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이름

주의 이름 측면에서 살펴본 구원관070103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4. 6. 8. 09:49

 

주의 이름 측면에서 살펴본 구원관

이근호 목사(우리교회)

 


A. 주의 이름과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은 창세기 1장부터 나온다. 그러나 뜸 하다가 창세기 5장에 또 나온다.  "아담 자손의 계보가 이러하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창세기 5장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거론한 것은 죄 짓고 난 이후의 인간세계의 변화된 모습에 대해서 설명하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지만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난 뒤부터는 하나님의 형상은 사라지고 아담의 형상의 세계가 되었다. "아담이 일백 삼십 세에 자기 모양 곧 자기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3절) 인간의 형상과 더불어서 이 지상에 나타난 현상은 무엇인가? "아담이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구백 삼십 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4절-5절).

 

아담은 죽었고 또 그 아담의 형상을 입은 자식도 죽었고, 그 손자도 결국에는 죽게 되고 …. 아담의 형상의 내림 따라 죽음도 병행된다. 그런데 창세기 5장에서의 '형상'에 대한 거론은 '이름 짓기'와 무관하지 않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시고 그냥 두신 것이 아니라 '사람'이라고 이름을 지으셨다.

 

그리고 아담과 마찬가지이다. 자기 모양, 자기 형상대로 자식을 낳고 난 뒤에는 '셋'이라는 이름을 지었다. 물론 하나님이 지으신 이름은 아담에게만 해당되는 이름이 아니라 전 인류에 대한 보편적으로 지칭하기 위한 '사람'이라는 대표 명사로서 시작이 된다. 셋의 이름도 사실상 사람이라는 하나님의 호칭 안에 들어 있는 것이다. 문제는 '형상'과 이름과는 무슨 관련이 있느냐 하는 점이다.

 

구약의 성도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구원에 보답했다. 신약에 와서는 오직 주의 이름으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을 이름을 하나님이 준 적이 없다.(행 4:12) 이름이 어떤 때 주어지며 그 주어지는 목적과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이 아담에게 사람이라는 이름을 주신 것은 단순히 존재적 구별을 위한 조치만이 아니다. 이름을 제공받은 쪽과 이름 지은 쪽은 이름이 담고 있는 창조성을 사이에 두고 상호 연결되고 있다. 아담이 자기 모양대로 자식을 낳고 난 뒤에 셋이라는 이름을 남긴 것도 같은 원칙에 의해서이다.

 

이름을 준 쪽과 이름을 받은 쪽이 동일한 틀 안에, 같은 운명으로 상호 통하고 있음을 뜻한다. 같은 운명, 같은 기능, 같은 속성 안에 함께 놓여 있다. 창세기 1장에 보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이 다른 피조물과의 차이나는 유일무일한 속성이 나열되어 있다.

 

다른 피조물은 결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지 못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 말씀이 지닌 의미가 보다 선명해진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 식물이 되리라"(27절-30절).

 

"정복하라"."다스리라","…주노라"라는 명령들은 곧 인간에 대해서만 특별 대우와 우월성을 보장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단순히 지음 받았다는 피조성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창세기 1장에서의 이러한 다스림이 본격적으로 수행하는데 있어 하나님은 아담에게 이름 짓기 작업을 위임한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이르시니 아담이 각 생물이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창 2:19). 하나님이 아담에게 이름 짓기를 맡긴 것은 아담에게만 다른 피조물과는 달리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창세기 1장에서의 인간의 위상과 창세기 2장에서의 이름 짓기와 서로 연결시켜 보면 이름을 지어준 주체를 위하여 이름 지음 받은 대상이 지배받도록 하는 원칙을 이 창조세계에 남기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이 드러난다. 인간은 하나님을 대신해서 이 세상을 다스리게 되었다.

 

사람이라는 이름을 하나님에 의해서 지음받았기 때문에 그 이름을 합당하게 살 의무와 책임이 있는 것이다. 아담은 또 하나의 이름을 짓게 된다. 그 이름은 여자이다. 이 여자라는 이름은 남자을 염두에 둔 이름이다. 즉 인간의 대표인 남자를 위한 배필로서 등장된 것이 여자이다.

 

그래서 여자의 머리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남자라는 단계를 거쳐야 한다. 사람에게는 분명 지배하는 머리의 위치가 있지만 특히 여자에게는 분명히 머리가 남자이다. 결코 여자가 남자의 머리가 아니다. 오히려 반대이다.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니 그 머리에 마땅히 쓰지 않거니와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니라"(고전 11:3,7).

 

이러한 서열은 이름 짓기에서 드러난다. 남자가 여자의 이름을 짓고 거명하므로서 사람에게 주어진 역할의 대표자는 남자와 여자 중에서 남자가 대표가 된다. 그리고 여자는 그 남자를 위한 존재이다. 선악과를 따 먹어서는 안된다는 계명도 여자에게 직접 준 것이 아니라 남자에게 직접 주어졌다. 이처럼 이름을 지음받은 쪽은 이름을 준 쪽의 역할을 위한 창조된 것이다.

 

그런데 죄를 짓고 난 뒤에 죽음이 찾아오게 되었다.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에게 죽음이 찾아든다. 하나님의 창조의 틀이 와해될 입장에 놓여 있다. 여기서 하나님은 남자에게 찾아와서 새로운 약속을 말씀하신다. 여자의 후손을 통해 창조 회복의 길을 마련한 것이다.

 

새로운 창조 사역은 이제는 남자가 아니라 여자를 통해서 직접 주어진다. 창세기 3:19에서 아담은 자신이 죽게 된다는 사실을 통고받는다.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 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그러나 이 죽음의 통고에도 불구하고 아담은 생명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즉 남자는 자기 아내에게 내려준 그 약속이 성취되면 다시 생명이 주어질 것이라는 입장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가 자기 아내 이름을 바꾸는데서 드러난다. 여자라는 이름 대신 하와 즉 생명으로 이름으로 바꾸어 부른다. 창세기 3:15에 나와 있는 하나님의 약속을 염두에 두고 붙인 이름이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그렇다면 생명이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는, 남자를 위해 반드시 그 약속을 구현되게 된다.

 

그 약속을 주신 분이 남자도 여자도 아닌 하나님 그 분이기 때문이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난 뒤에 생명 나무가 있는 곳에서 추방되게 된다. 이제 생명하고는 전혀 상관없이 살게 된 처지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담은 자기 아내의 이름을 생명이라고 붙인 것을 보면, 생명나무와 관련있고 그 세계에 계신 분이 직접 아내의 후손으로 등장된다는 점을 미리 암시하고 있다.

 

약속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고 또한 그 생명세계에 계신 분이 그 약속을 성취하기 위해 후손으로 등장된다면 생명은 다시 인간 세계에 투입될 것이라는 아담의 생각이었다. 생명이라는 새로운 이름이 남자의 아닌 여자의 계통으로 출현한다는 것은, 기존의 남자 중심의 인간 세상의 형편이 결국에는 죽음의 반복과 연속으로만 이어진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즉 더 이상 인간의 핏줄은 섕명세계는 소용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던져 주신 약속이 있기에 이 약속에 의해서 창조의 틀과 영광은 다시 회복이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첫째로 아담이 차지했던 그 하나님의 형상 자리에 새로운 이름이 거명되어야 하고 둘째 그 이름은 하나님이어야 한다.

 

그래서 창세기 4:26에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온다. "셋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왜 꼭 여호와를 거명해야 하는가? 그것은 아담 이후의 모든 역사는 아담이나 아담의 후손이 주도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하와의 관계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창세기 4:1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등장된다.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잉태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분명 하와와 동침한 것은 아담이다.

 

그러나 아기를 낳고 난 뒤에 여자인 하와가 하는 말이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라고 언급하고 있다. 창세기 3:15에 나오는 여자의 후손은 딸이 아니라 구체적인 남자 아기인 아들임을 분명히 기재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 아담의 후손들은 "…죽었더라","…죽었더라"만 반복될 뿐이다.(창 5:4-31)

 

아담이 낳은 아들들의 이름은 종국에는 생명과 무관하게 죽음으로 끝을 맺고 있다. 사람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하나님이 내려주신 그 약속이 그 이름을 부르는 이를 통해서 구체화되기를 적용, 성취되기를 원하는데서 비롯된다. 실제로 에녹 같은 경우에는 죽음을 보지 않고 세상을 떠나갔다.

 

이러한 사실은 가인의 노선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라 죽은 아벨의 대신 주어진 핏줄은 셋의 노선을 통해서 나타났다. 그들은 여호와의 이름에 기대를 거는 자들이었다.

 

에녹이 죽음을 보지 않고 세상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과 동행했기 때문이다.(창 5:22) 노아가 구원받은 것도 하나님과 동행했기 때문이다.(창 6:9) 만약 하나님이 동행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가? 창세기 6:3에 보면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 이십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라고 되어 있다.

 

여호와께서 사람들과 함께 하지 않겠다는 이유는, 그들이 육체가 되기 때문이란다. 여기서 육체라는 것은 죄 속에서 만들어진 몸들을 말한다. 하나님이 창조시 원래 만들어 주신 몸이 아니라 다른 몸을 그들은 지닌 것이다. 이것은 창조의 영광이 파손된 모습이다.

 

하나님을 그들을 땅 위에서 소멸시킴으로 새로운 하나님의 형상을 창조하신다. 심판을 통한 새 창조이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생겨난 인간은,하나님의 약속의 은총이 담아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 되는 것이다. 노아 홍수 심판 이후에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약속해 주신 바가 있다.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바다의 모든 고기가 너희를 두려워하며 너희를 무서워하리니 이들은 너희 손에 붙이웠음이라 무릇 산 동물은 너희의 식물이 될지라 채소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 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채 먹지 말것이니라 내가 반드시 너희 피 곧 너희 생명의 피를 찾으리니 짐승이면 그 짐승에게서,사람이나 사람의 형제면 그에게서 그의 생명을 찾으리라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 너희는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편만하여 그 중에서 번성하라 하셨더라"(창 9:1-7).

 

 

 

    이 내용은 마치 창세기 1:27-31의 내용을 반복해 놓은 것과 같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께서 이 땅에 하나님의 형상을 세워놓으시고 그를 통해서 아름답게 창조세계를 다스리고 싶어하는 그 의도를 홍수 심판 이후에도 반복하시는 것이다.

 

창세기 1장에서는 식물성으로 양식을 삼으라고 하셨지만 창세기 9장에서 동물성 피조물까지도 음식물로 주어진다. 그 원인은 '피'에 있다. 노아 홍수 이후의 모든 생명은 바로 하나님의 은총에 준해서 제공된 것이기 때문에 이 생명 유지 보전하는 그 은총성을 그대로 유지하는 새로운 차원의 창조 세계로 이끌고자 하시는 것이다.

 

동물을 음식으로 먹으면서 단순히 먹고 배불리라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짐승을 잡을 때마다 피를 가려서 안 먹음으로 심판을 무사히 통과시키신 그 하나님의 은총을 대대로 이 피조세계에 영구히 남겨두시는 것으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려고 하시는 것이다.

 

다른 말로해서 노아 언약을 통한 영광이다. 사람이 사람을 죽여서 피를 땅에 쏟아지게 할 자격이 없는 이유는, 하나님이 새로 남겨주신 생명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에 투입된 생명은 바로 창세기 3:15의 약속에 근거해서 제공된 생명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노아 언약 안에는 여자의 후손으로서 새로이 등장될 하나님의 이름이 담겨 있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창세기 9:26에서 노아가 다음과 같이 찬양 한다. "또 가로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이 종이 되고" 노아가 보기에 셈의 행동과 처신 속에 여호와의 은총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여자의 후손은 곧 바로 셈의 후손의 노선을 통해서 살아있음이 증명된 것이다. 셈의 후손이 유지,보존,지탱되는 것은 그 원동력이 셈의 생식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 때문이다.

 

여호와의 의해서 살아남은 핏줄, 즉 노아의 후계는 하나님의 은총의 환경 안에 놓여있다. 여호와에게 도전하든 순종하든 모두다 은총의 저촉을 받는다. 심판의 기준도 새로운 창조의 원리에 의해서 결정된다. 사람이 사람을 죽여서는 아니되지만 은총의 주체이신 여호와께서 죽이는 자는 반드시 죽여야만 한다.

 

예를 들면, 가나안 민족과의 전쟁 같은 것이다. 여호와의 약속과 이름 대신 자신의 이름을 거명하고 거기에다 기대를 거는 자들은 필히 멸망하도록 되게 된다.

 

 

 

    그런데 그런 일이 벌어졌다. 창세기 11:4-5에, "또 말하되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창11:5) 여기서 "우리 이름을 내고"라는 말씀이 들어 있다. 이미 인간의 이름은 노아 홍수 이후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인간의 핏줄과 이름은 곧 죽음과 저주받아야 될 기능과 속성을 같이 짊어지고 있는 이름이다. 그런데 그 자기 이름을 선호한다는 것은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기 위한 조치였다. 즉 고유 민족과 핏줄을 영구히 존속케 하려는 시도들이다.

 

그러나 이미 하나님이 생각하고 있는 것은 오직 여자의 후손 뿐이다. 하나님이 여자의 후손으로 출현하는 그 분의 핏줄 이외에 그 어떤 핏줄도 생명하고는 상관없다. 새로이 창조해 나가시는 핏줄은 창세기 12장에 나온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창12:1절-3절).

 

    복이라는 것은 창세기 1장에서 창조 완성을 위하여 주어진 것이다. 즉 창조 상태가 완벽할 때 그 완벽할 상태를 팽창시켜 온 우주에 차고 넘치게 하기 위해서 부가하는 힘이 복이다. 그런데 그 복이 아브람을 통해서 부어주시겠다는 것이다. 새로운 이름이 세계에 첨가되었다.

 

그리고 이 새로운 이름과 기존의 이름 사이에 구별이 생겨난다. 다른 그 어떤 이름으로도 복은 오지 않는다. 그러나 단 아브라함의 이름만은 예외이다. 누구든지 이 아브라함의 이름을 무시하면 저주가 주어진다. 이제 새 이름에 의한 새로운 약속의 시절이 도래한 것이다.

 

복의 이름을 지녔다는 것은, 복을 제공할만한 기능과 속성을 구비했다는 말이다. 그것이 약속 장치이다. 그러면 아브라함의 약속의 본질에는 누가 들어 있는가?

 

창세기 15:10과 17-18에 보면, "아브람이 그 모든 것을 취하여 그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고 … 해가 져서 어두울 때에 연기 나는 풀무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워 가라사대…" 라고 되어 있다. 제물을 "쪼개 놓았다"는 것은 제물의 속성과 본질 부분을 밝히자는 것이다.

 

아브라함 언약이 완성 될 때 과연 어떤 실상으로 드러날 것인가를 부분적으로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 쪼개놓은 부분을 횃불이 지나간다. 불이란 창세기 3:24에서 생명나무를 지키는 천사의 모습을 말한다. 즉 아브라함과 약속을 하시는 당사자는 바로 생명나무를 간수하는 하나님이신 것이다. 아브라함의 노선을 따라 생명은 찾아오시도록 된 것이다. 즉 약속을 따라 생명을 들어오신다.

 

그 약속의 씨가 여자의 후손과 연관있음을 보이기 위하여 아브라함과 사라의 생식능력을 부정하는 자식이 출생한다. 기존의 아담 형상을 입은 핏줄에 대한 전면적인 거부이다. 이것이 할례 언약으로 보여진다. 아브라함의 여호와로부터 택함을 받고 가나안 땅에 들어서면서부터 가는 곳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볼 수 있다(창 12:9/13:4/21:33).

 

이삭도 마찬가지이다(창 26:25). 아브라함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자기의 새로운 이름을 창대케 하는 약속의 작용에 기대를 걸고 있기 때문이다. 여호와의 이름에 준에서 새로운 이름이 이들 선택자에게 입혀지므로서 이들과 하나님 이름 사이에는 계약이 체결된다.

 

상방이 서로 유통될 수 있는 이름을 부르면서 계약이 실현되어 나가는 것이다. 어쨋던 이름이란, 창조의 영광의 틀을 유지, 보존 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일관된 창조사역의 증거요 매개체로서 사용하기 위한 조치이다. 창조 때는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인간의 몸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었다.

 

따라서 이 몸이 죄로 말미암아 흙으로 환원되고 난 뒤에는 그 자리에 새로운 하나님의 형상 유입이 요구된다.

그것이 무엇인가?

 

①창세기 15:17에서는 횃불로서 보여지고 있고

②출애굽기 3장에서는 떨기나무의 불꽃으로 보여지고 있으며

③출애굽기 24:17에서는 여호와의 영광이 불로 나타남이 백성들에게 공개되었고

④광야에서 국가 이스라엘을 주도해서 이끈 것은 불기둥이었다.

⑤그리고 성막 제단 위의 제물을 붙이는 불의 본질도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나온 것이다(레9:24).

 

원래 제단이란 하나님의 이름을 기념하는 곳이며 동시에 복을 받는 장소이기도 하다.

"내게 토단을 쌓고 그 위에 너의 양과 소로 너의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 내가 무릇 내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곳에서 네게 강림하여 복을 주리라"(출 20:24). 제단에 불이 제물을 소비시킬 때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에서 극복되어 긍휼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신명기 4장에서는, 형상 금지 항목을 해석하면서 하나님의 형상을 분명히 밝히고 있는데 "너희는 스스로 삼가서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와 세우신 언약을 잊어버려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금하신 아무 형상의 우상이든지 조각하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오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라"라고 말하고 있다.

불 자체가 형상이 된다는 말이 아니라 그 어떤 형상도 용납하지 못하도록 소멸하시는 일이 하나님의 속성이라는 것이다.

 

즉 지상에 있는 모든 형상 자체를 소멸하는 분으로 보여지는 분이시다. 또한 모세나 백성들이 산에서 하나님과 대면할 때도 불 속에서 대화했다. "말하되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영광과 위엄을 우리에게 보이시매 불 가운데서 나오는 음성을 우리가 들었고 하나님이 사람과 말씀하시되 그 사람이 생존하는 것을 오늘날 우리가 보았나이다 이제 우리가 죽을 까닭이 무엇이니이까 이 큰 불이 우리를 삼킬 것이요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음성을 다시 들으면 죽을 것이라"(신 5:24-25).

 

모세만큼은 하나님의 형상을 직접 보았지만(민12:8) 안 죽고 살아남은 것은 하나님의 긍휼 때문이었다.

 

"모세가 가로되 원컨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나의 모든 선한 형상을 네 앞으로 지나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반포하리라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또 가라사대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출애굽기 33:18-20). 이처럼 불로서 나타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 아브라함 계약과 이스라엘 계약의 중간형상으로 들어가면서 계속 처음 창조의 틀과 관계를 유지시켜 나가시는 것이다.

 

 이러한 이스라엘에서의 여호와 이름, 혹은 '주'개념은, 약속된 바를 오직 주님 자신이 벌리시는 거룩한 전쟁을 통해서 성취해 내시는 분으로서 드러난다. "여호와는 용사시니 여호와는 그의 이름이시로다…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권능으로 영광을 나타내시니이다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원수를 부수시니이다…주께서 그 구속하신 백성을 은혜로 인도하시되 주의 힘으로 그들을 주의 성결한 처소에 들어가게 하시나이다"(출15:3,6,13)

 

"나의 번쩍이는 칼을 갈며 내 손에 심판을 잡고 나의 대적에게 보수하며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 보응할 것이라 나의 화살로 피에 취하게 하고 나의 칼로 그 고기를 삼키게 하리니 곧 피살자와 포로된 자의 피요 대적의 장관의 머리로다 하시도다 너희 열방은 주의 백성과 즐거워 하라 주께서 그 종들의 피를 갚으사 그 대적에게 보수하시고 자기 땅과 백성을 위하여 속죄하시리로다"(신 32:41-43).

 

이 본문에 나와 있듯이, 인간들이 제대로 전쟁할 수 있으면 주께서 친히 나서서 복수하실까? 바로 이 주님이 하시는 일을 신약에 와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것이다.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는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으니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행 2:35-36).

 

구약에서의 '주'라는 개념이 단순히 성도와의 협력자 정도가 아니다. 홀로 모든 일을 열심히 기필코 처리해 내시는 분이시다. "이는 남는 자가 예루살렘에서 나오며 피하는 자가 시온에서 나올것임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히 이를 이루시리이다"(사 37:32).

 

그런데 과연 주님께서는 누구를 적으로 삼고 전쟁하시는가 하는 점이 중요하다. 결국 '이름 싸움'이었고 '자기 영광' 싸움이었고 '자기 형상 보존 싸움'이었다. "내가 주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지극히 높으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니… 열방을 책하시고 악인을 멸하시며 저희 이름을 영영히 도말하셨나이다"(시9:2, 5).

 

자기를 신앙의 대상이나 내용물로 삼는 자는 전원 다 적이 되는데

놀랍게도 신약에 와서 밝혀진 바에 의하면 그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적이 아닌 자가 없다는 것이다.

즉 자기 구원을 염두에 두지 않고 하나님을 거론하지 않는 자가 하나도 없다는 말이다.

 

율법의 개입이 바로 이런 점을 지적하기 위함이었다.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11, 19-20).

 

 

 

하나님의 형상이 불로서 나타나는 것은 후대에도 계속 이어지는 것은 하나님 이름이 인간의 본연 죄를 향하여 신속하게 치닫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은 더 짙어진 죄악과 더불어 더욱 더 큰 은혜로 나타나고 있다. 사사기 13장에서 하나님의 사자가 마노아 집에 나타난다. 그들은 그 천사의 이름을 묻는다. 그럴 때 '기묘'라는 이름을 던져 준다.

 

"마노아가 또 여호와의 사자에게 말씀하되 당신의 이름이 무엇이니이까 당신의 말씀이 이룰 때에 우리가 당신을 존숭하리이다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를 묻느냐 내 이름은 기묘니라 이에 마노아가 염소 새끼 하나와 소제물을 취하여 반석 위에서 여호와께 드리매 사자가 이적을 행한지라 마노아와 그 아내가 본즉 불꽃이 단에서부터 하늘로 올라가는 동시에 여호와의 사자가 단 불꽃 가운데로 좇아 올라 간지라 마노아와 그 아내가 이것을 보고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니라"(17절-20절).

 

'기묘'라는 이름의 이 천사는 제단 위의 불꽃을 따라 하늘로 올라갔다. 이 기묘자라는 이름은 이사야 9:6-7에 보면 한 아기의 형상으로 나타나시게 되어 있다고 약속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 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히 이를 이루시리라" 즉 하나님 자신이 기묘자이시다.

 

마노아는, 하나님을 만났으니 이제 자신들은 죽었다고 낙담을 하고 있다. 그러나 마노아 아내가 말하기를 번제를 통해서 그 죽음이 극복되었다고 한다. "그 아내에게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을 보았으니 반드시 죽으리로다 그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우리를 죽이려 하셨더면 우리 손에서 번제와 소제를 받지 아니하셨을 것이며 이제 이런 말씀도 우리에게 이르지 아니하셨으리이다 하였더라 여인이 아들을 낳으매 이름을 삼손이라 하니라 아이가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복을 주시더니"(삿 13:22-24).

 

이 번제라는 하나님의 이름을 기념되게 하는 자리에 '기묘'라는 사자가 직접을 불을 지폈는데 그런 일이 있고 이후 이 마노아 가정에 생긴 현상은 삼손이라는 이름의 아기가 탄생했다는 것이다. 번제를 받으시고 그 가정을 살리신 하나님의 사자는 바로 이러한 마노아 가정의 사건을 이스라엘의 전체 구원으로 확대하기 위하여 삼손이라는 특정 인물을 출현하게 한 것이다.

 

그렇다면 삼손은 바로 제단의 제물의 취지와 같은 운명의 소유자인 동시에 장차 기묘자로 오실 하나님의 속성을 담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이 기념되는 공간과 그리고 기묘자라는 낯선 천사의 왕림은, 주의 이름이 인격화되는 조짐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불이라는 심판의 모습으로 자기 백성 속에 들어오시는 것이 아니라

한 아기의 모습으로 하나님의 형상이 주의 이름을 가지고 오실 시점이 약속 안에 미리 잠재되어 있었던 것이다.

 

    에스겔에서도 하나님의 심판성은 하나님께서 불 가운데 계신 모습에서 진행된다. 범죄한 성전에 대한 심판의 징조인 것이다. "또 그 가운데서 얼마를 가져 불에 던져 사르라 그 속에서 불이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로 나오리라"(5:4). 그 중심에는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이 있었다.

 

"그러므로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이렇게 행함은 너희를 위함이 아니요 너희가 들어간 그 열국에서 더럽힌 나의 거룩한 이름을 위함이라…내가 이렇게 행함은 너희를 위함이 아닌줄을 너희가 알리라"(겔 36:22,32).

 

이사야 6장에서도 이사야는 성전에서 나온 숯불에 의해서 입에 지짐을 당하게 된다. 이것은 곧 이사야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이 이스라엘을 심판하기 위한 선포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신약 시대에 들어와서 세례 요한은 하나님이 최후(종말)에 하시는 심판 현상을 둘로 보았다.

 

하나는 성령의 세례이며 또 다른 하나는 불의 세례이다(마 3:11). 심판주가 두 개의 도구를 가지고 등장하는 이유는, 심판하고 난 뒤에 처음 창조의 틀로서 새창조에 나서려고 하시기 때문이다. 기존의 아담의 형상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소멸시키고 성령을 통해서 온전한 하나님 형상으로 대체하시려는 것이다. 온전한 하나님의 형상은 어디서 마련되는가? 이미 온전한 불 세례를 받은 아담의 형상속에 참으로 하나님의 심판의 의지가 담기게 된다.

 

그렇게되면 하나님의 의가 그 안에 늘 함유하게 되므로 불의 형상은 인격적으로 하염없이 발산되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적이 있다.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눅 12:49-50). 이 본문에서 "내가 받을 세례"를 주목해봐야 한다.

 

이미 예수님은 세례 요한에게 물세례 받은 것이다. 성령 세례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답답한 세례를 받아야 한다. 이 불세례의 구체적인 내용은 무엇인가? 요한 1서 5:5-8에 보면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자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이 또한 셋이 합하여 하나이니라".

 

즉 예수님이 말씀하신 불세례는 다름이 아니라 예수님의 피를 두고 말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저주를 받는(갈 3:13) 그 몸이 최후로 보이시는 하나님의 형상이다. 이 십자가 형상으로 세상에 대한 심판의 깊이는 다 드러내셨다. 이 세상의 그 어느 누구도 바른 하나님의 형상이 없기에 저주 받아야 당연하다는 점을 증거한 것이다.

 

예수님은 자기에게 세례 베풀기를 주저하는 세례 요한에게 이렇게 당부했다.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마 3:15). 즉 예수님이 먼저 물 세례와 성령세례와 불세례를 받아야 하나님 보시기에 의가 완성이 된다.

 

새로운 하나님의 형상은 이처럼 하나님의 의가 가득 담겨 있는 모습이어야 한다.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킨 형상을 주님이 갖추신다. 따라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에게 성령의 세례가 주어지게 되면(행 2:38/8:16/참조:고전 6;11), 하나님의 심판의 의지와 사랑의 의지가 가득 함유된 그런 백성으로 재창조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창조 사랑과 심판의 정신이 가득 담겨 있는 그런 존재로 출현된다. 이는 에스겔 선지자가 이야기가 한 그대로이다.

 

사도행전 2:3에서 오순절날 '불의 혀' 같은 모습으로 성령이 나타났다고 되어 있다. 성령의 나타나심이 인간의 신체 구조의 일부의 형태로 등장하면서 또한 불의 모습을 띤다는 것은 처음 창조 때의 중간 매체로서의 하나님의 형상의 틀을 계속 고수하신 채로 세상을 심판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내신 것이다. 동시에 그 창조의 틀 안에서 새창조를 시도하여 안식의 완성을 실현하시겠다는 목적도 드러내신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형태의 신체적 형식 표현에 이름이 결부되면서 특별한 인물로 등장된다. 신약에 와서 하나님이 이름을 가졌다는 것은, 같은 인간이 되셨다는 뜻이다. 다른 인간들이 이름을 각자 지니고 있는 그런 세계에서 예수님도 나름대로의 인간적 이름을 지녔다.

 

하지만 사도행전 4:12에서 분명히 밝혔듯이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을 이름을 준 적이 없고 오직 나사렛 예수의 이름만이 구원을 주는 주의 이름이 된다. 다른 이름은 왜 구원의 매개체가 되지 못하는가? 그것은 그들은 죄인이기 때문이다. 원 창조의 기능과 능력이 없는 이름은 무용지물이다.하나님이 새 이름을 따로 마련할 정도로(계 2:17), 그들의 이름으로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제 구실을 못해 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의 죄악의 깊이를 인식하고 무능을 폭로하기 위해서 인간의 이름을 가지고 인간 세계에 들어오셨다. 만약 예수님의 이름에 기대를 걸고 따른다면 그들의 이름도 하늘 나라 생명 책에 기록될 것이다.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눅 10:20).

 

 

    이 생명의 이름에 합당하게 이들은 새로운 형상으로 변화되는데 그 수준은 예수님의 형상 만큼이다.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 때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무릇 흙에 속한 자는 저 흙에 속한 자들과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는 저 하늘에 속한 자들과 같으니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고전 15:45-49).

 

    예수님은 하나님의 형상이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골 1:15/고후 4:4). 전에 창세기 6장에서 사람과 함께 하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신께서는 오늘날 신약 시대에서 오직 주의 이름을 부르며 구원받은 자를 이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게 하신다.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골 3:10/갈 4:19). 이 아들의 형상을 입을 자는 이미 확정되어 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29). 이렇게 형상을 기어이 새 창조해야 하는 이유는 그래야 처음 창조의 영광이 유지되기 때문이다.

 

인간의 모든 이름을 부정하고 오직 주의 이름만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 이 이름이 친히 행하셨던 약속에 의해서 하나님의 형상이 제 위치에 다시 되돌아 왔기 때문이다. 새로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주님의 얼굴, 그것은 바로 인간이 되셨던 주님의 이름이다.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계 22:4)

 

이처럼 인간들은 그 어느 누구라도 결코 하나님의 약속(말씀)을 이루어 낼 수 없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그 어떤 사람은 "나는 순종한 적이 있었노라!"라고 주장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지혜는 너무나도 놀랍고 깊은 지혜이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 11:33) 모든 것이 오로지 주께서만 다 하셨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롬 11:36)

 

그런데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끊임없이 '주'를 거론하면서 그 '주 다움'의 정신을 희석시키고 오직 주께만 돌아갈 몫의 영광을 자기 자신에게 돌리려 '인간 긍정'의 정신을 그 자리에게 집어넣으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가 하나님의 언약 앞에 모두 무너지게 되어 있다. "형제들아 사람의 예대로 말하나니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나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느니라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갈 3:15-16).

 

이 본문에 보면,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라는 대목이 나온다. 왜 그럴까? 모세는 아브라함 자손이 아닌가? 다윗은 아브라함 자손이 아닌가? 그렇다. 하나님이 생각하신 아브라함 자손은 오직 한 분 그리스도밖에 없다.

 

여기서 사적인 구원욕에 의한 구원이라는 것이 성경에서 용납이 되지 않는 이유가 들어 있다. 예수 그리스도 이 외에 그 어떤 인간이라도 자신이 구원받는다는 의지만으로 구원이 가능치 않는 것이다. 오히려 그들에게 주어질 것은 저주밖에 없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0). 구약의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 구원을 위해 몸부림쳤지만 성공한 자는 아무도 없었다. 왜냐하면 율법 아래 놓여 있었고 율법은 모든 자들로 하여금 자기 죄 밑에서 굴복 당하고 있음을 드러내 주기 때문이다.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을 거스리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갈 3:21-23).

 

이 본문에서, '죄 아래 갇혔다'는 상황과 '율법 아래 매인 바' 되었다는 것이 같은 뜻이다. 그 어떤 인간도 율법에 순종해서 구원받는다는 것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즉 개인적인 구원 시도는 모두 실패이다 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약 성도를 '주'를 외쳤고 '주'를 믿었다.

 

여기에 무슨 의미가 있느냐? "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은혜로 주신 것이라"(갈 3:18). 여기에서 아브라함에게 은혜가 내려온다. 그런데 그 은혜는 '하나님의 약속'에서 주어지는 은혜이다.

 

하나님의 약속이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주'께서 오셔서 의가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다.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갈 5:4-5).

 

그리스도를 의지한다면 오로지 '주'이시기에 제공하는 모든 은혜의 수여자가 될 뿐이다. 바로 이점을 고백하므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성경이나 하나님께서는 개인적인 구원에 관심을 두시는 것이 아니라 주되시는 분이 하시는 일을 주께서 하셨다고 고백하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데 초점이 있는 것이다.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입었느니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갈 3:26-29).

 

B. 인간들의 구원론

 

    이러한 하나님이 성경 안에서 드러나고 있건만 구원론에 계속 집착하는 자들은 자기 구원을 위한 성경 전체에 대한 왜곡된 해석에 나선다. 과연 성경이 용도에 따라 여러 가지 주제로 분해될 수 있는 책인가?

 

    도살장에서 한우를 잡을 때 부위 별로 칼로 나누게 된다. 소비자의 기호에 따라 각각의 부위들이 상품화되어 정육점을 통해 팔려 나가게 된다. 안심을 원하는 자에게는 안심 부위를, 등심을 원하는 소비자에게는 등심을, 내장을 원하는 자에게는 곱창으로 팔려 나간다. 각기 필요에 따라, 요구에 따라 일정량을 취사 선택하게 되는 것이다.

 

만약 예수님을 믿는다는 어떤 사람에게 "당신은 예수님의 어느 부위를 좋아하십니까?" 묻는 물음이 가능할까? 그렇다고 대답할 자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것은 상대방 예수님을 전인격과 교제하게 되는 참 신앙인에게 있어 이런 물음이 가당치 않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예수님과의 전인적인 교제와 무관하게 예수를 찾는 자들에 의해서 성경은 무참히도 도살당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죽은 자로 살아가야만 하는 것이 성도의 바른 자세임에도 불구하고, 자신만의 고유의 터전을 마련하기 위한 정보 조달책으로 성경을 끌어당기는 경우가 허다하다. 즉 자기를 부인하기 위한 성경이 아니라 자아를 더욱 더 고양하기 위해 성경을 인용하고 탐색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나라는 존재는 지금보다 더욱 값어치가 있고 의미가 있고 향상이 될까? 성경은 분명 여기에 대한 비책을 마련해 놓았을 것이다" 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성경을 보기 때문에 성경의 바른 뜻에서 갈수록 멀어질 수밖에 없다. 성경이 과연 이런 욕구를 옹호해 줄까?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 이 본문에 의하면, 이미 성도는 죽은 자로 지낼 수밖에 없다.

 

다음과 같은 구절도 마찬가지이다.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골 3:2-3).

 

    이런 본문을 통해 성도가 인식해야 하는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가 무엇이기를 왜 나를 죽일 수밖에 없는가 하는 문제이다. 더 나아가서 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사 나라는 인간을 그리스도와 함께 죽게 하시는가 하는 점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즉 그리스도와 하나님과 성령께서 하신 일에 관한 내용 때문에 성경이 있는 것이지 결코 인간이 스스로 자기 행위로 구원받는 방법을 기술하는데 핵심이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한우를 이리 저리 부위별로 나누듯이 성경도 이리 저리 나눌 수가 없는 책이다.

 

성경은 다음의 말씀과 같이 오직 그리스도에 대해서 증거 하기 위한 책이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5:39). 하나님에 관한 것도 성령에 관한 것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핵심으로 하여 그것과의 관련성 안에서만 비로소 파악될 뿐이다.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치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공경치 아니하느니라"(요 5:22-23). 이 본문에서 분명히 언급되어 있기를, 아들을 공경치 않는 자는 아버지를 공경치 않는 것이 된다.

 

이렇게 보면 성경은 분명 하나님의 영광성을 오직 아들을 통해서만 가능케 됨을 말씀하시고자 하는 책이다. 하나님에게 기쁨이 되려면 하나님께서 무엇으로 인해 영광 받으시는가에 대해서 미리 알고 있어야 한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요 17:1).

 

이 본문에서는, 아들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다른 우회로 영광 돌릴 수는 없는 것일까?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아들은 이미 모든 권세를 독점해 가지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하나님께 영광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절이 많이 있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2:8-11).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벧전 4:11).

 

"이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롬 15:7).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을 대하는 인간들은 이러한 영광의 체제를 무시하고 자신의 구원과 영광성과 기쁨을 위해 성경에 접근하는데 성경은 이러한 인간들의 사적 구원론을 단호히 거부하고 있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 1:10)

 

 

 

    성경 말씀을 준행해서 자신이 구원되고자 하는 자들은, 이러한 구원 노력에 대해 하나님이 단호히 거부하고 있음을 처음부터 모르고 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사 6:9-10).

 

위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예언하신 바 있는데 이 예언의 말씀은 반드시 성취되어야 정말 하나님답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오셔서 하신 일은 이 본문의 내용대로 적극적으로 인간이 스스로 구원되고자 하는 모든 노력을 막으시는 일이다.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어찌하여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 되었나니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마 13:10-17).

 

"이렇게 많은 표적을 저희 앞에서 행하셨으나 저를 믿지 아니하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가로되 주여 우리에게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뉘게 나타났나이까 하였더라 저희가 능히 믿지 못한 것은 이 까닭이니 곧 이사야가 다시 일렀으되 저희 눈을 멀게 하시고 저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였음이더라 이사야가 이렇게 말한 것은 주의 영광을 보고 주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요 12:37-41).

 

이 본문에 의할 것 같으면, "이사야가 이렇게 말한 것은 주의 영광을 보고 주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대목이 나온다. 즉 이 세상에 그 어떤 인간은 자력으로 구원받는 일이 생겨나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이다. 그래야 오로지 '주께만 영광'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즉 '주께만 영광'이란 구약의 예언된 하나님의 말씀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께서 홀로 성취해 내셨기에 그분께만 영광이 되고 또한 그분께만 영광을 돌릴 때 비로소 하나님께만 영광이 되시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을 두고 볼 때에 다음과 같은 주장은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주께서 우리를 찾아왔을 때는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구원되어 주는 것이 주님과 하나님에게 영광이 된다. 우리 자신의 구원을 위해 우리가 스스로 노력하고 착일 일을 하게 되는 것이 하나님에게도 영광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 개인이 예수 믿어 주고 구원되면서 우리를 통해서 착한 일이 마음껏 드러나기 때문이다"-라는 주장은 완전히 인간들의 일방적 주장이다. 즉 말씀 성취를 이제는 거듭난 신자는 자신들이 해낼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해 내므로서 비로소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이 왜 엉터리인가 하면은, 하나님께서 나아갈 때는 십자가를 통해서 나아간다고 하면서 막상 이 세상에 생활할 때는 더 이상 십자가를 통하지 아니하고 곧 펄펄 살아 있는 자기 자신의 의지력과 하나님의 뜻과 직접 대면해서 실행에 옮길 수 있다는 주장을 하기 때문이다.

 

즉 처음 구원받을 때는 주의 공로를 이용하지만 일단 구원받고 난 뒤부터는 모든 의로운 행위의 주체는 자기 자신들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발상이 나오게 된 것은 바로 구약에서 말하는 '주' 개념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무지하기 때문이요 따라서 죄에 대해서도 같이 무지하기 때문이다.

 

    구원이란 늘 죄를 배경으로 한 뒤 주께서 하신 결과일 뿐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죄라는 것을 톡 떼어 내버리고서는 죄의 배경을 염두에 두지 않는 '인간 구원론'이라는 새 체계를 따로 장만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 안에다가 설립이 가능한 특별 구역인 것처럼 여긴다.

 

바로 이점이 죄 임을 꿈에도 모르고 있다. 인간은 자기 구원을 측정하고 감상하고 더나아가서 그 수준과 크기를 끌어올릴 수 있을 때까지 끌어올려 보려고 한다. 높아지고 강해지고 안정성을 지닌 견고한 힘의 자아상을 그리스도 십자가와는 따로 만들어 그 곁에 같이 세워 두려고 한다.

 

깊은 은혜를 더욱 더 받은 자에 한해서만 그것이 가능하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들의 그러한 모습이 이미 예수님을 '주'라는 것을 근본적으로 뒤엎어 놓은 반란임을 모르고 있다. '주'가 지닌 그 배타성과 심판성이 어디를 향하여 날아가고 있는지,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되심 이외에 그 영역도 따로 생각해서는 아니된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안심되는 자기 구원이라는 벙커를 따로 만들려고 한다. 왜 그럴까? 자기 왕국을 경험하고 싶은 악마적 기질 때문이다. 즉 '복음'과 '성령의 능력'이라는 것을 무기로 삼아 달성해서 자아 승리를 맛보고 싶은 것이다.

 

인간은 '주'가 되는 순간적인 쾌감을 갖고 싶은 것이다. 하나님의 거저 넣으시는 은혜와 구원이라는 것을 밑천으로 삼아 욕망을 구체화하고 싶은 것이다. 구원의 역사를 실제로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쉽게 말해서, 믿음 없음→믿음 소유했음→ 신과 하나 됨→나도 신이다! 라는 데까지 계속 자아를 밀어붙이려고 한다. 그들 눈에 저 멀리 천국이라는 신비의 성채가 보인다. 영적이라야 보인다고 말한다(그러나 참된 성령은 오직 십자가 사건을 되풀이해 줄뿐이다). 자기 망상과 환상으로 지어진 전설의 성채 안으로 계속 문을 열고 들어가면서 오늘도 내일도 모험과 도전적 모험을 멈추지 않고 있다.

 

그들은 십자가를 모른다. 따라서 주님의 십자가는 인간들이 부단히 시도하는 그 모든 것에 대해서 각자의 인간이 죽을 때까지 거꾸로 소급해서 원천적으로 모든 행위를 정죄해 들어간다는 사실을 모른다. 그들이 이러한 정죄성을 감잡지 못하고 산밑을 힐긋힐긋 보면서 자신의 영적 수준에 못 미친 헉헉거리는 자들을 내려다보는 재미에 만낏해있다.

 

즉 이들은 주님께서 실제로 사역하시고 지향하는 방향과 자신이 추구하는 방향이 정반대임을 모르고 자아의 구원관에 매달려 살아간다. 자기 구원만을 즐기는 것으로 남은 새 삶을 채우겠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부쩍 더 성숙해졌다고 자위하고 싶은 것이다.

 

모든 것을 제거하고 자기를 선두에 세워 놓기 위한 근성(투쟁적 승부 근성)은 예수 그리스도 공로성까지 한 자락 지닌 추억으로만 간직하고 뒤로 놓고 만다. 그리고 앞으로 더나아가 자기를 위하여 마련된 절대적 자리를 언른 차지하는 것이다.

 

불교식으로 말해서 화엄의 세계 안에 접어든 것이다. 자신도 모르는 새에 어느덧 불교 신자가 되어 있다. 용어만 다르다 뿐이다. 자아를 신앙의 내용으로 삼기는 마찬가지이다. 이들은 '피 이후' '자기 죽음 이후'를 상상하고자 원한다. 그래서 신앙의 내용 안에 어린 양과 나란히 자신의 모습도 함께 들어 있는 스티커 사진을 날마다 찍고 있다.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는 주님의 말씀을 그들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섬기는 자에게는 '섬기는 그 자아'도 신앙의 내용 안에 '함께'(혹은 '더불어')를 삽입시켜서 경배할 수 있다는 식으로 변개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니까 '함께'라는 의미 안에는 다음과 같은 주님의 말씀은 해당되지 않는 것이 되어 버린다.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과연 이 의미가 '함께'라는 의미에 어울리는 원리라고 생각되는가? 아마 이들은 구원받고 난 뒤에 이 말씀의 원리는 소멸된다고 믿고 싶어 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확고하게 자리잡는다.

 

그것은 구약의 주님께서 그의 백성과의 동행했던 방식을 신약시대에서 와서는 십자가 원칙 안에서 제대로 적용시켜 나가시기 때문이다. 어쨌던 자아 긍정을 포기하지 않는 자들은 자아 부정와 긍정을 시차적으로 조정하여 궁극적으로 자아 긍정에 되는 쪽으로 배열해버린다.

 

즉 자기 긍정이 결국에 가서 자기 부정을 삼켜버려 극복해 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과정 속에 삽입되는 십자가 사건은 주의 이름의 영광성이 인간의 이름의 영광성을 부정하지 못하는 가짜 십자가 사건이다. 그 증거로서, 자기 긍정 이후에도 계속 십자가 사건을 자기 앞에 앞장 세울 수 없다는 신학적 헛점을 보여주는데 있다.

 

자신들의 욕망이 자신을 '십자가'로만 안심하고 만족하도록 가만 내버려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들은 그리스도와 자기와의 피말리는 긴장의 끈을 계속 유지하고 있다. 예수라는 알려진 인물의 완전한 익명성 안에서 어쨋던 자신만의 완고한 개성을 따로 확보해야 되겠다는 의욕으로 중무장되어 있다.

 

타인의 신앙과의 차별성을 강조하기 위해 자신만의 신앙적 경험과 경륜과 도전담을, '예수님은 여전히 구주이시다'는 일반적 고백성과 부단히 분리시킬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결국 이름 싸움이다. 주의 이름과 자신의 이름사이의 자리 넓히기 싸움이다. 이것이 십자가에서 긍극적으로 담지하고 있는 죄의 근원적인 면을 의도적으로 제거하고 망각시키는 작업과 병행할 것은 뻔한 일이다.

 

이것이 불신자들이 지향하는 바이며 인간의 한계이다. '더 풍성한 은혜의 세계상'이 늘 그들 코 앞에서 짙은 유혹의 냄새를 피워 대고 있다. 아니, 저들이 욕망이 도리어 '자기 만의 세계 갖기' 유혹을 유인해 들인 셈이다.

 

그 세계는, 죄와 무관한 것이 주님의 이름이 아니라 죄와 무관한 것이 자기 이름이기에 즐겁다는 것이다. 이것은 '자기 예언'이다. 사상적 스럼프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기가 자기를 불러 낼만한 일종의 주문을(자기 다짐) 스스로 가지겠다는 것은 자신에게 치명적인 올가미이다.

 

결국 그 동안 주님 속을 헤매고 다닌 것이 아니라 자아 속에 헤매고 다닌 것이다.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요 5:44).

 

한 마디로 말해서 자기 부인이 안되는 이런 현상이 벌어진다. 자기 영광에 도취되어 그것을 부각시키는 쪽으로 모든 것을 생각하는 자에게 그리스도의 영광이 영광스럽게 들어오겠는가!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고후 4:3-6).

 

 

 

결 론

 

    내 쪽에서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과 십자가에는 나를 바라보는 것 사이에는 존재론적 균열보다 신앙적인 균열에서 비롯된다. 영, 혼, 육으로 구성된 자아의 통일성을 근거로 주님과의 통일성은 논하는 것은, 나를 불러내기 위한 호칭의 자리를 마련하겠다는 의도와 함께 신앙에서 중심권 역할을 사실상 자아가 떠맡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잘못된 구원론이 기독교를 엉뚱한 종교로 뒤바뀌놓았다.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하나님임을 먼저 알아야만 한다. 말씀을 이루시는 것은 성도나 인간들이 아니다. 오로지 그리스도 주님일 뿐이다. 다윗은, 상한 심령으로서의 자신을 표현했을 뿐이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주의 은택으로 시온에 선을 행하시고 예루살렘 성을 쌓으소서"(시 51:17-18) 그것은 오로지 은혜가 은혜답게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롬 11:6).

 

 

 

    왜 하나님은 우리 성도를 이미 죽은 자로 간주하실까? 그것이 이미 우리 안에 있는 주의 생명의 위력만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고후 4:10-11).

 

    성령에 의해서 인도함을 우리라는 자랑스러운 형상을 돋보이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왜 인간은 죽을 때까지 죄만 지을 수밖에 없는 전적인 죄인인가를 드러내기 위함이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요16:8). 끊임없는 책망 가운데서 성도는 자신의 육됨을 더욱더 자각하고 오직 주님만 사랑하게 된다.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눅7:47).

 

    사도 바울이 성도에게 부탁한 기도도 바로 이런 차원이었다.

 

"이러하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3:14-19).

 

 

 

    사도 바울이 생각하는 성도의 삶은 십자가에 죽어 있는 것뿐이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 ♣

 

 


이근호 목사(우리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