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각 정리

2014년 8월 28일 오후 07:49 (교회됨의 원칙)

아빠와 함께 2014. 8. 28. 20:06

2003-12-26 20:32:53,
목사님, 질문드립니다.
행1:16에 베드로가
"성령이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예수 잡는 자들을 지로한 유다를 가리켜 미리 말씀하신 성경이 응하였으니마땅하도다" 하면서
시편 69:25 "그의 거처로 황폐하게 하시며 거기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와
109:8 "그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소서"을 인용하였는데, 시편과 사도행전이 잘 연결이 안됩니다.
시편의 두 본문을 풀어 주시고 또 사도행전과 연관지어서도 말씀해 주시면 합니다. 늘 감사드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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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2003-12-26 22:40:58,

베드로의 구약 해석은 참으로 특이하고 낯섭니다.
왜냐하면 구약 성경에 정통해 마지 않는 유대인들이라 할지라도 아무리 연구해도 나올 수 없는 해석을 베드로 사도가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구약 성경에 가롯 유다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는 겁니다.
베드로는 두 가지 본문을 시편에서 뽑았는데 우리는 그의 성경 해석을 그대로 따르고자 합니다.
그래야지만 문제를 뛰어넘는 제대로 된 영적 해석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의 본문은 시편 69편이요, 다른 하나는 시편 109편입니다.
시편 69:25에 보면, "저희 거처로 황폐하게 하시며 그 장막에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본문에 아무리 눈 닦고 봐도 가롯 유다라는 이름이 나오지 않습니다.
대신 27-28절에 보면, "저희 죄악에 죄악을 더 정하사 주의 의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소서 저희를 생명책에서 도말하사 의인과 함께 기록되게 마소서"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시편은 전체가 장차 오실 예수님을 묘사하기 위해 미리 예언된 것이라고 베드로는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예수님에 의해서 죄 씻음받고 용서받은 자도 이 시편에 예언되어 있을 것이요,
그렇지 않고 예수님의 의해서 죄씻음 받지도 못하고, 용서도 받지 못할 것도 이 시편에 예언되어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 증거가 시편 109:8절과 12-15절에 나옵니다.
"그 년수를 단촉케 하시며 그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시며… 저에게 은혜를 계속할 자가 없게 하시며 그 고아를 연휼할 자도 없게 하시며 그 후사가 끊어지게 하시며 후대에 저희 이름이 도말되게 하소서 여호와는 그 열조의 죄악을 기억하시며 그 어미의 죄를 도말하지 마시고 그 죄악을 항상 여호와 앞에 있게 하사 저희 기념을 땅에서 끊으소서"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구약 성경은 예수님에 의해서 행하신 일에 대해서 미리 언급한 책입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로 인해 이 세상은 두 종류의 사람이 생기고 말은 것입니다.
한 쪽은 자신의 지은 죄가 모두 예수님에 의해서 다 씻음받은 자인데 그 사람은 생명책에 이름이 그대로 유지되는 자이요,
다른 한 무리의 사람들은, 남들 보기에는 하나님께 속한 자인 것처럼 살아왔지만 예수님에 의해서 용서가 되지 않았기에 자기 부모에게 물러받은 죄가 그대로 남아 있어 저주받게 되어 무리들입니다.
가롯 유다는 바로 이 저주받을 무리의 대표로 이 다윗의 시편에 예언되어 있다는 것이 베드로의 구약 성경 해석입니다.

그러니까 베드로는 예수님의 십자가 입장에 서서 거꾸로 구약 전체를 내다보는데
거기에는 확실하게 대비가 되어 두 가지 노선을 나란히 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11사도들이 받은 은혜성과 가롯 유다가 받은 저주성을 함께 지니고 있어야 교회가 된다는 것을
이미 베드로는 익히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 중심으로 구약을 대하는 영적 해석입니다.
영적 해석이란 모호하게 해석한다는 것이 아니라,
비록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엄연히 교회의 주인되시는 분이
자신의 구원 사역을 다 이루었다는 그 증거물로서 교회를 만들고 계심을
확연히 아는 상태에서 성경을 해석하는 겁니다.

구원 사역을 완성하신 예수님은
과거 구약 때, 자신이 예언하신 대로 오직 자신이 원하는 자에게만 용서가 주어지는 조치를 취하십니다.
바로 그런 자들이 모인 곳이 교회며
교회는 바로 예수님의 이런 '주되심'의 본격적인 활약성의 결과로만 생겨난다는 것이 사도행전의 흐름입니다.

교회의 교회됨의 원칙은 이 원칙 뿐입니다. `
교회가 숫자를 논하는 것은 현재 교회의 주인 되시는 분을 모독하는 행위입니다.
어느 누가 구원될 것인가 하는 것은
교회에 다니는 인간들이 결정지을 문제가 아니라 머리 되시는 예수님만 알고 계시는 사항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