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강-창 1장 9-10(땅)150916-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1장 9-10절입니다. 구약성경 1페이지입니다.
창 1:9-10
“하나님이 가라사대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칭하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칭하시니라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성경에 땅이 있다, 이렇게 되어 있는데 구태여 땅이 있다는 것을 가지고 성경까지 찾아갈 필요는 없잖아요. 창세기 방금 읽은 본문에 ‘땅이 이렇게 있다. 땅이 이렇게 만들어졌다.’ 한다면 우리는 “땅이 있는 것은 우리도 다 안다. 땅 있는 것 까지 증명하기 위해서 성경까지 들이댈 필요가 뭐가 있는가?”라고 어떤 사람이 묻게 된다면 우리는 이렇게 답변해야 됩니다. 성경을 통해서 땅이 있다고 여기는 그 인간과 성경 없이도 땅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과학자들의 마지막 운명의 차이는 한쪽은 천국이고 한쪽은 지옥이 되는 겁니다.
흔히 눈에 보이는 대로 ‘땅이 있네. 하늘이 있네. 물이 있네. 채송화와 코스모스가 피었네. 가을이 왔네. 이제 겨울이 오겠네.’ 이것이 자신을 구원하는데 전혀 보탬이 되지를 않아요. 시각적으로, 청각적으로 뭔가 파악을 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원래의 인간의 자리로 옮겨갈 수가 없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우리가 보고 들은 이 모든 것은 자기를 더 굳히는데 보탬이 되기에 자리를 이동하기는커녕 자신의 존재의 무게가 점점 더 무거워서 나중에 엉덩이 떼려고 하면 그만큼 힘들어요.
로마에 갔던 사도바울, 사막에서 에티오피아 내시를 만났던 빌립집사, 아예 이 세상을 떠나버린 스데반 집사의 경우에 누가 그들을 데리고 다녔으며 누가 이 땅을 붕 뜨게 했습니까? 에녹도 마찬가지고 엘리사도 마찬가지고. 오늘 본문의 내용은 여기 나오는 땅, 그리고 그 뒤에 나오는 선지자들과 어떤 연관성이 있느냐를 파악해야 됩니다. 땅과 선지자의 연관성이 이어지면 메시아가 그 노선에 계시기에 때문에 그렇습니다. 쉽게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이여, 땅이 무엇이기에 메시아가 이 땅을 방문했어야 했습니까?” 이렇게 물을 수 있는 인간형, 물음이 되는 그것이 의미가 있다고 여기는 인간은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천국 가는 백성만이 그렇게 물을 수 있습니다. ‘땅이 있네. 텃밭 갈아서 먹고 살면 되겠다.’ 이것은 메시아를 경유하지 않고, 주님을 경유하지 않은, 흔히 말하는 흙덩어리 인간이지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간이 아닙니다. 교회 나와도 마찬가지에요. ‘땅이 있네. 농사지어야겠다. 땅이 있네. 사업해야겠다. 여기서 주차장 사업이나 할까? 잘 안 되면 예수님한테 기도해볼까?’ 이것도 마찬가지에요.
자기가 생각한 것을 두고 뒤늦게 예수님을 거기에다 손목 잡아끈다고 해서 그게 주님한테 의미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선지자는 그렇게 살지 않았어요. 그리고 선지자보다 더 확실하게 성도임을 나타냈던 사도행전의 초대교회 성도들도 그렇게 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내가 땅에 산다.’고 산다고 하지 않고 땅 대신 다른 용어를 사용했습니다. 신약의 어려운 용어인데요. “나는 예수 안에서 산다.”고 했습니다. 벌써 골치 아프지요? 구약에 분명히 땅이 있는데, 땅이 있고 그 위에 사람이 있으면 이것은 누가 봐도 ‘땅위에 내가 산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살기 위한 땅으로 주셨다.” 그렇게 정립되거든요.
그랬던 것이 신약에 와서는 뭐냐? “나는 땅위에 사는 것이 아니고 예수 안에 살기 때문에 이 땅을 떠나고 싶다.” 이게 지구탈출프로젝트입니다. 땅을 떠나서 어디로 가는가? 갈 데가 없어요.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추방되고 난 뒤에는 땅 자체가 최종목표지였습니다. “나 이 땅에 안 살고 딴 데 갈래.”가 성립이 안돼요. 사나 죽으나 땅 붙들고 살아야 되고, 거기서 가인은 도시를 만들고 거기서 번성했습니다. 갈 데까지 다 간 거예요. 땅에서 살면 갈 데까지 다 가서 산겁니다. 우리 지금 땅에 살잖아요. 갈 데까지 다 온 거예요. 갈 데 없습니다. 막혀 있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의 땅의 개념은 뭐냐? 한계개념입니다. 한계개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해놓고 벌써 3일째에 이미 한계점에 도달했어요. 빛, 그 다음에, 하늘, 그 다음에 땅, 끝! 끝났어요. 4, 5, 6은 한계점이 있는 세 영역에 내용물을 채우는 것, 그게 4, 5, 6일째에 할 것이고 일단 갈 수 있는 곳은 다 끝났습니다. 땅에 오면 우리는 다 온 거예요. 그 땅도 바다에 밀려서 온 겁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 뭍이 드러나라고 했기 때문에 땅이 바다밖에 없었는데 뭔가 불쑥 튀어나온 쪽이 땅이 되고 바다는 땅 부분에 대해서만 바다가 양보를 해주는 거예요.
이것은 뭐냐 하면, 우리가 땅에 살고 있다는 말도 되고요, 바다의 한계라고 볼 수가 있는데요, 제가 하는 말의 취지가 뭐냐? 땅은 상당히 넓어 보이잖아요. 그런데 땅을 넓게 보지 마시고 하나의 마지막 좁은 띠, 하나의 얇은 띠로 봐서 땅에서 마저 주의 뜻이 어긋난다면 이제는 오갈 데 없이 기다리고 있는 것은 죽음밖에 없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돼요. 바다가 곧 삼킬 수도 있는데 “아, 많이 봐줬다. 바다야! 잠간 물러가 있어.” 이렇게 해서 바다가 잠시 약간 물러갔는데 거기서 띠처럼 생긴 것이 땅이고 거기에 옹기종기 모여 산다, 그렇게 생각하시면 되는 겁니다.
예레미야 5장 22절에 그게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를 두려워 아니하느냐 내 앞에서 떨지 아니하겠느냐.” 너희가 나에 대해서 떨어라, 두려워하라, 그 말이거든요. “내가 모래를 두어 바다의 계한을 삼되.” 바다의 한계가 바로 땅이에요. 모래가 쌓인 둔덕입니다. 그게 땅이에요. “그것으로 영원한 계한을 삼고 지나치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파도가 흉용하나 그것을 이기지 못하며 뛰노나 그것을 넘지 못하느니라.”
지금 바다 쪽에서 파도가 쳐서 물결이 넘실대면서 ‘아, 저 땅 저거 옛날 내 영역이었는데.’ 하는 거예요. 얼마든지 바다가 땅을 덮쳐서 삼킬 수도 있는 문제인데 하나님께서 “그만! 거기까지. 내 허락 없이는 바다야, 땅에 못 들어온다. 네 것인지 아는데 내가 뜻이 있으니 잠간 물러가 있어. 여기까지만, 더 이상은 오지 마.” 하고 친히 당부를 했기 때문에 바다가, 넘실대는 파도가 땅을 점령하지 않는 것이지 바다가 땅에 대해서 벌벌 떨고 있는 처지는 아니라는 겁니다. 땅은 상당히 위험한 곳이라는 거예요. 땅은 위험한 곳이에요. 왜냐하면 바다의 한계이기 때문에.
‘위험하다. 바다의 한계다.’ 이것을 다른 표현으로 하면, ‘세상 끝’이 되는 겁니다. 땅에서 일어나는 일은 곧 하나님께서 천지창조를 둘둘 말아서 취소시키는 사건이라는 말입니다. 천지창조를 취소시킬 때 취소시키는 그 증거는 반드시 땅에서 일어나는데 그것은 뭐냐? 1, 2, 3에서 3, 2, 1로 두루마리나 카펫을 도로 말듯이 하늘, 땅이 다 날라 가버리고 다시 혼돈으로 접어들지요. 지금까지 설교한 것을 한마디로 말해서 많이 봐주고 있다는 그런 뜻이에요.
이걸 우리한테 적용시키면 우리는 지금 교도소 생활하고 있다는 거예요. 갇혀 있는 겁니다. 이리 가도 바다요, 저리가도 바다요, 갇혀 있는 겁니다. 인생은 뭐냐? 갇혀 있는 겁니다. 교도소 생활하고 있는 거예요. 답답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산다는 게 답답하지 않습니까? 벗어나고 싶지 않아요? 지구탈출프로젝트, 준비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구탈출 프로젝트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선지자를 통해서, 메시아 보내서 탈출시킵니다. 땅에서 탈출입니까? 아니요. 바다에서 탈출입니다. 땅은 원래 바다였어요. 바다뿐이었어요.
바다는 뭐냐? 흑암과 수면, 그 위에 하나님의 신이 임했던 그 상태의 반복, 그 연속성의 바다입니다. 하나님은 창조를 했다고 창조한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창조하기 전에 있었던 그 바탕을 한시도 취소시킨 일이 없습니다. 밑에 깔아놓고 시작합니다. 주님께서 여러 가지 기적을 많이 일으켰습니다. 사람들은 주님의 그 기적에 대해서 굉장히 오해를 했지요. ‘땅에 사는 우리더러 행복하게 살라고 기적을 일으켰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행하신 마지막 기적은 요나의 기적, 요나의 표적이에요.
요나의 표적, 기적 다 아시지요. 바다에 죽었던 요나를 물고기가 삼켰다가 다시 뭍으로 토해서 기어 나왔던 그 기적이잖아요. 바다를 경유하지 아니하면, 다시 말해서 혼돈을 경유하지 않으면 땅은 땅의 본래의 의미를 모른다는 겁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설교를 정리해봅시다. 인생은 뭐냐? 교도소다. 왜 갇혔는지 모르면서 갇혀 있는 교도소에요. 내 운명이 어떻게 될지 스스로 결정할 권한이 없습니다. 내 운명을 선택할 선택권이 없습니다. 천당 갈래, 지옥갈래, 그런 것 주께서 묻지도 않습니다. “그냥 살아!”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냥 살라는 거예요.
그런데 거기에 외부에서 의미가 주어집니다. 외부에서 의미가 주어지지 않게 되면 인간은 그 답답함을 견딜 수가 없어요. 사는 것이 맹목적이기 때문에 억지로라도 내부적으로 의미를 억지로라도 조작해내게 날조해서 만들어 낼 필요가 있습니다. 그나마도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의미를 억지로라도 만들어야 되는 거예요. 그 의미가 바로 드라마, 유행가, 영화, 사업, 스포츠, 프로야구, 프로축구, 월드컵, 취미활동들, 수영, 골프, 그런 것들입니다. 그리고 특히 사업 벌리는 그것이 본 의미가 되겠지요. “나 사업하면서 살래.” 그게 자기 존재의미가 되는 겁니다.
이것은 바로 교도소 내에 매점 개설하는 겁니다. 삼송물산, 교도소 내에 매점 하나 차린 거예요. 거기에 장 그래가 근무하지요. 그냥 살자니 의미가 없고 재미가 없잖아요. 남성은 여성을, 여성은 남성을 만나서 부부의 인연을 맺고 결혼을 하게 되지요. 거기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이렇게 합니다. “아내 있는 자는 없는 자 같이 하라. 세상은 곧 꺼지고 날라 간다.” 그리고 이런 멘트까지 날립니다. “네가 아내(남편)하고 결혼해서 너무 부부 사는 재미에 푹 빠지면 지구탈출 프로젝트를 잊어버린다.” 이게 사도바울의 견해에요. 지구탈출프로젝트 잊어버리면 마치 선녀가 목욕하러 왔다가 나무꾼한테 옷 빼앗겨서 나무꾼 애 낳고 사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하지만 선녀의 본성은 어디 갈 수가 없어요. 애 셋 낳고 도망쳐서 날개 옷 찾아 입고 하늘로 올라가잖아요. 그 날개옷을 왜 줬어요? 그 옷을 주지 말았어야지.
문제는 신화나 전설에서는 그냥 선녀가 날개옷 입고 올라갔다는데 그 간 곳이 어디냐는 말이지요. 선녀는 비록 땅에 살고 애를 낳아도 선녀의 선녀 됨의 의미는 갇혀 있는 이 세계가 아니고 외부에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사도바울이 디모데후서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창세전의 의미가 지금 나한테 꽂혔다는 겁니다. 창세전의 의미가. “Are you 선녀?” 이렇게 된 거예요. 선녀에요, 선녀. 요한복음 17장에서도 주님께서 엄청난 말씀을 하셨어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을 인함이니이다.” 이 땅에 속하지 아니했다? 마치 군대에서 “떠날 준비 됐습니까?” “됐습니다!” 이거하고 똑같은 거예요. 군기 잡듯이. “너는 이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야.” 그러면 어디에 속했는가? 하늘에 속했다는 겁니다. “하늘에 속한 자로서 나와 함께 있다.”는 겁니다.
제자들은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어요. ‘이상한 말씀을 하시네?’ 따라서 의미가 외부에서 왔다면 우리가 찾아야 될 것은 딱 하나밖에 없어요. 그 외부에 있는 의미가 이 땅 어디에 꽂혀 있는가, 그것만 찾아내면 된다는 말이지요. 땅인데 땅을 떠나려 하니 선녀의 날개옷이 없잖아요. 룰라 같은 경우에는 “♬ 천사가 찾아와서~” 몸을 흔들면서 노래하는데 천사가 찾아오면 돼요. 그런데 천사가 찾아와도 천사가 온 그곳에 우리를 데리고 갈 수가 없습니다. 이 몸 이 꼴로 갈 수가 없거든요. 더러운 이 죄인의 모습으로. 우리가 알고 들었던 풍월도 전부 다 이 땅에서 훈육 받고, 교육받고, 양육 받은 사고방식인데 그걸 들고 어디로 갑니까? 무거워서 못가지요. 갈수가 없지요.
노아 때처럼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그렇게 하면서 생겼던 그 의미들이 외부에서 온 의미를 차단시켜버리는데요. 매연처럼, 햇빛까지 차단할 정도로 우리는 기껏 내가 되새김한, 내가 토해낸 의미에 완전히 포위되어 있는 입장이기에. 왜 그렇게 하는가? 그나마도 살아가는데 지루하지 않고 행복의 의미를 찾고자 남들 그렇게 하니까 우리도 그렇게 하면서 나름대로의 행복을 추구한 거지요. 취미생활 해가면서 직장생활 하고 사업 벌리고 했는데 어쨌든 성경은 뭐냐 하면, “너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 내가 빼내주겠다.”고 한 겁니다.
빼내준다면 그 빼내주는 방식, 방법이 어떻게 되는가 하는 그 점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개시되는 겁니다. 하늘에서 우릴 데려간다, 그 이야기 말고 땅에서, 갇혀 있는 땅에서 무슨 일들이 일어나고 무슨 사건이 일어나고, 그 사건에 의해서 하나님께서 창세전부터, 우리가 손들고 “제가 천국 갈게요.” 그것이 아니고, 창세전부터 이미 뭔가 정해놓은 사람이 있어요. 로마서 8장에 나오는 이야기잖아요.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하나님께서 하나님 선에서만 알고 계신 사람이 있어요. 쑥덕쑥덕 모의해서 “아, 그 애하고 또 그 애하고요, 알겠습니다. 생명책 명단에 있습니다.” 하나님끼리 쑥덕쑥덕 했는데 그렇게 하면 뭐합니까? 내가 알아야지요, 내가. 내가 알아야 되잖아요. ‘하나님께서 미리 알고 정하신 자를 부르시고.’ 이제 불러주시는 작업이 일어나요. 로마서 10장에 보면,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라고 되어 있거든요.
이 대목을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우리는 “하나님이여, ‘이 사다리 타고 오라’고 하신다면 올라갈 준비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준비된 두레박을 타면 된다.’라는 것이 우리들의 인식입니다. 그거 잘못되었거든요. 그런 식으로 하지 않습니다. 십자가 있다. 십자가 믿으면 된다. 이것은 선교단체에서 이야기하지 성경은 그런 것이 아니에요. 십자가사다리 타 봐야 그 위에는 구름입니다. 구름 타 봐야 밑으로 빠져요. 이것은 할 수가 없어요. 십자가 목걸이 달고 다닌다고 해서 천사가 와서 “너 구원받았구나.” 하지도 않고요.
이야기 다시 해 봅시다. 이미 아신 자를 불러주는데 아신 자만 불러줘요. only you! 미리 아신 자만 불러줘요. 그런데 그 불러주시는 방식이 내가 미리 할 수 있는 가능성의 방식으로는 그 부르심과 만남이 성사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그거 설명하고 그 다음에 땅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를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마태복음 25장에 유명한 말씀이 나오는데요. 거기에 최후의 심판이 나옵니다. 양과 염소로 판가름 나지요. 모든 인간은 남자와 여자, 둘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양과 염소, 이 둘로 되어 있다는 사실은 안 믿는 사람들에게는 금시초문입니다. “너는 양당이야, 아니면 염소 당이야?” 양대 정당체제거든요. “너는 양에 속했어, 염소에 속했어?” 그렇게 심판한다는 말이지요. 마지막 심판 때 양이 되기만 하면 구원 받는데 그 구원 받으면 되지 않겠는가, 하는데 제가 지금 설명하려고 하는 것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 부르심이 어떤 현상을 나타내는가? 하나님께서 이 땅에 있는 자기 백성을 불러줄 때, 땅에 있는 인간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가, 지금 그걸 설명하려고 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그걸 설명해 드려야 ‘아하, 이런 변화가 나한테도 일어나고 있구나.’ 라고 자기 자신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양과 염소가 있는데 예수님께서 양에 대해서 이렇게 합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라고 하니까 양 되는 쪽에서 이상한 소리를 합니다. “제가 언제 그렇게 했습니까?”
이게 굉장히 이상하지요. 평소에 양되는 사람들이 예수 안 믿는 게 아니에요. 이들이 예수 안 믿는 게 아니고 십자가 안 믿는 게 아니고 자기의 행위 자체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이것은 예수님을 위해서 내가 드려야지.’라는 생각을 하지를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생각이고 저것은 나쁜 생각인데 저것은 마귀의 생각이다.’ 이렇게 양 되는 사람들이 의도적으로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둘로 나누지를 않은 거예요. 그런데 자기 행동이 주님께 속했는지 아닌지를 모르는 그것은 양 뿐만 아니고 염소에 해당되는 사람도 마찬가지에요.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라고 하니까 염소에 속한 사람들이 “제가 언제 주께서 어려울 때 안 도와줬습니까?”라고 나온 거예요. 그러니까 양쪽 다 전혀 예수님의 활동에 대해서, 예수 믿는 사람이나 아닌 사람이나 전혀 의식이 되지를 못한다는 이야기를 지금 주님께서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믿음의 행동일거야. 그리고 이것은 불신자의 행동일거야.’ 이렇게 의식을 하면 좋겠는데 그 의식이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양되는 사람들의 특징이 뭐냐 하면,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추후적인, 마지막의 이러한 설명이 이미 그 사람 속에, 자기 속에, 이 말씀이 그대로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비로소 그들은 알게 된 겁니다. 언제? 뒤돌아보면서. ‘아, 주께서 나 몰래, 나의 구원에 대해서 나에게 조금의 힌트도 주지 않고 알아서, 아무것도, 내가 새삼스럽게 뭘 의식해서 아무것도 할 것이 없이 그냥 알아서 양 되게 하셨구나.’ 하는 사실을 그들은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그들은 양 되고 난 뒤에 임금에게만 모든 공로와 영광을 돌리는 겁니다.
방금 이렇게 설명한 것을 간단히 한다면 말씀이 알아서 이 땅에서 활동하신다는 그 말입니다. 말씀이 알아서 활동해요. 말씀이 책속에 그냥 가만 점잖게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문자가 실제 행위로서 성경 바깥으로 튀어나와서 온 세계를 뒤덮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에녹이 이 땅에 살면서 뭘 했느냐 하면, 복음을 전파했습니다(유 1:14). 홍수가 일어난다고요. 에녹이 그냥 산 것이 아니고 복음을 전한 거예요. 그리고 노아도 역시 방주 만들면서 복음을 전했고.
그런데 그 복음이 뭐냐? 이 세상에 홍수가 나서 이 땅이 완전히 물로 덮인다는 것을 언급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에녹이나 노아는 자신의 견해를 밝힌 것이 아니고, 자기가 홍수에서 구원받기 위해서 행동을 똑바로 한 것도 아니에요. 어떤 행동을 잘 했다는 것이 아니고 하나의 스피커라고나 할까, 노아나 에녹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 사람을 장악해서 노아와 에녹으로 하여금 이 지상에 말씀되게 하는 인생을 살게 한 겁니다.
이것을 가지고 로마서 10장에서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라고 한 거예요. 본인이 뭘 전파할 생각은 없었어요. 그냥 살았는데 “하나님께서는 네가 네 삶을 통해서 복음을 전파하고 있구나.”라고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그렇게 해석해버리는 겁니다. 왜 그렇게 하느냐 하면, 내가 천국을 영접해서 선택하는 것이 아니고 보내심을 받은 자는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 방식이 예수님의 열두 제자에게도 마찬가지에요. 열 두 제자가 흩어져서 다닐 때 예수님께서 권능을 행사하니까 그들이 귀신을 쫓아내고, 말씀도 전하고, 병도 고치고, 돌아와 하는 말이 “귀신들도 항복합니다.” 하니까 주님이 하신 말씀이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눅 10:20) 했어요.
왜냐하면, 그 생명책이 가만있는 생명책이 아니고 창세전의 계획, 창조하신 것, 물과 빛과 땅과 하늘, 창조하신 창조세계 속에 하나님의 창세전의 원리가 우르르 쏟아져 들어온 거예요. 제가 말씀 드리는 취지는 이겁니다. 천국 갈까, 지옥 갈까, 선택하지 마시고 그냥 사시면 그게 보내심을 받았기에 내 인생이 말씀과 일치되는, 말씀에 의해서 가동이 되는, 말씀대로 움직여지는 삶이라는 사실을 보내심을 입은 받은 사람, 택한 자, 창세전에 예정된 사람에게만 그런 인식이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보내심을 받았다는 말은 결국 우리로서는 새삼 아무것도 할 것이 없는 거예요. “발걸음도 세시고 머리카락도 세시고, 참새도 그냥 떨어지지 않는데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여기서 ‘너희’라는 것은 불신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택한 백성, 인자에게 속한 백성에게만 하나님께서 지켜주신다는 겁니다. 지켜주는 그 모습이 우리 보기에는 마음에 안 들지만. 이렇게 힘들게 살아가는데 이게 뭐가 지켜주는 건가 싶지요. 힘들게 사는 이것도 복음전파의 내용을 담아서 힘들게 살아가는 거예요.
땅이라 하는 것이 뭐냐 하면, 이미 하나님의 언약에 의하면 서서히 지옥화 돼요. 아브라함이 기도했잖아요. 의인 50명만 있다면, 아니 45명만이라도 있다면, 이런 식으로 기도했잖아요. 아브라함 입장에서는 조금이라도 이 땅에 희망을 가져보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말씀에 의하면 “이 땅이 지옥인데 네가 거기서 이상적인 공동체, 이상적인 교회를 해서 뭐하는데? 그거 포기해라. 네가 일을 안 해도 내가 지금 일하고 있기 때문에 네가 ‘저 사람 나빠요. 그리고 저 사람은 좋아요.’ 그렇게 걱정할 문제는 아니”라는 겁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이 삶을 보세요. 예수님의 삶은 때가 되매 무슨 일을 하고 때가 되매, 또 말씀이 응하게 하려 함이다, 그렇게 되어 있다고요. 그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그럴 때 갑자기 인자의 때가 들이닥친다.’ 예레미야라든지 에스겔 같은 선지자의 특징이 뭐냐 하면, 이 땅에서, 오늘 이것만 하나 기억하세요, 이 땅에 대해서 절망적입니다. 이 땅에 대해서 절망적이에요.
절망적이기에 모두를 용서합니다. 상당히 아이러니 하지요? 절망적이기 때문에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어요. 그런데 사람이 절망이 아니고 이 땅에 어떤 희망을 갖고 있으면 그 사람에게 잘 해보려고 애를 써요. 이웃을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하고, 잘해주고 또 잘해주고. 그 잘해준다는 의미에 뭐가 있느냐 하면, 혹시, 행여나 나의 영역에 내가 원하는 행복이 만들어지지 않을까, 그거 선지자 아닙니다. 그건 눌러 앉은 거예요. 나무꾼하고 애 셋 낳은 겁니다. 그러면 안 돼요. 빨리 날개옷 챙겨서 떠나야 돼요. 나무꾼하고 애 셋 낳아서 살아봐야 그 행복은 하늘나라 선녀에게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행복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복이 없어요. 그걸 아예 기정사실화합시다. 이 땅의 복, 행복이라는 것은 이 땅에 없습니다. 교도소 생활 하면서 무슨 행복입니까? 7번가의 그런 것이 행복입니까? 이 땅에 행복이라는 것이 없어요. 언제 행복하냐 하면, 이 땅이 절망적일 때 도리어 행복 합시다. ‘그렇지. 이 땅을 믿었던 내가 바보야.’ 이게 선지자에요. 이게 노아고 에녹이고 이게 예레미야고 에스겔이고 이사야고 예수님입니다. 그리고 스데반집사고요. 절망 잘 안되거든요. 절망 잘 안되잖아요. 그러면 실망합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절망이 안 되기 때문에 실망이라는 과정을 겪게 하는 거예요. 믿는 도끼에 찍혔다. 더 찍혀야 돼요. 믿기는 뭘 믿어요. 믿을게 있어야 믿지요. 믿음, 소망, 사랑, 이웃을 사랑한다고요? 이웃을 사랑하지 마! 이웃을 사랑하지 마세요. 주님만 사랑하시면 그게 이웃사랑 됩니다. 참 절망 안돼요. 절망 안 되기 때문에 주께서는 실망케 하십니다. 혹시나, 했다가 ‘역시나!’로 끝나게 만들어요. 이 세상에 재미있는 일 있다고 덥석 물면 그 재미있는 일이 며칠, 몇 개월 안갑니다.
갑자기 권태롭고 시시하고 시들하고. 인간의 욕망이라는 것은 그 재미가 오랫동안 가지 않거든요. 이것 말고 더 자극적인 것, 이것 말고 더 짜릿한 것, 이것 말고 내가 남들보다 더 인기 얻고 사랑받을 뭐가 없는가, 를 찾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는 그런 분 없습니다만 만약에 어떤 분이 사법고시에 합격했다. 아무개 집사 아들 사법고시에 합격했다. 그런 것 붙이면 안 되겠지만 우리 교회에 플래카드 내걸었다고 칩시다. 합격 했습니다. 사법연수원에 들어갔어요. 그래서 변호사 될 거예요. 그래서 뭐? 합격했다는 그 순간부터 합격했다는 그것이 시시해져요. “이젠 돈 벌어와. 네가 합격 했으니 신부 감은 재벌 3세 하든지 대한이 항공사 동생으로 하든지 데려와. 이제 적어도 판사나 검사, 변호사니까 격에 맞는 신부 구해와.” 이렇게 되지요.
“우리교회 교인 한 5천명 되면 어떻겠습니까?” 하는데 5천명 되었다 칩시다. 그래서 뭐? 뭐? 아까 기도했습니다만 사람의 의도와 목적이 지금의 나를 힘들게 해요. 나를 어지러울 정도로 스트레스 받게 합니다. 정신도 못 차리게 힘들게 해요. 성도의 삶이란 딱 한가지 밖에 없습니다. 절망하라! 실망하라! 그러면 세상 사람들은 뭐 하는가? 세상 사람들은 행복을 위해서 영웅을 찾습니다. 그게 니므롯이에요. 니므롯의 고향땅에 뭐가 있는가? 바벨탑이 세워집니다. 그 바벨탑 만드는 성질 안 죽었습니다. 아직도 안 죽었어요. 자식 낳고 예쁘다고 돌잔치 해주고 또 탑하나 세웁니다. “실 잡을래, 청진기 잡을래, 마이크 잡을래?” 마이크 잡으면 아나운서, 실 잡으면 오래 사는 것, 청진기 잡으면 의사되고, 돈 잡으면 돈 잘 벌고. 성경책 잡는 애가 누가 있어요? 성경책 잡으려고 하면 “그런 거 잡지 마!” 하지요. 나중에 수능이나 실패하고 난 뒤에 신학교 가라고 할 거예요.
없는 희망, 성경에서 창세전에 예정된 자에 대해서는, 보내심을 받은 자는 성경말씀 그 뜻대로 되는데 우리가 워낙 세상 적으로 나만의 행복과 인기 얻는 것,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 또는 돌이 떡 되게 하라, 인기 얻어라, 세상 부귀영화, 이게 너무 있어서 주께서는 보기에 너무나 안 되었던지 또 우리에게 실패, 실패, 실망, 실망……, 우리는 또 얼마나 고집이 센지 일곱 번 넘어져도 여덟 번 일어나서 희망을 얻어요. 그 희망 또 부술 거예요. 행복은 위에 있다니까요? 행복은 위에 있어요, 위에.
주님께서 우리를 실망케 할 때 십자가 들이대잖아요. “그래, 네가 희망 품을 때 나는 죽었다. 됐냐? 네가 행복 찾을 때 나는 죽었다. 됐냐? 누가 믿었으리요? 누가 알리요? 채찍에 맞음으로, ‘네가 한 번 채찍에 맞아볼래?’ 내가 채찍에 맞음으로 네가 나음을 입었다.” 우리는 그 사실을 머리로는 안다고 하지만 전혀 현실감이 뚝 떨어져요. 내 존재감이 아닌 그런 것은 듣기 싫어요. 듣기 싫다가 내가 세상에 대해서 실망할 때 비로소 이미 내가 그 쟁반 위에, 그 피 묻은 쟁반위에 이미 놓여 살기 위해 주께서는 그렇게 하신 것을.
그래놓고 부름 받으면 “제가 언제 주를 위해서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었습니까? 제가 언제 주가 배고플 때 먹을 것을 주었습니까?” “너는 모르지만 나는 다 안다. 내가 말씀대로 너를 키워냈다. 강도? 네 선배다. 세리? 네 선배고, 창녀? 네 누님이 저기 가 있다. 그 사람도 그런 식으로 주의 말씀대로 용서해서 갔다. 그러니 너도 세상을 용서해라.” 주기도문에 나오지요? “죄 지은 자를 용서함 같이 너도 용서해라. 어차피 지옥 가잖아. 어차피 지옥 갈 거 행복 찾아서 까부는데 너는 천국 갈 사람이니 그거 좀 피해 입었더라도 봐 줘라. 허허, 하고 웃어넘겨라.”
회사취직해서 회사비리, 상사비리 캐내고 그러지 말고 그냥 월급 꼬박꼬박 주면 잘 받아 챙기고, 그렇게 살다가 퇴직해서 또 그냥 살면 돼요. 어차피 고치겠다는 것이 어떤 의미에서는 정의로운 것이 아니에요. 그걸 고치게 되면 내 마음에 드는 회사가 될 것이고 그러면 나는 거기서 소박한 행복을 찾게 돼요. 행복을 찾게 되면 나무꾼 하고 같이 사는 철딱서니 없는 선녀 됩니다. 주께서는 이 땅에 발을 못 붙이게 만들어요. 항상 떠나게 만듭니다. 지구탈출프로젝트. 주님과 더불어서 가는데 우리가 주님을 믿어서 가는 것이 아니고 주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았기에 모든 말씀으로 내 인생이 아니고 주님이 만들어가는, 주께서 조성해 나가는 제2, 제 3의 주님의 인생, 사도바울의 생을 우리의 인생을 통해서 반복시키는 그 작업을 오늘도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끝으로 한 말씀, 에스겔 47장에 보면 이 땅이 성전에서 나오는 그 생명의 물로 다 덮여버리지요. 그게 바로 천국입니다. 천국은 어린양의 생명수에서 이 땅 말고 다른 땅이 십자가에서 나오는 생명수, 주께서 주신 생명을, 영원한 생명나무 과실을 먹는 그것이 이 말씀대로 우리에게 적용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팍팍하게 할 것이 아니고 그냥 대충 넘어가는 인생 살게 하옵소서. 따져봐야 천국 될 세상도 아니고 지적해 봐야 알아먹을 인간도 아니고 주의 말씀만 쏟아내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