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강-창 1장 1-2(창조와 흑암)150826-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1장 1-2절입니다. 구약성경 1페이지입니다.
창 1:1-2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이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사람들은 창조를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사람들이 말하는 창조를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창조는 처음부터 주체 자를 드러내는 창조만 이야기합니다. 창조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창조’를 이야기합니다. 오늘 본문 1장 1절에서 2절에 보면, 거기에 창조의 주체자가 등장합니다. “하나님의 신이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의 신이 수면에 운행하시니까 이것은 곧 하나님께서 이미 창조하실 때부터 그 창조의 의미와 목적이 하나님이 주인공 됨을 드러내는 창조만 하나님이 하신 겁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자기 자신이 마치 주인공인양 여기는 그런 창조를 생산해내지요. 그런 것을 자꾸 뽑아내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신은 어떻게 하는가? 인간들이 알고 있는 그 창조를 하나님이 주역이 되고 주인공이 되는 그 창조로 보내기 위해서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있는 곳으로 다시 회수하고 귀환시키는 작업을 하나님의 창조 안에 깔아놓았습니다. “창조되었느냐? 그러면 다시 흑암으로 되돌아오너라.” 그냥 없던 것으로 되돌아오는 것이 아니고 창조될 때, 출발할 때의 그 주인공도 하나님의 신이었고 되돌아오는 것, 회수하는 그것도 하나님의 신이 그렇게 해주시는 겁니다.
지방자치단체에서 큰 가구 같은 재활용품은 이제는 찾아가서 회수한다는 조례가 생긴다는 겁니다. 그냥 문 앞에만 내놓으면 찾아가서 회수한다는 거지요. 하나님의 신이 우리에게 찾아오게 되면 우리는 내가 주인공 되는 창조의 현실에서 벗어나서 주님이 주인공 되는 그 원래의 자리로 회수되는데, 그 원래의 자리는 창조되기 이 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창세전에 구원받았어요. 창세전으로 돌아가는 겁니다. 무슨 힘으로 돌아가는 겁니까? 안되잖아요. 창조했던 그 주역이 우리로 하여금 창조 전으로 돌아가서 대기상태로 있게 합니다.
어떤 대기상태? 흑암과 공허, 그리고 혼돈의 대기상태에 우리가 놓여 있어야 돼요. 결국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내가 여기 존재한다는 그 자체는 의미가 없는 겁니다. 존재한다는 그 의미마저 회수당하고 압수당해야 돼요. 이것은 삭제당해야 됩니다. “내가 여기 있습니다.”라고 말하면 안돼요. 우리가 지금 여기 있잖아요. 그러면 “주님이 여기 계시네요.”라고 바뀌어져야 돼요. “주님이 여기 계시네요.” 이걸 시편에서는 “하나님의 신이 여기 계시네요.” 이렇게 바꿔야 된다고 하는 겁니다.
시편 104편 30절에 보면, “주의 영을 보내어 저희를 창조하사.” 이렇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께서 어떤 창조든 간에 하나님의 신이 주인공이 되지 않는 창조는 창조 근처도 안 갔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마귀가 장난질을 치고 있는 겁니다. 창세기 1장을 이해하면 구원되는 줄로 알고 그렇게 하는 겁니다. 그러나 창세기 1장이 주역이 아닙니다. 내가 창세기를 알아버리면 내가 주인공이 되거든요. 우리는 ‘창세기를 알았다.’ 혹은 ‘출애굽기를 알았다.’ 그렇게 할 입장이 못 됩니다. 그걸 주장할 수 있는 입장이 안돼요. 하나님의 신은 놀고 계십니까? 그냥 바라보기만 하시는 분이에요?
시편 104편에 보면 하나님의 영이 분주하게 움직여서 그들로 흙으로 돌아가게 하십니다. “주께서 저희 호흡을 취하신즉 저희가 죽어 본 흙으로 돌아가나이다.”(시 104:29) 하나님의 신이 저희 호흡을 취해서 본 흙으로 돌아가게 하는 겁니다. 처음의 그 자리, 그 자리가 창세전의 자리거든요. 창세전의 자리가 네가 원래 있던 너의 자리가 되어야 된다는 거지요. 우리는 자꾸 이 원천을 잊어버리고 늘 들썩거리는 삶을 살아요. 굉장히 바빠요.
사람이 자기 역사를 생각하고 자기 인생을 자꾸 설계하는데요. 내가 죽으면 나의 역사도 무효가 됩니다. 죽는 순간 파일이 통째로 삭제되어서 다 날아갑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없어야 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태어나고 인생 어디서 어떻게 살았다는 그 모든 것은 주역 되시는 하나님의 신의 몫이지 우리 몫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피조물을 만들고 나서 피조물에게 뭘 맡긴 적이 없습니다.
피조물이 독자적인 노선을 획책했지 하나님은 피조물에게 독자노선을 허락한 적이 없어요. 창세기 1장 1절 주석을 두고 그동안 얼마나 많은 설교와 책을 봤겠습니까? 창세기 1장 1절을 설명한 무수한 책들을 제가 봤어요.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도 한결같이 마귀 적인지. 모든 주석, 해석들이 전부 다. ‘바라’ ‘아사’ 이런 원어를 총 동원해서 ‘make’가 아니고 ‘creat’라는 등의 이야기를 하는데 다 그 해석들이 마귀 적입니다. 특히 마귀적인 것 중에 뭐가 있느냐 하면, 창조과학회가 있어요.
또 마귀적인 것은 철학가들이 말한 것, “신이 인간을 무에서 창조했다.”는 그것. 이게 헬라철학인지, 중세철학인지, 기독교철학인지도 분간이 안돼요. 다 똑같아요. 복음이 들어오기 전의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를 그대로 베꼈어요. 복음이 들어오든 안 들어오든 의미가 없어요. 복음이 들어오나 복음을 빼나 똑같은 이야기에요. “없는데서 신께서 만들었다. 데미우르고스라는 신이 창조했다.” 이게 플라톤의 이야기, 복음 들어오기 400년 전의 이야기입니다. 인간의 아이디어에서 나온 거예요.
인간이 신에 대해서 궁금해 하는 겁니다. 자기가 어디서 왔으며, 누가 만들었으며, 자기의 본질, 원천이 무엇이며, 자기 실체가 무엇이며……, 이런 것을 궁금해 하는 거예요. 궁금해 하니까 마귀가 안 도와줄 수가 없지요. 막 도와주는 거예요. 그러던 차에 히브리 성경 창세기 1장 나오니까 “딱 나왔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난 됐다. 구원받았다.” 이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구약성경 믿고 지옥 간 사람이 한 둘이 아닙니다. 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들, 유대인들입니다.
이들은 구약성경을 달달 외우다시피 교육받았습니다. 여호와께서 천지를 만들었다고 구체적인 하나님의 이름까지 거론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천지를 만들었다. 다른 신은 아닌데 우리 의 신, 여호와 하나님, 언약을 주신 그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했다. 됐지요?” “되기는 뭐가 돼? 지옥가거라.” 그걸로 끝나버렸지요. 신에 대해서, 하나님에 대해서 안다 할 때는 창세기 1장 1절에서 2절의 그 기능이 여전히 살아있는 가운데 알아야 제대로 아는 겁니다. 그렇다면 1장 1절, 2절이 창조하고 난 뒤에 그냥 유야무야 없어지는 사실이 아니에요. “자, 창조했으니까 잊자.” 이렇게 잊을 문제가 아닙니다. 뭘 잊어요? 창세기 1장 1절과 2절을 그대로 집어넣어서 그걸 반복시키는데요.
시편 103편 14절부터 보면 방금 제가 한 이야기를 이해하실 겁니다. “이는 저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로다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그것은 바람이 지나면 없어지나니.” 뭘 잘못해서가 아닙니다. 반드시 이렇게 돼야 돼요. 반드시 이렇게 돼야 됩니다. 회수당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창조된 피조물은 피조물 자체로서는 아무 의미가 없어요. 그 자체로서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내가 누굽니까?” “그런 것은 나한테 묻는 것이 아니야. 어차피 너는 의미가 없”는 거예요.
우리의 의미는 다른 곳에서 오는 것이 아니고 우리 자체가 다른 곳으로 이동해야 됩니다. 어디로? 창세기 1장 1절, 2절로 이동해야 돼요. 그런데 인간은 “에이, 이왕 만들어놓은 것인데 뭘 옮깁니까? 그냥 여기 있을 테니 정보만 알려주세요.” 하는 거예요. ‘천지는 누가 만들었고, 어떤 신이 어떻게 만들었는데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살면 된다.’는 그 정보. 그래서 “여기 있는 이 존재를 보존하고 빛내고 의미를 저쪽에서 주시면 그 의미를 담고서 저는 구원받겠습니다.”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의미 같은 소리하고 있네.” “네가 거기 있지 말고 말씀 속으로, 창세기 1장 1절, 2절로 들어오게 되면 거기는 애초부터 너에 대한 의미는 요만큼도 없”어요. 거기는 오직 창조의 주역되시는 그분의 의미만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고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말씀할 때 이 말은 우리보고 당장 죽으라는 말이 아니고 이미 사나 죽으나 의미가 없다면 죽은 거하고 똑같은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갈라디아서나 로마서를 보면서 그걸 보는 그 의미, 노림수가 뭐냐 하면, 지금 내가 나를 살리는 방식으로 그 정보를 알고자 하는 겁니다. 그것 때문에 교회도 나오고, 봉사도 하고 나름대로 열심히 활동을 하지요. 저는 그걸 ‘들썩거리는 인생’이라고 하는데 자꾸 인생이 들썩거려요. 자꾸 점검하고, 확인하고, 파악하고, ‘내가 지금 어디까지 왔나? 부산까지 왔나?’ 이렇게 게임하듯이 늘 자기 자신을 파악하려고 합니다. 그렇게 파악한다는 것은 아직도 자기에게 미련이 있고 애착이 있다는 겁니다.
창세기 1장 1, 2절이 바닥에 되어 있으면 우리는 공허해야 되고, 혼돈해야 되고, 흑암이 있어야 돼요. 첫째 날에 빛을 만드는데 빛은 그냥 만드는 게 아닙니다. 없는데서 빛 만드는 게 아니에요. 어두움과 빛이 갈라져서 만들어지는 거예요. 따라서 우리라는 존재가 빛에 속하면 안 됩니다. 우리가 어두움에 속해줘야 나중에 빛을 받을 때 내가 빛나는 것이 아니고 창조의 주역되시는 예수님이 빛이 나요. 피조물의 역할은 그걸로 끝났습니다.
창세기를 하는데 창세기가 굉장히 난해한 이유가 있어요. 처음부터 난해하면 힘들어들 하시니까 진짜 쉽게 이야기할게요.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우리가 에덴동산에 있다고 쫓겨났잖아요. “그러면 제가 알아서 에덴동산 바깥에서 살겠습니다.” 하고 능동적으로 나온 것이 아니고 발길에 채이듯이 그냥 수동적으로 나와 버렸어요. 에덴동산에서 발로 채여서 나오고 다시는 들어오지 말라고 아예 문을 닫아놓은 거예요. 이것은 강제추방을 당한 거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사건도 사람들이 예수님을 살해한 사건입니다. 사람들이 강제로 살해를 했지요? 살해한 그 분이 사흘 만에 부활해서 그 부활의 능력으로 우리를 죄 용서함으로 구원시켜주거든요. 그러니까 이게 뭐냐 하면,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일이나 십자가 일이나 둘 다 우리 선을 이미 떠나버린 사건이 되는 거예요. 우리는 어떻게 살아도 우리의 능동, 우리의 의미라는 것은 일체 인정받지 못한다는 하나님의 언질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보고 “네가 나를 알아?” “성경 보니 나옵니다.” “너는 처음부터 너의 모든 것에 대해서, 너의 인생에 대해서 네가 관여 못하는 입장에 있다는 것을 네가 아느냐?” 그 말입니다.
한 번 정리해 봅시다. 의미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라는 존재도 없어요. 우리의 존재는 어디에 있어야 하느냐 하면, 창세전으로 돌아가서 창조의 주역, 주님, 주님이 존재함에 속할 때 비로소 주 안에서 우리의 존재의미가 발생됩니다. 이것이 에베소서 1장 4절에 나오는 유명한 ‘예수 안에서의 창세전의 예정’이에요. 그런 의미에요. 보통 잠언서는 아버지가 자식에게 교훈을 주는 책으로 알고들 있는데 잠언서 8장 22, 23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를 가지셨으며 만세전부터, 상고부터, 땅이 생기기 전부터 내가 세움을 입었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잠언서 8장부터 하나님의 관심사가 우리한테 있는 것이 아니고 누구한테 있는가? 바로 지혜, 말씀이라고 하신 예수님에게 모든 관심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의 신이 수면에 운행하시니라.”라고 되어 있잖아요. 여기 하나님의 신이 점차로 신약에 가까이 올수록 이 하나님의 신이 누구의 신이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라는 것으로 점점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신이 어떤 목적을 갖고 있어요. 그 목적이 뭐냐 하면, 모든 피조세계, 이 우주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행하신 기능의 의미를 담아두는 식으로만 하나님의 신은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은 우리 구원하려고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구원에 의미가 없어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에 의미가 있지 우리 구원은 의미가 없어요. 우리 구원은 예수님이 구원받으면 덩달아 되는 겁니다. 제가 언젠가 그런 이야기를 했지요. 출애굽에서 정작 출애굽하신 분은 한 분밖에 없다고. 누구냐 하면, 어린양만 출애굽했어요. 어린양이 출애굽하는데 따라 나온 사람들이 누구냐 하면, 바로 히브리인들이에요. ‘어린양 피 믿으면 덩달아 구원받고, 안 믿으면 그것은 탈락’이고 그런 겁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중심은 십자가에 있어요. 죽었다가 살아난 것을 믿으면 덩달아 구원받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죽은 예수님을 사흘 만에 살렸다는 것을 안 믿으면 그것은 구원 못 받고,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사흘 만에 구원시킨 그 구원을 믿으면 덩달아 구원받고, 그런 겁니다. 초점이 우리한테 있는 것이 아니에요. 혹시 유병언쪽이나 박옥수쪽의 구원파가 와서 “실례지만 몇 월 며칠에 구원받았습니까?” 이렇게 하면 “저는 구원 못 받았어요.” 하세요. “왜냐하면, 구원 받을 자격이 못되기 때문에.” “그러면 구원 안 받으렵니까?” “예, 안 받으렵니다.” 하나님은 저를 구원하지 않습니다.
또 침례교회에 가보면 손들고 앞으로 나오라고 하고 흰 옷 입혀서 욕조에 집어넣고 “다 같이 박수칩시다.” 하는데 이렇게 박수치면서 이벤트하면 구원됩니까? 쇼를 벌여요. 이벤트를 벌이고. 그저 눈요기감이에요. 예배가 아니고 패키지쇼에요. 쇼도 패키지쇼가 있거든요. 노래와 춤, 음식까지 제공하면서 그것을 패키지로 상품화시키는 것이 있어요. 교회가 구원하는 단체가 되고 말았어요.
그러나 교회는 한 사람도 구원 못합니다. 사도바울이 한 명도 구원 못했어요. 왜냐하면, 본인은 십자가 안 졌기 때문에. 고린도전서 1장에 나오는 말씀이에요. “나는 십자가 지지 않았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한 명도 구원 못했어요. 뭐라고 하느냐? “나는 목격자입니다. 주님의 구원하는 작업에 저는 구경꾼이었습니다. 제가 어떻게 당신을 구원합니까? 앉은뱅이 낫게 한 것, 그것은 주님과 그 사람의 이야기지 나는 다만 목격자입니다. 나는 예수의 증인일 뿐이에요.”
누가 구원하는데요? 인간은 인간을 구원 못합니다. 왜냐하면,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구원대상이 안되기 때문이에요. 구원할 가치도 없고 구원할 의미도 없어요. 우리가 뭐했다고 구원합니까? 한 게 없는데. 모든 하나님의 일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 그분들이 짜고 치는 고스톱이에요. 그분들끼리 다 해버려요. 어떤 분이 저에게 그런 질문했어요. “성경내용이 뭡니까?” “하나님의 하나님에 관하여. 끝!” ‘하나님의 하나님에 대해서’에요.
우리는 왜 생겼는가 하면, 하나님이 하나님에 대해서 일하다 보니까 툭 튕겨져 나왔어요. 주님께서 일하다 보니 땀방울이 툭 튀었는데 보니까 그게 피조물이에요. 늦게 오신 분을 위해서 설교 다시 하겠습니다. 다시 해도 다 새로워요.
하나님의 관심사는 창조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한 적도 없고 아무것도 안했어요. “하나님, 이 세상을 누가 창조했습니까?” 하나님은 답변도 안 해요. 왜냐하면, 인간의 모든 묻는 것은 자기의미를 단단히 확고하게 하기 위한 질문이기 때문에 그 질문자체가 성립이 안 됩니다. 인간은 자기 자리를 떠나지 않아요. ‘내가 나를 알고 거기다가 하나님마저 알게 되면 이제 다 알았다.’ 이런 노림수가 있어요. 하나님은 답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하나님에 의해서 이루어진 창조만 있어요. 그걸 인간이 알아채면 되지 않습니까? 알아챌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어디가야 알아챕니까? 그 인간이 흑암으로, 공허로, 혼돈으로 다시 본래의 창조 이전의 자리로 돌아왔을 때, ‘아, 나의 구원이 아니고 나의 창조가 아니구나. 나의 의미가 아니구나. 하나님은 나의 의미가 되는 것이 아니구나.’ 어떤 하나님의 신에 의해서 강제로 소환당해서 창조 전, 혼돈으로 되돌아갔을 때 비로소 아는 거예요. 그 혼돈을 십자가 안에다가 미리 앞당겨서 우리에게 선점해서 사건 화시켜서 보여준 사건이 십자가사건입니다. 어두움이지요.
이미 그런 뉘앙스를 시편에서 누누이 이야기했어요. 시편 90편 8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제가 시편 90편 8절을 읽어드릴 테니까 어떤 느낌을 스스로 생각해 보세요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 빛 가운데 두셨사오니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일식간에 다하였나이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우리 어머니는 지금 건강한 축에 들어갑니다.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누가 주의 노의 능력을 알며.”
자, 시편 90편 8절에서 11절까지의 이 말씀을 왜 피조물인 우리에게 주는 겁니까? 이게 소환과정이거든요. “빨리 네 자리 찾아가! 빨리!” 어떻게 찾아갈까요? 웃으면서 찾아갈까요? ‘하나님의 분노’ 가운데서 찾아가라는 거예요. “1 더하기 1은 귀요미! 이런 것 하지 말고, 예쁜 재롱잔치 벌리지 말고, 기도는 몇 분을 해야 하고, 헌금은 얼마를 해야 하고, 예배는 몇 번을 참석해야 되고, 전도는 일 년에 몇 번을 해야 되고, 목사님은 어떻게 섬겨야 되고, 그런 귀요미, 재롱잔치 같은 것들 벌리지 말고 그냥 매일같이 분노가운데서 빨리 소환당해. 빨리 네 자리 찾아가.” 수고와 슬픔뿐이에요.
조금 신경 쓰고 일했다 하면 여기저기 아프고, 좀 논다 싶으면 돈이 안 되고, 도대체 우리가 왜 이렇게 힘들게 살아야 되는가? 이제 여러분은 선악과를 왜 심어놓았는지 아시겠지요? 선악과를 심어놓은 이유는 소환과정에 꼭 필요한 장치이기에 배치된 기계장치입니다. 반드시 따먹게 되어 있어요. 15년 참아도 16년째 따먹게 되어 있고, 17년 참아도 역시 따먹게 되어 있는 그것이 선악과에요. 일단 따먹으면 10년 참았다, 20년 참았다는 게 다 무효입니다. 우리 인생이 선악과에요.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똑같아요.
“하나님, 25년 동안 바르게 살았습니다.” 죽으면 무효에요. 죽으면 죄 값으로 죽는 겁니다. 25년을 버텼든지, 50년을 교회 나왔든지, 70년을 교회 나왔든지, 나온 지 이틀이 되었든지 상관없어요. 우리 인생은 나는 30동안 교회 나왔다고 내가 내 시간을 쪼개서 특별한 의미를 추구하는데 제가 설교 처음에 했지요. 우리한테는 쪼갤 수 있는 의미가 없습니다. 시편 90편 8편 앞에서 의미라는 것이 어디 있어요? 태어나면서 지금까지 계속 분노가운데 급속하게 지나가는데요. 모든 수고와 슬픔, ‘이정도 했으면 앞으로 편하게 살겠지.’ 앞으로도 수고와 슬픔이 남아 있어요. 죽을 때까지 남아 있어요. 수고와 슬픔이 남아 있는 그것, 그거 네가 너 자신을 보지 말고 시편 90편에 비추어서 보라는 말이지요.
하여튼 백설 공주 계모가 참 바보에요.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냐?” 지금 우리는 거룩한 거울 앞에 섰습니다. “거울아, 거울아! 나는 얼마나 행복하냐? 한 달 수입은 얼마고?” 이렇게 하면 시편 90편 8절은 말하기를, “지금 주님이 화내고 있는 것을 모릅니까? 당신한테는 수고와 슬픔뿐입니다.” 그 때 우리의 할일은 뭐냐? 그 거울을 깨는 거지요. 그 깨는 그것이 바로 십자가사건이 우리한테 들이닥친 사건입니다.
내가 아는 십자가 사건은 전부 다 사기입니다. 그러나 깨지고 돌아보면서 발견되는 십자가가 진짜 십자가에요. 내가 실패하고 내가 사는 것이 당연히 수고와 슬픔뿐이며 그 모든 수고와 슬픔의 모든 스트레스는 내가 내 존재의 의미를 추구하는 그것이 원인이 되어서 나에게 주어졌다는 사실, 내 원래의 자리가 눈에 보이는 이 자리가 아니고 혼돈과 흑암의 자리가 내 자리인데 우리는 착각을 해서 ‘지금 멀쩡하게 빌라에 살고 있으니까 이건 내 자리다.’ 하는 거예요. 그냥 ‘이 자리가 의미 있다. 나는 몇 년도부터 목사를 했고 지금도 하고 있다.’ 이런 것들이 나에게 수고와 슬픔을 가중시킵니다.
그러다가 하루아침에 졸음운전 하다가 신혼부부 죽여 놓고 교도소 가 있으면 “주여, 왜 이러십니까? 내가 얼마나 봉사했는데.” 이렇게 나올 거라는 말이지요. “왜 이러시다니? 네 처지가 어때서? 네가 어떤 존재인데? 네가 착각을 했구나. 그러면 내가 너에게 뭘 해주랴? 이것보다 더 심하게 해주랴? 너는 아직 멀었어. 너는 아직 네 자리, 너의 주제파악도 못하고 있어. 이것보다 더 심한 곤란한 사태가 와도 너는 할 말이 없어. ‘욥 네가 황무지에 비 내리는 이유를 알아? 스스로 황무지가 아니라고 여긴 네가 문제야.’ 아무 이유 없이 황무지에 비가 내리는데 너는 무슨 텃밭인줄 알았어?”
그동안 욥이 텃밭이었거든요. 자기가 애 키우고, 양 키우고, 그런 텃밭이라는 말이지요. 비가와도 자기한테 와야 된다는 거예요. 주께서는 황무지에 비를 내리시는 거예요. “너는 네 자리를 찾아가. 황무지야! 혼돈이고 흑암이야! 깜깜한 어두움이야!” 거기서 빛으로 구분하는 것은 네 소관이 아니고 창조의 주역되시는 하나님의 신이 예수님과 결탁해서 아들의 영으로서 작용하게 되면 우리에게 빛이 오는 겁니다.
이사야 60장 19-20절에 보면, “다시는 낮에 해가 네 빛이 되지 아니하며 달도 네게 빛을 비취지 않을 것이요 오직 여호와가 네게 영영한 빛이 되며 네 하나님이 네 영광이 되리니.” 이것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창세기 1장에 해와 달을 만드신 거예요. 너 좋으라고 만든 게 아니라는 겁니다. 만드신 분 좋으라고 해와 별을 만든 거예요. ‘별 하나 나 하나 별 둘 나 둘, 별 하나 너 줄까? 저 별은 나의 별, 저 별은 너의 별, 별들에게 물어 봐?’ 자기 마음대로에요. 우리는 별을 헤아릴 수 있는 입장이 못 됩니다. 뭐?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같잖아서 말이 안 나와요. 별을 헤는 밤? 자기가 별을 왜 헤는데? 윤동주 지가 왜 헤는데?
도대체 기독교신자가 없어요. 한국교회사 가운데서. 아마 많이 있을 거예요. “천만인의 어미가 된다.”고 했으니 천만인 더 되지 싶어요. 많이 있는데 유명한 것은 이상하게 다 가짜 같아요. 분명히 많아요. 그야말로 수많은 사람들이 하늘나라 온다 하니 그렇게 많은데 그 수많은 사람 중에 유명한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아요. 시편 90편 1절에 보면,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 딱 한마디로 끝났잖아요. 주님이 우리의 거처에요, 주님이! 현재 창조됨을 당한 이 자리가 우리의 거처가 아니라니까요? 그래서 아브라함은 나그네 생활을 하는 거예요.
“그러면 그리로 가면 되지.” 어딜 가요? 우리 이 몸을 가지고 가요? 이 몸 같으면 그것은 출애굽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애굽과 약속의 땅 중간에 광야라는 과정을 왜 주셨는데요? 다 죽이기 위해서 준 거예요. 죽음이 뭡니까? 동행하시는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의 주역에 의해서, 창조에 개입하신 그 하나님이 40년 광야생활동안 다 죽여 버렸습니다. 홍해 건너온 사람 다 죽였어요. “아나 먹어라. 이게 복이다. 내가 친히 죽인 것을 영광으로 생각해라.”
혼돈, 흑암, 그리고 공허, 그것을 섭섭해 하지 마세요. 왜? 하나님의 신이 거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신이 있으면 돼요. 예수 그리스도가 있으면 우리가 혼돈하든, 강도가 되든지, 세리가 되든지, 창기가 되든지 하나님께서 그 따위 것은 묻지도 않습니다. 아무것도 묻지 않아요. “목사님, 그러면 하나님이 신이 있다는 것은 어떻게 압니까?” “혹시 본인이 혼돈이고 어둠이십니까?” “예, 그렇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신이 있네요.” “죄인입니까?” “예, 죄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신이 있네. 당신의 자리는?” “제 자리는 흑암이고 캄캄한 자리입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신이 있는 거예요. “당신의 자리는?” “저는 청와대 안보실장 조카입니다.” 그것은 아니지요. 청와대간부 조카는 안돼요. 이번에 회담한 사람 누군지 알지요? 청와대 아는 사람 있다고 해서 그 자리가 그 자리는 아닙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자기가 수고해서, 아는 사람 엮어서 터 잡은 내 노동과 수고에 의한 모든 터에서는 하나님의 주역이 보이지 않고 그 대신 다른 예수, 다른 성령, 다른 복음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단이지요, 이단. 사탄의 종이지요. 후딱 흑암으로 돌아오세요. 물론 우리 힘으로는 안 되지요. 후딱 오세요. 혼돈과 흑암과 그리고 공허로 돌아오세요. 그게 우리의 자리입니다. 왜? 그게 하나님의 신, 신약으로 하면 예수의 영, 다시 말하면 성령이 거기에 함께 있기 때문에.
그러면 이사야 60장에서 ‘해와 달이 빛이 아니고 친히 여호와께서 빛이 된다.’는 것은 언제 주어지는 겁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그리스도에게 비추는 빛으로 우리가 그 조명발을 같이 받으면서 “이것은 주님 덕분입니다.”라고 하는 그 상태를 천국이라고 해요. 예수의 나라지요.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고, 우리가 아는 하늘나라가 아니고 예수의 나라에요. 하나님과 내가 있는 나라가 아니고 하나님과 예수님의 백성들이 있는 나라, 그것이 천국이에요. 내가 예수 믿는 나라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나로 하여금 흑암으로 몰아세운 그 나라가 바로 천국입니다.
그 세계에서 우리는 주님 안에서 흑암과 공허와 대비되는 빛과 어두움, 모두 다 하나님께서 친히 자기 자신을 위해서 그러한 과정과 절차를 유발했음을 우리는 마음껏 찬양하게 되지요. 창세기 1장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천국가도 반복해서 또 찬양해야 될 내용을 지금 현재 보고 있는 겁니다. 우리는 문제지를 미리 입수했어요. 시험 칠 필요도 없어요. 문제지 입수해서 다 보고 있어요. 1번, 다음 중 맞는 것은? “흑암으로 돌아가라.” 흑암으로 돌아가면 돼요. 나의 의미는? “애초부터 없었다.” 이걸 알면 되는 거예요.
그런데 똑같은 문제지를 빼돌렸는데 마귀가 역사해서 ‘그래! 이젠 잊어라. 이제는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이렇게 하게 되면 이것은 지옥 가는 해답이 되고 말았어요. 인간이 어떤 답을 구해도 왜 답을 구한 그 자체가 문제가 되느냐 하면, 내 존재의 가치와 의미와 나를 지키기 위해서 기도라는 형식으로 답을 하나님께 요구하기 때문에 문제가 돼요. “하나님이여, 저를 살려주세요.” 전에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하나님께서 이스마엘을 살려주잖아요. 살려주는데 모든 일은 이삭중심으로 흘러가고 더 놀라운 사실은 누가 봐도 에서가 아니라 야곱이 사기꾼인데 이상하게 모든 스토리가 그 사기꾼의 세계로 모든 것이 평정이 되어버린다니까요?
그리고 억울하게 당했던 에서는 그냥 당한 정도가 아니고 저주받아요. 나쁜 짓을 하지 않은 에서는 저주받고 거짓말하고 사기꾼인 야곱은 축복받아서 영생 얻고. 성경입니다. 이게 성경이에요. 착한 일 하면 지옥가고 나쁜 일 하면 천국가고. 이게 성경입니다. 납득 안 되지요. 납득 안 되는 이유는 당신의 자리가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당신은 엉뚱한 자리, 마귀가 선악과 따먹고 자리 잡은 그 자리에 있기 때문에, 당신이 주인공이기 때문에, 자기의 주인공 됨, 자신의 존재의미가 자기 자신에게 있기 때문에 마귀가 준 정답을 정답이라고 오인할 수밖에 없는 입장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신은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로 데려갑니다. 그래서 주님이 창세기 1장의 혼돈과 어두움과 공허, 주님만이 말씀대로 체험한 그 십자가체험에 우리를 참여시켜서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의 부활의 영광도 함께 참여하는 복을, 우리 이름이 아니라 예수님 속에 있는 자신의 이름과 명예를 걸고, 주님이 자기백성이라는 그 명예를 걸고 우리를 끝까지 버리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영원한 천국백성 되게 하십니다. 그걸 신약성경에서 ‘사랑’이라고 합니다. 사랑!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고.”(아 8:6)
죽음은 우리가 취소할 수 없잖아요. 죽음만 취소할 수 없는 게 아닙니다. 주신 사랑 취소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 모든 은혜는 성령이 오셔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자리, 창조 이전의, 태초의, 창세기 어전의, 창조되기 이전의 자리로 늘 데려감으로 말미암아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고전 15:10)라는 고백과 더불어서 이 사랑이 얼마나 단단하고 질긴 사랑인가 하는 것을, 우리 힘으로도 그걸 취소할 수 없는 사랑이 우리에게 이미 개시가 되었기에 우리는 우리자리가 의미가 없다는 것을 비로소 고백하게 되지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창세기 보았습니다. 주님 위한 창조인데 우리가 마귀의 시험 들어서 ‘창조했으니까 날 돌봐야지.’ 하는 식으로 우리의 가치를 지키기 위한 하나님으로 오인했습니다. 이제는 오인했으니까, 그 오인자체를 깨달았으니까 이제는 우리 자리를 찾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