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

나의 상실이야. 같이 상실해.

아빠와 함께 2026. 4. 28. 19:34

여기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라고 언급한 것은, 지금 계속해서 야고보서 1장 1절에 나오는 것처럼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 해당되는 형제들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 말은, 구약 이스라엘에 하나님께서 설정해 놓은 형태, 구조, 체제 그것이 신약에 와서 여전히 유지가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신약에 와서 완성이 되었다고 할 수 있겠죠.
‘형제들아’라고 이야기하는데 당부하는 그 내용은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너희들이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을 때는 반드시 사명감을 품고 이야기하라’는 겁니다.  
야고보서 1장 20절에 보면,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라고 되어 있어요. 성도의 특징은 뭐냐? 하나님의 의가 꽂혀있는 사람이에요. ‘자신의 의로는 천국 가지 못하고 하나님의 의로만 갑니다’라는 그 사명감을 품고 말을 건네는 거죠.

인간들이 주고받는 모든 대화는 뭡니까? 자기 분노에 대한 폭발이에요. 그렇게 분한 이유도 모르면서 왜 분을 품고 발산하는지요.
이유는 단 한 가지입니다. 상실이 되지 않아서 그래요. 이스라엘 백성들 형태, 구조는 뭐냐? 애굽에서 나올 때 그들은 자신의 터전을 상실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막힌 바다 홍해를 통과할 때는 자기의 목숨마저 그 바다 앞에서 상실했습니다. 그리고 광야를 통과할 때도 그들은 자기가 스스로 생계를 유지하는 모든 아이디어와 방법을 발휘할 수 없었습니다, 상실했습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상실하지 않으면 약속의 땅에 도달하지 못한다.’ 그것을 가르치기 위해서 40년 동안 홍해 건너온 사람 다 죽였어요. 자기의 상실을 인정하는 갈렙과 여호수아 빼놓고 다 죽었습니다. 이 땅에 인간이 태어난 것에 대해서 성경의 근본은 이겁니다. ‘모든 인간은 저주 안에서 출생했습니다.’ 이겁니다.
하나님 사람과 하나님 사람이 아닌 자를 하나님 쪽에서 구별해 내기 때문에 그 작업 때문에 발생된 것이 화냄이고 분노에요. 이런 차별의 이유는 히브리인들도 모르고 바로 왕도 몰라요. 왜냐하면 인간이 성내는 근원은 사탄이었습니다. 여호수아가 깨끗하게 된 것은 누구의 조치냐 하면, 여호와 하나님의 조치에요. 일방적인 하나님의 조치란 말이죠. 하나님이 그런 조치를 하는 것은, 사탄의 지배 아래에 있는 인간하나님의 지배 아래 있는 택하신 자, 죄 사함을 받는 인간과 이 땅을 통해 벌써 구별하기 위해 한 것이고, 그 구별에 의해서 그 구별을 모르는 바로 왕은 씩씩 성을 내고 있는 거예요.
스가랴 3장 2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이 책망 당함에 대한 분노. 모든 인간의 마음속에 사탄의 마음이 들어와서 이유도 모르는 채 분노하고 있는 거예요.  
주님은 말합니다. “난 너를 책망하노라.” “책망하든 말든 나는 나를 상실하지 않겠습니다. 끝까지 붙들고 지옥 가도 나는 나를 내 것으로 간주하고 지옥 가겠습니다.” 이게 인간의 고집이 아니고 그 사람 속 마귀의 고집이에요, 마귀의 고집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이 대처하는 방법은, 하나님이 스스로 상실해 버려요.
어떻게 상실하느냐? 하나님께서 친히 만드신 이 대자연, 이 현실 자체를 자기 손으로 허물어 버리십니다. 하늘과 땅 모든 것을 허물어 버릴 때…, 하나님이 자기 스스로 만든 거거든요, 자기 의미를 줘서 만든 걸 스스로 뭉개버리죠. 그 하나님의 자기 상실에 동참하는 사람이 바로 성도입니다. 참, 이게 인간의 힘으로는 안 되죠.
“교회 왜 못 나오십니까?” “내 일이 바빠서.” 상실이 안 되어 있어요. 상실이 안 되어 있다고요. 오늘날 교회에서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지옥 가는 자들의 고백이 교회에 가득 차 있어요. ‘반듯하게 살고 말씀대로 다 살고, 믿으라고 하는 것은 다 믿고, 십자가 믿고 복음 믿고 피 믿고 삼위일체 믿고 다 믿을 테니까 제발 내 인생은 끝까지 내겁니다. 하나님이 하라는 대로 다 할 테니까 내 인생은 내가 끝까지 쥐고 가겠습니다.’ 그 사람은 하나님이 요구하는 말씀, 율법의 요구에, 그 채무에 시달리는 신세가 됩니다. 최선을 다했잖아요

 

이스라엘의 특이성은  하나님이 하나님의 이름과 상대해서 모든 일을 끝낸다는 것, 이게 특이성이에요. 인간은 빠져요. 인간은 빠지고 하나님의 이름이 이스라엘과 함께 다닙니다. 이스라엘 속에 있으면서 모든 일을 하나님과 하나님의 이름 사이에서 처리하는 그 특이성, 그 특이성이 동원되는데 그 특이성의 이유가 뭐냐?
선악과나무가 훼손되었잖아요. 선악과의 가치가 상실되었다고요. 생명나무는 선악과와 함께 있을 때 온전함이 되고 완료함이 되기 때문에, 생명나무에서 나오는 피가 선악과의 ‘정녕 죽으리라’의 그 가치를 온전하게 성취를 시켜요. 생명나무 대신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선악과의 훼손으로 인하여 발생된 그 ‘정녕 죽으리라’의 진짜 취지를, 곧 십자가에서 “하나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자기의 생명을 버림으로써, 선악과가 지니고 있는 죽음의 수준이 인간이 감당할 수준이 아니라는 것을 몸소 보여준 거예요.
사람이 죽었다가 부활한다는 거예요. 성경에 그런 게 없습니다. 인간은 죽을 줄도 모르고, 인간에게는 죽음이 없어요. 유일하게 예수님이 죽음을 알고요, 아버지와의 관계가 끊어졌으니까. 예수님이 죽고 난 뒤에 부활하시면 거기에 부활 필드 field가 생겨요. 부활 장(場)이 되는 거예요. 물리학적으로 전기장이 생기듯이 필드가 생기면 그 부활 장에서 성령이 나와서 그 성령을 받은 자만이 십자가에 영원히 안착하게 됩니다.

‘부활에서 십자가’로 가는 거예요. 그래서 갈라디아서 6장 14절이 성립되는 겁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내가 지금 있는 곳이, 십자가 안에 영원히 들어와 있다는 거예요. 이걸 요한계시록으로 설명하면,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보좌 안에 영원히 있다(계 22:1-3)는 거예요. 따라서 ‘부활이 먼저고 십자가가 나중’이 되는 겁니다, 성도에게만! 죽고 난 뒤에 부활되는 것은 예수님에게만 국한되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피를 보내요. 생명나무에서 피를 짜내요. 피를 짜내서 선악과 따먹은 현장을 찾아간다고요. 그게 요한복음 14장 6절에 나오는,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아버지께로 가기 전에 먼저 주님께서, 아버지 계신 곳에 계셨던 분이 먼저 끈을 들고 이 생명이 없고 진리가 없고 길이 없는 이곳에, 선악과를 따먹은 저주만 있는 이 어둠의 세계에 끈을 들고 레펠 타듯이 이 땅에 오셨어요. 그리고 제자들에게 말합니다. “나를 말미암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자가 없다. 너희는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게 하나도 없다. 너희들의 하나님은 마귀가 심어준 거짓 하나님이다.”
진리가 너희 속에 없다는 말입니다. 진리가 없으니까 이 세상에는 어둡고 거짓된 것만 있어요. 그러면 여기서도 차별화가 되죠? 요한복음 8장 32절에,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이것은 뭐냐 하면, 모든 것을 상실하러 오신 예수님의 상실 안에서, 그 진리 안에서 진리에 압류당한 사람, 내가 뭘 잃어버린 게 아니고 잃어버림이 나를 덮칠 때 비로소 우리는 자유를 느끼는 거예요.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니까요. 내가 자유를 원해서가 아니라, 자유가 자유를 원하니까 주님 안에서 우리는 비로소 잃을 것이 없는, 바로 그 진리 안에서 우리는 비로소 자유를 만끽하는 거예요. 이게 얼마나 편한 생활이고, 얼마나 복이고, 얼마나 감사한지!
더 이상 나라고 나에게 질문할 대상 자체가 없어진 나, 질문을 해도 주님이 하고, 말을 해도 주님께서 말을 하는 그런 나. 더 이상 압류당한 상태에서 내 계획은 없어요, 주님의 계획만 남아 있는 나.

책망은 사탄에게 집중되어 있습니다. 사탄과 그 똘마니들에게 집중되어 있어요. 생명나무에서 피가 내려오는데, 그 피가 십자가에서 선악으로 저주받은 세상에 왔다가 그 피의 효과가 새 언약이라는 이름으로 하나님의 계약이 끝났어요, 완료가 됐어요. 다 이루었습니다. 그 피는 다시 하나님에게 돌아가게 되어 있어요. 이게 피의 내부 순환구조입니다. 우리는 그 피의 내부 순환구조에 걸려들었어요.

우리 성도는 뭐냐? 피가 주께로 돌아가는 피의 배수구에요.
늘 막혀 있잖아요. 막혀 있으니까 우리 속에 무엇이 피를 막고 있는 그것을 상실시키면서 다 끄집어내서 옆에 무더기로 모아둬요. 모아두는 그 내용이 뭐냐?  돈 문제, 경제문제에요. 그다음에 하나님의 기적을 바라는 요행 문제입니다. 행운 문제, 나 행복하게 해달라는 요행 문제. 세 번째가 뭐냐? 먹고 마시는 그것으로는 사람들이 성이 안 차지요? 세상 부귀영화. 그것으로 혈관이 막히면 안 되잖아요. 피가 막히면 안 됩니다. 날마다 성령께서 배수구 뚫어내느라 맨날 우리의 남은 인생을 통해서 배설물이 나옵니다.
이게 바로 그동안 피라는 것을 막아 놓았던 오물들이고, 이 오물들이 우리를 매일 같이 잠복적인 분노와 화를 돋우게 했어요.  

주님께서 피의 순환구조를 통해서 그 여파로 천국과 지옥이 만들어졌는데 그 이유가 뭐냐? 지옥이라는 것은, 주님께서 자기를 상실하고 자기 피까지 상실한 그 비용 처리가 지옥이에요. 아들의 피를 낸 그 생명, 그 값을 어디서 찾는가? 지옥의 저주 불로 다 찾아내요, 지옥의 저주 불로. 그 내용이 마태복음 10장에 한가득 들어 있는데요, ” 흩어진 열두 지파, 옛날 이스라엘과 같은 구조가 유지되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당했던 수난을 똑같이 당해요.
“ 너희를 넘겨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치 말라 그 때에 무슨 말 할 것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그러고 난 뒤에 하시는 말씀이 28절에,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계산 잘해라, 그 말이지요, 계산 잘해라. 주께서 자기 십자가 비용을 지옥에 있는 사람들에게 다 물어내게 만든다는 그 말이지요, 저주로써. 피가 내부순환구조로 이 땅을 다녀갔으니까요.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마 10:36-38). “값 물어내. 내가 죽은 그 값 물어내. 내 아들 죽인 그 값 물어내”라는 겁니다.

이 세상에 복음은 피밖에 없어요. 피의 내부순환구조, 그게 피입니다. 새사람, 아담의 몸에 속하지 않고 이제 그리스도 몸에 속한 사람은 피가 들어 있는, 피에서 흐르는 그 생명을 빨판으로 빨면서 살아가요. 시므온은 그게 만족스러워요. 그게 특이성이에요. 사람의 능력을 초과하는 능력이에요. 시므온 같은 사람은 그래요. 왜? 성령 받았으니까.
여러분도 성령 받았습니까? 여러분이 성령 받았으면 여러분이 가져야 할 평소의 마음 자세나 고백시편 131편을 통해서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치 아니하고 내 눈이 높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미치지 못할 기이한 일을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쉽게 말하면 주께서 힘쓰지 않는다는 말이에요. “…실로 내가 내 심령으로…” 마음이 어떠냐 하는 그 말입니다.
내 심령은 “…고요하고 평온케 하기를 젖뗀 아이가 그 어미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중심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나는 그냥 아이가 아니고, 착한 아이가 아니고 엄마의 푸근한 품 안에 있는 아이, 모든 것을 차압당하고 압류당한 아이, 생명이 끊임없이 무한대로 나오는 그 품의 아이,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찌어다.”

주님께서 이 땅에 차이를 만드십니다. 이 땅의 혼돈에서 벗어나서 완료된 질서, 바로 최고 등급의 마지막 질서를 위해서 이 땅에 극심한 차별을 만드는데 그 차별에서 생산되는 것이 바로 맏이라는 열매입니다. 출애굽기 11장 5-7절에 “애굽 가운데 처음 난 것은 위에 앉은 바로의 장자로부터 맷돌 뒤에 있는 여종의 장자까지와…” 숨을 곳이 없다는 말이거든요.  그러면 성도는 뭐냐? 지옥을 잃어버리고 대신 천국을 얻은 자가 성도입니다. “이 세상이 네가 있을 곳이 아니야. 빨리 떠날 생각 해야지! 하늘의 별? 그거 다 무너져. 그것은 하나님, 나의 상실이야. 같이 상실해.”

‘나는 저주받는데 너는 뭔데 복을 받는가?’ 복을 받을 이유는 없어요. 그냥 복 받았어요. 자기는 그냥 저주에요. 이게 뭐냐? 피 값이 어느 정도로 효과 있고 어떤 혜택이 주어지고, 어떤 저주가 주어지는가를 피 자체에서 나오는…, 피가 생명이니까 생명 자체에서 나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인간들은 거기에 동원된 것뿐입니다.

이제 우리가 성도로서 어떻게 살아가는가? 늘 우는소리 하면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늘 우는 소리. 외부적으로는 우는소리를 하시고요, 내부적으로는 그 절망을 즐기세요. 그 절망을 즐기면 돼요.  늘 우는 소리를 해요. 우리 애는 공부도 못하고, 돈도 지질이도 없고, 몸은 어디 안 아픈 데가 없고, 종합병원이고…, 라는 말을 즐겁게 자유롭게 할 수 있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사세요. 이런 말이 주저 없이 나올 수 있는 것, 절망을 즐길 수 있는 자유, 주님 주신 복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은혜, 혜택, 도대체 말로 감당할 수 없는 큰 은혜 주셨는데 이제 우리는 말을 끄집어낼 때마다 늘 우는소리 하면서 주님 거저 주신 긍휼을 찬미하는 말을 하게 해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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