려주시니 감사합니다. 눈에 보이는 내가 전부고,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이 전부고, 눈에 보이는 사람들이 전부고, 눈에 보이는 국가와 이 땅이 전부인 줄 알았는데 주께서 십자가로 새로 만든 땅이 있음을 저희들로 알게 하셨사오니 이제는 한 알의 밀알이 되어서 뿌려진 세상을 향하여 용서할 수 있는 저희들 마음 되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