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강의20250523a 로마서 11장 25절(수치와 선택)-이 근호 목사
『기독교와 허상』p.179에 <선택과 윤리>라고 되어 있죠. 그 중에서 하나의 핵심 문장을 뽑는다면 p.181 끝부분에 나옵니다. [교회 속에 이방인들이 초대되었다고 해서 구약 때부터 내려오는 선택의 원리가 소멸되는 것이 아니다.]
이 문장에서 ‘이방인들이 초대되었다’라고 이야기하죠. 여기 나와 있죠. 선택된 자가 엄연히 이스라엘로 확정되어 있는 상태에서 이스라엘로 선택된 그 숫자가 왜 충족되지 못하는가? 하나님은 이스라엘 전체를 선택했어요. ‘나의 택한 야곱, 이스라엘아.’ 하나님이 이스라엘 전체를 선택한 배경에는 아브라함의 혈통적 자손은 아브라함의 선택으로 인하여 무조건 선택되게 되어 있어요.
아브라함이 선택될 때 아브라함은 자식이 없습니다. 아예 자식 낳을 수가 없죠. 없는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 속에 선택된 자를 양성시키는 하나의 기계, 공장으로서 아브라함을 택했죠. 아브라함을 택할 때 원리가 들어있습니다. ‘아브라함 너를 축복한 자는 복을 받고 아브라함을 저주한 자는 저주받는다.’
그러니까 이 말은 아브라함 내에 들어있는 선택된 자들의 단일체, 집단을 축복하면 복을 받고 그 집단을 저주하면 저주받는 걸로 하나님께서는 천국과 지옥 가는 사람을 그런 식으로 결정하기로 했습니다.
‘아브라함을 선택했다.’ 선택했는데 아브라함만 선택하면 아브라함만 구원받잖아요. 그렇죠? 그럼 하늘나라에 혼자밖에 못 가니까 심심하죠. 아브라함의 자손을 하나님이 선택하기로 했는데 아브라함의 자손에 대해서는 아브라함 스스로 이 자손을 만들 능력은 일찌감치 차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이것이 차단되었어요.
아브라함을 선택하되 아브라함 속에 선택된 민족, 아브라함의 자손들이라는 선택은 그 선택의 주체자가 아브라함이 아니고 선택의 주체자가 따로 아브라함을 공장으로 사용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등장하죠. 아브라함의 자손이 야곱이에요. 이름이 바뀌면 뭡니까? 이스라엘이죠. 야곱이 얍복강 가기 전에 마하나임이라는 천사집단을 만나죠. 마하나임이라는 뜻은 ‘하나님의 군대’. 하나님의 군대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로 만드시고 그 군대를 축복하는 자, 그들이 하는 일이 정당하다고 여기는 자들은 복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뭐냐 하면 ‘주체의 세계화’에요.
주체의 세계화. 나의 주체가 세계화로 확장된다 이 말이죠. 인간세계에서는 이 주체의 세계화를 벌써 인간들이 실시하고 있어요. 나라는 개인이 있으면 내 영역이 확장돼서 영역이 크게 되고 나는 작게 되는 이것이 주체의 세계화가 되는 겁니다. 이 영역은 나의 세계죠.
지금 아브라함의 자손이 복을 받고 이스라엘로 확정된 입장에서 이스라엘 민족 외에 다른 복 받은 민족이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없죠. 없는 거예요. 그런데 p.181 문장에 보면 이방인들이 초대되었다는 거예요. 이방인들이 초대되었다. 이것은 일종의 철벽이거든요. 철벽. 누구든지 이스라엘 되지 아니하면 복을 받지 못합니다.
특히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몸에 문신 같은 것이 있는데 그걸 새기라 했어요. 그 문신이 뭐겠습니까? 할례죠, 할례. 하나님 보시기에 할례 받지 않으면 어떻게 되느냐? 수치를 당하게 되는 겁니다. 할례 받지 못한 것이 수치를 당해요. 하박국 2장 16절, “네게 영광이 아니요 수치가 가득한즉 너도 마시고 너의 할례 아니한 것을 드러내라”
바벨론 나라는 할례를 받지 못한 이방나라잖아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민족을 쳐버리겠다는 거예요. 어떻습니까? 하나님 하는 일이 굉장히 일관성 있으면서 명료하죠. 아브라함 자손이 아니면 모조리 저주받는다. 왜 저주받는가? 하나님 보시기에 이게 수치스럽기 때문에. 하나님 보시기에 수치스럽다. 더럽다는 뜻이에요. 추잡스럽고 더럽다는 거예요, 하나님 보시기에. 그래서 복을 줄 수가 없죠. 더럽고 추잡스러운 것에 대해서 하나님이 준비한 것은 축복이 아니고 반대로 저주인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할 때부터 선택은 뭐냐? 철벽이다. 철벽은 뭐냐? 선택이다. 선택은 곧 철벽이 되는 겁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아브라함은 ‘나 깨끗하니까 선택해주세요’라고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 요청한 적이 없어요. 요청한 적이 없습니다.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더러우려면 다 더러워야 되고… 왜 그중 하나를 택해서 하나님이 복을 주시느냐? 여러분, 이게 이해됩니까? 학교 학급 학생들이 전원 다 숙제를 안했는데 ‘한명은 됐고 나머지는 다 운동장 나가서 벌 받아.’하면 벌 받는 애도 납득이 안 되고 더구나 누가 납득 안 됩니까?
분명히 숙제를 안했는데도 불구하고 처벌받는 게 아니라 ‘거기 아이스크림 있으니까 꺼내먹어.’하고 복을 받아버릴 때 이 복이 굉장히 낯설게 느껴지죠. ‘내가 이 복 받아도 되냐?’ 이런 생각이 든단 말이죠. 괜히 벌 받는 애들 보기 미안스럽기도 하고요. 그런 현상이 일어나죠.
미안하면 돼요. 나 혼자 복 받아서 미안하다, 이러면 되는데 이스라엘이 ‘나는 복 받을만한 자격이 있다’ 이렇게 나오니까 이스라엘이 망한 거예요. 이스라엘이 망한 이유가 복과 저주, 저주와 복을 자기 자신과 연관시켜버리니까 이것은 본인 주체의 세계화가 되어버린 거예요. 나 중심의 세계화.
복이나 저주가 나의 어떠함과 나의 태도, 성격 이런 것하고 아무 상관이 없이 어디서 오느냐 하면 바로 ‘외부’에서 오게 돼요. 외부에서. 그럼 여기 어떤 학생이 있는데 걔는 숙제 안 해도 벌을 안 받았어요. 걔가 복을 받았다면 외부가 그 애 어디 속에 들어왔단 말입니까? 이 내부에 들어온 거예요. 내부에.
그럼 숙제 안 해서 벌을 받은 애들이 있다면 숙제 안 해서 벌 받는다고 해서 학교에서 걔들을 다 죽여 버립니까? 다시 집에 돌려보내죠. 일시적이잖아요. 숙제 안 해서 벌 받는다면 일시적이지만 저주받을 만해서 저주받는다면 이것은 집에 가나 어디 가나 늙어죽으나 이건 지옥 가는 거예요.
다만 숙제 안 했다는 것은 네 본질의 일부가 숙제 안함으로 드러날 뿐이지, 그다음부터 숙제 한다고 해서 본질이 바뀐다, 안 바뀐다? 안 바뀌는 거예요. 본질이 안 바뀌는 거예요. 왜냐하면 저주도 외부에서 오고 복도 외부에서 주어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외부에서 왔다고 하면 외부 누구? 외부 누구가 바로 아버지로부터 선택받은 자의 등장. 아버지로부터 선택받은 자의 등장이 등장합니다. 요단강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3:17) 이사야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한 그 이야기, 선택했다는 이야기를 그대로 아들 예수님께 주죠. 부어줍니다.
이스라엘에게 했던 것을 예수님이 받았다고 하지만 예수님이 받아야 될 주님의 관계가 일시적으로 한시적으로 먼저 이스라엘에게 예언형식으로 주어진 거예요. 그러니까 이스라엘은 까불지 말라는 거예요. 네가 착해서 구원받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외부에 어떤 미지의 선택받은 자가 현재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이름으로 동행하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의 이름으로.
외부에서 온 이 외부가 내부로 들어왔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시대가 신약시대입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난 뒤에 하늘에서 뭐가 오죠. 성령이 오시잖아요, 성령이. 성령이 오신다면 예수님의 마음, 예수님의 영이 우리 내부에 들어오게 됩니다. 들어오게 되면 여기서 어떤 현상이 생기느냐? 아무 한 것도 없이 성령이 와버렸단 말이죠. 그럼 지옥 가는 사람은 어떻게 돼요? 그 사람이 나쁜 짓해서 지옥 갑니까? 성령을 안 받아서 지옥 가는 거예요. 성령을 안 받아서.
예수님이 선택된 분이거든요. 선택된 분이 내부에 꽂히면 그 사람은 천국, 선택된 분이 내부에 꽂히지 않으면 선택된 분이 내부에 없으면 그 사람은 지옥. 명료해요. 복잡하지 않아요. 아주 간단하고 일관성 있어요. 모든 인간은 다 지옥 가야 되기 때문에. 지옥 가는 사람은 자기 지옥 가는 것을 못마땅해 하는 사람이고, 구원 받은 사람은 지옥 가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거예요.
성도한테는 이 세상이 지옥이라는 것이 속이 시원한 거예요. 창문만 열면 다 지옥이니까. ‘왜 저를 구원하십니까?’ 이렇게 나오죠. 성도가 갖고 있는 감사와 고마움은, 자기가 만들어낸 게 아니잖아요. 그냥 새벽 탁송처럼 그냥 자기한테 날아온 거잖아요. 이 기쁨이 있게 되면 세상에 소소한 슬픔이라든지 절망이라든지 불안, 공포 이런 것은 그 기쁨으로 인하여 전부 다 잠재워질 수 있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 구원받은 사람이 선택된 문제에 대해서는 별로 이야기할 게 없어요. 범사에 감사하고 고마워하라. 끝.
따라서 선택을 이야기할 때는 반드시 뭘 이야기해야 되느냐? 바로 불신자들이 말하는 선택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성경은 이렇게 두꺼운 책이 되고 말았어요. 불신자들의 선택에 대한 반박, 이것이 두꺼운 책이에요.
‘나는 지옥 가도 되는데’라는 그 항목이 성경 전체 내용이죠. 내가 왜 지옥 가야 되는가를 알려주는 것이 이 성경책이에요.
그래서 지옥 가는 사람이 성경을 보게 되면 악으로 봐요. 왜? 이거 믿어야 천당 가기 때문에. 다 쓸데없는 짓이에요,
그런데 성도가 성경 보는 것은 볼 때마다 감사와 기쁨이 나옵니다. 내가 이런 짓까지 했었지. 내가 이것밖에 안됐지. 달고 오묘한 그 말씀이죠. 바리새인 이야기부터 해서 가룟 유다 이야기, 어느 이야기든 내 이야기 아닌 게 없어요. 아주 신바람 이 박사에요.
그래서 지금 우리가 이야기할 것은, 지옥 갈 사람들은 하나님 선택에 대해서 어떻게 반감을 갖고 모독하고 대드는지. 아까 이방인들이 초대받았다 했잖아요. 다시 말씀드리면 이방인들은 아브라함 자손 아닙니다. 따라서 구원, 천국 못갑니다. 그런데 하나님 보시기에 쪽수는 채워야 되겠고… 이스라엘 여기서 빠진 자가 있어요. 빠진 자가 있으니까 보궐로 들어오는 거예요. 옛날에 ‘보궐’이란 말 많이 썼어요.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서 외부인에게 초청장을 주는 거예요.
“아무나 그냥 데려와.” 아무나 데려오는 거예요. 그 아무나가 저와 여러분들입니다.
주님 보시기에 아무것도 아니에요. 왜? 초청받을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왜냐하면 아브라함 자손이 아니잖아요. 아브라함 자손이 아니에요. 이거는 저주받아야 돼요. 나쁜 짓해서 저주받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선택한 아브라함 자손에게만 복 준다.’ 그 원칙 바깥에 있기 때문에 바깥에 있는 아무나는 다 저주받는 아무나에요. 그런 사람을 데려오라.
초대받지 않은 초대자, 이게 이방인이에요. 이방인. 그러니 이방인들의 선택은 선택의 의미, 선택의 원리가 계속 유지돼요. 자기는 아무것도 아니니까. 자기는 개코도 아니니까 아무것도 아니니까 선택의 원리가 계속 유지되면서 무엇이 빛나요? 하나님의 일방적 선택이 계속 그 의미가 살아있는 어떤 운반체, 그런 매개체가 되는 겁니다.
70년 만에 돌아온다는 말은 제발 아무것도 아닌 자로 그냥 돌아오라는 거예요. 아무것도 아닌 자로.
그런데 이스라엘은 돌아오자마자 ‘자기가 잘나서 하나님이 선택했다. 이방민족은 율법이 없지만 우리는 율법이 있잖아.’ 또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터가 문제라, 터가. 약속의 땅, 이게. 터 있고 땅 있고 좀 살만하니까 갑자기 자기한테 의미부여하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잊지 말라고 내가 당부한다면 이겁니다. ‘철벽’이에요, 철벽. 완전히 차단되어 있어요. 네가 선택될 이유를 찾지 마라. 그래야 선택이 산다. 네 안에서 계속 선택이 살아있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은 누굽니까? 성경이 왜 두껍습니까? 인간 내부에 뭐가 자리 잡고 있었어요. 자경단. 이름도 무시무시한 자경단. 나의 선택을 위한 자경단. 내 선택 자체의 의미를 지켜내는 자경단이 인간 속에 발생하게 되는 겁니다. 배후에 마귀가 이런 짓을 하죠, 마귀가. 이 자경단이 외치는 구호는 ‘정당성’이죠. 나의 정당성.
히스기야는 그때까지 유다 왕 중에서 최고의 왕이라고 칭송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세가 열두 살 때 왕위에 오릅니다. 물론 아버지한테 많은 교육을 받았겠죠. 아버지 죽고 난 뒤에 므낫세가 왕이 되는데요. 자진해서 성전이 있는 곳에 앗수르 제단을 세우고 자기가 시범보인다고 앗수르 종교처럼 자기 자식들을 불 속에 태웠습니다. 아주 적극적으로 앗수르 우상을 섬기는 전도사 역할을 톡톡히 열심히 해댔습니다. 가장 악랄한 왕이에요. 하나님께서는 이 므낫세 왕을 앗수르 쳐들어오게 해서 잡혀가게 만들었어요. 잡혀갔는데 역대하 33장 13절에 보면 이 므낫세 왕이 잡혀서 옥에 갇혔는데 회개를 합니다. 회개를 해요. 회개해서 안 죽고 살아와서 옛날에 자기가 우상 섬기던 제단을 자기 손으로 다 철폐하고 여호와 제단으로 다 바꿔놓습니다.
그런데 그 왕의 아들이 나중에 왕이 되는데 아몬이에요. 아몬 왕은 아버지가 회개한 것을 알면서도 그는 아버지 못지않게 아버지와 같은 우상 섬기는 죄를 범했다고 되어 있어요.
여러분, 두 가지 이상한 점이 있죠. 아버지 히스기야가 그렇게 선했으면 애들이 교육을 잘 받았을 거 아니겠어요? 잠언서 22장에 보면 이런 말씀 나와요. 6절에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되어 있죠. 그러면 아버지가 자식한테 어릴 때부터 밥상머리에서 얼마나 말씀을 가르쳤겠습니까?
열왕기하 23장 24절에 보면 요시야 왕 때에 므낫세가 세웠던 산당이라든지 우상 숭배하는 것을 전부 다 철폐합니다. 므낫세가 와서 해봤자 얼마 못 살고 죽었기 때문에. 아몬이 또 그만큼 아버지 본받아서 전부다 우상을 섬겨놨기 때문에 그다음 요시야 왕이 우상을 다 제했어요. 그렇게 철저하게 소위 말하는 개혁이라는 것을 했죠. 그러나 하나님이 유다 나라를 멸망시키는 것을 그대로 추진하는데 이유가 뭐냐? 므낫세가 저지른 죄가 너무 심했다는 거예요(26절). 너무 악해서 이 유다 나라는 다시 돌이킬 수 없다는 거예요.
철벽입니다. 철벽. 그러니까 택한 백성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선택했다고 일방적으로 말씀하시고 난 뒤에 그 선택됨을 지키는 과정 속에서 어느 인간도 선택을 지킬 만한 그러한 시도의 효과가 인간에게는 나올 수 없다,를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증명해버린 거예요. 그러니까 책이 두꺼운 거예요, 이게.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실험을 다 해보는 거예요. 시도는 다 해보게 하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유다 나라를 원상복귀 시키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선택을 인간이 가두어둔다든지 소유한다든지 간직할 수 있는 재주는 인간에겐 없습니다. 인간에겐 없어요. 선택한 자는 천국 보내는데 그 선택을 일평생 내내 유지할 수 있는 인간은 없습니다. 선택에 대해서 내 내부에 나의 선택을 위한 자경단, 스스로 자기 고을을 지키는 불법적인 단체가 이미 조직되기 시작한 거예요. ‘내 구원을 내가 지켜야지’ 또는 ‘내 믿음을 내가 지켜야지’ 이게 자경단이에요. 안됩니다. 이건 실패한 거예요.
‘자기 수치를 모르는 자=인간(人間)’. 하나님의 관점이 선택과 더불어서 주어집니다. 선택과 더불어서 자신의 수치, 지저분함, 더러움, 자기의 죄악 됨, 이것을 모르는 자에게 선택이 안겨지고 주어져요.
여호수아 5장 8절에서 할례를 행합니다. 9절,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날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굴러가게 하였다” 이 말은 이스라엘 되기 전 히브리인들 중에 애굽 나라 살면서 내가 산다는 것이 수치스럽다고 느낀 사람이 있다는 말입니까, 없다는 말입니까? 없다는 말이에요. 내가 이 땅에 태어나서 생일에 태어나서 이 땅에 사는 것 자체가 위에서 하나님 보시기에 참 더러워서 못 보겠다는 주님의 심정을 아는 사람이 없다는 말이죠. 자기 안에 자경단 있거든요. 나는 정당하다.
나의 선택은 정당하다. 인간이 태어나서 살아가면서 매 순간마다 선택해요. 선택할 때 어떤 선택을 하느냐? 이성적 선택, 감성적 선택. 감성적 선택을 기분 내키는 대로 기분 따라서 선택한다 하죠. 기분 따라서 선택하는 거예요. 기분 따라 안 사는 사람 누가 있습니까? 선택은 하나님의 요지부동 일관성이에요. 그런데 선택을 받은 인간은 변화무쌍해요. 기분 따라 살아가요. 나의 선택은 정당하다. 이것이 불신자들의 선택 개념이거든요.
여기에 대해서 성경말씀이 이야기하는 것은 굉장히 간단해요. ‘말씀 없으면 죽는다.’ 다른 말로 하면 ‘너의 생명은 말씀 안에만 있다.’ 그럼 말씀 밖은 뭐라는 말입니까? ‘말씀 밖에는 죽은 상태다.’ 따라서 하나님의 선택이 올 때는 무엇과 동반하느냐? 말씀과 동반하죠. 말씀 밖은 죽은 상태잖아요, 그러니 말씀이 오는 순간 말씀에서 조명들이 촥 비춘다고 봅시다. 말씀의 조명을 쫙 비춰버리면 모조리 전부다 죽은 자들이 꾸물꾸물 대고 있어요. 죽은 자들이. 말씀 밖에는 죽은 상태니까.
아까 나눠줬던 그림 있죠. 그림 한번 봅시다. 이 그림에 보면 여기 사람들 사이에 해골이 있습니까, 해골 사이에 사람 있습니까?
이 그림을 그린 취지는 해골 사이에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마다 긴긴 옷을 입고 있어요. 옷은 평생 자기가 고생해서 이뤄놓은 업적을 신분으로 표현한 거예요. 그게 옷입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옷 입고 있죠. 어떤 기사는 아예 무기 들고 있잖아요. 해골과 손을 잡죠. 그러니까 산 사람이 어떤 옷을 입었든 간에 그들은 출발을 해골부터 해서 해골로 끝나는 일시적인 귀족이고 왕들이고 교황들이고 상인들이고 군사들입니다.
티벳 불교에, 라사가 티벳의 수도거든요, 티벳 불교의 총본산인 그곳에서 축제를 벌이면 오체투지(五體投地, 머리, 두 팔, 두 다리를 땅에 대고 하는 절)를 하는 거예요. 오체투지를 하면서 ‘옴 마니 반메 훔’이라는 주문을 외워요. 그게 동아시아 쪽, 중국, 한국, 일본 쪽으로 오면 ‘나무 아미타불’이에요. ‘미래의 부처에 대해 내가 귀의합니다’ 이걸 티벳 불교에서는 자비의 연꽃이라는 뜻으로 ‘나한테 자비를 베푸소서’라 해서 오체투지를 해요. 그 불교의 특징이 뭐냐 하면 출발점과 도착 지점이 동일합니다. 내가 오체투지를 하는 이유는 나만의 구원이 아니라 모든 인간, 중생들을 위해서 생명들이 복 받기 위해 내 한 몸 희생해서 그렇게 한다는 거예요. 이게 티벳 불교의 본질입니다. 그 선택 누가 했어요? 자기가 선택했죠. 신의 계시 아닙니다. 왜? 신의 계시는 철벽이거든요. 철두철미한 철벽이에요. 아무도 몰라요. 왜? 택한 자는 누구밖에 없기 때문에? 예수님밖에 없기 때문에. 철벽입니다. 낯선 거예요. 그 선택이 왔을 때 우리는 뭐냐? 제가 지옥 갈 사람이라는 것을 이제사 알았습니다.
■광주강의20250523b 로마서 11장 25절(수치와 선택)-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선택은 새삼스럽게 이 세상은 지옥이고 죽음의 세상이라는 것을 알리면서 오는 거예요. 새삼스럽게. 세상은 죽었는데 거기서 윤회? 내가 산다 그런 것은 성경에 해당사항이 없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것은 말씀 안에 있거든 더는 욕심내지 말라는 거예요. 왜? 말씀 안이 곧 생명 안이기 때문에. 말씀 밖에는 생명이 없어요. 죽은 목숨이죠. 그런데 말씀 안은 그냥 생명입니다. 복 받기로 선택되었기 때문에 그래요. 세상을 볼 때에 바로 하나님의 안목으로 볼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성령 받은 거죠.
사도 바울이 성령 받기 전까지는, 어떻게 하나님이 하는 일을 하나님이 엎을 수가 있느냐? 그런 하나님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데 성령 받고 난 뒤에는 하나님이 엎은 게 아니고 그때 우리가 말씀에 대해서 우리 자신이 수치스럽다는 것을 몰랐을 때 그런 잘못된 이해가 나왔다는 거예요. 잘못된 이해가. 멀쩡하다고 생각한 이 자체가 하나님 보시기에 더러워서 못 보는 거예요.
누가 해골을 사랑합니까? 아무도 사랑 안하죠. 그런데 그런 해골, 곧 수치스러움과 수치스러움 사이에 자기가 끼어있어서 결국은 수치로 태어나서 수치로 끝난다는 것은 본질 자체가 수치로 그동안 자기 내부에서 계속 작용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하는 거예요.
이걸 몰랐던 겁니다. 그냥 늙어 죽는다고 생각했지 더러워서 죽는다는 생각을 못한 거예요. 추잡하고 더러워서.
처음에 이스라엘은 어느 나라에 살았어요? 애굽에 살았죠. 애굽에 살면서 그들은 애굽에서 벗어났다, 구원받았다, 탈출했다, 이제는 애굽과 바이바이라고 생각했죠. 그러나 자기 내부에 애굽이 있었던 겁니다.
할례라는 것이 무슨 뜻인지 몰랐던 거예요. 아까 여호수아할 때 여호수아가 뭐라고 합니까? 할례하고 난 뒤에 무엇의 수치가 떨어져나갔다? 애굽의 수치가 떨어져나갔다는 거예요. 애굽의 수치. 할례행할 때 애굽의 부끄러움이 떨어져나가는 징표로서 할례를 행했던 겁니다.
그런데 로마서 2장 29절을 보면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네가 육신의 할례를 행한 것은 맞는데 마음의 할례를 안했으니까 여전히 수치스럽기는 마찬가지라는 거예요. 골로새서 2장 11절,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예수님이 친히 나한테 할례 행하는 일을 하셨다. 이게 바로 성령의 오심이죠. 그리스도의 할례에요.
그리스도의 할례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수치 당할 필요도 없는데 수치스럽게 오셨던 이유가 예수님께서 선택받은 것은 자기 백성의 죄를 지고 수치를 당했거든요. 자기 백성의 죄를 지고. 여기서 이제 오늘 강의에서 제일 중요한 게 등장하는데요. 죄를 짊어지도록 선택된 분이 예수님이잖아요. 따라서 주님의 수치가 벗겨지는 그 순간, 다시 말해서 주님께서 영광스럽게 된 순간, 우리의 수치도 벗겨지는 순간입니다.
결국 지금까지 한 것을 이야기하면 하나님께서 이 땅에 찾아오신 이유가 거룩과 관련해서 우리의 수치스러움을 없애주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거예요, 주님께서.
인간이 쓴 가면은 벗겨지지 않습니다. 벗겨지지 않아요. 구원은 내 내부에서 이루어져야 되지, 가면 벗는다고 해서 구원이 되는 게 아니에요. 인간은 어떤 노력을 해도 가면을 쓸 수는 있지만 쓴 가면은 내 몸과 하나가 되어가지고 아무리 애써도 나의 가면은 벗겨지지 않습니다. 인간은 고쳐 쓸 물건이 아니에요. 이 죄악성, 추잡성은 죽을 때까지 계속 갑니다. 계속 가야지 범사에 감사하죠. 감사라는 것은 내가 어떤 노력을 한다 할지라도 이 더럽고 추잡한 악마의 탈, 탈이 아니고 악마 그 자체에요, 악마의 탈, 그리고 아담의 죄에서 어떤 노력을 해도 여기서 벗어나지 못함에서 오는 감격과 기쁨, 이게 성도고요. 불신자는 벗길 수 없는 것을 벗기려고 아주 애를 쓰고 악을 쓰는 그게 불신자의 모습이죠. 정당성. 내가 한 나의 선택의 정당성. 자기 의죠.
그다음에 이사야 44장 9절, “우상을 만드는 자는 다 허망하도다 그들의 기뻐하는 우상은 무익한 것이어늘 그것의 증인들은 보지도 못하며 알지도 못하니 그러므로 수치를 당하리라” 11절에, “보라 그 동류가 다 수치를 당할 것이라 그 장색들은 사람이라 그들이 다 모여 서서 두려워하며 함께 수치를 당할 것이니라”
“우상 누가 만들었지?” “우리 대장장이가 만들었습니다.” 그러니까 “그거 가지고 와. 우상 불탈 때 함께 수치를 당할 거야.” 함께 수치를 당하는 거예요. 우상을 만들었다 하는 것은 인간이 인간하고 대화했고 상대했다는 겁니다. 이걸 한번 적어보면 ‘인간이 인간을 상대하면 거기에 마귀도 한몫 끼어든다.’ 보이는 인간과 보이는 인간이 상대하고 대화하면 거기에 보이지 않는 마귀가 끼어들게 되어 있어요. 왜냐하면 인간과 인간이 상대하면 여기에 합리성, 이성적 감정 완화 또는 감정을 내놓고 감정에 대한 조정단계, 너 양보할 거 양보하고 나도 양보할게, 이런 식으로 조정하는 거예요. 인간이 인간을 상대하는 이유가 거기 있어요. 인간이 내뱉은 모든 말은 마귀 말을 인간이 대신해서 스피커 노릇을 하고 있다 이 말입니다. 이걸 달리 하면 ‘말씀에 관심두지 아니하면 악마가 개입하는 장소가 된다.’
아까 말했듯이 말씀 안에는 생명이 있고 말씀 밖에는 뭐가 있습니까? 죽음이 있죠. 이걸 성경에서는 계속 일방적으로 이야기하면서 더럽다, 수치스럽다, 우상을 섬겼으니까 너는 수치스러우니까 더러우니까 더러움에 대해서 저주다, 하나님의 심판이다, 하나님의 분노가 주어졌다 하고 계속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다니엘 12장 2절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수치)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 되어 있죠. 그러니까 여기 수치스러움의 반대 상황이 뭡니까? 영생이에요. 그러면 영생 못 받는다는 말의 반대말이 뭡니까? ‘영원히 수치를 당한다’입니다. 수치를 당한다. 한때 귀족이었고 한때 왕이었고 황제였고 한때는 교황이었고, 그림에 교황도 있어요, 한때는 훌륭한 기사고 뭐 이런 사람이라지만 얼마 안 가서 해골로서 수치를 당하게 되는 거예요. 인간이 태어난 것은 수치를 영원히 당하기 위해서 예비단계를 거치고 있는 중인 거예요.
오늘의 표어입니다. 말씀하고 상대하면 살고 사람하고 상대하면 죽는다.
죽는데 그 죽는 모습이 뭐냐? 앞에 ‘왕’자를 붙여서 왕짜증, 분노, 실망, 화. 화나 실망이나 분노나 같은 거죠. 사람하고 상대했기 때문에 그렇죠. 말씀하고 상대 안했기 때문에 그래요. 말씀하고.
그러면 우리는 짜증, 분노, 화내는 이런 사람 되지 말아야 됩니까? 아니죠. 사람하고 상대해야 돼요. 그래서 성도는 지옥에서 살아야 됩니다. 지옥에 살지 아니하면 복음이 안 나와요. 죄와 살지 않으면 등불이 있다는 걸 몰라요. 이건 성령 받은 사람에게 해당되는 겁니다. 주께서 기뻐하는 것은 뭐냐? 주님에 대해 감사하고 고마워하는 거예요. 감사하고 고마워하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어떤 상황에 집어넣습니까? 사람하고 상대하는 상황을 매일같이 겪게 하는 겁니다.
자, 지금까지 제가 쭉 이야기한 것은 바로 ‘저주받은 자들이 어떻게 선택을 생각하고 있느냐?’하는 거예요. 저주받은 사람의 특징은 하나님의 선택 이전에 내가 결정하는 내 이성적 결정, 기분에 따라 결정하는 내 선택이 턱하니 자리 잡고 있죠. 이게 자경단을 구성하죠. 내 선택과 하나님의 선택을 모순되지 않게 이어보려고 애를 씁니다. 그 짓을 한 자가 누구죠? 그 짓을 한 자가 바로 유대나라요 이스라엘이었습니다. 로마서 11장 보겠습니다. 11장 12절, “저희의 넘어짐이 세상의 부요함이 되며 저희의 실패가 이방인의 부요함이 되”었다. 11장 4-5절,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을 남겨 두었다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구약의 회개하고 신약의 회개가 달라요. 구약의 회개는 어디까지나 대상이 뭐냐? 어떤 효과를 내야 되는데 그 효과가 이스라엘의 정상화, 유다나라가 다시 정상상태로 올라가는 것이 회개의 목표가 되는 거예요. 회개 목적이 어찌하든지 내가 살아남아야겠다는 의도를 가지고 회개를 한 거예요. 내가 살아있기 때문에 이 행복은 누구 것이 된다? 살아있는 나의 것이 된다. 이걸 사람들은 복이라고 부릅니다.
아무리 이론적으로 복음으로 무장하고 아무리 기본적으로 하나님 은혜 안다하지만 답답한 일 있으면 저절로 무릎 꿇고 두 손 모으게 되어 있어요. 내 선택사항에 포함되지 않는 상황이 벌어졌을 때 그때는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죠. 도움을 요청할 때 그 심보가 뭡니까? ‘여기서 끝내주세요. 내 인생 끝내주세요.’ 이거 하는 게 아니고 문제해결 해달라 하잖아요,
복습해봅시다. 사람하고 사람이 상대했죠. 누구하고 상대 안했어요? 말씀 상대 안했죠. 말씀은 안 봐요. 말씀 신경 쓸 시간이 어디 있어요. 드라마 봐야지. 폭싹 속았수다 그런 거 봐야지. 상대방하고 상대한다고 말씀 안 봤죠.
그런데 우리 안에 이미 들어있는 무조건적인 일방적인 축복, 무조건 천국행 성령이 있으면 성령이 어떻게 해요? 회개케 합니다. 회개. 회개는 어떻게 되느냐 하면 ‘수치+희생물’이에요. 이게 신약의 회개에요. 신약의 회개=수치+희생물. 수치스럽다. 이유가 뭐냐? 내가 아직 살아있는 줄 착각해서. 내가 아직도 산 인간인 줄, 뒤에 생략된 말은 ‘착각해서’.
세상에 이 해골을 자랑질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잖아요. 중간부분을 자랑하잖아요. 중간부분을 자랑하도록 누가 격려합니까? 똑같은 산 사람끼리 만나서 이렇게 마음정리가 되는 거예요. 나는 잘났다, 또는 나는 못났다. 이정도 하면 내가 남한테 욕 얻어먹지 않을 정도로 내가 착실하게 바르게 살았다는 거예요. 모든 것에서 나의 선택이 끊어진 적이 없어요. 한 순간 순간 선택하기, 결정하기, 제대로 된 판단하기 그걸로 성실하게 왔는데 결국 뭡니까? 이 나의 본질은 해골이죠, 해골.
하나님이 이것을 수치스럽게 본다는 말은 나의 선택에 대해서 주님께서는 분노하신다는 거예요. 화를 내고 계신 거예요. 이걸 바로 성령 받고 난 뒤에 알 수 있는 겁니다. 내 모든 선택은 하나님의 분노 가운데 있다.
‘회개=수치+희생물’에서 플러스 누가 있어요? 희생물. 누구죠? 예수님의 십자가. 우리의 모든 죄에 대해서 이미 다 씻을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에 주님의 희생을 보여주기 위해서 수치스러운 우리에게 성령을 꽂아준 겁니다. 주님의 영이, 십자가의 능력이 꽂아준 거예요. 네 평생 하나님이 분노하는 이런 선택이 네 육신이 있는 한 멈추지 않는다는 겁니다.
로마서 11장에서 이스라엘을 선택했죠. 그 이스라엘의 선택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무너졌죠. 분명히 망가졌죠. 완전히 망가진 건 아니지만 남은 자는 있지만 어쨌든 무너졌잖아요. 그 이스라엘이 왜 무너졌습니까? 왜 무너졌죠, 이스라엘? 무너질 수밖에 없죠. 왜? 육신을 가지고 있으니까. 육신이 있는 인간은 무너지게 되어 있어요.
거기에 이방인들, 초대받지 않은 자들이 초대되었죠. 그럼 이방인들은 안 무너집니까? 이방인도 무너지죠. 이스라엘도 무너지고 이방인도 무너졌다는 말은 사도 바울에 의하면 이방인들이 은혜를 입어서 무너진 장막을 세운다 이렇게 하죠. 무너진 자리에 들어옴으로써 누구로 하여금 자기의 본질을 발견케 합니까? 처음 선택받은 유대인들로 하여금 우리가 하나님께 선택받은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것을 알도록 유인책, 또는 자극제로 이방인들을 집어넣었다는 거예요.
그럼 그다음 이야기, 이스라엘 중 돌아온 자가 있다면 이번엔 누가 자극돼요? 우리 이방인들이 자극이 되어야 되겠죠. 시리아, 이라크, 사우디아라비아, 이란, 아프가니스탄 그들 속에 성령 받은 성도가 있다는 걸 아십니까? 99%가 히잡 쓰고 다니는 그 나라 속에 예수님 이름으로 예수님 말씀 붙들고 몰래 말씀 공부하는 그룹이 있어요.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마태복음 28장 20절, 마태복음 제일 마지막에 있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그다음에 뭡니까? 다같이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너 구원받았으니 너 알아서 살아라. 너 잘 살 수 있어.’ 이런 거 없습니다. 세상 끝날까지 주님께서 한 번 들어온 성령께서 계속해서 함께 합니다. 뭘 분노하기 위해서? 나를 위한 성실함. 나를 위한 종교를 내가 만드는 것을 막지는 않아요. 만들게 해놓고 그것과 무엇과 만나게 합니까? 십자가 피와 만나게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날이 가면 갈수록 십자가 피, 모든 말씀 안에 들어있는, 예수님 십자가로 향한다는 그 말씀의 내용이 십자가 피가 말씀 안에 들어있으니까 그건 성령께서 십자가 피가 들어있는, 주님의 선택이 들어있는, 아버지의 선택받은 아들이 들어있는 그 세상을 성령은 떠나지 않게 해주시죠.
수치스러운 모습이지만 그 세계, 하나님이 선택한 세계를 떠나지 않게 할 때 우리의 기쁨과 고마움과 감사는 뭡니까? 주께서 알아서 선택해주셨습니다, 하는 은혜에 고마워하는 거죠. 이것이 주께서도 원하시는 바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매일 우리의 삶을 살게 하옵소서. 얼마나 우리가 지독하게 나 잘났고 나는 옳다는 것을 우기는지. 그런 성깔밖에 내놓을 수 없는 우리 자신인 것을 십자가 앞에서 그게 도리어 기쁨과 감사의 원리가 되고 바탕이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또 봤으면 하는 글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요한일서2:27 (0) | 2025.04.30 |
---|---|
영문 없는 구원 (1) | 2025.04.22 |
생명나무로 본 창조 (0) | 2025.04.22 |
목자 시스템 (0) | 2025.04.06 |
쪼개진 하나님 (0) | 2025.04.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