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신원조회 불가

아빠와 함께 2026. 8. 30. 19:16

신원조회 불가

2026년 8월 30일                      본문 말씀: 요한계시록 6:9-11

(6:10)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하니
(6:11) 각각 저희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쉬되 저희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받아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

너는 너대로 살고, 나는 나대로 살고, 참으로 평화로운 풍경처럼 여겨질 겁니다. 각자 자기 일에 종사하고 간섭하지 않는 세계, 천국이 따로 없이 보이지요. 그만큼 인간들은 평화를 원하고 소망하며 살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저 조용하게 살다가 조용하게 세상을 떠나고 싶습니다. 그 이유는, 인간에게 있는 자율성과 결정권을 한시도 놓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죽어서 어떤 세상이 기다리고 있던지 그것은 어디까지 미래의 일이고 중요한 것이 이 지상의 삶이 천국이고 싶어합니다. 이 천국의 기본 원칙은 개인적인 자율권과 결정권이 방해받지 않고 보장받고 느끼고 싶어합니다. 그러니 실제 천국은 개인적인 자율성과 결정권을 일체 보장하지 않는 곳입니다.

이점은 지옥에 관해서도 예외가 아닙니다. 지옥도 자율권과 결정권이 없습니다. 이런 것을 간추려 정리하면 이러합니다. “인간은 주어진 환경에 맞도록 서식한다” 즉 인간치 보다 환경에 결정권을 갖고 있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성도를 보면 난리도 아닙니다. 참으로 힘들어 보입니다.

이런 식으로 한시도 곱게 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견딜 수 없어 보입니다. 그 누구도 기피하고 싶은 환경을 소개합니다. 특히 ‘그 수에 차지까지 하라’라는 대목에 이르게 되면 성도의 존재는 마치 이 땅에서 살해당하기 위해서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일 지경입니다. 따라서 이 본문을 대하는 자들은, “악착하게 살아서 성도의 삶의 보여주어야지‘라는 식으로 각오를 새롭게 할 것입니다.

하지만 성도는 환경과 싸워 이기므로서 성도 신분을 보장받거나 지탱할 수 있는 자가 아닙니다. 문제는 오늘날 성도라고 하면서도 정작 이 삶의 환경은 성도라는 이름으로 위협을 가하지 않는다는데 있습니다. 너무 고요하고 조용합니다. 교회 다니기에 주어지는 국가로서의 핍박도 없습니다.

그런 환경에서 오늘 본문 말씀은 아무런 현실감으로 느껴지지 않을 것입니다. 도대체 누구라도 우리 자신이 성도라는 이유로 핍박과 고난을 안겨 줘야 그것을 계기로 우리 자신들이 스스로 ’성도 맞구나‘라는 감격을 누릴 수 있는 게 아닐까요? 누가 종교적으로 시비를 걸어주어야 우리 성도는 신나게 맞대응하면서 성도라는 자부심에 도취되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게 아닐까요?

즉 왜 이 세상은 조용하냐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성경 말씀대로 성도이기에 잡혀서 죽게 되는 처절한 상황이 연출되는 것으로 성도임을 확인하고 싶은 겁니다. 누가 성도를 오늘 말씀대로 건드릴 것입니까? 놀라운 점은 이미 국가가 성도를 철저히 길들이고 있다는 점입니다.

구약을 봅시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자손들이 번창에 번창을 거듭하게 된 환경은 애굽 나라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애굽나라에서 탈출하기를 소망했습니까? 아닙니다. 떠나기는 어디로 떠난단 말입니까? 도대체 떠날 이유가 없는데 왜 떠나겠어요? 무려 430년 동안 히브리인들은 애굽 나라 속에서 이웃과 애굽 사람들과 정들었습니다.

떠나기 보다는 사이좋게 지내는 쪽으로 이미 굳어졌습니다. 굳이 네 종교, 나 종교  따질 필요없이 그저 누구하고나 사이 좋게 지내고 정권잡은 자들의, 통치 행위에 적극 협조하고 순응하고 말 잘 듣고 설명 되지 않겠습니까? 실제로 그들은 그렇게 살았습니다. ’평화로운 삶‘에 대해서 달리 표준적인 대상을 만들 하등의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냥 살던 대로 살면 살아지는 겁니다. 인생이라는 것이 말입니다. 굳이 종교나 이념이나 따질 필요조차 없는 겁니다. 그런데 이상스럽게 새로 통치자 바로가 등장하면서 히브리인들이라는 이름으로 핍박이 가해졌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히브리인들은 애굽을 탈출할 의사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들의 학대를 받아내는 쪽으로 정리했습니다.

정작 히브리인들의 사정을 더 힘들게 한 것은 모세와 아론의 등장입니다. 그들은 애굽의 바로왕 앞에서 나타나서 충고를 하므로서 바로왕의, 심기를 건드려서 그 여파가 애꿎은 히브리들에게 쏟아졌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인들이 자신을 해방하려 왔다는 아론과 모세가 물러가도록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할 지경에 이른 겁니다.

이런 경우는 사도행전 7장에 나오는 스데반 집사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도 가만 입다물고 있다면 억울한 죽음을 당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 모아놓고 설교를 해버렸습니다. 결과로 돌아온 것은 돌이었고 그 돌에 맞아죽습니다. 이때 돌던지 자들의 이념은 예수님 나라가 아니라 자기 나라입니다.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히브리인들이 애굽 국가와 분리되면서 그 와중에 ’어린양의 피‘의 위력이 나왔다는 점입니다. 즉 히브리인들이 세웠다는 유대나라이든지 애굽인이 세웠던 애굽이든지 상관없이 그들 세계는 자체적인 세계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즉 국가 자체가 성도를 괴롭히는 짐승으로 활동한다는 사실을 성도라면서도 인정하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인간보다 국가로부터 탈출하라고 하면, 탈출을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굳이 탈출할 이유를 모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경우를 봅시다. 유대 나라의 유대 지도층에서 먼저 예수님에 대한 명확한 신원조회를 찾고자 했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무리 중에서 혹은 이가 참으로 그 선지자라 하며

혹은 그리스도라 하며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 성경에 이르기를 그리스도는 다윗의 씨로 또 다윗의 살던 촌 베들레헴에서 나오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며 예수를 인하여 무리 중에서 쟁론이 되니”(요 7:40-43) 예수님께서는 신원조회 자체가 성립되지 아니합니다.

’땅에서 출생하는 방식’으로 하늘에서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이 땅을 성령을 보내시고 자기 성도를 만드시는 취지도 예수님께서 친히 당하셨던 방식으로 그대로 적용시키기 위함입니다. 빌립보서 3:20-21에,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성도를 지상에 계속 생겨나고 남겨두시는 겁니까? 그것은 천사에 대한 세상 멸망을 위한 폭격에 성도를 미끼로 사용하기 위함입니다. “주님, 여기에요 여기요”라고 외치게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스데반 집사님의 경우와 같이 오늘날 성도들의 그 이질성으로 인해 주님과 세상의 싸움은 여전함을 보여주시려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성도는 홀로 사는 것이 아님을 세상 국가의 활동을 통해서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22강-요한계시록 6장 9~11절(신원조회 불가)260830-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요한계시록 6장 9~11절입니다. 신약성경 380페이지입니다.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어,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하니, 각각 저희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쉬되 저희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받아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 아멘.

이 대목을 보게 되면, 성도는 이 땅에서 고난을 받는다고 여러분들이 이해가 될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자신을 성도라고 간주합니다. 그런데, 누가 여러분에게 시비 걸던가요? 성경 말씀을 보면, 성경 말씀은 성도가 이 땅에서 울고불고, 뭐 고난받고, 고통당하고, 뭐 난리도 아닌데, 오늘날 성도의 삶은 조용해요. 너무 조용해요.

성경에 나오는 이 상황과 조금도 일치됨이 없어요. 누가 교회를 가도 뭐라 말하는 사람이 없고, 심지어 전도한다고 돌아다니면 민원 좀 들어오지만, 그렇지 않고 너는 너대로 살고, 나는 나대로 조용히 살면, 아무도 우리를 터치 안 하는 세계, 그 터치 안 하는 세계에 사는 우리 모습과 오늘 요한계시록 6장 9~11절의 내용과, 이걸 한번 결부시켜 보세요. 연결해 보세요. 이게 말이 되는 이야기인지.

제단 앞에서 기도하고 있는 성도들은 10절에 보면,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그런데 아무도 우리가 교회 간다고, 우리를 죽이고 하지 않는데요? 어떻게 하면 좋지요? 좀 죽여줘야, 로마 시대처럼 우리를 사자 굴에 집어넣어 줘야, 이때, 오늘 본문 10절의 말씀이 폼 나지 않습니까.

‘아, 이때다. 요한계시록 6장에 10절 말씀, 야~~~요 때 써먹어야지’ 그런데 오늘날에는 말씀을 써먹을 상황이 없는데요. 뭐, 축구라도 보면서 할까요? 어디 놀러 가면서 이 이야기 할까요? 여행 가면서 이 말씀 써먹습니까? 뭐 핍박을 받아야, 거기에 대응으로 딱 외워놨던 요한계시록 6장에 10절을 들이대면서, ‘역시, 나는 성도 맞다니까. 맞아’라고 이렇게 자부심을 갖는데, 아무 일도, Never! 결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요.

그러면 둘 중 하나입니다. 성경이 너무 유난을 떨든지, 하나님께서 너무 유난을 떨든지, 우리가 세상을 잘못 읽고 있는지, 그 둘 중 하나이거든요. 그래서 이번 시간에 그 둘 중 하나, 아니면 우리가 성경을 미처 모르고 있든지, 뭐 같은 이야기입니다만, 우리가 성경을 제대로 모르고 있는지, 아니면 하나님께서 그냥 호들갑을 떠시는지, 그냥 어려울 때나 주의해서 하라는 식으로, 평소에 조용할 때는 이 본문이 필요 없고, 어려울 때나 이런 식으로 하라는 그런 식으로 해석해야 옳은지를 이 시간을 통해서 한번 검증해 봅시다.

일단 스데반 집사님에 대해 여러분이 들어 본 적 있지요.? 스데반 집사. 사도행전 7장에. 예수님을 증거 하는데, ‘아멘’ 이런 소리가 날아온 게 아니고, 돌이 날아왔어요. 예수님 증거 하면서 스데반 집사님은 설교를 했어요. 설교하니까, 설교의 끝은 돌에 맞아 죽는 것이 설교의 끝이었습니다. ‘퇴직금 얼마 드릴까요?’라는 이런 거 없어요. ‘내년에도 우리 교회 위임목사 되세요’라는 이런 거 없어요.

그냥 돌이 날아와서 죽였습니다. 그리고 돌 맞아가면서 쉽게 말해서, 마지막에 하신 말씀이, 사도행전 7장 60절에,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라고 이렇게 했다고요. 그러니까 스데반 집사님은 뭐냐 하면, 일단 이 세상은 조용하든, 요란스럽든, 관계없이 무조건 그건 죄다. 이 세상은 무조건 죄다.

그렇다면, 어디서 죄냐? 어떻게 죄냐? 어떻게 그걸 무모하게, 일방적으로 죄라고 규정할 수 있는 그 근거가 뭐냐.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400년 동안 살았던 적이 있어요. 정확히는 430년 동안 산 적이 있습니다. 430년 동안 히브리인들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자손들이 애굽에 살면서 그들은 어떻게 살았는가. 잘 살았어요. 아무 탈 없이 살았어요.

‘애굽 나라가 우리에게 이렇게 하면 안 되는데’라는 생각을 한 적이 없습니다. 왜? 인간은 사는 존재가 아니고 서식하는 존재거든요. 적응에 대해서는 귀신입니다. 잘 적응해요. 적응할 때, 나라가 어떠니, 국가가 어떠니, 민주당, 국민의 힘, 이런 게 어떠냐가 아니라, 적응할 때는 오로지 자기 편한 것만 계산하는 거예요. 내가 여기에 발붙이고 서식하는데, 생존하는데, 별 지장 없으면, 이 국가는 정상적인 국가라고, 이렇게 살아가는 거예요.

제가 예를 하나 들게요. 대한민국의 이 사정을, 남한의 사정을 북한 주민에게 그대로 공개했다고 칩시다. 실제로 다 알려졌다고 칩시다. 그들이 김정은 정권을 버리고 남한으로 귀순하겠습니까? 1번 - 귀순한다, 2번 - 귀순 안 한다. 몇 번이겠어요? 귀순 안 합니다. 적응되었잖아요. 적응. 누가 적응한 겁니까. 나라가 어떠냐, 이념이 뭐냐, 사상이 뭐냐, 사회주의냐, 공산주의냐 ,민주주의냐, 그런 것보다도 내가 내 삶에 그동안 적응을 잘했잖아요. 잘했다고요.

‘싱싱 고향 별곡’이라고, 토요일 날, TBC 지방 방송에서 하는 아침 방송이 있어요. 토요일 날 아침에 해요. 경상북도에 골짜기는 다 돌아다녀요. 골짜기란 골짜기는 다 돌아다니면서 나이 많은, 거의 70대 이상 분들 붙들고, ‘아줌마, 우애 살았습니까?’라고 이런 거 묻는 프로그램이에요. ‘자식들 도시로 다 보내고 이 골짜기에서 고생 드는데, 자식들이 그 도회지로 좀 오라고 안 카던가요?’

이렇게 물으니까, ‘아이고, 지는 지대로 살고, 나는 나대로 살지, 뭐’ 지금 그 할머니, 할아버지가 국가의 이념을 논했습니까? 사상을 논했습니까? 아니에요. 인간은요, 자기 편하면요, 억지로 참고 살아도 다 편해요. 그게 바로 애굽 나라의 430년 동안 줄기차게 살아왔던 히브리인들의 마음가짐이었습니다. 그들은 그 애굽에서 탈출할 마음이 조금도 없었어요.

그냥 사는 게 편해요. 그냥 대대로 430년 동안 얼마나 오래 살았습니까? 그게 다 적응되고 편하다니까요. 그런데 그들에게 애굽에서 나가자고 하는 것은 그들의 의견을 모은 게 아니고 누구의 등장이냐, 모세의 등장 때문에 탈출이 된 거예요. 억지죠 억지입니다. 지금 원치도 않은 탈출을 한 거예요.

그들은 항상 모세와 아론에게 불만을 터뜨릴 준비가 돼 있습니다. 이게 인간입니다. 제가 3개의 나라와 하나의 종교를 지금 설명해 드릴게요. 어느 것이 적당한지 여러분이 골라잡아보세요. 1번, 2번, 3번, 4번인데, 세 개의 나라. 일단 북한은 간단히 나갑니다. 북한은 남자의 병역 의무가 10년이고, 여자는 8년이에요. 그리고 탈북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탈북은 거의 불가능한데, 탈북하는 사람들도 있죠.

그러나 거의 소수고, 거기에 기독교나 뭐 이런 종교의 자유가 없습니다. 북한에 살래요? 북한은 평등하다는 겁니다. 북한은 굉장히 평등이 있다는 거예요. 거지도 없고 거리에 불량배도 없답니다. 그런 사람들을 잡아다가 북한으로 아예 드론 띄워서 보내버리면 되는데. 보내고 싶지요. 이게 첫 번째 나라 북한입니다.

그다음에 ‘에리트레아’라고 하는 나라예요. 에리트레아 나라는 어디에 있느냐 하면은, 아프리카 북쪽, 홍해 그리고 사우디아라비아의 맞은편, 거기가 홍해거든요. 아프리카 쪽에서 제일 위에 있는 나라, 구부러져있는 그 위에 있는 나라가 에리트레아 나라인데, 거기는 항병(降兵), 남자들이 20세가 되면 군에 가요. 군복무 기간이 무한대입니다. 죽어서 나와요.

그러니까 그 나라의 젊은 사람들은 군에 갔다고 하면 결혼이고 뭐고 끝났어요. 자기 직장 구하고 하는 그런 거 없어요. 군에서는 뭐 하느냐? 군대 훈련하느냐? 아니에요. 북영 건설 현장과 각종 강제 노동하면서, 거기에서 평생토록 군대라는 이름으로 삽니다. 그러면 군대가 아니고 그건 노역하는 그 감옥이잖아. 왜 군대라고 하지?

이걸 왜 군대라고 하느냐 하면, 지금 그 나라에는 몇 가지가 없는데, 선거가 아예 없어요. 선거가. 그리고 여론이 아예 없어요. 그리고 투표가 아예 없어요. 의회가 없어요. 그 나라는 30년째 국회가 아예 없어요. 그리고 그 나라의 특징은 전쟁 지도부가 곧 국가 지도부입니다. 그 나라는 또 뭐가 없느냐면 헌법이 없어요. ‘헌법에 준해서...’라는 그런 말조차도 필요치 않아요.

헌법이 없으니까. 왜? 그 나라에서 하는 것은 국민에게, 그러고 보니 국민이 아니죠, 완전히 백성들이죠. ‘아직도 전쟁 중입니다. 아직도 전쟁 중입니다. 아직도 계엄 중입니다’라는 이걸 계속해서 하는 거예요. 한때 프랑스에서 독립 전쟁을 했는데, 독립운동하면서, 독립운동이 독재로 이어졌고, 그것이 군사 체제로 그대로 이어진 나라예요.

그러면 그 나라의 젊은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선택권은 뭐냐? 그 나라에서 탈출하는 겁니다.
탈출하는 거예요. 탈출하면 어디로 오느냐 하면, 수단으로, 수단의 사막으로 가고, 사막에서 리비아로 가고, 리비아에서 지중해를 거쳐서 유럽으로 가는 건 그 나라뿐입니다. 자, 이게 두 번째 나라입니다. 이제,

세 번째 나라 합니다. 지금 제가 이렇게 첫째, 둘째, 셋째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우리가 현재 핍박이 없다고 자부하기 때문에 그것이 아니라는 것, 그것이 지금 큰 오해라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세 번째 나라가 뭐냐 하면, BC 1000~500년 있었던 인도의 베다 후기 문명입니다. 베다 후기 문명은 어떤 거냐 하면, 카스트(Caste) 제도가 가장 융성했던 제도인데, 카스트 제도라고 하는 것은 계급을 4단계로 나눠요.

제일 윗 단계가 브라만(사제), 제사 의식을 담당하는 계급이고, 그다음에 크샤트리아(왕족, 무사), 이거는 국가를 통치하는, 정치하고, 전쟁하는 전사들의 단체, 세 번째가 실질적으로 농업하고 수공업하고 상업하는 경제 활동을 담당하는 바이샤(농공상인) 계급, 네 번째가 뭐냐. 바이샤 계급의 노동하고, 수공하고, 상업하는 그 사람들의 허드렛일, 힘든 허드렛일하는 그 계급이 수드라(노예) 계급입니다.

힘든 거, 삼디(dirty, difficult, dangerous)업종과 같은 그런 각종 노역을 하는 그런 계급이 수드라 계급이고, 그보다 하나 더 밑에 내려가면 ‘불가촉천민(不可觸賤民)’은 만지면 더러워지는, 그건 사람으로 취급해서는 안 되는 층이 있고, 가촉(可觸) 천민들이 따로 또 있어요. 지금도 인도에 있습니다. 있는데, 이 제도에서 지금 제가 네 가지 계급을 이야기했잖아요.

이 네 가지 계급에 대해서, 이걸 뒤집으면 안 되느냐? 안 돼요. 왜냐 하면, 브라만 사람들이 언어를 알아서 베다(산스크리트어: वेद, vedas)라는 경전에, 경전에 그걸 새겨버렸어요. 정치인은 정치인답게, 상인은 상인답게, 군인은 군인답게, 노예는 노예답게, 각자 자리를 정해서, 교육을 한다든지, 그 밑에 계급이 치고 올라오는 것을 일체 다 금지를 했어요.

지금도 인도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뭐냐, 신과 통하는 제사하는 계급에 의해서, 신의 나라가 되는 거예요. 종교를 통해서, 신의 국가의 질서를 싸잡는 그런 역할의 제도, 이 제도가 바로 카스트 제도에 입각한 국가입니다. 지금 이란을 보시면 되고, 아프가니스탄, 카자흐스탄, 인도네시아도 그런 나라로 보시면 됩니다. 그러면 그 나라에 있는 사람들이 가만히 있느냐. 종교적으로 해결을 해요.

종교적으로 해결하는 게 뭐냐 하면은, 이 계급을 이렇게 갈아엎는 것을 죽고 난 뒤에 해줘요. 그걸 윤회설이라고 해요. 윤회라고 하는 것은 다음 생에 태어날 때는 네가 계급의 상위에 올라와서 계급을 하라는 건데, 이렇게 해서 그것 가지고 위로받고 사는 거예요. 이 나라에 한번, 이런 종교 나라에 한번 살아 볼래요? 현재 그 나라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누가 핍박하느냐. 국가가 핍박해요. 이게 요한계시록의 이야기입니다. 조용한데, 아무 일 없는데? 우리는 우리의 계급이 돈이 받쳐줘서 얼추 중상층 정도는 되기 때문에, 이 질서로 그냥 밀어붙이자 하는 식으로 우리가, 이 몸이 어느새 적응되었어요.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이 6장 9~11절이 전혀 우리하고 안 맞는 듯한 느낌을 주는 거예요.

‘이상하다. 우리는 아무 일도 아직 일어나지 않았는데...’ 애굽에 모세가 등장하기 전까지는요,
그 애굽의 국가 질서에 차분하게 잘 적응해서 살았어요. 오히려 애굽에서 나가자 할 때, 그 히브리인들이 모세와 아론에게 뭐라고 이야기했습니까?

‘너나 나가라! 왜 지금 가만히 있는 사람을 괜히 흔들어서, 우리 입장만 난처하게 만드느냐. 지금 애굽 사람들이 우리를 그렇게 힘들게 하는 것은, 모세, 네가 여호와 이름으로 우리를 찾아왔기 때문에, 우리가 힘든 거야’ 너만 나가면 전에처럼 우리는 아무 일 없이, 이웃에 있는 애굽 사람들과 평등하게 잘 살고 있는 거예요. 괜히 와서 우리 인생을 들쑤시지 말라.

이 서구의 모든 국가 구조가 애굽에서 시작했잖아요. 그다음에 바벨론이 모델이 돼요. 바벨론의 형태를 그대로 보여준 게, 네 번째 짐승인 로마였고요. 로마의 그 국회의원 제도가 현재 전 세계에, 민주공화국이라는 이름으로 전 세계에 다 퍼져 있습니다. 이게 네 번째 짐승에서 인간은 벗어난 적이 없어요.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나중에 더 나가면, 현재 우리가 삶의 환경이라 여기는 것은 뭐냐 하면, 네 번째 짐승의 시대라고 그렇게 표현합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지금 표정들을 보니까 전혀 지금 동의하지 않는다는 표정을 하는데, 이 국가가 흔들릴 때는요, 돈이 없어서, 자본이 없어서 살기 힘들 때, 국가를 흔들어요. 흔들 때, 뭘 동원하느냐면, 이 성경책을 동원해요. 라스타파리 운동(Rastafari Movement 또는 Rastafarianism)이라는 그런 운동이 있는데요. 이거는 자메이카인에 60%가 믿는 종교예요.

그 종교가 무슨 종교냐 하면, 예수님이 재림했다는 종교입니다. 그 도미니카에서 나오는 머리를 땋는 거, 도미니카 흑인들이 그거는 레위기 21장 5절의 말씀에 의해서, 제사장들은 머리카락에 손대지 말라는 그 본문 따라서, 머리를 이렇게 레게 머리처럼 땋는 거예요. “제사장들은 머리털을 깎아 대머리 같게 하지 말며 그 수염 양편을 깎지 말며 살을 베지 말고”

그 나라의 이념을 쥐는 것은 바로 이 종교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했다는 종교예요. 예수님이 재림했는데, 그 재림한 자가 누구냐? 1930년도에, 라스타파리안이라는 이 사람이 셀라시에 1세인데, 에티오피아 황제입니다. 남의 나라 황제예요. 남의 나라, 에티오피아 황제인데, 저 미국 밑에 있는 도미니카라는 나라가 아프리카의 북쪽에 있는 그 나라 황제를 재림한 예수로 뽑는 이유가 뭐냐?

그쪽이 에티오피아의 메시아는 흑인이에요. 흑인인데, 유대인한테 핍박받았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에티오피아의 기독교는 마리화나(대마초)를 사용하면서 정신적인 깨달음과 명상을 보는 그런 종교예요. 그 종교를 도미니카의 다수가, 60%가 그걸 믿으니, 그 나라는 하나님의 재림 예수 밑에서, 그냥 편안하게 잘 사는 거예요.

자, 이제 한번 정리해 봅시다. 여러분들 가만히 표정을 보니, 아무도 그 나라에 살 생각이 없는 모양인데, 성경에서의 뜻은 이겁니다. 이미 국가 자체가 핍박을 하고 있는데, 성도라고 하면서 전혀 핍박을 못 느끼는 것은, 그들이 예수님께서 어떻게 말씀대로 일하시는가에는 관심이 하나도 없고, 자기 편한 것만 챙기기 때문에 그래요.

‘나 안 건드리면, 나 안 건드리면, 국가든 뭐든, 나는 누가, 어떤 대통령이 와도 좋다’라는 지금 이런 마음가짐이 돼 있는 거예요. 출애굽 이전에 히브리인들의 사고방식인 겁니다. 출애굽 할 때, 유월절 피로 구원받았잖아요. 그러니까 오늘날 성도들이, 자신이 성도라고 하면서 자꾸 뭘 잊어 버렸느냐 하면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피 흘려 돌아가신 이유에 대해서 매일 같이 이 잊어버려요.

그걸 생각을 안 하고 있습니다. 생각 못 하고 있어요. 그러면 짧은 시간 내에, 한 3~4분 동안, 이 점을 설명하고 마치겠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와서 신원 조회가 안 되는 분입니다. 신원 조회가. 이 말은 사람들은 말하기를 예수님이 목수의 아들이라고 하는데, 아닙니다.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다? 아닙니다. 신원 조회가 안 돼요. 그런데 성령이 와서, 성경을 통해서, 성도는 이 땅에서 신원 조회가 빠져 있는 사람을 성도라고 합니다.

교회 와서 성도라고 하면 성도다? 신원 조회가 안 되는 거예요. 왜냐 하면 소속이, 시민권이 이 땅에 없기 때문에 그래요. 이제 좀 감이 오십니까? 빌립보서 3장에서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고, 우리의 목숨은, 생명이 하늘나라에 있어요.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빌3:20)

낮에 이야기한 것처럼, 우리는 지금 혼자 있는 게 아니고, 예수님께서 함께 사는 거예요. 예수님이 신원 조회가 안 되는 것처럼, 예수님과 함께 하면, 우리도 신원 조회가 안 돼요. 이 땅에 사는 이 민주 체제의 사람이 아니에요. 주민등록에 연연할 필요가 없어요. 아주 특이한 존재예요. 제가 로마에 간 적이 있습니다. 거기 로마에 가면, 사람들이 가는 트레비 분수(Fontana di Trevi)가 있는데, 트레비 분수에는 사람들의 이런 전설이 있답니다.

동전을 던지는 거예요. 한 번 던지면 다시 로마로 돌아오고, 두 번째 던지면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고, 세 번째 동전 던지면 그 사람과 결혼한다는 거예요. 이 전설의 특징은 뭐냐? 네가 한국에 돌아가더라도, 네가 영원히 행복하게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서 살 곳은 어디다? 이 로마이어야 한다. 자꾸, 로마로 돌아와야 돼! 로마로 돌아와야 돼! 이게 동전 세계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한국에 갔을 때, 진짜 그 전설대로 한다면, 한국에 갔을 때, 자꾸 로마로 가고 싶어 하죠. 그럴 때, 그 한국의 환경은 뭐냐. ‘너는 한국 사람이야. 너는 주민등록이 여기로 돼 있어!’라고 이야기하겠죠. 그게 바로 그러한 소속 자체, 시공간 자체가 이질적인 것에서 오는 그 핍박을 받게 돼 있습니다. 핍박을 받게 돼 있으면, 핍박받는 사람을 그러면 왜 한국에 살게 하느냐.

지금 왜 하늘나라로 안 데려가고, 왜 살게 하느냐. 주님께서 핍박을 받으면서, 이것이 하나님께서 천사가 공격할 때, 공격하는 좌표를, 좌표 정보를 성도가 제공하게 돼 있어요. “주님, 여기예요! 여기! 여기를 천사가 폭격하세요” 폭격은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죠. 전염병, 홍수, 가뭄. 공짜로 구원받았는데, 세상은 공짜가 없잖아요. 아등바등 살려고 합니다. 그런데 성도는 이미 공짜로 생명을 얻었어요.

얻었는데, 이 세상에 대해서는 그다지 애착 없습니다. 그것 때문에 주위 사람들로부터 핍박을 받아요. 핍박을 받을 때, 핍박받는 그 좌표를 향하여 주님께서 폭격과 공격을 하는 하나의 타이밍을 형성하는 거예요. 더 노골적으로 말해서, 하나님은 자기 성도를 이 땅의 미끼로 삼아서, 세상을 멸망시키는 그 정당성을 보장하는 것, 그것 때문에 성도를 이 땅에 계속 살게 하는 겁니다.

여러분, 이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세상에 나와서 누구와 대화하고, 누구하고 거래하고, 누구하고 장사하고, 누가 같은 가정이라고 사귈 때, 저 사람의 의식이 얼마나 세속적인 것을 온몸으로 느끼면서, 이질성을 가지고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좋은 대통령, 좋은 나라가 우리를 행복하게 한다고 생각하는 이것이 얼마나 비 성도의 발상인지를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가 하늘에 주민등록을 갖게 된, 소속이 하늘나라 소속인 것을 가볍게 여기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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