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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안에 든 이중성

아빠와 함께 2025. 4. 3. 20:46

사무엘하 7장 13-14절에 나옵니다. “저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 나라 위를 영원히 견고케 하리라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이것은 하나님 쪽에서 일방적으로 제시한 거예요. 일방적입니다.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는 그 아들을 하나님이 다윗 언약을 통해서 낳겠다, 생산하겠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조건하에서만 하나님의 성전을 지을 수 있고, 그 성전은 하나님과 아들의 만남의 장소입니다.

 

육적으로 모든 능력은 이미 다 소실되었어요. 그런데 하나님의 약속은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네 자손이 하늘의 별만큼 많을 것이다”(창 15:5).
그리고 약속에 의해서 이삭을 줘버립니다.

이삭을 주게 되면 이삭과 아브라함의 관계는 약속의 자식으로 인해서 약속된 아버지가 되어버려요.

그 아버지의 역할이 뭐냐? 그 자식을 죽이는 거예요.

졸지에 아브라함은 하나님 역할을 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자식을 죽이고, 그 죽은 자식이 다시 살아나는 그 아들만이 천국 백성으로 삼는 유일한 아들이라는 겁니다.

 

인간의 육신에서 나오는 모든 지혜와 지식은 다 소용없지요. 다 소용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다윗은 모세 율법과 계명을 지켰으니 너희도 지키라’라고 할 때 여러분은 어떤 느낌이 듭니까? ‘지킬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이런 느낌이 들지요. 지킬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줬는데 그게 왜 안 먹히느냐? 자기의식이 살아 있으니까 말씀이 안 먹히는 거예요, 자기의식이 살아있으니까! 말씀이 먹히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말씀이 우리 의식을 죽여버려야 합니다. 나를 죽음으로 몰아넣지 않는 계시는 계시가 아닙니다. 무능력한 계시지요. 능력 있는 계시는 나를 죽여버립니다. 나의 의식을 죽여버려요.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보고 있는 현실이 있잖아요, 그리고 그 현실 속에 있는 나를 보는 것, 나를 볼 때 나의 의식을 가지고, 현실을 볼 때 나의 의식을 가지는 것, 하나님은 그걸 이미 죽었다고 봅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보는 이 현실을 뭐로 바꿔버리느냐 하면, 말씀의 현실로 바꿔치기합니다. 하나님은 주관적인 예술가예요.( 화가는 자기의 붓과 캔버스를 가지고 객관적 현실을 지워버리고, 주관적인 예술적 혼으로 캔버스를 채우지요. 현실을 그대로 담으려면 사진 찍으면 그만이지요. 사진을 찍는 것이 아니고 그림을 그린다는 말은 이런 겁니다. ‘당신들이 보는 현실과 화가인 내가 보는 현실은 이토록 다릅니다. 다른 현실을 구경해 보실래요?’라고 하는 이것이 예술성이 있는 그림의 가치고 특징이에요.)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이유, 율법을 계속 끌고 가는 이유는 율법안에 유월절 사건을 반복해서 그걸 실어 나르는 거예요, 하나님의 공무집행을. “육신으로 태어났어? 죽어라, 인간아.” ‘육신으로 태어난 것은 다 죽이고, 대속한 유월절의 양을 우리 집안의 새로운 장자로 여기는 집안은 살리라.’ 이것이 율법 안에 든 이중성이에요.

 

사무엘상 17장이 다윗이 골리앗하고 싸우는 대목이거든요. 골리앗과 싸우면서 다윗이 뭐라고 했느냐? 이스라엘은 사울 왕부터 다 육신의 할례를 행했잖아요. 육신의 할례를 갖고 있는 자의 그 무능력성, 육신의 할례의 그 한계성을 골리앗을 보내서 파악하게 해주는 겁니다.

그때 소년 다윗은 어른들보고 “아, 이번 전쟁은 볼 것도 없는데 할례가 없는 인간을 왜 가만두고 봅니까? 이 싸움은 하나님의 싸움이지 우리 싸움이 아닙니다. 내가 나갈게요.” 이렇게 했단 말이죠. 그러니까 마음의 할례를 행했다는 말은 ‘이건 내 싸움이 아니고, 내 인생이 아니고, 내 존재가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다운 모습을 나를 통해서 보여주는 싸움을 하라고 주님이 골리앗을 우리한테 붙여준 겁니다.’라는 뜻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그것도 소년 다윗이요.

육신의 할례를 행한 사람은 아무 소용이 없어요. 능력도 없어요. 육신의 할례를 행해서 뭐 합니까? 막상 덩치 3미터 넘는 거인 보니까 전부 기죽어서 아무 소리 못 하는 거예요. 여기서 다윗이라는 존재는 마음의 할례, 육신의 할례가 아니라 마음의 할례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인지를 하나님이 다윗을 통해 모델로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일단 모델은 등장했어요, 다윗, 그 사람이 이스라엘의 영원한 왕이 되는 분입니다.

 

하나님이 율법을 주시면서 율법의 취지를 버리지 아니하고 율법으로 죄인 된 자를 하나님의 유월절이라는 율법의 이중성에 의해서 제대로 살리는 거예요. 제대로 살리는데 요한1서 5장 12절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굉장히 그 탕후루를 깔끔하게 묘사하고 있어요.
제가 한 번 읽어볼게요.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한 번 더요. 너무 간단해서 한 번 더!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세자로 줄여서 탕후루, 코팅.
하나님은 과일을 먹고자 하는 게 아니에요. ‘과일 + 코팅’ 가짜 아들 위에 있는 진짜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 생명. 그렇게 해서 주님의 간식거리가 돼요. 간식거리 정도가 아니죠. 하나님이 받으시는 음식이 되죠. 양식이 됩니다.

 

신명기 21장 15-17절이에요. “어떤 사람이 두 아내를 두었는데 하나는 사랑을 받고 하나는 미움을 받다가 그 사랑을 받는 자와 미움을 받는 자가 둘 다 아들을 낳았다 하자 그 미움을 받는 자의 아들이 장자여든 자기의 소유를 그 아들들에게 기업으로 나누는 날에 그 사랑을 받는 자의 아들로 장자를 삼아 참 장자 곧 미움을 받는 자의 아들보다 앞세우지 말고 반드시 그 미움을 받는 자의 아들을 장자로 인정하여 자기의 소유에서 그에게는 두 몫을 줄 것이니 그는 자기의 기력의 시작이라 장자의 권리가 그에게 있음이니라.”

아, 인간의 육신적인 뜻에 의해서 장자로 세우지 말고, 미움받더라도 장자는 장자로 세워야 한다는 거예요. 장자는 장자 값으로 해야 한다는 거예요. 그런데 장자의 특징을 신명기에서는 ‘미움받는 자’라는 거예요, 미움받는 자. 하늘나라의 탕후루가 이렇게 제조되는 거예요.

 

장자는 기원이고 근원이고, ‘기력의 시작’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생명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 말고, 진짜 생명은 스스로 기원으로부터 아들을 창조해 나가는 거예요. 방법은 골로새서 2장 11-12절에 나옵니다.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탕후루, ‘함께’, 네가 주되심의 재료가 되어서 더러운 죄인이 주님의 생명, 유월절의 피로 코팅이 됨으로써 같이 하나님의 장자가 된 자만이 다윗 자손이 누리는 영생, 천국의 백성이 된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8장 29절에서는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장자가 되게 하심이니라.
결론적으로 말해서 하나님은 예수님을 장자 되게 하기 위해서 아브라함과 이삭 그 관계를 가지고 이삭이 이스마엘 제끼고, 육으로 난 것 제끼고 약속의 아들 이삭이 장자가 된다는 걸 보여주시고, 그 인간들의 육신이 왜 장자가 되지 못하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430년 후에 율법을 집어넣어서 그 율법을 통해 어떤 인간도 썩었고, 구원될 자격이 전혀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시고, 마지막 새 언약에 예수님을 보내서, 장자를 보내서 비로소 장자의 나라를 완성시킨 겁니다.

아브라함 언약+율법’ = ‘-율법+다윗 언약’ = ‘새 언약.’ 오늘의 수학입니다.