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각 정리

2015년 3월 25일 오전 07:47 (이방인의 처지)

아빠와 함께 2015. 3. 25. 08:13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 중에 있는 이방인 중에 

마음과 몸이 할례를 받지 아니한 이방인은 내 성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겔44;9)


살아 있는 사람들의 아이디어에서 신학이 나온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성경 보면서 교회 운영 방법이 자기가 살아 있는 채로 나온다는 거예요. 

할례 받지 않은 상태에서 나온다는 겁니다. 

그것은 멸망해야 될 이방인에 속하는 사고방식이에요. 이방인들이에요, 

사실은. 흉내 내고 모방하고 상상하는 겁니다. 

보다 완벽한 신의 세계, 완벽한 하늘나라를 만들기 위해서 

화평하고 온유하고 거룩하게 사는 것, 정결하게 사는 것, 그런 것들을 다 모은 거예요.

저는 그걸 쓰레기통이라고 합니다. 

주께서 다 쓰레기통에 집어넣습니다. 살아 있으면서 한 것은 하나도 인정받지 못합니다. 

부모가 죽음 건너편에 있는 거예요. 죽음 건너편에 있는 부모가 이 땅에 어떤 아들을 낳은 거예요. 

이사야 9장에 보면,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아들이 왜 왔겠습니까? 그 아들처럼 이 땅에 출현하는 자만이 그것이 할례 받은 사람입니다. 

이스라엘에 해당돼요. 그 아들처럼 출현해야. 

이 예수님, 그리고 이 예수님에 속해있던 백성들은 세상에 있는 부모로부터 만들어진 게 아니에요. 

사람이 구원받는다는 것은 그 사람의 근거, 출생지가 죽음 저 건너편에 있기 때문입니다.

죽음 건너편에 있다는 것이 어떻게 확인됩니까? 할례를 가지고 한다니까요. 

할례. 할례 할까요? 할례는 ‘할까요?’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할례라는 것은 우리가 만드는 것, 시행하는 것, 제작하는 것이 아니에요. 

새기는 것이 아닙니다. 할례라는 것은 보여준다는 겁니다. 

이방인들은 뭐든지 그걸 흉내 내고 만들고 상상해서 유사품을 만들어놔요. 

자꾸 시킨 대로 했다고 하는데 그게 아니고 통보, 뭔가 알려주는 역할을 해요. 

그 할례가 뭐냐? 바로 주님의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요.

골로새서 2장에 보면, 이 십자가를 가지고 마지막 때의 할례라고 했습니다. 

십자가로 너를 낳았다. 이겁니다. 십자가로 너를 낳았다. 십자가의 능력으로 너를 낳았다. 

십자가의 능력으로 낳았다는 말은 십자가를 계획했던 분이 죽음 저편에 계시는데 

저편에 계신 분이 자기나라를 채울 백성을 위하여 

십자가의 능력으로 여기 있는 이방인들 가운데서 할례 행해서 합류를 시켰는데 

그 합류로 나타난 것이 뭐냐,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성전에는 할례 받지 않은 사람은 들어오지 말라는 겁니다. 

이것은 금지입니다. 끝까지 주님은 금지 없는 일을 하신 적이 없습니다. 

왜 그래야 됩니까? 이 세상은 인간을 위한 세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 이 세상은 나를 위한 세상이 아니었구나. 이 세상은 다른 분을 위해서 있는 거구나.’ 

그러면 그 다른 분이 뭐냐? 중재자, 또는 중보자라고 이야기하는데 

그 중보자가 이 땅에 나타나서 보여준 것은 바로 십자가라는 이름의 할례의 완성이었습니다. 

십자가로 가까웠다는 그 말은 인간들끼리 화합하고 화목하자는 말이 아니고 

죽음 그 건너편에 가게 되면 이방인도 없고 유대인도 없고 

오직 십자가의 능력으로만 죽었다가 살림 받는 사람만 거기에 있다. 

그게 바로 에베소서 2장에 나오는 교회라는 겁니다. 성령의 전이라고 하지요. 


-우리교회 수요설교 ”이방인의 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