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
인간은 순수하지 않습니다. 죄인이기에 순수한 마음은 없습니다.
차라리 순수하지 않다는 것이 낱낱이 발각될 때 우리 바깥에 순수하신 분이 있고 그분과 관계가 성사되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내가 순순하지 않다는 것이 폭로될 때, 그 폭로하시는 것은 순수함입니다.
따라서 순수를 만나는 좋은 계기는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말씀을 깨닫는 놀라운 순간이 옵니다.
교회 와서 자식들 위해 기도하고, 남편 위해 기도하는 것은 결코 순수한 것이 아니고 죄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죄가 된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닫는 순간 그 사람은 순수에 걸려든 사람입니다. 곧 구원 받는 순간이지요.
어떤 인간도 순수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순수한지 아닌지 판정을 내리지도 못한 채 그저 필요에 따라서 예수 믿고자 했을 뿐이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인간의 의도마저도 사용하셔서 예수님의 자기 계획을 드러내는 계기로 순수하게 사용하시는 겁니다.
제가 '순수'라는 표현을 섰습니다만 성경에서는 이것을 '거룩' 혹은 '의'라고 합니다.
이 모든 것은 주님과 우리가 맺은 관계 자체가 의롭고 거룩한 겁니다.
예를 들어, 어떤 집안에 아버지가 장관이라면 아버지는 장관이지만 아들은 장관 아니잖아요.
하지만 그 아들이 골목에 나가면 다른 사람들이 '장관 집 아들이다.' 이렇게 말하지요.
아들은 장관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아버지가 장관이기 때문에 자기는 장관 집 가족이 되지요.
우리는 이런 식으로 구원 받습니다.
나는 내 성실과 선함으로 구원 받고자 시도했는데,
예수님께 걸려들어서 예수님의 거룩 때문에 내가 예수 안에서 의로운 가족이 되는 거예요.
내가→주님께서
문둥병자가 병 낫게 해달라고 요청했을 때 주님은 병을 고쳐주시면서 ‘네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라’고 했지요.
이 율법은 말씀에 해당되지요. 그러면 여기서 ‘내가 어떻게 구원 받습니까?’ 이것이 성립됩니까?
이 질문은 ‘내가’로 시작됩니다.
이것은 문둥병자가 예수님 찾아올 때 했던 이야기입니다. “내가 어떻게 하면 이 몸이 깨끗하게 됩니까?”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병을 고쳐주고 하시는 말씀이, 이미 구원 받은 사람은 ‘내가’에서 말씀 속으로 위치가 바뀌게 되어 있다고 이야기하시는 거예요.
‘네가 나에게 요청해서 병 나은 것이 아니고,
너는 모르지만 율법이 완성되기 위해서 너는 애초에 문둥병 걸려야 했고, 지금 이 순간 너는 나를 만나야 했고, 내가 낫게 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여, 어떻게 하면 내가 구원 받습니까?’라고 할 때,
정작 구원 받은 사람은 ‘내가 어떻게 구원 받습니까?’라는 말도 창세전에 이미 계획된 것을 내뱉고 있는 거예요.
이미 구원 받았기에 그 소리가 나오고 있는 겁니다.
쉬운 예로, 작가가 드라마 시나리오를 쓰는데, 김수연, 임성한 이런 분들이 유명한 분입니다.
드라마를 보는 사람들은 그 장면에 빠져듭니다. ‘다음 장면은 어떻게 될까?’
예를 들면, 며느리가 시집을 왔는데 시어머니가 비타민 약을 먹이는 거예요. 그런데 그 비타민 약 속에 피임약에 들어 있어요.
그 사실을 나중에 며느리가 알았어요. [청담동 스캔들]이야기입니다.
이런 스토리를 보면서 ‘이제 어떻게 될까?’ 궁금해 합니다. 왜냐? 우리는 작가가 아니니까.
그런데 작가는 그걸 보면 어떻겠어요? ‘이쯤 되면 시청자가 궁금증이 극에 달했겠지?’
지금 상황에서 누가 느긋합니까? 작가는 느긋한 거예요. 그 이후의 내용을 이미 알고 있으니까.
구원이 뭔가 하면, 내가 천국 간다는 것이 구원이 아니고
우리가 말씀의 세계 속에 들어가면 나의 기억과 나의 과거를 버려야 되고,
주님의 창세전 계획과 이 세상 끝난 후의 일을 우리 몸에 퍼붓게 되는 거예요. 이게 바로 말씀의 세계입니다.
출발점은 내가 아쉬워서 예수님께 도움받기 위해서 교회 가고, 예수 믿으려고 했잖아요.
그러나 주님이 보시기에는 그것이 출발점이 아니고 ‘너는 그렇게 될 수밖에 없도록 내가 창세전에 이미 계획했다.’는 겁니다.
창세전에 이미 야곱은 사랑받기로 했고 에서는 미움 받기로 했지요.
그러면 에서와 야곱이 어떤 활동을 하는 것은 창세전 계획대로 움직입니까, 제 마음대로 움직입니까? 창세전 계획하신 대로 움직입니다.
그 계획에 참여하게 되면 ‘내가’는 날아가 버립니다.
“주께서 구원을 보여주기 위해서 내가 그런 시도를 해야만 했군요.” 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그러면 ‘내가’의 자리에 누가 들어갑니까? 방금 이야기했잖아요.
“예수님께서 나로 하여금 ‘내가 어떻게 구원 받습니까?’라는 말을 하게 하신 것 맞지요?”라는 고백으로 바뀝니다.
우리는 소급해서 창세전 계획을 고백하고 또 고백하는 겁니다. 이것이 범사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모든 되어진 일이 어느 것 하나 오류가 없는데
우리는 내 중심으로 생각하니까 이것은 이런 아쉬움이 있고, 저것은 저런 방향으로 갔으면 좋겠다는 식으로
내가 주가 되어 평가하고 원망하고 수정하려고 합니다.
내가 드라마 작가가 되어 내가 이 세상을 주관하려고 합니다. 이게 바로 죄가 됩니다.
이런 강의를 들어도 돌아서면 또 마찬가지입니다.
내 인생의 주인은 내가 되고 주님은 내가 시키는 대로 하시면 되는 분입니다.
‘내가 기도할 때 응답해 주시면 내가 주님을 잘 섬기겠습니다.’ 이렇게 거래하고 흥정에 나섭니다.
이 병은 죽어야 고칠 수 있는 병입니다. 절대 이 병은 안 고쳐집니다.
그러나 걱정하지 마세요. 고쳐야 구원 받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 받았기에 이것이 병인 줄 압니다.
-광주강의 "존재의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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