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강-창 1장 6-8(하늘)150909-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1장 6-8절입니다. 구약성경 1페이지입니다.
창 1:6-8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 가운데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게 하리라 하시고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제가 지난 시간에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된다.’는 것은 원래 흑암과 창조 이전의 상태를 하나님께서는 취소하지 않는다는 것이라고 했지요. 한 주 지났으니 다 잊으셨을 거예요.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창세기 1장부터 우리 인간은 제발 빠져주세요. 나를 위한 창조라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나를 집어넣어서는 안돼요. 인간 개인문제를 창조에서 빼주세요. 아브라함, 이삭, 야곱, 다 개인문제하고는 관련이 없습니다. 일방적으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찾아온 거예요. 출애굽은 말할 것도 없고요 모세는 목부로 살려고 했지 애굽에 가서 독립운동 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창세기에서 분명히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는데 그 창조했다는 창세기 1장만 너풀거리고 끝나는 것이 아니고 요한계시록까지 이어지거든요. 창세기에서 창조 그 다음에 나오는 문제는 뭐냐? 선악과 먹으면 죽는다는 죽음문제가 나와요. 제가 또 다시 이야기합니다. 죽음에 대해서 우리가 신경 쓰지 마세요. 창조에 대해서 신경 쓰지 마세요. 그 다음 창세기 2장에서 “죽으리라.” 나의 죽음에 대해서 신경 쓰지 마세요. 우리 가족의 죽음, 나의 죽음, 국가의 죽음, 이웃의 죽음, 신경 쓰지 마세요. 죽이는 것도 하나님의 창조의 연장입니다.
그 다음에 또 봅시다. 신약에 가면 십자가 나오지요. 십자가에서 자신을 빼주세요. 자기에 대해서 신경 쓰지 마세요. 창조, 죽음, 십자가, 십자가 지고 나서 사흘 만에 부활하셨잖아요. 우리의 부활, 우리의 영생, 우리의 천국에 대해서도 우리가 힘을 빼세요. 우리가 애쓰지 마세요. 모두 다 하나님의 일입니다. “성도가 하루하루의 생활을 어떻게 합니까?”라고 묻는다면 “그냥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삽니다.”라는 그것을 인식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성도의 삶이에요. 발걸음부터 시작해서 모든 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살아요.
“그러면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안 살면 어떤 상태입니까?” 그것은 본인이 개입한 결과입니다. 본인이 개입해버렸어요. 본인이 개입해버리면 하나님이 그냥 주시는 힘을 본인이 가로막고 나서는 셈이 되는 겁니다. 어른 앞에 애가 버릇없이 가로막게 되면 비키라고 하잖아요. 비키라고 하는 그 일 때문에 하루하루 인생이 굉장히 고달프고 힘들어져요. 참 짜증스럽고 괴로워요. ‘왜 세상이 내 맘대로 안 되는가?’ 그것은 가만 따지고 보면 목을 이쪽으로 제키는 순간입니다. “좀 비켜줘. 네 인생 네가 만드는 것이 아니거든? 내가 만들고 있거든? 그런데 네가 또 여기에 관여했구나.” 하고 목을 옆으로 잡아챕니다. 비키라는 말이지요. 비키게 되면 하루하루 생활이 주의 은혜로 살아간다는 겁니다.
그것을 가지고 범사에 감사하며 사는 것, “성령 안에서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주의 뜻이니라.”라고 데살로니가 5장에 나와 있습니다. 뜻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내가 나에 대해서 관여만 안하면 그게 주의 뜻이 되는 겁니다. 따로 뭘 지킬 필요가 없어요. 그렇다면 문제가 되는 것은 이거예요. 거기서 나오는 그 다음 질문이 뭐냐 하면, “왜 이 세상에 나쁜 짓 하지도 않고 착하고 바르게 살고, 심지어 거짓말 한 적도 없고 도둑질도 한 적이 없는 그런 사람을 왜 하나님이 죽이시는가?” 하는 겁니다.
이점을 한 번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굉장히 착한데 하나님이 죽였어요. 그러면 착한 것과 죽이는 것과는 상관이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착한데 왜 죽이시는가? 그것은 착한 것과 관계없이 죽이는 일 자체가 하나님에게 속한 일이기에 죽이시는 겁니다. “착한데 왜 죽이십니까?” 하는 질문 자체가 상당히 수상한 질문인데 뭐냐 하면, 또 자기 자신을 자기 자신이 관여한 거예요. “내가 이렇게 착한데 힘들게 살고, 아프고, 죽이기까지 합니까?” 그렇게 관여하는 겁니다.
우리가 죄짓고 난 뒤에 하나님이 만들어 가시는 나를 자꾸 내가 관여하는 나로 차고 들어오는 이것을 어떻게 말씀을 가지고 제켜야 되는데 어떻게 제킬 수 있는가? 창세기 오늘 본문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뭐냐 하면, 물이 없이는 하늘도 없다는 거지요. 물 없는 하늘은 없어요. 처음에 흑암과 물로 되어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흑암에 대해서는 빛을 가지고 이야기했고 이번에는 물을 가지고 이야기할 참이거든요. 수면위에 하나님의 신이 운행하셨다는 그 물.
물을 가지고 하늘을 만들고 밑에 바다와 땅을 만들었다는 거예요. 굉장히 신기하지 않습니까? 이 물을 가지고 만들었다는 말은 하나님의 처음창조의 재료가 되는 흑암과 수면, 물을 하나님은 영원토록 포기하거나, 취소시키거나, 없는 것으로 친다거나 하는 일은 없습니다. 그대로 계속 이어져 가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우리 자신은 뭐냐? 우리 자신은 물의 자녀에요. 오늘 본문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하늘이 나오는데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 가운데 궁창이 있어.” 여기서 궁창이란 ‘허공’이라는 말입니다. “궁창(허공)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게 하라.”
그러면 허공이 있는데 그 허공을 물로 채운다는 그 말이거든요. 허공을 물로 채워놓고 위에 있는 허공을 뭐라고 하는가? 하늘이라 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그 허공, 위에 있는 물과 아래 있는 물밖에 없거든요. 그러면 아래 있는 물은 뭐냐 하면, 하늘의 구체화입니다. 제가 지금 성경대로 하고 있는데도 처음 듣는다는 느낌이 들지 않아요? 왜 여러분이 처음 듣는다는 느낌이 드느냐 하면, 인간을 뺐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인간을 빼버렸어요. 아직 인간은 태어나지도 않았어요. 인간을 확 빼버린 겁니다.
인간을 빼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있고 그 하나님 하시는 일을 증거하고 만끽하라고 마지막에 인간을 집어넣는 거예요. 그러면 인간이 할 일은 아무것도 없어요. 하나님이 창조한 그 원리와 법칙에 대해서 증명하고 감사하고 찬양하고, 그것만 하면 되는 겁니다. 그게 그 원리에 대해서 감사하는 거예요. 그러면 그 원리를 알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이야기가 상당히 어렵게 되었는데 그러면 쉽게 해 봅시다.
지금 우리가 당장 죽는다고 칩시다. 지금 당장 숨이 넘어갑니다. 죽을 때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어요? 우리가 지금 죽는다고 했을 때 제일 먼저 떠오르는 생각은 뭐겠습니까? “하나님이여, 어떻게 하면 내가 살 수 있겠습니까?” 그거지요. 지금 죽어요. 죽는데 죽는다는 그것만큼은 확실하거든요. 죽는 것이 확실하다면 이것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그렇게 죽이신 거예요. 그렇다면 내가 죽는 것만큼이나 확실한 것을 하나님께서 준비해 주실 거란 말이지요. 그게 뭐냐? 그게 바로 물이에요.
왜 물인가? 이 지상의 물은 하늘을 반영하고, 하늘을 증거하고, 하늘의 모형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 몸의 75퍼센트가 물이라 하잖아요. 뛰면 물이 출렁이는데 이 물이 있다는 말은 우리가 가야 될 하늘, 본향이 있다는 말이에요.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위엣 것과 아랫것을 나누었고 우리는 위에서 사는 존재가 아니고 아래서 사는 존재거든요. 그런데 아래서 사는 우리가 곧 죽습니다. 지금 수명이 다 되어서 곧 죽습니다. 죽을 때 하늘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는 말이지요. 내가 가야 될 본향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 그 말입니다. 내가 곧 죽는데.
그것은 바로 그 앞에 물 한 그릇 있으면 됩니다. 물. 그러면 물이라는 것이 왜 있는가? 선악과 따먹은 인간은 자기밖에 모르거든요. 선악과 따먹은 인간이 하나님의 새롭게 창조하신 세계에 들어가려고 한다면 물을 넘어서야 돼요. 이 물을 넘어선다는 말은 물이 가로막는다는 뜻입니다. 물은 중간매개물질, 중간체, 이렇게 보면 돼요. 하나님께서 물을 만드심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 모든 것이 너희를 위해서 만든 것은 일체 하나도 없다는 것을 물로서 증명해 가는 거예요. “네가 물을 넘어설 수 있어? 못 넘어서지.”
물을 넘어설 수 없다면 우리는 원래 창조했던 하나님의 세계에 도달될 수가 없습니다. 아래의 물을 통해서 위의 물로 이어지고 위의 물을 통해서 원래의 천지 창조했던 하나님의 세계, 하나님이 계시는 세계에 들어가야 되는데 물이 그것을 가로막고 있다면, 또는 물이 중간매체라면, 물을 우리가 극복할 수 없다면 우리는 그 나라에 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물로서 위아래를 나눠놓았는가? 그것은 시편 104편 2-3절에 보면 나와 있습니다. 3절에 보면, “물에 자기 누각의 들보를 얹으시며 구름으로 자기 수레를 삼으시고 바람 날개로 다니시며.” 이 말은 뭐냐? 물 위에 하나님께서 자신의 궁전, 궁궐을 세웠다는 그 말입니다. 시편 104편 3절 말씀입니다. 2절에 보면, “주께서 옷을 입음같이 빛을 입으시며.”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이유가 나와요. 이게 뭐냐 하면, 하나님이 자기궁궐을 짓기 위해서 천지창조를 하신 거예요. 제일 끄트머리에 창조한 것이 인간입니다.
하나님께서 궁궐 지으시고 거기에 누굴 집어넣는가? 인간을 거기에 집어넣는 거예요. 끝이에요. 이게 진실입니다. 아까 질문 다시 하겠습니다. 상당히 중요한 질문인데 다시 하겠습니다. 우리가 지금 숨을 거두고 죽는다고 합시다. 죽을 때, 죽는 순간에 우리가 뭘 해야 됩니까? 죽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입장에서 우리가 뭘 해야 돼요? 우리가 죽잖아요. 이렇게 죽을 인간을 낳게 하고 만들어주신 분을 찾아가야 되지 않습니까? 이게 제일 중요한 문제거든요. 죽을 때 “그래, 죽자.” 그냥 그래서는 안 되고 뭔가 만들어졌기에 죽잖아요.
그러면 죽는 순간이 왔다는 것은 뭐냐? 나를 만드신 분을 만나는 것이 제일 중요한 문제에요. 어떻게 만날 것인가, 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어디 계신지를 알아야지요. 하나님께서 어디 계시는가 하면 물 위에 궁전을 지으신 겁니다. 물을 통과하면 돼요. 그러면 세숫대야의 물을 뒤집어쓸까요? 아니에요. 그 물이 하나님의 원래 창조했던 그 물을 뒤집어써야 돼요. “원래 창조했던 그 물이 세월이 지난 지금에 어디 있습니까?” 하고 물으면 그게 바로 세례요한이 준 물세례라는 거예요. 그걸 두자로 언약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언약, 약속.
노아와 아브라함의 차이가 있는데요. 노아는 물가지고 언약을 설명했고 아브라함은 하늘과 땅 가지고 언약을 설명했어요. 아브라함은 말하기를 내가 땅에 살지만 이 땅에는 나의 고향이 없다고 한 거예요. 사람이 ‘고향이 없으니까 고향 따라 가면 되겠지.’라고 굉장히 쉽게 생각하시는데 오늘 본문 가지고 설교하면서 이 점을 중점적으로 말씀드리고 싶어요.
인간의 두뇌가 태어나면서 한 10년 동안 온갖 것을 외부로부터 자극받고 경험하고 체험합니다. 태어나서 넉넉잡아 한 스무 살 때까지, 어떤 사람은 스물여섯 살까지라고도 하는데 이 두뇌가 조립이 되고 정리가 돼요. 조립이 되고 정립이 되면서 여기에 어떤 정보가 들어오는가 하면, 태어나서 어릴 때부터 살아온 모든 경험들이 막 들어와요. 들어와서 새겨진 그것을 뭐라고 하냐면 그것을 ‘기억’이라고 합니다. 그 기억이 뭘 만들어내는가? 고향의식을 만들어내요.
고향의식은 어떤 특징이 있느냐 하면, 낯선 것이 들어오면 극렬하게 반발하고 저항을 해요. 취직해서 출세하겠다고 서울가놓고 힘들 때마다 고향에 있는 부모생각하고 명절만 되면 열 시간에서 열두 시간씩 차타고 고향 갑니다. 사과상자 하나 사고 봉투에 돈 좀 넣어서 부모 찾아오지요. 왜 찾아옵니까? 어릴 때 두뇌가 이미 굳어졌어요. 그래서 이미 굳어진 두뇌에다가 30대, 40대, 50대, 아무리 서울 살아도 항상 그 깊은 내면에서는 어릴 적 기억을 지울 수가 없어요.
이게 고향입니다. 우리의 고향이에요. 나이가 80되고 90이 되어도 영원히 지워지지 않아요. 옛날 노래를 들으면 노래만 들리는 게 아닙니다. 그 노래를 처음 들었던 그 때 그 시절, 그리운 식구들과 돌아가신 할아버지 할머니부터 해서 사촌들까지 그 정경이 다 들어와요. 소꿉놀이 하고 놀던 그 정경, 개발되어서 마을이 사라져도 그 머릿속에는 옛날 놀던 것이 다 들어있다니까요. 인간은 고향을 못 버려요. 고향을 못 버린다는 이거요, 이게 바로 우리의 구원을 방해합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은 지상에 고향이 없기 때문에. 그래서 아브라함의 두뇌는 뭔가 바뀌어도 단단히 바뀌어져야 돼요. 사실 두뇌가 바뀌는 것은 아니지요. 하나님의 성령께서 인도하시지요. 아브라함도 우리하고 똑같은 사람이에요. 자기 고향 갈대아 우르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성장하면서 두뇌가 완전히 구축될 그 때까지 자기 고향에 살았고 그 뒤에도 살았지만 그 뒤의 것은 후차적인 기억이기 때문에 그것은 쉽게 날라 가버려요.
치매환자들 보면 나중 기억은 쉽게 사라져요. 그러나 옛날에 했던 것, 옛날 동대문시장에서 장사했던 그런 것, 옛날 기억은 지금도 잊지 않고 있어요. 그러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예를 들어 우리가 교회 왔다. 교회 오면……, 지금 중요한 이야기합니다. 교회 오면 뭘 생각하느냐? 어릴 때 교회 다닐 적 믿던 그 하나님을 회상하기를 원하지요. 어릴 때 해병대 박수치면서 찬송했다면, 요즘같이 점잖게 예배드리면 영 예배드리는 게 맘에 안 들어요. 그런데 어떤 부흥사가 와서 박수 막 치게 하면 마치 그 옛날 처음 하나님 믿을 때의 기쁨이 밀려오면서 마치 은혜를 되게 받은 듯한 느낌이 들지요. 그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잘 들으세요. 그게 구원이 아니고 ‘위안’이라고 합니다. 스스로 자기를 위로하는 거예요.
위안의 근거는 뭐냐? 어릴 적 과거의 괜찮았던, 교회 와서 기분 좋았던 그 때 그 시절로 되돌아가는 겁니다. 아담이 선악과 따먹었잖아요. 선악과 따먹은 아담 이후의 모든 자식들은 뭐냐 하면, 이미 범죄한 아담의 자식이에요. 그러면 백이면 백, 천이면 천, 본인이 갖고 있는 그 성질, 성격, 본성, 고향, 그것은 물 밖으로 못 나갑니다. 물 안에 갇히게 돼요. 그게 바로 노아홍수입니다. 노아홍수에요. 모든 인간을 죽여 버리는 겁니다.
때로는 이렇게 하지요. “세상 참 불공평하다.” 하지요. 세상은 불공평한 정도가 아닙니다. “하늘이시여” 하잖아요. 하늘이시여, 그런 노래도 있지만 하늘은 자비가 없습니다. 냉정합니다. 냉정보다 더 심한 말이 뭐냐? 하늘은 잔인해요. 나의 원통함, 나의 소원, 일체 완전히 묵살해버립니다. 왜냐하면 그 하늘은 궁창인데 어떤 궁창인가? 물로서 가득찬 궁창이기에 너는 이 물 안에서 살다 죽으라는 겁니다. “하늘 쳐다보면 무슨 동정이라도 받을 줄 아나?” 절대로 하늘은 인간 말 듣지 않습니다. 하늘은 하나님의 말 듣습니다. 다른 말로 해서 하늘은 하나님의 약속대로, 언약대로만 움직입니다. 우리에게 너무너무 잔인해요.
하늘이 잔인하다는 말은 세상만사, 우리 인생살이가 그만큼 잔인합니다. 자비가 없어요. 베풀어주는 그 배려도, 사랑도 없고, 애정도 없습니다. 인간들이 어떤 신의 자비와 애정을 찾는 것은 뭐냐 하면 자기 고향, 옛날 기억 중에 좋았던 것을 확장시켜서 그게 마치 하나님인양 일방적으로 하는데 냉혹한 하늘은 오직 언약만을 통해서, 언약을 통해서 우리에게 나타납니다. 그게 노아언약이고 신약에서는 물세례라는 겁니다.
마태복음 3장에서 세례요한이 물세례를 줄 때 어떻게 물세례 줬는지, 얼마나 냉담한 반응을 가지고 진짜 자비라고는 요만큼도 없는 멘트를 날리면서 물세례를 주는지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3장 10절에 보면,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 긍정적으로 표현하지 않습니다. 부정적으로 표현합니다. 좋은 열매 없는 것은 불에 던져버린다. 그러니까 인간은 끼어들지 말라는 말이지요. 그냥 찍히면 찍히는 대로 살라는 말이지요.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그런데 12절에 보니까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이게 하늘의 자비입니까? 안 그러면 냉혹함입니까? 우리는 우리의 과거의 기억, 우리 과거기억의 고향에 항상 나한테 잘해주고, 나한테 착하게 해주고, 나한테 사랑을 베푼 그 기억들로 꽉 무장이 되어 있어요. 그래서 날 구원하는 하나님도 아마 내 사정을 들어주실 것이라고 일방적인 상상을 합니다만 언약은 그렇지 않습니다. 굉장히 냉혹한데 심지어 누구에게까지 냉혹하냐 하면 하나님의 독생자까지도 냉정하게 처리합니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얼마나 아팠으면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할 수만 있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하늘은 주님을 돕지를 않습니다. 속담하고 달라요. 속담에서는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왜 그래야 되느냐 하면, 우리가 고향이라는 이 땅을 떠나야 하기에 그렇습니다. 주님은 말합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늘나라 볼 수가 없다.” 그러면 물을 통과하면 되지 않겠는가? 물, 이것은 인간이 태어나지 않은 상태에서 위의 물과 아래 물로 나누었기 때문에 물은 6일째 만들어진 인간이 자력으로 물을 통과해서 하나님에게 가고자 하는 것을 가로막는 역할을 합니다. 제가 아까 이야기했지요. 가로막아요.
그 중에 하나가 출애굽 할 때에 홍해가 그렇잖아요. 애굽군대가 홍해 건널 때 물에 다 빠져죽었잖아요. 물이라는 것은 한마디로 이렇습니다. “네가 살아 있는 한 물은 통과 못한다.” 그게 물의 존재의미입니다. 제가 며칠 전에 영주 댐 근처에 갔는데 거기에 수몰지역이라고 있어요. 아직 물이 안 찼어요. 10월쯤 되면 보상금 받고 집집마다 다 철거되는 그런 와중에 있어요. 그 작은 마을을 제가 걸어봤어요. 사람은 다 떠나고 집들은 관공서만 남고 다 허물어졌어요.
그런데 이 수몰지역에 물이 이미 찼다고 봅시다. 옆에 보니까 영주 댐이 커다랗게 보여요. 그 마을이 영주 댐 바로 밑의 마을이라는 말이지요. 지금은 물이 하나도 안찼어요. 댐이 있고 사람들이 아직도 왕래하고 있어요. 좀 있으면 통행을 다 막겠지만. 물이 찼다고 상상해 봤습니다. 물이 가득 찼다고 생각한다면 저는 어디에 있느냐 하면, 물속에 있는 거지요. 제가 지금 노아홍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지금 물속에 있는 거지요. 거기서 퍼뜩 뭐가 생각났느냐 하면, 불교신자들이 생각났어요.
불교신자들이 ‘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 하면서 애쓰고 중들이 머리 깎고 애쓰는 것이 뭡니까? 도 닦는 거지요. 어디에서? 이 사람들이 언약을 몰라요. 노아언약을 모르거든요. 자기 자신이 지금 수몰지역에 있다는 것을 몰라요. 모르니까 그 사람들은 뭐냐? 극락을 생각하거든요. 극락을 생각하면서 ‘여기에서 도 닦으면 나중에 죽어서는 이 도 닦은 것 가지고 좋은데 간다.’ 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것은 어디부터 하는 생각인가? 아담이 죄짓고 난 뒤에, 선악과를 따먹고 난 그 이후에 인간의 본성과 성격을 불자들이 그렇게도 실감나게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제가 불교신자 이야기를 했지만 사실은 불교신자만의 이야기가 아니지요? 우리 자신들이 평소에 어떻게 살아가는가, 그 말 아닙니까? 불교신자 이 사람들은 ‘이 대자연, 환경이라 하는 것은 한 번도 물이 개입한 적이 없다.’는 겁니다. 그들 생각이 그래요.
그런데 성경 베드로후서 3장에는 뭐냐? ‘그 때에는 물가지고 덮쳐서 전부다 멸망했다.’고 되어 있거든요. 우리는 어떤 점이 유리한가 하면, ‘이미 물로서 한 번 지나가서 이 세상에 태어난 인간은 전부 다 물을 벗어날 수 없다. 태어났나? 그러면 죽어야 돼.’라는 것을 언약을 통해서 이미 수몰지역속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것을 느끼면서 산다는 점에서 우리 성도들은 유리한 거예요. 상당히 다행스럽다 할 수 있어요.
물속에서 헤엄친다는 것은 말이 안 되지요? 더구나 물속에서 도 닦는다는 것은 더더구나 말이 안 되지요. 물속에서 자기성화, 자기행위를 높인다는 이것도 말이 안 되지요. 물속에서는 그냥 죽으면 되는데 조건이 하나 있어요. 언약대로, 언약에 의해서 죽으면 돼요. “물에 죽습니까?” 아니요. 언약에 의해서 죽게 되면 됩니다. 이미 과거에 물속에서 죽었다는 것과 같은 언약, 하나님의 십자가에 같이 죽는다는 언약이 우리한테 오게 되면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뭐냐? 수몰지역에 있는 것만큼이나 확실한 것이 뭐냐 하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용서 안에 우리가 살고 있는 겁니다. 댐 바로 밑에서 보니까 댐이 제법 높아요. 수몰지역을 상상해 본 거예요. 물속에 갇혀 있는 그것이 상상만 해도 답답해요. 만약 그 댐이 십자가라고 봅시다. 십자가 안에는 뭐가 있는가? 하나님의 사랑이 있고, 용서가 있고, 자비가 있고, 하나님의 의가 있을 거예요. 하나님의 의.
그러면 우리는 어디에 수몰되어 있는가? 하나님의 의에 수몰되어서 헤엄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 의를 내가 소유하면 안돼요. 이미 수몰지역에서는 내가 죽은 것처럼 십자가 안에서는 우리가 죽었거든요. 그래서 죽은 인간이 저 의를 내가 소유할 수 없어요. 죽은 인간은 소유할 권리가 없기 때문에. 내가 여기 존재한다는 자체를 주의 의의 하나의 일부로 보자는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아무것도 행한 것도 없이? 아니지요. 죄를 졌지요. 죄를 짓고 이렇게 살면서도 주의 의의 생산품으로, 주의 결실, 주님의 의의 솜씨로 이 땅에서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뭘 해도 의가 되는, 마치 노아 안에서 뭘 해도 수몰지역에 있는 것처럼, 뭘 해도 물에 빠져 있는 것처럼. 사고팔고,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도 수몰지역에 있는 것처럼 우리는 장가가고, 사고팔고, 시집가도 주님의 의가 되는 결실물로서 이 땅에 살아갑니다.
안 믿어지지요? 로마서 3장, 5장이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네가 이미 의인이니라.” 이것이 하나님의 의의 효력입니다. 언약의 효력이지요. 아까 제가 이야기했습니다. 인간의 몸은 75퍼센트가 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이 지상에 물이 있다는 말은, 그 물은 하늘의 모형이고 그 하늘의 내막은 하나님의 궁궐, 하나님의 궁전이라고 제가 언급했습니다. 하나님의 궁전은 물 위에 세워졌다고 시편 104편 3절에서 언급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천지창조를 하신 이유는 뭐냐? 하나님의 자기궁전에 영원히 살 수 있는 사람을 만드는 작업으로서 첫째 날은 흑암과 빛, 둘 째 날은 위에 있는 하늘과 밑에 있는 물, 하늘과 물을 만든 것이 둘째 날이거든요. 그 모든 창조가, 그 창조의 원리가 어디까지 이어지는가? 6일째 인간을 만드는 것까지 이어집니다. 그 원리가 그대로 십자가지신 예수님에 의해서 우리에게 적용이 돼요.
적용이 되어버리면 우리는 어떻게 되느냐 하면, 이미 하나님의 의로 구원을 받은 상태에서 ‘왜 내 속의 75퍼센트가 물이지? 왜 하늘의 태양은 떠 있지? 왜 하늘의 별은 반짝이지? 왜 여기는 땅이고 저쪽은 하늘이지?’ 그 모든 것이, 나를 용서하시고 사랑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 궁궐과 자기궁전을 위해서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소급해서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겁니다. 아까 제가 두 번이나 질문했는데 다시 한 번 세 번째 질문해 봅시다. 이 질문을 하는 이유는 제발 성경 보면서 우리 자신을 빼자는 이야기입니다.
만약 지금 우리가 죽는다면 우리가 뭘 할 것인가? 내가 죽는 것만큼이나 확실한 게 뭐냐? 그것은 바로 물입니다. 왜냐고 묻는다면 내가 있기 전에 물이 먼저 있었기 때문에. 내가 있기 전에 물이 먼저 있었다면 물이 나보다 먼저거든요. 물이 먼저가 되어버리면 우리는 물의 후차적순서이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 나를 뺄 수가 있어요. 물 다음은 뭐가 있는가? 궁창이 하늘에 있지요. 하늘 다음에 뭐가 있는가? 빛이 있지요. 빛 다음에 뭐가 있는가? 천지창조하신 하나님이 거기에 궁전에서 앉아 계시지요.
그러면 그 물을 어떻게 통과하느냐? 세례요한이 이야기했습니다. 우리가 죽어 마땅하다는 것, 우리가 이 땅에 수몰되어야 마땅하다는 것, 그것은 우리가 잘못해서가 아닙니다. 우리 조상 아담이 우리를 대표로 해서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아담의 뒤에 서 있기 때문에, 아담이라는 그 줄 뒤에 서 있기 때문에, 우리의 머리 되는 아담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우리는 죽어야 되는 겁니다.
그런데 죽을 때 그냥 죽으면 허무하잖아요. ‘그냥 살다 죽자.’ 그런데 왜 죽이는가의 그 이유를 알면 돼요.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언약에 의해서 죽는다는 것을 알게 되면 두 번째 아담이 우리 뒤에 계셔요. 우리 앞에 아담 계시고, 우리 뒤에 예수님 계시고, 우리는 아담이라는 너무나 확실하게 갖고 있는 아담의 몸을 우리 뒤에 계시는 똑같은 몸을 지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확실하게 부활하심으로써 “이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로마서 8장 말씀처럼 이 몸도 사는 몸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물어야 돼요. “어떻게 이 죄 많은 몸이 삽니까?” 하나님이 “너는 죄로 보지만 나는 의로 본다.” 하는 거예요. “도대체 내 의가 어디서 나왔습니까?” 네 뒤에 있는 십자가의 의로 말미암아 죽을 너희 몸도 알아서 책임지고 주께서 살려주시는 겁니다. 이것을 우리의 생활, 24시간 일상, 아침에 눈 떠서 밤에 잠자는 거기에까지 확대시켜 보세요. 확대시켜 보면 우리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의로움과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속에서, 수몰지역에서 헤엄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느 것 하나 은혜 아닌 것이 없고 어느 것 하나 사랑 아닌 것이 없어요.
끝으로, “왜 우리는 평소에 이걸 모릅니까? 들어보니 그것이 정답인 것 같은데 왜 그렇게 못 삽니까?” 한다면 나를 거기에 집어넣어서 그런 거예요. 나를 주인공으로 집어넣어서 그래요. 주인공인 예수님을 위해서 창조한 거기에다가 자기가 피조물, 창조 받은 그 입장을 놓쳐버리고 창조 받은 자가 아니고 마치 나를 위해 모든 것이 존재해야 되는 것처럼, ‘내가 뭘 하면 어릴 때의 그 아름다운 기억으로 돌아가겠습니까? 내가 좋았던 그 행복을 되찾겠습니까?’
자기 자신이 자기의 고향이 되어버렸어요. 이것은 수몰지역이 없어요. 이것은 기독교신자라고 하지만 사실은 불교신자입니다. 그저 ‘댐 있네. 곧 수몰되겠네.’ 문제는 댐이 아니고 내가 문제지요. ‘보상금 타먹고 이 자리를 뜨면 그만이지.’ 이렇게 생각해요. 전부 다 내 중심으로, 내 중심으로 생각하니까 아까 이야기 한 ‘범사에 감사, 자비, 은혜, 사랑, 용서, 하나님의 의’ 그런 것이 다 날라 가버린 거예요.
‘하나님, 사는 것이 참 피곤합니다. 힘듭니다.’ 그런 생각이 얼마나 많은 경우에 들어갑니까? ‘참 힘듭니다.’ 힘들다, 힘들다, 하다가 힘들면 어떻게 되는가? 죽겠지요. 죽을 때 우리가 뭐하면 되지요? 우리가 죽었다 치고. 죽는 순간 가장 확실한 것은 지금 죽는 내가 가장 확실한데 그러면 내 안에 있는 물은 누가 만들었지요? 죽어가는 이 늙은 몸은 누가 만들었지요? 그것은 상식적으로 ‘하나님이’ 그 하나님을 어떻게 찾아가지요? 노아언약을 통해서. 바로 아브라함언약을 통해서.
노아언약은 물에서 나와서 그냥 땅이지만 아브라함은 “내가 이 땅에는 본향이 없고 나아갈 본향이 있으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다.”라고 합니다. 그리고 모세언약을 통해서. 하나님의 법을 지킴으로서 의인이 되고. 다윗언약에 의해서, 어떤 왕이 오셔서 백성의 죄를 대신 짊어지면 되고. 십자가 언약, 하나님의 마지막 언약이 와서 “내 살과 피로 말미암아 네 죄가 용서 받았다.”는 그것으로 인하여, 이 세상 모든 것이 바로 복음을 위하여, 새 언약을 위해서, 십자가를 위해서 우리도 그 중의 일부로서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 이 땅에 살도록 배치를 해서 인형처럼 툭 던져 놓은 거예요.
이제부터 주변의 하늘을 보고, 그리고 땅의 물을 보고, 그 물은 하늘의 모형인줄로 아시고 창세기 1장 6절을 기억날 때마다 되새길 수 있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 어떻게 살아야 됩니까? 굉장히 복잡한 질문 같은데, 우리 자신을 거기서 빼면 되는 간단한 문제인데 우리는 여전히 우리 자신을 거기에 집어넣습니다. 이제는 이 세상이 나를 위한 세상이 아니고 우리를 의롭게 하시고, 우리에게 영생 주시고, 우리를 사랑해주신 주님의 세계인 것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