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새(창1;20-23) 151007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5. 10. 18. 06:42

2015-10-07 20:31:09 조회 : 107         
   새 151007 이름 : 이근호 (IP:119.18.86.67)   

새(창세기 1: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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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5-10-07 21:05 


2015년 10월 7일                        본문 말씀: 창세기 1:20-23

(1:20)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들은 생물로 번성케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1:21) 하나님이 큰 물고기와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1:22)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어 가라사대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다 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1:23)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다섯째 날이니라

5일째 벌어진 하나님의 창조 행위는 첫째날과 6째날의 중간과정으로 개입된 것입니다. 이 말은 6째날로 마감될 창조원리가 첫째날로부터 점차 추가적으로 첨가된다는 말입니다. 5째날의 창조로 알려진 첨가될 창조원리는 바로 ‘갇힌 세계 안에서의 자족성’입니다. 새는 아무리 창공을 휘저으며 날아도 창공 안에 갇혀 있습니다.

물고기가 아무리 신나게 물 속에서 헤험쳐도 물 밖에 나오면 죽습니다. 물이라는 환경에 갇혀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새나 물고기가 불만을 갖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족합니다. 바로 이런 창조원리가 6일째 만들어지는 피조물에게 그대로 첨가되어 이어지게 됩니다.

인간이라는 피조물도 이 원리에 준해야 합니다. 즉 새는 그 신체 단독적으로 창조를 알리는 존재가 아니라 자기를 둘러싼 환경의 본질을 표현하는 차원에서 창조되었습니다. 즉 “나 주변에서는 공기로 가득 차 있다”를 증거하는 겁니다. 물고기는 그저 자신의 생존으로 만족하는 것이 물고기의 사명이 아니라 “나 주변에서 물 천지다”라는 것을 말해주는 용도로 창조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6일날 만든 인간의 용도는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6:33에 보면, “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혼돈에서 시작된 창조가 인간 창조로 마감이 된다면 이는 주변 환경도 함께 완성된 면을 보이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그 나라와 의’로 가득찰 때 비로소 하나님의 창조된 그 완성을 보이게 됩니다. 인간은 자기 주변에 가득찬 ‘그 나라와 의’ 안에서 자족해야 하는 존재라야 참 인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존재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겁니다. 자신의 생존을 자랑하라는 것이 인간의 존재 목적이나 이유가 아닙니다.

새나 물고기 같은 경우, 하늘의 궁창이나 바다의 궁창이 그냥 그대로 비워두는 것이 아니라 창조물로 채워지는 것은, 마치 젤리 속의 알갱이처럼 그 존재 의의가 고정적인 자리를 활당받는 식으로 존재하는 겁니다. 운신의 폭이 그다지 많지 않다는 겁니다. 그 세계에서의 진동폭이 좁은 편입니다.

쉽게 말해서 일개 피조물이 주변이 대한 영향력이 대단치 않다는 겁니다. 이것이 인간 창조까지 전수되는 창조의 원리입니다. 일개 피조물들이 아무리 용쓰고 애쓰고 나댄다 할지라도 그것으로 인해 이미 고정적으로 꽉차 있는 주변환경의 성질이 바뀔 리가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러한 창조원리가 이미 범죄한 현 인간 세계에서는 무시당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개인적으로 울분이 넘치면 고래고래 고함칩니다. 그런다고 해서 하늘의 해와 달과 별이 마구 땅에서 떨어집니까? 산에 있는 감나무의 감도 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갈릴리 바다를 건너갈 때에 갑자가 풍랑이 일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에 의해서 놀랬던 점은, 예수님의 말발로 인하여 풍랑이 잔잔해졌다는 겁니다.

이는 자신들이 아무리 몸부림쳐도 바다와 풍랑이 잔잔해지지 않는다는 점을 이미 알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창세기 1:28에 보면,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참된 사람에게만 실효성있는 효과가 나타난다는 겁니다. 즉 창조세계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의와 나라는 환경이 완성이되면 그 가운데 있는 인간이 당연히 하늘과 땅과 바다의 창조세계를 당연히 영향력을 행세하는 위치에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인간은 이미 창세기 3장에 범죄했습니다.

그렇다면 창세기 1장의 권한은 당연히 인간으로부터 행사될 수 없습니다. 파괴당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창조행위는 이 죄많은 세상에서 파괴행위 형식으로 작용합니다. 즉 새들이 노니는 공간은 천사들이 활동하는 공간이 됩니다. 인간들은 자신들이 범죄한 이후에 스스로 물질화되어 갑니다.

이 물질화되도록 유도하는 것은 이미 환경상 죄로 가득찬 성질을 발휘하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로 인해 인간들은 자신의 생존과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일방적으로 왜곡된 세계관을 형성하게 됩니다. 신(神)도 자신들이 구상한 우상들을 대체합니다. 모두 자기 자신들을 위하여 조력해주는 신들로 채워집니다.

이러한 인간들의 범죄 행위에 대해서 하나님의 창조행위는 그 환경을 파괴하고 새로운 의로움으로 교체하는 작업으로 진행됩니다. 이사야 45:8에 보면, “너 하늘이여 위에서부터 의로움을 비 같이 듣게 할지어다 궁창이여 의를 부어 내릴지어다 땅이여 열려서 구원을 내고 의도 함께 움돋게 할지어다 나 여호와가 이 일을 창조하였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의로운 작업은 병행되는 새로운 인간의 등장을 말해줍니다. 물고기가 물을 세계를 표현하고, 새가 공기의 세계를 알린다면 하늘에서 오는 메시아의 의의 세계를 알립니다. 이는 곧 환상적이고 망상적인 인간 이익 위주의 세계관의 파괴를 의미합니다. 요한게시록 8:7-9에 보면,

“첫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피 섞인 우박과 불이 나서 땅에 쏟아지매 땅의 삼분의 일이 타서 사위고 수목의 삼분의 일도 타서 사위고 각종 푸른 풀도 타서 사위더라 둘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불붙는 큰 산과 같은 것이 바다에 던지우매 바다의 삼분의 일이 피가 되고 바다 가운데 생명 가진 피조물들의 삼분의 일이 죽고 배들의 삼분의 일이 깨어지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는 인간이 자체적으로 생존이 용납되지 못하는 세계로 바뀌어집니다. 하늘이고 바다고 땅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판국에 새 한 마디라가 등장하는데 그 새는 주변의 변동사항을 창조원리에 준해서 소개합니다. “내가 또 보고 들으니 공중에 날아가는 독수리가 큰 소리로 이르되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화, 화, 화가 있으리로다 이 외에도 세 천사의 불 나팔 소리를 인함이로다 하더라”(계 8:13)고 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현 세계는 에수님의 죽으심으로 인하여 더 이상 하늘의 달과 해도 별도 소용없고 예수님의 보좌의 빛으로만 조성되는 그런 환경과 그 빛이 없는 깜깜한 지옥으로 구성됩니다. 바로 이 사실을 증거하는 새의 기능이 오늘날 성도의 기능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개인적인 구원이 아니라 환경을 통한 구원임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5-10-08 06:34 
7강-창 1장 20-23(새)151007-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1장 20-23절입니다. 구약성경 1페이지입니다.


창 1:20-23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들은 생물로 번성케 하라 땅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하나님이 큰 물고기와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어 가라사대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다 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다섯째 날이니라.”


오늘 본문에 나와 있는 하늘, 궁창, 그리고 물, 이 모든 것은 처음에 혼돈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창세기 1장에서 알 수 있지요. 혼돈에서 하늘과 땅과 바다가 나왔다면 하늘과 땅과 바다, 텅텅 비어있는 그 자체가 혼돈에서 창조하신 그 창조의 목적이 다한 것인가? 그것이 마지막인가? 그것으로 끝인가? 그게 아닙니다. 하늘에다 하나님께서 또 낯선 새로운 창조물을 채우시고 물에는 또 특별히 창조물을 만드셔서 바다와 물을 채우시고 여섯째 날에는 땅 위에 하나님이 만드신 짐승과 인간으로 채우십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의 다섯째 날은 첫째 날에서 여섯째 날로 가는 중간과정에 있다,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중간과정에서 첫째 날 만들고 바로 인간 만들지 않고 왜 둘째, 셋째, 넷째, 다섯째 날을 경유해서 인간을 만드셨는가? 그것은 인간이라는 그 안에, 첫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 있던 그 창조원리가 인간 속에 종합적으로 응축되어서 포함이 되는 양으로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인간을 톡, 깨보면 첫째 날부터 여섯째 날의 인간에 오기까지의 발전된, 점점 더 전개된 모든 창조원리가 한꺼번에 들어있어서 다 쏟아지게 되어 있어요.


오늘 설교제목이 ‘새’인데 이 새가 품고 있는 하나님의 창조원리는 무엇인가? 새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표현하고자, 드러내고자 하는 창조원리가 무엇인가? 갇힌 세계 안에서 자족적으로 살아가는 존재가 새입니다. 새가 창공을 마음껏 나는 것 같지만 하늘 바깥으로 벗어날 수 없고 바다의 물고기가 마음껏 헤엄치는 것 같지만 물이라는 그 제한된 환경 밖으로 나가버리면 죽습니다. 살 수가 없어요. 고기는 물 안에서만 고기고 새는 공기가 있는 하늘에서만 새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새라는 이 움직이는 창조물, 물고기라는 창조물은 그 움직임 하나하나가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의 속성을 자기 몸체를 통해서 표현해주고 있다고 하는 거지요. 새는 하늘을 묘사하는데 적합해요. 나는데 적합하니까. 물은 자기 주변에 물이 둘러싸여 있다는 것을 표현하는데 적합합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뭐냐? 여섯째 날에 만든 인간은 무엇을 표현하는데 적합한가, 하는 겁니다. 새나 물고기의 특징이 뭐냐? 방금 제가 언급했습니다. 갇혀 있는 세계를 묘사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창조한 모든 창조물의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갇혀 있다는 거예요. 갇혀 있는데 이상하게 즐거워요. 자족하니까. 갇힌 세계에서 자족하니까. “갇히게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하는 뜻이에요. “가두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만약 새라면 “내가 인간되지 않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는 거예요. 내가 만약에 물고기라면 “내가 낙타되지 않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내 존재를 드러내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고 나와 더불어서 내가 처해있는 환경을 내 몸을 통해서 마음껏 발휘할 수 있게 된 것에 대해서,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의 솜씨고 창세기에 보면 “보기에 심히 좋았더라.”가 숭숭 계속 나올 수 있도록, “하나님, 참 보기 좋네요.” “내가 보기에 좋아.” 그것이 계속 우러나올 수 있는 그 환경을 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하겠지요.


그런데 제가 아까 이야기했듯이 새나 물고기는 인간이 되기 전의 중간과정이라고 했어요. 그 말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여, 절벽이 있는데 훌쩍 뛰어서 날고 싶습니다. 저로 하여금 날개가 있게 하옵소서.” 성문종합영어라는 문법책에 나오는 가정법과거단락의 유명한 영어구절, “만약에 나에게 날개가 있다면……” 이젠 다 잊어버렸습니다만. 하나님께서는 그걸 인간에게 허락하지 않습니다. “너는 날개 없어도 돼. 네게 날개가 있는 것이 너의 임무가 아니야.” 비행기 만든 것, 라이트 형제의 실수입니다. 인간은 날 필요가 없어요. 잠수함 만든 것? 아이고, 그것도 실수입니다. 인간은 물속에 들어갈 필요 없어요. 그럴 필요 없습니다. 그거 하라고 인간 창조한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 잠수함 만들었습니다. 천국 보내주세요.” 말이 안돼요. “하나님, 제 겨드랑이에 날개가 붙어 있으니 천국 보내주세요.” 안됩니다. 인간은 인간다워야 돼요. 인간답다는 말은 인간이기에 필요했던 주어진 환경이 있는데 그 환경을 마음껏 묘사해야 될 임무가 인간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처음에 인간들은 실패했어요. 인간이 실패하고 난 뒤에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것은 새의 공간이 천사의 공간으로 바뀝니다. 새가 날던 그 공간, 하늘궁창이 천사가 활발하게 나는 공간으로 바뀌어요. 그게 요한계시록에 나옵니다.


요한계시록은 “인간들아, 세상이 너희들의 생존을 위한 환경이라고 착각하지 마라. 모든 환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표현하기 위한 환경이다. 환경은 따로 있고 홀로 있는 것이 아니다. 환경은 이 환경을 주도하는 그 주인공을 묘사하기 위해서 환경이 있다. 그런데 그 환경에 대해서 인간들은 적절하지 않고 적합하지 않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것이 혼돈에서 인간을 만드신 그 목적 안에 포함이 되어 있어요. “그렇다면 목사님, 인간을 만드신 목적이 뭡니까? 뜸들이지 말고 단도직입적으로 인간창조의 목적이 뭡니까?”라고 묻는다면 그 점에 대해서는 마태복음 6장에서 예수님께서 언급했습니다.


“새들을 보아라. 창고도 만들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은 갇힌 세계에서 자족한다. 마음껏 그들을 하나님께서 친히 기르신다.” 이렇게 했어요. “들풀을 봐라. 너희들 보기에는 그냥 잘라서 아궁이에 집어넣는 그 들풀, 그 들풀을 하나님께서 친히 기르신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찾아오신 목적이 너희들 들풀 만들기 위해서도 아니고 참새 되도록 하기 위해서도 아니다.”는 말이지요. 들풀은 셋째 날이고 새는 다섯째 날이잖아요. 창조는 일곱째 날로 완성이 되고 인간은 여섯째 날로 마감이 되는 겁니다.


“우리는 뭘 해야 됩니까?” “너희는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라고 되어 있어요. 이 말은 “인간아! 이 전체를 덮고 있는 이 모든 환경이 네 눈에는 물질적 환경으로 보이지? 내 눈에는 ‘그 나라와 그 의’가 지배하는 환경이 된다.” 하는 겁니다. 이것은 새에게 주어진 창조원리가 인간에게 같은 방정식으로, 같은 형식으로, 인간의 방식으로 그 틀이 그대로 오는 거예요. 새가 그 닫힌 세계에서 마음껏 자족한다는 것은 쉬운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양갱속의 밤톨’이라고 보면 돼요. 다른 말로 ‘젤리 속의 밤톨’ 단팥죽속의 곶감!


제가 왜 그런 표현을 하느냐 하면, 운신의 폭이 좁아요. 인간이 설쳐대고 큰소리쳐봐야 그 소리가 밤에는 한 300미터쯤? 글쎄요, 약 500미터쯤이나 가겠어요? 목청 큰 사람이 밤중에 조용할 때 소리 지르면 그 정도는 가겠네요. 그러나 도시 한복판에서는 고함질러봐야 100미터도 안가요. 인간이 설치고 애쓰고 노력하고 울부짖고, 그런다고 해서 달이 눈물 흘리고, 해의 궤도가 바뀐다거나 멈추거나 하지 않습니다. 찻잔 속의 진동밖에 안돼요. 백날 해 봐야 찻잔속의 물 잠시 흔들리다가 다시 고요해져요.


우리가 인간이니까 인생에 대해서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인생이 뭐냐? ‘찻잔속의 고요’라고 보면 됩니다. 백날 설치고, 나대고, “안동 최 씨 셋째 아들 사법고시 합격” 이렇게 붙여놔도 그거 몇 개월 가지도 않고요, 아무개 아버지 죽었다고 상여매고 온 동네 돌아다녀도 죽은 그 사람 일 년도 안 되어서 잊어버려요. 너무 잊어버리니까 제사지내잖아요. 제사지내고 난 뒤에 맛있게 먹고서 또 잊어버리고. 인생이라는 것이 뭐냐? 쉽게 잊어버리는 거예요. 분명히 있어요. 있는데 곧 사라져버려요. 그것을 안개라고 하잖아요. 야고보서 4장에서 인생을 안개라고 하지요.


다시 말해서 안개라는 말은 뭔가 환경에 대해서 그다지 영향력을 줄 수 없는 존재라는 말이고 그게 인간입니다. 가족들 모여서 동해바닷가 가서 대게 먹었다. “맛있더라.” 게 맛있게 먹어봐야 일주일도 안 되어서 ‘그게 무슨 맛이었더라?’ 다 잊어버려요. 인간이 왜 설칩니까? 설쳐봐야 진동의 폭이 얼마 안돼요. “♬울다가, 울다가” 백날 울어도 소용없어요. 아무 소용없어요. “왜 우리가 울고 또 울어도 내 인생은 안 풀리고 왜 내 운명은 안 바뀝니까?”라고 물으면 주님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내가 산 위에서 설교했잖아. 너는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고 했지 언제 네 출세를 구하라고 했던가!” 쓸데없는 것을 구해놓고 “왜 안 이루어집니까?” 하고 있어요. 너는 너 자신의 욕망이 아니라 네가 속해 있는 환경과 같이 가는, 환경과 같이 매여 있고 엮여 있는 것이 인간존재라는 말이지요.


국악 하는 소녀가 명창이 되고자 하는데 득음이 안 되네요. 흔히들 하는 방법으로 폭포수 앞에 앉아서 “♬어허~” 해도 득음이 안돼요. 보다 못해 아버지가 약을 먹여서 장님을 만들어놨어요. “이년아! 네가 한이 맺혀야 득음이 된다.”고 그게 <서편제>아닙니까? 득음한들 늙어죽는데요? 득음한들 그게 뭔데요? 새가 지저귀는 것이 득음한 겁니까? 물고기가 헤엄치는 것이 득음하는 식으로 한 거예요? 수영선수에요? 오징어가 갈치 되게 해달라고 간절히 통성기도 했어요? “주여, 주여! 갈치 되게 하옵소서.” 이렇게 기도했습니까?


본문에 보세요.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했다는 말이지요. 이 말은 뭐냐? 종류대로 해도 하나님의 영향력은 너희들에게 미치는 것이 똑 같다는 거예요. 종류대로, 각양 종류대로, 갈치, 멸치, 문어, 멍게, 광어. 회 종류 다 나옵니다, 오징어, 어떤 종류도 그들이 속해 있는 것은 물, 물이라는 동일한 환경 속에서는 그들의 역할은 동일하고 그들이 받은 사명은 동일합니다. “내 바깥에 나를 둘러싼 물 있다.” 이것이 동일합니다. 인간이라면 “내 바깥에 나를 둘러싼 그 나라와 그 의가 있다.” 그것만 하면 돼요. 그러면 그 나라와 그 의가 뭐냐? 그것은 지옥이지요, 뭐. 지옥과 천국입니다. 내 밖에 천국이 있고 지옥이 있다. 그게 그 나라와 그 의입니다.


60이 되고 70이 되어도 언제 자기 자신을 아나요? 관심도 없고 말씀은 봐도 모르고. 방금 제가 중요한 이야기를 했어요. 인간은 성경을 봐도 몰라요. 죄사함에 대해서 “어떻게 죄사함 받았습니까?” 설명할 길이 없네요. “예수 믿으면 됩니다.” 그게 거짓말이에요. 예수 믿는다고 죄사함 받는 것이 아니에요. 내가 예수 믿는다고 작심을 했기에 이것은 죄사함이 되지를 않습니다. 예수 믿어도 안 되고, 십자가 믿어도 안되고. 왜? 내가 믿으니까. 이게 안되는 거예요. 주님 영접해도 안되고. 왜? 내가 영접했다고 착각하기 때문에. 어떤 방법이 없어요. “산수유, 남자에게 참 좋은데 설명할 길이 없네!” 설명할 길이 없어요.


왜 설명할 길이 없나? 이것은 설명할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설명을 해버리면 우리에게서 언어가 나오거든요. 그런데 우리의 언어는 이미 범죄한 언어가 되어서 하나님께서는 그 해석과 해명을 쳐주지를 않습니다. 마태복음 7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오는데 참 무서운 말씀이지요. 마태복음 7장 22절, 23절을 읽어보겠습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라고 되어 있어요.


여기 보면, 주의 이름을 불렀고요. 귀신을 쫒아냈어요. 권능을 행했습니다. 선지자 노릇을 했습니다. 뭐가 더 필요합니까? 뭐가 더 필요해요? 문제는 ‘네가’ 했다는 거예요. ‘네가’ 네가 뭔가 노력을 했다는 거예요. 주님이 하신 것이 아니고 네가 한 거예요. 우리가 우리말로 했다는 겁니다. 우리말은 우리 속에서 나왔기에 이것이 헛방이고요. 요한복음 1장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하지요. 다른 말씀이 있어요. 세례요한은 자기 말을 하면 안돼요. 세례요한은 쇠해야 돼요. 흥해야 할 말씀은 따로 있습니다. 세례요한은 그냥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에요.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


세례요한은 자기가 죽는 것을 영광으로 알았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저를 죽여주셔서.” 이랬을 거예요. 왜? 그 전에 나는 쇠해야 된다고 미리 이야기했기 때문에. 내가 행하면 어떤 문제가 생기느냐 하면, 내 내가 사는데 필요한 내 바깥에 있는 환경을 내가 구성하게 되면 그 때는 마귀가 도와줘요. 창세기 1장 28절을 보게 되면 이 본문 볼 때마다 저는 속에서 부글부글 끓고 부들부들 떱니다. 너무 거짓말 해석이 많아서 부들부들 떨어요. 이 구절이 무슨 말씀이기에 저를 이렇게 떨게 만드는지 이게 그렇게도 무서운 말씀인지를 여러분이 실감할 수 있을지도 혹시 모르겠어요.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라는 이 말씀이 왜 그렇게 겁이 나는 말씀이냐는 말이지요. 이것이 인간이 범죄하기 전에 주신 말씀이잖아요. 그러면 이 말씀은 누가 실행하느냐 하면, 범죄하시지 않은 예수님만이 행할 수 있는 이야기인데 인간이 범죄하고 난 뒤에 이 말씀을 자기가 해보겠다고 나대고 설쳐대니까 저는 그에 대해서 분노에 벌벌 떨 수밖에 없는 겁니다.


이 본문 가지고 만들어낸 단어가 몇 글자, 일곱 자에요. ‘칼빈주의문화관’ 대학에 있는 여러 선교단체들이 다 여기서 나왔어요. 대표적인 구호가 뭐냐? 김우중 회장이 했던 말,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 그 비슷한 말, “Boys be ambitious!” 세상은 너를 기다리고 있다, 젊은이여, 눈을 넓은 세계로 향하라, 그래서 뭐하는데? 다스리고 정복하겠다는 겁니다. 네가 뭔데? 네가 뭔데! 자기가 예수 믿는다는 거예요.


근본적으로 이걸 다스리고 정복하려면 주님이 옛날에 나 위주로, 성령 받고 거듭나기 전의 나를 파먹어야 돼요. 나를 파멸시켜야 돼요. 그래서 창세기의 이 원리는 나중에 이스라엘 역사 속에 이스라엘을 파괴하는 원리로 작용합니다. 죽지 아니하면 다시 태어나는 것은 없다는 원리입니다. “제발 그런 소리 하지 말고 좀 죽어줘. 네가 죽어주는 것이, 세례요한처럼 죽는 것이 내 일, 하나님의 일이다. 제발 좀 죽어줘.” 입만 살아서 나불나불, 입만 살아서 다스리겠다고 나서고 정복하겠다고 나서는 거예요.


하나님이 너에게 맡겨준 사명은 딱 하나밖에 없어요. 이걸 표어로 집에 붙여놓으면 좋아요. 세자입니다. “죽어라.” 느낌표 까지 해서 “죽어라!” 네 자에요. “제발 좀 죽어줘. 난 너 때문에 못살겠다. 네가 나대고 설쳐대서 못살겠다.” 집안에서도 너만 조용하면 아무 문제없는 거예요. 남자가 운전할 때 남자가 운전 잘하는 방법은요, 여자가 조수석에 안앉으면 되고 기어이 앉고 싶다면 가만있으면 돼요. 가만 못있겠거든 주무시면 돼요. 그러면 안전운전으로 안전하게 도착됩니다. “손님, 다 왔습니다.”


그런데 옆에서 떠들어대기 시작하면, 성질나면 잘해보겠다고 한 그 짓이, 자기가 해보겠다던 그 나라와 그 의가 그 둘을 일치감치 하늘나라에 가게 만듭니다. 죽게 만들어요. 왜 자꾸 간섭하고 잔소리를 하는가? 자기세계가 따로 있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잘되는 세계가 따로 있어요. 그러나 이미 우리는 창세기 3장에서 범죄한 인간이에요. 내가 잘되면 안돼요. 그게 아니고 내 위주로 돌아가는 세상이 주님에 의해서 파괴돼야 됩니다. 스스로 자기세계, 자기 꿈과 희망을 접을 인간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자기 나라와 그 의를 구할 특별한 분을 독생자이름으로 이 땅에 투입을 하신 거예요. 그리고 “나는 창조원리대로 한다.” 사람들은 이 말 들어도 무슨 말인지를 모릅니다. “창조원리대로? 그럼 그렇게 하세요.” 이럽니다. 인간들이 범죄하고 난 뒤에 인간의 주변 모든 것은 자기가 다스리고 정복하다 보니까, 인간은 흙으로 되어가는 물질이거든요, 그렇게 자기가 물질화 되다 보니까 주변의 모든 것을 물질로 만들었어요. 처음에는 창조원리가운데서의 자연이고 새인데 그게 아니고 인간위주, 나 위주, 인간들 좋으라고 비가 와야 하고, 인간들 좋으라고 달은 떠야 하고, 인간들 좋으라고 햇빛은 빛을 제때 비춰야 하고, 모든 것이 죄악된 인간중심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면서 거기에 가짜신들을 생산해서 집어넣은 거예요.


“태양신에게 잘 빌면 농사가 잘되고, 낙뢰, 폭우, 지진, 바다의 신에게 인간제물을 바치면 파도가 잠잠해지고 고기는 잘 잡힐 것이다.” 이런 식으로 바다를 다스리고, 하늘을 다스리고, 땅을 다스린 거예요. 그게 전부다 우상덩어리인겁니다. 이스라엘도 이름만 하나님이지 가나안종교, 바알종교에 현혹되어서 같은 성질이니까 단박에 물들어서 같이 이방나라 되어 버린 거예요.


인간위주로 세상이 바뀐 겁니다. 그게 오늘날로 쉽게 하면 과학이라는 거예요. 다 사람 좋으라고 있는 거예요. 명왕성, 천왕성, 은하계, 다 사람 좋으라고 있다는 거예요. 타로점, 이 별점이라는 것, 별의 움직임과 자기시험 합격하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동양철학은 관계가 있다는 거예요. 달과 별과 해와 이런 것, 동양은 다섯개의 행성이거든요. 오행이 움직여서 서로 기를 주고받으면 어떤 특정한 때가 있다는 것, 그 때만 잘 맞추면 운명도 바뀐다는 겁니다. 사주팔자가 그런 거잖아요. 이사날짜, 결혼날짜, 태어난 때와 운이 잘 맞는 때가 있다는 거예요. 왜? 천체의 운행이 제 멋대로 돌아다니는 것 같지만 타이밍이 맞거든요. 그처럼 인간도 타이밍이 있다는 거예요. 이게 한의학입니다. 솔다 배우는 한의학이 그거라니까요? 한의학이 인간의 오행설을 근거해서 과학으로 설명되지 않는 어떤 기가 흐르는데 이 균형만 잘 맞추면 인간이 건강해진다는 거예요. 증거를 대라고 하면 통계를 가지고 증거를 댑니다. 수천 년 모은 통계를 가지고 이렇게 처방하면 잘 듣고, 저렇게 처방하면 어떤 증상이 나오고, 이런 통계자료를 모으니까 한의학이 된 겁니다. 서양의학도 마찬가지고요.


전부 다 공통점이 뭐냐? 무조건 나는 잘되어야 돼요. 그게 교회까지 밀려왔잖아요. 교회까지 밀려와서 QT라는 이름으로, “주여, 오늘은 무슨 말씀을 주시렵니~까? 오늘은 계돈 타는 날인데 이 말씀이 되겠습니~까?” 보니까 여호수아 1장 7절이 나왔어요.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게 나오니까 “주여, 오늘도 좌로나 우로나 신천지 이단에 안 빠지고 정통으로만 가서 계돈 타겠습니다.” 이렇게 해요.


하나님께서는 중간과정, 새가 갖고 있던 그 중간과정을 어떻게 인간이 다스리고 정복하는 이 공간에 이사야 45장에서 뭘 로 채우는가? 8절에 보면, “너 하늘이여 위에서부터 의로움을 비 같이 듣게 할찌어다 궁창이여 의를 부어 내릴찌어다.” 궁창, 하늘에서 비가 쏟아지는 것이 아니고 의가 쏟아지게 해서 그 모든 의는 새로운 메시아의 존재의 출생을 예언하게 됩니다. 하늘의 별까지, 동방박사가 봤던 그 별까지. 그래서 천사가 활동하는 요한계시록 8장에 보면 거기는 하늘과 땅과 바다의 모든 것이 심판으로 얼룩지게 됩니다. 삼분지 일이 다 불타버려요.


그것은 뭐냐 하면, 새로운 인물이 새로운 세상을, 새로운 창조세계를 이미 구상했다. “기존의 주인공 행세한 인간들아 너희는 죽어야 돼. 심판받아야 돼.” 하고 우주가 교체가 됩니다. 새하늘과 새땅, 더 이상 하늘의 달도 필요 없고, 별도 필요 없고, 태양도 필요 없고, 요한계시록 22장에 보면 더 이상 빛, 광명이 필요 없는데 그것은 왜인가? 예수님 자신이 빛이기 때문에 예수님 중심으로, 예수님 중심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새로운 환경이 마련됩니다.


천사들이 지금도 그것 때문에 고생, 고생, 고생 많이 하고 있습니다. 천사들이 바빠요. 명절 택배기사들보다 더 바빠요. 하늘에서 비를 내리고 또 자기 백성들 때찌! 한다고 바빠요. “그게 아니야, 그게 아니야! 그나라 의야!” 그렇게 바꿔치기 한다고. 자기 백성들 헛된 길로 가면, 넓은 길로 가면 좁은 길로 바꾸기 위해서 때리기도 하고 징계도 하고 도와주기도 하시면서 “그게 아니다! 이쪽 길이다.” 네가 생각한 대로 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생각한 것을 네가 차후적으로 ‘아, 이것은 내 일이 아니고 주의 일이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하시는 그 일에 천사들이 깊숙이 개입해서 지금도 봉사 많이 하고 계십니다. 천사 만나거든 고맙다고하세요. 호위무사입니다. 수호천사들이에요. 성령께서 열심히 일하십니다.


인간은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어떤 분은 사이트에서 질문하기를 “개인구원 있습니까?” 개인구원은 없어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용도로만 성도지 성도를 위한 그런 주님은 없고 그런 주님은 인간들이 만들어낸 거예요. 예수님 중심으로 재편됩니다. 창조세계는 새롭게 완성을 봅니다. 그걸 이스라엘에서는 언약대로 움직인다, 하나님의 언약대로 새로운 세계가 주어지게 되면 우리는 새언약의 영향력하에 존재하게 되고 우리는 언약안에 갇혀 있음을 자족하는 성도가 되는 겁니다.


하나의 새지요, 우리는. 새입니다. 폼 딱 잡고 앉아 있는 한 마리 새처럼, 우리는 주의 그 나라의 의가 충만한 그것을 마음대로, 독수리처럼 날개짓을 하면서 올라갑니다. 날마다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독수리가 되어서, 믿음의 독수리가 되어서. 이스라엘을 독수리 날개로 업어서 내게로 인도했다(출 19:4)는 말씀도 있잖아요. 그 공간이 기존의 물질적인 독수리가 나는 공간이 아닙니다. 언약의 독수리, 언약을 표현하는 독수리. 그리고 세상이 멸망할 때는 요한계시록 8장에서 독수리가 날면서 “내가 또 보고 들으니 공중에 날아가는 독수리가 큰 소리로 이르되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화, 화, 화가 있으리로다 이 외에도 세 천사의 불 나팔소리를 인함이로다 하더라.”(계 8:13) 쉽게 말해서 (더럽다고)“퇘! 퇘! 퇘!” 죽음이 있는 곳에 독수리가 날지요. “죽어 마땅한 것들! 이제 정신 차렸어?” 그런 뜻이에요.


하나님의 언약이 이 공중을, 새로운 공간을 점령했습니다. 주님의 새언약이 공간을 점령했습니다. 이제는 지옥갈 사람은 지옥가야 되고 천국갈 사람은 천국가도록 언약적으로 분류가 돼요. 그것이 뭐냐? 예수님의 완성된 십자가의 복음의 말씀입니다. 십자가를 증거하기 위해서 우리는 새롭게 되었고 저쪽은 십자가가 보여주는 저주스러운 심판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들은 지옥가야 될 사람으로 유지되어야 되는 거예요.


이러한 바꿔치기가 바로 여섯번째 날에 완성되는 진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간, 온천하를 다스리는 분, 오직 주님께서 주답게 다스리는 겁니다. 그 영향력, 흔히들 이걸 주권사상이라고 하는데 주권사상은 너무 오해의 소지가 많아서 그냥 영향력, 주님이 영향력을 행사하는데 여러분은 주님의 새가 되시고 주님의 물고기가 돼야 됩니다.


우리는 완전히 새됐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나 살기 위한 세상이 아니고 그 나라 의를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는 양갱속이 밤톨처럼 새롭게 만들어주신 것을 감사케 하옵소서. 우리가 움직이고 애쓰고 고래고래 고함친다고 해서 주님 주신 이 사랑의 관계, 이 끊어지지 않는 관계가 환란이나 핍박이 온다 할지라도 끊어지지 않는 사랑으로 꽁꽁 묶여 있는, 그래서 그 사랑에 자족하고 만족하고 헤엄칠 수 있는 그런 피조물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