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3장에 보면 씨 뿌리는 비유가 나와요. 씨 뿌리는 비유가 네 가지로 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길 가에 떨어진 씨, 하나는 돌짝밭에 떨어진 씨, 또 하나는 가시덤불에 뿌려진 씨, 또 하나는 옥토에 떨어진 씨.
첫 번째는 길 가에 떨어졌으니까 새가 주워 먹었고,
두 번째는 싹이 나다가 밑에 숨어있는 바위가 있어서 결실을 못 맺고
세 번째는 결실을 맺어서 좋다 했는데 갑자기 가시덤불이 와서 덮쳐서 결실을 못 맺고 시들어버리고.
네 번째는 그야말로 가시덤불도 없다. 바위도 없다. 그리고 마귀도 없다. 그냥 씨 뿌린 대로 드러냈을 때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었다.
라고 이야기하면서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라고 이야기했어요.
제자들이 못 알아들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왜 못 알아들었냐 하면요, 못 알아들을 수밖에 없어요.
그 이야기를 할 때, 사람들이 백이면 백 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저는요? 어느 땅에 속하는데요?”
벌써 출발 자체가 가 네 가지의 밭 가운데 저는 어느 땅에 속합니까? 하기 때문에 주의 말씀을 못 알아듣는 겁니다. 알아들을 수가 없어요.
인간이라 하는 것은 내 것이 있는 것이 아니고 뭔가 하나님이 주시면 내 것이라고 여기는 것을 빼버려야 돼요.
내것이라 여겼던 것 빼버리고,또 주면 또 빼고. 남는 것은 뭐냐, 경계선만 남아요. 경계선. 경계선만 남는다고.
그 다음에 경계선에 무슨 그림을 그릴까? 하는 것은 우리 소관이 아니다 이 말이에요.
마치 우리가 투명한 유리와 같아서 유리에다가 색칠을 하게 되면 색칠은 남고 유리 자체는 아무 색깔이 없고 그냥 투명하기만 하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바로 그런 식으로 사용하시는 겁니다.
자, 네 가지의 밭이 있다고 한다면 정답은 그거예요.우리가 어느 밭에 속합니까? 가 아니라
네 가지 다 밭을 보여 줄 투명한 거울 같은 그러한 인생을 살게 될 때, 우리는 천국에 속한 사람이 되는 겁니다.
투명한 것 중에서 주님이 주신 일만 보여주면 되는데, 꼭 자기가 하는 일을 집어넣어요.
주님은 당신에게 어떻게 했습니까? 그걸 듣고 싶은데
내가 이렇게 했습니다. 내가 이렇게 열심히 했습니다. 내가 이렇게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자꾸 그런 것만 나오니까 짜증나요
목사의 권위가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참, 기가 찼어요. 그래 이랬습니다.
존경받는 것과 존경을 강요하는 것과는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주신 자도 하나님이요, 가져가신 자도 하나님인 것을 안다면 나는 그냥 투명한 유리판으로 되잖아요.
주면 주는 대로 하고 가져가면 가져가는 대로 하면 되거든요.
대추가 풍년 되었는데 값은 폭락하는 대로 안 되면 안 되는 대로 팔면 되지.
그것가지고 하나님한테 닦달하게 되면, 따로 자기가 지킬 것을 가지고 있으면 본인이 피곤해져요.
그렇게 되면 복이다? 복 아니다? 를 누가 결정하냐면 본인이 결정해요.
이것은 하나님 나라 아닙니다.
네 가지 중에서 하나를 차지하려고 해요.
목사님이 “하늘나라는 땅이 네 종류가 있거든요. 옥토 있고 가시덤불 있고....”
“저요! 저요!” “왜?” “나는 옥토 될래요. 그래서 열매 맺을래요.”
그래 나오니까 목사 본인도 마찬가지에요. “여러분 이렇게 하시면 옥토 됩니다.”
그게 무슨 해석입니까? 이렇게 하시면 옥토 됩니다. 이게 무슨 해석이에요.
“여러분들은 네 가지 다를 보여 준다면 천국 백성입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해야지.
주께서는 자기 사람에게 적용시킨 자기 원리가 이뻐서 그 사람을 거기에다 적셔서 천국으로 데려가는 거예요.
그 주께서 구원하는 기준. 그 기준을 찾아내시는 겁니다. 그 기준을 찾는 방법은 뭐냐,
복 받아 놓고 뜯기는 그 과정의 경로를 거쳐야 그 기준을 우리가 목격하게 되고 느끼게 되는 거예요.
그거는 어떻게 되느냐 하면, 이겁니다. 이게 바로 주께서는 그걸 주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두려움을 줘요.
그래서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눈만 뜨면 항상 두려움이 택배처럼 와있어요.
“오늘 이런 일이 일어나면 안 되는데. 오늘 이런 일이 일어나야 하는데.” 항상 두려움이 와요.
근데 그 두려움의 긴장된 순간이 지나가면서 “아휴! 다행이다!” 하고 감사할 때.
감사할 때 바로 병 주고 약 주시는 하나님. 깜짝 놀라게 했다가 다시 한 번 또 감사케 하시고.
이렇게 해서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하신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고,
뭔가 큰일을 했으면 사람은 교만하기 짝이 없게 돼요. 느긋하게 될 때,
또 주께서 새로운 사태로 어려움을 주시면 과거 잘 난 것 싹 사라지고 또 새로움에 대해서 깜짝 놀라게 만들죠.
그러면 그것이 또 주님에 의해서 해결되면 또 감사가 되고. 그러면 그 사람은 하나의 경계선만 남죠.
그게 바로 복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런 원리에 의해서 이렇게 하시고 이런 원리에 의해서 주시더라.
그럼 원리가 뭐냐? 교만하면 미워하시고 겸손하면 사랑하시더라는 원리입니다.
그 겸손의 자리가 어딥니까? 바로 십자가의 자리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말라기의 구약은 십자가에서 완성이 되는 겁니다.
니 안에 십자가라는 하나님의 원리가 느껴질 때까지 하나님께서는 너에게 작용하실 것이다.
니가 만약에 모든 게 정상적으로 잘 될 때는, 집안에 아무 문제없을 때는 십자가 때문에 잘 된 줄 알고
니가 뭔가 일이 꼬일 때는 십자가 은혜를 놓치기 때문에 꼬이는 줄로 생각하라.
그게 하나님의 고집이에요.
니가 잘나서가 아니다. 너하고는 관계없어. 내 원리가 너한테 적용시키기 때문에 그렇게 잘 된 것이다.
우리 것은 없고 우리는 아예 주님의 것으로 인정하시기 바랍니다.
-주일오후예배 "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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