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성도가 값이다

아빠와 함께 2026. 9. 6. 19:19

성도가 값이다

2026년 9월 6일                    본문 말씀: 요한계시록 6:12-17

(6:12) 내가 보니 여섯째 인을 떼실 때에 큰 지진이 나며 해가 총담 같이 검어지고 온 달이 피 같이 되며
(6:13) 하늘의 별들이 무화과나무가 대풍에 흔들려 선 과실이 떨어지는 것 같이 땅에 떨어지며
(6:14) 하늘은 종이 축이 말리는 것 같이 떠나가고 각 산과 섬이 제 자리에서 옮기우매
(6:15)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각 종과 자주자가 굴과 산 바위 틈에 숨어
(6:16) 산과 바위에게 이르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
(6:17)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

진노의 날에는 산 사람을 경악하기 위기 위함이 아니라 죽은 자를 경악하기 위함이다. 죽는 자마저 도로 살아나게 하는 경악함이다.

상상만해도 겁나는 상황입니다. 사람들은 우왕좌왕합니다. 그동안 질서 정렬하게 계급지어지는 사회 형태가 그 힘이 뒤죽박죽이 됩니다. 그들이 걸치고 있었던 사회 직위이나 거기에 걸맞는 체면 위신 같은 것은 하나님의 진노의 날에 아무 소용없습니다. 이러한 무가치별성은 인간이 정해놓은 질서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도발적으로 와해시키심을 전제로 하는 조치입니다.

즉 “너희들이 짜놓은 질서가 그럴 듯 해보이지? 내가 가차없이 뭉개주겠어. 이로서 인간들이 설정한 기준과 하나님의 기준과 전혀 일치점이 없음을 내가 분명히 해두겠다”는 조치입니다. 서로가 서로의 합의에 의해서 건설한 사회질서가 그렇게 안정적이지 않습니다. 도리어 인간 세계보다 더 안정적으로 보였던 자연 세계의 질서가 맥없이 무너져 내립니다.

인간들 입장에서는 자연질서가 무너질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 전에 그들은 다음과 물었어야 했습니다. “과연 자연질서가 유지되는 것이 제 3자의 관여인가 아니면 어쩌다보니 그렇게 된 것인가”를 말합니다. 당연히 ’어쩌다보니‘라는 표현은 무책임적인 발언일 겁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이런 질문을 하지를 못하고 있는 걸까요? 그들은 자연질서의 안정성이 당연한 것인줄 알았습니다. 영원무궁토록 그 체제가 유지할 줄 알았던 겁니다. 그 이유는 몰라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알게해 주실 분을 찾지도 않았습니다. 단지 인간 자기네 실서에서 안정적으로 신경쓰면 된다고 여긴 겁니다.

그 신경 쓴 질서가 자연질서가 내리앉는 그 원칙에 병존해서 같이 무너져버리게 되었습니다. 이런 사례는 출애굽 때에 이미 있었습니다. “밤중에 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모든 처음 난 것 곧 위에 앉은 바로의 장자로부터 옥에 갇힌 사람의 장자까지와 생축의 처음 난것을 다 치시매
(12:30) 그 밤에 바로와 그 모든 신하와 모든 애굽 사람이 일어나고 애굽에 큰 호곡이 있었으니 이는 그 나라에 사망치 아니한 집이 하나도 없었음이었더라”(출 12:29-30)

즉 사람과 사람 사이에 차등이 없이 다 한꺼번에 장자가 죽었습니다. 사람의 죽음을 통해서 자연질서 전체가 무너져 내렸다는 것은 이 세상에 죽어서는 아니되시는 분이 죽었다는 뜻입니다. 이 죽음의 위력으로 인해 이 세상은 더 이상 버틸 근거가 없음을 분명히 해줍니다. 이 자연질서의 붕괴로 인해 숱한 사람들이 자기 본색을 드러냅니다.

평소에 자기네들 삶의 배경에 되었던 친숙한 산과 바위까지 껴 안고 끝까지 함께 하겠다고 덩벙댑니다. 이런 자폐적인 조치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하심이 거두어질까요? 어림도 없습니다. 그 이유는 성도(=의인)가 품고 있는 값어치가 온 우주 물질의 총량보다 더 소중하고 가치 있기 때문입니다.

“산과 바위에게 이르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계 6:16) 자 여기서 우리 성도들은 이런 사태를 맞이해서 과연 마음 안정되고 초연해질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에게 마음껏 찬양할 수 있습니까? 자신의 재산과 부동산이 다 날아가는 판에도 말입니다.

성도는 그 어떤 두려움이나 무서움을 드러내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성도는 이러한 현상은 이미 말씀에 적힌대로 그대로 이런 일어남에 대해서 도리어 감격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성도는 이미 죽었으니까요. 죽은 자 입장에서 보면 세상도 마땅이 죽음의 티를 내는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 이유도 성도는 압니다. 그것은 바로 이 땅에서 하나님이 오셔서 희생하셨기 때문이며 그 결과가 새로운 부활의 나라로 구성되는 조건이기 때문입니다. 시편 16:8-11)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이러므로 내 마음이 기쁘고 내 영광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거하리니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부활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부활이 되실 주님이 우리 성도 곁에 계셔서 자신이 하신 일이 성도 쪽으로 흘러넘치신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떤 이는, 자신에게 부활이 너무 소중하다고 말합니다. 이 말이 진심이 되려면 이는 곧 “나는 나에게 죽음이 찾아온다는 사실이 너무 반기고 싶다. 왜냐하면 죽음 없이는 부활도 없기 때문에”라는 말이어야 합니다. 따라서 이처럼 죽음에 환장한 성도가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일에 대해서 마치 하늘에 단비 내리는데 반기듯이 반기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도란 무엇일까요? 어떻게 생기는 걸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인류를 몰살하고 멸절을 시키는 작업을 통해서 성립됩니다. 스바냐 1:18에, “그들의 은과 금이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능히 그들을 건지지 못할 것이며 이 온 땅이 여호와의 질투의 불에 삼키우리니 이는 여호와가 이 땅 모든 거민을 멸절하되 놀랍게 멸절할 것임이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멸절의 배후에 성도 등장을 전제로 한 멸절입니다. “주 여호와 앞에서 잠잠할지어다 이는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으므로 여호와가 희생을 준비하고 그 청할 자를 구별하였음이니라”(습 1:7) 여호와의 희생이 있음으로서 없던 성도가 새로 생긴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예언이 신약에서 ’값없음으로 영생 얻게 된 자‘들의 등장을 낳습니다.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계 22:17) 그런데 이 ’값없음‘은 소위 양심대로 산다는 인간들의 평소 행위들을 모독하는 겁니다. 인간들은 모두 선악 지식을 갖고 있기에 나름대로 선하게 살려고 노력해오고 있던 사람입니다.

따라서 이들에게 있어 자기 말고 누가 ’희생‘하므로서 자신이 천국간다는 사실에 몹시 불쾌하게 여깁니다. 하지만 시편 50편에 주님은 다음과 같이 명확하게 밝히십니다. “내가 너의 제물을 인하여는 너를 책망치 아니하리니 네 번제가 항상 내 앞에 있음이로다 내가 네 집에서 수소나 네 우리에서 수염소를 취치 아니하리니 이는 삼림의 짐승들과 천산의 생축이 다 내 것이며 산의 새들도 나의 아는 것이며 들의 짐승도 내 것임이로다”(시 50:8-11)

왜 주님께서 인간의 번제물을 받지 않으신 겁니까? 그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르시되 나의 성도를 너의 앞에 모으라 곧 제사로 나와 언약한 자니라 하시도다”(시 50:5)

즉 성도 자체가 하나님의 ’값없이‘의 구현체입니다.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20)  세상 사람들은 ‘더하기’를 하면서 산 자들이라면 성도는 늘 ‘빼기’가 되도록 하도록 주님께서 인도하신 자들입니다. 이들이 있음으로서 비로소 악인들은 병존해서 같이 생겨났습니다. 주님의 희생을 모독하면서 망하는 자들입니다. “교만자의 발이 내게 미치지 못하게 하시며 악인의 손이 나를 쫓아내지 못하게 하소서 죄악을 행하는 자가 거기 넘어졌으니 엎드러지고 다시 일어날 수 없으리이다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를 투기하지 말지어다 저희는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볼 것이며 푸른 채소 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시 36:11-12, 시 37:1-2)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에 부여된 십자가의 가치만 드러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3강-요한계시록 6장 12~17절(성도가 값이다)260906-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요한계시록 6장 12~17절입니다. 신약성경 380페이지입니다.

“내가 보니 여섯째 인을 떼실 때에 큰 지진이 나며 해가 총담 같이 검어지고 온 달이 피 같이 되며, 하늘의 별들이 무화과나무가 대풍에 흔들려 선 과실이 떨어지는것 같이 땅에 떨어지며, 하늘은 종이 축이 말리는것 같이 떠나가고 각 산과 섬이 제 자리에서 옮기우매,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각 종과 자주자가 굴과 산 바위틈에 숨어, 산과 바위에게 이르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 아멘.

여기에 등장하는, 무섭고 떨리는 마음으로 이 대자연의 재앙을 대비해서 자신의 공포를 가릴 방법이 없어서 뭐라고 요청하느냐 하면, 산과 바위에게 당부하면서 산과 바위가 나를 좀 가려 달라고 하는 거죠. 왜? 하나님의 그 진노하심과 심판을 우리가 맞닥뜨리거나 견딜 수 없어서 산과 바위의 틈에 좀 숨고 싶다는 거고, 산과 바위에 숨어버린다는 것은 그 터널 안에 숨는 거죠.

이 터널이라는 게, 산과 바위는 인간에게 친숙하잖아요. 평소에 살았던 그 환경이 산과 바위죠. 그런데 그 친숙했던 산과 바위는 잘 알지만, 하늘의 해와 별은 너무나 멀리 있었는데, 그 해와 달과 별들이 땅으로 뚝뚝 떨어지게 되면, 그리고 하늘이 종이 축이 말리는 것처럼 말려서 떠나가 버리면, 그 낯선 환경을 사람들은 견딜 수 없어서 당황스럽고 공포스러워하는 겁니다.

누가요? 이 세상 사람들이 그렇다는 거예요. 그러면 성도는 그런 일이 있더라도 별 놀랄 기색이 없고, ‘그거는 요한계시록 6장에 12~17절까지 예언된 그대로 되어지네. 역시 하나님의 말씀은 말씀대로 진행되는구나’라고 이렇게 느긋한 마음으로 천지 대재앙을 맞이할 수 있을까요? 뒤에 물음표 들어갑니다. 있을까요?? 우리 동네에 홍수가 나도 느긋한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요?

자기 손에 손가락이 약간 부러져도 느긋한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요? 과연 그럴까요? 요한계시록을 보면서 “불신자들은 이렇게 무서워한다”라고 언급을 하는데, 그렇게 설명하는데, 그러면 신자라고 우기는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이런 대재앙이 와도, 겁 하나도 안 날 자신감이 있어요? 없지요. 없어요. 따라서 자기가 뭐 교회 다니면서 신자라고 우기는데, 막상 요한계시록에 이런 일이 나오면, 아예 요한계시록을 안 보려고 하죠.

그런 것은 신천지나 보라고 하고, ‘나는 안 봤다, 나는 몰랐다, 나는 안 들었다’하고 그냥 피하기에 급급합니다. 그러나 어쨌든 간에, 우리가 피하든 안 피하든 그건 관계없이, 이 세상의 일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진행이 됩니다. 사람들은 이런 지경에 왔을 때, 두려워하지 않고 이런 지경을 도리어 찬양하면서, ‘하나님이 일을 참 잘하셨습니다’라고 할 수 있는 그 자신감, 이런 자신감이 없을 때, 우리는 ‘나한테 믿음이라는 것이 일도 없구나’라고 하죠.

믿음이 있다고 했는데, 사실은 막상 살기 힘드니까, 물가만 올라가도 갑자기 걱정하잖아요. ‘믿음이 없구나’하고 들통나게 되면, ‘그럼, 목사님 저 지옥 가는 거예요?’ 갑자기, ‘지옥 갑니까? 나는 천국 가는 줄 알았는데, 지옥 갑니까?’라고 이렇게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간단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러한 대자연이 내려와도 성도는 신경 쓸 필요가 없어요.

왜냐하면, 이미 죽었으니까요. 이미 죽은 자, 이미 자연이 죽이기 이전에 나부터 먼저 죽었거든요. 성경의 부활 이야기 나오죠. 여러분, 부활이라는 것이 사실은, 어떤 사람은 부활을 좋아한다고 하는데, 저는 좀 그렇다고 인정하고 싶지 않아요. 부활을 그렇게 좋아해요? 네, 부활 좋아합니다. 그러면 저는 말을 이렇게 해요. ‘죽는 것이 그렇게 소원입니까?’라고 이렇게 물어요.

왜냐하면 부활이라는 말이 뭐냐 하면, 죽지 않고서는 부활이 없어요. 순서가, 죽고 난 뒤에 살아남이거든요. 그러면 부활을 좋아한다는 말은 뭐냐 하면, ‘나 죽고 싶어서 환장했다’라는 그 말이거든요. 정말 당신은 죽고 싶어서 환장했습니까? 시편 16편에 부활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는데, 지금, 이 말씀을 이렇게 보기만 해도 너무너무 감사해요.

시편 16편 8~11절에 보면,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이러므로 내 마음이 기쁘고 내 영광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거하리니,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논리가 이래요. 여호와께서 항상 내 옆에 계시기 때문에, 그 옆에 계신 분 때문에 내가 즐거워하는데, 그 이유가 뭐냐 내 옆에 계시는 분이 나로 하여금 썩지 않게 하실 것이고, 주께서 생명의 길로 보이기 때문에, 나로 하여금 썩더라도 썩은 데서 다시 살려주는 그 일 때문에, 주께서 나를 떠나지 않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다시 물어봅시다. 부활이 좋습니까? 옆에 계신 주님이 좋습니까?

정답은 내 부활을 좋아하지 말고, 옆에 계신 주님께서 계심 그 자체로, 부활이 되든 뭘 하든, 죽게 하시든, 주님께서 하실 일이 나에게 넘어옴으로써, 주의 일로 끝날, 마감처리 되었던 그 끝 날이, 물이 넘치듯이 주의 일로 넘쳐서, 나까지 주의 일이 엄습하고 그걸 전부 다 사로잡아버렸다는 이 말이죠. 사로잡은 거예요. 여기에 대해서 적절한 단어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우리의 멸절이에요. 멸절. 우리의 소멸입니다. 우리는 소멸, 멸절 같으면 기겁해요. 왜? 내가 없어지니까요. 그런데 주께서 나를 없앤다는 말은, 없앤 나를 다시 살리겠다는 주님 자신의 일의 노선 속에, 여정 속에, 우리를 집어넣었다는 뜻이에요. 표정들을 보니까 별로 좋아하지는 않는데, 스바냐 1장에, 구약에 한가득 들어 있는 선지자 중에 스바냐가 들어 있어요.

스바냐 1장 18절에 보면 이런 말 나옵니다. “이 온 땅이 여호와의 질투의 불에 삼키우리니 이는 여호와가 이 땅 모든 거민을 멸절하되 놀랍게 멸절할 것임이니라”라고 나옵니다. “소멸하되 멸절할 것이다”라는 말은, 다 없애버린다는 거예요. 이것만 들으면 우리는 기겁하죠.

‘나 이제 교회 안 나가. 나 이제 성경 안 볼 거야. 위로를 해야지. 이게 뭐냐? 나를 죽이겠다는 하나님을 굳이 내가 믿을 이유가 없지. 나를 살려주는 하나님만 골라서 믿을게’라는 뭐 이런 식이죠. 그런데 스바냐 1장 7절에 보면, 왜 멸절해야 하고, 왜 소멸해야 하는지 이유가 1장 7절에 나옵니다. “여호와가 희생을 준비하고 그 청할 자를 구별하였음이니라”

여호와의 희생을 준비하고 그 청함을 받은 자를 구별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다는 거예요.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그 뜻은 시편 50편 5절에 나옵니다. 시편 50편에 7~8절에 보면 이렇습니다. “내 백성아 들을찌어다 내가 말하리라 이스라엘아 내가 네게 증거하리라 나는 하나님 곧 네 하나님이로다, 내가 너의 제물을 인하여는 너를 책망치 아니하리니 네 번제가 항상 내 앞에 있음이로다”

너희가 갖다가 나한테 바친 어떤 것도, 뭐 헌금이든 뭐든, 돈이든 희생이든, 시간이든 봉사든, 어떤 것도 나는 받지 않는다. 뭐 십일조가 됐든, 뭐 감사 헌금이 됐든 난 받지 않는다. 너희들이 주는 어떤 돈도 일절 받지 않는다. 왜 그러느냐 하면요, 영생은, 천국은 공짜로 가기 때문에 그래요. 공짜로 가는데 거기에다가 돈을 받쳐 버리면 그게 공짜겠습니까? 공짜겠습니까? 공짜에 대한 모독이에요.

사람이 몸을 이끌고 교회 나오니까, 갑자기 교회 나와서 다른 사람 보기에 자기 가오를 세워요. ‘너는 헌금 얼마 했나?, 나는 이만큼 했다, 나는 이만큼, 나는 조금밖에 못 했는데’라는 이건 교회가 자기 자랑하는 장소가 되었어요. 성경은 분명히 이렇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분명히 나옵니다. 22장 17절에,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 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목마른 자도 올 것이오, 원하는 자도 올 것이라. 값없이, 값없이 생명수를 받아라. 받아라, 이 인간아! 내 생명을 받아라. 천국을 받아라. 영생을 받아라. 영원히 천국을, 천국의 그 복락을 받아라. 그냥 공짜로, 값없이, 값없이 공짜로 주는 거예요. 그런데 그 사람들은 낼름, ‘공짜야? 신난다. 야~ 이거 공짜로 받았네. 나 공짜로 받고 튈 거야. 이제는 또 내 마음대로 살 거야’라고 이런 또 꼼수를 쓰는데, 이 공짜를, 제대로 공짜의 영생을 받은 사람은 주님 앞에서 떠나지 않고 이렇게 질문합니다.

[주님이여, 나는 인생 살면서 공짜를 좋아하기는 하지만 공짜를 반기지는 않습니다. 내가 하는 노동의 대가, 내가 착하게 살은 그 결과물, 내가 그 결과물을 받을 때, 비로소 내가 여기 존재한다는 보람을 느끼면서, 내가 존재하는 의미를 내가 만끽하면서 나는 그렇게 살아왔습니다.공짜로 주는 것도 나는 싫습니다. 내가 하는 일에 보람을 느낄 수 있도록 내 가치가 계속 살아 있는 조건 하에 나는 행복했습니다.

그런데 왜? 저 그만한 자격이 있고 그만한 권한이 있습니다. 나답게 바르게 살 수 있는 그러한 양심이라는 것이 남보다 더 크기가 크고, 나는 양심으로 살 마음의 준비가 돼 있습니다. 세상이 다 더러워도, 내가 양심에 비추어서 나는 깨끗하게 살 자신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그 공짜가 나의 가치를 지금 모독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나님은 안 해봤습니까?

천하 죄인 같으면 공짜 좋아하는데, 나는 바르게 살잖아요. 하나님이 지켜봤잖아요. CCTV 다 까볼까요? 내가 얼마나 바르게 사는지? 그런데 내가 준 헌금을 안 받아요? 내가 준 봉사를 안 받아요? 내가 하나님을 섬기는 찬양을 안 받는다고요? 무슨 심보입니까? 왜 낯섭니까? 내가 생각하는 하나님이 아니고, 왜 항상 나를 뭔가 비켜 가는 낯선 하나님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까?] 그렇게 질문을 시편 50편을 보면서 우리가 해야 돼요. “너의 일체 모든 것을 안 받는다”

어떤 교회에 가면 목사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나는 당신을 구원하지 않겠습니다’ 지가 뭔데 구원을 안 해요? 지가. 지가 뭐 했다고 남을 구원하고 말고를 해요? 또 어떤 사람은 ‘나는 당신을 구원하겠습니다’ 지가 뭔데, 지가 왜 구원을 해주고, 지가 왜 구원을 안 해 줘요? 본인이 뭔데요? 둘 다 사기꾼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사기꾼 말을 그리워하고 있고 기다리고 있어요.

능력 있는 사람이 성경도 잘 모르는 나에게 뭔가 확정 지어주고 단정 지어줄 때, 마음에 안정감을 주잖아요. ‘누가 그카던데? 우리 목사님이 이야기하더라. 뭐라꼬? 너 구원 받았대. 너 죽어도 천국 간대’라고 이러면, 기분 좋지요. 뭐 보이스피싱이 달리 보이스피싱이겠습니까? 성경을 아셔야 돼요. 성경에 보면 첫 번째 조건 제가 말씀드렸죠? 공짜로 줍니다.

그리고 두 번째 조건 이야기합니다. 공짜로 받은 사람은 이 공짜가 어디서 왔는지를 따라가요. 왜? 자기는 착하니까, 훌륭하니까. 공짜가 은근히 나를 멕이는 말이거든요. 멕이는 단어잖아요. “너는 공짜 아니면 지옥 가”라는 이게 은근히 나를 멕인다니깐요. 기분 확 나쁘게 만든다고요. 시편 50편 5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이르시되 나의 성도를 내 앞에 모으라 곧 제사로 나와 언약한 자니라 하시도다”

“제사로 나와 언약한 자” 이걸 성도라 합니다. 여기에 이제 정답이 나오네요. 공짜로, 공짜로, 아무것도 안 받고 너를 구원하는 이유가, 제사로, 제사는 희생제물 들어가죠, 희생제물로, 약속으로 주님이 자신의 몸을 희생제물로 해서, “내가 희생할게. 너는 덕이나 봐라”라고 하는 그 계약에 사인이 된 거예요. 사인도 우리가 한 게 아니고 주님이 알아서 사인을 해버린 거죠.

나는 너의 어떤 것도 안 받고, 나 혼자 내가 다 할게. 그 결과로, 내가 희생했다는 결과로 부풀어져서 나타난, 너에게 도달된 그 정보가, “네가 영생 얻었다. 그것도 공짜로 영생 얻었다”라는 자리, 그게 성도입니다. 그러면 그 대목이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은 바로 히브리서 10장에 나옵니다. 10장 5절에 보면,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미리 따로 준비했어요. 우리 몸 아니죠? 우리 몸 아닙니다. 우리 몸은 일체 안 받습니다. 우리 몸은 안 받고 다른 몸을 받아요. 그 몸이 뭐냐?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여기 요한계시록까지 포함해서 모든 말씀을 한 분에게 전부 다 응축을 시켜서 그분이 다 가져갔어요. 모든 말씀을 우리가 지키는 게 아니고, 우리가 지켜서 그 천국 가는 게 아니고, “가져와!”라고 해서, 우리가 지킬 것 같은 말씀을 그분이 새치기해서, 그분이 다 가져와서 그분이 희생을 해버렸어요.

희생을 했습니다. 그래서,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히10:7) 하고 등장했어요. 그 “왔나이다”라고 하시는 분이 그냥 “책에 기록돼 있다! 끝! 너 구원받았다”라고 이러지는 않아요. 10절에 보니까,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그 뜻을 따라 모든 말씀을 다 가지고 가는 주님이, 그 뜻을 따라 자신의 몸을 단번에, 아버지에게 제물로 드림으로 말미암아, 거기에 그 희생의 계약을 한 사람은 단번에, 단번에 거룩함을 입었어요. 그 거룩함을 입은 자를 두 자로 줄여서, ‘거룩한 자’라고 그러면 말 길잖아요. 두 자로 하게 되면 성도예요. 성도. 성도만이 구원받습니다.

그러면 교회에 와서 할 일은 뭐냐? 교회에서 설교를 들을 건 뭐냐? 더하기(+)가 아니에요. 봉사 더하기, 전도 더하기, 헌금 더하기, 열심히 더하기가 아니라 반대입니다. 빼기(-)입니다. 전도 빼기, 헌금 빼기, 봉사 빼기, 예배 빼기, 찬송 빼기, 다 빼기예요. 뭘 해야 빼지, 아무것도 안 하고는 빼기가 안 되잖아요. 다 하면서도, 봉사하면서도, ‘이것 때문에 천국 가는 건 아닙니다, 주님이여’

주님은 이미 값을 다 치렀습니다. 값을 치렀습니다. 애인과 같이 영화관에 가면서, 총각들이 사주는 거 많이 하잖아요. 요새는 그런 총각이 별로 드뭅니다마는, 여자가 ‘표는 내가 끊을게’라고 가면, 여자도 그냥 폼만 잡는 거죠. 그러면 남자가, ‘가만있어봐, 내가 낼 게’ 지가 또 총각이라고 기마이 쓰면서 표 끊죠. 끊고 쿠폰은 자기가 또 챙겨요. 알뜰하게 챙기는데, 영화표 값을 다 내지요.

이게 뭐냐 하면, ‘왜 영화 보기는 내가 보는데, 그걸 네가 내는데?’ 너랑 나랑 우리 둘 사이가 보통 사이가 아니잖아! 우리는 한 몸이잖아. 이러고는 값을 내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자연재해를 내려서 모든 것을 뭉개버렸다. 뭉개버렸어요. 뭉갤 때, 그걸 보고 ‘새삼스럽다, 놀랍다, 이럴 줄 몰랐다, 그럼 내 인생은 여기서 완전히 끝장인가, 신이 어찌 이럴 수 있습니까?’라고 하는 것은, 이거는 혼자 사는 사람이에요. 혼자. 자기만 믿고 산 사람이에요.

고린도전서 6장 20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라고 이렇게 돼 있어요. 값으로 샀다. 아까 값이 없다면서요. 값이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 값으로 산 것이 있다. 네 값이 아니고, 값이 없는데, 네가 값이라는 거예요. 여러분 이해되십니까?

값이 없으니까 나는 공짜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값이 없는데, 없는 이유가 네가 값이 되기 때문에, 내가 만든 네가, 내가 만든 값이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래서 오늘 본문의 핵심은 그겁니다. 오늘 본문의 핵심은 시편에 나오는 말씀을 먼저 보고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시편 36편 10절에 보면, “주를 아는 자에게 주의 인자하심을 계속하시며 마음이 정직한 자에게 주의 의를 베푸소서”라고 해놓고,

11절에, “교만한 자의 발이 내게 미치지 못하게 하시며 악인의 손이 나를 쫓아내지 못하게 하소서” 악인이, 이 세상은 악이라는 것은 없어요. 없는데 성도가 출몰하면서 동반해서, 가만히 있다가 나타난 것이 악인이에요. 모든 인간은 선악을 알기 때문에, “너 악인이지?”라고 하면 동의하지 않습니다. 왜? 선과 악을 안다는 것은, 선을 추구하고 악은 밀어내는 그 방식으로, 모든 인간에게 양심이라는 게 있어요.

그래서 악인은 존재하지 않아요. 그런데 여기에 값없이 성도가 등장하니까, 이건 난데없이 값없이, 값없이 영생을 받아버리니까, 영생 받지 못하고 분류된 나머지는 하나님 희생의 조치에 대해서 거부한다는 조건 하에, 악인으로 규정이 되어버렸어요. 그래서 악인이 발생 됐죠. 그러면 여기서, 마지막으로 제가 말씀드리는 거예요. 요거 정신 바짝 차려야 돼요. 나는 오후만 되면 걱정이 돼요.

잘까 봐 싶어서. 걱정해도 할 수 없지만. 이게 뭐냐 하면은 하나님은 성도가 값이잖아요. 논리를 잘 보세요. 값인데, 값이 값 되기 위해서는 성도는 뭐 그냥 멀뚱하게 있다가 천국 가버려요. 왜? ‘값없이’가 구현되기 때문에 그러는데, 악인들에게는 이 값을 값의 합당한 대가를 치러야 값이 값으로서 이 세상에 나타나기 때문에, 그들은 처참하게 망가져 버립니다.

그걸 시편 36편에서는 뭐냐 하면은 의인을 욕하는 자에게는, 악인은 멸하게 된다는 뜻이고, 37편 1~2절에 보면,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를 투기하지 말지어다, 저희는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볼 것이며 푸른 채소 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지금, 이 성경 이야기가 예수님한테 몽땅 갔기 때문에 우리가 이걸 지킬 수는 없어요.

그냥 결과만 우리에게 주어졌는데, 그 말씀 지키는 예수님의 내부 안에 사정은 이래요. 저 사람은 값없이 구원받기 때문에 그냥 천국 가는 거예요. 그런데 값을 주지 못한, 영생 받지 못한 자가 구원받은 사람에게 자꾸 비난하는 거예요. ‘너는 뭐 양심도 없나? 좀 상식대로 살아라. 저건 뭐 성경 보더니 인간이 이상에 달라졌네. 너 상식 없어? 너 정신없어? 제대로 한번 뇌를 굴려 봐’

사람은 천국 지옥이 없지만, 있다 치면, 천국은 누가 가느냐 하면, 착한 사람이 가고, 지옥은 누가 가느냐? 나쁜 사람이 지옥 가는 거예요. 우리의 선악 구조에 의하면. 근데 성경은, “그러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희생한 거는 어디로 날아가고? 내가(주님이) 단번에 죽으심으로 너희 이 천하의 죄인이, 전과 7범이 거룩함을 입었도다” 이 계약은, 이 계약서는 어디로 날아가죠?

이게 아까 이야기한, 하나님의 희생 안에서 새롭게 계약 맺은 자, 그를 성도라고 이야기합니다. 주님의 희생 안에서 유월절에 피를 바름으로 말미암아 애굽에서 나왔던 이스라엘, 노아 홍수 이전에,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그렇게 평범하게 살던 모든 사람이 물에 잠겼을 때, 그들이 몰랐던 것은 단 하나, 하나님이 죽는 하나님.

멀쩡하게 사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이 땅에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그 예수님의 효과로 그들은 천국을 가게 된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사람이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교과서에 나오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상식으로 받아주는 그런 일들이 아니었습니다. 교회 와서 바르게 살라고 하는 자에게는 절대로 깨닫지 못한 이야기였습니다. 주께서 홀로 다 이루시고, 공짜로 우리에게 영생을 주셨사오니, 우리는 항상 주님의 희생하심에 감사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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