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14: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이 지상에서는 어제와 내일 사이를 두고 '날' 이라고 표현하는데,
그런데 묵시의 세계에서는, '주 안에' 있으면 즉 이미 천국에 들어온 상태를 두고서 '날'로서 이야기를 한다
즉 주님이 활동하신 자국이 있으면 '그 날'이 된다
그러니 그 날인지 아닌지는, 주님의 활동을 느낄 수 있는지 없는지, 거기에 달려있다
주님의 활동을 느끼지 못하면 오늘은 자기의 날이 되지만,
주님의 활동을 느끼고 믿게 되면, 오늘은 자기 날이 아니고 그 날이 된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작업하시는 그 날이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날'의 개념이 정립되면, 날은 과거에서 미래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항상 여기서 부글부글 끓는, 언제나 일이 계속해서 일어나는 상태를 '그 날'로서 표시를 하셨음을 알게 된다.
주와 함께 있는, 주 안에 있는 그 날로서....
모든 것은 다 주님이 알아서 하신 것이다, 주님의 솜씨이고 작품이다.
우리는 도화지인데, 주님께서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오늘하루도 그렇게 도화지로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변곡점을 거쳐서, 어떤 꼬부랑길로 왔던 간에
주님과 함께, 아니 주님 안에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물로서, 그런 주님의 작품으로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릇인데 아버지와 아들이 약속한 바를 이루어 그 그릇에 담는 것이다
우리의 행함이 아니요 주님의 이루심이다
주님의 행하심의 결과를 담는 그릇이 성도의 역할이다
자기긍정에서 자기부인으로 성령에 의해 바뀌어 가는 것이다
우리가 곧 철없는 아브라함이고, 이삭이고, 야곱임을 알게 된다
아브라함의 부인이 사라인데, 참으로 못됐다는 것이다.
자기는 자식이 없는데 자기 종인 하갈은 자식이 있으니, 그 하갈과 자식을 굉장히 구박했다는 말이다.
요즘은 못된 시어머니만 아니라 못된 장모도 유행인데 말이다(ㅋㅋ). 사라도 그에 못지 않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못된 사라가 지금 어디서 살고 있는고 하니, 천국에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 못된 사라에게 시달리고 시달린 하갈은 어디에 살고 있는가? 저 밑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의 상식을 그야말로 뒤엎고 마는데, 책상을 마구 엎어버리듯이 말이다.
우리에게 있어서 그런 업어치기에, 그런 바뀜에 참으로 많은 세월과 시간이 필요한데,
즉 "착한 내가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천하에 못된 내가 구원을 받았다" 라는 것이다.
이렇게 바뀌어야만 하는데, 그것이 결코 우리의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오직 성령의 능력이시다.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가? 오직 그리스도만 자랑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다.
-대구강의 "에수안"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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