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이 견고함이고,
그 견고함의 자리가 마련되면 그 다음에는 그 사람의 관심사가 바뀌게 된다.
나의 전쟁
"이 세상은 나의 힘으로 자리 확보에 나서야 숨을 쉴 수 있다" 그게 바로 타고난 인간의 본성이다.
바로 우리의 일상(日常)이다. 내 자리, 즉 내가 힘을 들여서 모았던 그 자리를 감히 누가 빼앗아 가느냐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그렇게 자기 아지트만 있고 토치카만 있으면 되는데, 그것은 교회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렇게 우리 인간은 타고났는데, 자기 전쟁만큼은 말이다.
그러니 가나안 10족속이 바로 우리 자신인데, 애굽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나' 이외에 다른 것에는 일체 관심도 없이 살아간다.
주의 전쟁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주님은 전쟁을 하기 위해서 오셨고,
그 전쟁은 우리가 알고 이 세상의 뒤바뀜이라는 것이다. 즉 모든 것이 '거꾸로' 라는 말이다.
(눅 6:20)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가라사대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눅 6:21) 이제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이제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
(눅 6:25)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사람에게 성령이 오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시어른과 같은 주님과 함께 살게 되면, 그 관심사가 무엇으로 바뀐다는 말인가? '
나의 전쟁'이 아니라 '주님의 전쟁'으로 바뀌면서,
"내가 바로 주의 원수의 자격으로, 주님과 함께 동거하고 있습니다" 라는 고백을 하게 된다.
그게 바로 성도의 모습이다.
하나님의 강력한 우연적인 언약 사건에 의해서 "이렇게 못난 저도 쓸모 짝이 있네요" 라고,
주의 전쟁'에 쓸모가 없다는 이유 때문에, 그렇게 하나님의 일에 참여되어서,
요한계시록 12장의 두 증인처럼 죽기까지 죽도록 주님만 드러내는 증거자로서 살아가게 하는 그 프로젝트,
그것이 지금 우리에게 실시되고 있다는 것이다.
(계 11:3)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저희가 굵은 베옷을 입고 일천이백육십 일을 예언하리라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의 전쟁 중에서 있으면서도 나의 전쟁에 몰두하다가 보니,
모든 것이 다 평온하기만 하고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여겨집니다.
하지만 우리가 우리 자신의 것을 챙길 때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손을 털치시는 줄 압니다.
그렇게 해서 주님에게 관심을 두게 하는 놀라운 기적적인 사건이 일어남을 통해서,
우리 자신이 이미 주의 증인임을 깨닫게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대구강의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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