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림받은 자의 활용성
2026년 4월 19일 본문 말씀: 야고보서 1:25-27
(1:25)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 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1:26)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1:27)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옛날 이스라엘이 처음 생겼을 때, 하나님께서는 출애굽 정신에 입각해서 율법을 시내산을 통해서 주셨습니다.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이었었음이니라 너는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 네가 만일 그들을 해롭게 하므로 그들이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반드시 그 부르짖음을 들을지라 나의 노가 맹렬하므로 내가 칼로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 아내는 과부가 되고 너희 자녀는 고아가 되리라”(출 22:21-24)
하나님께서는 수시로 이스라엘 민족 내에 가난한 사람들은 발생시켰습니다.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경내 네 형제의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신 15:11) 전쟁의 여파로 가장이 죽거나 남은 식구가 노동을 못하게 될 때에 가정은 가난하게 될 뿐입니다.
이럴 때 타인이나 스스로 생각해보면서 자신이 세상에서 버림받았다는 의식이 들겁니다. 버림받은 자의 특징은 뭔가 내놓을 만한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이라는 약속 외에 말입니다. 더는 버틸 수 없는 지경입니다.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이런 결손된 가정을 일으켜서 이스라엘 자체가 출애굽때에 나오는 정신을 유지하고 있는지를 살피십니다.
이스라엘이 ‘버림받았다’는 의식이 사라지면 하나님의 약속도 같이 사라집니다. 그러면 이 민족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이스라엘이 아니라 이방민족과 다를 바 없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동원시켜 수시로 고아와 과부를 돌보아주라고 당부하십니다. “배부르게 하라”(신 14:29)
“절기 때에는 꼭 참석시켜라”(신 16:14), “3년마다 내는 십일조는 그들에게 주어라”(신 26:12) 그리고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것을 율법으로 명시화시킵니다. “객이나 고아나 과부의 송사를 억울케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신 27:19)
이처럼 하나님께서 유독 이스라엘에게만 율법을 주시면서 율법이 자아내는 환경까지 형성되게 하셨습니다. 율법이 모세를 통해서 처음 주어질 때의 분위기는 이러합니다.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을 산 위 불 가운데, 구름 가운데, 흑암 가운데서 큰 음성으로 너희 총회에 이르신 후에 더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그것을 두 돌판에 써서 내게 주셨느니라
산이 불에 타며 캄캄한 가운데서 나오는 그 소리를 너희가 듣고 너희 지파의 두령과 장로들이 내게 나아와 말하되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영광과 위엄을 우리에게 보이시매 불 가운데서 나오는 음성을 우리가 들었고 하나님이 사람과 말씀하시되 그 사람이 생존하는 것을 오늘날 우리가 보았나이다
이제 우리가 죽을 까닭이 무엇이니이까 이 큰 불이 우리를 삼킬 것이요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음성을 다시 들으면 죽을 것이라 무릇 육신을 가진 자가 우리처럼 사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불 가운데서 발함을 듣고 생존한 자가 누구니이까”(신 5:22-26) 즉 이스라엘이 율법을 받았다고 해서 ‘안 버림받은 자’가 아니라 유일하게 인간들 모두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아 마땅하며 지옥으로 버려주시는 하나님의 조치는 정당하다는 사실을 아는 자들이 된 것입니다.
바로 이 율법 정신이 고아와 과부의 발생이라는 증상을 낳게 한 겁니다. 이 율법의 취지는 예수님에 와서 그 취지가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이는 인간 언어의 해상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명확하게 하는 데 있어 아무런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구제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언질을 주십니다.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마 6:3)
이런 주님의 말씀대로 구제가 되지를 못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인간 속에 귀신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마 17:18 “귀신이 나가고”) 즉 ‘인간-하나님’ 식이 연결이 아니라 ‘인간-귀신-하나님’연결입니다. 귀신이 들어간 상태에서 인간은 태어나기에 그 모든 인간들은 태어나면서 믿음을 갖고 태어납니다. 귀신의 신앙으로 무장된 채 말입니다.
이 세속적 신앙으로 인해 인간은 귀신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들은 항상 인간편을 들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꾸준히 내 편을 들 듯이 말입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다음과 같습니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즉 율법이 주어진 것은 이미 하나님께 버림받은 처지에 있음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입니다. 율법에서의 자유란 온전한 율법 완성으로만 가능합니다. 율법 완성이란 제대로 율법의 취지를 알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 베드로는 바로 이 주제를 설교합니다.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치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셨으니 주의 앞에서 나로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리로다 하였으니 형제들아 내가 조상 다윗에 대하여 담대히 말할 수 있노니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행 2:27-29)
비록 다윗이 선지자로서 예언의 말씀을 남기지만 그 말씀의 성취자는 다윗이 아니라 예수님이십니다. 왜냐하면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묘가 오늘까지 있으니까’ 말입니다. 반면에 예수님의 무덤은 육신이 없는 빈 무덤입니다. 로마서 8:7-8에서는 이렇게 결론 짓습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고아와 과부는 바로 이 육신의 가족 단위에 궐이 생긴 자들입니다. 그런데 그런 자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그저 주신이 은혜를 나타냅니다. 그것이 궐(누락된 지점)에 신랑으로 찾아오신 하나님이 되시기 위함입니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뇨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마 9:15)
즉 오늘날 고아와 과부는 자신의 행함도 노력으로 율법을 지키려는 자가 아니라 율법이 온전하게 된 그 복음을 내어놓는 자들을 말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갈 2:21)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께서 먼저 죽으심으로 마땅히 우리가 버림받는 자로 드러나게 됨을 감사하게 하옵소서. 나의 일함이 아니라 내 안에 주님의 일하심을 드러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0강-야고보서 1장 25-27절(버림받은 자의 활용성) 260419-이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야고보서 1장 25-27절입니다.
야고보서 1:25-27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야고보 사도는 계속해서 ‘흩어진 12지파에게만’ 문안합니다. 구약적인 체제, 구약에 있었던 그 약속이 지금도 소멸되지 않고, 비록 흩어져 있지만,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12지파지만 이스라엘에 찾아왔던 하나님의 원칙은 완성된 형식으로 계속해서 그대로 성도에게 주어진다는 것을 야고보서를 통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특히 율법이 지금도 작용하고 있는데 그 율법은 옛날 구약 때의 율법이 아니라, 오늘 본문 25절에 보면 ‘온전한 율법’이라고 돼 있어요. 그 온전한 율법을 야고보는 복음이라고 봅니다. 율법이 주어진 것에 의미를 두고 그 율법을 온전하게 했을 때 그게 복음이 되는데, 25절에 보면 그 율법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이라고 되어 있어요.
‘율법이 우리에게 자유를 준다? 어떻게 주지?’ 옛날 구약의 이스라엘 사람들, 그들도 율법을 받았는데 그들은 그 율법을 통해서 온전한 자유를 누리지를 못했어요. 율법에 늘 주눅 들고, 지쳐 있다고나 할까요? 율법의 압박에 몸들 바를 몰랐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지킬 수 있는 재량이나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망했거든요. 이스라엘이 흩어졌어요.
그런데 신약에서는, ‘율법은 율법대로 살아 있지만 온전한 율법체로 살아 있으면서 그 온전한 율법체가 우리에게 자유를 주었다’는 거예요. 자유를 주었다는 상태, 어떤 상태를 가지고 자유를 주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율법을 가지고 자유가 없던 경우를 대비해서 보면 알 수 있겠죠. 율법이 주어졌을 때 그 율법에 대해서 자유가 없었던 그런 시절이 있었습니다.
신명기 5장 22-27절에 보면, 거기에 두 부류가 나타나는데 한쪽은 모세가 나타나요. 모세가 불붙은 산 위에 있었을 때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견뎌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견뎌냈어요. 율법이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것도 불 속에서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멀쩡했어요. 그런데 모세 말고 모세의 말을 듣는 산밑의 백성들은 그 율법에 대해서 감당을 못했어요.
모세는 시내산에 올라가고 그 모세가 없었을 때의 이스라엘 집단이 있었죠. 모세는 산에 홀로 갔으니까, 모세가 그들에게 없었을 때가 있었는데 그 모세가 산에서 율법을 들고 왔어요. 모세가 돌판을 들고 산에서 내려왔을 그때 그 전경입니다. 신명기 5장 23절입니다. “산이 불에 타며 캄캄한 가운데서 나오는 그 소리를 너희가 듣고 너희 지파의 두령과 장로들이 내게 나아와.”
배경은 아주 무시무시합니다. 무시무시한데 그들이 말하기를 24절에, “말하되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영광과 위엄을 우리에게 보이시매 불 가운데서 나오는 음성을 우리가 들었고 하나님이 사람과 말씀하시되 그 사람이 생존하는 것을 오늘날 우리가 보았나이다.”
‘말씀을 전하는 자 모세가 생존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봤습니다.’ 모세는 생존했어요. 불 속에서, 화산 속에서 나왔으니까요. 어떻게 사람이 불 속에서 나옵니까? 그런데 나왔거든요. 어떻게? 말씀과 더불어 나왔다 그 말이지요. 그렇게 나왔는데 ‘우리는 그 정도는 아니다’라는 거죠. 25절에 “이제 우리가 죽을 까닭이 무엇이니이까…”
‘왜 이제 와서 말씀을 가지고 우리를 죽이려 하십니까?’ 그 말이에요. “…이 큰불이 우리를 삼킬 것이요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음성을 다시 들으면 죽을 것이라.”
‘불은 여호와의 음성과 함께 있고 율법과 함께 있는데, 그 율법이 동원되면 함께 있는 그 불이 우리에게 덮칠 것이고 우리는 그 불에 삼켜져서 죽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장로들은 이런 결론을 내려요. 26절에, “무릇 육신을 가진 자가 우리처럼 사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불 가운데서 발함을 듣고 생존한 자가 누구니이까.”
곧 ‘육신을 가진 자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 죽는다. 육신을 가진 자로서 하나님의 율법을 보는 자는 다 죽는다. 그런데 모세는 안 죽었다. 도대체 왜 우리는 죽고, 모세는 40일 동안 하나님의 불 속에 있으면서도 살았느냐?’ 이게 율법이 등장하는 그 현장에 있었던 팩트, 사실입니다.
자유가 뭘까? 온전한 율법이 우리에게 자유를 준다는 말은, 바로 율법 앞에서 우리 모두가 죽음에서 벗어날 수 없는 자라는 것, 죽을 자라는 결론을 율법이 미리 챙겨서 우리에게 나타난 거예요. “율법 줄게 제발 죽어줘!” 이 말이에요. “이 성경 말씀을 줄 테니까 말씀 앞에서 좀 죽어. 좀 죽으란 말이야. 자꾸 율법 지키려고 하지 말고 그냥 죽어버려! 살았다고 이야기하지 말고.”
율법이 없을 때는, 하나님 말씀이 없을 때는 살아 있는 것이 맞아요. 왜? 인간과 인간끼리 비교하니까 ‘너 살아 있네, 나도 살아 있네. 그러면 우리 모두가 살아 있네.’ 거기에 대해서 아무 하자가 없고 그게 정답인 줄 알았어요. 그러나 난데없이 율법이 개입되니까, 율법과 함께 있던 모세는 살았지만 우리는 죽어 있다는, 죽게 된다는 사실을 발견한 겁니다.
이 지구에 인간끼리 있을 때 다들 살아 있죠. 그런데 만약에 외계인이 나타났다. 머리가 이상하게 생긴 외계인이 나타났을 때, 이상한 방사능에 쏘이면 다 죽잖아요. 그럴 때 사람들 앞에서는 살아있는 것이 맞는데, 하나님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 율법 앞에서는 모든 인간은 모세 빼놓고 다 죽었다 이 말이에요.
다시 말해서 모세가 율법을 들고 온 것은 살았다는 그 구라, 그 거짓말에 네가 그동안 속아 넘어갔다는 거예요. “너 안 살았어. 너는 지금 죽어가고 있어. 거기에 대해서 네가 뭐 할 말이 있어? 네가 거기에 이의를 걸 수 있어?” 여러분, 우리가 이의를 걸 수 있습니까? 안 죽을 재주 있는 사람이 있어요? 죽는 것까지는 너무 멀고요, ‘10년 전과 나는 똑같다’ 하는 사람이 있어요?
뭔가 늙어가고 있죠. 늙어간다는 말은 뭔 뜻입니까? 죽어가고 있잖아요. 왜 죽는데요? 왜 늙지요? 왜 아프지요? 20대에는 일 좀 해도 안 피곤한데 40대 넘어서는, 일하면 피곤하죠. 왜 피곤하지요? 거기에 대한 어떤 해답이 있습니까? 죽음이라는 게 우리보다 더 세요. 죽음 안에 갇혀 있기 때문에 우리가 아무리 거기서 애쓰고 몸부림쳐도 죽음한테는 꼼짝도 못 하고 죽음 안에 갇혀 있는 꼴이 자유가 없는 겁니다.
율법이 주어진 것은 죽음에 갇혀 있는 너를 죽음에서 빼내 주겠다는, 자유를 주겠다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내가 죽어 마땅하다는 것, 죽기 위해서 태어났다는 것을 인정하면 되는 거죠. 그런데 그냥 율법은 ‘너는 죽어야 된다.’ 이거잖아요. 온전한 율법, 다시 말해서 복음은 ‘죽어야 마땅하다’로 멈추는 게 아니에요. ‘지옥에 가야 마땅합니다’로 그 의미가 확장됩니다. 신약에 와서의 이 온전한 율법은 ‘지옥 가야 마땅하다’로 의미가 확장돼요.
그러면 이것을 소급해서 다시 모세의 율법에 넣어버리면, 모세의 율법은 단순히 늙어 죽는 데서 멈추는 것이 아니고, ‘너는 율법을 위반한 죄로 말미암아 죽어 마땅함’을 알려주기 위해서 이 온전한 율법, 복음, 신약 성경의 말씀, 곧 구약의 율법과 복음을 우리에게 주신 겁니다. 우리로 하여금, 할 말을 잃게 만들어요, 할 말을!
지금 사도가 우리한테 말을 거는 그 대화 내용이요, 세상에서 흔히들 나누는 인간 대 인간의 그 대화 내용하고 달라요. 인간들이 말을 하지만 그 언어의 해상도는 인식의 해상도보다 낮습니다. 상대방에게 내 감정을 전달하는데 동원되는 모든 단어, 단어를 수십 개 던져도 ‘진정 네가 내 마음을 알겠나?’ 언어를 동원했는데도 내 심정은 전달이 안 돼요.
해상도가 달라서 그래요. 인간 인식의 해상도는 주님의 해상도하고 연결이 안 됩니다. 아예 연결이 안 돼요. 인간은 죽음에 갇혀 있으니까요. 예수님께서 활동하시면서 그런 경우가 많이 나왔는데, 한 가지 예가 마태복음 17장에 나옵니다. 어떤 아들이 간질로 발작하고 고생합니다. 불에도 넘어지고, 물에도 넘어지고 정신없이 설쳐대니까 그의 아버지가 예수님의 제자들한테 먼저 고쳐달라 했는데 제자들이 못 고쳤어요.
그래서 그 아버지가 직접 예수님한테 와서 고쳐달라 했습니다. 17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그를 이리로 데려오라.”
아들도 문제고, 그 아버지도 문제고, 제자들도 문제고 예수님 빼놓고는 다 문제예요. 18절에, “이에 예수께서 꾸짖으시니 귀신이 나가고 아이가 그때부터 나으니라.” 이게 무슨 말이냐? ‘아이가 병에서 나았다’가 아니라, 귀신이 나간 거예요. 인간들은 ‘나 여기 있다, 하나님 저기 있다. 내가 율법 지키고 말씀 지킬게.’ 이렇게 되잖아요.
그게 바로 마귀한테 속은 거예요. ‘나 있다-귀신 있다-귀신이 있는 나가 하나님께 나가는데 하나님께서 거절했다.’ 이 말입니다.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귀신이 있어요. 귀신이 있다고요. 야고보서 2장 19절에 보면,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어떤 믿음이 있는데 어떤 믿음이냐? ‘내 속에 귀신 없다.’ 이걸 믿어요. ‘나는 내가 행한 대로 어떤 결과를 낳을 것이다.’ 이걸 믿고 태어난다고요. 인간은 믿음 없는 인간이 없어요. 다 믿어요. ‘나는 내가 아는 내 믿음으로 이 성경 말씀을 지킬 수 있다’라는 그 믿음은, 귀신이 준 믿음이에요. 귀신이 준 믿음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겁니다.
‘내 안에 귀신이 있네.’ 특수한 주님의 믿음이 왔을 때나 이게 밝혀져서 귀신이 떠나면서, ‘이제 더이상은 못 붙잡고 있겠네.’ 이렇게 떠나면서 하는 고백이고, 내 속에 귀신이 있음을 경험하거나 체험하지 못한 사람은 그냥 악바리같이 열심히 이 성경 말씀을 지키려고 해요. 교회 나와서 지키면서 할 수 있는 것 다 하려고 합니다.
이걸 오늘 본문 야고보서 1장 27절에 뭐라고 하느냐 하면, ‘세속에 물들었다’고 되어 있어요. 세속에 물든 거예요. 교회라는 이름의 세속에 물든 겁니다. ‘교회 나오면 신앙이 있는 것이고, 교회 안 나오면 신앙 없다’고 생각하는데, 인간에게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타고났습니다. 마귀 말이라면 죽자 하고 엎드려서 복종하는 그 믿음을, 그 신앙을 타고났어요.
참, 인간은 이상한 공통점을 보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편 못 들어서 아주 환장을 했어요. 자꾸 인간이 인간 편을 들어요. 사람 편을 든다고요. ‘왜 전쟁하면서 사람을 학살하느냐?’ 이 발언은 뭐예요? 왜 사람이 사람 편을 들어요? 왜 사람이 사람 편을 듭니까? 그게 세속에 물든 경건이에요. 왜 사람이 사람 편을 드느냐 하면, 내 안에 마귀가 들어 있으니까 자꾸 내 편을 들어요. 내가 내 편을 드는 거예요.
내가 나를 위로하지 않으면 누가 위로해요? 여러분이 위로합니까? 그것은 윤복희나 이야기하는 거예요. 여러분이 우리 위로 안 해줘요. 마지막 위로자는 나입니다. 내가 나를 위로해요. 왜? 내 안에 귀신 들었거든요. 신약에서는 죽는 정도가 아니고 지옥 가야 된다는, 아주 정확한 직격탄의 이야기가 요한복음 14장 6절에 나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나로 말지 않고서는 아버지께로 갈 자가 없다’는 거예요. 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버지께로 갈 자가 없다. 끝났어요. 교회고, 집사고, 장로고, 목사고 뭐고, 다 끝났어요. 우리는 버리운 자입니다. 버림을 당한 자예요. 우리는 버림받은 자의 동기 동창들이에요. 그러니까 서로가 서로를 편드는 거예요. ‘전쟁할 때 살살 봐주면서 하자.’ 봐주면서 하는 전쟁이 어디 있어요? 인권 같은 소리하고 있네. 인간의 권리는 이게 귀신의 권리예요.
저는 경건이라고 딱 생각하면, 바로 귀신이 믿는 하나님 있잖아요, 하나님 한 분 계시다고 믿으면서 벌벌 떠는 그 믿음, 그 귀신의 믿음으로 경건 생활하는 사람이 딱 떠올라요. 1962년에 태어나서 2010년에 대장암으로 죽었던 사람이 있습니다. 이태석 신부, 그 사제. 그 사람에 관한 영화 <울지 마 톤즈>(Don't Cry for Me Sudan, 2010), 2시간 가까이 되는데 참고, 꾹 참고 다 봤어요.
어릴 때부터 마음이 너무 착해요. 거지가 있으면 엄마한테 바늘과 실을 달라고 해서, 거지 옷을 꿰매주는 선한 성품을 가진 아이였어요. 천주교 가정에 태어났기 때문에 항상 주의 길을 따라야 한다는 것, 주의 십자가를 따라야 한다는 것을 어릴 때부터 마음에 새기면서 컸어요. 그가 커서 의사가 되었습니다.
그 집이 9남매나 되는 데 집안에 의사 하나 나오니까 가정의 기둥이잖아요. 돈 잘 버는 의사가 되었으니 다 자기만 쳐다보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갑자기 남수단에 간다고 한 거예요. 원주민끼리 전쟁이 일어나서 나라가 엉망인 곳이지요. 나라도 없고 저희끼리 싸우는 전쟁통에 갔어요. 거기서 병원 세웁니다. 그리고 주님께 물었답니다. “학교 세울까요, 먼저 성당 세울까요?” “학교 세워라.” 그래서 성당보다 학교를 먼저 세웠어요.
그렇게 사회 활동하고, 삶의 환경 바꾸고, 한국과 연락하면서 많은 물자를 가져와서 그 톤즈라는 남수단에서 온갖 활동을 하고, 문둥병자도 고치고 다 했어요. 그러면서 본인은 고백합니다. ‘내가 왜 이곳까지 오게 되었는지 나는 모르겠다’는 거예요. 모를 수밖에 없죠. 평생 복음을 들어본 적이 없어요. 천주교 사제까지 되고, 신학 공부까지 다 했지만 복음을 들어본 적이 없어요.
복음이 이겁니다. 복음은, 사람이 죽는 이유는 예수님이 먼저 죽었기 때문에 사람이 죽는 거예요. 예수님이 왜 죽었습니까, 십자가에서? 죄 때문에 죽었잖아요. 그러면, 그러면 왜 우리가 복음을 알게 되었고, 왜 우리가 성도 되었는가? 자기 죄를, 아담의 죄를 알기 위해서 성도가 된 거예요.
이게 뭐 어렵습니까? 아, 이게 어렵구나. 이게, 이게 진짜 어렵구나. 인간이 자기 죄를 아는 걸 목표로 삼으면요, 모든 것에서부터 자유입니다. 모든 것에서부터 자유예요. 온전한 율법은 우리를 죽은 자로 보는 거예요. 버림받은 자로 보는 겁니다. 그 구약 이스라엘 틀 안에서, 구조 안에서 - 항상 야고보서는 흩어진 12 지파의 연속성이니까 – 야고보서가 이스라엘 구조 안에서 언급하는 것은 뭐냐?
고아와 과부에 대한 구약 성경의 율법의 그 취지를 야고보서는 계속해서 이어가고 있는 거예요. “진정한 경건은 고아와 과부를 환란 중에 돌아보는 것이다.” 고아와 과부가 뭐냐 하면, 버려진 존재예요, 버려진 존재. 왜? 그 집 안에 기둥이 없으니까. 왜? 무슨 나쁜 짓을 해서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그래서 부모가 돌아가셨습니까?
아니에요. 인간은 처음부터 버려진 존재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내에 고아와 과부 및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않도록, 끊어지지 않도록, 계속해서 그게 나오도록 조치하신 겁니다. 그게 신명기 15장 11절에 보면 나옵니다.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경내 네 형제의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신 15:11).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줄 때 그 대상자가 마땅히 지옥 갈 자에게 율법을 준 거요. 마땅히 지옥 갈 자에게! 이게 이스라엘에게 준 혜택이에요. 왜냐하면 다른 이방 민족은 인간이 있더라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그걸 인간으로 간주하지 않습니다. 있어도 없는 존재예요. 그리고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있고 말씀이 있고 언약이 있는 너를 건드리면 하나님께서 그게 누구든지 어떤 민족이든 저주를 내린다.”
이걸 최근에 누가 이야기했느냐 하면, 미국의 국방부 장관이 이야기했어요. 하나님의 일하는 사람을 건드리면 하나님께서 저주 내린다고. 그렇게 하니까 다른 사람이 “성경에 그런 것은 없다”고 해서 그게 언론에 나왔어요. 도대체 언론의 기자들이 성경을 몰라요.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그게 창세기 12장에 나오잖아요.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창 12:3).
이것은 수십 번 수백 번 들었던 이야기예요. 그게 왜 성경에 없습니까? 인권 같은 소리 하고 있네요. 무슨 인권이 있어요? 없어요, 그런 거! 전부 다 앞앞에 귀신 들려서 그래요, 귀신이 들려서! 언론도 귀신 들려서 그렇습니다. 정치인도 마찬가지고요.
제가 이태석 신부를 거론한 것은, 성경에서 말하는 경건은 이태석 신부가 한 것과 정반대로 하면 돼요. 다시 말해서 ‘도대체 내 죄가 내가 하고자 하는 행위 속에서 어떻게 깊이 박혀 있는가?’예요. 그것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의도적으로 고아와 과부를 발생시켰어요. 전쟁이 나간 아버지를 잃으면 고아가 되고, 또 남편을 잃어버리면 그건 과부가 되잖아요.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어요. 왜? 뭐가 일어나든 안 일어나든 간에 어차피 버리운 자니까, 어차피 버림받은 자니까요. 우리 자신들 모두가 그러합니다. 나중에 온전한 율법이 될 때 예수님은 죽었어요. 예수님이 죽음으로써 비로소 ‘우리가 왜 버림받아야 마땅한 자냐’ 하는 그것을 야고보 입장에서 흩어진 12지파 – 성도죠 - 오직 흩어진 이스라엘만 알고 다른 사람은 일체 모르게 돼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능력을 초과하는 그러한 은혜가 왔을 때나 비로소 아는 내용이에요. 내가 버림을 받은 자로 태어나야만 한다는 이 사실을 말입니다. 손 쓸 수가 없어요. 이 버림받은 나를, 지옥 가는 내가 어떻게 손 쓸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어떤 행함을 하고, 어떤 경험을 해도 이 지옥 가는 것이 중지되거나 취소되지 않습니다. 그게 우리 인간의 모습입니다. 분명히 예수님이 이야기했죠. “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버지로 갈 자가 없다.”
율법을 이스라엘에 처음 줄 때 그 당시 현장에 있던 장로들이 벌벌 떨었잖아요. ‘왜 이제 와서 우리를 죽이느냐?’ 뜻은 이래요. ‘너희들이 죽어야 율법의 취지가 살아나기 때문에 내가 너희를 율법으로 죽이러 왔다.’ 그 말이에요. 그래서 ‘죽을 때 그냥 죽지 말고 이유를 알아라. 네 죄 때문에 죽는다, 저주받는다.’
창세기 3장 24절에 나옵니다. 에덴동산의 생명나무에서 쫓겨난 것처럼요.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그렇게 되는 거예요.
이스라엘 전체를 뭐로 만드는가? 이스라엘 전체를 고아와 과부로 만들어요. 이스라엘 전체를 고아와 과부로 인도하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이런 율법을 줬습니다. 출애굽기 22장 21-23절에,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이었었음이니라 너는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 네가 만일 그들을 해롭게 하므로 그들이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반드시 그 부르짖음을 들을찌라.”
누구든지 너희 가운데 고아와 과부가 있거든 함부로 하지 말라는 율법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고아와 과부를 발생시켰는데 그들을 무시하는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조치합니다. 출애굽기 22장 24절에, “나의 노가 맹렬하므로 내가 칼로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 아내는 과부가 되고 너희 자녀는 고아가 되리라.”
지금 이걸 누구 보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이스라엘 보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너 그 정체성 바꿀래, 안 바꿀래? 너희가 고아와 과부가 될래, 안 될래?” 고아와 과부의 특징은 버림받은 자예요. “너희가 버림받은 자의 모습으로 살아가야, 버림받은 자를 건져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그 가치가 살 게 아니냐?” 이 말이죠.
뭔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주님께서는 버려진 자를 활용하겠다는 거예요, 버려진 자를 활용하겠다. 고아와 과부는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을 내놓을 게 없어요. 하나님의 약속 외에는. 그게 이스라엘 아닙니까! 자기가 할 수 있는 걸 내놓을 게 없어요. 자랑거리도 없고요. 쉽게 말해서 이스라엘은 어떠하냐? 버틸 만한 게 없는 사람이 이스라엘이에요, 버틸 만한 게 없는 사람.
이태석 신부 신부가 남수단에 갔다면 – 물론 이태석 신부는 복음도 모르지만 – 그리고 그가 복음을 안다면 버려진 자를 어떻게 대해야 합니까? 건지면 안 되죠. 더욱더 어떻게 해야 해요? 더욱더 버려진 자로 만들어야지요. 문둥병자가 왔을 때 고쳐주지 말고,
“너는 문둥병 된 게 마땅해! 알았어?”
“예”
“그러면 넌 구원받은 거야.”
이거 하기 위해서 복음이 주어진 거예요. 한국에서 돈 끌어당겨서 병원 세우고, 뭐 세우고, 뭐 세우고…, 왜 그런 짓을 하는 거예요? 모르겠다는 거예요. 모르기는 뭘 몰라. 네 안에 귀신이 들어서 세속에 물든 경건을 펼쳤죠. 로마서 8장 7절은 지난 목요일 날 서울 강의 때 나왔던 건데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너무나 충격적이라서 이 구절 읽어달라 해놓고는 내가 중간에 스톱! 하고 중지시켰어요.
8절,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스톱! 다들 육신이 있죠? 원수입니다. 마귀예요. 귀신입니다. 육신 가지고 뭐 내놓는다, 경건하다고요? 어려운 사람 돕는다고, 고아와 과부를 돕는다고요? 그게 세속에 물든 경건, 귀신의 믿음 가지고 하는 짓들이에요. 이미 버려진 자가 자체적으로 안 버려지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것은, 물에 빠진 자가 지금 운동화 끈 잡아당겨서 스스로 구원하려고 하는 그 짓이에요.
그동안 여러분이 복음을 어떻게 이해했습니까? 오늘 본문 야고보서를 통해서 지금 우리가 복음을 행여나 반대로 알고 있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복음 알아서 착한 사람 돼서 바르게 살자. 주님의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면서 바르게 착한 일을 하자.’ 그게 이태석 신부잖아요. 그게 이단에 속한 사람들 특징 아닙니까? 우리는 구제도 할 수 없고요, 우리는 헌금도 못 해요. 왜냐하면 돈이 있어야 뭐라도 하지요. 동의하십니까? 왜 우리가 돈이 한 푼도 없느냐 하면, 내 돈이 한 푼도 없기 때문에 그래요. 누구 돈이냐 하면, 주님 돈이에요. 주님 돈인데 왜 내가 씁니까?
예수님 관점에서 율법을 어떻게 해석하는가? 그 점에 대해서 마태복음 6장 3절에 이렇게 돼 있습니다.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돈 몇 푼 낸다고 헌금이고, 돈 몇 푼 낸다고 구제 아니죠? 주께서 그걸 묻지 않습니다. “네가 구제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네가 십일조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해? 그건 귀신이 하는 거야. 너는 못해. 안 돼! 왜? 너는 철저하게 제발 버려져야 하니까.”
뭘 해도 버림받아야 마땅한 존재로 드러나야 하기에 구제하라, 뭘 해라, 뭘 해라, 뭘 해라…, 어떤 말씀도 우리는 하나도 해낼 재주가 없습니다. 이것을 베드로가 처음에는 몰랐어요. 나중에 오순절 성령 받고 난 뒤에 베드로가 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이 사실을 알고 구약 때 선지자 다윗에 대한 예언을 제대로 해석합니다.
구약 시편에 나오는 다윗의 해석을 제대로 해석한 대목이 사도행전 2장 25절에서 29절에 나옵니다. 짧게 줄여서 말씀드리면, 다윗이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27절에 보면,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치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다윗이 이렇게 이야기했는데, 성령 받은 베드로가 다윗의 시편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29절에, “형제들아 내가 조상 다윗에 대하여 담대히 말할 수 있노니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 즉 ‘다윗의 육신은 다윗의 무덤 속에 그대로 있다.’ 왜? 육신은 하나님의 일과 원수가 되기 때문에 그대로 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예수님에게 적용되게 되면, ‘예수님의 시신은 이 땅에 없다’ 입니다. ‘따라서 다윗 언약, 다윗에게 준 약속, 예언, 다윗 언약은 다윗이 지키지 못한다는 사실과, 그리고 지키지 못한 그 육신을 대신해서 예수님이 그 말씀을 자기가 가져와서 자기가 그걸 다 이루었다.’ 그 이야기를 한다는 거예요.
“그는 선지자라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사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 하심을 알고 미리 보는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말하되 저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행 2:30-32).
사도행전에 나오는 베드로의 성경 해석이 그래요. 이게 바로 주님의 말씀의 해상도입니다. 헌금, 구제, 기도, 봉사, 선교…, 다윗 본인도 못했는데 왜 우리가 할 수 있죠? 못해요. 안 됩니다. 할 수가 없어요. 이태석 신부는 하겠다고 한 거예요. 그러니까 본인의 죄가 얼마나 무서운지를 모르는 거예요. 그게 죄인 데. 버림받은 자가 백날 해봐야 버림받은 자의 티만 날 뿐이에요. 사람이 살려고 노력해 봤자 결국은 죽어서 지옥 갑니다. 교회 나오나 안 나오나 상관없어요, 이것은! 말씀 들으나 안 들으나 상관없어요.
그러면 주님께서 이 베드로의 이 시편 말씀, 오늘날 사도행전을 왜 우리에게 주시는가? 우리를 시신 없는 무덤으로 사용하기 위함입니다. 나는 죽는데 나 말고, 죽어가는 나에 맞지 않는 다른 분의 빈 무덤을 내가 짊어지고 가라고 우리에게 성령을 주셨던 겁니다. 이처럼 중심이 없는, 내세울 게 없는 고아와 과부들이 오늘날의, 이 시대의 성도들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움직이는 무덤으로 살게 하는 겁니다.
주님께서 우리보다 먼저 죽었기 때문에 우리는 이미 죽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로 갈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14장 6절에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풀이하면 ‘내가 곧 길이요, 내가 곧 진리요, 내가 곧 생명이다.’ 이 말입니다. 요한복음 8장 32절에 보면 그 진리에 대해서 이렇게 돼 있어요.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한다고 했어요.
신명기에 고아와 과부에 대한 율법이 굉장히 많아요. 신명기 14장 29절, “너의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우거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로 와서 먹어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고아와 과부를 배부르게 하라고 합니다.
신명기 16장 11-14절,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과 및 너희 중에 있는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 할찌니라 너는 애굽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고 이 규례를 지켜 행할찌니라 너희 타작 마당과 포도주 틀의 소출을 수장한 후에 칠일 동안 초막절을 지킬 것이요 절기를 지킬 때에는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연락하되.” 절기를 지킬 때 고아와 과부를 반드시 참여시키라고 합니다.
신명기 26장 12절, “제 삼년 곧 십일조를 드리는 해에 네 모든 소산의 십일조 다 내기를 마친 후에 그것을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에게 주어서 네 성문 안에서 먹어 배부르게 하라.” 3년마다 내는 십일조는 레위인은 물론이고 객과 고아와 과부, 하여튼 내세울 게 없는, 버틸 것도 없는 자의 몫으로 돌리라고 합니다.
신명기 27장 19절에서 아예 그걸 율법화시켰는데, 그 대목을 한번 보겠습니다. 27장 19절에 이렇게 돼 있어요. “객이나 고아나 과부의 송사를 억울케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버림받은 인간이니까, 일단은 버림받은 그 인간을 옴팍 어디에다가 가두었냐 하면, 율법안에 가두어 버려요. 인간을 율법에 가둬 놓고 율법 자체적으로, 그 안에서 저주에서 영생으로 나아가는 길을 예수님께서 참여해서 이루어버려요. “나는 길이고, 나는 진리고, 나는 생명”이기 때문에.
그러면 그 예수님이 율법안에 집어넣고 율법안에서 조성된 그 노선을 통해서 우리는 구원을 받습니다. 길과 진리와 영생을 받게 돼 있어요. 요한복음 1장에서 사도 요한이 이 사실을 알았고, 이걸 고백하는 대목이 요한복음 1장 17절에 나옵니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했어요.
앞에서 신명기 5장 말씀드렸죠. 율법 앞에, 그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율법이 불과 함께 나타나서 우리를 죽이러 온다.” 그들의 솔직한 고백이었습니다. 이것은 팩트 fact, 사실이에요. 모세로 말미암아 율법이 주어져서 다 죽이는데, 그다음에 그렇게 함으로써 율법이 온전하게 되면 ‘은혜와 진리, 거저 주심, 값없이 주심, 그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이렇게 되죠.
그래서 요한복음 1장 18절에,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가 됩니다. 하나님이 자기 자식을 우리에게 보냄으로써, 사람과 함께 있도록 보냄으로써 이제는, - 하나님께 갈 사람은 없어요. 이미 버림받았는데 뭘 가요? - 이제는 버림받은 자에게 찾아가는 서비스, 찾아가는 봉사, 찾아가는 은혜로 말미암아 그걸 납치해서 예수님과 더불어서 어디로 가느냐?
천국으로, 영생의 나라로 데려가는 원칙입니다. 이게 자유 가운데 관심 두는, 바로 경건이에요. 고아와 과부 같은 신세에 대해서 온전한 율법이 하는 것은 이겁니다.
“자유 줄게.”
“먹을 것을 다오, 돈도 다오!”
“아니, 자유를 줄게.”
“나, 그 자유 같은 거 필요 없고 그냥 부자 되게 해주세요.”
그거 안 줍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그런 것을 이미 예언 했어요. 누가복음 4장에 보면 여기 과부 이야기가 나오는데 25-26절에 나와요.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세 해 여섯 달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잘 들어보세요. “…이스라엘 중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엘리야가 그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여기서 강조하는 것, 엑센트를 줘야 할 대목은, ‘한 사람에게도 보냄을 받지 않고’입니다. 한 사람에게도 보냄을 받지 않았다. “야~! 과부다. 도와주자.” 이런 것 안 했습니다. 이런 것 엘리야가 안 했어요. 한 사람이라도 과부를 도와주겠다는 이름으로 선지자는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선택된 과부, 선택된 고아, 이게 오늘날 선택된 성도예요.
왜? 그들만이 버림받았다는 사실에 즐겨 감사하고 기뻐하기 때문에. 내가 버림받은 자라는 것을, 자기가 누구인가를 이제 알았기 때문에. 그전에는 버림받은 것도 모르고 ‘나는 의사 돼서 봉사하고, 사제 돼서 봉사하겠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제는 복음, 주께서 아무에게도 누구에게도 보내지 않고, 선택된 자에게만 성령이 임하니까 ‘내가 바로 버림받은 자 중에 하나로 버림받았구나’, 그리고 ‘인간을 버린 하나님의 정당성에 대해서는 요지부동, 달라질 게 하나도 없다’라는 사실을 발견할 때 여러분, 얼마나 놀랍습니까!
이게 공부해서 된 게 아니에요. 성경 공부한다고 아는 게 아닙니다. 누가 찾아가야 해요. 성령님이 친히 찾아가게 되면, 버림받았음에 대한 고마움과 감사, 그걸 안다는 감사가 있죠. 제가 지금 세 번째 이야기합니다마는, 지난주 설교 때 그런 이야기를 했죠. 우는소리를 하면서 즐기라고 했죠. 절망을 즐기라고 했잖아요.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즐겁게 징징거리세요. 왜? 버림받았으니까. 이미 맛이 갔으니까, 버림받은 자니까, 버려졌으니까….
그리고 누가복음 4장 27절에 보면,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문둥이가 있었으되 그중에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주님께서 “문둥병자 다 모여, 고쳐줄게!” 이거 아닙니다.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 뿐이니라.”
왜 이렇게 폐쇄적으로 하십니까? 왜 못 들어오게 합니까? 버림받은 자라고 해서 자동적으로 구원되는 게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버림받은 자 중에서 귀신이 떠나고 보니까, 진짜 나를 지옥 보내고 버리신 주님의 조치가 얼마나 합당하고 옳은 행위인지를 기쁨과 감격 속에서 받은 사람만이 주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고, 진리로 자유케 된 사람이고, 길을 알고 영생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이 버림받은 고아와 과부에게 필요한 것은 뭐냐? 신랑이겠죠. 그래서 주님께서는 신랑 이야기를 끄집어냅니다. 신랑이 함께 있거든 무조건 기뻐하라는 거예요. 무조건 기뻐하라. 마태복음 9장 14절에, “그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금식 안 하냐고 저쪽, 바리새인 쪽에서 시비 거니까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15절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뇨.” 반박을 이렇게 합니다. 신랑이 함께 있을 때 슬퍼하지 않고 한없이 기뻐하려면, 그 기뻐해야 할 사람에 어떤 조건에 붙어있어야 하느냐? ‘나한테는 나를 지켜줄 수 있는 사람도 없고, 나는 스스로 지킬 수도 없는 버림받은 자’라는 인식 속에 있을 때 신랑의 등장이 세상에 그 어떤 것보다 귀하고 고귀한 거예요. 그런 사람만 기쁜 겁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9장 15절에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슬픈 날이 온다는 겁니다. 신랑을 빼앗기는 날이지요. 신랑이 계셨는데 빼앗겼다. 신랑이 계실 때 기쁘고, 빼앗길 때 슬픈 사람은 어떤 조건에 놓여있는 사람이냐 하면, ‘나는, 신랑 없으면 나도 없다’라는 것을 자기의 버림받은 상태의 바탕 위에서 비로소 파악하는 사람이에요.
‘내가 있음’의 그 나는 소용없었어요. 내가 있다는 자체가, 나는 소용없어요. 내가 있는 것은 버림받은 자로서 있는 것뿐이지, 나는 나한테 아무 짝도 소용없어요. 미래 설계하지 마세요. 미래에 희망 품지 마세요. 다 쓸데없는 짓이에요. 천국의 특징은 고아와 과부가 없다는 데 있어요. 왜? 신랑이 먼저 가 있으니까요.
그런데 지옥의 특징은, 부자들만 가요. 돈 있는 부자도 가고요, 돈 없어서 돈에 환장한 부자도 가요. 그게 바로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특히 누가복음 16장 초반에서는, 인간 세계에서 귀신 들린 인간들이 성경을 해석하는 그 해석과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를 보여주는데, 그게 누가복음 16장 8절에 나옵니다.
거기에 보면,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이런 말씀을 해요. 주인 돈을 횡령했던 불의한 청지기가 칭찬을 받아요. 누구한테? 주님한테 칭찬을 받습니다. 왜냐하면 이 불의한 청지기는 자기자신의 본질을 알고 있는 사람이거든요. 내가 나쁘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에요. 자기가 악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 불의한 청지기가 구제를 하겠습니까, 불의한 청지기가 기도를 하겠습니까, 불의한 청지기가 금식을 하겠습니까? 불의한 청지기가 하는 모든 짓은 다 불의한, 나쁜 짓이에요. 나쁜 짓만 나온다는 그 사실을 불의한 청지기 본인이 알고 있다는 이것이 바로 불의한 청지기의 독보적인 지혜입니다. ‘나한테서는 나쁜 짓만 나온다.’ 50년 살았으니까 나쁜 짓만 50년 내뱉었어요. 70년 사셨습니까? 이제 거의 80줄에 들어서셨습니까? 70, 80년 동안 나쁜 짓만 했어요. 버림받아 마땅한 짓만 했습니다.
끝으로 제가 말씀드릴 것은, 예수님께서 이야기할 때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마 6:3)라고 하셨는데, 이 율법으로 말미암아 어떤 인간도 신랑 없이는 계속 버림받은 자라는 것을 명시할 때 예수님께 그 계시를 받은 사람들이 여러 명 되는데 한 사람은 사도바울이고, 한 사람은 요한이고, 또 한 사람은 야고보, 또 베드로도 있어요.
그중에서 사도바울은 이것을 어떻게 이해했는가? 제가 아까 로마서 8장 7절도 이야기했지만, 성경의 다른 구절에서는 사도바울이 어떻게 이해했는가? 갈라디아서를 보겠습니다. 갈라디아서 1장 4절에…, 여러분이 이 말씀을 좀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세계관이 되기를 바랍니다.
갈라디아서 1장 4절에,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이게 무슨 뜻인지 아시죠? “너, 끝났어.” 이 뜻이에요. “너, 끝났어!” 그 뜻이에요! 하세요, 뭘 하세요! 헌금이든 구제든 하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 하세요. 그걸 죄를 드러내는 계기로서 하세요. 내가 버림받았다는 티를 팍팍 내시면서 하세요.
갈라디아서 2장과 3장에, 특히 2장 같은 데 보면, 사도바울이 아주 작심하고, 작심하고 외칩니다. 2장 18절,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 그리고 21절 끝에,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주께서 죽었다는 것이 뭐냐는 거예요. 신랑이 왜 죽어요? 귀신 들려서, 자기가 무슨 의미 있는 줄로 아는 자를 충분하게 제대로 버리는 거예요. 제대로 버림받는 겁니다. 그렇게 제대로 버려놓고, 버림받은 자를 이제 친히 예수님 자신의 공과, 성과를 위해서 활용해 주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성령으로 찾아오신 거예요.
“네가 고아와 과부다. 내가 너를 돌봤다.” 이 관계, ‘예수 안에서 주님은 나를 고아와 과부로 돌보시고, 나는 주님 때문에 아무 내세울 것도 행함도 없이 하늘나라의 기업을 얻었다…’ 신명기 말씀처럼 ‘…기업을 얻었다’라는 이 관계, 관계입니다, 존재가 아니라, 여러분들이 이 관계를 증거하시면서, 찡찡거리면서, 즐겁고 기쁘게, 감격하면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사태 파악하게 해주시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눈 뜨기를 원합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기를 원합니다. 귀신이 나가면서 비로소 ‘내가 버림받은 자요, 죄인 되었다’라는 사실을 아는 감격이 우리에게 있기를 원합니다. 예수님께서 저희들을 활용하기 위해서 찾아오신 이 은혜를, 어떤 식으로도 어떤 행함으로도 갚을 길이 없다는 것을 또한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주일 오전오후설교(260419) 보충
그전까지는 우리가 보통 죄를 지어서 죽는다고 알고 있었잖아요. 로마서 6장에도 나오고요. “죄의 삯은 사망이요..”(롬6:23) 그런데 오전 설교에서 제가 ‘예수님이 죽음으로써 우리가 죽는다.’고 이야기 했어요. 죽음의 원인이 우리에게 있는 게 아니고, 죽음의 원인이 우리를 떠나서, 우리 바깥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전에는 창세기 2장 17절에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라고 했잖아요. 따먹은 자가 누구죠? 사람입니까, 마귀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입니까? 선악과 따먹은 자가 누구죠? 인간이죠.
그런데 거기서 왜 하나님께서는 따먹은 인간에게 책임을 묻지 않고, 마귀한테 책임을 지우고 저주를 했느냐 이 말이죠. 거기서 ‘정녕 죽으리라’했는데, 아담과 하와는 안 죽었잖아요. 그렇죠?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인간들이 이해하는 죽음의 개념은 창세기 2장 17절, 거기에 해당이 안 된다는 뜻이죠.
따먹고 난 후에 ‘헉헉~’하고 죽어야 되는데, 안 죽었단 말이죠. 그러면 ‘정녕 죽으리라’는 말씀의 의미에서 인간의 이해는 배제되어야 되죠. “넌 끼지마. ‘정녕 죽으리라.’의 죽음의 자리는 네가 낄 데가 아니야.” 주님께서 저주를 할 때 뱀부터 저주를 했잖아요. 그렇죠?
이 죽음이 악마한테 이미 결정타를 날리는, 악마의 죽음을 겨냥해서 ‘정녕 죽으리라’라고 하셨구나...왜냐하면 여자의 후손은 사람하고 상대하는 게 아니고, 뱀의 후손과 상대하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선악과 따먹을 때에 왜 따먹도록 뱀이 에덴동산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고, 따먹을 때 왜 안 말렸을까?
생명나무는 따먹을까봐 사전 조치를 했잖아요. 두루 도는 화염검으로요. 그런데 선악과는 왜 조치를 안 했죠? 그 차이가 뭐죠? 같은 나무인데... 왜 생명나무는 단도리를 하고, 왜 선악과는 방치하듯이 했느냐 이 말이죠. 그것도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게 하면서요.
왜 그렇게 하셨는가? 적극적으로 말리지 않고 놔 둔 것은 골로새서 1장에서 비로소 그 정답이 나옵니다. 마귀부터 해서 모든 피조물들은 누구를 위해서? 예수님을 위해서 만들어졌어요. (골1:16-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그래서 예수님의 죽음이 진짜 죽음이다. 이제 결론 나왔죠? 우리 인간이 죽는 이유는 예수님 자신의 죽음으로서 인간이 죽거든요. 인간이 죽고 사는 것은 주님의 관심사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죽은 것이 주님의 관심사인데, 악마는 예수님의 죽음보다도 ‘너 그러면 죽어!’라고 죽음을 가지고 협박, 공갈을 하는 거예요.
히브리서 2장 15절에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 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죽는 게 문제가 아니고, 마귀의 종 되었다는 이 관계에 대해서 인간은 죽더라도 못 빼요. 죽어서 빠지면 다행인데, 죽더라도 뺄 수가 없어요, 이 발목을.
그래서 주님께서는 인간을 죽게 함으로써 인간이 생각하는 죽는다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고 하시는 거예요. 그 대표적인 예가 거지 나사로입니다. 거지 나사로가 죽잖아요. 거지 나사로의 죽음은 그게 죽는 게 아니고, 남의 땅에서 자기의 본 고향, 원래 자리로 돌아가는 거죠. 실컷 고생하다가, 자기 임무 마감하고 가는 거죠.
그래서 성경 전체는 예수님의 죽음을 가지고 시작을 해야 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들은 성경을 볼 때, 자기 죽음 문제를 해결하려고 성경을 보니까, 이건 뭐 백날 봐야 마귀 해석 외에는 아무 것도 안 나오죠.
“어떻게 하면 안 죽습니까? 어떻게 하면 지옥 안가고 천국 가겠습니까?” 이거는 벌써 시작 자체가 잘못된 거예요. 인간이 마귀한테 정신이 팔려서 자기 죽음에 급급해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죽음이 가리워져 있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가리워진 자신의 죽음, 이 죽음을 일찌감치 생명나무와 선악과, 하나는 죽게 되어 있고, 하나는 살게 되어 있는, 연결되어 있는 두 개의 나무를 심어놓은 거예요. 나무가 하나가 아니라 둘이라는 것은 서로 연락이 되고, 관계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모든 게 관계거든요. 독점적인 진리가 아니고, 관계예요. 관계가 진리예요. ‘나는 이것을 안다.’ 이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주님과 나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느냐? 이게 진리예요. 이것을 주님께서는 인간을 통해서 선악과 따먹을 인간과, 그리고 절대로 따먹어서는 안 되는 생명나무 되신 예수님과 인간은 어떤 관계가 있느냐, 그 관계를 로마서 1장에서는 복음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의’라고 이야기해요. 하나님의 의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대신 죽으심’이 들어있죠. 여기 또 죽음이에요. 대신 죽으심 때문에 의롭지 못한 자를 의롭게 만드는 기적이 일어나서, 그들이 모인 곳이 바로 천국이다.
그래서 낮 설교에서 핵심적인 것을 예수님이 먼저 죽음으로써 그 다음부터 우리가 죽는다. 우리가 죄를 많이 지어서 죽는 게 아니고, 우리가 죄 지은 게 아니고, 아담이 죄 지었으니까 우리랑 관계없고요.
아담을 대표로 해서 선악과 따먹게 해서 죽으면서도 당장 아담을 죽이지 않고, 뭘 하느냐 하면, 저주라는 삶의 환경 안에 들어가서 죽기는 죽지만 저주 환경을 맛보게 하고 죽이죠. 우리는 그 전체를 이 땅에서 되풀이하죠. 어떤 일을 해도 인간은 고생스러워요. 고생이 없다는 것은 자기 주제 파악을 못해서 그래요.
그렇게 해서 주님께서 이 모든 것을 주께서 하셨다는 것, 주님의 죽으심, 십자가 중심이라는 것을 누가 아느냐? 사도바울이 알았잖아요. “나는 십자가만 자랑한다”(갈6:14-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그럴 때 예수님이 아버지한테 버림받았죠. 그러면 예수님의 죽은 것 때문에 우리가 죽는다면, 그 다음에 나오는 공식은 간단하죠. 예수님이 버림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마땅히 버림받죠. 그러면 우리 성도는 뭐냐? 버림받은 것을 즐거워하고 감사하면 끝이죠. 버림받은 것을 즐기는 거예요. 왜? 버림받아야 자기 공로가 거기 섞이지 않으니까.
그리고 오후 설교 첨가한다면, 성경대로 “모든 인간은 애곡하리라”(계1:7-볼찌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끝났어요. 인간이 살아가는 것은 애곡하기 위해서 이 땅에 태어나서 여러 가지 일을 하다가 결국 애곡으로 끝납니다.
미리 자기 사람을 빼돌리죠. 빼돌리는 사람은 뭐냐 하면, 십자가 중심이고, 이 세상은 애곡하기로 확정되어 있음을 눈치 챈 자, 그 사람은 세상에 대해서 어떤 미련도, 어떤 부러워하는 것도, 세상에 어떤 기쁨도 그것이 거짓인 것을 눈치 챘죠. 눈치 챈 겁니다.
그래서 오후 설교에서 사도요한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밧모섬에 있었죠. 귀양살이 하고 있었습니다. 일종의 휴스턴의 로켓 발사대에 있는 거죠. 밧모섬은 뭐냐 하면, ‘세상에서 뜬다’, ‘하늘나라 간다’와 가장 가까운 접촉점이 되는 거죠.
세상에서 버림받고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마지막 접촉점, 모든 인간과의 관계가 끊어졌을 때, 사도요한은 자기 신세타령을 하는 것이 아니고, 감격스러워서, 하나님의 천사가 주신 계시에 감격스러워하면서 그것을 글로 썼고, 그 글을 보고 듣고 기뻐하고 믿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게 바로 요한계시록입니다.
추가) 버림받는다는 게 그렇게 기쁜 소식이에요. 왜냐하면 주님과 동기동창생 아닙니까? 주님이 아버지께 받은 운명이 어떻게 나에게 카피되는 혜택을 주시다니, 이 얼마나 감격스러워요? 너무 감격스럽죠. 감히 내가 주님이 당했던 그 체험에 참여되다니요.
그리고 아까 이야기했지만, 우리가 죽는 것은 내가 잘못해서 죽는 게 아니고, 바로 예수님이 죽었기 때문에 죽는 겁니다. 이 사실을 아는 자만이 버림받은 데서 건져내지죠. 하나 더 보탠다면, 바로 불의한 청지기, 얼마나 아이러니해요? 불의한 청지기가 지혜롭다는 말은 자체적으로 자기한테 희망이 없다는 것을 아는 자예요.
그래서 뭐했다? 돈 횡령했잖아요. 주님이 보시기에 불의한 청지기는 주님 스스로 만들어낸 예이지만, 옳지 않죠. 그런데 옳지 않은 것이 의로운 너희들보다 어디 간다? 천국 간다. 자기의 옳지 않음을 파악하는 자가 천국 가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