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강-창 1장 3-5(빛과 어두움)150902-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1장 3-5절입니다. 구약성경 1페이지입니다.
창 1:3-5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오늘 본문을 상당히 신중하게 들여다보면 빛과 어두움이라는 것은 아예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빛이 왜 없는가? 본문에 보면 빛은 만들어졌는데 그 빛이 다른 것으로, 낮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빛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그리고 어두움이라는 것도 없습니다. 어두움이라는 것도 만들었는데 그 어둠을 밤이라고 바꾸어놓았기 때문에 어두움이라는 것이 없는 겁니다. 나중에 6일째에 인간이 만들어지고 난 뒤에 누가 나를 만들었는가, 하는 생각, 인간들이 기껏 아는 것은 부모가 있어서 부모가 나를 낳았다는 그 정도밖에 안되거든요.
부모가 나를 낳았다면 그 부모는 누가 낳았는가? 그 질문에 대해서 ‘그 부모는 또 부모가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돌아가신 증조부까지 계속 올라가면 결국 어떻게 되는가? 현재 우리 눈에 띄지 않는 것까지 상정해야 될 모험을 하게 돼요. 몇 대손 할아버지, 그 윗대의 어떤 분, 그보다 더 윗대의 어떤 분, 그렇게 되면 결국 거짓말이 되는 겁니다. 그것을 가지고 추론해서 아는 것이라고 하지요. 지금 내가 존재하고 있는데 그 존재는 살아계신 부모로부터 왔다. 그러면 살아계신 부모는 이미 돌아가신 할아버지로부터 왔다.
돌아가신 할아버지 선을 넘어버리면 이것은 우리 시각에는 나타나지 않는 겁니다. 돌아가신 분이 어떻게 낳았는가, 하는 그것은 우리가 추론을 할 뿐이지요. 뒤늦게 돌아가신 할아버지에게 배다른 형제가 있다는 드라마 같은 이야기가 막 나와 버리면 골치 아픈 이야기라니까요? 나를 낳으신 아버지, 그 아버지가 아버지가 아니에요. 나를 낳았다는 나 위주의 관계로 맺어진 아버지가 돼요. 그 아버지를 낳았다는 할아버지도 나를 현재 있게 한 할아버지, 나와 관련된 할아버지지 그냥 독단적으로 그 할아버지의 인격이 어떠냐, 하는 것은 모르는 겁니다.
만약에 일제시대 이야기하다가 “네 위로 5대조 할아버지가 나카무라인데 일본군 앞잡이 노릇 해서 독립군 배신했다가 암살당했다.” 그런 이야기 나오면 그 할아버지의 사적인 문제로 인해서 갑자기 후손인 내가 화가 나면서 “우리 할아버지가 어때서?” 하게 되지요. “네 할아버지가 일본군 앞잡이 노릇 하는 통에 우리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이렇게 되면 그것은 나카무라 할아버지와 그 친구들 사이의 문제가 아니고 후손들까지 내려와 버리면 일방적인 주장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인간이라 하는 것은 자기 존재의 시각에 들어오는 것만 연관성을 가지면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현실을 해석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 해석에서 인간에게 주어진 빛과 어두움이라는 용어는 더 이상 우리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어요. 진짜 그 빛과 어두움을 만드신 분은 그 빛과 어두움을 어떻게 활용하셨는가, 그것을 우리가 알아야 되는데 우리는 내가 여기 있기 때문에 그 빛이 낮이 되고 어두움은 밤이 되어서 ‘밤 되면 자고 낮 되면 깨서 움직거린다.’는 그게 전부지요. 하나님은 낮을 만들었다. “하나님을 낮을 만들었습니다.” “그래, 하나님이 낮을 만들었는데 너한테 무슨 의미가 있나?” “낮을 만들었기에 이렇게 돌아다니고 고맙게도 하나님께서 또 밤을 만들었습니다.” “밤을 만들어서 오는 이익이 뭔데?” “밤 되니까 잠이 오네요. 피곤을 해소하라고 밤을 만들었습니다.” “그건 네 생각이고!”
그것은 어디까지나 네 생각이거든요.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낮과 밤을 만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빛을 위해서 낮을 만들었고 어두움을 위해서 밤을 만들었는데 인간에게는 빛과 어두움은 보이지를 않아요. 안 보이면 거기서 나오는 인간의 모든 의견은 다 거짓말이고 엉터리입니다. 일방적이에요. 인간은 자기에게 이익 되고 유리한 것만, 필요한 것에 한해서만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에 인간이 기껏 하는 것은 ‘낮이네? 일어나서 일해야지. 어? 밤이 되었구나. 그러면 이제 자야지.’ 그것뿐이에요.
그래서 성경 전체가 뭐냐? “네가 하나님을 믿느냐?” 그거거든요. “네가 주님을 믿느냐?” 그거잖아요. 그러나 우리는 성경 전체를 볼 때 이미 나한테 의미를 두고 있기 때문에 내가 믿는다고 우겨봤자 나한테 이익 되는 것만 믿는다는 우리 본심만 드러낼 뿐이에요. 그것은 믿음도 아니지요. 자기 자신의 이익을 믿는 그것이 무슨 믿음이겠습니까? 창세기 1장 3-5절의 빛과 어두움, 이 대목에 대해서 이미 우리는 자신 위주로 살기 때문에 그 의미를 알지를 못합니다. 알지를 못하면 믿을 수가 없어요. 빛을 믿을 수가 없고 어두움을 믿을 수가 없어요.
우리가 단지 아는 것은 낮과 밤 외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을 첫째 날이라고 해요. 그 첫째 날이라는 개념이 우리한테는 없습니다. 왜, 우리는 그날이 그날이기 때문에. 인간이 달력을 만들었지만 그것은 인간을 위한 달력이고 인간의 편리를 위한 달력이고 하나님의 달력, 첫째 날이라는 달력은 이미 우리 소관을 떠났습니다. 우리는 그게 왜 첫째 날인지의 이유를 몰라요. 왜 그것이, 낮과 밤 그 자체로 된 날이 왜 첫째 날인지의 그 이유를 모릅니다. 알 수가 없어요.
그런데 어쨌든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날’이 만들어졌다는 것,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첫째 날입니다. 첫째 날, 여기서 ‘첫째’를 빼버립시다. 하나님께서 ‘날’을 만든 거예요. 우리가 아는 하루를 만든 거예요. 하루를 만들고 그 다음에 뭘 만드는가? 또 하루를 만든다고 되어 있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을 둘째 날이라고 해요. 또 다음 날을 만듭니다. 그런데 우리 보기에는 그 날이나 그 날이나 똑같은 날인데, 우리 보기에는 같은 느낌의 날인데 그것을 세 번 째날, 세 째 날이라고 합니다.
문제는 그 날에 1, 2, 3, 4 이런 식으로 숫자를 붙여 나간다면 어떻게 되느냐? 첫째 날은 1이 되고 둘째 날은 2가 되고, 그렇게 해서 지금은 수 천 수만의 날이 되어야 하는데 하나님에게는 일곱째 날 외에는 더 이상 날이 없어요. 저는 노래방이라는 데는 갈 기회도 없고 거의 가본 기억이 없습니다. 혼자 갑니까? 같이 갈 친구라도 있어야지 가지요. 보통 노래방에는 회식한다고 가잖아요. 신입사원이 ‘이참에 평소에 업무에서 밑 보인 것 노래라도 잘 불러주자.’ 해서 직장상사에게 잘 보이겠다고 노래를 하는 거예요. 의외로 노래를 잘한다 싶으면 직장 상사가 “잘한다!” 하고 박수쳐줘요. 잘한다니까 신이 나서 한 곡 더 불러요. “야! 레퍼토리가 다양하네.” 하면 또 부르는 거예요. 그럴 때 눈치 적당히 봐서 한 두곡 부르고 그만 무대에서 마이크 놓고 내려와야 되는데 잘한다, 잘한다, 하니 계속 마이크 잡다가 그 마이크로 머리 얻어맞는 수가 있어요. “지금 어른들 계시는데 노래방 네가 전세 냈어?” 한다는 말이지요.
첫째 날, 둘째 날, 죽죽 나가니까 ‘야, 하나님이 우리 살라고 이 세상을 만들었구나.’ 이렇게 착각하는 거예요. 세 째 날, 네 째 날, 다섯째 날, ‘야, 다 우리를 위해서 만들었구나.’ 하면서 일곱째 날 뒤에 여덟째 날도 계속 있는 줄로 알아요. “여덟째 날도 우리를 위해서!” 하다가 마이크로 얻어맞는 수가 있습니다. 왜 하나님에게 여덟째 날, 아홉째 날, 열째 날이 없는가? 숫자를 붙이려면 끝까지 붙여야지 왜 거기서 멈추는가? 그것은 첫째 날도 이해를 못하고 있다는 뜻이에요.
1을 붙일 때는 7과 연계해서 1을 붙였는데 우리는 처음이 있으니까 1을 붙이고 그 다음에는 당연히 2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지요. 하나님께서는 모든 날을 일곱째 날을 만들어놔요. 아코디언이라는 악기를 보면 양쪽으로 잡아 늘렸다가 가운데로 모았다가 하면서 소리를 내잖아요. 하나님께서는 첫째 날을 아코디언처럼, 또는 부채 살처럼 일곱째 날로 펼치고 그 펼쳐진 일곱째 날을 첫째 날로 오므려요. 한 날로 오므라들면 거기서 하나님이 만든 첫째 날의 의미가 나오면서 거기서 날은 날라 가버리고, 빛과 어두움의 원 상태로 회귀하는 속성을 창조가 갖고 있습니다. 그 날이 주의 날, 그리스도의 날입니다.
인간들은 이 날, 낮과 밤을 자기 편한 대로 자기 살기 위해서 있는 날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되면 8, 9, 10, 계속 나와야 돼요. 그런데 7에서 멈췄다는 이것은 인간들 살라고 준 날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리스도를 드러내기 위한 날이 되는 겁니다. 장차 오실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위해서 천지창조가 되었다고 이야기했잖아요. 우리가 창세기 1장을 보면서 설교하고 해석하는 것이 이렇게 어려울 수밖에 없는 이유가, 하나님이 관심 두고 있는 빛과 어두움에 우리는 관심이 없어요. 우리의 관심은 그 날, 그 날, 낮과 밤의 날에만 관심이 있어요.
왜? 우리 사는 것과 직결되기에 그것만 관심이 있어요. 관심 두고 있는 그것을 찢어버리고 관심도 두지 않는 빛과 어두움에 관심을 두려 하니 이 해석이 이렇게 난해해지는 겁니다. 어쨌든 모든 날은 그리스도의 날로 응축이 되어버립니다. 고린도전서 1장 8절에 보게 되면, ‘그리스도의 날’이 나와요.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시리라.” 그리스도의 날까지.
그러면 그리스도의 날까지 도착했다고 치고 “그 다음에 뭐가 있습니까?”라고 저에게 묻는다면 그 뒤에는 빛과 어두움으로 환원됩니다. 날 속에 빛과 어두움이 다 들어 있어요. 하나님은 날을 만들기 위해서 빛과 어두움을 구분한 거예요. 빛이 있으라고 하시고 어두움과 구분시킨 겁니다. 뭘 만들기 위해서? 날을 만들기 위해서. 그 날은 주인공이 우리가 아니에요. 우리는 주인공이 아니고 주인공은 그 날을 만드신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이 그 날의 주인공이 되는 겁니다.
뭘 하기 위해서? 내가 빛과 어두움을 구분지어서 만들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그러면 둘째 날은 뭡니까? 둘째 날은 결국 구겨버리고 빛과 어두움으로 와요. 그러면 세 째 날은? 세 째 날도 구겨버리고 결국 빛과 어두움으로 온다니까요? 둘째 날 하늘, 세 째 날 땅, 바다, 전부 다 구겨서 어디로 환원되는가? 빛과 어두움, 어두움과 빛으로 구분지어서 끝나버리는 거예요. 어두운 곳을 지옥이라고 하고 밝은 곳을 천국이라고 합니다.
요한계시록 22장에 가면 네 번째 날에 만들었던 태양과 달, 그런 것이 다 필요 없어요. 그냥 빛의 세계에요. 그런데 지옥이 뭐라고 묘사되어 있느냐 하면,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마 8:12)라고 되어 있습니다. ‘어두운 데’ 어두운 세계가 지옥이에요. 아침이 되고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는데, 따라서 밤이 되거든 ‘아, 이런 게 지옥이구나.’라고 보시면 됩니다. 요새는 에디슨이 전기발명해서 밤에도 훤하게 밝혀놓으니 지금 지옥인지 뭔지 분간도 안 되지요. 정전되어 보세요. 깜깜하지요.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빛과 어두움으로 환원시키기 위해서 천지창조를 하신 거예요. 애초부터 아무것도 안 만들었다면 하나님 보시기에 뭐가 불리하고 뭐가 손해인가? 아무것도 안 만들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주가 되시지를 못해요. 하나님 아들 주님이 주님 되시려면 이 땅에 빛이 만들어지고 어두움이 만들어지고 그 어두움이 어두움 값을 해줘서 예수님이 빛인 것을 드러내 줄 때 비로소 그 관계에서 예수님은 메시아가 되고 만유의 주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어두움을 만들었다는 말입니까? 성경에 ‘예수님이 빛’이라는 대목이 있는데 어두움을 만들었다는 대목도 있습니까?”라고 물을 수 있겠지요. “어두움은 마귀인데 어떻게 하나님이 어두움을 직접 만들 수가 있습니까?”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이사야 45장 7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나는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노라.” 빛과 어두움을 친히 만드셨어요. 다시 말해서 지옥 만드시는 분이 예수님이고 천국 만드신 분이 예수님이에요.
예수님은 천국만 만들었다고 생각되지만 지옥도 만드셨어요. 그걸 어떻게 압니까? 저녁 되어보세요. 캄캄하지요. 천둥치고 비오고 지금 난리 났잖아요. 이게 어두움이거든요. 어두움을 백날 봐야 거기 그리스도 안보이지요? 그것은 뭐냐? 이 낮과 밤을 나를 위한 낮과 밤으로 봤기 때문에 낮에 일하고 밤에 잠을 자도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 관련된 것이 우리에게 와 닿지를 않는 겁니다. 이미 우리 조상 아담이 범죄하고 난 뒤부터 인간은 자기 위주로 돌아가기 때문에 주변의 자연환경이 자기편리 위주로 돌아가는 겁니다.
따라서 하루하루가 그냥 생계위주로 지나지 이것을 내 힘으로 다시 날 뒤에 있는 어두움과 빛으로 내가 알아서 참여할 수가 없어요. 우리는 거기에 들어갈 수가 없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이제 문제가 뭐냐 하면……, 설교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할 입장입니다. 다시 해 봅시다. 지금 성경이 왜 있느냐 하면, “네가 주 예수를 믿느냐?” 그거잖아요. 그러면 따져봅시다. 성경은 주 예수 믿으면 누구든지 구원 얻는다, 주 예수 이름 부르는 자는 구원 얻는다, 주 예수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복음이라고 하면서 나와 있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성경은 창세기 1장도 필요 없고 2장도 필요 없어요. 1장부터 “다 예수 믿어라.” 이렇게 나오면 돼요. 창세기 1장 1절, 예수 다 믿어라. 1장 2절, 나는 구세주다, 믿어라. 1장 3절, 나를 믿으면 구원받는다. 1장 4절, 나는 십자가 졌다. 이렇게 나오면 되지 창세기 이야기, 천지를 창조하고 뭘 하고, 이런 이야기는 왜 나오느냐는 말입니다. 그렇잖아요. 제 말이 틀렸습니까?
성경전체가 예수님을 증거 하는 것이고 우리 행함이 아니고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면 창세기 1장1절부터 예수는 이런 분이니 믿어라, 해놓고 그 다음에 요한계시록 바로 붙여서 “내가 다시 오리라. 아멘 어서 오시옵소서.” 이렇게 끝나면 돼요. 그러면 성경 가지도 다니기도 얇아서 얼마나 좋은데요. 참 쉬워요.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이거 골치 아프게 노래까지 만들어서 외울 필요가 없다니까요? 우리가 믿어야 될 것만 쏙쏙 뽑아서 그걸 정리해서 가지고 다니면 되지 창세기 1장 1절, 2절, 3절, 4절, 5절을 왜 알아야 됩니까? 이게 믿음에 관한 것같이 보이지를 않는데.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듯이 유대인들이 천지창조를 믿었는데 지옥 갔잖아요. 창세기 1장 1절에 나온 대로 여호와께서 천지를 창조했다는 것을 믿어도 맨 어두움이라. 하나님께서 믿으라고 하는 말이 뭐냐? “네 구원에 있어서 너 자신은 빠져라. 너는 나가 있어라.” 하는 말이지요. “내가 나가 있으면 나 구원받는 것, 내 장래의 운명은 어떻게 됩니까?” 창세기 1장, 2장, 3장, 죽 나오는 그 말씀대로 실행될 거예요. 그 결과물로 어떤 사람은 천국가고 어떤 사람은 지옥 가는 겁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다른 말로 이스라엘에게 ‘나의 약속’이라고 했어요. 그걸 언약이라고 합니다. 그냥 말씀이라 하는 것은 말하고 명령하면 그만이지만 약속이라는 것은 상대자가 있어요. “새끼손가락 걸고 우리는 언약을 했다.” 하면서 언약식이라는 것도 하지요. 사랑의 언약이라는 노래도 있잖아요. 언약식을 하는 그 모든 것은 대상자가 있다는 말이지요. 진짜 하나님과 내가 마치 약혼이라도 한 듯이, 혹은 신랑신부처럼 약속을 맺었다면 신랑신부 사이에 유일하게 기억해야 할 것은 약속입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약속의 바다, 약속이라는 겁니다. 그 약속의 실행에 있어서 신부는 빠져줘야 돼요. 신부가 나대버리면 신랑이 하는 약속의 훼방질밖에 안돼요. 어설픈 짓을 하게 되면 방해가 돼요. 차라리 빠져나와야 돼요. “그저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나이다.” 이렇게 빠져나와야 돼요. 그렇게 했던 백부장은 어두움에 거하지 않고 빛에 거했다는 그 말이거든요.
오늘 본문에서 빛은 낮이 되고 어두움은 밤이 되어버리면 낮과 밤에 대해서 주께서 손질 하실 거예요. 하루하루가 하나님의 약속에 편입되어버려요. 약속의 내용으로 들어와 버리면, 우리는 그냥 1, 2, 3, 4, 5 ……, 365일, 이렇게 하지만 주께서는 1, 2, 3, 4, 5, 6, 7! 1, 2, 3, 4, 5, 6, 7! 주께서 친히 그렇게 시행하실 겁니다. 제 7일일 안식일로 잡아서. 주께서 스스로 자기가 내민 언약은 자기가 스스로 지켜나간다는 것을 우리는 빠져나오면서 믿으면 되는 거예요.
중요한 것은 우리가 너무나 우리 위주기 때문에 그게 믿기지가 않는다는 겁니다. 너무나 내 생존위주로 단단하게 무장되어 있기 때문에. 다시 한 번 정리합시다. 하나님이 창세기 1장 1절을 우리보고 이해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보고 알라는 것이 아니고 너는 빠져 있으라는 것이고 빠져 있으면서 우리는 이 말씀의 의미를 몰라요. 처음에 이야기했지만 우리 시각에 안 보이면 우리는 자꾸 추론하고 상상해버려요. 눈에 보이는 것을 추론해서 그것을 안다고 하니 막상 예수님이 눈에 보이는 사람으로 왔을 때 기존의 눈에 보이는 것이 단단하게 확정된 이상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예수님이 와도 안 믿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체포되고 난 뒤에 오늘 본문을 인용했습니다. “지금은 어두움의 때, 어두움의 날이다.”
하루하루 아침이 되고 저녁이 되는 그 날이 그리스도께서 오시고 난 뒤에 그 날의 폭이 24시간이 아니라 주님 재림하실 때까지 그 전체가 그리스도의 날로 확정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게 바로 주의 날이에요. 주의 날로 확정되고 말았어요. 24시간의 텀(간격)의 인식으로 생활하고 있는 우리가 어떻게 그걸 알아서 믿음으로 받아들이겠습니까?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하나님께서는 낮과 밤이라는 이 빛과 어두움을 어디로 환원하느냐 하면, 본인이 지키는 언약으로 본인이 받아버려요. 언약을 본인이 받는 방식에 있어서 예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신 방식을 자신에게 적용시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그리고 다윗언약을 예수님 자신에게 적용을 시켜버려요. 적용을 시키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하루하루의 날이 창세기 2장 1절에 보면 “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모세한테 준 언약에 보면 이게 들어 있어요. 그게 십계명 안에 들어 있습니다. 네 번째 계명에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가 나와요. 하나님의 모세언약에 창세기 1장이 그대로 담겨서 메시아를 향하여 하루하루 지금 이동 중입니다. 모세와 예수님 사이에서 하루하루 이동 중이에요.
마치 강물에 종이배 띄우는 것처럼, 낙동강의 돛단배가 바람에 흘러가듯이. 이 말씀, 언약이라는 것이 돛단배처럼 이 역사 속에 흘러서 메시아까지 도달하는 겁니다. 우리는 그걸 지켜보면서 “믿습니다.” 하는 거예요. 우리는 빠져주세요. 우리는 빠지세요. 빠지고 하나님이 친히 이 하루하루를 어떤 식으로 활용해 가는가를 지켜보는 겁니다. 그러면 나를 통해서 어두움과 빛이 계속해서 환원되는 현상을 보입니다.
시편 27편 1절에 보면,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라고 되어 있거든요. 그 빛을 뭐라고 했느냐? 구원이라, 구출이라고 했거든요. 그러면 시편 27편에서 구출이라는 말은 무엇을 염두에 두는가? 출애굽상태를 염두에 두는 거예요. 출애굽은 이보다 앞서 있으니까, 시편보다 앞서 있는 역사적 사건이니까. 그렇다면 빛이 구출이라는 말은 지금 이스라엘 자체가 어두움이라는 거예요.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개입되면 즉시로 빛과 어두움으로 환원되어서 구분되는 현상이 일어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왔을 때 요한복음 1장 4절에 뭐라고 했느냐 하면, “빛이 왔으매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라고 했어요. “빛이 왔으매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이것은 예수님이 등장할 때만 비로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그러면 오늘날은 어떤 현상이 일어납니까? 오늘날은 복음의 현상이지요. 고린도후서 4장 4절부터 보면,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이 말은 뭐냐? 세상 모든 현실은 예수님의 주되심을 위하여 창조되었다는 이야기를 여기서 또 다시 반복합니다. 6절에 보면,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라고 되어 있어요. 예수님이 빛으로 오셔서, 그 다음에 우리 마음에 빛을 비추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만들어서 거기에 빛을 쏴 넣지요. 그리고 그걸 지켜보는 사람 가운데 예수님의 약속을 믿는 사람한테는 ‘우리’라는 명칭이 해당이 돼요.
예수님께서 초라하게 오니까 “저게 무슨 빛이야? 세상에 저런 상거지가 없다.” 이럴 때 그 사람한테는 ‘우리’라는 말을 사용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 명 모여서 우리교회라고 한다고 해서 우리가 되는 것이 아니에요. 모인다고 우리가 아니라 ‘우리’라는 내용이 고린도후서 4장 6절 안에 포함이 되어 있거든요. 그러면 고린도후서 4장 6절에서 우리는 빠지세요. 빠지고 이것을 하나님의 언약, 약속으로 보자는 말이지요. 신랑이 신부에게 주는 약혼반지, 결혼반지라고 봅시다. 커플링이라고 할 수도 있는 그 결혼반지 안에 ‘우리’라는 말이 들어 있다면 내가 우리가 아니고 친히 빛 되시는 주님께서 우리를 만들어내게 되는 겁니다. 뭘 담기 위해서? 빛을 담는 그릇, 빛의 자녀가 되기 위해서.
빛의 자녀란 에베소서 5장에 나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빛의 자녀라.” 에베소서 5장 8절에서 9절에 보면,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참, 이게 설교하면서 제일 제가 지금껏, 그리고 계속해서 앞으로도 힘들 것인데 그게 뭐냐?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라는 여기에 동의하는 사람들보다도 이걸 강력하게 저지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는지요. 지금도 많고요. “나는 신학교 교수다. 나는 목사다. 나는 장로다. 나는 어느 교회 교인이다. 나는 십자가마을 후원회 일원이다. 나는 성도다. 나는 개혁주의 신학에 달통했다.” 제가 보기에는 어두움인데? “내가 왜 어두움이야?” 어두움이 아니라고 하기에 신자가 아닌 거예요. “우리는 전에 어두움이었습니다.”라고 해야 돼요. “어두움이었습니다.” 하는 그것이 바로 빛의 자녀가 되는 겁니다.
“목사님! 말씀대로 해야지요. ‘전에는’ 이렇게 되어 있잖아요.” 여기서 ‘전과 후’라는 말은 늘 말씀 안에 같이 들어 있다는 말이지요. 전이고 후고 간에 이것은 누가 만드는가? 주님께서 늘 매일 같이 전과 후를 우리에게 발생시킵니다. 그래야 우리 가운데서 약속이 늘 배태되고 발현되고 있는 말씀의 그 종이쪽지가 되지요. 우리의 마음은 주께서 친히 쓰시는 편지라고 했잖아요. 우리는 편지지에요. 주께서 그냥 편지를 쓰는데 “전에는 너희가 어두움이었고.” 이렇게 썼다고 우리가 기분 나빠해야 됩니까? “에이 씨! 이미 빛의 자녀인데 뭘 옛날로 다시 돌아가? 왜 다시 어두움이라고 해?” 이렇게 삐지면 안돼요. “옳소이다.” 이렇게 해야지요. 내일 되면 오늘이 전이고 모레가 되면 내일이 전이 돼요. 우리는 매일 같이 어두움이고 매일 같이 빛의 자녀가 되는 겁니다. 그래야 말씀이 역동적으로 우리에게 탁탁 튀거든요.
프라이팬 벌겋게 달궈놓고 기름 뿌려보세요. 막 튀겨 나오지요. 말씀이 이렇게 튀겨 나오는 거예요. 우리가 프라이팬처럼 달궈져서. 요새 프라이팬은 이중으로 코팅이 되어 있어요. 밑에는 우리의 죽음, 그 위에 주님의 살아계심. 나는 죽고 그리스도가 살아 있어서 말씀이 오게 되면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으로 말씀이 바깥으로 막 나오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이 프라이팬이 오래 되면 코팅은 다 벗겨지고 “나는 신자다. 이제 나는 어두움의 자녀가 아니다.” 이렇게 나온다고요. 그게 바로 바리새인들입니다. 서기관들이고, 사두개인들이고 개혁주의 신학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버릇이 뭐냐? 내 존재중심으로, 나 위주로 살던 그 어두움의 버릇을 못 깼어요. 주여, 주여, 하지만 사실은 본인이 더 좋아. 주님보다 나 자신이 더 좋아. 주님 사랑하지 않고 내 사랑이 우선이에요. 그런 사람에게 이 성경말씀은 백날 넣어봐야 거기서 말씀이 나오는 것이 아니고 자기자랑밖에 나오지를 않습니다. 자기 신앙의 연륜밖에 안 나와요. 얼마나 자랑 질을 했으면요, 신부복장을 하겠어요? 수녀들은 머리에 뒤집어쓰고 신부들은 유니폼을 입고. 얼마나 자랑 질을 하고 싶고 티를 내고 싶었으면. 십자가 뱃지 달고 심지어 제복 입고 딸랑딸랑, 겨울만 되면 냄비 들고 거리에 나오고. 연말연시 지나면 전 거두고. 구세군의 낮과 밤은 달랑 두 달뿐이에요. 그리스도의 날이 아니에요.
우리에게는, 이미 죽은 자에게 날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오직 빛과 어두움밖에 없어요. 빛을 보여줄 빛의 증거와 어두움의 증거가 우리 몸을 통해서 나타내도록 우리가 쓰임을 당할 때 그 때 우리는 성도라, 빛의 자녀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이게 빛이고 이게 어두움입니다.” 어두움에서 남 손가락질 할 필요 없어요. 내가 어두움이고 그런 어두움을 빛이 오셔서 빛의 자녀로 삼았으니까 그리스도의 그 얼굴, 복음이 바로 빛입니다. 빛과 어두움, 양쪽을 다 보여주는 거예요.
천국 간 24장로들이 자기의 면류관을 벗어서 주님 발 앞에 던집니다. 던져놓고 도로 가져다 쓰는 것이 아니에요. “던졌으니까 나도 쓸 만하지요?”라고 다시 쓰는 것이 아닙니다. 후딱 벗어던집니다. “제게는 합당치 않습니다.” 보세요. 천국 가도 면류관 쓸 수 없는 인간임을 자각하잖아요. 그게 뭐냐? 벌써 말씀대로, 말씀을 그대로 보여주는 페이퍼가 되는 거예요. 말씀을 보여주는 그릇이 되고 증인이 되는 겁니다. 증인은 독자적인 가치를 소유하면 안돼요. “나는 어떻습니까?” 하면 안돼요. 그냥 “예수님은 이런 분이었습니다. 이런 기능을 했습니다.”를 보여주면 되지 그 기능을 자기한테 환원시켜서 “그러니까 나는 이렇습니다.” 할 필요는 없어요.
창세기 1장의 빛과 어두움을 고린도후서 6장 14절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예수 그리스도 오고 난 뒤에는 몇 년도인가, 2015년인가, 2016년인가는 아무 의미 없습니다. 이미 왔으면 빛과 어두움, 그걸로 땡, 결정 났어요. 빛 아니면 어두움, 어두움 아니면 빛입니다. 날짜요? 베드로후서 3장에 보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날, 하루는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고.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어떤 사람은 천년을 하루로 계산해서 3천년이면 사흘 되었다고 한다면 주께서 이렇게 합니다. “하루가 만 년 같고 만년이 하루 같다. 어딜 내 앞에서 숫자를 계산해?” 인간이 말하는 숫자, 하루는 자기중심의 스물네 시간이에요. 이미 십자가에서 우리를 죽이실 때는 우리가 계산하는 그 날도 의미 없는 것으로 십자가에 함께 죽었습니다. 이제는 무엇이 빛이며 무엇이 어두움인가를 증거 하는 일만 남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유명한 말씀, 요한복음 3장을 제가 잠시 읽어드리겠습니다.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빛보다 어두움,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다는 말, 자기로부터 자기가 빠져 있는 사람은 그 말을 알아듣지만 자기세계, 자기현실, 내 중심의 현실을 유지하는 사람, “내 행위가 어때서? 내가 뭐가 그렇게 잘못되었다고? 내가 뭐가 문제라서?” 이런 사람한테는 이 말씀이 전혀 이해가 안돼요.
인간의 자기행위 자체가 곧 빛을 거부하고 어두움을 좋아하는 식으로 행동하게 되어 있다는 것을 성도는 동의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신자가 아닌 사람은 “깨끗하고 바르게 살면 되잖아요. 고귀하게, 순결하게 살면 되잖아요. 뭐가 문제기에 자꾸 행위를 문제 삼습니까? 바르게 살겠다잖아요. 바르게 살겠다. 이젠 빛의 자녀가 되어서 빛의 행동을 나타내면 안 됩니까?” 자꾸 이렇게 하는 거예요. 그러면 그 말씀은 본인이 행하는 말씀이 되어버려요. 본인이 말씀을 지키는 행위, 어두움이 내 뱉어주는, 어두움에서 나오는 말씀이 되어버립니다. 그 말씀은 바로 십자가사건을 유발시켜요. 주님이 하신 행함과 충돌하면서 그 자체가 극단적인, 궁극적인 어두움이 되는데 그게 바로 자기 행위를 유지하는 것, 그것이 궁극적인 어두움이었습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모든 날은 그리스도의 날로 환원되어버리고 그 환원된 날은 빛과 어두움, 지옥과 천국으로 환원되는 그 작업을 친히 하시니까 “너는 나가놀아라. 너는 빠져 있어라.”라는 것이 창세기 1장 3절에서 5절의 말씀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어떻게 말씀 지켜서 구원해보겠다는 모든 시도가 지옥 갈 악마적인 행위라는 것을 저희가 깨닫게 하옵소서. 주께서 약속이라고 하시면서 행하시는 그 행하심을 찬양하고 그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춰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