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각 정리

2014년 8월 16일 오전 08:26(여름수련회8강)

아빠와 함께 2014. 8. 16. 08:36

출애굽기 22장 21절입니다.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이었었음이니라.”

이 말은, 주변에 있는 고아와 과부의 모습에서 진짜 너의 모습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상대가 요구하는 것은 내가 평소에 호소했던 것으로 받아드려야 합니다.
누가복음 10장 ‘선한 이웃’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요.
강도를 만나 피를 흘리고 있는 사람을 보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냥 다 지나갔는데 사마리아 사람은 그를 도와주었지요.
왜 도와주었지요?
여기에서 주님이 하신 말씀은, 강도 만난 사람의 가해자가 강도가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길에서 만난 상대를 때려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다면,
때린 사람이 가해자가 아니고 그 광경을 보고도 그냥 가버린 사람이 가해자가 되는 거예요.
주님은 진정한 이웃을 생산하기 위해서 그런 사태를 의도적으로 유발하셨습니다.

이런 저의 주장에 반문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처음에 목사님이 말씀하시기를 율법은 못 지킨다고 했잖아요?
못 지킨다고 해놓고 갑자기 고아와 과부 이야기가 나오니까
네가 그 입장이 되었다고 생각하고 도와주라고 한다면 앞뒤가 안 맞는 말씀을 하신 것이잖아요?
그러면 도와주라는 말입니까, 도와주지 말라는 말입니까?” 이런 식으로.

저는 이렇게 답변하고 싶어요.
“나는 고아다. 나는 과부다. 그러니까 날 도와 줘!”라는 사람은 절대로 도와주지 마세요.
율법은 우리의 이용물이 아닙니다.
‘내가 어려운데 왜 사람들이 안 도와주지? 율법에는 고아와 과부를 도와주라고 했는데.’
이것은 아닙니다. 고아와 과부에게는 그런 권리가 없습니다.

그럼 고아와 과부는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가?
‘저를 고아(또는 과부)되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이렇게 나와야 돼요.
이런 사람은 주변 사람이 날 안 도와줘서 괘씸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나를 과부로 만들었습니다.’ 라는 믿으며 주님과의 이웃 관계가 성립된 사람입니다.
따라서 그 사람을 도와주지 않으면
그 사람을 안 도운 것이 아니고 주님이 일으킨 사태에 대해서 주님을 빼버리는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 8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