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산 자의 땅

아빠와 함께 2026. 9. 2. 23:48

2026년 9월 2일                 열왕기하 13:1-9
       
(13:1) 유다 왕 아하시야의 아들 요아스의 이십삼 년에 예후의 아들 여호아하스가 사마리아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어 십칠 년을 치리하며
(13:2)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이스라엘로 범죄케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를 좇고 떠나지 아니하였으므로
(13:3)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향하여 노를 발하사 늘 아람 왕 하사엘의 손과 그 아들 벤하닷의 손에 붙이셨더니
(13:4) 아람 왕이 이스라엘을 학대하므로 여호아하스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들으셨으니 이는 저희의 학대 받음을 보셨음이라
(13:5) 여호와께서 이에 구원자를 이스라엘에게 주시매 이스라엘 자손이 아람 사람의 손에서 벗어나 전과 같이 자기 장막에 거하였으나
(13:6) 저희가 이스라엘로 범죄케 한 여로보암 집의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고 좇아 행하며 또 사마리아에 아세라 목상을 그저 두었더라
(13:7) 아람 왕이 여호아하스의 백성을 진멸하여 타작마당의 티끌 같이 되게 하고 마병 오십과 병거 십 승과 보병 일만 외에는 여호아하스에게 남겨두지 아니하였더라
(13:8) 여호아하스의 남은 사적과 모든 행한 것과 그 권력은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13:9) 여호아하스가 그 열조와 함께 자매 사마리아에 장사되고 그 아들 요아스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사람은 평온한 삶을 원합니다. 행여 자기 생애가 위험하지 않을까 두려움을 늘 염두에 두고 살아가게 됩니다. 이 두려움을 미리 걱정하는 것 자체가 인생을 편치 않게 합니다. 실제로 인생을 살면서 각종 재앙을 만나게 됩니다. 자연적으로 발생되는 재앙이 있는 반면에 타인들로 인한 재앙이나 사고도 만나게 됩니다.

예를 들면, 대학교 실험실에서 약품이 폭발해서 화상을 입는다든지, 혹은 난데없이 먼 친척이 찾아와서 돈을 빌려달라는 요구를 받는다든지 하는 것도 사람으로 인한 재난입니다. 그래서 내 인생을 힘들게 하는 타인은 될 수 있는대로 멀리하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자연 재난은 어떻게 대처하렵니까?

그것은 그냥 운명이러니 하고 체념하게 됩니다. 3년 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는 것에 대해서 인간들이 뭘 어쩌겠어요. 참고 또 참을 뿐이지요. 홍수가 나서 갑자기 집 안으로 물이 들어오면 대야를 동원해서라도 집 밖으로 퍼낼 뿐이지 누구보고 따지겠어요? 그러나 허름한 술취한 불량인이 갑자가 집안으로 들어온다면 자역 경찰에 어른 신고하고 원망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치안을 이 따위 밖에 못하느냐 하면서 말입니다. 이래서 이 동네에서 불안해서 살겠느냐 하면서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북이스라엘이라는 땅이 자연재해와 인공재해 두 가지가 다 덮쳤습니다. “ 길르앗에 우거하는 자 중에 디셉 사람 엘리야가 아합에게 고하되 나의 섬기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 년 동안 우로가 있지 아니하리라 하니라”(왕상 17:1)

선지자 입장에서 이스라엘 땅에 비가 오기 않는 것은 하나님 말씀이 없다는 상황이 곧 자연자난을 받아도 마땅함을 알리기 위한 조치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선지자 입장이고 왕이나 일반 백성들은 여전히 바알과 아세라 신을 믿는데 열중입니다. 신(神)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서 믿는 신이 있는 반면에 실제로 살아계신 신이 있습니다. 모든 인간들에게 있어 스스로 신을 만드는 것이 편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서 믿는 신은 만만하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이 어려움에 처할 때 부려먹을 수 있는 신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실제로 살아계신 신은 하나님 고유의 시나리오가 있습니다.

모든 인간들은 스스로 만든 신을 믿는 반면에, 유독 이스라엘에게만 실제로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찾아들었던 이스라엘은 처음에는 미처 몰랐습니다. 결국에는 그 하나님과 맨날 싸운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모든 인간들은 아담의 분신들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인간 본인이 괸라하고 통제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귀가 인간의 마음을 꽉 쥐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자신가 믿을 신을 자신이 선택할 권리가 있다고 여기는 겁니다. 애굽에서 학대받던 히브리인들은 이러한 인간 본원의 마음을 알지 못한채 애굽에서 나와버렸습니다. 어린양의 희생으로 그들은 자신들도 알지 못하는 땅으로 이끌림을 받았습니다.

출애굽기 20:3에서, 하나님께서 다음과 같은 계명을 주었을 때에 그들은 마땅히 그 계명에 순종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출 20:2-3) 하지만 이랬던 그들이 오늘 본문에 나와 있는 것처럼 하나님이 계시는 땅에서 노골적으로 우상을 섬겼습니다.

엘리야 시대 때는 하나님께서 3년 6개월 동안 하늘에게 비가 내리지 않는 자연 재해를 내렸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우상 섬기는 것을 멈출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북이스라엘 북쪽에 있는 아람나라를 통해서 침범케 했습니다. 이것은 자연 재해처럼 참는다고 해서 참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인간에게 굴욕감을 안겨주고 지긋지긋한 좌절을 겪게 합니다. 비참함을 맛보게 됩니다. 그토록 자랑했던 자신의 군사력이 바닥을 쳤습니다. “아람 왕이 여호아하스의 백성을 진멸하여 타작마당의 티끌 같이 되게 하고 마병 오십과 병거 십 승과 보병 일만 외에는 여호아하스에게 남겨두지 아니하였더라”(왕하 13:7)

여기서 여호와아스 왕은 놀라운 행동을 합니다. 그것은 바알을 섬기는 그 마음에서 여호와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하는 놀라운 태도를 보입니다. 이럴 때 하나님께서는 구원자(앗수르)를 보내어 아람나라의 괴롭힘에서 잠시 벗어나게 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이스라엘에게 별한 관여를 하시는 걸까요?

그것은 이스라엘만이 하나님이 계시는 하나님의 언약이 작용하는 약속의 땅에 들어와 있기 때문입니다. 곧 그 땅은 인간들 땅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땅이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이 특별한 관계성은 사사기를 통해서 반복적으로 나타납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길갈에서부터 보김에 이르러 가로되 내가 너희로 애굽에서 나오게 하고 인도하여 너희 열조에게 맹세한 땅으로 이끌어 왔으며 또 내가 이르기를 내가 너희에게 세운 언약을 영원히 어기지 아니하리니

너희는 이 땅 거민과 언약을 세우지 말며 그들의 단을 헐라 하였거늘 너희가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였도다 그리함은 어찜이뇨 그러므로 내가 또 말하기를 내가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그들이 너희 옆구리에 가시가 될 것이며 그들의 신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리라 하였노라

여호와의 사자가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이 말씀을 이르매 백성이 소리를 높여 운지라 그러므로 그곳을 이름하여 보김이라 하니라 무리가 거기서 여호와께 제사를 드렸더라”(삿 2:2-5) 이 본문에서 우리는 ‘땅’과 ‘언약’이라는 특이성을 발견합니다. 그것과 더불어 이 말씀을 ‘하나님의 사자’, 곧 천사가 말씀하신다는 점입니다.

사람들이 만들지 않았다고 해서 없는 것은 아닙니다. 천사나 하나님의 신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이분들은 하나님의 시나리오(언약)대로 실시하십니다. 언약이란 곧 신약에 그 완성된 본질이 나옵니다.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세 증인을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히 10:28-29)

인간이 만든 신은 이미 인간에게 선과 악의 지식으로 체계가 되어 있기에 자신의 죄와 인생은 자신의 방식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겁니다. 반면에 실제로 살아계신 하나님은 오로지 자신의 희생으로만 죄가 씻어서 해결하십니다. 성도는 새삼스럽게 ‘예수 믿고 천국간다’는 자가 아니라 이미 뿌리가 천국에 박혀 있기에, 왜 아무 것도 아닌 죄인을 벌써 천국에 바탕을 두고 살 수 있게 하는지를 말하는 자입니다.

“내가 산 자의 땅에 있음이여 여호와의 은혜 볼 것을 믿었도다”(시 27:13)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의 육신이 아담의 분신임을 전제로 하고 예수님의 피를 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31강-열왕기하 13장 1-9절(산 자의 땅) 260902-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열왕기하 13장 1절에서 9절까지입니다.

열왕기하 13:1-9

“유다 왕 아하시야의 아들 요아스의 이십삼년에 예후의 아들 여호아하스가 사마리아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어 십 칠년을 치리하며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이스라엘로 범죄케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를 좇고 떠나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향하여 노를 발하사 늘 아람 왕 하사엘의 손과 그 아들 벤하닷의 손에 붙이셨더니 아람 왕이 이스라엘을 학대하므로 여호아하스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들으셨으니 이는 저희의 학대 받음을 보셨음이라 여호와께서 이에 구원자를 이스라엘에게 주시매 이스라엘 자손이 아람 사람의 손에서 벗어나 전과 같이 자기 장막에 거하였으나 저희가 이스라엘로 범죄케 한 여로보암 집의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고 좇아 행하며 또 사마리아에 아세라 목상을 그저 두었더라 아람 왕이 여호아하스의 백성을 진멸하여 타작마당의 티끌같이 되게 하고 마병 오십과 병거 십승과 보병 일만 외에는 여호아하스에게 남겨두지 아니하였더라 여호아하스의 남은 사적과 모든 행한 것과 그 권력은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여호아하스가 그 열조와 함께 자매 사마리아에 장사되고 그 아들 요아스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여기에 등장하는 여호아하스는 남쪽 왕이 아니고 북쪽 왕입니다. 이 당시에 남쪽 왕은 요아스였습니다. 지난 시간까지 남쪽의 요아스 이야기를 하다가 이제 북쪽의 여호아하스 왕 때의 북쪽 이스라엘의 사정을 성경은 소개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북이스라엘을 소개하는 이유가 본문에 나와 있습니다.

열왕기하 13장 2절에,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이스라엘로 범죄케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를 좇고 떠나지 아니하였으므로”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난 시간에 보았듯이, 예후 왕이 등장해서 바알과 아세라의 목상과 모든 것을 철저하게 다 부순 것으로 우리는 인식하고 있습니다.

‘진짜 미친 듯이 바알과 아세라 종교를 말살했다’라고 했는데, 오늘 본문에 보니까 아버지는 그렇게도 열심을 내서 바알을 말살하고 섬기지 않았다고 했는데 그의 아들 여호아하스는 아버지를 따른 것이 아니고 도리어 아버지 돌아가기를 기다렸다가 자기가 왕이 되고 난 뒤에는 도로 바알 신을 섬겼다고 나옵니다.

사람은 바뀌지 않는 모양입니다. 사람이 바뀌지를 않아요. 왜 안 바뀌느냐 하면, 모든 인간은 아담의 분신이거든요. 아담의 요소가 대를 이어서 인간의 육신을 복제하고, 복제하고 복제를 계속하는 겁니다, 아담의 속성을. 아버지가 자식을 낳고, 그 자식이 또 자식을 낳고…, 그 아버지의 위의 아버지, 그 아버지 위의 아버지, 최초의 아버지는 아담입니다.

그 아담이 하나님이 따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따먹게 되면서 그 최초의 조상 아담은 악마와 결탁되었어요. 하나님의 정신보다 악마의 정신이 아담의 본 중심을 차지했습니다. 아담도 자기 맘대로 못 해요. 아담의 아들 가인도 자기 맘대로 못 합니다. 동생을 죽였는데 자기는 죽이고 싶지 않더라도 자기 맘속에 들어온 그 악마의 사주를 받아서 동생을 죽이게 됩니다.

‘내 정신이니까 내 맘대로 한다’는 그것은 잘못된 거예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잘못 알고 있습니다. 우리 마음은 우리 맘대로 안되고 마귀가 맘대로 하고 있습니다, 마귀가! 그러니까 북쪽 이스라엘의 여호아하스가 바알을 섬기는 것은 욕할 것이 안 돼요.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니까요. 그러면 바알을 섬긴다는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이런 겁니다.

‘없는 신을 새로 만들어서 섬길까, 아니면 이미 계신 하나님과 다툴까?’ 인간이 할 수 있는 선택지는 이 둘 중 하나밖에 없어요. 다시 말씀드립니다. 인간이 신을 믿는다는 것은 자기가 신을 만들어서 믿는 거예요, 만들어서. ‘자기한테 잔소리 하지 않고, 자기가 함부로 부릴 수 있는 만만한 신, 그 신을 자기가 만들어서 믿을까, 아니면 나는 이제 신을 안 믿어, 하면서 이미 계신 하나님과 티격태격 다툴까요?’

여러분, 어느 쪽으로 하고 싶습니까? 없는 신을 만드는 것은 이스라엘 외의 모든 이방 민족들이 그렇게 했어요. 만만하게 갖고 놀 수 있는 신, 고려 때나 조선시대 때의 그 신, 부처라는 신, 알라라는 신, 다 인간들이 만든 신이잖아요. 그러면 인간이 만든 신이 아니고 유일하게 진짜 하나님이 찾아온 민족은 어느 민족이냐? 그것은 이스라엘이지요.

그러면 ‘이스라엘은 좋겠네. 진짜 신을 만났으니까.’ 이렇게 생각하는데 이스라엘은 진짜 계시는 하나님과 다투는 것이 그들의 역할이었고 할 일이었고 그들의 역사였습니다. 다시 묻습니다. ‘없는 신, 만만한 신, 갖고 노는 장난감 같은 신 만들어서 섬길래요, 아니면 진짜 살아계신 하나님과 맨 날 싸울래요?’ 어느 쪽입니까?

‘진짜 하나님께 잘해주렵니다.’ 그것은 아담의 분신이 아니지요. 그런 인간은 없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진짜 살아계신 하나님이 찾아오지 아니하면 그 이스라엘도 역시 자기가 만든 신을 만들어놓고 신과 노닥거리면서 ‘나는 하나님과 평화를 유지했다.’ 이렇게 나올 민족이에요. 그게 오늘 본문에 바로 바알과 아세라입니다.

자 여기서 여러분이 하나님 입장이 되어 봅시다. 하나님이 인간들이 어떤 신을 만들어 섬기든지 그냥 못 본 체 봐주면 안 되겠어요? 어차피 인간들은 이미 악마와 한통속이 되어가지고 하나님을 좋아하지 않는 입장, 하나님을 밀치는 그런 입장이라면 그냥 자기들이 좋아하는 신을 좋~다고 만들어서 섬기면 그대로 그냥 놔두면 되잖아요.

그걸 하나님께서는 ‘못 보겠다.’ 하고 왜 찾아오십니까? 복잡하게 하지 말고 여기서 우리가 정리합시다. 이방 민족한테는 안 찾아가요. 이방 민족은 하나님이 그냥 “내어 버려두사”, 그냥 내버려둬요. 이게 로마서 1장에 나옵니다. 그냥 내버려둬요. 네가 어떤 신을 믿든 그냥 내버려두는데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자 이유가 뭘까요?

왜 이스라엘만큼은 하나님이 다른 신을 믿는 것을 그냥 방치하지 않을까요? “네가 바알 신 믿나?” “예!” “그래, 그냥 믿어.” 왜 이렇게 방관하거나 방치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개입하는가? 이유가 있어요. 남쪽 이스라엘과 북쪽 이스라엘이 사는 땅이 자기들 땅이 아니고 하나님 땅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에요. 하나님이 선점한 땅이에요.

사람들은 이렇게 합니다. ‘아, 예수 믿어서 천국 가야지. 나는 하나님 만나볼 거야. 나는 죽어서 천국 가고 싶어. 지옥은 가기 싫어.’ 성경은 구약 때부터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예수 믿어 하나님 계시는 천국에 가야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은 이거예요. ‘내 천국을 누가 망치느냐?’ 이렇게 물어요.

다르지요? 내가 여기 있는데, 내가 바깥에 있는데 ‘나는 죽어서 천국 안에 들어가야지’ 이게 인간들 생각이라면 하나님께서는 ‘너는 왜 내 천국 안에 있으면 내 천국을 망치느냐?’라고 질책하시는 겁니다. 그 나라가 무슨 나라냐 하면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에요. 이방나라 같으면 하나님께서 선지자 보내지도 않아요. 하나님이 찾아오지도 않습니다.

오늘 길게 열왕기하 13장 1-9절까지 읽었는데 딱 읽어보니까 그 내용이 들어오십니까? 내용은 이거예요. “북이스라엘 왕이 우상을 섬기니까 하나님께서 그냥 방치하지 않고 북쪽에 있는 아람 나라 –오늘날의 시리아- 군대가 쳐들어오게 해서 북 이스라엘을 학대했다. 학대하니까 북이스라엘이 그 학대에 못 이겨서 ‘여호와 하나님이여, 도와주소서’라고 기도하니까 하나님께서 구원자를 보냈다.”

여기서는 ‘구원자’로 되어 있지만 역사적으로서는 북쪽에 있는 저 아람나라를 또 압박하는 다른 나라, 큰 나라가 있었는데 앗수르라는 나라입니다. 앗수르라는 그 나라가 이스라엘을 압박하는 그 아람 나라를 압박하니까, 작은 나라인 이스라엘을 간섭할 여력이 없어서 놔버리고 앗수르 신경 쓰다 보니까 북이스라엘은 잠시 숨을 고른 거예요.

“아, 혼났다.” 그런 겁니다. 그걸 누가 했다는 말입니까? 그걸 하나님이 했다는 거예요. 일상 생활하면서 이 성경의 세계에 들어온다는 것이 그렇게 힘들어요. 방금 들었던 이 본문의 예를 들 테니까 여러분이 한 번 느껴보세요. 네팔이라는 나라에 자연재해가 덮쳐서 홍수가 났다. 그래서 그 가난한 나라가 거의 2조 원의 피해를 입었어요.

홍수가 났을 때 사람들이 무섭다고 이야기들 해요. “자연이 이렇게 무서운 줄 몰랐다. 무섭다, 무서워!” 동영상 보는 사람들도 “야, 이렇게도 무섭구나.” 했어요. 그러면 제가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홍수가 나는 게 무섭습니까, 아니면 러시아 군대가 우크라이나 국민들에게 쳐들어오는 그것이 무섭겠습니까? 홍수가 나는 게 무섭습니까, 아니면 북한 인민군이 탱크를 앞장세워서 서울을 침공하고, 대전 광주 다 먹고 마지막 대구 지나 다부동까지 쳐들어왔을 때 그게 무섭습니까? 5초 드립니다.

어느 것이 직접적으로 무서워요? 인공재해가 무서워요. 왜? 직접적이니까. 만약에 가뭄이 들었다, 비가 안 온다, 홍수가 났다? 그러면 사람들은 “무섭다.” 무서워요. 무서운 것은 맞는데 ‘하나님이 하시는 일인데 우리가 우짜겠노?’ 또는 ‘자연이 그렇게 하는데 우리가 누굴 탓하겠어?’ 하고 해소가 돼요, 해소가. “자연 보고 탓하겠나, 하늘 보고 따지겠어? 우리가 미처 물관리를 안 해서 그렇지 뭐.” 이런 식으로 넘어가요.

그런데 직접 외국 군대가 쳐들어와서 우리를 노예로 삼는다면 그 무서움은요 자연재해의 무서움과 족히 비교가 안 돼요. 지금 북이스라엘에 가뭄이 들었다. 열왕기상 17장에서도 나오지요. 가뭄이 3년 6개월 동안 들었어요. “길르앗에 우거하는 자 중에 디셉 사람 엘리야가 아합에게 고하되 나의 섬기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년 동안 우로가 있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그럴 때 사람들이 “아이고, 무서워라. 이제 바알과 아세라 버리고 여호와 섬겨야지!” 이랬습니까? 이랬어요? 안 그랬어요! 열왕기상 17장에서 안 그랬다고요. “자연이 하는 일 우리가 어쩌겠어? 참아야지. 비 올 때까지 참아야지 우리가 손을 쓸 수가 없잖아.”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아람 나라가 쳐들어오니까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이 북이스라엘 왕이 뭐라고 하느냐? 열왕기하 13장 4절에, “아람 왕이 이스라엘을 학대하므로 여호아하스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들으셨으니 이는 저희의 학대 받음을 보셨음이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와, 3년 6개월 동안 비 안 올 때도 기도 안 했는데? 그런데 군대가 쳐들어오니까 사람들이 왜 이렇게 기도해요? 이게 더 공포스러운 거예요. 더 공포스러운 겁니다. 정리해 봅시다. 자연이 쳐들어올 때는 무섭기는 하지만 참을 만했는데 막상 같은 인간이 쳐들어오니까 사람들은 어쩔 줄 모르고 대번에 여호와께 도와달라고 기도했어요.

그만큼 공포가 몇 배나 더 셌다는 거예요, 공포가. 비가 안 오고 또는 갑자기 홍수가 났다. 거제도에도 홍수 났잖아요. 그렇게 홍수가 났을 때 무섭지요. 무섭지만 거제 주민들이 물을 퍼내면 되었지요. 그런데 술 먹고 마약에 취한 어떤 남자가 우리 집에 갑자기 들어와서 “오늘 하룻밤 여기서 자자”하고 침대에 누웠을 때, 인간이 그렇게 쳐들어왔을 때의 그 공포하고 홍수 났을 때의 공포하고 어느 게 더 세겠습니까? 낯선 부랑자가 쳐들어왔을 때 어느 것이 더 무섭겠어요?

묻는 내가 잘못이지요. 여기서 정리할 것은 자연재해보다 뭐가 더 무섭다? 사람이 더 무서운 거예요. 하나님이 그렇게 그 인간들을 이용한 겁니다. “네가 하는 짓이 얼마나 무서움을 유발하고 공포를 유발하는 죄인지 아느냐?”를 다른 민족 같으면 언급을 안 해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땅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이 얻고자 하는 것은 뭐냐?

“이 땅은 너의 땅이 아니고 하나님이 살아계신 땅이다.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다.” 다른 말로, 신약적으로 한다면 “이곳이 바로 천국이다.” 죽어서 천국 갈 생각하지 말고 이미 들어와 버린 천국을 망치는 그 주모자가 누구냐? 바로 너다! 너라는 거예요. 너다! 제가 문제 낼 테니까 1, 2, 3번 중에서 어느 것이 가장 우리에게 무서운지를 맞춰보세요.

1번, 자연재해
2번, 인공재해
3번, 나 자신

몇 번입니까? 누가 가장 내 인생을 망치는 존재에요? 바로 마귀하고 한통속이 된, 걸핏하면 하나님께 원망하는 내가 내 인생을 아주 조져놓습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가르치려고 하는 거예요. 그 가르치는 근거, 토대가 뭐냐? 그 토대가 바로 출애굽기 20장에 나옵니다. 출애굽기 20장에 십계명이 나오는데 제1계명이 3절부터 나옵니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찌니라.” 너는 나 외에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하지 말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말씀을 들을 때 자신만만했어요.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자기를 건져냈잖아요. 그러니까 여호와 외에 다른 신이 없다는 것을 명확하게 아는 이상은 십계명의 1계명에 대해서는 상당히 만만하게 보고 “예, 믿습니다. 다른 신을 믿지 않겠습니다.” 했어요.

그랬던 그들이, 그랬던 그들의 자손들이 오늘 본문 열왕기하 13장에서 그들은 바로 여로보암의 죄, 우상 섬기는 죄에서, 새삼스럽게 믿는 게 아니고 ‘떠나지 아니했다.’ 떠나지 아니한 거예요. 출애굽할 때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의 본성 안에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는 본성이 자리 잡았다는 것을 꿈에도 생각 못 했어요. 자기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꿈에도 생각 못 한 겁니다.

그렇게도 못 고치고, 사람이 안 달라질 인간 같으면 하나님이 그냥 내버리지, 뭐 하려고 자꾸 찾아오시고 관여하시느냐? 그들이 기거하는 땅이 그들의 땅이 아니고 하나님 자기 땅이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그러니까 신약에 와서 방금 이야기한 것이 이렇게 됩니다. 백날 이야기해 바야 하나님 말 안 듣는 인간을 뭐 때문에 하나님께서 미리 넣어줬는가?

그들의 세계가 바로 천국이기 때문에 그래요. 백날 이야기해도 말 지독스럽게 안 듣는 인간들이 천국을 가요. 여러분, 이게 믿어집니까? 오늘 본문 보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새삼스럽게 말 잘 들어서 천국 가는 게 아니고, 죽어라 하고 말 안 듣는 인간을 이미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약속의 땅에 미리 집어넣었다니까요. 그것도 언약과 더불어서.

천하의 말 안 듣는 인간들을, 죄인을 신약에 와서 죽어서 천국 가는 게 아니고 살아 있을 때 천국에 뿌리를 박고 소속을 천국 소속으로 천국 사람 되게 했다니까요. 이게 성경 이야기입니다. 뭐 예수 믿고 천국 간다고? 새삼스럽게 가는 게 아니에요. 못나고 못난 인간을 천국에 집어넣고, 그다음 작업이 뭐냐? 네가 이 정도로 말썽꾸러기라는 것을 말씀을 통해서 알려주는 작전, 그 작전이 바로 천국을 천국답게 만드는 작전입니다.

여러분, 교회 몇 년 나왔어요? 여러분 성경 몇 년 전에 봤습니까? 어떤 사람은 성경 백번 보고 천 번 봤다는데 보니 뭐합니까? 하나님의 취지를 모르는데요. ‘열심히 성경 봤으니까 이제 천국 가겠지’ 천국은 가는 게 아니고 천국이 오는 겁니다. 그리고 덮쳐지는 거예요. 우리가 얼마나 천국 갈 만한 존재가 못 되는지를 알리시는 방법으로 우리로 하여금 네 뿌리가 천국에 있다는 것을 확인시키고, 또 확인시키고 매일 같이 확인시키는 하나님의 열심, 그 열심으로 우리가 이미 천국에서 뿌리째 뽑히지 않는 거예요.

주님은 우리의 뿌리를 보시는데 요한계시록 바로 앞에 있는 유다서라는 게 있어요. 그 유다서 1장에 보면 지옥 갈 사람들을 이렇게 표현해 놨어요. 마귀와 더불어 영원한 지옥 갈 사람들을 이렇게 표현해 놨습니다. 12절에, “저희는 기탄없이 너희와 함께 먹으니 너의 애찬의 암초요 자기 몸만 기르는 목자요 바람에 불려가는 물 없는 구름이요 죽고 또 죽어 뿌리까지 뽑힌 열매 없는 가을 나무요.”

이게 가인의 어그러진 길로 간 자들에 대한 표현입니다. 여기에 “뿌리까지 뽑힌”, 그러니까 뿌리가 천국에 박힌 자, 하나님께서는 이방 민족과 차이 나는, 대조되는 이스라엘의 특수성을 구약 이스라엘을 통해서 이렇게 미리 보여준 거예요. 이스라엘의 특수성은 뭐냐 하면, 하는 행동을 보고 구원을 해주는 것이 아니고, 일단 그들을 애굽이라는 이방 민족에서, 다른 신을 믿는 이방 민족에서 강제로 구원을 시켜서 데리고 어디로 가느냐?

약속의 땅에 뿌리를 박게 한 거예요. 그게 바로 사사기입니다. 구약 사사기가 있어요. 사사기 2장 1-5절을 제가 한 번 읽어드리겠습니다. 거기서 여러분이 어떤 특이성을 찾아보세요. “여호와의 사자가 길갈에서부터 보김에 이르러 가로되 내가 너희로 애굽에서 나오게 하고 인도하여 너희 열조에게 맹세한 땅으로 이끌어 왔으며 또 내가 이르기를 내가 너희에게 세운 언약을 영원히 어기지 아니하리니 너희는 이 땅 거민과 언약을 세우지 말며 그들의 단을 헐라 하였거늘 너희가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였도다 그리함은 어찜이뇨 그러므로 내가 또 말하기를 내가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그들이 너희 옆구리에 가시가 될 것이며 그들의 신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리라 하였노라 여호와의 사자가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이 말씀을 이르매 백성이 소리를 높여 운지라 그러므로 그 곳을 이름하여 보김이라 하니라 무리가 거기서 여호와께 제사를 드렸더라.”

특이성, 제가 답변하겠습니다. 세 개를 뽑아봤습니다. 첫째는 뭐냐? 땅. 두 번째는 언약. 세 개인데 세 개 중에서 특이한 하나를 따로 뽑아서 이 본문에서 하나만 끄집어내라면 그 하나는 뭐냐? 하나님의 사자, 천사입니다, 천사. 이게 무슨 의미일까요? 천사가 이야기해요. 이게 뭐냐 하면, 인간이 자기 노력으로 천국에 못 간다는 거예요.

이걸 이스라엘식으로 한다면, 인간이 자기 노력으로, 애굽에 있던 히브리 민족이 이 약속의 땅 가나안 땅까지 자기 노력으로 올 수가 없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 땅에 왔어요. 오지 못하는 데 왔어요. 여러분, ‘인간이 만들지 못한다’는 것과 ‘아예 없다’하고 같은 뜻이 아닙니다. 인간 세계에서는 인간이 만들지 못하면 없는 것으로 알아요.

그러나 인간이 만들지 못하지만 있어요. 천사, 하나님, 성령…, 성령 인간이 만들었습니까? 아니지요. 예수님에게서 나왔지요. 그러면 하나님은? 하나님은 인간이 만들지요. 하나님은 인간이 만들어요. 그것이 인간의 본성이니까. 악마에 속한 인간의 본성은 자꾸 하나님을 만들고 종교를 만들어요. 그 만든 신을 섬겨요.

그것은 인간이 할 수 있어요. “신이 있다.” 왜? 자기가 만들었으니까 신이 있지요. 그러나 천사가 개입된 이 하나님은 인간이 만든 하나님이 아니고 실재로 계신 하나님이에요. 실재로 계신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사사기 2장 1-5절에 보면, 웁니다. 그것도 통곡하고 울어요. 그래서 그 이름이 ‘보김’이에요. 대성통곡하고 울었다고.

사사기 2장 1-5절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천사가 하는 말이 “내가 너희를 애굽에서 건져냈잖아. 그래서 이 땅에 왔잖아. 그것도 언약대로 했잖아.” 언약이라 했는데 시나리오라고 합시다, 시나리오. 영화의 시나리오 있지요. “시나리오대로, 그 각본대로 왔잖아. 왔는데 내가 너희에게 주의 준다. 이 땅의 본토인들이 믿었던 다른 신을 믿지 마라”라고 천사가 이야기했어요.

천사가 왜 그 이야기 합니까? 천사가 인간을 아니까요. 천사가 인간을 알아요, 인간의 본성을 알아요. 아담의 분신이니까, 조상부터 이미 악마와 한통속이 된 그 본성을 이미 천사가 알고 있어요. 자연스럽게 인간은 섬기고 싶고 만만한 신을 자기가 만든다는 걸 알아요. 그리고 인간은 자기가 만든 신이기 때문에 신에 대해서 그렇게 기죽지 않습니다. 뭐 하나님께 기죽어서 벌벌 떠는 그런 사람 없어요. ‘하나님이여, 내가 믿어주면 고마운 줄 아세요.’ 뭐 이런 식이라니까요.

그러니까 다시 이야기합니다. 진짜 살아계신 하나님께 가장 무서운 존재는 자연재해도 아니고 인공재해도 아니에요. 나, 나예요, 나! 내가 나에게 가장 무서운 존재입니다. 이걸 불쌍히 여겨서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통해서 “너희들이 이 땅에, 이 약속의 땅에 와서 도대체 올 수 없는 이 하나님이 계신 이 약속의 땅에 어떻게 왔는지, 그 언약을 배워라.” 그 언약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희생입니다. 언약이 하나님의 희생이에요.

그러면 희생을 배우라는 뜻인데 이 말이 뭐냐? 인간들은 악마와 한통속이 되어서 어떤 특징이 있느냐 하면, 자기 힘으로 자기 죄 문제를 해결하고, 자기 인생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게 선악과 따먹은 티를 내는 것인데, ‘바르게 살면 되잖아, 착하게 살면 되잖아, 훌륭하게 살면 나중에 죽어서 천국 좋은 나라 갈 거야.’ 이게 바로 자기 문제를 자기가 해결하려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마귀와 한통속이 된 그러한 인간을 하나님이 자기 백성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제시한 것은 하나님의 희생입니다. “아이고, 인간아, 인간아! 죄 문제를 네가 해결한다고? 선악과 따먹은 그 죄를, 네가 행함으로 그걸 무효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나?”

인간의 죄는 자기가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어린 양의 희생, 그 희생을 반복하는 게 언약! 모세 언약, 모세 제사의 반복을 통해서 “너희들이 이 땅에 온 것은 희생의 능력과 덕분이라는 것, 죄는 그렇게 사해지는 거야.” 그걸 알려주기 위해서 진짜 살아계신 하나님이 바로 제사, 십자가 어린 양의 희생을 들이대는 겁니다.

신약에 와서도 마찬가지예요. 히브리서 10장 28-29절에서 사도가 얼마나 가슴 찢어지면서 진짜 호소하듯이 하시는 말씀, 그 내용에 그 절절함이 담겨있어요.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세 증인을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얼마나 크냐, 중하겠는가, 무겁겠는가, 이렇게 돼 있어요. 절절함이 되묻는 식으로 나오잖아요, 되묻는 식으로. 율법 지키는 것도 모세의 율법에 돌로 쳐 죽이게 되어있는데, 이것은 모세의 율법이 아니고 ‘예수님이 너를 천국에, 천국 사람으로 들여보내겠다.’ 하면서 제공된, 치러진, 희생이 치러진 그 예수님의 피, 아들의 피를 인간들은 평소에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했습니까?

그 피는 생각 안 하고 만만한 게 예수고, 만만한 게 삼위일체고, 만만한 게 하나님이고, 만만한 게 성령이에요. 종 부리듯이 부립니다. 한번 놀라운 기적을 베풀어 봐, 내가 복권 살 테니까 1등 한번 당첨 되게 해 봐, 한국팀하고 일본팀하고 축구하면 기도할 테니까 우리 대한민국 한번 이기게 해 봐, 우리 딸내미 서른 넘었는데 아직도 시집을 안 가고 있는데 좋은 남자 만나게 해 봐…, 이런 식으로요.

그러니까 가장 무서운 존재는 외부에 있는 게 아니고 내 내부에,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우습게 보는, ‘내 죄는 내가 알아서, 시건 있는 내가 알아서 한다’라는 이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그 인간을 망치는 가장 무서운 거예요, 무서운 거. 그리고 사사기 3장 7절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 목전에 악을 행하여 자기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바알들과 아세라들을 섬긴지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역시 우상을, 바알을 섬겨요. 백날 이야기해도 안 먹혀요. 사람은 말한다고 달라질 그런 종자가 아닙니다. ‘니 캐라.’ 이런 거예요. 성경에서 뭐라고 해도 안 들어요. 그래서 바알을 섬기고 하니까 그다음에 누구를 보내느냐? 메소포타미아 왕 –메소포타미아는 지금의 이라크죠- 그 왕 구산리사다임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쳐들어가게 만들어요. 누가? 시나리오대로.

사사기 3장 8절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그들을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의 손에 파셨으므로 이스라엘 자손이 구산 리사다임을 팔년을 섬겼더니.” 하나님께서 요이 땅, 준비 땅, 해서 쳐들어가게 만드니까 그들이 8년 동안 학대를 당하다가, 당하다가 도저히 못 참으니까, 여호와께 “하나님, 살려주세요.” 빕니다.

그다음에 사사기 3장 9-10절에 보니까,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한 구원자를 세워 구원하게 하시니 그는 곧 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이라 여호와의 신이 그에게 임하셨으므로 그가 이스라엘 사사가 되어 나가서 싸울 때에 여호와께서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을 그 손에 붙이시매 옷니엘의 손이 구산 리사다임을 이기니라.”

여호와의 신이 옷니엘에게 임하매, 여호와의 신이 임한 상태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산 리사다임으로부터, 메소포타미아 왕으로부터 구원했다고 되어있어요. 이게 반복돼요. 그런데 방금 한 이 사사기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이게 무엇의 반복이냐 하면, 애굽에서 바로 왕에게 학대받는 자를 주님께서 어린 양의 희생으로, 그 학대에서 벗어나게 해서 약속의 땅에 이끌었다는 출애굽의 원칙을 반복하는 거죠.

신약에 오게 되면, 이미 천국에 뿌리를 박은 사람은 희한하게도 뭐가 특이하냐 하면, 십자가만이 죄를 용서할 수 있다는, 희생의 피만이 용서할 수 있다는 이 사실을, 이 땅에 살아가면서 어떤 일이 일어나도 그것을 반복시킵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그거 다 아는 거, 지식으로 알아요.

지식으로 아는데, 실제 생활에서 진짜 난감한 일이 벌어졌을 때 성도 같으면 다시 한번 자신의 뿌리가 나한테 있지 않고 말씀에, 언약에 뿌리가 박혔다는 것을 반복하는데, 성도 같으면 이걸 반복하는데 이걸 반복하게 하는 분이 누구냐? 성령이에요. 하나님의 영이 그렇게 합니다.

작은 일에도 그래요. 애가 있는데 밤중에 에어컨을 20도로 틀어놔가지고 잠을 안 자네요. 내일 일 나가야 하는데 밤새 잠을 못 잤어요. 그럴 때 ‘하나님, 빨리 우리 아들 잠들어서 나 잠 좀 푹 자게 해달라’고 그렇게 기도할 수 있죠. 기도하니까 ‘애 잘 자고, 너 잠 잘 자게 해주면 너는 나한테 뭐 해줄래?’ 이렇게 하면 우리가 할 말이 없어요, 할 말이 없다고요.

이제 끝으로 시편 27편 13절을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산 자의 땅에 있음이여 여호와의 은혜 볼 것을 믿었도다.” 아…, 내가 그냥 땅이 아니고 무슨 땅? 이미 살아버린 땅에 뿌리를 박고 있으니, 지금은 내가 철딱서니도 하나도 없고 매사에 내 중심으로 살아가도 그러나 하나님의 영이 시편 27편 13절을 기억하게 하니까, ‘참 내! 이 뿌리가 사람 사는 동네 대한민국이 아니고, 이 뿌리가 산 자의 땅, 죽어도 사는 땅에 있구나.’ 하는 것을 인생이 어려울 때마다 새록새록 생각하게 하는 거예요.

시편 17편 15절에 보면,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보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만족, 만족한다. 야…, 내 인생 잘 사는 것으로 만족할 게 아니라 ‘주께서 이미 나를 천국에 심어놓았기에 그 산 자의 땅에서 결국은 주님의 영광스러운 얼굴을 볼 수 있게 된 이걸 생각할 때 나는 이 땅의 험한 지옥 같은 세상에 살면서도, 애굽같은 세상에 살면서도 수시로 저는 만족합니다’라는 이 고백, 이 고백만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하나님을 만족케 하는 참된 성도의 놀라운 모습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습니까. 아쉽고 어려울 때는 하나님 찾고 좀 편하다 싶으면 또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가는 그 짓을, 이미 구약 이스라엘이 다 했다는 것을 되돌아보면서 주님의 죄용서가 우리 힘으로 되지 않는다는 이 놀라운 것에 늘 만족하고 감사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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