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가 피차 송사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완연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너희는 불의를 행하고 속이는구나 저는 너희 형제로다” (고전6;6-8)
에스겔 24장 18절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내가 아침에 백성에게 고하였더니 저녁에 내 아내가 죽기로.”
에스겔의 아내가 졸지에 죽었습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악에 받쳐서 막 하나님께 대들었을 거예요.
“하나님께 충성을 다했는데 사랑하는 아내를 데려가게 되면
내가 무슨 의욕을 가지고 일을 계속할 수 있습니까?” 하고 악이란 악은 총동원시켜서 대들었을 거예요.
그런데 에스겔은 담담합니다. 왜? 자기가 태양이 아니기 때문에.
내가 태양이 아니거든요. 나는 태양이 아니고 나는 태양을 도는 행성에 불과합니다.
이 발상의 전환이 되는 사람을 가지고 성도라, 형제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세상 모든 변화는 다 예수님을 위해서 있지 우리를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살아도 혹은 죽어도 주를 위해서 살기도 하고 주를 위해서 죽는다는 이야기입니다.
마지막 때에 성도가 출현합니다.
이 출현된 성도의 특징은, 본인에게 그 어떤 의미나 목적을 두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즉 ‘나를 위하여’가 근원적으로 차단된 자들이 바로 성도입니다.
이 성도는 하나님의 성령에 의하여 이미 끝을 넘어선 자들이요 그 끝 안에서 도로 튕겨져 나온 자들입니다.
그들은 예전에 자신이 살던 풍경 속으로 도로 들어온 자들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닫힌 문을 노크하는 자들이 아니라 이미 열려진 문을 노크하면서
자기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 하늘에서 새로 파견된 자들입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성취’가 내장되어 있습니다.
이 내장된 신적 요소로 인하여 그들은 철저하게 자신들이 인간이 아니라 괴물임을 자인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마지막 때의 요소인 ‘십자가’라는 절대적 기준에 준해서
인간 스스로의 착함과 선함을 용납하지 않음을 알게 된 자들입니다.
속는 것이 차라리 낫지 아니하냐.” 하는 이 대목을
육신으로 해석하지 말고 신약 때 성령 받은 영으로 해석돼야 돼요.
육신으로 해석하면 이렇게 됩니다.
“형제가 속이더라도 이미 너는 가진 자니까 차라리 속아줘 버려라.
그러면 그 형제와 네가 하나가 되어서 그리스도 몸을 이룰 것이 아니냐?
참는 사람이 이긴 자다. 그렇게 생각해라.” 그게 바로 육신으로 해석하는 거예요.
그러나 영으로 해석하는 것은 이렇습니다.
나라는 존재는 매일 같이 속이지 아니하면 살 수 없는 괴물이로구나!
속이지 않는 분은 주님 한 분 뿐이시네!
“차라리 불의를 당해라. 왜? 너는 당해도 싸니까.” 그게 정답이에요.
“참아라. 참는 자가 이기는 것이다” 그게 정답이 아니에요.
“내가 양보할게. 그래, 네가 이겼다.” 이렇게 돼버리면
나는 양보하는 괜찮은 사람이 되어 상대방을 속이는 것이 되지요.
하나님께서 얍복강가에서 밤에 찾아갈 때,
야곱은 자신의 속임수 있는 인생 전체를 자신이 자기를 지키기 위해
낯선 방문지와 죽도록 밤새 싸우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야곱입니다.
이 야곱이 오늘날 우리들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옛적 살던 동네입니다.
이 동네에서 우리는 자신의 진면목을 되풀이하면
주님의 용서하심을 되풀이하면서 증거하게 됩니다.
성도는 죽기전부터 이미 죽은 자의 삶을 고백하게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매일 위선없이 살지 못하고
남에게 자신이 마치 존재할 가치 있는 것처럼 가장하는 삶 속에서
하나님의 절대 기준인 십자가를 늘 새삼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우리교회 주일오전설교 ”속아주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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